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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굿의 전승과정과 변화양상

문서에서 제주도 잠수굿 연구 (페이지 82-92)

무속신앙은 끊임없이 견제를 받으면서도 아직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일제시대에 전통문화 말살이 이어지고, 이후 근대화․산업 화시기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우리 무속신앙이 미신타파의 대상67)으로 낙인 찍혔으며, 더 욱더 시급히 없애야 할 장애물로 인식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경향도 나타냈다.

한편 최근 들어서 이런 일련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게 서서히 전통에 대한 재조명 또는 재해석을 시도하는 움직임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문화재 정책 적인 측면 혹은 이른바 민중운동적인 측면이든 재해석에 대한 관점과 주체는 저마다 다 다르게 표출되었으나, 어쨌든 이를 통해 예전에 비해서는 무속신앙을 포함한 전통문화 를 우리 주위에서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잠수굿도 이런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미신타파의 대상에서부터 가장 제주적인 문화요소로까지 그 스펙트럼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그리고 잠수굿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잠수굿 역 시 시대의 틀에 따라 자신의 모양을 변화시키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속신앙 에 대해 각각의 시대가 형성해 낸 이른바 ‘담론’68)은 바로 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동김

67) 최길성은 미신의 意義, 미신타파 운동의 전개, 근대화와 미신타파와의 관계 등에 대해 서 일본과 한국의 예를 들어 고찰한 바 있다. 미신타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최길성 의 “迷信打破에 대한 一考察”,「한국민속학」7, 민속학회, 1974 참고.

68) 김성례는 아끼바의 식민담론, 민족담론, 민중문화담론 등 이제까지 진행되어 온 무속 전통에 대한 담론을 분석했다. 그러면서 “무속이라는 문화적 범주에 한정지워 현대생활 의 유토피아적인 대안을 창출하거나, 혹은 전통의 원류로 화석화시키거나, 이미 그 전 통적 삶의 고유한 구조가 붕괴되고 있는 농촌(민) 사회를 모델로 한 상상의 공동체를 계속 추상적으로 재생산하기를 멈추고, 무속현상과 문화를 실제로 구성하는 사람들, 그

녕의 잠수굿에 각인되어 있는 시대의 담론을 읽어내는 것은 잠수굿이 어떻게 시대와 타 협 또는 대결하며 전승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구체적으로 동김녕마을에서 실제 잠수굿을 어떻게 진행, 유지, 존속시 켜 왔는지 알아보아야 할 차례다. 더불어 잠수굿의 구체적인 전승과 변화가 시대적인 흐 름과 어떻게 호흡하며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재의 시점 에서 동김녕 잠수굿을 추적할 수 있는 지난 100여 년간의 시기를 생각할 때, 잠수굿의 전 승과정의 시기적인 구분을 크게 199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피려고 한다. 왜냐하면 잠수굿을 둘러싼 여러 가지 부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담론의 변화과정이 특히 1990년 대를 기준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잠수굿을 주관하는 잠수들의 굿 에 대한 참관정도나 기타 내부 상황도 이 시기와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 1990년대 이전

사실 1990년대 이전이라고 시기구분을 했지만, 1990년대 이전이라는 그 속에도 많은 사회적․문화적 층위들을 내포하고 있을 작은 시대의 흐름들이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전의 잠수굿은 간단히 말하면 일제시대와 ‘4․3 사건’69), 그리고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미신타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최길성은 일제의 미신타파 정책을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學務局이 중심이 된 神社․神道政策이며, 둘째는 警察局이 중심이 된 取締行政이고, 셋 째는 社會課가 중심이 된 사회교화운동으로 완전히 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70) 또한 해방이 된 후에는 제주현대사에서 큰 상처를 남긴 ‘4․3 사건’으로 인해 별반 달라진 것 은 없었다.

주체들(real-life subjects)의 일상의 세계라는 맥락에서 그 변화를 포착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무속의 동시대성(contemporaneity)에로 연구의 초점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 하고 있다(p.238.) 김성례, “무속전통의 담론분석”,「한국문화인류학」22집, 1990 참고.

69) 제주 4․3은 현재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으며, 정부가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다. 지금도 계속적인 조사와 위령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본고에서 ‘4․3사건’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끔찍했던 역사적 기억을 지닌 채 숨죽이며 살아왔던 제주사회에서 오랫동안 유포됐던 용어를 그대로 빌린 것이다.

70) 최길성, 윗 글, p.52.

한편 1950년대는 기독교가 국가 비호를 받으면서 급속히 성장하던 시대였고, 무당을

‘미신업자’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근대화 이 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강화된 학교교육은 무속의례를 더욱 대 중의 생활로부터 밀어내었다. 특히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음주, 도박, 관습 일소와 미신타파를 적극적으로 장려해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신당파괴가 진행되기 도 했다.71) 또한 관제 전통문화를 유포함으로써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려 했던 1980년대 역시 무속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시각은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국가가 정책적으로 문화재 보호나 전통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일부에 대해 지정․보존․복원․전승 등의 움직임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무속전통에 대한 온 전한 접근이 아니라 종교적 측면을 거세하는 등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72) 동시 에 미신타파운동이 워낙 강력한 힘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분위기 또한 자유로이 굿을 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잠수굿은 부정적인 시대흐름과 격동의 사건들에 휩싸여 유지와 전승이 쉽 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부정담론의 시기는 굿을 미신타파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정 책적으로 실제 굿을 하지 못하게 했고, 교육 등 여러 가지 선전활동을 통해 부정적 담론 을 광범위하게 주입시켰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정체성 부정을 경험해야만 했을 뿐 아니 라 후손세대와의 정서적 단절을 겪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굿을 못하게 된 결과로써 주민들은 실제로 개인에게나 마을에 여 러 가지 액운이 닥쳤다고 믿고 있다. 잠수굿에 정통한 원로잠수 한중선 씨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녕에 일제시대 전부터 굿은 있었다. 일제시대 때 못 하게 하니까 실제로 굿을 못 했다. 일제시대에 굿을 못 하니까 그때는 사람 많이 죽었다. 옛날에는 미역하나가 돈이 되었는데 물옷, 속적삼 입고 했는데 하다 보면 추워서 김녕 사람 대여섯이 물 에서 죽었다. 그래서 많이 죽었다. 굿을 못 한 기간은 내가 18~19살 때쯤부터 시작

71) 조성윤, “산업사회의 무당”,「전통과 현대」6호, 전통과 현대사, 1998 가을호, pp.98~99.

72) 정부정책적인 측면에 대비해 하나의 저항운동으로 나타났던 민중문화운동을 주장했던 쪽에서도 역시 굿(무속의례)의 종교적 측면에 대해서는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였다. 이 에 대해서는 조성윤, 윗 글, pp.100~102. 참고.

해서 일제시대 끝날 때까지 못했다. 일본군인 가버리고 해방되었다 해서 이제 잠수 들도 정신을 차려 가지고 다시 굿을 하기 시작했다. 4․3 사건 때에도 굿을 못 했다.

그러니까 일제시대에도 굿을 못하고 해방되고 나서 잠깐 했다가 4․3사건이 나면서 또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서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이다. 사람이나 죽은 영혼이 나 배부르게 먹어야 모든 게 편안한 거지 그렇지 못하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니 까 잠수가 많이 죽은 것이다. 굿을 못 하게 되면 확실히 잠수들이 물 속에서 많이 죽게 된다. 그래도 시신을 다 건져왔다. 그렇게 물 속에서 죽어도 시신을 못 건져온 적은 없고 다 건져올 수 있었다.”

물질을 하면서 전에 없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담론에 갇혀 굿 을 공개적으로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절체절명의 문제가 되었다. 매번 목숨을 걸고 물질하는 잠수들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굿을 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급기야는 숨어 서라도 굿을 관철시켰다. 동김녕에서도 소나무밭이나 굴 같은 장소에서 몰래몰래 보이 지 않게 잠수굿을 치렀다고 한다.

“4․3 사건 후에 50년대에 다시 굿을 시작했다가 이후에 또 박정희 대통령 때도 한 동안 굿을 못 했다. 한 5~6년쯤 굿을 못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한 것은 아 니다. 소나무 밭이나 굴 속 같은 데에 가서 숨어서 간단하게나마 굿을 했었다. 제대 로는 못 해도 숨어서 하는 척은 했었다. 그러다가 순실이어멍하고 탈의장 옆 원래 굿자리에서 계속 굿을 한 것이다.”(한중선 씨 인터뷰 내용)

이런 사항으로 미뤄 본다면, 부정적인 담론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잠수들은 물질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여,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사 망사고를 피하기 위해 해상무사고 기원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굿을 비밀리에 거행하였다.

또 들키지 않고 재빨리 굿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들을 생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기에 그들이 전승시킨 잠수굿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만을 가 지고 치러지는 약식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열명과 무사고 기원, 지드림, 액막음 등의 축원 사항이 간단하게 행해지는 형태인 것이다. 잠수들은 부정적인 시대의 틀에도 불구 하고 잠수굿을 보존시키기 위해서 최소한의 형태로나마 굿의 모양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시절 잠수굿이 시대논리로 억압당하다가 다시 복원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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