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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말갈에 대한 견해

한규철은 󰡔삼국사기󰡕의 말갈이란, 특정종족을 염두에 둔 것이 아 니라 백제와 신라, 고구려인의 변방집단으로서 중앙조정의 군사, 행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漢, 때에는 읍루만이 있고 말갈은 있지 않았 는데 말갈이라고 쓴 것이 어찌 그다지도 빨랐던가?∼중국의 역사는 모두 당 시 사신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틀린 사실이 없는 데 김부식의 역사 책은 1000년 전의 일을 뒤에 기록한 것이니 그 거칠고 틀 린 것이 괴이할 것 없다.∼동성왕 4년에 읍루를 물길이라고 했으나 여기서 말갈이라고 한 것은 곧 가짜 말갈이요 속말 냇가의 진짜 말갈은 아니니 보 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236쪽) 참고.

51) 楊軍, 조선사서 󰡔삼국사기󰡕소재 “말갈”고, 중국변강사지연구, 2008.12 조선학자들의 연구결과 말갈은 숙신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의 말 갈은 동옥저 혹은 동예고 발해시대 말갈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중국학자들 은 대부분 삼국사기 기록이 틀리다고 생각한다. ‘말갈’은 다른 시기, 단일민 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다민족을 말하는 범칭 및 비칭으로 사용하는 것 으로 전한시기에는 읍루를, 위(삼국시대)에는 한예나 동예를 말하고 수당시 기에는 철령에서 함관령 사이에 옥저를 말한다고 정약용의 「말갈고」에서 밝히고 있다. 결론은 삼국사기 모든 자료 통합 분석과 중국자료 분석 및 일 본사료 분석결과 말갈은 예인(東濊)이다.

52) 정약용, 󰡔대동수경󰡕 「淥水」 그러므로 여러 문헌에 압록이라고 한 것은 다 의주 하류를 두고 말한 것이다.

정조직에 정식으로 편제되지 않고 반독립적 행동을 하였던 집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53) 이렇게 말갈을 독립된 하나의 정 치체 혹은 집단으로 보지 않고 고구려의 귀속 혹은 변방 집단으로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다음의 표에서 확 인 할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의 기록에서부터 말갈 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고 921년 「신라본기」의 마지막 기록까지 약 1000여년간 80여회차에 걸쳐 지속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교류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간의 말갈과 발해의 연구에서는 주로 󰡔北 齊書󰡕, 󰡔隋書󰡕, 󰡔新唐書󰡕, 󰡔舊唐書󰡕 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 향이 많았다. 그러나 말갈의 등장시기를 가장 이르게 보고 말갈에 대 한 언급의 빈도수 역시 󰡔삼국사기󰡕를 능가하는 사서는 찾아 보기 힘 들다. 그러므로 말갈연구에 있어서 󰡔삼국사기󰡕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삼국사기󰡕에 기재된 말갈기록을 꼼꼼히 검토할 필요 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번 장에서는 말갈관련 기록 중에서 특히 󰡔삼국 사기󰡕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말갈의 국가적 성향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53) 한규철, 「삼국사기의 말갈 문제」, 󰡔인문학논총󰡕 제31집, 2013.

󰡔삼국사기󰡕 말갈기록54)

번호 연도 삼국사기 내 용

1 BC37 고구려본기 말갈 부락과 접경,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 려워, 말갈이 복종

2 BC17-1 백제본기 말갈이 북부국경과 인접, 용맹, 거짓말잘함 3 BC16-9 백제본기 말갈이 북쪽 국경 침범

4 BC11-2 백제본기 말갈군3천명이 위례성 포위, 대부현까지 추격, 말갈 병 5백여명 사상자

5 BC1-10 백제본기 말갈이 습격, 칠중하에서 싸움, 추장 소모를 마한에 보냄

6 BC9-10 백제본기 말갈이 북부국경 침략, 곤미천에서 싸움 7 BC8-4 백제본기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책 습격하게 함

󰡔삼국사기󰡕 말갈기록54)

번호 연도 삼국사기 내 용

8 BC6-5 백제본기 동쪽에는 낙랑,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변경 침공으 로 편하지 않음

9 004-09 백제본기 부현동쪽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도적을 만나 물 리침

10 022-09 백제본기 말갈이 술천성을 침임

11 022-11 백제본기 말갈이 부현성을 습겨하여 약탈

12 030-10 백제본기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이김, 죽이거나 생포 한 자 많음

13 031-08 백제본기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김, 2백여명 죽임 14 034-09 백제본기 말갈이 마수성을 침입하여 합락, 가옥 태움 15 034-10 백제본기 말갈이 병산책 습격

16 055-08 백제본기 말갈이 북쪽 변경을 습격함 17 056-02 백제본기 우곡성을 쌓아 말갈 방어하게 함 18 108-07 백제본기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 약탈 후 돌아감

19 121-10 고구려본기 숙신사신이 와서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침 20 125-0 백제본기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해 구원병 요청함 21 125-01 신라본기 말갈이 북족 변경에 대대적으로 침입

22 125-07 신라본기 대령책을 습격하여 이하를 지나니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함

23 137-02 신라본기 말갈이 변경으로 들어와 장령의 5책을 불태움 24 139-08 신라본기 말갈이 장력을 습격해 백성을 잡아감

25 139-10 신라본기 말갈이 쳐들어 또 쳐들어 왔으나 눈이 심하게 내려 물러남

26 140-02 신라본기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함

27 142-07 신라본기 신하들에게 말갈에 대한 정벌을 의논했으나 이찬웅 선이 불가하다고 하여 중지함

28 203-10 신라본기 말갈이 변경을 침입함

29 210-10 백제본기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불 을지르고 도망감

30 214-09 백제본기 진과에게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 격하여 빼앗게 함

31 214-10 백제본기 말갈이 정예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술천에 이르름

󰡔삼국사기󰡕 말갈기록54)

󰡔삼국사기󰡕 말갈기록54)

󰡔삼국사기󰡕 말갈기록54)

54) 원문참고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 초기 말갈의 위치

‘말갈’에 대한 󰡔삼국사기󰡕 제일 첫 기록은 BC37년 「고구려 본기」 인데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개국시에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어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 치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다.55) 이 구절 이전에 “주몽은 졸본천에 이르렀다고 하고 󰡔위서󰡕에 서는 홀승골성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비류수가에 터를 잡은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땅이 말갈부족 인근이라는 점이다. 때 문에 고구려 주몽이 처음 터를 잡은 졸본천, 혹은 홀승골성 혹은 비 류수가 주변이 옛적부터 말갈집단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후 발해의 위치가 중국 동북지방 동부 와 연해주에 있다는 일반론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말갈과 발 해의 위치를 파악해야할 필요성을 갖게 하는 근거이다.

2. 고구려와의 친연성

초기 말갈세력은 고구려세력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그 집단의 특수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고구려의 초기 도읍 지역인 홀승골성, 졸본, 비류수 근처에 말갈이 살고 있었고56) 󰡔삼국 사기󰡕 말갈 기록 전체에서 말갈이 고구려 영역을 침범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초기 고구려세력과 말갈세력이 대립의 위 치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연합하여 타국을 공격하거나 후대에는 당과의 연합으로 타국을 공격 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떠한 형태로든 고구려와 유사성을 가지고 끊

5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BC37년 위 표에서 1번 항목.

56) 󰡔삼국사기󰡕 1번 항목, 고구려 주몽이 홀승골성에 이르러 국가 형성.

임없이 교류해 왔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후대 발해가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이야기 하는 측면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 증거자료로 제 공될 수 있는데 실제로 2015.5.19. 기준 중국 백과사전(바이두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발해국”은 말갈족을 근간으로 하고 고구려와 연계되 어 있는데 신라와는 대립구도를 가진 집단으로써 중국의 지방민족으 로 설명하고 있다.

3. 말갈이 위치한 지역의 중요성

󰡔삼국사기󰡕기록에 언급 되어 있는 대로 ‘말갈’ 집단이 지속적으로 백제나 신라의 북쪽 경계에서 지속적으로 분쟁이 있었다면 그 지역 이 말갈집단의 세력 확장에 중요한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말갈의 중심지역이 곧 군사적 요충지이거나 그러한 조건을 확보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도 있으며 이는 향후 말갈세력을 기반으 로 한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성장하기에는 그들이 점유했던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 및 경제적 요충지였고 그 루트를 활용했을 충분한 가 능성 또한 고려해야 한다. 만주지역 및 중국동북지역의 패권은 요동 반도와 발해만에 대한 지배력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양질의 소금과 해상루트의 편리성 등으로 만주지역, 요동지역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때문에 발해만과 발해국의 명칭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발해만을 점유하고서야 ‘발해’라는 국명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4. 말갈의 국가체계 가능성

󰡔삼국사기󰡕 초기항목에는 백제가 말갈과 접경지역에서 분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백여년 간 백제와의 분쟁 이후, 그 다음으로

는 신라와의 분쟁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또다시 200년쯤 백제를 공격 하고 있다. 214년 백제본기에는 말갈의 “정예기병”을 언급하였다. 정 예기병의 파견 등은 단순한 조직체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 는 아니며 군사적으로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존재해야지만 진행될 수 있다. 또한, 기병의 운용은 당시 대외관계속에서 군사경쟁력에서 우 위를 점할 수 있는 사항이므로 이들을 단지 고구려에 예속된 군사정 예집단이나 용병등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_김춘추 편에서도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의 군사”라는 표현을

기이_김춘추 편에서도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의 군사”라는 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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