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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담이 변화가 많은 지역: 위미리의 사례

위미리는 제주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한남리, 동쪽으로 남원리, 서쪽으로 신례리, 남쪽으로 바다와 인접해 있다. 위미리는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 하는 9개의 법정리 중 한 곳으로 행정리는 위미1리, 위미2리, 위미3리로 나누어 져 있다. 위미1리와 위미2리는 위미교회를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 고, 위미3리는 남원리와 접해 있다. 위미1리에는 5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해안 가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서성동, 대화1동과 2동, 명륜동이 있고, 비 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곳(100~120m)에 상위미동이 있다. 위미2리 또한 5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해안가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상원동, 대원 하동 과 상동, 세천동이 있고, 상위미동 동쪽에 대성동이 있다. 마지막으로 위미3리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종정동이 자리 잡고 있다(그림 Ⅴ-1).

위미리의 지형은 동쪽에 자배봉이 있고, 한라산 동쪽 끝자락을 중심으로 해발 고도 600~700m에서 해안으로 점차 낮아지는 가운데 토지 이용도 고도에 따라 산림대, 초지, 경지, 취락 순으로 환상(環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위미리에는 위 미항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지귀도가 있다. 대표적인 하천으로는 위미1리 서성 동 넙빌레로 흐르는 전포천, 위미포구로 흐르는 위미천, 위미2리 세천동으로 흐 르는 세천이 있고, 신례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신례리와 위미리 경계인 종남천이 있다.

2014년 기준으로 위미리 토지면적은 27.3㎢로 남원읍 전제 면적에서 14.4%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남원읍에서 한남리(32.1㎢), 수망리(30.6㎢), 신례리(29.0㎢) 다음으로 큰 마을에 해당된다. 위미리 인구수는 4,472명, 경지면적은 11.3㎢이다.

이는 남원읍 전체에서 인구수로는 24.1%, 경지면적으로는 20.1%를 차지하고 있 다. 또한 위미리 전체 1,800가구 중 1,027가구(57.1%)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전체 경지면적 중 과수원(9.7㎢)이 차지하는 비율이 85.6%이다. 과수원 대부분이

감귤을 재배하고 있다는 점은 현재까지도 제주도를 대표하는 감귤산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림 Ⅴ-1] 위미리 주변지역 지형과 조사 지구(◯) 출처: 1:25,000 지형도 (국토지리정보원 2012년 수정 발행) 위미(爲美) 도폭.

전통농업사회에 위미리는 밭농사 중심의 농업을 하였고, 밭담 또한 높이와 형 태면에서 제주도 농업지역의 밭담과 유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 인 감귤농업의 도입은 위미리 농업과 밭담 형태변화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 밭농업 지역 대부분의 밭담이 주로 농가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축조한 것과 달리 위미리의 밭담은 과수원 조성과 함께 농가들과 석공들에 의해 서 비교적 단기간에 축조되었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위미리 감귤농업 도입 시기를 중심으로 농업환경에 따 른 밭담의 존재형태와 과수원 밭담53)에 대한 농가들의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밭담의 존재형태를 살펴보기 위해서 조사 지구를 선정하였다. 조사 지구 선정은 위미리에서 과수원 조성이 비교적 초창기에 이루어진 곳을 중심으로 과수원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을 확인하였다. 그 후 수차례의 현장답사와 농가들의 인 터뷰를 토대로 최종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1) 감귤 도입 전 농업환경

현재 위미리는 제주도에서 대표적인 감귤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과거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밭농업 지역이었고, 농가들은 조, 고구마, 깨, 콩, 보리, 유채, 메밀 등을 재배하였다. 당시 위미리 토양은 제주도에서 흔히 말하는 ‘개흙 밭’이나 ‘뜬땅’에 속해서 농업생산성이 낮은 땅이었다(위미신용협동조합, 1991, p.

12)54).

당시의 위미리 농업환경은 지도와 여러 문헌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림 Ⅴ-2>는 1918년 위미리 지형도인데, 이를 통해서 당시 위미리의 농업환경을

53) 현재 농가들은 과수원에 존재하고 있는 밭담을 ‘과수원 담’ 또한 ‘과수원 돌담’이라고 하고 있으나 과수원 도 경지 종류 상 밭이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밭담’ 또는 ‘과수원 밭담’ 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54) 제주도에서는 토양의 종류와 생산력에 따라 농경지를 구분하였는데, 습기가 많고 배수가 잘 되는 밭은

‘질왓’, 자갈이 많은 밭은 ‘작지왓’이라고 하여 이들을 보통 상전(上田)이라고 한다. 반면, 습기가 잘 유지되 지 않은 밭을 ‘른밭’, 매우 척박한 땅을 ‘개흙밭’, 흙이 가벼워 바람에 잘 날리고 물에 잘 씻겨 내려가는 밭을 ‘뜬땅’이라고 한다. 또한 토양의 입지에 따라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박토를 ‘난전밭’, 토질이 중 간이면서 마을 밖에 있는 밭을 ‘중난전’, 마을 안에 있으면서 토질이 그래도 가장 좋은 밭을 ‘가름밭’이라고 도 한다(남석진, 1987, p. 10).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토지이용을 보면 일주도로 주변으로 밭, 활엽수림( )과 함께 중산간 지역으로 갈수록 황지( )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림 Ⅴ-2] 위미리 지형도(1918년)

1960년대까지 위미리는 해발 50m 전후한 해안가 주변에 가장 좋은 토지가 있 었다. 이곳은 해수의 영향을 받았지만 산성 토질에 강한 보리와 고구마 등을 심 을 수 있었으며, 해발 50m 이상의 토지보다 농업 생산성이 매우 높았다. 이점은 토지의 입지에 따른 지가(地價)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일주도로변 가장 좋은 토지가 3.3㎡ 당 약 3천원 정도였고, 해발 100여 미터 지역의 토지는 3.3㎡

당 300원 정도, 이보다 높은 곳의 토지는 3.3㎡ 당 몇 십 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 결과 위미2리를 중심으로 일주도로변 마을 중에는 ‘안카름55)’이라고 불리는 상원

동의 토지를 많이 확보한 집안이 마을에 큰 영향력이 있었고, 대성동과 같이 해 안가에서 떨어진 마을일수록 가난한 농가들이 자리를 잡았다(김준희, 1983, pp.

12-13). 또한 위미리를 포함한 과거 남제주군은 농업증산 5개년 계획에 따라 고 구마 생산량이 매년 증가하여 농가 소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김두욱, 1999, p. 75). 과거 서성동 앞 바다에 위치한 ‘넙빌레(넓은빌레)’에 풍부한 물을 이 용한 전분공장은 고구마 생산을 통한 농가들의 소득에 일조하였다.

2) 감귤 도입 후 농업환경

(1) 1960년대 위미리 농업환경

위미리는 1960년대 말부터 감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농가들에 의 하면 이전에도 일본인들에 의해서 당유자, 산물 등의 품종이 몇몇 집의 텃밭에서 재배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이 귤들을 제사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4.3 사 건으로 인해서 당시 재배되었던 귤들은 전부 사라졌다. 4.3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난 뒤 위미리에도 감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초창기 서귀포 감귤 재배는 대부분 ‘안카름 밭’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농가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경지를 과수원으로 전환하지 않고 한 필지에 20~

30% 정도의 면적에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하여 점차 확대하였다. 위미리에서도 감귤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후 마을 전체에 정착되는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 다. 그 이유에 대해서 김준희(1983)는 1950년대 말부터 감귤이 고소득원이라는 사실이 농가들 사이에 퍼졌지만 농가들이 감귤을 재배했던 선례가 없었고, 감귤 묘목 또한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감귤농업 초창기에 위미리 농가들이 밭작물에서 감귤로의 작목 전환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에 대하여 Chayanov(1966)는 농민들이 노동의 대 가로 더 높고 더 안정된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생계 관행 임을 밝히고 있다. 농민들에게 있어 안전한 생계라는 목표는 생산과정의 폭넓은 선택의 배열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면서 환금작물보다 식용작물에 대한 선호, 위 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여러 개의 종자 변이를 채택하는 경향, 소출은 보잘 것 55) 안카름은 제주어로 ‘한 마을 내에서 안쪽에 위치한 동네’라는 뜻으로 안카름 밭은 ‘마을 내에 위치한

밭’을 말한다.

없어도 안정된 재배작물 등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농민이 기업가적 열망

[그림 Ⅴ-3] 서귀읍과 남원읍 주변 토지이용도(1967년) 주: ◯ 표시된 지역은 당시 감귤 과수원이 조성된 지역임.

출처: 오홍석(1974)

[그림 Ⅴ-4] 위미리 해안가 주변 위성사진(1967년) 주: ◯ 표시된 부분이 당시 감귤 과수원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됨.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2) 1970년대 위미리 농업환경

[그림 Ⅴ-5] 위미리 일주도로 주변 위성사진(1979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그림 Ⅴ-6] 위미리 중산간 주변 위성사진(1985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Ⅴ-6>을 통하여 위미리 감귤 재배지 분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Ⅴ-6>은

[그림 Ⅴ-7] 위미리 고도별 농업 지구

주: 는 현재 마을을 관통하는 1132번 지방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지구

시기 A B C D E F

감귤 도입 이전

감귤 도입 이후

<표 Ⅴ-1> 위미리 지구별 토지효용도 변화

주: 여기서 A~F지구는 <그림 Ⅴ-7>과 대응하며, ①: 토지 효용성 가장 큰 토지, ②: 토지 효용성 보통인 토지, ③: 토지 효용성이 가장 낮은 토지임.

출처: 김준희(1983)

따라서 위미리 감귤 도입 후의 고도별 토지 효용성은 그대로 지가(地價)에도 영향을 주었다. 감귤 도입 후 1970년대에 감귤 재배면적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 주도로변 토지는 3.3㎡ 당 20~50만원, 해발 100m지역까지의 토지는 3.3㎡ 당 5~7만원, 그 이상의 경우 3.3㎡ 당 1~4만원에 거래 되었다(김준희, 1983, p. 21).

(4)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위미리 농업환경

1998년에는 노지와 시설 재배면적 비율이 97.6%와 2.4%로 노지 재배면적 비율

3) 토지이용도로 본 농업환경

<그림 Ⅴ-8>는 조사 지구의 토지이용도이다. 토지이용도에서도 확인되듯이 재 배작물은 주로 감귤이다. 감귤은 노지와 시설(비닐하우스 등)에서 재배되고 있는 데 노지에서 재배하는 감귤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키위도 한 곳에서 시설 재 배되고 있다.

조사 지구의 농업경관은 한반도 과수농업 지역과는 다른 특징들을 보여준다.

조사 지구의 농업경관은 한반도 과수농업 지역과는 다른 특징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