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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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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는 문학 창작의 중요한 기법으로서 그 역사는 우리 문학사와 함께 한다. 패 러디에 대한 논의는 논자들의 관점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는데, 모방과 변용의 차원 에서 원텍스트의 풍자적 모방이라는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쓰였는가 하면, 과거 문 학작품의 상호테스트성과 자기반영성의 개념으로 확대 재생산된다는 보다 포괄적이 고 긍정적인 논의가 있다. 패러디의 영역은 어휘나 문체, 어조, 구조 등 형식적인 요소에서부터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현대시는 상호텍스트 성을 이루는 대상을 과거의 문학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상품 광고, 신문기사, 만화, 무협소설, 영화, 사진, 플래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텍스트를 원전으로 하는 혼성 모방의 양상으로 보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패러디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전개된다. 원텍스트를 계 승하는 모방적 패러디, 원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비판적 패러디 그리고 원 텍스트를 중성적으로 발췌· 조합하는 혼성모방적 패러디이다. 모방적 패러디의 대표 시인으로 김소월과 서정주를 들 수 있으며, 비판적 패러디에는 김지하의 풍자시가 속한다. 또한 황지우, 오규원, 박남철, 유하, 장정일, 장경린 등은 1990년대 초부터 생성된 혼성모방적 패러디 시인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같은 패러디 방식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미학적 가치의 구현을 통해 우리 문학사와 함께 앞으로도 꾸준히 시도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고정희의 패러디시를 원텍스트의 유형에 따라 분류하고, 그 미학적 변 용과정을 고찰하였다. 고정희 시에 나타난 주요 패러디 방식은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연희적 텍스트 패러디, 고전문학 텍스트 패러디, 기독교 텍스트 패러디, 현대문학 텍스트 패러디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연희적 텍스트 패러디에서는 전통민 중예술인 굿을 차용한 마당굿시와 역사적 죽음에 대한 추모적 제의의 장시를 통하여 민중예술의 가치를 높이고 문학적 애도의 기능을 담았다. 고전문학 텍스트 패러디에 서는 고전시가의 리듬과 형식을 차용하고, 고전 속 여성화자를 통한 여성적 글쓰기 를 시도하여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내었다. 또한 기독교 텍스트 패러디에서는 기독교적 실존에 바탕을 둔 현실인식으로 종교와 문학의 관계 를 환기시키고 성경의 권위와 위엄으로 현실참여의식을 높였다. 현대문학 텍스트 패 러디에서는 이미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과 사건을 패러디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실천 문학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고정희 시에서 패러디가 도입된 배경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시대의 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문학적 애도의 형식으로서 마당굿시가 도입 되었다. 둘째, 여성적 글쓰기에 있어서 패러디는 해방된 세계관을 담을 수 있는 새 로운 양식적 실험이 될 수 있었다. 셋째, 성경 속의 등장인물과 기도문 또는 현대시 의 패러디 등을 통해 지배계층과 권력을 비판하고자 패러디 양식을 도입하였다.

고정희가 도입한 다양한 패러디 양식 중 무가와 마당극을 패러디하여 새롭게 탄생 시킨 마당굿시는 전통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현실 참여적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 낼 수 있는 창작 방식으로 고정희의 시적 토대가 되었는데 그 의의를 살펴보면, 먼 저 우리의 전통 장르인 무가를 시에 접목시켜 굿의 본래적인 형식 속에 당시의 사회 상을 담아내는 비판적 수용의 자세로 이를 활용하였다. 또 무가에서 이루어지는 여 성의 역할에 주목함으로써 여성적 글쓰기의 주요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무가의 씻김 굿 형식을 이용한 문학적 애도의 발화 방식은 문학과 삶이 일치하는 실천문학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굿의 신명과 놀이를 시에 이용함으로써 공동체의 대동단결 을 꾀했다는데 마당굿시의 큰 의의가 있다.

앞서 밝혔듯이 고정희의 문학적 시도는 삶과 문학을 통합한다는 전제에 항상 충실 하였다. 그는 여성 시인으로서 뚜렷한 현실 인식과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좁 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넘어서 새로운 시정신과 미학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로 인 해 고정희의 시에는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가 채택한 방식들 이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것으로 때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에 대한 꾸준한 탐구는 그에게 과거와 현대를 연결해주는 패러디라는 방법론을 발견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고정희는 당대의 시대적 모순을 비판하며 문학적 실 천을 해나갈 수 있었다.

패러디화는 과거를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끊임없이 과거에 의문을 품으며 지속과 변화, 권위와 위반의 양가성을 동시에 추구한다.97) 이같은 패러디 방식은 전통적 계 승과 혁신을 동시에 보여준다. 더구나 여성이 주체가 된 고전 문학은 고정희에게 있 어 과거를 폐기하려는 요강이 아니라 당대 세계에 적절한 창조로 과거를 변화시키려 는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이로써 그는 과거의 세계를 왜곡시키지 않고 해학적으로, 심미적으로 변용시켜서 여기에 형이상학적 의

97) 린다 허천, 김상구· 윤여복 공역, 『패러디 이론』, 문예출판사, 1992, 35쪽.

미를 부여했다. 또한 기독교의 성경 속 인물이나 기도문의 변형은 신성 모독이 아니 라 당대의 타락된 삶을 겨냥한 패러디시로 재탄생된다. 이렇듯 패러디는 고정희 시 세계 속에서 과거는 보존되고, 보존되었던 과거는 새로운 현대화로 환원되면서 지속 성과 변화성을 획득하고 있다.

고정희가 그의 시에 패러디를 활용함으로써 거둔 성과는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현대시에 전통 율격을 접목시키는 등 형식의 다변화를 꾀했으며, 무가·

민요· 시조 등 소재 수용의 확대에 기여했다. 둘째, 원텍스트에 대한 친화적 입장과 비판적 입장을 함께 드러내었다. 친화적 입장일 경우, 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승인 과 계승에 치중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원텍스트의 새로운 해석이나 개작에 주력하여 비판적 기능을 높였다. 셋째, 이미 독자에게 친숙해져 있 는 구조를 패러디하여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친연성을 강화시키고 능동적 독자로서 의 위치 정립을 공고히 하도록 도왔다.

이렇게 고정희의 시세계에서 패러디는 그 자체로서 정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해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미학적 가치를 높이는 창조적 작업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패러디 작품을 통한 독자의 계몽과 사회적 변화에 역점을 두어 그 기능 이나 목적에 치중하다 보니 시로서의 미학을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아 쉬운 점으로 남는다. 하지만 패러디 자체가 가지는 가치, 즉 어떤 목적과 효과를 위 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성과 무용성을 평가해야 하듯이 고정희의 패러디시 또 한 텍스트와의 상호관련성을 통한 효과에 따라 작품의 문학적 평가를 달리 해야 할 것이다.

한 시인의 패러디 작품을 중심으로 고찰하다 보니, 패러디의 이론 전반에 대해서 는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정희의 시세계를 패러디를 중심으로 초점화함 으로써 문학적 양식에 대한 시인의 선구적 의식을 규명해낼 수 있었다. 그가 정형화 된 서정시의 틀에서 벗어나 다각적 실험을 통해 시세계를 확장해 간 궤적은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 그동안 고정희 시에 대한 주제적 측면의 연구에 비 해 패러디를 통한 시적 발화방식이나 형식적 측면에 대한 연구가 미약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논문이 연구사적 균형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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