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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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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신적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쿠빈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대부분 부정 적인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 가지 구분을 통해 쿠빈의 각 작품에 나타나는 그로 테스크한 모습을 보이는 여성 도상이 상징하는 바와 쿠빈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를 파악해보도록 하자.

1. 임신한 여성

1902년에 그려진 <알>(도판 17)은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림의 중앙에는 무 덤이 있고 그 옆에는 해골 형상의 여자가 서있다. 이 여자의 몸에서는 광채가 사방으 로 뻗쳐 나가고 있다. 여자의 부푼 배는 곧 터질 듯 풍선처럼 팽창해 있는데, 제목이 암시하듯 몸 안에 거대한 ‘알’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후경에는 석상처럼 보이는 정체 를 알 수 없는 물체가 그림자의 형태로만 관찰된다. 징그러울 정도로 부푼 배를 가진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임신한 여성’ 도상은 작품 <수태>(도판 18)에서도 등장한다. 화면 중앙에는 기형적 으로 배가 부푼 여자가 쓰러져 있다. 여자의 탄력 없는 피부로 미루어 보아 여자는 아 기를 낳기도 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있다. 여자의 축 늘어진 배에 희미하게 보이는 핏줄과 뻣뻣하게 경직

된 팔과 두 다리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떠오 르는 태아는 관람자에게 오싹함을 느끼게 한 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연약한 생명들은 죽음을 맞이한 채 대지를 떠나고 있다. 태아 들은 어디로 올라가는 것일까?

이외에도 <지구: 우리 모두의 어머니>(도 판 19)를 살펴보면 임신한 여자가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밀고 땅 에 씨앗을 뿌리고 있다. 여자의 주위에 나뒹

[도판 17] 알프레드 쿠빈, <알(The Egg)>, 종 이에 잉크, 스프레이, 16×24cm, 1902, 비엔나, 알베르티나 미술관

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잘린 머리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처럼 쿠빈의 작품에 ‘임 신한 여성’ 도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 일까?

이러한 작품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쿠빈 의 삶에서 여성과 관련된 사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쿠빈은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를 싫어한 반면135) 엄마에게는 애정을 느꼈다. 이런 쿠빈 에게 어린 나이에 맞이한 엄마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왔다.136)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쿠빈의 이모였던 로사와 재혼을 하지만 안 타깝게 그녀마저 아이를 낳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실의에 빠진 쿠빈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애정을 조 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쿠빈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 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한 채 쓸쓸하고 고독하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마와 새엄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린 쿠빈은 심리적으로 많이 약해 져 있었다. 그러한 쿠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건 마을의 임산부였다. 그녀 는 쿠빈을 유혹했는데, 일찍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쿠빈은 임산부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성폭행의 수위가 어느 정도 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 사건은 쿠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137)

135)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쿠빈이 군대를 전역하고 집에 돌아온 뒤부터 사라졌다. 아 버지는 군대에서 돌아온 쿠빈을 반갑게 맞이했으며 이에 대해 쿠빈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나는 아빠와 매우 다정하고 화기애애한 사이였으며, 아빠는 내가 성 공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셨다.” Alfred Kubin, op. cit., pp. 16-17, p. 27을 참조함.

136) Ibid., p. 6.

137) Ibid., p. 7. 아이러하니 하게도 이러한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 고통은 쿠빈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쿠빈이 임종 전에 자신을 돌봐주던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 한다. ‘제게서 불안을 뺏어가지 말아주세요. 불안은 제가 가진 유일한 재산입니다.’” (“Noch am Sterbebett soll er zu einem trostenden Arzt gesagt haben: Nehmen Sie mir meine Angst nicht, sie ist mein einziges Kapital.”) In: Martin Lichtmesz: 50 Jahre ohne Kubin. In: Sezession 31, August 2009. S. 31을 조예서 트라클의 후기 산문시와 쿠빈의 삽화 비교연구 , 고려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3, p. 38 각주에서 재인용함.

[도판 18] 알프레드 쿠빈, <수태(F ertility)>, Leopold Collection, Vie nna, 1901-02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심리적으로 상처가 쉽게 발생할 가능성이 큰 시기는 유년기 이다. 왜냐하면 나이가 어릴수록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방어기제가 약하기 때문이다. 프 로이트는 어린 아이와 어른이 받는 상처의 강도 차이를 “분열하려는 세포의 핵을 바늘 로 찌르는 것과 성숙한 유기체를 바늘로 찌르는 것의 차이”에 비유했다.138) 이러한 프 로이트의 이론에 입각한다면 11살의 어린 나이의 쿠빈에게 가해진 성폭행은 한 개인의 인생을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빠지게 만든 사건이기에 충분했다.

엄마의 죽음과 출산 중 세상을 떠난 새엄마에 이어서 임산부의 성폭행 사건은 쿠빈 에게 여자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이 감정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된다. 특히 무방비 상태인 어린 자신을 겁탈했던 임산부에 대한 분노 와 반감이 쿠빈의 작품에서는 ‘임신한 여성’ 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알>에서 임산 부는 쿠빈을 무덤으로 데려가기 위한 위협적인 존재로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 다. 어린 쿠빈의 기억 속에 임신은 생명의 탄생과 같은 기쁨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순 간이 아니라 죽음이나 상실과 밀접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지구: 우리 모두의 어머 니>의 임신한 여성이 뿌리고 있는 것은 생명을 잉태하는 씨앗이 아닌 ‘죽음의 씨앗’이 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지나온 길에 목이 잘린 채 널브러진 머리가 있는 것도 이러 한 이유에서이다. 즉, 임산부는 쿠빈에게 죽음과 위협적인 존재의 상징이다.139)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떠한 성적인 사건을 겪게 된 후 피해자에겐 그 사건이 기억으 138) 이창재, 프로이트와의 대화, 학지사, 2003, p. 159.

139) Annegret Hoberg et al., op. cit, p. 45.

[도판 19] 알프레드 쿠빈, <지구: 우리 모두의 어머니(Earth: Mother of Us All)>, 종이에 잉크, 17.1 5×38cm, 1900

로 남게 되는데, 이 기억을 표상이라고 한다.140) 여성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 롯된 부정적인 기억이 쿠빈의 작품 안에서 여성 혐오적 특성을 지닌 ‘임신한 여성’이라 는 표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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