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삼국사기 말갈(靺鞨)에 대한 기록 검토-송옥진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삼국사기 말갈(靺鞨)에 대한 기록 검토-송옥진"

Copied!
40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송옥진*33)

Ⅰ. 머리말

Ⅱ. 기존 말갈연구의 경향

Ⅲ. 중국과 한국의 말갈 기록 1. 중국문헌자료

2. 국내문헌자료

Ⅳ.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말갈에 대한 견해 1. 초기 말갈의 위치

2. 고구려와의 친연성

3. 말갈이 위치한 지역의 중요성 4. 말갈의 국가체계 가능성

Ⅴ. 맺음말

【국문요약】

동아시아 역사, 특히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국가 간 협력체계를 갖기도 하고 대치상황을 갖기도 하는 등 그 교류가 끊임 없었다. 국가 간 상호협력이 꼭 필요한 현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 체제가 과연 누구의 것이었느냐는 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는 같은 역

*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박사수료.

(2)

사를 공유한다는 역사인식 속에서 양국이 협력하고 경제적, 문화적 상승효과를 내어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한국과 중국, 양국의 교량역할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 는 ‘말갈’에 대한 양국의 역사인식에서 평화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대부분이 말갈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을

󰡔북제서󰡕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제서󰡕에 기록된 말갈의 사신파견 기록보다 더 많은 횟수의 말갈기록이 한국사서 󰡔삼국사기󰡕의 전 편 에 걸쳐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에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해 주 는 󰡔삼국사기󰡕 말갈 관련 자료를 집중 검토해 보기로 하며 이와 함 께 한국과 중국의 말갈 관련 기록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삼 국사기󰡕의 ‘말갈’괄녈 기록을 검토하여 말갈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을 몇 가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 초기 말갈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제일 첫 기록인 BC 37년 고구려 건국시 졸본천 주변이 예로부터 말갈집단 거주지역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록에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한 말갈이 고구려의 변경은 한번도 침 입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고구려와의 친연 가능성, 이 후 말갈세력을 기반으로 한 발해가 해동성국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 는 데에 기여한 말갈이 위치한 중심지역의 지리적 중요성, 마지막으 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견줄 만큼의 말갈의 정치적 역량 등을 제시 하였다. 그동안 사서 검토에 있어서 중요시 되지 않았던 󰡔삼국사기󰡕

내에 80여건의 말갈관련 기록으로 생각해본 것들을 추후 다른 사서 들과 교차 검색해 본다면 좀 더 많은 말갈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주제어 : 말갈, 말갈국, 발해, 삼국사기, 백산, 압록

(3)

Ⅰ . 머릿말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개개인이 갖는 생각이 모두 다르듯이, 각국 의 역사인식도 때로는 정치적으로 때로는 문화적으로 국가 간 차이 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아시아 역사, 특히 한국과 중국 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국가 간 협력체계를 갖기도 하고 대치상황을 갖기도 하는 등 그 교류가 끊임없었다. 때문에 ‘동북공정’으로 대두 되는 양국의 역사분쟁에 있어서도 한쪽은 우리역사바로알기의 입장 에서, 다른 한쪽은 자국역사세우기 입장에서 한동안 첨예하게 대립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간 상호협력이 꼭 필요한 현재 는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체제가 과연 누구의 것이었느냐는 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는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는 역사인식 속에서 양국이 협 력하고 경제적, 문화적 상승효과를 내어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한국과 중국, 양국의 교량역할 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말갈’에 대한 양국의 역사인식에서 평화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는1) 고려시대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국시대로 지 칭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인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양국의 역사인식의 주요 쟁점이었던 발해사의 경우 발해의 건국세력 일부였던 ‘말갈’에 관한 인식에 대해서 서로 자국의 역사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다양한 연구 가 진행 중이다. 대개는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지는 종 족 계통설을 일부 수용하는 실정이지만,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옛 땅에 그 유민을 중심으로 성립된 ‘발해’의 세력으로 ‘말갈’을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 볼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

1) 양국의 역사에 모두 연관되어 있는 주제인만큼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각각 ‘한국’, ‘중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4)

󰡔삼국유사󰡕 「기이」 말갈 발해전에서는 발해의 건국 및 건국주체인 말갈에 대해 다른 사료보다 자세히, 다양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한 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삼국유사󰡕에 인용된 자료에 대한 충분한 검 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대부분이 말갈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을 󰡔북 제서󰡕로 보고 있다. 󰡔북제서󰡕 권7에는 ‘이 해에 실위, 고막해, 말갈, 거란이 나란히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는 기록이, 󰡔북사󰡕 「물길전」 에서는 “물길은 고구려 북쪽에 있으며 말갈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 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권1 「기이」편에는 말갈 발해전을 따로 입전하여 󰡔통전󰡕의 기록을 빗대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 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 연간에 비로 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2) 고 적고 있으 며 ‘말갈은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말갈의 위치정보를 나타 내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말갈 관련 기록이 그 어느 사서에서 보다도 빈번히 보이고 있으나 사료로 인용되 는 부분은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삼국사기󰡕 에 기록된

‘말갈’기록을 정리하여 ‘말갈’에 대한 기초연구를 해 보고자 한다. 그 간의 말갈에 대한 선행연구를 먼저 검토한 후 관련 사료를 한국문헌 과 중국문헌으로 구분하여 정리하기로 하는데 한국사서로는 󰡔삼국유 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 는 ‘말갈’기록을, 중국사서로는 최초의 말갈기록이라 알려진 󰡔북제서󰡕

를 기본으로 󰡔수서󰡕, 󰡔신당서󰡕, 󰡔구당서󰡕를 살펴보아 말갈관련 기록 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최광식, 박대재 역주, 󰡔삼국유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125쪽.

(5)

Ⅱ . 기존 말갈연구의 경향

말갈의 민족연원에 관해서는 한국과 중국에서 학자들 마다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다. 주로 한국의 입장에서는 ‘발해’의 건국 당시 말 갈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으며 건국자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이 다’는 것으로 한국사에서 말갈이 차지하는 부분을 고구려계승의지를 갖는 발해의 주민구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중 국에서는 각기 다른 시기의 다른 민족의 의미로서의 말갈을 주장하 며 대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지는 계통성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구성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말갈에 대한 성향 파악에 앞 서 여기에서는 말갈에 대한 민족 연원에 관한 선행 연구자의 견해를 간략히 소개한다.

권오중은 말갈의 계통을 읍루로만 보아 온 종래의 견해가 많은 모 순을 안고 있었다는 지적에서 출발하여 읍루설에 의한 경우 삼국사 기의 말갈기사가 허구로 처리된 문제의 근거가 되는 중국정사를 통 해 말갈의 종족계통을 재검하였다. 여기에서 말갈을 ‘예(濊)’와 ‘읍루 (挹婁)’계통으로 구분하고 발해건국 이후 말갈이 발해와 흑수부로 분 리된 것은 이같은 종속상의 차이로 인식하면서 예계의 말갈이 부속 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였다고는 하나 이들이 몸담고 있던 국가가 고구려이었고 보면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를 복 건한다는 의미가 강하였으리라고 판단하였다.3)

노태돈은 말갈은 선진시대 숙신, 한 대의 읍루, 북위대의 물길, 수 당대의 말갈갈등의 명칭으로 불리던 종족4)으로 정의했다. 또한 발해 국의 주민구성에서 먼저 주목되는 사실에 있어서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의 지배하에 옛 발해국의 주민들이 두 부류로 뚜렷이 구분되

3) 권오중, 말갈의 종족계통에 관한 시론」, 󰡔진단학보󰡕 49, 1980.

4) 노태돈, 「발해 건국의 배경」, 󰡔대구사학󰡕 19, 1981.

(6)

어 존재한다고 하면서 요, 금대의 발해인과 여진인은 두 개의 다른 족속 단위인데 여기에서의 여진인은 명백한 말갈족의 후예라고 하였 다. 이 발해인의 역사계승의식은 고구려를 이었으나 말갈족이라는 의식을 표한 예는 없다고 하면서 그 구분을 뚜렷이 하여 발해국을 주도하였던 ‘발해인’은 고구려인의 후예들이라고 하였다.5)

한규철은 말갈과 발해에 관련하여 오랜 기간동안 많은 논문을 발 표하였다. ‘말갈’은 당⋅송대인들이 그들의 동북방주민들을 범칭, 비 칭하였던 종족명이었고 고구려의 피지배주민들의 비칭이라고 규정 하였다. 말갈을 피지배주민들에 대한 비칭으로 보는 자세는 󰡔삼국사 기󰡕에 반영되어 중국측 기록과 달리 동명성왕대까지 말갈이 등장하 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한국 및 중국사에서 ‘말갈’족의 존재를 ‘고 구려’와 따로 구별하여 인정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하였다. 또한, 초 기에는 自稱에서 후에는 중국인들에 의한 他稱, 卑稱, 고구려백성으 로 볼 수 있는 주민(흑수말갈 제외)으로 해석하였다.6)

손진기는 하나의 민족도 하나의 종족도 아닌, 예맥, 숙신, 고아시 아 3개 종족의 일부 부락군 및 부락연맹을 포괄하는 이름7)으로 설명 하였고 김현숙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계절성 이동을 하는 半農半守 獵의 종족으로, 예맥족은 농경정착생활존재로 생각되며 일부 말갈족 은 고구려와 역사적 관계 지속8)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문안식은 기존의 연구가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에 대하여 크게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 북부에 걸쳐서 존재하였던 동예와 관련 있다는 정약용의 위말갈설에 대한 부정이나 보강에 불과하다고 하면

5) 노태돈, 대조영, 고구려인인가 말갈인인가」, 󰡔역사비평󰡕 9, 1989.

6) 한규철, 「고구려시대의 말갈연구」, 󰡔부산사학󰡕 14, 1988; ~「발해건국과 남북 국의 형성」, 한국고대사학회, 1992; ~「발해인이 된 고구려말갈」, 󰡔고구려연 구󰡕 26, 2007.

7) 손진기, 󰡔동북민족원류󰡕, 동문선, 1992.

8) 김현숙, 「고구려의 말갈지배에 관한 시론적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 1993.

(7)

서 이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말갈세력을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위말갈이라고 하는 종래 의 한갈래라는 인식과 달리 세 종류의 다른 집단을 아우르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구분한 말갈은 백제본기의 ‘맥(貊)계 말갈’과 신라본기 의 ‘예(濊)계 말갈’, 그리고 이들의 문화기반 해체 이후 새로이 고구 려에 의하여 從民된 ‘아(亞)말갈’로 구성된다고 하였다.9)

이흥종은 삼국사기 말갈기사는 특정지역에 자리했던 한 집단의 기 록이며 문헌상의 말갈과 고고학상의 중도식토기집단이 동일한 집단 이었으며 아울러 중국측 사서에 등장하는 ‘예(濊)’와 동일집단에 대 한 서로 다른 칭호로 보았다.10)

이동휘는 한반도내에서 확인되는 말갈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삼국 사기에서 전하는 말갈전체를 만주 혹은 연해주에서 남하한 말갈로 보기 어려우며 그들의 상당수는 한반도 내에서 존속하였을 세력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신라 북 방에서 산택에 거주하고 단일된 세력체를 형성하지 않았던 세력들을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용어를 차용하여 지칭하였다고 보고 후세에도 말갈용어를 차용하여 이들을 말갈로 호칭하였을 것으로 보고 그 실 체를 흑수, 달고 등 말갈을 제외한 종래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던 여러 지역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11)

서영수는 동아교섭사의 입장에서 발해를 서술하면서 발해연구에 서 도외시할 수 없는 부분인 말갈에 대하여 손진기와 이해문의 의견 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손진기는 ‘말갈은 하나의 민족도 심지어 하나 의 종족도 아닌, 예맥, 숙신, 고아시아 3개 종족의 일부 부락군 및 부 락연맹을 포괄하는 이름’12)이라 하였고 이해문은 삼국사기의 기사검 9) 문안식, 「삼국사기 나제본기의 말갈사료에 관하여」, 󰡔한국고대사연구󰡕 13, 1998.

10) 이흥종, 삼국사기 ‘말갈’기사의 고고학적 접근」, 󰡔한국사학보󰡕, 1998.

11) 이동휘, 삼국사기 말갈의 활동범위와 성격」, 󰡔부대사학󰡕 27, 2003.

12) 손진기, 󰡔동북민족원류󰡕, 동문선, 1992.

(8)

토로 말갈은 ‘백두대간을 골간으로 펼쳐진 산지 일대에서 수렵을 위 주로 삶을 영위해 갔던 사람들’13)로 정의한 연구에 동의했다.14)

김종복은 말갈이 고구려와는 다른 종족계통으로 7세기 전까지 정 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단위로 분산되어 고구려 동북쪽 지 역에서 반농반렵(半農半獵) 생활을 영위하는 종족에 대한 총칭이라 했다. 이는 그 조상으로 알려진 읍루, 숙신, 물길도 마찬가지였고 6세 기 말 7세기 초 말갈은 7부족이 널리 알려졌고 그중 속말말갈과 백 산말갈이 여타 말갈부족보다 고구려 예속도가 높아 군사적으로도 동 원된 것으로 보았다.15)

선석열은 중국사서에 보이는 말갈은 󰡔북제서󰡕563년, 기록상 6세기 중엽부터 처음등장하고 있는 데 반해 󰡔삼국사기󰡕에는 기원 전후시기 부터 나타나고 있는 점을 들면서 두 계통의 사서에서 말갈의 존재 시기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있음을 문제시 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 기사를 대상으로 하여 시기구분 을 하여 분석한 결과 말갈은 고구려가 지배한 모든 종족, 4세기 이후 고구려지배하의 지방의 예맥족을 말갈이라 차별하여 부르는 것으로 보았고 중국은 이 명칭을 받아들여 만주의 동부와 북부에 거주한 여 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16)

서병국은 발해유민사연구에서 발해 유민은 여진족과 민족적 계통 을 달리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진의 조상이 말갈이며 발해 유민과 민 족적 계통이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계 유민이 말갈과 계통을 달리 한 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발해국은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연합으 로 건국되었으나 고구려계의 유민이 고구려의 문화적 우수성을 견지

13) 이해문, 󰡔말갈의 실체연구󰡕, 단국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14) 서영수, 「동아교섭사에서 본 발해의 국제적 위상」, 󰡔문화사학󰡕 21, 2004.

15) 김종복,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북방사논총󰡕 5, 2005.

16) 선석열, 삼국사기 백제,신라 본기에 보이는 말갈 인식」, 󰡔지역과 역사󰡕 19, 2006; 「중국정사의 말갈7부와 삼국사기의 말갈」, 󰡔고구려발해연구󰡕 37, 2010.

(9)

하고 있어 발해국의 국가적 발전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하였다.17) 김진광은 󰡔신당서󰡕와 󰡔신오대사󰡕기록을 언급하면서 발해정권이 처음 건국하였을 때 정식국호가 곧 말갈이었다고 주장한다.18) 또한 왕우량과의 공동논문에서 말갈은 곧 대조영 정권의 국호이고 대조영 무리의 민족칭호(족칭과 국호)라고 명시하였다.19)

김영천은 말갈의 실체에 대해 고구려가 지배하였던 말갈은 소규모 의 부락으로 잔재해 있던 세력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제 나름 의 성장을 이룬 세력집단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중원왕조에 대한 빈 번한 조공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성장기반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때 고구려와 자웅을 겨룰 만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 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고구려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하는 소망은 고구려가 소멸한 이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 다고 갈음했다.20)

강인욱은 말갈문화기층은 폴체문화로 대표되는 읍루문화권에 있 으나 반농반목의 생계경제는 선비문화계통의 유입에서 시작된 것21) 으로 말갈문화의 형성을 설명하였고 구난희는 말갈이라는 호칭은 발 해초기에 과도적으로 사용한 용어로 발해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지 않아 발해라는 국호가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사용된 것22)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박노석은 말갈을 고구려 북쪽에 거주하고 있는 숙신계 주민으로만 해석하였다.23)

17) 서병국, 발해유민사 연구」, 󰡔고구려연구󰡕 25, 2006.

18) 김진광, 「발해의 초기 국호 “말갈”재고」, 󰡔고구려연구󰡕 25, 2006.

19) 박노석,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만주연구󰡕 15, 2011.

20) 김영천, 말갈의 성장과 고구려의 말갈지배」, 󰡔고구려발해연구󰡕 32, 2008.

21) 강인욱, 「말갈문화의 형성과 2∼4세기 읍루, 선비, 부여계문화의 관계, 󰡔고구 려발해연구󰡕 33, 2009.

22) 구난희, 발해, 일본의 교류개시기에 대한 검토-속일본기를 중심으로」, 󰡔고 구려발해연구󰡕35, 2009.

23) 박노석,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 󰡔만주연구󰡕 15, 2011.

(10)

김락기는 만주 동북부의 강줄기를 따라 수십 부로 나뉘어 생활한 집단으로 250여 호 이상의 小部 (1천여명 전후)와 소부 10개 안팎이 그들 중 한 부락의 정치적 영도 아래 느슨하게 결합되어 유사시 공 동보조를 취한 大部(말갈 7부)로 구성된다고 하였다.24)

민성욱은 고조선 붕괴 이후 요서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에 고 구려, 백제, 신라 등이 이어지고 요동, 러시아에 이르는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진계로 나뉘는데 숙신, 삼한, 옥저, 말갈 등이 이 계통에 속한다고 설명했다.25)

권은주는 발해의 주민구성과 관련하여 말갈에 대해 중국학계와 한 국학계의 의견차가 크다는 것을 지적하고 발해사와 말갈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반대로 한국사회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 되었다고 보았다. 말갈7부의 출현을 물길과 더불어 고구려가 주변 여 러 집단을 일곱 개의 지역단위로 구분하여 인식한 것으로 보고 발해 시대 말갈은 고구려 멸망 전후 지역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점차 상실 해가며 다시 재편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대부분 말갈은 발해라는 국 가 테두리 안에 편입되어 발해인이 되었고 이 둘의 최종향방을 보자 면 발해의 말갈지배는 그 시기가 짧아 사회발전이 고르지 못한 세력 간에 각자의 정체성 차이를 극복시키지 못하였고 이것이 발해 멸망 이후 발해유민과 여진으로 구분되어 인식되는 원인이 되며 발해의 말갈지배가 통합력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26)

이춘상은 말갈과 낙랑사이에 백제의 세력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고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을 막지 못한 것으로 볼 때 한반도 북부는 계 속해서 말갈의 실제통제범위인 것으로 보았다.27)

24) 김락기, 「6∼7세기 말갈 諸部의 내부 구성과 거주지」, 󰡔고구려발해연구󰡕 36, 2010.

25) 민성욱, 󰡔한국사에서 말갈인식에 관한 연구󰡕, UBE 박사학위논문, 2011.

26) 권은주, 말갈7부의 실체와 발해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 35, 2009.

27) 이춘상, 「<三國史記> 靺鞨渤海史料相 問題硏究」. Journal of Tonghua Normal University Vol32. 2011.11.

(11)

임상선은 수당시기 말갈족은 발해시기에는 발해에 참여한 말갈(속 말말갈등)과 발해에 속하지 않는 흑수말갈로 구분, 요나라때에는 흑 수말갈을 여진으로하고 요적에 올라가 있는 여진(숙여진)과 요적에 올라가 있지 않은 여진(생여진)구별, 발해인은 여진과 구분될 뿐 아 니라 대체로 漢人과 유사한 대우를 받음. 말갈 – 발해 – 금(여진) - 청(만주족)이 종속적 연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중국 정사 등의 기 록에서 합당한 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28)

위국충⋅조려위는 발해집단을 말갈로 지칭하고 대조영 건국당시 칭 한 국호로 정의하였다.29) 양군은 삼국사기 모든 자료 통합 분석과 중 국 자료 분석 및 일본 사료 분석 결과 말갈은 예인(東濊)이라 했다.30) 장전초⋅주홍은 말갈인은 체질적으로 고대 패가이족의 영향을 많 이 받았으며 사보가 말갈인은 고대 시베리아 유형에 가깝고 트라이 즈 말갈인은 고대 몽고고원 유형에 가깝다고 했다. 트라이즈 말갈인 은 중세기 시대 패가이 고대 군족과 돌궐인과 인종상 유사하며 그시 기에 페가이호(러시아)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영향을 받음을 반증하 는 것으로 고고학 연구결과 흑룡강 유역에 돌궐에서 온 유물이 많이 발견(돌궐문화의 침투)되어 말갈인의 최종 계승성문제에서 현대 페 가이족(러시아) 민족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31)

앞서 언급한 연구를 바탕으로 선행연구자들의 말갈에 대한 인식을 간략히 하고자 하였으나 많은 연구물처럼 그 결론도 다양하여 획일 화 하여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말갈의 실체에 대한 인식에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중국 사서 인 󰡔북제서󰡕로 언급하고 있고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

28) 임상선, 북방지역 종족의 계승관계 검토- 말갈, 여진 만주족을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 50, 2014.

29) 위국충⋅조려위, 발해국호초 “말갈”재고」, 󰡔모단강사범학원학보󰡕, 2008.1기.

30) 楊軍, 조선사서 󰡔삼국사기󰡕소재 “말갈”고, 󰡔중국변강사지연구󰡕, 2008.12.

31) 張全超,⋅朱泓, 「말갈인종고」, 󰡔사학집간󰡕, 2010.1.

(12)

지는 계통설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말갈에 대한 이러 한 인식의 바탕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말갈에 대해 최초로 관심 을 보였다고32) 하는 점과 정약용이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한반도 내의 말갈은 예계(穢系)인 위말갈(僞靺鞨)이고 만주일대의 말갈이 진 말갈(眞靺鞨)이다’라고 하는 주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갈의 실체가 한반도 내에서건 만주지역에서건 󰡔삼국사기󰡕초기기 록의 신빙성 문제를 문제 삼아 󰡔북제서󰡕기록(6세기 이후)의 것만은 인정하는 방법은 이미 있는 자료를 누락하여 제대로 된 실체 파악을 더욱 어렵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때문에 본고에서는 말갈의 활동 시기에서 가장 이른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에 대한 말갈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말갈의 성향에 대해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Ⅲ . 중국과 한국의 말갈 기록

1. 중국문헌자료

말갈관련 기록이 가장 처음 나온다고 알려진 󰡔北齊書󰡕에는 ‘말갈 전’이 입전된 것이 아니라 본문 중에 말갈, 거란 등이 사신을 보냈다 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실제로 말갈관련 기록이 자세히 나오는 것은

󰡔隋書󰡕이다. 발해 건국 바로 전에 쓰여져 아마도 말갈관련 기록을 같 은 시기에 쓰여진 것일 뿐만 아니라 말갈이 그 건국기반세력인 발해 와 교류관계가 빈번했던 수나라 역사이므로 ‘말갈’관련 자료도 가장 근접하게 서술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며 그 사료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舊唐書󰡕와 󰡔新唐書󰡕 역시 󰡔隋書󰡕보다는 후대에 쓰여졌 으나 교류관계가 빈번한 당의 역사서이며 발해, 말갈전을 입전하고 32) 김택균,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고구려연구󰡕 3, 1997.

(13)

있어 눈여겨 보아야 할 사료로 꼽힌다. 다음은 ‘말갈’관련 기록이 언 급된 중국사서를 정리한 것이며 이 중에서 본고에서는 북제서, 수서, 신당서, 구당서에 기록된 말갈관련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서명 말갈관련기록 집필시기

후한서[後漢書] 읍루 남북조[420∼589]

삼국지[三國志] 읍루,예 진(晉)

진서[晉書] 숙신 당(644년)

양서[梁書] 물길 당(629년)

위서[魏書] 물길 북제(551년)

북제서[北齊書] 말갈(본문중)이 사신을 보냄 당(636년)

수서[隋書] 말갈 /동이열전 당(636년)

북사[北史] 물길

신당서[新唐書] 발해, 흑수말갈 / 북적열전 (1044∼1060)

구오대사[舊五代史] 발해말갈 (924)

신오대사[新五代史] 흑수말갈  (1053)

송사[宋史] 발해 (1345)

금사[金史] 흑수말갈 (1344)

구당서[舊唐書] 말갈, 발해말갈, 흑수말갈/북적열전 후진(後晉)1060

1) 󰡔북제서󰡕

󰡔북제서󰡕는 중국 당나라 때 이백약이 황제의 명에 따라 지은 북제 (北齊)의 역사책으로 636년에 간행된 북제서 권 7 에 말갈에 대한 기 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이 기록에서 실위, 고막해, 말갈, 거란과 교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실위, 고막해, 말갈, 거란이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33) 33) 󰡔북제서󰡕, 권7, 「帝紀」, 제7, 무성제 河淸 2년 “時歲, 室韋, 庫莫奚, 靺鞨,

丹 竝使朝貢”.

(14)

이후에도 매년 고려, 말갈, 신라 등이 조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나 신라와 대등하게 교류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다 만, 말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기술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교류 에 관한 사항만 적혀 있을 뿐이어서 당시 고려, 신라와 같이 말갈의 존재를 인식하고 교류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2) 󰡔구당서󰡕 「북적열전」, 말갈34)

󰡔구당서󰡕는 후진의 유구 등이 편찬한 당왕조(唐 618∼907년)의 정 사로써 10세기(945년)에 편찬되었다.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 부족 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 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으나 당대 원사료의 문 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후 송대 (宋代)에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 는데 󰡔구당서󰡕에 언급된 말갈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말갈의 위치 와 습속 등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북제서󰡕에서는 기술되지 않 은 숙신의 땅에 말갈이 있고 후에 물길로 칭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 온다. 또한 그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말갈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 설명 하고 있다.

말갈은 곧 숙신의 땅이니 후위 때에는 이를 물길이라 하였다. 경사(京師) 에서 동북으로 6천여리 밖에 있다.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하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와 인접해 있다. 그 나라 는 모두 수십부나 되는데 각각 추수(酋帥)가 있어 더러는 고(구)려에 부용 되어 있고, 더러는 돌궐에 신속되어 있다. 그런데 흑수말갈이 가장 북방에 있으면서 제일 강성하여 늘 그 용맹을 과시하므로 항상 이웃 부족의 걱정 거리가 되었다.

3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해석 참고.

(15)

3)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발해

󰡔신당서󰡕는 1044∼1060년까지 송의 인종이 구양수⋅송기 등에게 고 쳐 편찬하게 하였고 재상 증공량이 총재한 당왕조의 역사서이다. 󰡔신당 서󰡕에는 북적열전에 흑수말갈과 발해를, 동이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입전하였다. ‘말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흑수말갈 의 첫 기사에는 “흑수말갈은 숙신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하며 후위때에는 물길로도 불리었다. 경사에서 동북으로 6천리 밖에 있는 데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돌궐에 닿으며 남쪽은 고(구)려와, 북족은 실위와 접해있다”라고 적고 있다.35) 또한 발해조에는 “발해 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라 고 하여 숙신-읍루-물길-말갈의 연계성과 속말말갈인 발해가 고구려 에 부속되어 있다고 할 뿐이다.

4) 󰡔수서󰡕 「동이열전」 말갈

󰡔수서󰡕 「동이열전」에는 말갈을 독립된 챕터로 서술하고 있다. 여 기에서의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다 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추장(酋長)이라는 표현으로 말갈사회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36) 추장(酋長, chief)의 사전적 의미로는 “①만 족(蠻族)들이 사는 마을의 우두머리. 추령(酋領). 추수(酋帥) ②씨족 사회에 있어 생활집단을 통솔하며 대표하는 우두머리”이다. ‘미개한 종족민 사회에서의 종족, 부족의 통솔자’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어 중 국이 말갈에 폄하하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서술하게 하는 근거가 되

35) 원문인용: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黑水靺鞨居肅愼地, 亦曰挹婁, 元魏時曰勿吉. 直京師東北六千里, 東瀕海, 西屬 突厥, 南高麗, 北室韋.

36) 󰡔위서󰡕 동이열전」_말갈조에는 바로 뒤에 “우두머리를 대막불만돌(大莫弗 瞞咄)이라 하는데 동이 가운데에서 강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6)

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삼국사기󰡕에서도 고구 려, 백제, 신라의 우두머리는 왕으로 지칭하는 반면 말갈은 추장으로 표현하고 있어 꼭 중화주의에 입각한 비칭, 범칭의 표현이라고 일반 화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판단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일 되어 있지 않다. 모두 7종이 있다. 그 첫째는 속말부로서 고[구]려와 인접하 여 있는데, 정병이 수천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늘 고[구]려를 침입하였 다. 둘째는 백돌부로서 속말[부]의 북쪽에 있으며, 정병이 7천이다. 세째는 안차골부 로서 백돌[부]의 동북쪽에 있다. 네째는 불녈 부로서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로서 拂 [部]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 부로서 안차골[부]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백산부로서 속말[부]의 동남 쪽에 있다. [이들은] 정병이 모두 3천에 불과한데, 흑수부가 가장 굳세고 건 장하였다. [부]에서부터 동쪽지방은 화살이 다 돌촉인데, 곧 옛날 숙신 씨의 땅이기 때문이다.37)

2. 국내문헌자료

1) 『삼국사기』

말갈에 대한 인식은 발해의 건국세력에 대한 설명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45년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을 중심으로 편찬된 고려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단지 발해의 건국세력이라는 설명 이외에

37) 원문참고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靺鞨, 在高麗之北, 邑落俱有酋長, 不相總一. 凡有七種: 其 一號粟末部, 粟末  原作 「栗未」, 據册府九五六⋅新唐書 黑水渤海靺鞨傳⋅通鑑 武德四年胡注改.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其二曰伯咄部, 在粟末 之北, 勝兵 七千. 其三曰安車骨部, 在伯咄東北. 其四曰拂涅部, 在伯咄東. 其五曰號室部, 在拂涅東. 其六曰黑水部, 在安車骨西北. 其七曰白山部, 在粟末東南. 勝兵並不 過三千, 而黑水部尤爲勁健. 自拂涅以東, 矢皆石鏃, 卽古之肅愼氏也.

(17)

기원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말갈에 대한 80여회의 사건이 언급되어 있 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관련기록은 󰡔北齊書󰡕, 󰡔隋書󰡕등과 달 리 이른바 ‘말갈의 일원적 계통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중국사서에 보이는 최초의 기록인 말갈은

󰡔北齊書󰡕하청2(563)년, 즉 기록상으로 6세기 중엽부터인데 이는 󰡔삼국 사기󰡕의 말갈기사가 기원 전후시기부터 나타나고 있어 두 계통의 사 서에서 말갈의 존재 시기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문제시 되어 왔다.38) 중국정사에서 말갈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北齊書󰡕 (563)이고 말갈 별전은 󰡔隋書󰡕에 이르러서인데 한국에서 이러한 말갈 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보인 것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었다.39) 예컨 대, 1859년 윤정기가 엮어 간행한 조선후기의 지리, 역사서인 󰡔동환 록󰡕40)에서도 “김부식의 삼국사에 서한(西漢)때부터 말갈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말갈의 지명이 (사료에는) 위(魏)에서부터 시작되었 으나 그 이전 한(西漢)시대에 이미 ‘말갈’명칭을 사용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말갈의 내용을 검 토하는 것은 당시 말갈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할 것으로 생 각되어 다음 장, ‘󰡔삼국사기󰡕 기록을 중심으로 본 말갈에 대한 견해’

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삼국유사󰡕

신라나 그 이후의 고려가 이웃 나라인 발해에 대해 남긴 기록이나 인식은 발해사를 이해하는 데 다른 어느 자료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41) 고려시대 기록 중 발해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

38) 선석열, 「삼국사기 백제, 신라 본기에 보이는 말갈 인식」, 󰡔지식과 역사󰡕 19, 2006.

39) 金澤均,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고구려연구󰡕 3, 1997.

40) 靺鞨之名始出於元魏之末而前 漢之時靺鞨已橫行我邦有是理乎 원문참고: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18)

으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에서 󰡔삼국유사󰡕는 발해와 삼국과의 분쟁기록이 많은 󰡔삼국사기󰡕와 는 달리, 발해의 건국주체인 말갈과 말갈의 추장인 대조영, 건국 시 기 및 오경 십오부 육십이주로 구분되는 행정구역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건국당시 중심위치에 대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어 말갈에 대 한 다양한 면을 알 수 있게 하는 사료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통 해 대외관계사를 정리한 많은 논문과는 달리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말갈, 발해에 대한 기록에 관심을 갖은 논문은 많지 않다. 대표적으 로 임상선은 󰡔삼국유사󰡕 ‘말갈발해조’에 보이는 인용서와 그 사용빈 도에 대한 정리를 했는데 이를 살펴보면, 󰡔통전(通典)󰡕1회, 󰡔삼국사 (三國史)󰡕2회, 󰡔신라고기(新羅古記)󰡕1회, 󰡔(동파)지장도(東坡指掌圖)󰡕4 회, 󰡔가탐군국지(賈耽)郡國志󰡕1회, 󰡔지리지(地理志)󰡕1회, 󰡔동명기(東明 記)󰡕1회, 󰡔후위서(後魏書)󰡕1회이다. 여기에서 그는 󰡔삼국유사󰡕에서 전 거를 밝히지 않은 내용의 상당부분도 󰡔신당서󰡕 혹은 󰡔구당서󰡕의 발 해전을 참조하고 있으며 일연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신당 서󰡕 발해전과 거의 동일하고, 󰡔신당서󰡕의 내용을 논지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다수의 사서를 참고하며, 전거를 밝힌 것은 발해에 대한 내용이 저자일연의 개인 의 견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2)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권은 서 로 비슷한 문화권을 형성해왔다. 한국에서는 儒⋅彿⋅道 三敎가 三 國時代에 수입되었기 때문에 순수 한국문화의 原形을 지니고 있던 시대는 삼국시대 이전이라 할 수 있다.43)

󰡔삼국유사󰡕의 말갈발해전을 내용상 ①건국주체, ②건국시기, ③건 국장소, ④대외관계 및 위치 등으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임상선, 삼국유사 말갈발해조의 지장도」, 󰡔동북아역사논총󰡕 18호.

42) 임상선, 삼국유사 말갈발해조의 지장도」, 󰡔동북아역사논총󰡕 18호, 221쪽.

43) 세계역사문화연구소 편, 단군인식, 2006,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출판부.

(19)

해당 구절 비교사료

- 말갈은 한편으로는 물길이라 한다 -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 발해는 바로 말갈의 별종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 로 같지 않을 뿐이다.

-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 <지장도(指掌圖)>에 이르기를 “읍루와 물길은 다 숙신(肅愼) 이다했다.

󰡔통전󰡕

󰡔후위서󰡕

󰡔지장도󰡕

- 선천 연간에 (현종의 임자년) 국호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 개원 7년에 조영이 죽자, 그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 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의 큰 나라가 되었다.

- “의봉 3, 고종 무인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을 모 아 북으로 태백산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 개원 20 년 경에 당의 명황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 32, 현종 갑술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침범하자 현종은 이를 쳤다.고 했다.

- 고구려의 추장 조영의 성은 대씨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했다.

-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 가탐의 <군국지>에 이르기를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

추성 등 사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 신라 천정군에서 <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에 천정군이 있었으 니 (지금의 용주이다) 추성부까지는 도합 39역이 있다고 하였다.

󰡔三國史󰡕

󰡔新羅古記󰡕

-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뜨 렸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

-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 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 가 된 것이다).

- 신라 사람들은 이르기를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 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로움이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 <동명기(東明記)>에 이르기를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에 연접되어 있다.(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

- 신라의 제6대 지마왕) 14년에 (乙丑(을축)) 말갈의 군사가 북 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의 성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 지나갔다고 했다.

-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지장도(指

󰡔三國史󰡕

(20)

3) 󰡔고려사󰡕

민성욱은 󰡔고려사󰡕에서 말갈기록을 살펴보면 말갈을 어떻게 인식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말갈은 점 차 사라지고 여진이 그 뒤를 이어 만주지역에서 활동을 한다고 하였 다. 또한 그들은 ‘金’과 ‘大淸’이라는 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역사의 주무대로 나서기 때문에 말갈이 언제 어떻게 여진으로 흡수 및 통합 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45) 고려사 기록을 보면 태조 때 부터 말갈과 여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서로 혼재되어 오다 가 1066년 거란이 국호를 ‘대요’로 고치고 1114년 생여진의 완안아골 타가 반란을 일으켜 1115년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던 이후 여진에 대한 기록만 나온다. 이 내용은 거란족이 강성해져 요제 국을 건설하자 말갈의 일부가 거란에 흡수되었고 결정적으로 여진이 강성해져 금제국을 건설하자 대다수의 말갈이 여진에 흡수되었기 때

44) 󰡔삼국유사󰡕 기이_태공춘추공」 䴡靺鞨 二國兵來圍之相擊.

45) 민성욱, 󰡔한국사에서 말갈 인식에 관한 연구󰡕, UBE 박사학위 논문, 2011.12 57쪽.

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 했다.

- <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 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 沃沮)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3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또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 기이_태공춘추공 : 당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미 돌 아간 뒤에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잔적을 쫓아 잡게하고 한산성에 주둔케 하니, 고구려 말갈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하여 서로 싸웠다.44)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는데 511 일부터 622(661)에 이르러 우리 군사가 매우 위태로웠다.

(21)

문에 더 이상 말갈의 기록이 안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말 갈이 여진으로 대체되는 시점과 계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번호 연도 내용46)

1 0921-02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추장 고자라(高子羅)170명을 데리 고 귀화하였다. 임신일에 달고은 171명이 신라를 침공하러 가는 도중에 등주(登州-강원도 안변)를 통과하였다. 고려장군 견권(堅權)이 이를 가로막아 크게 격파하여 말 한 필도 돌아가 지 못하게 하였다.

2 0925-09 발해 장군 신덕 등 귀화, 원래 속말말갈족이다. 거란과 대대로 적대적, 거란이 결국 발해 멸망, 발해국사람이 많이 귀화.

3 1017-07 여진말갈의 목사가 부락민 데리고 옴. 그들에게 벼슬과 의복 줌 4 1017-08 흑수말갈의 아리불 등 귀순, 이들을 강남 주, 현 등에 배치 5 1019-09 중양절이라 송나라, 탐라, 흑수말갈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을 위한

연회 배설

6 1020-01 흑수말갈의 24명이 토산물 바침 7 1020-05 흑수말갈의 70명이 토산물 바침

8 1021-01 흑수말갈의 추장이 말과 궁시(弓矢)를 바쳤다.

9 1021-09 흑수말갈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10 1022-05 흑수말갈 30여명이 내조하였다.

11 1023-01 흑수말갈 80명이 말과 토산물을 바침, 그들에게 베와 비단을 줌 12 1023-04 여진 말갈 70명이 토산물을 바침

13 1024-04 흑수말갈이 토산물을 바침

14 1027-02 흑수말갈 장군이 와서 말과 무기를 바침

15 1117-01

압롱강 일대는 신라의 옛 지역, 쇠퇴로 인해 요나라 침략당해.

근래 요와 금의 분쟁으로 두 성의 종속문제를 염려하였더니 말 갈족이 성을 바치겠다고 한 것은 하늘의 의사를 좇음.

16 열전_윤관

여진은 본시 말갈족의 유종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고구려 에 병탐되었다가 후에 산림속과 천택 가에 부락을 형성하고 전 체가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그 중, 정주와 삭주 지방 근처에 사 는 자들이 간혹 고려 측에 귀순하여 복종하다가도 때로는 배반 하였다.

17 _명주

명주는 원래 예국인데태종왕 5년에 말갈지역과 접경되어 있 다고 하여 경을 없애고 주로 만들어서 도독을 두어 이곳을 지키 게 하였음

(22)

흑수말갈의 잦은 등장은 말갈을 곧 흑수말갈로 인식하고 있음이 다. 흑수말갈을 대개 흑룡강성 주변의 말갈 잔여세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관점이지만 여기에 쓰인 ‘흑수(黑水)’의 표현 이 검을 물이 아닌, 깊은 물 혹은 깨끗한 물의 의미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말에서 그 깊이가 깊고 깨끗하여 속을 알 수 없는 물을 빗대어 ‘검푸르다’라고 일컫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오행의 사상을 대입해 볼 때 흑(黑)은 곧 북방의 색이다. 이는 강희자전의 맨 첫머리 해석에서도 볼 수 있는 데, 흑(黑)에 대한 설명을 천문- 북방의 색으로 하고 있다. ‘말갈’의 위치는 사서에서 볼 때 모든 국가의 북쪽이다. 백제의 북부국경 인 접, 신라의 북쪽 경계 침입 등 북방의 색을 나타내는 흑, 또한 흑은 水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북쪽에 위치한 ‘말갈’이 후에 왜 ‘흑수말갈’로 불리어 지는지 간과해서는 안될 사항이라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에게 ‘흑수’의 표현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오랜 기간 동안 압록강이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경계의 역할을 했다는 것 이다. 압록강의 위치를 비롯한 압록강이 가지는 한국역사속의 중요 성에서 “압록이 말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그간 고려되지 않았 다. 󰡔통전󰡕 기록에는 “마자수는 일명 압록강으로 그 발원지는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물 색깔이 오리 머리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다”라고 하여 우리 역사의 중요 키워드인 압록강와 백산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말갈이 존재함에도 대부분의 연구에서 말갈을 단순히 발해의 피지배층 집단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에서 탈피 하지 못하는 것은 말갈에 대한 인식의 획일화에서 온 문제점으로 보 여 지며 이는 말갈에 대한 다양한, 다방면의 연구와 해석이 필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46) 원문참고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3)

4) 󰡔조선왕조실록󰡕47)

󰡔조선왕조실록󰡕 중 말갈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조선의 북쪽경계에 대한 부분과 말갈과 한민족이 일정한 친연성을 가졌다는 부분이다. 조선의 북쪽 경계 및 민족사의 북쪽 변방을 말하는데 있어 서 조선의 북쪽 경계가 말갈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 있던 말갈, 중국사서에서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말갈, 고려시대로 넘어와서도 북쪽에는 항상 말갈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 으며 이는 그 이전시대부터 말갈을 지속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 두 번째 조선후기 단군조선을 인정하면서 한민족과 일정한 친연성을 가져 왔던 말갈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후 기까지 말갈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당시 말갈에 대한 조선후기 지식 인들, 특히 실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의 상당수가 말갈에 대해 인식하 고 있음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5) 󰡔제왕운기󰡕

1287년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현존 사서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발 해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하였을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발해가 고려에 귀부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데 925년 발해 유민의 고려 내투 에 대한 기사가 󰡔제왕운기󰡕에 나와 있다. 이승휴가 발해를 한국사 체 계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서 우리 학계에서는 당시의 대내외 정세 하에서 단군을 위시한 민족의식 고양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8)

󰡔제왕운기󰡕 내 「발해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7) 원문참고: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48) 임상선, 「제왕운기에 보이는 북방왕조인식」, 󰡔사학연구󰡕 103, 2011.

(24)

전 고구려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녘성(지금의 남책성이다. 󰡔오대사󰡕

에 적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갈인데 영주 동쪽에 있었다”라고 하였다)에 씩 씩하게 근거 삼아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신라가 고구려를 멸한 후 17 년이다) 해에 개국하여 이름 지어 발해로 일컬었다. 우리 태조 8년 을유(후 당 장종 동광 원년이다)에 이르러 온 나라 손을 잡고 서울로 내조했네. 이 런 기미 먼저 알아 귀부한 이 뉘시었다. 예부경과 사정경(예경부인 대화균, 사정경 좌우장군 대리저, 장군인 신덕 대덕 지원 등 6백 호가 내부하였다) 이 그분이라.49)

6) 󰡔아방강역고󰡕(정약용 저, 장지연 다시 씀)

말갈의 역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의 역사로 편입한 시기를 보 통 조선시대 실학자에 의해서라는 의견과는 달리 조선 순조 때 실학 자 정약용이 저술한 「강역고」(여유당전서)에서는 진(晉, 265∼316) 이 전의 말갈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곧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진 말갈관련 기록 중 36건에 해당하는 말갈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며 때문에 당시 기록된 말갈은 거짓말갈이라는 ‘위말갈설’로 명명 하여 주장한다.50) 이러한 정약용의 주장은 현재까지도 많은 학자들

49) 규장각 소장 발해사료 원문 DB(www.krpia.co.kr) 󰡔제왕운기󰡕,

前麗舊將大祚榮, 得據太白山南城, <今南柵城也. 五代史曰, 渤海本粟靺鞨, 營州東.> 於周則天元甲申, <羅之滅麗後十七年也.> 開國乃以渤海名, 至我太 祖八乙酉, <後唐莊宗同光元年也.> 擧國相率朝王京, 誰能知變先歸附, 禮部卿 與司政卿, <禮部卿大和鈞司政卿左右將軍大理著將軍申德大德志元等六百戶來 附>. 歷年二百四十二, 其間幾君能守成.

50) 정약용(이민수옮김), 󰡔아방강역고󰡕, 범우사, 1995.

말갈이라는 이름은 원위(元魏) 말년에 생겼으므로 진(晉)나라 이전에는 말갈 이 없었다.(231쪽) /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서한 때부터 말갈의 이름이 있 었고 또 신라와 백제 땅이 말갈 영토와 이어져 있다고 했다. 이는 소홀하고 거칠고 허탄하고 망녕되어 이름과 사실이 전혀 틀리는데 우리나라 학자들 은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역사로 높이 받들고 있다.(233쪽) / 역사를 쓰는데 허황하고 거칠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말갈이라는 이름은 원위(元魏) 말년에 비로소 나왔는데 전한 때에 말갈이 이미 우리 나라에 버젓이 있다고 했으니 이러한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흉노가 周나라를 침범하고 돌궐 이 漢 나라를 침범하고 몽고가 唐나라를 침범했다는 격이니 천하에 이러한

(25)

에게 영향을 미쳐 󰡔삼국사기󰡕기록을 불신하고 인용조차 하지 않는 폐단을 낳기도 한다. 더욱이 중국학자의 󰡔삼국사기󰡕기록 부정의 근 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51) 그러나 이러한 정약용의 생각은 단지 스 스로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우기는 것일 뿐이어서 이에 대한 검토가 신중하게 필요한 사항이라 생각된다. 그는 또한 말갈 백산에서 시작되는 압록에 대해서도 특정 지역에 비정하는 등, 조선의 강역을 한사군에 맞추어서 서술하는 오 류를 범하기도 하였다.52)

Ⅳ .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말갈에 대한 견해

한규철은 󰡔삼국사기󰡕의 말갈이란, 특정종족을 염두에 둔 것이 아 니라 백제와 신라, 고구려인의 변방집단으로서 중앙조정의 군사, 행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漢, 때에는 읍루만이 있고 말갈은 있지 않았 는데 말갈이라고 쓴 것이 어찌 그다지도 빨랐던가?∼중국의 역사는 모두 당 시 사신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틀린 사실이 없는 데 김부식의 역사 책은 1000년 전의 일을 뒤에 기록한 것이니 그 거칠고 틀 린 것이 괴이할 것 없다.∼동성왕 4년에 읍루를 물길이라고 했으나 여기서 말갈이라고 한 것은 곧 가짜 말갈이요 속말 냇가의 진짜 말갈은 아니니 보 는 사람은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236쪽) 참고.

51) 楊軍, 조선사서 󰡔삼국사기󰡕소재 “말갈”고, 중국변강사지연구, 2008.12 조선학자들의 연구결과 말갈은 숙신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의 말 갈은 동옥저 혹은 동예고 발해시대 말갈과는 다르다고 했는데 중국학자들 은 대부분 삼국사기 기록이 틀리다고 생각한다. ‘말갈’은 다른 시기, 단일민 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다민족을 말하는 범칭 및 비칭으로 사용하는 것 으로 전한시기에는 읍루를, 위(삼국시대)에는 한예나 동예를 말하고 수당시 기에는 철령에서 함관령 사이에 옥저를 말한다고 정약용의 「말갈고」에서 밝히고 있다. 결론은 삼국사기 모든 자료 통합 분석과 중국자료 분석 및 일 본사료 분석결과 말갈은 예인(東濊)이다.

52) 정약용, 󰡔대동수경󰡕 「淥水」 그러므로 여러 문헌에 압록이라고 한 것은 다 의주 하류를 두고 말한 것이다.

(26)

정조직에 정식으로 편제되지 않고 반독립적 행동을 하였던 집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53) 이렇게 말갈을 독립된 하나의 정 치체 혹은 집단으로 보지 않고 고구려의 귀속 혹은 변방 집단으로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다음의 표에서 확 인 할 수 있듯이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의 기록에서부터 말갈 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고 921년 「신라본기」의 마지막 기록까지 약 1000여년간 80여회차에 걸쳐 지속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교류 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간의 말갈과 발해의 연구에서는 주로 󰡔北 齊書󰡕, 󰡔隋書󰡕, 󰡔新唐書󰡕, 󰡔舊唐書󰡕 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 향이 많았다. 그러나 말갈의 등장시기를 가장 이르게 보고 말갈에 대 한 언급의 빈도수 역시 󰡔삼국사기󰡕를 능가하는 사서는 찾아 보기 힘 들다. 그러므로 말갈연구에 있어서 󰡔삼국사기󰡕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삼국사기󰡕에 기재된 말갈기록을 꼼꼼히 검토할 필요 가 있다고 판단되어 이번 장에서는 말갈관련 기록 중에서 특히 󰡔삼국 사기󰡕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말갈의 국가적 성향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53) 한규철, 「삼국사기의 말갈 문제」, 󰡔인문학논총󰡕 제31집, 2013.

󰡔삼국사기󰡕 말갈기록54)

번호 연도 삼국사기 내 용

1 BC37 고구려본기 말갈 부락과 접경,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 려워, 말갈이 복종

2 BC17-1 백제본기 말갈이 북부국경과 인접, 용맹, 거짓말잘함 3 BC16-9 백제본기 말갈이 북쪽 국경 침범

4 BC11-2 백제본기 말갈군3천명이 위례성 포위, 대부현까지 추격, 말갈 병 5백여명 사상자

5 BC1-10 백제본기 말갈이 습격, 칠중하에서 싸움, 추장 소모를 마한에 보냄

6 BC9-10 백제본기 말갈이 북부국경 침략, 곤미천에서 싸움 7 BC8-4 백제본기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책 습격하게 함

참조

관련 문서

정기후견사무보고서, 후견감독보고서 법원 제출 감독인 정기후견사무보고서, 후견감독보고서 검토 법원 미진한 내역(첨부서류 등) 에

되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재결례를 포함한 사례를 보건데 국가 의 과세권이라는 중요한 가치에 힘입어 일부 절차의 누락에도 불구하고 해당 과세처분은 여전히

기업소모성자재 또는

[r]

If Korean law asks all kinds of corporation to mandatorily adopt the cumulative voting technique for the election of directors, the stability of

If Korean law asks all kinds of corporation to mandatorily adopt the cumulative voting technique for the election of directors, the stability of

하지만 현재 발의된 상법 개정안의 내 용을 보면 기존의 주주대표소송에서 원고의 자격을 모회사의 주주로 확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회사에 대한 외부 감독권을

☉ 조립 생산 :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부분적으로 생산하여 준비하고 있으나, 고객의 제품에 대한 요구가 다양하여 주문을 받을 경우 제품의 이 부분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