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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세계관과 현실인식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77-82)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원죄 의식’으로 시작된다.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죄에 대한 끊임없는 참회 없이는 구원도 없다 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은 기독교 시인들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 는 바, 고정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그것이 절대자에 대 한 기도 일변도의 단순하고도 상투적인 참회나 찬양이 아닌, 인간적 고뇌와 갈등의 표현을 통한 구원의 모색임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에 관련된 서적을 간행하는 등 고정희의 종교 활동81)은 그 범위가 남달랐으며, "광주Y 가 내게 생의 길을 열어준 곳이라면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은 생의 내용을 가르쳐준

학』, 2000.

81) 고정희는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기독교문사에서『기독교대백과사전』을 편찬하였 고, 1984년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간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1985년에는 『예수 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 (기민사)를 엮었다.

곳"82) 이라고 회고하고 있듯이, 종교가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정희의 시세계를 논함에 있어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독교 문학의 범주에 쓰인 언어들은 고백적이고 실존적이기보다는 교리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들로 꽉 차 있다. 무조건 기도 형식의 시면 신앙 시이고,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면 기독교 시라고 분류하는 문학적 태도는 기독교 문화에 아무런 보 탬이 될 수 없다.", "참된 기독교 문학은 가장 문학다운 문학작품이어야 한다"83)는 것이 고정희가 밝힌 기독교 문학이다. 그는 또한 사랑, 나눔, 정의, 평등과 같은 기 독교적 가치관이 문학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균형 있게 형상화 된 작품만이 기독교 문학으로서의 위의를 획득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참된 기독교 문학은 이와 같은 문학의 본분에 충실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에는 종교와 문학의 독자적 영역을 존중하며 문학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자신 의 시관을 기저로 기독교의 교리를 시 속에 녹여내되 문학성을 염두에 두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김정환은 시집 『초혼제』의 발문84)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기행』등 그의 초기 시집을 읽 으면 그는 분명 상당히 기독교적인 구원의 차원, 그리고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고통의 차원에서 몸부림치고 절규했던 시인이다. 사실 고정희라는 시인을 만 나고 알게 된 다음부터 나를 줄곧 사로잡은 단어는 '고통'과 '구원'이었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그리고 기독교 시(詩)에 있어서 고통과 구원이란 말이 쉽게 빠져왔던 함정으로서의 한계는 개인(혹은 소우주로서의 예수)고통의 우 상화 문제, 개인 구원주의로서의 보수신학이 그것이다. (중략)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기독교주의' '고통주의' '고독주의'에서 고정희는 분연히 벗어난다.

시인에게 있어 어떤 개인주의로서의 구원, 내면적 자아로서의 고통 등의 차원 을 벗어나, 민중 속에서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3인칭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물론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수반하는 결단의 시기를 거쳐야 가 능할 터이지만, 문학에 있어서, 아니 고정희의 시에 있어서 그것은 어떠한

82) 고정희, 『고정희 시전집1』, 또하나의문화, 2011, 97쪽.

83) 고정희 엮음, 『예수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 기민사, 1985. 9쪽.

84) 고정희, 『초혼제』, 창작과비평사, 1983, 168쪽.

'전달무기'의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게 되는가?"

이어서 그는 고정희 시인이 '고향정신의 획득'과 '풍자정신의 채택'을 통해 개인 적 고뇌의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김정환이 고정희의 '전달무기'로 들고있는 '고향정신'과 '풍자정신'은 같은 책 후기에 쓴 고정희의 변과 일맥상통한 다. 고정희는 후기85)에서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한 유산으로 활용하고 싶어서 마당 굿시 같은 한국적인 언어와 풍습의 작품들을 재조명해봤다고 쓰고 있다. 즉 전통적 장르의 규범을 따르면서 민중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해내는 동시에 당시의 현실에 대 한 풍자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 시 형식을 발굴해내려는 의도로서 패러 디가 사용되었으며, 이때 패러디는 고정희가 기독교 문학을 '3인칭의 바다'로 끌고 나아가는데도 확실한 '전달무기'로서의 기능을 절대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고정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시집 『이 시대의 아벨』에 수록 된 같은 제목의 시를 보자.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칫상에서 주린 배 움켜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오르던

85) 내용적으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 어두운 정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 한편 조직사회 속에서의 인간성 회복의 문제가 크나큰 부담으로 따라다녔고, 형 식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적 가락을 여하이 오늘에 새롭게 접목시키느냐가 최대의 관심 사였다. 나는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한 유산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의 결 과로 생겨난 것이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과 같은 마당굿시이고 「우리들의 순장」

은 79년에 발간된 첫 시집에서 「차라투스트라」라는 서구적 제목으로 씌어졌던 시대 인식을 다시 한국적인 언어와 풍습 속에 재조명해 봤다. (고정희,「후기」,『초혼 제』, 창작과비평사, 1983.)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이 시대의 아벨」부분

위의 작품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일컬어지는 카인과 그에게 살해당하는 아벨의 이야기를 원텍스트로 하고 있는 패러디시이다.

고정희는“아벨”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원텍스트를 의식적으로 전경화시키고 있다.

「창세기」4장 9절에서 10절의 내용을 살펴보면,“여화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하느니라”라고 쓰여있다.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돌로 쳐 죽인 카인에 게 야훼가“네 동생 아벨은 어디있느냐?” 라고 꾸짖었듯이, 인용시「이 시대의 아 벨」에서 시적 화자는 청자를 향하여 아벨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음을 던진다. 여기 에서 ‘아벨’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짊어진” 우리 사회의 폐부이 며, 짓눌린 양심이다. 고정희는 대표적 민중 신학적 시인이다. 때문에 우리 역사 속 에서 짓눌림을 받아온 민중의 형상을 ‘아벨’로 표상하여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에 침묵으로 일관해온 자들에게,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 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라고 경고하며 동참을 요구한다. 이 를 통해 개인의 고통을 넘어 민중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함으로써 기독교 의식의 폭 을 역사적 지평으로 넓혀가려는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같은 시집에 실린「디아스포라」 연작시를 살펴보겠다. 이 작품들 역시 성 경을 원텍스트로 하였으나 사회 비판보다는 인간 실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사전적 의미는‘흩어짐’의 뜻으로,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는 말이다.

이 ‘흩어진 사람들’, 즉 ‘이산자(離散者)’들은 고국, 가족, 삶의 터전을 떠나 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종교적으로 다양하지만, 고정희는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현상을 과거 유대인들의 삶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형식 또한 디아스포라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시를 쓰고 있 다. “슬픔에게”, “환상가에게”, “발에게”, “길에게”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 듯이 고정희에게 인간은 떠돌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로 비춰진다.

흐리고 어두운 날

남산에 우뚝 선 해방촌 교회당은 날벼락을 맞아 검게 울고

무더위로 가라앉는 내 몸 속에서는 그리운 신호처럼 전신주가 운다 (중략)

민들레 한 송이

서늘하게 흔들리는 오후,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디어 칼 쓴 예수가 갈지자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디아스포라-슬픔에게」부분

근대사회는 이주의 시대이며,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아가고 있다. 이주 주 체에게 새로운 공간은 뿌리내림과 정체성의 도전 장소이다. 이렇게 디아스포라의 처 지에 있는 이주자들의 삶을 고정희는 그의 시에서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로 묘 사한다.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기에 소수자가 되어 버린 그들에게, 삶은 “불로 일어서다가/ 분노가 되다가/ 이내 다시/ 내 고향 해남의 상여소리”처럼 불안하게 흔들린다. 이들은 “해방촌 교회당”을 통해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줄 예수를 찾 지만, “칼”을 쓴 채로 “갈지자로 걸어 들어오는”그 예수 또한 자신들의 삶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이렇게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묘사를 통해 고 정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를 함께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 공습경보가 그치면 우리는 또다시 떠나야 한다 (중략)

누군들 사막에서 외롭지 않으리 누군들 행복을 탐내지 않으랴만 젊음이 길임을 굳게 믿는 우리는 두 벌 옷과 전대를 지녀서도 안 되리 한 벌 옷과 꿈으로 바람을 가리고 다만 그리운 등을 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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