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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삶에의 의지와 고통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도덕의 형이상학으로,인간의 행위와 고통에 대해 탐구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권은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인데,제목은 <의 지로서의 세계 제2고찰:자기 인식에 도달한 경우 삶에의 의지의 긍정과 부정>

이다.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논의하 고 있다.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왜 고통스러운지를 인식해야 한다.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삶에의 의지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이 다.삶에의 의지에 지배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쇼펜하 우어는 이 부분을 이론철학과는 다른 실천철학이라고 부르는데,이러한 실천철학 이 자신의 철학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쇼펜하우어는 “만약 우리의 삶이 무한하고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왜 이 세계 가 존재하고 이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169)라고 말한다.생명체들은 도처에서 고통을 겪고 죽어나가고 있다.왜 그런 것일까?동물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조용히 죽어간다.그런데 인간만이 이를 알고 “도대체 왜 고통과 죽음이 있는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진다.170)이 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른다.그의 윤리학은 이처럼 인간이 숙명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해결하 기 위한 것이다.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삶의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풀기위해 인간 의 삶에 대해 탐구한다.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삶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 하고 있다.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의욕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라고 본다.우리의 삶은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Wille)라는

169)W II,187-188쪽.

170)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은 우리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알게 될 때 생겨난다.W II,186쪽 참조.

말과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라는 말이 같은 표현이라고 보고,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에 지배받는 모든 생명체의 삶이 전적으로 고통일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그는 의지의 본질을 끝없는 ‘노 력’(Streben)으로 규정한다.그런데 모든 천체에 중력이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우리의 삶은 최종적인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노력이 계속된다.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쇼펜하우어가 식물보다 동물이,동물보다 인간이 더욱 고통스럽다고 본다는 점이다.그 이유는 지적 능력이 발달될수록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식물에게는 아직 감수성이 없으므로 고통이 없지만, 최하등 동물에서는 아주 미약한 정도이긴 하지만 감수성과 고통이 있다.곤충에 게는 아직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지만,지능이 발달한 인간에 이르러 고통이 최고도에 달하게 된다.특히 인간의 경우는 보다 지적일수록 고통이 커지 는데,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지나친 즐거움이나 격렬한 고통은 언제나 정신이 매 우 활발한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격렬한 고통 은 미래에 대한 예상을 통해 생겨난다.지나친 기쁨과 고통은 언제나 사유를 통 한 오류와 망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171)왜냐하면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미리 예상되는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망상에서 생기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러한 망 상은 나중에 실체가 밝혀지게 되므로 그 망상이 사라지게 되면 망상이 안겨주었 던 기쁨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대가로 치르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의 현존은 고통일 뿐만 아니라,지속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즉 인간의 본질은 고통과 죽음이다.“인간 개체의 본래적인 현존은 현재에만 있을 뿐이고,현재가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과거로 도망쳐가는 것은 죽 음 속으로 끊임없이 넘어가는 것이고 끊임없이 죽어가는 것이다.”172)따라서 “우 리의 신체의 삶은 죽음이 지속적으로 저지되고 있을 뿐이며,계속해서 연기되고 있는 죽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173)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손아귀

171)WⅠ,397쪽 참조.

172)W I,389쪽.

173)W I,390쪽.

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언젠가 죽을지 알 면서도 될 수 있는 한 삶을 계속하려 한다.

모든 존재에게 욕구의 궁극적인 만족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곧바로 다시 지루함이 생겨나고 다시 새로운 욕구의 대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우리의 삶은 ‘고뇌’(Schmerz)와 ‘지루함’(Langeweile)사이에 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할 뿐이다.이처럼 우리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과 지루함에 시달리며 일평생 걱정하며 살아간다.그런데 생존이 어느 정도 유지되 면,그 다음엔 종족 번식의 욕구가 생겨난다.그러나 생존과 종족유지와 같은 모 든 어려움을 해결한다 해도,인간의 길의 끝에는 결국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이 처럼 우리의 삶은 생존을 둘러싼 그리고 결국 질 수밖에 없는 끊임없는 투쟁인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삶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죽음에서 해방될 수도 없다.쇼 펜하우어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고뇌를 추방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고뇌의 형태를 바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이러한 고뇌의 형태는 원래 부족과 고난,삶을 유지하기 위한 걱정이 다.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이러한 형태를 한 고통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면,고통은 연령이나 사정에 따라 교대로,수많은 다른 모습을 취하며 성욕,열정 적인 사랑,질투,부러움,증오,불안,명예욕,금전욕,질병 등등으로 나타난다.고 통이 결국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없게 되면 싫증과 지루함이라는 슬픈 회색 옷을 입고 나타나는데,그러면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마침내 이러한 것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면 이전의 여러 고통들 중의 하나 에 다시 빠져,괴로운 춤을 처음부터 다시 추게 될 것이다.174)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행복은 불가능하다.그에 따르면 “모든 충족 또는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negativ) 것에 불과하고,결코 ‘적극적인’(positiv)것은 아니다.”175)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어떤 부족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 다.어떤 소망,즉 결핍이 모든 즐거움에 선행하는 조건인데,욕구가 충족되면서

174)W I,394쪽.

175)W I,399쪽.

소망과 함께 즐거움도 끝나게 된다.그 때문에 충족이나 행복은 결코 고통이나

한 경우 의지의 부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