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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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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 24) 의 표상, 항아리와 백자

6. 맺음말

나혜석이 경험한 1920년대의 유럽은 여성참정권운동의 해방구였다. 특히 여성성이 인정받는 프랑 스 지식인 중산층 가정생활의 경험은 ‘여성’ 자체가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남성과 다른 ‘성차’를 지닌 여성에 대한 고유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모성에 호소하는 출산장려운동과 정치적 권리획득을 위한 여성참정권운동이 강하게 대두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성적 자유와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며 소비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신여성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파리) 관련 여행기 가 많이 소개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큰 잘못을 했다거나 죄악으로 여기지 않았 다. 두 번 뿐이지만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관계를 실명으로 밝혔고, 「이혼고백장」이나 희곡 등에 영 문이니셜 ‘C’ 또는 ‘J’로 등장시키는 등 ‘스캔들’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혜석이 묘사한 ‘사 랑’의 감정이 최린과 교감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자료 청구소송(1934.9) 당시와 이후의 글에 표 현되는 최린에 대한 감정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소장에는 ‘정조유린’과 ‘책임회피’를 강조 했지만, 이후 「신생활에 들면서」(1935.1), 「파리의 그 여자」(1935.11) 등에서는 최린과 교감했던 ‘사 랑’의 감정을 묘사했다.

7) 최린은 자치청원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갔지만 명목상으로는 신병치료를 내세웠다. 12월 1일 귀국했다.

8) 羅蕙錫, 「나를 잇지 안는 幸福(帝展入選後 感想, 1931.10.15. 於東京)」, 『三千里』 제3권 제11호(1931.11), 40∼41쪽.

9) 「아아 自由의 巴里가 그리워, 歐米 漫遊하고 온 後의 나」, 『三千里』 제4권 제1호(1932.1), 43∼46쪽.

한편 최린은 어떤 글에도 나혜석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사회적 ‘비난’을 받거나 ‘책임’을 강요 받지도 않았다. 고소장이 언론에 공개된 후에도 ‘여자 나혜석’ 개인의 부끄러운 행위로 여겨졌던 것 같 다. 최린의 지위로 볼 때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스스로의 입장을 밝힌 적도 없었다.

‘기혼녀 나혜석’ 만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관계를 ‘비난’ 받았고, 이로 인한 ‘책임’도 떠안았다.

그러면서도 굳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후에도 적극적 인 ‘독립·민족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지조를 지키며 글을 통해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분 노, 저항을 표현하였다. 반면에 최린은 3·1운동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된 후 천도교단을 장악 하는 한편 자치운동의 분위기를 탐색하다가, ‘구미시찰’에서 돌아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자치를 주장하 면서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나섰다. 친일의 정도는 다르지만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큰오빠 나홍석도 최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혜석은 ‘인간’으로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이를 동등하게 나눌 수 있는 남성과의 ‘사랑’을 인정하는 사회가 오기를 바랐을 것이다.

李箱과 여성들, 그 욕망과 공포의 기록

장 용 경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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