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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심리전의 주체와 논리, 귀순자의 존재론

1960년대 심리전의 필요성을 증대시킨 요인은 복합적이다. 쿠데타의 대내외적 정당화와 민간정부로의 정권재창출, 반공개발동원체제의 확립 등 통치전략상의 시급성이 우선적인 요인이었으나, 남북한 체제경쟁의 격화에 따른 북한의 공격적인 대남전략에 대한 대응 또한 대공심리전의 의의를 부각시켰다. 냉전전이 전파냉전 시대로 진입되는 추세에 부응하 는 전략심리전의 이론 및 기술적 대비도 요구되었다. 5․16 후 북한의 대남전략은 강경일변도로 치달았다. 1950년대 전후복구3개년계획(1954

1956)과 제1차 5개년계획(19571961)의 성공적 추진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한의 경제발전모델과 반제국주의의 가치를 제3세계국가를 대상으로 선전하는 동시에 김일성의 연방제통일안 발표(1960.8)를 시작 으로 자주적 평화통일공세를 주도해갔다. 그러나 5․16 후 남한사회가 점차 안정됨에 따라 종래의 평화공세를 후퇴시키고 ‘남조선혁명론’ 혹은

‘민족해방전쟁론’을 전면에 내세운 가운데 남조선혁명노선에 바탕을 둔

‘4대군사노선’의 확립으로(1962.4)대남 강경노선을 굳혀갔다. 이 같이 전 환된 기조는 한일국교정상화 및 베트남파병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는데, 1965년부터 본격화된 군사분계선에서의 충돌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급 기야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등 무장게릴라의 남파에 의한 무력도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76 남파간첩의 임무도 소극 적 첩보공작에서 군사기지 및 중요시설 폭파, 요인 암살 등 적극적인 게 릴라전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77 1960년대 후반 한반도에서

76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에 대해서는 강광식, 「1960년대의 남북관계와 통일정책」,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엮음, 뺷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문제뺸, 백산서당, 1999, 159∼

204쪽 참조.

77 「북괴간첩의 새 전술과 방비 태세」(사설), 뺷조선일보뺸, 1965.8.6.

최고조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조성된 것이다.

대남정책이 무장공세로 전환되기 이전까지는 간접침략을 통한 심리 전 공세가 대남전략의 주류를 이루었다. 북한은 4․19 직후 연방제통일 안을 천명한 후 남한 내 지하조직 구축과 함께 위장평화공세, 지하공작 활성화, 조총련의 적극적인 활용 등을 대남정책의 지침으로 세우고 이전 보다 강도 높은 간접침투전략을 구사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5․16 을 겪은 후에는 5․16 주체세력들에 대한 접근공작을 세우고 연방제통 일․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 대표를 파견하는(황태성 사건) 한편

‘대남사업총국’과 ‘조사부’로 대남공작조직을 정비하고 해외 공작거점 의 운영과 이를 통한 대남침투공작을 추진하는 방법까지 동원한 간접침 략을 더욱 확대 강화시켰다.78당시 남한 정보당국에서 파악한 북한의 간 접침략과 심리전 공작 형태는 다양했다. 남파간첩에 의한 심리전 공작방 법(거점 확보 뒤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을 과장 선전), 납치 유인공작에 의한 심리 전 공작방법(납치어부 송환, 동반월북 기도), 전파에 의한 심리전 공작방법( 양과 해주 거점의 라디오심리전과 휴전선의 대남확성기방송), 전단 살포 공작방법, 우편을 이용한 공작방법(일본과 홍콩을 발신지로 한 선전문 송부), 제3국을 통 한 심리전 공세(중립국 진영을 대상으로 한 북한체제 우월성 선전)등이 동시다 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79이에 대항하는 대북심리전 체계 확립과 역 선전전이 긴급히 요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간첩자수기간의 주기적 설정과 범국민 간첩색출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연계되어 있던 남한 내 통일론에 대한 제압도 필요했다. 북한심

78 1960년대 초 북한의 대남공작조직의 변화에 대해서는 황일호, 「노동당 3호 청사 놀라 게 한 4․19와 5․16」, 유영구, 뺷남북을 오고간 사람들-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 업뺸, 글, 1993, 187∼234쪽 참조. 남로당 출신 월북자를 대남공작원으로 양성한 기관 인 ‘강동정치학원’을 비롯한 북한 대남공작기관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앙정보부, 뺷북한 대남공작사뺸 1, 중앙정보부, 1972 참조.

79 정형택, 「현대 심리전 공세의 중요성」,뺷동아일보뺸, 1961.9.10.

리전의 효과로 단정할 수 없으나, 4․19혁명의 시공간에서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혁신계를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5․16 후에도 여전히 한반도 분단질서의 해결방법으로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대내외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4․19 직후에 제기된 김용중의 한국중립화방안, 미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방안, 김삼규의 중립화통 일방안 등이 더욱 거세게 다시 제안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서민호 의원 의 통일구상 발표(1964.1.17), 황용주의 중립통한론(1964.11)등이 제기되어 파란을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국회에서는 ‘남북이산가족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다(1964.10). 반공법을 적용해 황용주와 서 민호를 구속시키고,80통일론의 법적 한계, 즉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 안(승일통일)만을 국법상 허용한다는 검찰의 공식적 가이드라인 제시와 중립통일론이나 용공사상을 논하는 학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장의 공개 경고를 계기로 공론 장에서의 통일론은 일단 수그러들게 된다. 정작 문 제는 일반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이었다. 당시 통일에 관한 각종 국 민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 방법이 압도적이었으 나 남북협상론에 대한 선호도가 15% 이상이었고, 남북교류에 대한 필요 성에 공감하는 의견도 상당했다.81 조선일보여론조사에 따르면(1964.10),

80 서민호가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된 것은 한일협정 체결 후 의원직을 자진 사퇴한 뒤 민사당 창당발기문을 통해 한일협정의 폐기, 파월한국군 철수, 남북한 서신교환과 체 육인 및 언론인 교환 등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구속영장이 기각되 자 민사당이 조총련계의 자금을 창당준비로 썼다는 새로운 혐의를 추가해 구속되는 과 정을 밟는다(1966.6). 이 사건에도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했다.

81 공보부의 국민여론조사에서는(1964.2.5∼11) 유엔감시하의 총선거가 23.4%, 남북협상 16.3%, 모르겠다 47.7%로 조사됐고, 동아일보사의 전국여론조사에서는(1964.12.14∼

18) 유엔감시하의 총선거가 41%, 남북협상이 19%, 모르겠다는 응답이 28%였다. 국토통 일원의 ‘국토통일에 대한 여론조사’(1969.12)에서도 유엔감시하의 총선거에 대한 지지 가 31.9%, 무력통일 12.8%, ‘현 상태 유지 10.3%, 남북협상 9.5%, 중립국 감시 8.3%, 모르겠다 23.7% 등으로 조사되었는데, 용공으로 치부된 남북협상론에 대한 기대가 일정 수준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고(84.7%), 통일논의는 필요가 있다면 논 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으며(69.4%), 남북한 편지교환, 체육인 및 언 론인의 교환에 대해서는 신중론이 우세했으나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27%)이용될 테니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13.8%)보다 많았으며, 가족 면회소 설치에 대해서도 긍정적 답변이(74.3%)부정적 의견(24%)보다 매 우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82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반공동 원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동시에 남북협상 및 교 류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정 권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대북심리전의 의의와 그 필요성이 더욱 더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북심리전이 대북한/대내 두 차원을 포 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귀순자의 존재가 부각되고 그들의 심리전적 가치가 배 가된다. 자진 월남귀순자는 물론이고 남파공작원, 즉 간첩의 존재는 대 북심리전의 목표와 방향 및 효과 생산에 최적임자였다. 1951∼1969년 생포된 2,391명의 간첩들은 전향의 여부에 따라 생사가 좌우되었다. 비 전향자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돼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일부는 비전향장기 수로 장기간 감옥에서 갖은 전향공작에 맞서며 비인간적 삶을 영위해야 했다.83주로 중앙정보부의 관할 하에 이루어진 간첩에 대한 전향공작은 체포 후 정보 제공을 대가로 공소 보류되어 풀려나는 절차를 거치는데, 이는 1930년대 및 정부수립 후 국가보안법체제에서 시행된 전향제도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풀려난 후에는 국가심리전 체제에 편입되어 다양한

82 「조선일보 여론조사-통일문제의 관심도」, 뺷조선일보뺸, 1964.11.4.

83 한홍구의 연구에 따르면(앞의 글, 200∼201쪽), 비전향장기수는 네 부류, 즉 첫째 남 파공작원, 둘째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빨치산 출신, 셋째 통일혁명당, 인민혁명당, 남민전,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 등 남쪽의 급진적 변혁운동에 관련된 사람 중 비전향 자, 넷째 재일동포나 납북어부, 월북자가족, 한국전쟁 시기의 부역자, 유학생 중 공안 기관이 조작한 간첩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비전향자로 남은 사람들 등이다.

심리전 활동에 동원되는데, 주목할 것은 5․16 후에는 이들을 조직적으 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귀순()의 심리전적 가치와 용도를 과할 정도로 잘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수근의 사례에서 확인되듯 이 너무 강압적이어서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공보부 산하 ‘특수선 전위원회’의 심사와 지도방침을 거쳐 적절한 소임을 맡기는 방식으로 귀 순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84중앙정보부가 (전향)귀순자를 생산하고 공보부가 이들을 선별, 배치, 활용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일찍부터 가 동된 것이다. 그리하여 귀순자는 1960년대 국가심리전의 최정예 요원으 로 거듭나게 된다. 이는 냉전 분단체제의 비극적 산물인 전향간첩 및 귀 순()이 심리전에 이용되면서 역설적으로 분단체제를 강화하는데 부정 적으로 기여하는 구조가 정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비극이 비극을 낳는 악 순환 구조이다. 대남공작원 파견 못지않게 대북공작원 밀파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악순환에 대해서는 남북 정권 모두에게 책 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국가심리전에 동원된 귀순자의 분포는 복잡하다. 자진월남귀순 자와 전향간첩이 주류를 이루나 한국전쟁 포로도 동원 혹은 자발적 참여 가 빈번했다. 기존 월남지식인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어서 그룹을 형성할 정도였다. 대남침투와 귀순의 경로도 다양했고, 또 심리전상의 가치가 큰 지식인귀순자들의 북한에서의 직위와 역할이 다양했던 관계로 심리 전의 효과를 제고하는 데도 유리했다. 심리전요원으로 선별된 전향간첩

84 특수선전위원회(위원장, 공보부 차관)는 특수선전위원회규정(1962.2.20, 각령 제478 호)에 의해 설치되었고, 주 기능은 심리전의 기본방침 수립에 관한 사항, 심리전 실시 기관 간의 상호협력 및 조정에 관한 사항, 심리전 활동상황의 종합, 분석, 평가 및 효과 측정에 관한 사항, 귀순자의 처우 및 지도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조사 심의하는데 있었 다. 위원회 산하에 심리전관련 7개 부처 과장급으로 구성된 ‘실무자회의’(의장, 공보부 조사국장)를 두어 심리전을 원활하게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특수선전위원회는 4차례 부분적 개정을 거치며 존속되다가 1975년 11월에 폐지되었다.

과 귀순자는 일반적으로 언론의 기자회견을 통해 귀순을 공표하고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남기는 의식으로 시작해서 각종 강 연회, 좌담회, 군중대회 등에 동원되는 것이 기본적이었다. 특히 공포의 존재로 간주된 간첩의 공개는 간첩에 대한 공포이미지를 더 한층 각인시 키는 가운데 반공방첩사상을 부식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귀순자의 북한에서의 경력과 전문성에 따라 각기 다른 심리전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공안사건의 (검찰측)증인으로, 해외파견을 통해 아 시아반공연대를 강화하는 자원으로, 북한자료의 수집 및 연구의 인력으 로, 영화검열에의 참여 등 실로 다양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대한 귀 순자들의 다양한 경험 정보는 공산주의 체험 및 집중적인 반공교육으로 조성된 국민 대다수의 적대적인 북한이해를 고착시키는 데 유효했다. 지 금까지 당대 심리전에 동원된 귀순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1960년대 대공심리전에서 뚜렷한 활동을 한 주요 귀순자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심리전의 논리와 특징 을 정리하고자 한다.

① 이철주(1957.6 남파 후 전향):문화선전성 기관지 부주필을 역임한 그 는 전향 후 육군본부특전감실 집필위원(1958), 동방통신사 주필(1960), 내 외문제연구소 연구위원(1961) 등으로 심리전을 수행하면서 방송극작가 로도 활약한다(1964.5 HLKA 「김삿갓 북한방랑기」). 이철주의 대북심리전의 특 징은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의 모순을 북한예술가들의 숙청에 초점을 맞춰 고발하는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북한의 작가 예술가들」(뺷사상계뺸, 1963.71965.4), 「북한 무대 예술인들의 최근 동향」(뺷사상계뺸, 1965.8), 「북괴 조선노동당」(뺷신동아뺸, 1965.5)및 이를 묶은 북의 예술인(1966)등의 논 조는 임화를 비롯해 남로당계 예술인의 동향과 공판(숙청)에 대한 폭로를 통해서 공산주의이념에 우호적인 남한 및 자유세계 지식인들을 향한 경 종, 한 마디로 ‘자유를 택하라’에 있었다. 「の詩人」에 서술된 임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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