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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문서에서 인천의 섬과 역사문화유산 (페이지 109-112)

1) 현황

용유면으로 편제되었다가 1973년 부천군 폐지로 경기도 옹진군에 편 제되었다.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로 편입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 중구로 변경되었다. 2012년 영종출장소 운서지소가 행정동 운서동으 로 승격되어, 현재의 행정동인 영종동, 운서동, 용유동이 갖춰지게 되 었다. 영종동은 3개의 법정동(중산동, 운남동, 운북동), 용유동은 4개 의 법정동(을왕동, 남북동, 덕교동, 무의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운서동 에 속한 법정동은 없다. 2001년 3월 29일 인천국제공항이 개항과 함께 영종도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공항전용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2009 년 완공된 인천대교는 송도국제도시와 연결된다. 공항철도가 연결되어 있으며, 구읍뱃터에서 인천 월미도 사이를 운행하는 정기선이 있다.

2) 연혁

영종도에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선사시대부터이다. 송산리의 신석기 시대 주거지, 운남동의 고인돌, 삼목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와 청동 기시대 유적과 유물, 그 외 영종도에서 발견된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늦어도 신석기시대 말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삼국시대 영종도는 대체로 4세기까지는 백제, 5세기에는 고구려, 6 세기 이후는 신라의 영향 아래 있었다. 삼국시대 이 지역은 왕산포구의 조천대라는 지명으로 보아 중국과 내왕하는 기항지로서 기능하였던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 영종도는 한산주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영종도는 인주(仁州, 인천)에 속하였는데 당시의 명칭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자연도는 섬에 제비가 많아 붙은 이름으로 중국과 왕래의 무대가 되어 중국 남송(南宋)과 무역거점인 경원정(慶源亭)이 설치된 요충지였다. 자연도는 예성강-자연도-고군산도-흑산도-명주 를 잇는 명주항로(明州航路)를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 자연도는 죄인의 유배지로도 이용되었다. 1197년(신종 1) 11

영종도 지도

영종도(永宗島)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중구의 섬으로, 동경 126°

31′, 북위 37° 29′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약 103㎢이며, 2015년 12 월 기준 인구는 60,960명이다. 본래 영종도 본도를 비롯해 삼목도, 신 불도, 용유도, 무의도가 군도를 이루고 있었으나, 인천국제공항건설을 위한 매립으로 무의도를 제외하고 모두 매립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로 연육되기 전 용유도의 면적은 13.6㎢, 해안선 길 이는 48.2㎞였고, 삼목도는 면적 4.74㎢, 해안선 길이 12.5㎞이었다.

영종도는 고려시대부터 제비가 많은 섬이라 하여 자연도(紫燕島)라고 불렸고, 조선시대 남양부의 영종진이 옮겨오면 지금의 이름 영종도를 갖게 되었다. 영종진은 1894년 폐지되었고, 1914년 부천군 영종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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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자연도에 유배된 고려 공신 두경승 장군이 독살되는 사건이 있었는 가 하면, 1211년(희종 7) 12월, 최충헌에 의하여 고려 희종이 폐위되 어 자연도로 이거하였다는 기록, 1314년(충선왕 1) 대호군 장공윤 또한 자연도로 유배되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자연도 일대는 1653년(효종 4) 자연도에 영종 진이 이전 설치되기 이전까지 인천에 속하였고, 국영 말목장이 설치되 어 운영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자연도에는 둘레 25리의 목 마장에 358필의 국마가 방목되고 30여 호의 목자가 있었으며, 삼목도 에는 둘레 45리의 목마장이 있고, 30여 호의 목자·수군·염부들이 살 고 있었다.

1653년 남양부에 있던 영종진의 이전으로 자연도는 영종도라는 지 금의 지명을 갖게 되었고, 인천도호부의 부속 도서였던 자연도·삼목 도·용유도·신불도·물치도 등의 섬을 관할하게 되었다. 종4품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영종진의 책임자였다. 남양부에 설치된 영종진의 역 할은 왜구 격퇴와 관련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 방비와 유사시 국왕의 강도 입도 수로의 확보 일환으로 영종진이 자연 도로 이전하게 되고 군사상의 비중도 커졌다.

1681년(숙종 7) 영종진의 책임자는 종4품 만호에서 종3품 첨절제사 (僉節制使)로 승격되었고, 어영청(御營廳)에 배속되었다. 1690년(숙종 16) 영종진의 책임자는 종3품 첨절제사에서 종2품 방어사(防禦使)로 다시 승격되었다. 해양 방어상 영종진의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음 을 알 수 있다. 1715년(숙종 41) 어영청에서 교동수영으로 관할이 바 뀌어 배속되었다가, 1758년(영조 34) 다시 교동수영에서 어영청으로 배속되었고, 영종진을 독진(獨鎭)으로 설정하였다. 1653년 남양도호부 의 영종진을 자연도(현 구읍뱃터)로 이전 설치하면서 조선후기까지 영 종진은 강화와 도성의 해상로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조선 말 이양선이 출몰하자 영종도는 강화·김포와 함께 한양으로 향 하는 수로 방비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

요 때 프랑스군함이 물치도에 정박하자 영종첨사가 문정(問情)을 하였 고, 1868년(고종 5) 4월에는 옵페르트 일행이 침입해와 영종첨사 신효 철(申孝哲)이 문정을 시도하고, 상륙하자 격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영종진 방비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중앙정부는 옵페르트 사건 후 진무영의 군사와 갑곶진에 정박 중인 세곡을 영종진 에 지원하였다. 또한 1869년에는 훈련도감에서 화포·총포·화약 등 의 무기를 내려주어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1874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별주한 대포·중포·소포를 분급하기도 하였다.

1875년 9월는 영종진이 함락되는 운요호사건이 발생하였다. 9월 20 일 일본의 운요호가 강화의 초지진을 공격하고 항산도를 점령, 불을 지 른 후 9월 22일 남하하여 영종진을 공격한 것이다. 일본군은 2척의 보 트에 보병부대 56명을 나누어 탑승 후 영종도에 상륙하였다. 영종진을 지키는 600여명의 군인은 이에 응전하였지만,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륙을 막지 못하고 영종진은 점령당하였다. 당시 영종진 군 사는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에 일본군은 2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귀환 길에 1명이 사망했을 뿐이었다. 영종진을 점령 한 일본군은 화포 36문을 비롯한 영종진의 군기(軍器)를 약탈하고 나가 사키로 귀환하였다. 조정에서는 전몰자 35명에게 급료와 위문금을 하 사하였고, 전몰자 위령제를 시행하였고, 영종진은 폐지되었다. 그 후 같은 해 10월 영종진은 구읍에서 신읍으로 옮겨 영종진을 재설치되는 변화를 겪었으나,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1894년 영종진은 완전히 폐지 되고 인천부의 영종면으로 편제되었다.

일제강점 후인 1914년 영종도 일대는 부천군이 신설되자 부천군 영 종면과 용유면으로 편제되었다. 1919년 3월에는 영종지역의 용유도에 서 조명원·조종서·문무현·최명교 등이 혈성단을 조직하여 3월 28 일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시위는 이틀간 계속되었고, 무의도 로도 확산되었다.

광복 후 영종지역은 1973년 부천군 폐지와 함께 경기도 옹진군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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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되었고, 1989년에는 인천직할시 중구 영종동, 용유동으로 편입되었 다. 1991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영종·용유·삼목·신불의 매 립이 시작되었고, 1995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 용유동으로 변경되 었다. 2001년 인천구제공항의 개통과 함께 영종대교·인천대교·공항 철도로 육지와 연결되어 세계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3) 지명유래

(1) 영종동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관할지역으로 자연도(紫燕島)라 하였는데 1653 년(효종 4) 남양부에 있던 수군기지 영종진(永宗鎭)을 이곳으로 옮겨와 용유(龍流), 무의(舞衣), 삼목(三木), 월미(月尾), 신불(薪佛), 물치(勿 淄) 등의 7개 섬을 관할하였다. 영종진 첨사는 1680년(숙종 6) 어영별 부 천총을 겸임하였고, 1691년(숙종 17)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로 올리고 1779년(정조 3) 좌해방장(左海防將)을 겸임하다 1788년에 수군첨절제사의 직책만 담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진(鎭)이 폐지 되면서 용유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영종면이라 했다.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산·운북·운남·운서의 4개리로 개편되어 경기 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 년 용유면과 함께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2) 운남동(雲南洞)

옛 영종면의 전소리와 외중촌리 일부, 후소리 일부, 송산리 일부를 합친 지역이다. 1914년 운남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경기도 옹진군으로, 1989년 1월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 어 운남동이 되었다.

(3) 중산동(中山洞)

옛 영종면의 구읍리와 송산리 일부, 중외촌 일부를 합친 지역으로 1914년 중산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 으로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어 중산동이 되었다.

(4) 운북동(雲北洞)

옛 영종면의 북촌리와 예호리, 후소리 일부를 합치 지역으로 1941년 운북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 었다가 1989년 1월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면서 운북동이 되었다.

(5) 운서동(雲西洞)

옛 영종면의 후소리 일부와 삼목리, 신불도를 합친 지역으로 1914년 운서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에 옹진군에 편입 되었다가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면서 운서동이 되었다.

(6) 용유동(龍遊洞)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지역의 용유도(龍游島)로 1663년 영종진이 설 치되면서 영종진 용유면으로 개편되었다. 그 후 영종진이 폐지되고 구 한말 인천부에 포함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경기도 부 천군에 편입되어 을왕, 남북, 덕교, 무의의 4개 리(里)로 개편되었다.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75년 5월(군조례 제341호)에 무의출 장소를 두어 1출장소 4개리를 관할하다가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었다. 이때 4개 리가 동으로 바뀌었다.

(7) 남북동(南北洞)

인천부 용유면 지역으로 1914년 남리(南里), 북리(北里), 관청말, 날 개, 등개, 영구리 등을 병합하여 남북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 되었다. 1973년 옹진군 편입되었고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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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남북동이 되었다.

(8) 덕교동(德橋洞)

인천부 용유면 지역으로 1914년 거잠리, 공댕이, 마시안, 순묵개를 병합하여 덕교리라 하여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 에 편입되고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에 편입되면서 덕교동이 되었다.

(9) 을왕동(乙旺洞)

인천부 용유면 지역으로 늘목, 또는 얼항, 을항, 을왕이라 하였는데 1914년 목개, 약수, 왕산, 입구지, 장말, 학방재를 병합하여 경기도 부 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인천직할 시 중구에 편입되면서 을왕동이 되었다.

4) 옛 기록의 영종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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