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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서에서 경계가 만드는 공간 (페이지 57-64)

Ⅲ. 효창공원 변천과 현황

2. 역사

상당 부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은 1940년 효창원을 법

2.3. 한국전쟁과 효창운동장 조성으로 인한 황폐화

한국전쟁은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만큼 효 창공원 역시 전쟁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목재 수탈과 골프 장 개발에 이서 한국전쟁을 겪은 후 효창공원의 울창했던 산림은 황폐화되 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효창운동장 건립공사는 공원 내 산림을 더욱 황폐 화시켰다. 1956년 5월 21일 정부는 효창운동장 건설공사 착수에 들어가 6 월 나무를 벌채하고 분묘지대의 구릉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공사 과정 중에 효창공원선열보존회 등 시민단체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중단되기도 하였 으나 정부는 건설을 강행해 1960년 10월 효창운동장이 완공되었다. 국내 최초의 국제규격축구장이었던 효창운동장은 독립운동가 유족과 시민의 반발 을 외면한 채 건설된 곳이지만, 유소년축구, 일반인 동호회 등에 의해 여전 히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의 한국 축구를 성장케 한 공간적 밑바탕으로 여 겨진다.

[그림 36] 효창운동장 공사 (자료: 용산구(2009))

[그림 37] 효창운동장 완공 (자료: 서울사진아카이브)

2.4. 1960년대 ~ 1980년대 중반: 공원 성격의 복합화

1960년대는 입지 맥락이 부재한 다양한 건축물과 시설이 도입되어 효창 공원의 성격이 복합화되고 세부공간별로 나뉘어 사용되는 시기이다. 수목박

물관, 골프연습장, 산책도로, 어린이놀이터, 유료 풀장 등 설치가 포함된

2.5.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사적기능 강화

2.6. 2000년대 이후: 공간 정체성 재확립의 노력

2000년대부터는 성역화, 민족공원화, 독립공원화 등 공원을 재구조화하 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사적지의 상징성과 정체성 재확립을 위해 노력하되 공원으로서 기능을 확대하고자 했다. 2000년 서울시 도시공원으로 지정되 었고 성역화의 일환으로 현재 효창광장 연못에 위치한 상징조형물 ‘점지’가 들어섰다. 효창근린공원 재정비 기본 및 실시설계(2001년)를 통해 공원 시 설을 개보수하였고 2002년에는 생태 습지와 자연학습장을 조성하면서 효창 공원은 ‘도심 속의 생태터’라는 이미지를 획득하였다. 국가보훈처에 의한 효 창공원 민족공원화사업 예비구상(2005)과 효창공원 국립묘지화에 대한 국 회 안건 발의 등 효창공원 성역화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되었으나, 운동장 이전에 대한 합의 실패와 공원이용시간 제한에 대한 주민의 반대 등 독립 운동가후손단체와 체육계, 주민 간 입장 차이로 인해 모두 무산되었다.

효창공원은 묘역은 행사 때만 방문하고, 운동장은 훈련·연습 때만 이용하 며 기념관은 주로 단체가 이용하는 정도로 활용되고 있다. 연간 공원 이용 자 수는 33만 명으로 어린이대공원 934만 명, 보라매공원 835만 명, 현충 원 223만 명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이용률을 보인다(PMA 2019, 17).

2019년부터는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 국가보 훈처, 문화재청, 용산구가 협업식을 갖고 효창공원 독립공원 조성 기본계획 과 효창독립 100년 포럼을 추진하고 있다.

[그림 40] 효창공원 연대표

3. 공간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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