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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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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인데요”라고 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히토츠바시대학의 졸업생이었다. 빗길에도 불구 하고 히토츠바시대학이 있는 구니다치로 향했고, 사회인으로 인생의 원점에 다시금 서서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정책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모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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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나카류 직구… 자민당은 움찔

!

10월 21일 중요한 1주일의 첫날, 눈을 떴을 때 몸이 이상 하다고 느꼈다. 이명(耳鳴)이 생긴 것이다. 계속 멈추지 않았다. 건강 에 자신 있던 터라 스스로 놀라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겪는 경험이기도 했다. 금융장관이 되고 나서 극도의 긴장과 피로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날은 금융회생 프로그램의 골격을 사무 국에 제시해야 했고, 국회에서는 대표 질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휴식 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곧 정무담당인 마가라 비서관과 금융청의 이노우에 비서관에게 연 락하여 병원에 들러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진단 결과는 ‘돌발성 난 청’으로 정신적으로 초긴장 상태에서 인간의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한 다는 것이었다. 약을 먹어가며 중요한 하루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오후부터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총리에게 정식으로 금융회생 프로그램의 개요를 설명하 고 기본적인 승낙을 얻어냈다. 관계자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최대 쟁점 은 이연법인세자산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의 문제인데, 우선 가장 엄격 한 안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하고 이해를 얻었

다. 그런 연후에 프로그램 전문(全文)을 사무국에 제시했다.

금융청 사무국은 이러한 상명하달을 경험한 적이 없어 불만이 컸 을 것이다. 그러나 거센 반대 속에서 제대로 정책적 틀을 만들고 근 본적인 방침을 변경하는 데 있어서는 상명하달식으로 한꺼번에 진행 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언론계 몇몇 사람에게 금융재생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과 커다란 방향에 대해 설명할 기회 를 가졌다.

그 다음날인 22일 화요일, 금융청의 사무국에서 몇몇 항목을 수정해 달라고 했다. 예상대로 이연법인세자산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제시한 대로 기간을 정하여 계상하는 상한을 명시하는 것은 극히 엄격한 것 이며, 이것을 제대로 실시하면 많은 은행에서 자본이 부족하게 될 가 능성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관계자도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엄격한 안을 제시하는 전 략을 취했다.

이날 총리로부터 앞으로의 진행 방법에 대해 명확한 지시를 받았다. 저녁시간 국회 회의실에서 열리는 자민당의 간부회의에서 ‘다케나카 플랜’을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놀랐지만 총리의 전략이라고 직감 할 수 있었다. 흔히 간부회의에서 어떤 현안에 대해 갑작스럽게 설명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정책은 정조회에서 논의하고 최종적으로는 총무회에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회에 중간보 고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총리가 갑자기 간부회의에서 설명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저녁시간 간부회의에는 간사장, 정조회장 등 그야말로 최고 간부들 이 모였다. 애써 담담하게 금융회생 프로그램 개요만을 설명했다. 몇 가지 기술적인 질문이 나왔는데, 그것은 모두 이연법인세자산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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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통상적인 공방을 끝낸 후 당시 참의원 간사장이었던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 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습니다. 선거가 있을 때 주가를 떨어뜨리면 안 됩니다.”

이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실질적인 거부의사로 같은 날 예정되어 있었던 중간보고도 취소하게 했다. 이는 동시에 당 간부들에 대해 제 대로 일 처리를 하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회의실 밖에 기자들이 몰려들어 떠들썩한 가운데 간부회의는 끝이 났다.

곧바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밤이 되어 개최된 관계장관 모임에서 나 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왜 지금까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소?”

지금까지 부실채권 처리를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왔고, 정 부 차원에서는 이를 일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를 반복해서 설 명해 왔다. 하지만 많은 장관들이 다른 사람의 일처럼 여겨왔다. 자 민당이 이런 지경이 되어버리자 각 성청의 불만에 불을 당긴 꼴이 되 어버렸다. 비판에 대하여 반론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오히려 정 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결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러한 혼란에 대해 일부 언론은 ‘학자 출신의 다케나카 장관이 사 전교섭에 익숙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그런 단순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른바 총리가 연출한 쇼크요법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일본경제신문은 큰 제목으로 ‘다케나카류 직구…

자민당 움찔’이라고 보도했다. 총리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한 총리는 “다케나카 장관이 해온 일이 힘들겠지만, 이것은 금융 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전체의 문제입니다. 각 장관이 잘 협력해

서 일이 잘 진행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총리가 연출한 쇼크요법은 오히려 금융회생 프로그램 전체를 정리 해 가는 데 있어서 더욱더 강력한 추진력을 갖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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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계의 반발

정부와 여당 간의 조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병행 하여 부실채권 문제의 당사자인 은행계와 긴밀히 접촉해 가는 것도 중요했다. 힘있는 은행들이 반대 입장이기 때문에 그들과 연결된 여당 의 반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0월 23일 수요일 아침, 주요 은행의 은행장을 소집하여 기본적인 생각을 피력하기로 했다. 회의장인 재무성 미타(三田) 회의실에는 이 른 아침부터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회의장에도 이미 은행장들이 모여 있었다.

여당과의 관계가 경색된 지금 단계에서 회생 프로그램 전체를 보여 줄 수는 없지만 왜 부실채권 처리 정책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기본적으로 ‘엄격한 자산실사’, ‘자기 자본의 충실’, ‘관리체제의 강화’라는 항목에 대해 총론적으로 설명하 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은행측의 반론은 주로 ‘이전부터 금융청의 지시 를 따라 충분히 노력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에 대해 ‘몇몇 사람의 의견과 시장의 평가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만을 이야기했다. 서로 의견이 엇갈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회의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한 언론사의 차량이 뒤따르고 있 었다. 이를 금세 알아차린 경호원은 시내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급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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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뒤따라오던 차를 따돌렸다. 이러한 미행이 시작된 지 오래 되지 않았으나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고, 보도전쟁은 이미 정책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나와 업계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기에 이르렀다.

다음날인 24일, 일본경제신문에 다케나카안(案)으로 명명되는 금융 개혁안이 소개되었다. 우리 쪽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안은 계속 조금씩 수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사무국에 건네주었던 정책안이 빠져나갔다고 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안건에 대한 반대론, 특히 이연법인세자산의 계상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맹렬 한 저항이 확산되어 나갔다. 정책안의 외부 유출에 대해서 몇 가지 설 이 있는데, 금융청의 OB가 그 출처라고 짐작했다. 아마 다케나카 플 랜에 대한 반대 분위기를 확산시키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10월 25일, 다시 은행장들과 간담회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내용은 이전의 회의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제를 일으 켜 감독을 받아야 하는 업계와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제대로 감독해야 하는 정부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틈이었다. 그날 저녁 은행장 들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금융개혁에 분명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기자회견을 보고 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부실채권을 발생시켜 국민에게 폐를 끼친 당사자인 은행이 개혁에 반대하는 모습, 더욱이 구태의연한 방식에 얽매인 은행장들의 모습은 은행계의 관리 체제와 전략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 민은 이러한 은행들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26일, 아사히신문에 이전까지와 다른 논조의 사 설이 게재되었다. 그때까지 부실채권 처리가 늦어짐을 지적하며 다케 나카 비판의 수위를 높여왔던 언론들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그날 사설

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었다.

“다케나카 이지메의 무책임: 다케나카 금융장관이 정리한 부실채권 처리의 내용이 보도되니 자민당 간부나 대형 은행의 수뇌들이 한꺼번 에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야말로 일본경제의 병의 근원이 된 이 문제를 벌써 해결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도 못한 채 스스로의 책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리는 모습이 보 기 좋지 않다.”

이후 여당과 어렵고 힘든 절충을 계속하여 1주일 내에 금융회생 프 로그램을 정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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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시국의

삼간삼정

(

三幹三政

)’

10월 27일, 일요일이었지만 금융청 간부와 모임을 가졌다. 어떻게든 그 주 안에 금융회생 프로그램에 대하여 여당과 최종 합의 하고 발표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총리가 개각을 할 때 공약한 것이기 때문에 폭넓게 여당 구 성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사무국의 협력은 절대 불가결한 것이었다. 또 이날은 몇 명의 여당 간부를 만나 직접 설명을 했다. 적 극적으로 전화를 걸어 동의를 구하는 작업도 했다.

10월 28일 월요일 아침,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특별회의가 열렸 다.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 보수당의 간사장과 정조회장이 모이는

‘삼간삼정(三幹三政)’이라고 불리는 회의였다. 실제로 나는 그때까지 이 삼간삼정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통상 당의 수순을 뛰어넘는 비상국면의 수순이며, 최고 간부인 간사장과 정조회장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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