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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문서에서 經濟運營原理 (페이지 61-68)

백성의 생존을 위한 농본주의와 욕망과 물욕의 억제와 공사의 엄격한 구분에 바탕을 둔 유교의 경제관념에서는 사치는 용납될 수 없었다. 특히 사람이 먹을 양식을 낭비하는 술은 우선적 대상이었다. 역대 국왕들은 다양한 형태로 근검절약 을 강조하고 사치를 억제하였으며 다양한 형태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려고 하였 다. 이는 경제적 궁핍의 해소와 신분제를 유지하려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국왕의 의지는 세자나 신료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서나 윤음으로 표현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술이나 복식 등을 금지하는 수교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사치와 과시는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 것으로 인위적으로 억누를 수 없다.

경제의 발전, 외래물품의 수입 등으로 민간영역에서는 국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성행하였으며, 때로는 그 출발점은 왕이 거처하는 궁중이었다. 영조와 정조 는 일방적 금지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여겨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서는 추상적 차원에서 사치를 금지하고 검약을 강조하는 국왕의 하교는 줄어들었으며 개별적 금령만 소수만 있었다. 또 금령 단속을 빌미로 관원들이 백성을 침탈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금령단속에 대한 규제가 늘어났다. 결국 인간의 욕망을 제도로 억제하는 것 그리고 시장을 정책적 의도로 규율하는 것의 한계를 실감하여 사치에 대해서는 인삼무역 등 국부의 유출 등에 대해서만 규제하는 등 사치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기 의 상태가 되었다.

생존을 주목적으로 하는 경제정책 하에서는 경제규모의 확대와 시장의 팽창이

나타날 수 없고, 이를 넘어선 수요의 존재가 있어야 가능하다. 영조와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었으며, 그 대상도 다양해졌 다. 19세기에 인위적 물가조정의 포기는 욕망을 제도적으로 억제할 수 없음을 자인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사치를 공식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공인되지 않은 사치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억압될 우려가 있다. 사치품 생산자나 상인이 적극적 인 경제활동을 하기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많다. 19세기에도 달라지지는 않았다.

비록 시장은 확대되었지만, “사치품 소비→ 시장 확대 → 경제성장”의 선순환의 과정을 기대할 수 없다.

사치는 상류층에서 시작하여 사회 전체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왕조국가에서는 상류층은 궁정이며, 궁정의 생활양식은 표준이 되었다.30 그러나 조선은 궁정은 검약을 강조하고, 이를 솔선수범하였다. 사회 전체에 요구하고 강제하였다. 그리고 어제와 수교가 반복되었다. “입법은 정책의 실패”라는 명제는 조선시대 사치규제에 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의 욕망은 정책의지와 법으로 억제할 수 없다.

30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여성, 『궁정사회』, 한길사, 2003.

토론문

「조선시대 사치 규제」에 관한 토론문

신 항 수(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정긍식 교수님의 「조선시대 사치규제」는 좀바르트의 사치 개념과 유교 경전의 사치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사치 규제의 이념과 실상을 정리한 글이다. 논평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공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과연 유교는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다.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논평자의 입장에서 드리는 거친 질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1. 제목과 관련하여

사치는 욕망이나 선망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좀바르트 의 말처럼 사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어제의 사치가 오늘에는 예법이나 도리 가 되는 경우도 많다. 논평자는 사치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것이며 정책의지와 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이 글의 논지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사치의 규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전근대 사회처럼 사치를 금지하는 것으 로 사치의 규제를 한정지을 수 있는지 아니면 사치품 소비에 대해 특별소비세 등의 중과세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상황도 사치의 규제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인간의 욕망은 정책의지와 법으로 억제할 수 없다’는 현재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서는 사치 뿐 아니라 사치의 규제가 갖는 정의도 필요하다.

2. 사치에 대한 관점

유교 경전에서는 이 글의 논지와 같이 사치보다는 검약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다. 사기 화식열전에서 사마 천은 ‘가장 좋은 정치는 순리에 따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이익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려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지런히 바로 잡으려는 것이고, 가장 못한 것이 인민들과 싸우는 것[故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教誨之, 其次整斉 之, 最下者與之爭.]’라 하여 욕망을 인정하였다. 적어도 현실정치 차원에서 욕망 혹은 인정(人情)은 항상 고려해야 하는 것이었다.

욕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禮였다. 신분에 따라 촘촘하게 규정된 예는 한편으로는 신분질서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고, 생산력이 제한된 전근대 사회 를 유지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여기서 벗어나는 ‘참월’은 한편으로는 신분적 도리를 벗어났다는 명분론 위배이자 사치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과시이자 신분 상승 의 의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奉祀와 관련해서도 조선 전기에는 경국대전의 차등 봉사 규정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부모봉사, 2대봉사 혹은 3대봉사가 시행되었 으나, 『주자가례』의 확산으로 19세기가 되면 4대봉사가 일반화된다. 4대봉사가 일 반화되면서 제사 비용의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禮 자체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뀐 것이며, 좀바르트의 말처럼 서유럽에서 사치가 근대화를 이끈 것이라면 조선 시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모두가 양반되기‘는 근대화의 한국적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경제적 발전만이 근대화의 요소 내지는 지표인지 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편찬의 역사적 맥락

이 글에서는 御製, 受敎, 法典 등을 근거로 18세기에 자주 나오던 사치에 대한 규제가 19세기에 들어 약해졌으며, 이는 사치의 사치에 대한 규제의 실패를 국왕

역시 인정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실제 19세기는 이전 시기보다 소비가 늘었고, 그 결과 서민문화나 여항문학이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전히 19세기에도 사치는 탄핵과 처벌의 대상이었고, 금주령 역시 필요에 따라 시행되고 있었다. 하지 만 각종 자료에서 나타나는 빈도는 18세기에 비해 매우 적다. 이것을 국가 혹은 국왕의 검약에 대한 의지가 약화된 것으로 직접 해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왕의 편찬 사업이나 저술은 왕권과 연결되는 것으로, 편찬 당시의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사치에 대한 경계를 가장 많이 보인 왕은 영조이다. 그런데 영조는 취약한 정통성으로 명분에 집착한 국왕이다. 정조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성리학적 가치를 강조하였다. 영조와 정조시기에 수교나 어제가 집중되는 것은 이러한 면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수교나 어제, 법제가 소략해지는 것은 왕권의 약화와 관련되지 않나 생각된다.

아울러 유교국가의 명분과 실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교 사회에 서 국왕이 사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일 수 없으며, 검약을 강조하고 사치를 금하는 것은 국왕의 당연한 의무이다.(심지어 이러한 태도는 1980년대까지 일정하게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에서 왕실재정의 비율은 매우 높았으며 왕실 내지는 궁내의 사치는 지속적으로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비판도 일상적으로 나타났다. 국왕에게는 검약이 요구되었으나, 궁실 구성원의 사 치 역시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한 국왕의 근검에 대한 의지는 제한적으 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유교 이데올로기의 담지자인 국왕과 대비 에 효도하고 옹주와 왕자들을 사랑하며, 외척과 화목하는 현실의 국왕은 구분되어 야 한다. 엘리아스의 『궁정사회』에서 보이는 양식과는 차이가 있겠으나, 조선 사회 에서도 사적 영역에서 왕실 구성원의 사치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적지 않다.

4. 유교 이념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유교의 한 가치인 검약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치 금지 정책을

정리하였다. 조선시대 유교에서 사치에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부정된 다는 점에서 조선 유교와 경제 발전에 대하여 평가하였다. 물론 그러한 한계에 대해서 평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것이 유교의 본질적인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논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유교는 개인의 심성에서 국가 제도까지 매우 다양한 요소를 포괄한다. 국가 제도 의 측면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대동법 시행이나 통공정책 등 제도의 변경이 있었다. 개항기에도 국가‧왕실이 주도한 각종의 개혁이 있었다. 즉 유교 자체는 현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 측면이 있다. 논자에 따라서 유교 이념에서 읽어내는 (현재적) 가치는 다양하다. 인의와 도덕, 가족주의나 입신출세주의, 국가주도의 경 제 성장, 권위주의, 민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중화주의 등 다양한 가치를 읽어 낸다. 문제는 유교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있을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도 유교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쟁점이었다. 유교의 핵심은 무엇인가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대한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다음으로 그것이 유교만의 문제인지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가 늦은 지역 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이념 이나 종교는 근대화를 선도하는 것일지 의문이 생긴다. 결국은 사회 변화가 먼저 아닌지, 이념이나 종교는 그것을 따라 변화하는 것은 아닐지. 오활하기는 하나 이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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