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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도산 교육사상의 형성 배경과 기초

1. 형성 배경

1) 시대적 배경

도산이 출생한 19세기 후반의 우리 나라는 역사적으로(정치, 경제, 사회, 사상의 제 측면) 매우 급격한 변화를 보였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수십 년 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국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발호로 인한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원군이 과감한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을 폈으나 집권한지 10 년 만에 민씨 일파에 몰려 실각하게 되었다. 일본은 1875년 운양호(雲楊號) 사건 을 구실로 위협 시위을 하면서 조선 정부에 협상을 요구하였다.1) 다음 해(1876년) 에는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 제물포 조약에 이르자 잇따라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통상 조약을 맺게 되는데2) 이 것들은 물론 우리 나라의 자주적 선택에 의해서 추진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원래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이질적인 다른 나라와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튼 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국제사회에 대하여 한 국가로서의 독립성과 정체 성을 확고히 해야 하는 새로운 국가적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 반 당시의 문호 개방은 제국주의 일본의 군사적 위협 하에서 처음 이루어진 것이 기 때문에 나중에 국권 상실이라는 훨씬 심각하고 현실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 었다.

1) 운양호 사건(1875) :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자 조선 군대가 자위 행위로 포격을 가함. 이를 구실로 일본이 조선 정부에 협상을 요구. 1876년에 강화도조약 체결 (3개 항구 개항 등 불평등 조약임).

2) 통상 조약 : 미국(1882년), 독일(1882년), 영국(1883년), 러시아(1884년),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1896년 2월에 일어난 ‘아관파천’3) 후에 우리 나라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가 생겼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심화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를 비롯하여 구미 열강에게 광산, 철도 등 각종 이권을 침탈 당하거나 전제권으로 양여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열강들의 이권 침탈은 우 리 나라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면서 또 하나의 위협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 대한 열강들의 이해 관계를 살펴보면, 제정 러시아는 극동에 서 남하 정책을 시행하여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에 부동항과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나라를 속지 또는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 라에 대한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대립하게 되었 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을 후원하였고, 프랑스는 영 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착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미국과 독일은 필요에 따라 이해를 추구하여 이권 획득과 선교에 열중하면서 상황 변화에 따라 자기 나 라에 유리한 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이러한 외세의 위협을 맞아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세력이 대두됨에 따라 국론은 개화와 척사로 엇갈려 정계는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국권은 중심을 잃고 방황하게 되며, 이러한 상황에 편승하여 침략적 야심을 품은 일본과 청, 일본과 러 시아의 대립은 마침내 전쟁으로까지 점화하게 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지배 세력으로 남 게 되어 1905년에는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국권까지 빼 앗아 이후 35년 동안을 식민 통치하게 된다.

이처럼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세기 말에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단 기 4211년, 무인년) 대동강 하류인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7리 도롱섬에서 한 농 사하는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7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자라났다. 7-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 하고, 9-14세까지는 한문 서당에 다니면서 목동도 겸하였다. 14-16세 사이에 강서 군 심정리에 머물면서 김현진(金鉉鎭)에게 유학을 배웠고 자기보다 서너살 맏이가

3) 아관파천(1896년) : 친러파 이범진 등이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와 공모하여 고종을 러 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친러 내각 성립. 정부는 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됨.

4) 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흥사단출판부, p.7.

되는 필대은(畢大殷)5)을 만나게 된다. 필대은은 근대 사상에 먼저 접한 사람으로

세운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시에 또한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였

집중 게재함으로써 해외에서나마 민족 언론을 주도하였다.

간다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방략을 작성하였으며 대외 선전과 문화 사업에도 착수하였다. 1920년에는 흥사단

는 없다.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조나 분위기 속에서 행동을 익히고, 생 각을 가다듬어 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행동이나 사상은 그 시대의 사 조나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도산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본 절에서는 도산의 사상과 행동 형성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 을 미친 사조나 분위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을 들 수 있다. 도산의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조 중의 하나는 20세기 초에 한국에 소개된 사회진화론32)이다. 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서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생존 경쟁’과 ‘적자생존’을 골자로 한 진보 이론이었다.33) 그런데 서양에서는 인수동조론 (人獸同祖論) 때문에 기독교에 도전하는 이론으로 간주되어 비판받고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수용 될 수가 있었다. 오히려 약육 강식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침탈을 목격하게 되자 진화론을 일종의 정치 사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국에 들어 온 이 사회진화론은 개화 사상과 연관을 맺으면 서 자강론으로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진화론을 소개하는데 간접적으 로 공헌한 책은 중국의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었고 직접적으로 공헌 한 사람은 유길준(1856-1914)이었다.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은 20세기 초 한국 지식인들의 필독서였고 그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담총(談叢)을 토대로 만든 ‘음빙 실자유서(飮氷室自由書)’가 1908년에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이 무렵 도산은 ‘음빙실 문집(飮氷室文集)’을 탐독했고 널리 익혀지기를 권했던 것 같다. 도산은 1908년 평 양에 직접 설립한 대성학교 한문과의 교과서로 사서오경보다 ‘음빙실문집(飮氷室 文集)’을 택했을 정도였다.34)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삼남 출신인 유지가 도

32) 사회진화론 : 진화론은 19세기 중엽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 후 허버 트 스펜서와 토마스 헉슬리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서 사회진화론으로 발전됨. 사회진화 론은 개항 이후 개화 자강 사상과 애국 계몽 사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수용되었던 서 구 사상의 하나로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많은 사상들이 전개되는데 이론 적 기반이 됨.

33) 장을병(1986), “도산 안창호의 정치와 사상”, 「도산 사상 연구」, 제1집, 흥사단출판부, pp.11-12.

34) 주요한 편, 전게서, p.113.

산을 찾아와 나라 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에

“크게 용빼는 일만이 나라 일 아니요, 양계초가 만든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 란 책이 있으니, 그것을 우선 몇 권 사서 삼남에 있는 유명한 학자에게 주어서 읽게 하시오. 그것이 나라 일이요.”35)

하고 타일렀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의 당대 대표적인 문 명개화론자였던 복택유길(福澤諭吉)의 지도를 받았고, 1883년 도미했을 때는 에드 워드 S. 모스의 지도를 받았다.36) 이에 도산은 유길준을 근대의 대표적인 지도자 로 꼽을 만큼 숭앙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산은 1924년 ‘동포에게 고하는 글 (일명 갑자논설)’에서

“… 근대에도 유길준 같은 어른은 우리의 지도자 되기에 합당하였건만 우리의 선 인들은 그를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고 압박과 무시를 더하다가 마침내 그의 불우의 일생이 끝날 때에 가서 성대한 화장을 한 것을 보고 나는 슬퍼하였습니다. …’고 하 였다.”37)

당시 우리 나라의 계몽 사상가들은 사회진화론을 계몽 사상 전개의 기본으로 삼게 되었고 그 결과로 실력양성론을 제시하고, 민족 정신의 고취를 강조하고, 신 민 사상을 주창하였다.38) 한편 도산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점진적인 개혁주의로 나아갔다고 하겠다. 사회진화론은 혁명적인 변혁보다는 점진적인 개혁 에 관심을 쏟고 있다. 따라서 도산이 제시한 독립 운동의 방략도 점진론 내지 준 비론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성급한 무력 항쟁이나 조급한 정치적 독립을 주장 하기보다는 계몽을 통해 올바른 신민(新民)39)을 길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

35) 상게서, p.113.

36) 이광린(1979), 「한국 개화 사상 연구」, 일조각, p.266.

37) 주요한 편, 전게서, pp.527-528.

38) 김경일 외(2003), 「한국 사회 사상사 연구」, 나남출판, pp.208-221.

39) 신민(新民) : 우리 나라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을 애국 계몽 사상가들은 사상 전개의 기 본 인식으로 삼았는데 그 결과로 실력양성론을 제시하고, 민족 정신의 고취를 강조하 고, 신민 사상을 주창하였음. 신민 사상은 생존 경쟁의 시대에 있어서 국민 되는 자격 이 없다면 자립할 수 없으므로 국권과 민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을 새로이 하여야 한

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신민이 길러지고 민족의 역량이 축적되면 국가의 독립은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신민이 길러지고 민족의 역량이 축적되면 국가의 독립은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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