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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후 문학의 문학사적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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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조선후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역동적인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향촌사족은 중앙정권과의 단절 및 경제적 어려움으로 사회적 위상이 점점 추락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선비로서 과거에 합격하는 문제 및 가 장으로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답을 찾아내려는 과정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앙권력이 지방통제를 강화함에 따라 향권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종종 위기 앞에서 향촌사족들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 여 내적으로는 가문의 단결을 견고하게 만들고, 외적으로는 향민을 교화함을 통하여 향 촌사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117) 18세기 후반 전라도 보성의 향촌사족이 었던 안창후의 문학은 이런 배경 하에서 산출되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 하에 지역적으로도 같은 호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 중 안창후 와 마찬가지로 한시와 국문시가의 영역을 함께 넘나든 인물로 황윤석(黃胤錫, 1729~

1791년)과 남극엽(南極曄, 1736~1804년)을 들 수 있다. 황윤석은 목천현감으로 있을 때

「목주잡가(木州雜歌)」 28수를 창작하였으며 여러 시조 작품을 한시로 번역하기도 하였 다. 남극엽 또한 「애경당십이월가(愛敬堂十二月歌)」라는 연시조를 창작하였으며 스스로 이 작품을 한역하였다. 이들은 조선후기 전라도 지역의 문인으로서 한시와 시조를 아우 르는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안창후와 유사한 행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안창후의 경우는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설이십오’라는 독특한 양식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이미 살펴본 바 있듯이 ‘한설이십오’는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먼저 문으로 자세히 밝힌 다음 이를 한시와 시조로 다시 요약하여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양식은 황윤석이나 남극엽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안창후 문 학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앞서 언급한 것처럼 향촌사족이 문학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 문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은 조선후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이관빈의

「황남별곡」과 같은 가사 작품에는 산수 유람을 하는 과정을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찾아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성리학적 이상향을 찾는 것은 결국 조선후기 분화된 사대부 계층의 질서 안에 살아가고 있는 향촉사족의 내적 갈등과 고뇌가 만들어 준 행위

117) 국윤주, 「조선후기 향촌사족 시가의 자의식과 그 윤리적 성격―위문가첩을 중심으로」, 『한국시가 문화연구』 제 28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1, 305~306면.

라 할 수 있다.118) 이런 점에서 이관빈의 지향과 내면 의식은 안창후와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두 작가가 모두 성리학적 이념의 견인력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눈 앞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창후가 해결 하고자 한 것은 마을공동체의 풍기를 개선하는 것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 활발하게 문학 창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창후의 문학은 이관빈이 추구한 문학과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안창후의 문학에 투영된 향촌공동체 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하여 장흥지역에서 살았던 위백규(魏伯珪, 1727~1798년)와의 비교 검토가 요청된다. 위 백규는 안창후와 같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향촌사족인데 그는 공동체의 안정성 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창작된 「농가(農家)」는 노동의 분위기를 경쾌하고 밝은 것으로 묘사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향촌공동체를 互惠性과 同樂의 시점에서 운영하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119) 그리고 이와 동시에 위백규는 실 천적으로 경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하였다. 이와 달리 안창후의 향촌공동체 운영은 향촌공동체 구성원들의 사상 개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문학은 여기에 일조하 기 위해 창작된 것이다. 도덕적 사상 개조라는 측면에서 창작된 안창후의 문학은 후대에 조황과 같은 작가에게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창후의 문학에는 윤리적 의식과 유학적 도덕이념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이는 가문의 가풍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안창후 가문에서 대표 자로 꼽히는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성향이 나타 나고 있다. 안방준은 비록 시조가 아닌 한시 작품이기는 하나 「오륜가(五倫歌)」를 창작하 였다. 그는 무너진 세상의 질서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의 상실을 보면서 이를 해 결하고자 ‘독행(篤行)’을 해결방법으로 제시하고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오륜가」를 창 작하였으며, 오륜의 가치를 실천하도록 노력하였다.120) 또한, 안방준을 통해 가문의 위상 이 높아진 이후 이런 문학 창작을 통한 교화의 모습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 인 사례는 안후상에게서 나타나는데 대내적으로는 문중의 강학 활동에 열중하고, 대외적 으로는 향촌의 교화에 힘쓰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들어 문중의 자제들을

118) 조유영, 「조선후기 향촌사족의 이상향 지향과 그 의미」, 『우리말글』 제 71집, 우리말글학회, 2016, 235~237면.

119) 신성환, 「존재 위백규의 향촌 공동체 운영과 <농가>」, 『어문연구』 42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4, 256~258면.

120) 송재연, 「안방준의 한시 「오륜가」에 구현된 오륜 형상과 그 의미」, 『국문학연구』 제39집, 국문학 회, 2019, 9~16면.

교육시키기 위해 가숙과 같은 공간을 운영하고 대체적으로 문중서당으로 이용하고 있는 데, 죽산안씨는 이와 달리 목미암(木美庵)이라는 서당을 문중 자제 속하지 않은 촌민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 운영하였다.121) 이는 죽산안씨가 향촌에 같이 살았던 촌민들에 게 유학적 도리를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잇었고, 유교적 가치인 대동사회라는 공동 체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22) 그러므로 안방준이 한시에서 다룬 오륜과 안후 상 등 죽산안씨의 강학과 향촌교화 활동을 같이 고려할 때 안창후의 문학에서 주목 받는 교화성과 유학적 지향은 이 가문의 가문적 전통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안창후의 문학 에서 나타나는 이런 독특한 가문적 전통은 18세기 다른 문인의 문학과 어느 정도 구별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첫째, 안창후의 시조는 비록 황윤석, 남극엽 등이 보여준 한 역 혹은 개작의 현상이 없지만 문·시·가의 세 가지 문학적 형태가 결합된 상태로 나타나 는 점은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의 향촌공동체 의식은 다른 향촌사족들과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그는 세태 혹은 공동체의 모습을 부정적이고 문제가 많은 것으 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비판의식과 현실 개조 의식이 뒤따르고 있다. 셋째, 의외 인 것은 그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유학의 이상적 이념을 보급하 기 위한 열정만큼은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그의 이런 열정이나 유 학에 관한 문학창작과 교화는 죽산 안씨의 가문적 전통에서 비슷한 이념적 지향이 발견 된다는 점이다. 이는 안창후의 문학이 가문적으로 중요시하고 있는 유학적 가치와 가풍 을 대대로 계승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121) 김대식, 「조선후기 죽산안씨 문중의 강학과 향촌교화 활동」, 『인문학연구』 45권, 조선대학교 인문 학연구원, 2013, 154~155면.

122) 김대식, 위의 논문, 155~15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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