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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과 심리전, 1960년대 국가심리전 체계와 귀순의 냉전 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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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과 심리전, 1960년대 국가심리전 체계와 귀순의 냉전 정치성

*1

이봉범**2

1. 귀순과 전략심리전

이만희 감독의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의 검열서류를 살펴보면(1964.12

1965.8, 한국영상자료원 소장)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우선 중앙정 보부(KCIA, 5)가 영화검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다.

공보부와 함께 <7인의 여포로>의 합동 실사검열에 직접 참여해 부분제 한 결정의 입장을 밝힌 뒤 곧바로 상영보류조치를 공보부에 통보했고, 제작사의 재심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재편집본에 대한 재검열 과정에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5A2A03031971)

**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강사 목차 1. 귀순과 전략심리전

2. 1960년대 반공체제 재편성과 국가심리전 체계 3. 대공심리전의 주체와 논리, 귀순자의 존재론 4. 냉전질서의 변동과 심리전-결론을 대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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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개입하면서 영화 제명의 변경, 6개 장면의 완전삭제와 반공적인 내 용의 대폭 보강 등을 지시하고 이후 상영보류조치 해제 및 상영조치 의 견을 전달했다. 중앙정보부의 개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 의 의견이 모두 반영되어 재촬영 후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명으로 비로 소 개봉될 수 있었으나, 뒤늦게 국방부가 일부 문제장면의 삭제 또는 수 정조치를 요구한 뒤 공보부가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를 중앙정보부에 문 의했고, 중앙정보부가 공보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하라는 답 변 후 공보부의 추가제한 지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밟는다.1중앙정보 부가 (영화)검열에 직접 개입한 것 자체가 탈법적인 일이다. 중앙정보부 의 검열이 가시적으로 공개된 시점은 남북대결이 고조된 1968년 하반기 부터 사상관련 출판물에서였는데(판권지에 ‘中央情報部檢閱畢’ 명기), <7인의 여포로> 검열서류를 통해서 중앙정보부의 초법적 검열참여가 비교적 이 른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그것도 텍스트의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압도적 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중앙정보부의 검열 권한이 영화검열의 주무부처인 공보부보다 상위에서 텍스트의 내용에 칼날을 들이대는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검열주체인 공보부와 검찰․경 찰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율하여 지침을 도출해내는 막후 조정자의 역 할을 했다.

둘째, 검열과정에서 논란의 초점이 된 국가안보상의 유해요소로 적시 된 내용이 당대 심리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제작신고 단계 에서 정부시책의 저촉 여부가 심의되었고 시나리오검열과 합동실사검열 에서 사상문제가 검토된 뒤 부분제한을 거쳐 상영허가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가 상영보류 및 재검열의 지시와 수정사항을 명시

1 <7인의 여포로> 검열과정의 상세한 과정과 내용 그리고 영화검열사적 의미에 대해서 는 조준형, 「검열자료로 보는 <7인의 여포로> 사건」, 뺷웹진 민연뺸 47․50, 고려대 민족 문화연구원, 20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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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통보한 데는 이만희의 반공법위반 구속 기소사건(1965.2.5)이 작용했 다. 검찰이 기소한 문제점 6가지가 완전 삭제되는 절차를 거쳐 “건전한 반공영화”로 재편집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중앙정보부가 텍스트의 심리전적 가치를 중요하게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즉 텍스트 말미에 자유 대한에 귀순하는 용감성을 표현할 것과 반공적인 표현이 관객들로 하여 금 직감케 하도록 장면의 보강을 특별히 요구한다. 심리전 관련은 이만 희 구속 후 공보부에 접수된 영화인협회(감독분과위원회)의 진정서에서도 나타나는데, 검찰의 공소장에 대한 반박에서 ‘자유대한으로 귀순할 의사 를 지닌 북한병사들이 용감하게 그려진 것은 북한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북한찬양 혐의가 아닌 그 반대이며 이는 이북방송이 괴뢰군장병의 귀순 을 환영하는 취지와 내용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텍스트의 심리전적 가치를 강조하며 인신구속의 부당성을 비판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7인의 여포로>검열이 당시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국가심리전과 모종의 내막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중앙정보부의 사상검열과 그 일환인 반공방첩영화에 대한 검열 개입은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 어졌고,2그 사상검열에서 용공, 불온성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려된 요소 가 텍스트의 대내외적 심리전상의 가치 여부였다. 본고는 <7인의 여포 로>검열에 함의되어 있는 심리전적 맥락을 확장하여 1960년대 국가심 리전의 체계와 작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3

2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반공방첩영화 <검은 장갑>(김성민 감독)의 검열과정이다(1962.2

∼1963.5). 중앙정보부는 영화제작신고 시 추천영화에 대한 입장 표명, 시나리오 심사 및 실사검열 참여, 일본현지로케 문제로 상영허가가 보류된 상태에서 상영허가 입장 통보 등을 했으며, 검열과정에서 <검은 장갑>이 지닌 북송의 기만성 폭로와 반공방첩의식 고취의 효과 등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개입은 중앙정보부 창설 (1961.6.10)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영화 <오발탄>의 상영보류 해제 후 (합동)재검열 시

“치안에 역효과를 초래할 위험성과 재건시책과 정반대 현상”이란 요지로 상영불가의 의견 서를 제출했고(1961.7.20), 이후 상영허가의 의견을 통고한 바 있다(1963.7.10).

3 조준형도 적시한 <7인의 여포로>검열의 특이한 지점들, 예컨대 최상위 검열자로서의 중앙정보부의 위상과 검열기관들의 유기적인 내적 검열시스템, 반공방첩영화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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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은 귀순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 고 있다. 제2전선으로 일컫는 심리전은 넓은 의미에서 적(적군, 적국민)의 심리를 교란․변화시켜 전쟁의식을 감퇴 내지 말살하는 한편 내부적으 로는 일반국민들의 전의를 하나로 통일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도록 하 는 일체의 선전과 조치들을 뜻한다. 심리전의 범위는 적대국뿐만 아니라 중립적 집단 및 우호적 집단 등 제3국을 대상으로 자국에 대한 이해, 협 력, 지원을 얻기 위한 프로파간다까지를 포괄한다. 이러한 설득작전으로 서의 심리전은 전시에는 무력전과 결합 혹은 단독으로 수행되고, 그 목 적이나 운용에 따라 전술심리전, 전략심리전, 선무심리전 등 다양한 형 태로 구분된다. 준전시 또는 평시에는 대체로 장기간에 걸친 시간적 지 속성을 갖는 전략심리전 위주로 전개되는데, 특히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냉전체제하에서는 동서 양 진영 모두 체제(진영)의 이념적․

도덕적인 우월성을 선전하는 전략심리전을 냉전전의 주요 무기로 삼았 다. 냉전기 심리전에서 귀순은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자유진영으로의 귀순 자체가 냉전선상의 승리의 표상이자 체제우월성의 반증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4더불어 재교육을 통한 대공 역선전전의 호재로, 또 내 부적인 승공의 자원으로 이용 가치가 매우 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양 진 영 상호적이었으며, 다양한 변주를 거쳐 장기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냉전기에 귀순을 매개로 한 심리전의 전형적인 사례는 베트남전에서 미 국이 1963년부터 시행한 ‘Chieu Hoi Program’이다. ‘배반의 기회를 제 공하여 敵을 약화시키고 我를 강화한다’는 이론을 기초로 시행된 Chieu Hoi[귀순]프로그램은 1963∼1968년 총 90,180명의 귀순자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수치는 한국전쟁기간 유엔군 사령부가 억류한 포

검열의 우선적인 기준과 귀순의 문제, 전파심리전(대북방송)의 가치 등과 이 요소들의 상호 관련성은 당대 심리전의 맥락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명료한 이해가 가능하다.

4 「자유의 값어치」(사설), 뺷조선일보뺸, 1967.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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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의 수 22,604명의 4배에 달하는 규모였다.5베트콩 귀순자들은 CIA의 귀순자활용계획에 의해 추호이수용소에서 사상교육을 중점적으로 받고 다시 역이용된다.6베트남파병 한국군도 이 귀순프로그램의 틀 안에서 독 자적인 귀순 심리작전을 전개한 바 있다. 북한 또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 여 1966년 6월부터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에 대한 조선어 강습 실시 및 한국군 전방부대에 대한 선전공세, 한국 파월장병 속에 공작원 침투 등 대 남심리전을 계획․시행했다.7냉전기 베트남전보다 앞서 심리전이 치열 하게 전개된 것은 한국전쟁 기간이었다. 한국전쟁의 독특한 특성과 양상, 즉 기본적으로 동서 냉전의 이념전쟁으로서의 열전이었고 국제전이자 내 전이며, 전면전이자 제한전의 양상으로 전개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심리 전이 활성화된 가운데 한국전쟁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의 거대한 심리전장이 되었다.8

미국주도하에서 수행된 한국전쟁기 심리전의 경험과 학습은 정전협 정 후에도 연속되어 전략심리전의 형태로 지속되는데, ()아시아가 냉 전의 격전장으로 부상하고 한반도분단체제의 고착화에 따른 남북체제 경쟁이 가속되는 것에 대응하여 대내외적 대공심리전의 가치가 증대되 기에 이른다. 이는 오키나와를 거점으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심리전과의

5 김명기, 「귀순자의 국제법상의 지위」, 뺷국제법학회논총뺸 17-1, 대한국제법학회, 1972.3, 25∼26쪽.

6 메카시, 「나는 이렇게 보았다 ③-메카시의 월남전 르포」, 뺷조선일보뺸, 1967.7.30. 베 트남에서 미국의 대공심리전을 전담한 기관은 ‘JUSPAO’(미국합동공보국)이다. 1965

∼1972.6 기간 대공심리전 활동의 군민협조, 베트남의 매스미디어 개발과 공보활동 지 원, 미 국무성의 공보문화 활동 등을 도맡았던 군민합동의 공보기구였다(「7년 만에 문 닫는 ‘저스파오’」, 뺷경향신문뺸, 1972.6.29).

7 「북괴 월 참전 재확인」, 뺷동아일보뺸, 1968.6.15.

8 한국전쟁 기간 시행된 심리전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은 정용욱, 「6․25전쟁기 미군의 삐라 심리전과 냉전 이데올로기」(뺷역사와 현실뺸 51, 한국역사연구회, 2004), 김종숙,

「6․25전쟁기 심리전 운용실태 분석」(뺷軍史뺸 53,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4), 장 영민, 「한국전쟁 전반기 미군의 심리전에 관한 고찰」(뺷軍史뺸 55, 국방부군사편찬연구 소, 2005)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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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 채널을 통해서 수행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독자적인 심 리전의 모색으로 진척되면서 심리전의 조직, 이론, 체계 등이 구체적으 로 마련, 정비되는 수순을 밟는다. 그러나 전후 1950년대에는 일원화된 국가심리전 체계가 불비했고, 공산권(북한)정보의 부재, 대공심리전에 대 한 인식 미비, 심리전 요원 및 기간시설의 부족 등의 이유로 심리전의 중 요성에 대한 정책적․사회적 요구에 비해 실효적인 추진이 어려웠다.9(육군본부)의 산발적이고 초보적인 대공심리전으로는 북한의 공세적인 대남심리전을 방어하는 것조차 버거운 실정이었다. 정언적(定言的)차원 의 심리전에 대한 맹목적 강조는 오히려 대내적인 사상전으로 협소화되 어 사회통제의 도구로 활용되는 측면이 훨씬 강했다. 이러한 구호 차원 의 심리전은 5․16 직후 군사정부에 의해 전면 개편되었다. 군사정부는 집권 초부터 대공심리전을 최우선적인 정책 과제로 설정하고 조직적인 국가심리전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비로소 국가주도의 심리전이 본격적으 로 실시될 수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부각된 것이 전향남파간 첩을 비롯한 귀순자집단이다.

귀순()의 심리전적 가치는 귀순자의 법적 지위와 관련이 깊다. 국제 법상 귀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로의 대우에 관 한 제네바협약’(1949)에도 귀순자의 지정은 생략되어 있다. 한국전쟁기 휴전협정이 장기 지체된 것도 동 협약 118조에 규정된 포로 처리원칙을 둘러싼 첨예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귀순의 사전적 의미, 즉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표준국어대 사전)이라는 의미가 함축하고 있듯이, 귀순자는 일반적으로 자기 소속() 을 자발적으로 배반하고 적과 협력하는 자로 규정된다. 자발성(자유 의지) 의 유무에 의해 귀순자(deserter/defector)는 전쟁포로와 구별되며, 강제로

9 「심리전에 주력하자」(사설), 뺷동아일보뺸, 195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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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획된 전쟁포로라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적의 군대에서 복무하거나 본 국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경우에도 귀순자로 처리하는 것이 국제적인 관 행이다. 마찬가지로 전시귀순자가 전쟁 또는 적대행위 종료 후 전쟁포로 와 같이 송환 대상에 포함되는지에 관한 성문화된 국제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귀순자의 송환 여부는 귀순자를 접수한 국가의 재량에 속하 는 문제로 간주되어 왔고, 이런 관행은 특히 한국전쟁 당시 송환을 거부 하는 포로, 즉 귀순자의 처리를 통하여 법적 확신을 획득함으로써 국제관 습법적으로 확립된 바 있다.10 따라서 배반자로서 귀순자는 국제법상 전 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한편에서는 범법자(반역자)인 동시에 다른 한편 에서는 VIP가 되는 이율배반적 가치를 지닌 묵인된 존재들이었다.11

한국에서 귀순자에 대한 법적 규정은 ‘병역미필자특조법’ 시행령(1961.6.23)

제4조, 즉 “귀순자라 함은 북한괴뢰집단의 불법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부터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탈출하여 자발적으 로 귀순한 자”로 처음 명문화되었다.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직후 귀 순()이란 용어가 빨치산(민족반역자)과 대칭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뒤 한국전쟁기와 그 이후에 남한의 체제우월성을 증명하는 표상으로 광범 하게 소환되었으나 법적으로 규정된 바 없었다. 법률적 용어 정착과 더불 어 귀순자는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1962.4)에 의해 국가 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는데, 당시 240여 명의 귀순자들에게 정착수당 지 급과 취업 및 주택문제 해결을 규정하고 있다. 다만 동법 시행령(1962.5)에 따라 월남귀순자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5가지 심사기준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리한 북한첩보의 제공, 가치 있는 노획물 제공 등과 함

10 민경길, 「귀순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뺷인도법논총뺸 20,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연 구소, 2004, 40쪽. 이 논문에는 귀순자의 처리에 관한 여러 국가들의 관행과 학설이 잘 정리되어 있다.

11 김명기, 앞의 글,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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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귀순의 동기, 정신 상태, 귀순 시기, 북한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 등 “심 리전상의 가치”를 주요 심사원칙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12특혜 제공을 통한 귀순 유도와 함께 귀순자를 대공심리전의 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실제 심사를 통과한 귀순자들은 1962년 2월 설치된 공보부 산 하 ‘특수선전위원회’의 관리 및 통제를 받는 가운데 각종 심리전에 동원 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13법적 뒷받침 속에 귀순자와 대공심리 전의 제도적 결합을 바탕으로 한 국가심리전체계가 성립․가동된 것이 다. 이 시스템은 관련 법률의 개정을 수반하며 1980년대까지 확대 지속 된다.14

그런데 심리전의 요원으로 부상한 귀순자의 규모는 불분명하나, 월남 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한 자진귀순자, 전향남파간첩 등 다양한 분포 를 나타내는 특징이 있다. 이중 전향간첩들이 가장 중요한 대공심리전의 주체였다. 대남공작원, 특히 자수 및 전향의 과정을 거쳐 귀순한 간첩은 적에 대한 정보원이자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산 증거로서 또 대내외적인 체제선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심리전의 최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의 비밀자료에 따르면, 1951∼1969년 검거된 간 첩의 규모는 3,360명이다.15검거형태별로는 생포 2,391명, 사살 824명,

12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원호기준을 밝혀」, 뺷경향신문뺸, 1962.6.1.

13 특수선전위 규정 공포에 따라 설치된 특수선전위원회는 공보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외 무, 내무, 법무, 국방, 문교, 보사 등 6개 부처의 차관과 공보부장관이 임명한 3명의 위 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주 임무는“심리전의 실시 및 활동 상황과 귀순자의 처우와 그 지 도방침에 관한 사항을 조사, 심사”하는 기능이었다.

14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은 1966년 4월 개정을 통해 정착수당 대폭 인 상 등 귀순자 원호규정을 강화했고, 귀순자 원호 부문은 1978년 12월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으로 대체되었다. 이 법률에서 월남귀순자의 범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명 시되는데, 북한군 소속 군인 및 군속과 민간인 그리고 밀파된 간첩으로서 자수, 전향한 자 등이 포함된다. 물론 귀순 동기와 사상 검증의 심사를 거쳐야 귀순자로 인정되는 것 은 마찬가지였다. 이후 ‘귀순북한동포보호법’(1993)으로 승계되었다가 탈북자 급증에 따른 정책 전환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1997)이 제정되면서 ‘귀순’이란 법률적 용어는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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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217명이고, 검거단서별로는 인지 1,594명, 공작 135명, 신고 563 명, 검문 851명, 자수 217명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간첩의 실체를 실증 적으로 연구한 한홍구의 조사에 따르면 1951∼1996년 남한당국이 적발 한 간첩이 총 4,495명이었고, 연도별로는 1951∼1959년 1,674명(생포

1,494, 사살 62, 자수 118), 1961∼1969년 1,686명(생포 825, 사살 762, 자수 99), 1971∼1979년 681명(생포 448, 사살 208, 자수 25), 1980∼

1989년 340명(생포 238, 사살 77, 자수 25), 1990∼1996년 340명(생포

70, 사살 29, 자수 25)등으로 나타나는데,16 1951∼1969년에 검거간첩 이 집중되었고 점차 하향 추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러한 사실은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와 유관한 산물로, 남파공작원(내부적 인 공작으로 만들어진 간첩조작사건까지 포함해)에 대한 이해가 대남/대북 상호

(심리전)전략의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심리전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의 자료에서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은 침투유형별 다양성이다. 즉 남파 1,523명, 월북 후 남파 1,243명, 대 동월북 후 남파 34명, 재남(在南) 393명, 합법 도일 후 남파 17명, 밀항도 일 월북 후 남파 3명, 납북귀환 42명, 제3국 우회 26명, 위장귀순 1명, 도 구 월북 후 남파 4명, 월북 후 일본우회 남파 1명, 중공 남파 2명, 강제송 환 1명 등으로, 총 3,360명의 남파 경로와 성격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이 또한 북한의 대남전략 추이와 연계된 결과이다. 이 가운데 상당한 규모 의 재남, 납북귀환, 도일 혹은 일본으로부터의 침투는 간첩공작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냉전기 조작(의혹)된 간첩사건의 대표적 세 유형이

15 중앙정보부, 뺷1970∼75년 검거 간첩 명단(Ⅲ급 비밀)뺸, 중앙정보부, 1976. 이 자료에 는 1951∼1969년 검거간첩의 숫자와 검거기관, 검거단서, 검거형태 등 17개항의 분 류, 통계만 제시되어 있는 반면 1970년부터는 매년 검거간첩의 숫자, 실명 및 관련정보 를 구체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16 한홍구, 「한국현대사의 그늘, 남파공작과 비전향장기수」, 뺷역사비평뺸 94, 역사비평사, 2011, 204쪽 ‘<표 1> 시기별 간첩검거현황’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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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역과 연계된 사건, 특히 조총련계와 연루되었거나 재일동포가 간 첩혐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납북어부 그리고 남파간첩과 무리하게 관련지은 사건에 의해 간첩으로 둔갑된 경우였다는 사실에서 추정 가능하다.17일본지역과 관계된 간첩사건은 1951∼1969년 검거간 첩 중 조총련 소속이 117명이었고, 1970년 이후 조총련간첩이 상대적으 로 급증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19701975년 조총련 간첩은 97). 이 같은 특징을 감안할 때, 1960년대 간첩의 문제는 한반도차원을 넘어 동 아시아 지정학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성을 제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1960년대 심리전의 권역과 함수관계가 있다. 1951∼1969년 자수한 간첩 2,608명과 생포된 2,391명 중 전향한 간첩의 상당수는 국 가심리전의 체계에 편입되어 심리전의 핵심 주체가 되었다. 여기에다 정 전협정 후 자진월남자들이 포함되고 기존 월남지식인들이 합류하면서 대공심리전의 풍부한 자원이 형성됨으로써 한국 독자적인 심리전이 활 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다. 국가주도 하에서 이들이 전개한 심리 전은 동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파급된다. 라디오심리전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전반에 전파냉전을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재일조선인사회), 대만, 베트남 등지에 귀순자를 직접 파견해 해당국과의 협력적 심리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귀순이란 정체성이 냉전의 규정 속에 특유의 정치성을 낳고, 그 정치성이 냉전동아시아를 횡단하는 심리전으로 확산되는 맥락 은 이 시기 심리전을 접근하는데 필수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지점이다.

따라서 본고는 다양한 성분, 유형, 경로로 귀순한 남파간첩을 비롯한 주 요 귀순자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심리전콘텐츠 를 생산․전파했는가를 실증적으로 재구성하고, 이 전반이 박정희정권 의 대내외적 심리전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계되어 한반도 및 동아시아 문

17 「통일로 가는 전환시대, 문제의 공안사건을 점검한다」, 뺷한겨레뺸, 1988.1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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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냉전에 접속, 기여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귀순과 심리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드물고 또한 소략하다. 심리전 연구는 주로 한국전쟁기 심리전에 치중되었고, 전후의 심리전은 라디오 심리전에 대한 연구가 더러 있을 뿐이다.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

1950.6.291970.6.30)의 운영과 폐쇄, 심리전프로그램에 관한 연구와18동아 시아 문화냉전의 관점에서 1955년부터 개시된 KBS의 ‘자유대한의 소리 일본어방송’에 대한 고찰19등이 있다. 위의 논문들은 1950∼1960년대 전략심리전의 총아인 라디오심리전에 관한 실증적 연구로, 동아시아 전 파냉전의 양상을 드러내준 의의가 크나 일부 라디오심리전에 국한시킨 결과 당대 한국 독자적으로 전개한 심리전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 는 미흡하다. 간첩, 귀순()등에 관한 연구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다양 하게 다루어졌는데, 대체로 간첩담론의 지형과 정치사회적 함의, 귀순 및 반공방첩담론과 반공체제의 재편성 문제, 월남귀순자들에 의한 북한 재현(연구)과 재현의 냉전정치성 구명 등이 있다. 기타 반공(간첩)영화의 문화정치 또는 재일조선인간첩사건을 통한 간첩의 존재론에 대한 규명 이 있었다.20 앞서 거론한 간첩의 실체에 관한 한홍구의 연구 외에는 대

18 김영희, 「1960년대 VUNC(유엔군총사령부방송)의 운영과 폐쇄」, 뺷한국언론학보뺸 56-5, 한국언론학회, 2012; 김영희, 「1960년대 VUNC(유엔군총사령부방송) 프로그램과 청취 양상」, 뺷언론정보연구뺸 51-1,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4.

19 윤상길, 「냉전기 KBS의 ‘자유대한의 소리’ 방송과 對日라디오방송-동아시아 문화냉 전의 파열과 수렴」, 뺷커뮤니케이션이론뺸 15-4, 한국언론학회, 2019.12.

20 간첩, 귀순과 관련해 본고가 주목한 기존 연구로는 김봉국,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간첩 담론의 양가성」(뺷역사연구뺸 22, 역사학연구소, 2012), 후지이 다케시, 「4․19/

5․16시기의 반공체제 재편과 그 논리」(뺷역사문제연구뺸 25, 역사문제연구소, 2011), 임유경, 「일그러진 조국-검역국가의 병리성과 간첩의 위상학」(뺷현대문학의 연구뺸 55, 한국문학연구학회, 2015), 임유경, 「북한 담론의 역사와 재현의 정치학」(뺷상허학 보뺸 56, 상허학회, 2019), 허병식, 「간첩의 시대, 분단 디아스포라의 서사와 경계인 표 상」(뺷한국문학연구뺸 46,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14), 이하나, 「1970년대 간첩/첩 보서사와 과잉냉전의 문화적 감수성」(뺷역사비평뺸 112, 역사비평사, 2015), 장세진, 뺷숨겨진 미래-탈냉전 상상의 계보 1945∼1972뺸, 푸른역사, 2018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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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가시화된 담론, 재현 및 표상, 특정 사건을 대상으로 한 접근이었기 에 국가심리전의 전반적이고도 내밀한 실상을 파악하기엔 일면적일 수 밖에 없다. 이상의 연구를 바탕으로 본고는 동아시아 냉전지정학의 차원 에서 1960년대 한국 독자적인 전략심리전의 체계와 그 시행을 귀순자의 생태와 관련지어 구명하는데 초점을 둔다.

2. 1960년대 반공체제 재편성과 국가심리전 체계

5․16 직후 비상계엄령 하에서 군사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 중 하나가 간첩 및 용공분자의 대대적인 색출․검거였다. 포고18호(5.19) 를 발동해 공산주의 활동의 철저한 규제 및 공산계열의 반국가단체에 대 한 엄중처벌을 선언하고, 간첩자수기간(5.1822)에 2,014명의 용공분자 를 예비검속으로 체포한 것을 비롯해 이후 1962년까지 간첩자수기간 및 방첩강조주간을 5차례 이상 연장, 확대하면서 공격적으로 반공체제의 재편성을 시도했다.21 5․16 이전에도 군․검찰이 주도한 방첩주간이 상 시적으로 시행되어(1958.12 국가보안법 개정 후로는 한두 차례 간첩자수기간 시행 이 병행)반공체제의 강화와 냉전인식의 사회적 확산을 조장한 바 있으나, 5․16 이후는 그 기조와 양상에 확연한 변화가 나타난다. 법무, 공보 등 4개 부처 장관의 간첩자수기간 설정에 관한 공동성명서(1962.3.24)에 잘 나타나 있는데, 간첩의 분쇄를 간첩의 대량 남파공작으로 전환된 북한의

21 특히 5․16 직후에 대대적인 용공분자 색출작업이 이루어졌는데, 5․16 후 한 달 동안 3,098명을 예비 검속했고 군․검․경 합수부의 종합심사 후 중앙정보부의 최종 심사 를 거쳐 2,496명 석방했으며, 중앙정보부는 1961.5.16∼1961.9 820명의 간첩을 검거 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뺷동아일보뺸, 19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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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적 대남전략에 대응하는 한편 조국의 재건 및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 한 국가과제의 최우선적 목표로 간주하고 있다.22간첩의 존재를 ‘간접침 략’으로 규정하고, 이를 민심의 착란, 한미 간의 이간, 관민 간의 반목 획 책 등과 연계시키는 가운데 조국근대화를 방해하는 일체를 모두 반국가 세력, 즉 간첩으로 취급한 것이다. 따라서 간첩의 범위는 북한괴뢰 및 조 총련계로부터 지령을 받고 침투한 간첩, 간첩으로부터 지령을 받았거나 포섭된 사람, 간첩을 숨겼거나 보호한 사람, 5․16 후 용공분자로 도피 중인 사람,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자, 그밖에 이적 행위 및 반국가행 위자 등으로 확대․공지되었다. 간첩에 대한 예방, 색출, 검거를 통해서 對사회통제력을 확보하고 이를 반공체제의 재편성 및 공고화의 자원으 로 활용하는 한편 조국근대화 프로젝트, 특히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적 참여와 동의를 높이는 소재로 활용하는, 반공개발동원체제의 구축이 애 초부터 치밀하게 기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이후 방첩과 승공을 결합한 형태의 국민계몽운동(가령, 내무부 주관의 방첩 및 승공사상계 몽기간’ : 1968420일부터 41일간)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관제공산주의자 와 같은 내부적 타자(비국민)를 창출하는 과정을 동반한 가운데 박정희체 제 내내 권력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확대, 장기 지속되었다.23

22 「간첩자수기간 설정에 대하여」(내무, 국방, 법무, 공보부 장관 공동성명서), 뺷동아일 보뺸, 1962.3.28, 1쪽 광고. 이러한 기조는 박정희의 각종 담화(1961.7.17․11.7 등),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담화(1961.11.7․9.29․12.5․1962.4.10 등), 관계기관의 공동담화문(1962.11.9) 등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23 관제공산주의자의 창출은 국가안보 및 공안 관련 법률(국가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 등)의 제(개)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반공법 제4조를 확대 해석해서 목적범 뿐만 아니라 결과범까지 소추하여 적용함으로써 다량의 관제공산주의자를 만들어내었다.

이 과정에서 5․16 직후에는 전시부역자 및 연좌제에 따른 부역자가족이 관제공산주의자 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고(안우환, 「나는 관제공산주의자」, 뺷동아일보뺸, 1964.5.27), 부역자는 자진 신고하지 않는 경우 간첩으로 취급되었으며 악질 부역행위는 국가보안법의 추급대상이 되었다(1975년 사회안전법 제정 후에는 부칙에 따라 전시부역자 중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모두 보안처분대상이 되었다). 전시에 부역한 남로당원이 “잡히면 죽는다”

는 두려움 때문에 15년 동안 토굴에 은신하다 (자수)검거된 사건은 당시 강권적 부역자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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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16 후의 반공체제 재편과정에서 두 가지 특기할 사항을 발 견할 수 있다. 첫째는 군사정부의 신속한 공보정책 수립과 대내외 공보 활동의 체계적인 추진이다. 쿠데타주체들은 ‘공보목표, 정책, 지침 및 공 보활동의 방침과 구체적 방안’(1961.8)을 입안해 공보정책의 틀과 추진체 계를 정비하고, 이후 각 연도별 시정 목표에 따른 공보시책을 탄력적으 로 재조정하면서 쿠데타의 정당화와 함께 자신들이 구상했던 통치전략 을 강력한 공보사업을 통해 뒷받침하고자 했다. 쿠데타세력이 구상했던 혁명의 단계, 즉 제1단계 ‘구악의 일소’와 제2단계 ‘재건’이라는 단계별 목표에 맞춰 공보정책의 방향과 지침을 정하고,24이에 근거한 공보활동 을 다차원적으로 추진하는 일사불란한 조직과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헤게모니적 지배력을 확보하게 된다. 군사정부의 공보가 국정의 대국민홍보 차원을 넘어 능동적 통제의 수단으로 효과적 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심리전 관련 법․제도와 조직의 정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앙정보부의 창설(1961.6)과 반공법의 제정(1961.7)은 반공체 제 재편 및 국가심리전체계 수립의 근간이 된 기제였다. 쿠데타세력의 전위조직으로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한 정보업무 외 에 수사기능 특히 정보수사에서는 군 정보수사기관 및 검경에 대한 조

정책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뺷동아일보뺸, 1965.6.15).

24 문화공보부, 뺷문화공보 30년뺸, 문화공보부, 1979, 33∼45쪽. ‘공보목표, 정책, 지침 및 공보활동의 방침과 구체적 방안’(1961.8)은 6개항의 공보목표, 6개항의 공보정책, 5 개항의 공보지침 및 선전, 방송, 영화, 언론 등 4개 분야 22개 방침이 제시되어 있다. 이 같은 공보시책은 1962년에는 3개항의 공보 목표와 11개항의 방침, 1963년에는 8개항 의 공보 목표와 35개항의 방침으로 각각 확대 발전되어 한층 체계화되는데, 전체를 관 통하는 기조는 시의적 공보정책의 수립과 이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한 국내외 공보인프 라(법, 행정제도, 기구 등)의 정비 및 구축이었으며, 이 모든 것은 군사정부가 당면했던 쿠데타의 정당성, 경제개발, 반공강화, 민정이양 번복과 정권재창출 등을 위한 국민동 의 기반의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유상수, 「5․16 군사정부의 공보」, 뺷역사와 실학뺸 47, 역사실학회, 20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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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휘 감독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은 최고의 국가정보기구였다.25 김종필이 주도한 중앙정보부의 국가정보에 대한 효율적인 조정 및 통제 기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CIA의 시스템을 모델로 한 것으로, 실제 중앙정보부의 탄생도 CIA와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1959년 CIA의 요청으로 국방장관 직속의 중앙정보부(위장 명칭은‘79호실’) 가 창설되어 미국 CIA-서독 BND(연방정보부)-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소 련 KGB를 견제하는 공동전선을 형성했으며, 4․19 후 국무원 소속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1961.1)로 승계되었다가 5․16 직후 CIA 한국지부 장 P. 실버의 자문을 거쳐(1959.962.7 재임)중앙정보부 창설로 귀결되는 과정을 거친다.26 1963년 대선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의 월권적 정치개입 시비가 불거지면서 중앙정보부법이 개정됨에(1963.12) 따라 수사기관에 대한 통할지휘권이 삭제되고 일반수사권이 대검에 이양되는 등 직무의 범위가 다소 축소되나27오히려 법 개정이 국가정보 운영체계가 정착되 는 계기로 작용한다. 형법 중 내란죄와 외환죄, 군 형법 중 반란죄․이적 죄․군사기밀누설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 규정된 범죄수사로 수사 권의 범위가 구체화되고, 개정법 제13조에 의거 산하에 ‘정보위원회’가 설치되면서(1964.3)중앙정보부는 국가정보정책의 기획과 수립, 외무부, 내무부, 공보부, 군․검․경 등 국가정보관련 기구들을 관할하는 가운데

25 중앙정보부의 설치 근거는 국가재건최고회의법(1961.6.10) 제18조(“공산세력의 간 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중앙정보부를 둔다”)에 있었고, 중앙정보부의 설립 목적 또는 기능은 중앙정보부법(1961.6.10) 제1 조(“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 하에 중앙정보부를 둔 다”)에 명시되어 있다.

26 이에 대해서는 정규진, 뺷한국정보조직뺸, 한울, 2013, 278∼286쪽 참조. 김종필은 중앙 정보부를 만들 때 이후락의 79호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참고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으나(뺷중앙일보뺸, 2015.4.3), 기존 정보기구의 조직, 인적 자원을 흡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7 「일반수사권 대검 이양」, 뺷동아일보뺸, 196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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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를 판단․조정하는 최상위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입지를 확고 하게 구축하게 된다. 5․16 이전 국가정보기구의 우위를 점했던 방첩대

(특무대 후신), 반체제 사건과 사상범에 관한 수사를 관장했던 검찰정보부 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대공 분야에서 사상검사의 시대는 쇠퇴한다.

이 같은 법적 근거와 함께 1964년 기준 37만 명의 요원으로 비대해진 조 직을 운영하면서 중앙정보부는 제5국을 중심으로 간첩수사를 전담하는 동시에 제5국 산하에 ‘국제문제연구소’를 설치해 국내 대공(선전)자료뿐 만 아니라 미 CIA에 의존한 해외정보 수집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해외정 보 수집과 전향간첩, 귀순자를 동원한 각종 심리전자료의 개발 및 생산 을 주도한다. 나아가 제7국 외곽단체로 ‘북한연구소’를 설치(1971.11)운 영하는 방법으로 직접 대북심리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도 간 첩의 색출 및 친()공분자의 사찰은 물론이고 인혁당사건(1964),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사건(1968)등 대규모 공안사건을 기획․관리했으 며,28앞서 거론한 영화검열에의 직접 개입을 비롯한 사상검열의 최종심 급기관으로 군림했다. 1960년대 미국 CIA의 실체가 폭로되며 ‘보이지 않는 정부’로 불렸던 것처럼29중앙정보부 또한 이와 유사한 위상과 권한 을 지닌 가운데 박정희체제를 지탱한 동맥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 법제의 신속한 제()정은 반공체제 재편 및 국가심리전

28 5․16 이후 1970년까지 중앙정보부가 취급한 동백림사건을 비롯한 국내외의 대간첩 사건과 무장공비소탕 작전에 관한 9편의 실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반공계몽의 심리 전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뺷침입자와의 대결뺸(반공지식총서 3), 희망출판사, 1971).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은 유신선포 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에 대한 수사권까지 부여 되면서(1973.3) 직급이 장관급에서 부총리급으로 격상되는데, 특히 제6국에 의해 국 내 정치사찰 업무가 관장되면서 제6국이 ‘肉局’으로 불릴 정도로 중앙정보부는 정치사 찰과 밀실고문수사의 본산이란 악명을 얻게 된다. 중앙정보부의 조직체계 및 직무 범위 가 광대하고 대체로 비밀리에 처리된 특성으로 인해 그 실체가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 인데 박정희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보부에 대한 종합적․객관적 연 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이다.

29 「CIA」, 뺷동아일보뺸, 1966.4.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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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력이었다. 군사정부는 5․16 후 1년 간 총 458건의 법률 제정․공 포와 670건의 각령(閣令), 즉 대통령령을 공포하는 놀라운 입법 실적을 거두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여전히 법적 효력을 지니고 있던 식민지시기 및 미군정기 구 법령 447개를 정비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정 립하는 한편 새로운 입법으로 법적 사회통제의 기틀을 마련한다.30그 중 심에 반공법 제정(1961.7.3)이 있다. 반공법은 민주당정부가 반공을 대의 명분으로 삼아 국가보안법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으로 입법을 시도했다가 무산된 ‘반공임시특별법안’(1961.3)을 승계한 것으로,31 제정 목적은 반공체제를 강화함으로써 공산계열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 있었 다(1). 북한 및 이와 연관된 국내의 반국가단체뿐만 아니라 공산계열 전체가 처벌의 대상이 됨으로써 모든 사회주의국가를 적으로 규정했으 며, 직접 목적수행과 관계없이 적으로 규정된 국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 에 대한 고무, 찬양, 동조 등 이른바 용공적인 행동도 처벌 대상이 되었고

(4), 회합 및 통신행위(5), 월남침투 간첩과 공산지역으로의 탈출

(6)32등도 모두 반국가범죄로 취급되었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

30 공보부, 뺷혁명정부 1년간의 업적뺸, 공보부, 1962.5, 72∼92쪽. 계엄령하 예외상태에서의 입법으로 식민지시기 및 미군정기의 법제적 유산이 청산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다. 문화 관련의 경우 ‘공연법’ 제정으로(1961.12.30) ‘조선흥행 등 취체규칙’(1944년 부령 제197호)이, ‘영화법’ 제정으로(1962.1.20) 미군정법령 제68호(활동사진의 취체, 1946.4)와 제115호(영화의 허가, 1946.10)가, ‘외국정기간행물수입배포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1961.12.30) 미군정법령 제88호(신문급기타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 1946.5.29)가,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1961.12.30) 미군정법 령 제19호 제5조(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록, 1945.10.30)가 각각 폐지되었다.

31 민주당정부는 4․19혁명 후 공산세력의 교란활동이 극심해지는데 현행법으로는 처벌 이 불가하다는 근거로 반공특별법을 성안하고 ‘반공임시특별법안(시안)에 대한 국민 제현의 비판을 바란다’는 장문의 광고를 연일 일간신문에 게재해 국민의 이해와 지지 를 호소했으나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입법이 결국 무산되었다. 당시 민족일보는 이 법 안의 반민주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가운데 ‘민주주의의 屠殺法’으로 규정한 바 있다.

「반공특별법은 기본 인권의 유린이다」(사설), 뺷민족일보뺸, 1961.3.12.

32 반공법상 공산지역으로의 탈출죄는 1961년 12월 월북하려던 김평근에게 처음 적용된 (뺷조선일보뺸, 1961.12.13) 이래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다수의 월북기도사건에 대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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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법’ 제정으로(1961.6.22)특수반국가행위를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부칙에 의거 그 처벌 시기를 소급 적용해(36개월) 4․

19혁명 후의 혁신운동 관련자들을 반국가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 치를 마련한 뒤 곧바로 국가보안법보다 처벌 범위, 대상, 형량이 확대 강 화된 반공법이 공포됨으로써 북한과의 적대적 대결관계가 고조되는 동 시에 내부적 타자의 창출을 동반한 억압적 사회통제가 정착되기에 이른 다.33군사정부는 5․16 후 반공체제 확립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보 다 반공법 제정을 꼽은 가운데 반공법의 법적 근거 하에 용공세력의 선 제적인 제거, 반공프로파간다 및 대공심리전 강화 등의 반공시책을 원활 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34

반공법과 더불어 국가보안법도 대공심리전 시행의 법적 기제로 작용 했다. 국가보안법은 4․19혁명 직후 1958년 ‘2․4파동’ 당시 통과된 국 가보안법의 독소조항 제거를 골자로 한 개정과정을 거친다(1960.6.1). 그 러나 인심혹란죄, 헌법상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 등 반민주적 독소조항의 삭제라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개정국가보안법 또한 여러 한계 를 드러냈는데, 특히 불고지죄(9)의 신설이 가장 큰 사회적 논란거리 가 되었다. 반국가단체구성원 및 그 지령을 받은 자의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인지하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되는 불고지죄는 사회내부에 밀고를 조장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실제 불고지죄가 적용된 오화섭교수 구속사건, 한옥신부장검사구속사건 등으로 불고지죄의 위헌 논란이 거 세게 일었다.35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가 계속 존치되고 반공법상에도

소의 법적 근거로 활용되었다.

33 반공법 제정의 경과와 주요내용에 대해서는 박원순, 뺷국가보안법연구뺸(1-국가보안 법 변천사), 역사비평사, 2004, 193∼201쪽 참고.

34 「혁명이년간의 반공의 발자취」(성명서), 뺷경향신문뺸, 1963.10.14, 1쪽 광고.

35 「불고지죄와 혈육의 정」, 뺷동아일보뺸, 1960.11.2.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는 본범과 친 족관계가 있는 때에는 형을 감면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었으나 일반형법상 친족, 호주 또는 동거의 가족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오화섭은 1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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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규정이 명문화되면서(8)남파간첩, 특히 구 남로당원 위주의 대 량 남파공작이 활성화된 1960년대 남파간첩에 대한 검거에 효과적인 장 치로 기능했다.

1960년대 검거간첩의 검거단서별 분류에서 ‘신고’에 의한 검거가 약 28%로(471 / 1,686), 1950년대의 5.5%(92 / 1,674), 1970년대 15%(104 /

681)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것은 불고지죄의 효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고지죄는 방첩사상을 고취시키고, 자수하 지 않은 전시부역자를 비롯해 사회내부의 용공분자들에 대한 색출, 신 고, 자수를 권장하는 촉매제가 되면서 반공만능주의의 상호 감시체계를 부식하는 데도 일조했다. 군사정부는 반공법 제정 후에도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킨 가운데 일부 조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1962.9.24). 반 국가적 범죄의 재범자에 대한 특수가중처벌 조항(102), 즉 법정형 의 최고를 사형으로 강화하는 내용을 신설하는데, 이는 다수 미전향자의 반국가적 범죄의 사전 차단과 함께 이들에 대한 전향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36이렇듯 반공법 제정과 국가보안법의 존속 및 개정에 의한 사 상법제의 정비는 능동적 사회통제의 법적 기제 확보, 대내외적 심리전의 공세적 추진 동력이 되었다.37

선고유예를 받은 뒤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1961.3), 문제의 원인이 된 그의 매 부 정연철(남파간첩)은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형이 최종 확정 되었다.

36 박원순, 앞의 책, 201∼202쪽.

37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상당부분 중복되나 신법우선 원칙에 따라 반공법이 우선 적용 되었고, 특히 반공법이 반국가단체 및 그 구성원의 목적수행에만 적용되었던 국가보안 법(제3조)과 달리 목적범뿐만 아니라 반국가단체 구성 및 가입도 처벌할 수 있었기 때 문에(제4조) 1980년 12월 폐지되기까지 박정희정권의 사회통제를 위한 가장 강력한 법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1964년 인혁당사건 때 검찰에 의해 증거부족의 이유로 불기 소되자 중앙정보부(5국)가 직접 개입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한 공소취하 신청을 내고 그중 13명에 대해서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등을 규정한 반공법 제4조 1항 위반혐 의로 공소장 변경신청을 제출하여 결국 기소시키는 것에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공존 시대의 사회 및 사상통제의 강권적 작동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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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보기구의 정비에 따른 공보행정의 일원적 체계화는 군사정 부의 공보목표 및 정책을 구현하는 제도적 기반이었다. 공보부의 신설과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을(1961.6.21)통해 공보부는 언 론․방송․출판, 문화예술 분야 대부분의 업무를 전담하게 되고, 대내외 국가심리전 또한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공 보기구로 자리 잡게 된다. 이에 걸맞게 공보부가 단기간에 추진, 시행한 공보사업의 영역은 광범위했다. 눈에 띄는 것을 꼽아보면 우선 조사국이 담당한 사회조사사업이다. 홍보선전매체의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공보부 가 1960년대에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가 44회에 달하는데,38사회조사연 구에 바탕을 둔 당면 공보정책의 수립을 시도한 경우는 정부수립 후 최초 이다. 특히 5․16 직후 곧바로 실시한 전국홍보선전매개체실태조사

(1961.9.312)는 행정력을 총동원한 전국 대상의 직접조사 방법으로 실시 했고 그 실태조사결과를 공보선전정책 수립의 기초로 활용했다는 점에 서 의미가 적지 않다. 이 기간 전국극빈자부락실태, 전국라디오보급실태 등 16개 항목을 조사한 뒤 그 수집 자료와 결과분석을 통해 홍보선전의 지침 작성, 선전 자료의 제작․배포, 공보인프라 구축방안의 마련 등으로 연결되는 반공선전의 체계화를 도모함으로써 공보사업의 효율성을 제고 할 수 있었다.39가령 라디오보급실태 조사에 근거해 농어촌 라디오스피

김경재, 뺷혁명과 우상-김형욱 회고록뺸 2, 인물과사상사, 2009, 266∼272쪽 참조.

38 공보부조사국이 1960년대에 실시한 각종 사회조사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문화공보부, 앞의 책, 50∼58쪽(사회조사실적 일람표) 참조.

39 전국홍보선전매개체실태조사 보고서는 제1집(뺷전국극빈부락실태조사보고서뺸, 1961.

9.18), 제2집(뺷전국시도공보과, 전국공보관 및 문화관, 전국농촌문고 실태조사보고서뺸, 1961.10.1), 제3집(뺷전국공설라디오․앰푸촌, 전국사설라디오․앰푸촌, 전국국민학 교라디오․앰푸, 전국트랜지스타․라디오 실태조사보고서뺸, 1961.10.15), 제4집(뺷각 종홍보선전간행물배부, 각종영사반순회상영 실태조사보고서뺸, 1961.10.27), 제5집 (뺷전국농사원․농사교도소, 전국농업협동조합, 전국수산조합․어업조합, 전국지역사 회개발시범부락, 전국4-H구락부 실태조사보고서뺸, 1961.10.30), 제6집(뺷전국신문보 급 실태조사보고서뺸, 1961.11.8), 제7집(뺷전국전기 및 라디오보급 실태조사보고서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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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보내기 운동, 방송시설에 대한 출력 증강, 지방송신소 및 중계소 건립 등을 통해 라디오프로파간다시대를 개척하는 과정이나, 극빈부락, 농촌 문고, 지역사회개발시범부락 및 4-H구락부, 농사원 및 농협․어업조합 등 지방농촌실태조사에 근거한 농촌근대화사업의 단계적 추진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5․16 후 1년 동안의 기간 조사연구 실시 및 결과보고자료 발간이 다수인데, 과학연구조성활동 및 과학자 실태조사

(인문과학부 159, 자연과학부 320), 국내학술단체 조사(인문과학계 38, 자연 과학계 81)등이 있으며, 자료집 발간으로는 국민건의분석결과 보고(16 ), 북한괴뢰중앙통신 보고(매일 1회간), 국내신문논조보고(매일 2회간), 국 내신문논조평가(1회간), 국내주요잡지 종합평가(월간), 심리전 교재 및 시범도 공보활동 종합보고, 정부업적(월간)등 총 94건이었다. 이를 통해 군사정부가 공보를 얼마나 중시했고 어떻게 준비를 철저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5․16 후 쿠데타세력의 정권 장악과 사회문화 통제가 단순히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것만이 아닌 나름의 헤게모니적 지배를 모 색․발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련의 사회조사를 바탕으로 한 공보부의 반공선전 및 전략심리전 업 무는 주로 산하 조직단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특징이 있다. 민간반공단 체를 발족시키거나 기존 단체를 편입시켜 선전업무를 다차원적으로 분 업화하는 방법이다. 외무부 소관이던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의 지도․감독 권한을 공보부로 이관시키고 이를 매개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냉전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한 심리전 전 개의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한국아세아반공연맹 조직의 확대 개편과 더 불어 그 산하에 다수의 반공단체들을 결집시켜 반공활동의 지도적 역할

1961.11.8) 등으로 출간되었다(비매품). 그리고 제8집(뺷전국홍보선전매개체실태조사 총평뺸, 1961.12.26)을 통해 조사결과에 대한 분석, 해외국가와의 비교, 정책방안 제시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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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전자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임시총회의 서울 개최(1962.5.1015, 16개 회원국 및 18개 옵서버국가 참가)를 강행해 (동남)아시아 의 공산주의침략에 대한 공동대응 결의안을 채택해 아시아반공유대를 강화하고 특히 ‘자유센터(아세아반공센터)’ 의 한국 설치를 이끌어내 범아 시아 대공심리전의 구심체로 삼는다. 이렇게 확보된 반공이니셔티브를 세계반공연맹(WACL)의 창설(1967.9)로 발전시켜 국제반공연대를 강화하 고 이를 활용한 체제우월성 선전의 반공외교전을 추진했다. 후자의 경우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을 공보부로 이관하는 동시에 사회문화단체들과 여 성계, 종교계, 법조계 등 직능단체를 대거 참여시켜 범국민적 반공단체로 격상시킨 가운데40북한5도관계기구, 귀순자 및 반공포로들로 구성된 단 체들, 예컨대 ‘국민반공계몽단’, ‘귀순자동맹’, ‘동방통신사’ 등을 통합해

‘이북해방연맹(북한해방촉진회)’ 발족으로 유도하고 이를 산하기구로 편입 시켜(1961.12)대공심리전의 전위로 활용한다.41 APACL의 한국지부였던

40 1961년 11월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이사장 박관수)의 조직 개편 때 이사진으로 참여한 주요 문화계 인사로 주요섭, 정충량(상임이사), 이용희, 조의설, 김형석, 유진순(학계), 한경직(종교계), 조지훈, 김성태, 유치진, 오영진, 모윤숙, 허우성(예술문화계), 김활란, 김옥실(여성계) 등이 눈에 띈다. 한재덕, 김창순이 연구원으로 채용되었고,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고문으로 포함되었다.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의 재편과 자유센터 설치는 김종 필이 기획 주도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아시아재단과의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 아시아재 단은 이 기구가 중앙정보부의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지렛대 로 삼으려는 의도로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는 US & International Conference-Asian People Anti Communist League(APACL), The Asia Foundation, Box No.P-014, Hoover Institution Archives; Korea-Organization Asian People Anti Communist League(APACL) July 1962, The Asia Foundation, Box No.P-277, Hoover Institution Archives.

41 4․19혁명의 시공간에서 진보적 통일운동에 대항한 반공단체들이 귀순자, 전향간첩, 반공포로, 재향군인들에 의해 다수 발족되어 활동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국민반공계몽단(1960.10 결성)은 정보정훈장교 출신이 조직한 재향군인단체로 성 명서발표와 대규모집회를 통해 민주당정부의 반공방첩운동을 주도했다. 주요일간신문 에 광고한 이 단체명의의 장문의 성명서로는 「조속한 정국 안정으로 공산도당의 준동 을 막자」(1960.10.20), 「공산간첩의 준동을 분쇄하자!」(1960.11.2), 「북한괴뢰의 대 남협상 제의를 통박한다」(1960.12.11), 「중립화론은 이래서 반대한다」(19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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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세아반공연맹은 ()한국반공연맹으로 법정기구화 되어(1964) 산 하에 13단체를 둔 세계 최대 반공단체로 거듭난 뒤 대내외 반공프로파간 다를 총괄하는 민간반공운동의 거점기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민족일보사건을 필두로 반국가(용공)세력에 대한 선제적 제압 을 통해 반공체제 재편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뒤 군사정부의 공보목표 및 정책의 기조가 점차 반공선전과 결합한 대내외 심리전을 강화하는 방 향으로 전환된다. 그 면모는 1963년부터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1963년 공보부의 공보목표 및 방침에서 국제적인 공보활동 추진, 대공 및 반공 선전활동체제 확립, 심리전 체제의 강화 등을 소목표로 제시하고 재외동 포의 선도, 학계와 매스컴의 동원, 심리전요원 양성, 라디오심리전 전개 등 15항의 구체적 방침을 설정하고 있다.42이에 따라 심리전 총괄기관인 공보부의 국가심리전이 공보인프라 확충을 발판으로 보다 공세적으로 추진된다. 이 또한 산하기구별 분업적 체계화에 따른 전문성을 띠는데, 먼저 내외문제연구소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내외문제연구소는 국내외 제반 현안에 대한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공보논리 개발과 공보자료의 작성 및 배포를 위한 시급성 속에 조사국 산하에 설치된(1961.9.7)후 특히

「전국학생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왜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가?」(1961.2.9) 등 이 있다. 동방통신사는 전향간첩(이철주), 귀순자(한재덕)가 주도한 단체로 조선중앙 통신, 신화사통신, 타스통신 등 공산권 3대 통신을 해설을 첨부해 일간 동방통신으로 발간했고, 귀순자들의 증언수기집 출판을 통해 공산권(북한)자료 수집 및 분석의 업무 를 수행했다. 민주당정부의 국가보안법 개정 및 강화방침 과정에서 공산권통신의 직접 수신 문제가 논란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은 바 있다.

42 국가재건최고회의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뺷한국군사혁명사뺸(상), 1963.8, 424∼

425쪽. 대공심리전과 관련된 공보목표 및 방침으로는 ‘⑦ 대공 및 반공선전활동체제를 확립한다’(민족 간 문제 연구기관을 보강하여 민족정신 앙양을 위한 학계와 매스컴을 최대한 동원한다, 한국아세아반공연맹의 활동을 강화한다), ‘⑧ 심리전 체제를 강화한 다’(심리전요원을 훈련 양성한다, 대내 대북방송은 심리 전략의 실효를 거두도록 질을 향상한다, 대외방송을 적극 강화한다, 외국어방송을 통하여 공산 및 제삼국에 대한 선 전활동을 강화한다, 대이북방송을 강화하는 한편 발원지를 모르게 비밀방송을 병행한 다)이다. 1963년부터 대내외 심리전에 한층 더 주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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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북한)자료․선전물 수집․분석과 대공심리전 자료 제작 및 배포, 심리전교재 발간 등을 주도했다. 내외문제연구소가 대공심리전의 자료 센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전문가들의 동원 또는 자발적인 참여 에 따른 인력 풀이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귀순자동맹, 동방통신사 등 기 존 지식인귀순자집단(한재덕, 이철주, 이동준 등)과 사상 심사를 통과한 5․

16 후의 남파전향간첩(김남식, 오기완 등)및 월남귀순자들 그리고 월남반 공이데올로그들(양호민, 김창순, 유완식 등)이 주축이었다.

내외문제연구소가 생산한 최신 공산권자료는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투 영된 것으로 대중미디어에 독점적으로 공급된다. 따라서 정기간행물, 방 송 등 모든 미디어의 공산권(북한)기사는 내외문제연구소가 배포한 자료 에 의존해 보도될 수 있었고 자료 출처가 내외문제연구소임을 명시해야 했다. 주요일간지에는 하루 평균 1회 보도 자료가 제공되었고(뺷조선일보뺸, 1961.12.21), 1963년 9월 기준 주요일간지에 제공한 공산권자료 총량이 1,325회 분에 해당할 정도로 그 양이 막대했다.43사상계, 세대 등 종 합지의 북한관련 연재는 더더욱 의존도가 높았다. 지면이 대공심리전의 지탄(紙彈)이 된 것이다. 각 미디어가 자체 기획 생산한 자료는 1964년 11 월 세대 필화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화된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게다가 보안업무규정(1965.7)에 의해 북한자료는 극소수의 배부대상자 외에 접근 내지 열람이 불허되는 상황이 지속됨으로써 내외문제연구소의 독점적 자 료 공급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조건이 지속되면서 대부분의 미 디어는 공보부가 주관한 심리전의 하위파트너로 배치되기에 이르렀고, 이 시스템으로 인해 냉전대결 논리와 북한에 대한 적대적 재현의 크렘리 놀리지(Kremlinology)가 사회 및 일반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전달, 부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44또한 공산권 및 북한자료의 한국 독자적인 집성․축적

43 「혁명이년간의 반공의 발자취」(성명서), 뺷경향신문뺸, 1963.10.14.

44 특히 당대 여론형성을 주도한 신문미디어가 크렘리놀리지의 사회적 조장에 막강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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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탕으로 북한연구가 촉진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북한연구 의 지평이 제한, 왜곡되는 양상이 제도화된다.45내외문제연구소의 공산 권 자료에 대한 배타적 독점화는 공보부명의의 단행본, 예컨대 북한20 년(1965), 오늘의 월남(1966), <현대사와 공산주의>시리즈(2, 1968

1969)등으로 출간, 배포되는 과정을 수반하며 지속되는 가운데 1970년대 에는 부설기관으로 내외통신사를 설치해(1974)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자료 를 해외언론기관에 보급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면서 내외문제연구 소는 박정희체제 내내 대내외 국가심리전 공식적 센터가 된다.

내외문제연구소의 심리전은 자료 수집 및 제공에 그치지 않고 직접 승 공프로파간다도 수행했다. 내외문고 시리즈를 통해서인데, 가짜김일성 론과 김일성의 항일혁명운동 왜곡을 중심으로 북한정권의 반민족성을 폭로한 공산당은 國史를 이렇게 위조하였다(1961.12)를 시작으로 중공 의 홍위병(1969)까지 총 31권이 출간되었다. 내외문고의 구성은 5가지 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공산주의의 이념, 실체, 동향에 대한 비판서 10권, 북한정권의 성격, 침략, 숙청, 사회실태 등에 대한 해부서 9권, 중립주의 비판과 아․아 비동맹국가의 공산주의운동에 관한 개설서 4권, 포로와 귀순자의 수기 및 전향서 5권, 문화대혁명 이후의 중공의 실정에 관한 비 판서 3권 등 전체적으로 냉전진영론에 입각한 체제우월성을 설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문고본 형태이나 풍부한 근거 자료 중심의 실증적 접 근으로 인해 가독성을 높인 점과 각 권의 발간시점을 고려할 때 여론의 관심사로 대두된 반공이슈를 실시간으로 반영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는‘지배와 저항의 상호경쟁의 과정을 통해 1950년대 간첩(방첩) 담론이 재생산되고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메커니즘’(김봉국, 「한국전쟁 이후 1950년 대 간첩 담론의 양가성」,뺷역사연구뺸 22, 역사학연구소, 2012, 134∼136쪽)과는 판이 한 양상이다. 1960년대는 관계당국과 언론기관과의 유착, 공조 속에 반공프로파간다가 국민운동의 차원으로 전개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45 이에 대해서는 이봉범, 「냉전과 북한연구, 1960년대 북한학 성립의 안팎」, 뺷한국학연 구뺸 56,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20, 63∼6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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