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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문서에서 인천의 섬과 역사문화유산 (페이지 1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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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해연총제사가 찰 병부는 새로 만들어서 하직 인사를 하는 날 전 해 주고, 판관의 병부는 전 부사가 차던 것을 전해 주도록 하며, 병영에 지급할 좌척은 경리청에 지급한 것을 옮겨 보내고, 감영에 지급한 좌척 및 대부도와 영흥도 첨사가 차는 병부로 나누어 지급했던 것을 모두 거 두어서 올려보내도록 경기 감사, 해연총제사, 경리사(經理使)에게 하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⑥ 『우계집(牛溪集』

■제6권 잡저 효자전

임수복은 남양(南陽) 영흥도(靈興島) 사람이다. 영흥도는 서해(西海) 가운데에 있으니, 숲이 무성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열대여섯 집이 마소 를 치고 사는데, 임수복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만력(萬曆) 임진 년에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니, 강진(姜晉, 휘는 자서 子舒)이 난리를 피 하여 처자를 데리고 그의 집에 가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

5)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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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현령·언양현감·낙안군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낙안군수 재임시 사망하자, 고향인 영흥도에 안장하였다.

③ 영은사(靈隱祠)

영흥면 내4리의 영은사는 임씨 7대 종손 자부인 황정심이 2002 년 음력 8월에 33㎡ 규모의 재실 을 66㎡으로 증축한 것이다. 영 흥도 임씨 가문의 종부인 황씨가 남편이 작고한 후 조상들을 위해 1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만들었

다고 한다. 20년 전부터 10월 10일 오후 2시에 제사를 지낸다. 영은사 는 못을 쓰지 않는 전통 기법으로 지어졌다.

④ 임현규(林顯圭) 정문

영흥면 내1리 평택임씨의 세 거지인 가잣골의 기와집에 있는 1885년(고종 22) 임현규에게 내 려진 효자 정문이다. 정문에는“효 자 학생 현규의 문 광서11년(을 유) 6월 효행의 뛰어남으로 명정 되어 정려의 은전을 문에 표시한

다.(孝子學生顯圭之門 光緖十一乙酉年六月命旌 卓絶之孝行命賜旌閭之 典表其門)”고 새겨져 있다. 이 집은 1930년대 영흥도 일원의 간척사업 으로 치부하고, 섬에서 권력을 휘두른 영흥면장 임원배(林元培)의 집이 기도 하였다.

임현규 정려 영은사

⑤ 영흥목장 마성터(靈興牧場馬城址)

영흥면 외2리 야산 일대의 조선시대 영흥도에 설치되었던 목장의 터 로, 경계석으로 보이는 석축이 일부 남아있다. 석축은 1996년 인하대 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일부 확인되었고, 2001년 한양대학교 박 물관의 영흥진 추정지 시굴조사 때 다시 확인된 바 있다. 대부분 붕괴 되어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폭과 높이가 각각 50~60

㎝에 달하는 1열의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목장의 설치에 대한 정확 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기록된 것으 로 미루어 중종대부터는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대의 기록인 『목장도(牧場圖)』에는 “국마 119필을 281명의 목자가 방목하였 다”고 되어 있어 영흥도에 대규모 목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영흥 도목장은 고종 9년(1872) 화량진을 영흥도로 옮기면서 폐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목장의 시설로는 외2리 뒷 산인 ‘큰산’ 정상에 동서로 마성의 석축이 일부 남아 있고 업벌 큰산 북쪽지역으로부터 양로봉(養老峯) 너 머 신노루와 마경리(馬耕里)쪽과 가두리, 매부리, 화랑골 등지에도 마 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⑥ 영흥대교

2001년 11월 15일 선재도 와 영흥도를 연결하는 영흥대교 가 개통되어 영흥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영흥대교는 길이 1,250m, 너비 9.5m의 왕복 2차 선 도로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최초로 건설된 해상 사장교(斜張 橋)이기도 하다.

영흥대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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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십리포 해변의 서어나무 군락지

서어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키는 15m이며 잎은 어긋나는데 어릴 때는 붉은 색을 띄지만 자라면서 녹색으로 바뀐다. 5 월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며, 열매는 10월 무렵에 익는다. 십리포 해변 의 서어나무 군락지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괴수목으로 약 350여 그루 가 군락을 이룬다. 150여 년 전에 내동마을 선조들이 해풍 바람막이를 위해 심어 놓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 극동사령부 클라크 대위와 해군 첩보대원 17명, 영흥도 청년방위대원 60여 명이 이곳에 기밀첩보 작전기지를 두었다.

⑧ 해군영흥도전적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X-Ray작전’을 수행한 임병래 중 위와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3인 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12월 2일에 세운 전적비이다. 인 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미 극동사 령부 클라크 대위와 해군본부 정 보국 임병래 중위가 이끄는 특수

공작대는 1950년 8월 22일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에 상륙하여 잠입하 였다. 이후 인천과 서울, 수원 등을 왕래하며 첩보를 수집하여 해군본 부와 맥아더 사령부에 제공하였다. 이들의 첩보수집 활동은 인민군의 병력배치와 규모, 보급관계, 지뢰매설 사항,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기뢰수송 사항, 인천해안포대의 위치, 인천시내 주둔 병력의 규 모와 활동 내용 등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 월 14일, 영흥도로 상륙한 북한군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위 기에 처하였고, 적에게 체포되어 특수공작임무의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한 임병래는 자결하였다.

해군 영흥도전적비

⑨ 영흥진 터

영흥진 설치의 배경이나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종실록』9년 5월 14일에 “화량진 진영을 영흥도로 옮기고 강화 의 어구를 지키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수원유수 신석희(申錫禧)의 제의 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여 1872년 5월에 화량진을 남양에서 영흥도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7월 ‘영흥진첨사’로 정식 명명되어 영흥 진은 1894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영흥면 외2리 업벌마을은 남쪽으로 천연의 호안이 형성되어 있고 주 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등 수군진이 자리하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 춘 곳이다. 그러나 진(鎭)과 관련된 유력한 유구들을 확인되지 않았다.

2001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표상에서 자기편 몇 점과 교란층에서 조선시대 기와편과 자기편을 수습하는데 그 쳤다. 이후 영흥화력발전소와 관련 시설들이 건축되는 등 형질변경이 이루어져 더 이상 관련유적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⑩ 외1리 패총1

영흥면 외리 29-7임 일원으로 빗살무늬토기편와 함께 패각이 혼토되어 있다. 1996년 인하대학 교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보고된 유적이다. 이후 2005년 인천광역 시립박물관에 의해 다시 조사되 었다.

⑪ 외1리 패총2

외1리패총1에서 서쪽으로 40여 미터 떨어진 영흥면 외리 16임 지점 일원에 있으며, 해안에 인접한 구릉 남사면에 위치해 인근의 외1리 패 총1과 유사한 입지를 보이고 있다. 1996년 인하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영흥도 외1리 패총 출토 빗살무늬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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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보고된 유적이다. 이후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다시 조사되었다.

⑫ 외1리 패총3

영흥면사무소에서 장경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영흥면 외리 29-7 임 일원에서 횡단도로의 우회도로를 확장 포장하는 공사를 실시하던 중 발견된 유적이다. 1996년 인하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외1리 패 총3’으로 보고되었다. 이후 2003년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으며,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다시 보고된 유적 이다.

⑬ 용담이 패총1

영흥도패총1에서 용담리 마을로 넘어가는 영흥면 외리 산64-4, 17-3전 일대 포도밭과 주변의 경작지에서 패각이 확인된 유적이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처음 보고되었고, 이후 국립문 화재연구소에 의해 ‘영흥도 용담이 패총’으로 재확인된 곳이다.

⑭ 용담이 패총2

용담이 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북쪽 영흥면 외리 59-1 임 일원 의 절개면에서 패각층이 확인된 유적이다. 패각의 두께는 40~100cm 정도이며 길이는 10m 정도이다. 1996년 인하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용담이패총2로 보고된 유적으로,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

⑮ 용담이 패총3

용담이 패총2에서 해안을 따라 영흥면 외리 40임 일원 해수욕장의 중간지점 도로에 인접한 지역에서 패각이 확인된 유적이다. 1996년 인 하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용담이패총3으로 보고되었다.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

⑯ 내리 큰우물

영흥면 내4리 700m 지점에 있는 마을 전체가 식수로 사용했던 자연 우물이다. 마을 처녀들이 더운 여름에 이 우물에서 목욕을 즐기기도 했 다 하여 ‘처녀물’이라 부르다가 마을사람들이 처녀물이란 말이 좋지 않 다 하여 조선 중기 ‘큰우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⑰ 삼신우물

영흥면 외2리 업벌마을에서 당고사 때 쓰던 우물이다. 새마을사업 때 우물물을 펌프로 끌어올리게 되면서 이웃 마을도 삼신우물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무당들은 삼신우물이 영험하다고 믿어 그 근처에서 굿을 하기도 했다.

(3) 선재도

① 선재도 패총1

선재도와 영흥도를 잇는 연육교를 건너기 바로 전 선착장으로 내려가 는 영흥면 선재리 산24-2, 24-4번지 일대에 있다. 이 길 좌측의 구릉 과 절단면에서 패각이 희미하게 확인되었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 에 의해 처음 보고된 유적으로,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선재 도 버드러지 패총’으로 재확인된 곳이다.

② 선재도 패총2

영흥면 선재리 산16 일대 완만한 구릉의 사면 끝자락에 위치한다.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선재도 옛 선착장 패총’으로 처음 보고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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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선재도 패총3

선재도패총2에서 해안을 따라 딴둥이리섬 부근, 영흥면 선재리 산 3-4, 3-45 일대 능선의 절단면에서 패각이 확인된 유적이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통우리 조개더미’로 처음 조사된 유적으로 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선재도통우리패총’으로 재확인하였다.

④ 선재도 패총4

선재도패총3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200여m를 가다 영흥면 선 재리 513-1·산311·3·7번지 일대 깊게 안으로 굽은 해안과 만나는 구릉의 끝자락에서 패각이 확인된 유적이다. 패각의 두께는 30cm 정 도로 두껍지 않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사매기 조개더미’

로 조사된 유적이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선재도사맥이패 총’으로 재확인되었다.

⑤ 뱃말 패총

구름말유물산포지에서 선재분교방향으로 가다 영흥면 선재리 23, 25 전 일원 밭에서 마제석부 1점과 함께 패각이 확인된 유적이다. 1996 년 인하대학교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뱃말패총’으로 보고된 유적으로,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

⑥ 구름말 유물산포지

영흥면 선재리 68임, 331일원 능선 일대에서 고려~조선시대 도자기 편이 수습된 유적이다. 2005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구름말유 물산포지’로 보고되었다.

6)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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