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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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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그려진 <지옥으로 가는 길>(도판 37)에는 거대한 여인이 등장한다. 머리카 락은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묶을 만큼 장발이다. 화면의 소실점을 따라가다 보면 감상 자의 시선은 화면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구멍으로 시선이 모이게 된다. 이러한 장치는 쿠빈이 의도한 조형적 구성 방식으로 화가로서 그의 뛰어난 테크닉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화면 하단에는 십자가가 새겨진 수많은 관들이 여인의 몸으로 들어가 고 있다. 어둡고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몸의 구멍은 여인의 뒤편으로 길게 이어지는 듯 보인다.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구멍은 관람자에게 심리적 공포를 선사한 다.

4년 뒤 그려진 <지옥으로 향한 길>(도판 38)에도 구멍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이 작 품은 전체적으로 삼등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림의 아랫부분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중앙에는 짙은 어둠 속으로 뚫린 터널이 보인다. 그리고 상단에는 정 체불명의 남자가 앉아있다.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낙타, 말 그리고 마차를 탄 사 람들, 깃발을 든 기수들,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촘촘히 그리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전투태세를 갖춘 무리들이 구멍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의 세부적 묘사는 쿠빈이 브뤼겔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194) 한편 초승달을 배경으로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작품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은 신비로우면서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자 194) 쿠빈은 아픈 아내와 함께 요양 차 비엔나에 가게 되었다. 이때 방문한 코트 뮤지엄에서 보게 된 브뤼겔의 작품에 압도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At the Court Museum he was overwhelmed by the paintings of Brueghel”) Phillip H. Rhein, op. cit., p. 12를 참조함.

아내고 있다.

사람들은 구멍을 통해 어딘가로 들어가는데,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도착하게 될 곳은 지옥일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쳐야할 시커먼 어둠 속 구멍에는 심연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듯 보인다. 쿠빈이 보여주는 드로잉의 자유로움은 하늘에 휘갈긴 날카 로운 선으로 나타나고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드로잉의 질감은 보는 이에게 심리적 공포를 선사한다. 이렇듯 쿠빈 작품의 제목에는 ‘죽음’, ‘지옥’이라 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멍과 죽음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시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우물, 땅과 바다에 생기는 싱크 홀과 블루 홀 등의 구멍 은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과 공포심을 자극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성이 페니스를 삽입하는 행동과 아이들이 옷장 안,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행동은 모 두 욕구에 대한 상징이다.195) 이러한 상징은 어머니의 품, 자궁으로 회귀하는 길을 나 타낸다. 즉 구멍은 여성 자궁의 대용 또는 상징이다.196) 프로이트는 언캐니 개념이 여 성 성기와 연관된다고 보았고, 언캐니한 장소는 인류의 시작이 되는 “집에 들어가는 입구”라고 주장했다.197) 이러한 점에서 두 작품에 나타나는 구멍은 여성 자궁의 변형 195) 강영계, op. cit., p. 111.

196) 미하일 바흐찐,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op. cit., pp. 115-11 6.

[도판 37] 알프레드 쿠빈, <지옥으로 가는 길(The Road to Hell)>, 1900

[도판 38] 알프레드 쿠빈, <지옥으로 향한 길(The Way to Hell)>, 1904

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거세공포의 개념을 통해 해석한 여성의 성기는 쿠빈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쿠빈에게 구멍 내부로의 출입은 죽음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구멍(여성의 성기)으로 들어가고 있는 무수한 관과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인 ‘지 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쿠빈이 활동했던 시대·역사적 배경 에서 구멍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해보도록 하자.

일본 작가 노마 히로시의 어두운 그림은 브뤼겔 작품에 등장하는 구멍이라는 소재 를 통해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겪은 일본의 청년들이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과 인간성 상실, 피폐해진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198) 시대와 국적은 다르지만 소 설에 등장하는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쿠빈 또한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산 정책과 이로 인한 전쟁의 불안한 기운 속에서 살아가던 예술가였다. 쿠빈 에게 당대의 현실과 시대적 분위기는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암울한 미래(구멍)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죽음을 향한 발걸음의 표현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간다’라는 표 현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쿠빈 작품에서 구멍은 ‘안’과 ‘밖’ 중 어느 곳으로 통하는 것일까? 쿠빈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시대가 당면한 문제와 이를 바라보는 개인 의 고통과 문제의식을 ‘구멍’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쿠빈 작품에 등장하 는 인물들은 모두 구멍으로 다이빙을 하거나 홀린 듯 어두컴컴한 구멍의 내부로 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쿠빈은 고성에 들어가 부인과 살면서 주류 예술계와 연 을 끊은 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시대의 중압감, 예술가로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구멍 내부로 들어감은 암울한 미래를 향한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구멍을 통해 외부세상으로 나간다고 했을 때, 인간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슬픔과 아픔, 고통을 경험하게 되지만 동시에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의 운명을 극복 하고 더 나은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성에 들어가 지내던 쿠빈은 주류 예술계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와의 교류를 의미한다. 그리고 쿠빈은 이러한 지점을 ‘구 멍’이라는 모티프로 나타낸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두운 고통과 조우

197) 전영백, op. cit., p. 343.

198) 양정임, 요한시집과 어두운 그림에 나타난 ‘구멍’의 상징성 연구 , 동남어문학회, Vol.1 No.

33, 2012, p. 87.

하면서 그들이 나아갈 지점을 자문하게 된다.”199)

이와 같이 구멍 안과 밖의 기준의 전복성은 쿠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그로테스크 의 전복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 아래 살아가는 예술가로 서 시대를 바라봤던 작가의 시선은 ‘구멍’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즉, 쿠 빈 작품에 나타나는 구멍은 단순하게 뻥 뚫린 구멍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통해 현실 세계의 문제를 반영하는 어두운 거울이자 예술과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의 의미를 함의 하고 있다.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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