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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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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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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1판1쇄 인쇄 / 2008년 3월 17일 1판1쇄 발행 / 2008년 3월 21일 저 자/ 다 케나카 헤이조 발행 처/ 한국 경제연구 원 발행 인/ 김종 석 편집 인/ 김종 석

등록 번호/ 제 318-1982-000003호

(150-756) 서울특 별시 영 등포구 여의도 동 28-1 전경 련회관 전화 3771-0001(대표 ), 3771-0057(직통 ) / 팩스 785-0270∼1 http://www.keri.org

ⓒ 한국경제 연구원 , 2008

ISBN 978-89-8031-491-1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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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에 부쳐

최근 일본경제의 향방에 대하여 다시금 비관적인 견해가 나오기 시 작하고 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고이즈미 총리가 퇴진한 뒤 일본 정치는 다시금 혼돈이 거듭되고 경제개혁에 대한 모멘텀도 점차 약화 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흔들렸던 미국조차도 2007년 한 해 동안 6%의 주가 상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가는 오히려 11% 하락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우정 민영화를 결정하고 개혁의 기운 이 높았던 지난 2005년의 주가상승률 42%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반면 한국에서는 개혁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이명 박 대통령이 취임했다. 연간 7%라는 높은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공 격적인 자세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러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아가 경쟁력 있는 한국경제를 만들어 나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일찍이 러 시아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휘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개혁자는 불행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개혁의 어려 움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일례로 어떤 나라에서도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적인 과정은 매우 복잡하기 마련인데, 이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정책결정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는 전문가들에 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이 내가 5년 5개월간의 고이즈미 내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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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을 역임하고 대학으로 돌아온 직후 한 권의 책을 내고자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구조개혁에 직접 참여한 기간 중에도 꾸준히 일지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서 일본의 구조개혁이 어떻게 진행되었 는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데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하고, 어떤 반대가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때 정치지도자나 관료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또한 나아가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고 여론 은 어떻게 움직였는지 등을 정책연구자로부터 장관이 되고 다시금 연 구자로 돌아온 사람으로서 가능한 한 상세하게 전하고자 했다.

이 책이 이번에 한글로 출판된 것은 내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기 쁨이다. 한국은 대통령제, 일본은 의원내각제로 그 제도는 다르지만 정치지도자 밑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강한 경제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 서는 공통점도 적지 않다. 일본의 경우 어느 정도 개혁이 진행되어

‘잃어버린 10년’을 끝내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반면 고이즈미 내각 이후 최근의 상황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개혁을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글판 출판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한국경제연구원 김종석 원장과 번역・출판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본서가 한국의 정책 관계자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에게 읽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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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판 출간에 부쳐

우리는 2008년 새 정부를 맞아 ‘작고 효율적인 정부’ 만들기에 여 념이 없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이미 하나의 세계적 흐름이며, 이를 이루지 않고서는 더는 정부의 생명력을 지탱해 나갈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더욱 활발히 작고 효율적인 정부에 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추진하는 것이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지 충분히 검토할 필요 가 있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개혁’이라는 차원 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개혁을 공직의 축소 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앙정부 권력 의 지방정부로의 이양, 규제개혁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작은 정부를 향한 정부개혁은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되고 논의되어야 한다. 모든 나라의 경험이 똑같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 지로, 정부개혁의 방향도 동일하지 않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 리나라의 역사적・정치 문화적 경험에 부합할 생산적인 정부 형태는 무엇인지를 더욱 폭넓게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은 시기는 다르지만 일련의 경제성장 의 역사에서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일본이 버블경제를 경험했고 이어 장기불황에 빠졌다. 이어 탄생한 정 부가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불황 탈출에 매진한 바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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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일본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을 맺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오히려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처지에 놓였다. 일본경제의 부활 을 교훈 삼아야 할 입장이 되었다.

지난 2001년 탄생한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내각 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디플레이션에 따른 투자위축, 공적자금에 도 되살아나지 않는 개인소비 등 사실상 성장 동력이 멈춘 채 10년 간이나 정체해 온 일본을 되살려내는 데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공공부문의 개혁을 통해 4년간 1조5000억 엔의 재정지출을 감축하 였고, 부실채권의 정리・금융개혁 등 경제 전반에 대한 개혁도 단행 했다. 정부기업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1500건의 규제를 철폐하 거나 완화했다. 2003년 4월에는 산업재생기구를 설립해 공적자금을 투입해 30조 엔이 넘던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인수하면서 통폐합 을 진행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성과는 메이지 유신 이래 최대 개혁이라고 일 컬어지는 우정 민영화였다. 그때까지 우정공사는 우편・예금・보험 등 3대 업무를 총괄할 뿐만 아니라 개인금융자산을 360조 엔이나 보유하 고 사원이 24만 명에 이르는 공룡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민간 기업에 비해 인건비는 높고, 이익은 적은 전형적인 국영기업으로 특혜에다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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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추진했다. 우정공사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정족의원이 자민당 내 에도 70%를 차지할 만큼 정치 파벌의 정치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정개혁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정치개혁이기도 했다. 결 국 고이즈미의 개혁은 정부의 조직을 바꿨고 일본경제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고이즈미의 개혁은 최고 지도자로서 강력한 의지를 펼친 총리와 사령관으로서 개혁을 실행에 옮긴 민간 학자출신 각료인 다 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장관(현 게이오대학 교수)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케나카 교수는 고이즈미 집권기 내내 장관직을 유지하 면서 권력이 집중된 경제재정자문회의를 통해 개혁정책을 쏟아내고 실천했다.

이 책은 다케나카 교수가 고이즈미 내각에서 경제재정장관, 금융장 관, 총무장관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구조개혁을 추진한 5년 5개월간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를 번역한 내용이다. 고이즈미 정권 내 내 ‘다케나카 때리기’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반대파가 많았고, “현실 을 모르는 학자가 설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구조개혁을 주도했던 그가 일본경제의 부활을 이끈 각종 개혁과 이를 실천해 낸 비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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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번역자 윤성준 선임연구 원, 조동호 부장, 그리고 감수를 맡아주신 정훈 인천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교정을 위해 수고해 준 이은화, 김유선 씨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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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머리말. 개혁의 날이 시작됐다

제1장. 고이즈미 내각이라는‘기적’

0 1 거리낌 없는 지도자의 등장 ·· ··· ·· ··· ··· ··· ··· ··· ·· ··· ··· ··· ··· ··· ·· ··· ··· ··· ··· ·· ··· ··· ··· 30 0 2 고이즈미 내각의 출범· ·· ··· ··· ··· ··· ··· ··· ·· ··· ··· ··· ··· ··· ··· ·· ··· ··· ··· ··· ··· ··· ·· ··· ··· ··· 38

제2장. 금융개혁의 진실 - 부실채권이라는 무거운 짐 -

0 1 ‘당국의 벽’ 속으로· ··· ··· ·· ··· ··· ··· ··· ··· ··· ··· ··· ··· ··· ··· ··· ··· ··· ·· ··· ··· ··· ··· ··· ··· ··· ··· 54 0 2 금융회생 프로그램을 둘러싼 공방 ① · ··· ··· ·· ··· ··· ··· ··· ··· ·· ··· ··· ··· ··· ··· ·· ··· ··· 74 0 3 금융회생 프로그램을 둘러싼 공방 ② · ··· ··· ·· ··· ··· ··· ··· ··· ·· ··· ··· ··· ··· ··· ·· ··· ··· 88 0 4 금융위기대책회의로 가는 길 ··· ··· ··· ··· ··· ··· ··· ··· ··· ··· ··· ··· ··· ··· ··· ··· ··· ··· ··· ··· · 1 08 0 5 리소나은행 󰠏 공적자금 투입 ··· ··· ·· ··· ··· ··· ··· ·· ··· ··· ··· ··· ·· ··· ··· ··· ··· ··· ·· ··· ··· · 1 25 0 6 금융개혁의 진일보· ··· ··· ··· ··· ··· ··· ··· ··· ·· ··· ··· ··· ··· ··· ··· ··· ··· ··· ·· ··· ··· ··· ··· ··· ··· · 1 40 0 7 잃어버린 1 0 년의 종국· ··· ··· ··· ··· ··· ··· ··· ···· ··· ··· ··· ··· ··· ··· ··· ··· ··· ··· ···· ··· ··· ··· · 1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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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우정 민영화의 진실 - 개혁 본체에 대한 공방 -

0 1 민영화 기본방침의 결정 ·· ··· ··· ··· ··· ··· ··· ··· ··· ·· ··· ··· ··· ··· ··· ··· ··· ··· ·· ··· ··· ··· ··· · 1 66 0 2 법안 제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90 0 3 국회에서의 공방으로 ··· ··· ··· ··· ··· ··· ··· ··· ··· ··· ··· ··· ··· ·· ··· ··· ··· ··· ··· ··· ··· ··· ··· ··· · 2 15 0 4 부결, 총선거, 그리고 승리· ··· ··· ··· ··· ··· ···· ··· ··· ··· ··· ··· ··· ··· ··· ··· ··· ···· ··· ··· ··· · 2 33 0 5 본격적인 민영화로· ··· ··· ··· ··· ··· ··· ··· ··· ·· ··· ··· ··· ··· ··· ··· ··· ··· ··· ·· ··· ··· ··· ··· ··· ··· · 2 49

제4장. 경제재정자문회의의 진실 - 정책과정은 어떻게 변화되었나 -

0 1 ‘골태방침’이라는 새로운 방법· ··· ··· ··· ··· ·· ··· ··· ··· ··· ··· ·· ··· ··· ··· ··· ··· ·· ··· ··· ··· · 2 62 0 2 변화된 예산 절차 ··· ··· ··· ··· ··· ··· ··· ··· ··· ··· ··· ··· ··· ··· ··· ··· ··· ···· ··· ··· ··· ··· ··· ··· ··· · 2 75 0 3 사령탑으로서의 자문회의 󰠏 세 가지 도전· ··· ··· ·· ··· ··· ··· ··· ·· ··· ··· ··· ·· ··· ··· · 2 93 0 4 5 년째의 자문회의 ··· ··· ··· ··· ··· ··· ··· ·· ··· ··· ··· ··· ··· ··· ·· ··· ··· ··· ··· ··· ··· ·· ··· ··· ··· ··· · 3 09

제5장. 일본경제의 두 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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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각주는 역자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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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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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총리관저

일본에서 가장 큰 축제와도 같았다. TV에서 몇 번 봤던 광 경이었는데 실제로 그 현장에서 보면 아이들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축제와도 같은 화려하고 떠들썩한 흥분이 넘치는 첫 번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의 출범이기도 했다. 그 축제의 분위기 속 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조금은 웃는 듯해야 하는지,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는 채로 총리관저에 들어갔다. 이것 이 고이즈미 5년 5개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후 전개되는 엄청난 구조개혁 출발의 신호, 즉 저항세력과 전투 개시를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며칠 전 고이즈미 총리(정확하게는 수반 지명전이었기에 총리 내정자)로부터 은밀한 연락이 왔다. 조각이 되는 26일 오후 3시경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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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오쿠라호텔 근처에 있는 총리의 지인 사무실에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버블경제 붕괴 후 피폐한 사회 상황에서, 일본 국민은 고이즈미 준이 치로라고 하는 이색적인 리더를 간절히 원하였다. 사회 전체가 고이즈 미 내각 출범으로 들끓고 있었다. 보통의 정치상황이라면 자민당의 총 재, 즉 일본 총리가 될 수 없는 강력한 리더가 지금 탄생하는 것이다. 국민의 기대는 생각보다 컸다. 나 또한 고이즈미 총리라고 하는 기적 의 총리가 탄생하는 것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대하고 있었다. 그 러한 총리로부터 직접 “이제부터 엄청난 싸움이 될 것이다. 장관으로 입각하여 같이 싸우자”고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관저에 들어갔을 때의 일은 너무 당황하여 기억이 분명치 않다. 총 리의 집무실로 불려가 경제재정장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미 총리 실에는 당 간부로 취임한 야마자키 간사장, 아오키 참의원 간사장 등 TV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중진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한다. 그리고 숨돌릴 겨를도 없이 취임 기자회견을 한 후 천황의 인증 을 받기 위해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거(皇居)의 판 하문(板下門)을 처음 지나칠 때 장관들의 자동차 행렬이 내는 불빛은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새로운 내각이 시작된다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조각하는 날은 새벽 두 시를 넘겨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때 총리 집무실에 모인 여당 간부들 사 이에서는 “곧 참의원 선거가 있다. 빠르면 3개월로 끝나 버릴지 모르 는 내각”이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3개월 뒤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으로 알려져 고이즈미 내각도 “그때까 지만의 잠정내각”이라고 내뱉는 평론가도 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정 권은 그로부터 5년 5개월 동안 집권을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사토 내 각, 요시다 내각에 이어 전후 세 번째로 장기집권한 정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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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고이즈미 내각은 부실채권 처리를 진행함으로써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제 정체를 종언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했고 반대세력과 싸워나가며 우정 민영화나 도로공단 민영화라는 커다란 제 도 개혁을 감행했다. 정치적으로도 이 사이에 각각 두 차례씩 중의원 선거와 참의원 선거가 있었다. 또한 ‘우정 해산’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 건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선거에서 고이즈미 내각은 계속 국민의 신임 을 얻었으며 내각 지지율은 이 기간 동안 평균 50%(아사히신문)를 유 지했다. 이는 나카소네 내각을 넘어 호소카와 내각에 이은 높은 지지율 이었다. 호소카와 내각이 8개월의 단기 정권이었음을 고려할 때, 고이 즈미 내각이 실제로는 가장 지지율이 높았던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관일기 개시

고이즈미 내각에서 나는 국회의원의 지위를 갖지 않은 일 반인 장관으로서, 즉 대학교수 신분에서 갑자기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미국 등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전부터 정책을 같이 논의해 왔던 고이즈미 총 리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어서 경제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정책에 반 영해 달라는 뜻으로 입각을 요청받은 것이다. 도중에 참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고이즈미 내각의 처음 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일을 맡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임하자마자 매일 짧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일지나 일기를 쓰는 습관이 없었는데 이런 귀중한 경험을 이른바 ‘다케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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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헤이조의 장관 일지’로 제대로 기록해 둘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국무대신’으로서의 책임과 긴장된 생활을 매일 돌아보 고, 그로 인해 얻는 교훈을 중시하고 그 중책을 충실히 이행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나아가 경제정책을 공부해 왔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귀 중한 경험에 대하여 나중에 어떤 형태로 남겨 사회에 환원해야 할 필 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학자라고 하는 ‘연구 주 체’가 실제 정책을 실시하는 책임자가 된 ‘연구 객체’의 입장을 경험하 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나의 친구인 L. 써머즈(클린턴 정권의 재무 장관)이나 G. 허바드(부시 정권의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등의 예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후일을 위해 경제정책 과 경제학과 관련된 내용, 정책결정의 과정 변화, 정책과 합의 형성 시스템 등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5 년 5개월에 걸친 나의 장관일기는 결과적으로 A4용지 300매에 이르러 책 두 권 분량이 된다. 2001년 5월 초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가기 시작 했다.

“고이즈미 총리체제하에 일본은 분명히 변화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 했기 때문에 장관직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그 변혁의 역사적 순간에 맞서고 싶다. 이 책은 나 자신의 장관일기에 근거하여 고이즈미 개혁 의 5년 5개월을 총괄하는 것이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결코 한 가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에 대해서는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싶다.”

우선 첫 번째 목표는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시대의 구 조개혁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효과는 어떠한 것인지 평가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른바 ‘경제적 측면에서의 평가’이다. 부실 채권 처리, 우정 민영화 등 커다란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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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로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상세하게 제도를 설계해야만 했 다. 그러나 세상의 정책 논의는 전문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논의 를 포함하여, TV에 나오는 와이드쇼 같이 편파적인 것들이 많다. 최근 강연 등에서 가끔 “정책이란 것은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 다도 훨씬 어려운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0 년 가까이 정책연구를 해왔지만 정권 중추에서의 일을 통해 정책이라 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어려움을 다시금 실감했던 5년 5개 월이었다.

두 번째 목표는 ‘정책결정의 정치적 과정’에 대하여 실제에 근거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코노미스트 등 경제전 문가는 경제정책에 관해 정치적인 측면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경제 판단에 자신 있는 사람일수록 정치를 더럽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모 든 경제정책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과정’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정 치적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제정책은 있을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일본에서는 정치학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이러한 문제, 즉 정책결정의 정치적 과정에 정통한 전문가는 매우 드 물다. 또한 정치를 논하는 기자나 평론가 중에도 실제 정책결정의 경 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정책 과정에 대한 정보 축적과 문제의식이 매우 부족하다.

고이즈미 내각에서는 경제재정자문회의 등을 활용하여 정부의 의사 결정을 상명하달 식으로 집행하도록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파벌 약체 화로 상징되었듯이 여당의 기능, 정부와 여당의 관계도 크게 변화했다. 고이즈미 내각이 끝난 순간에 이르기까지 정책결정의 정치적 과정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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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아있는 생물과 같이 계속 변화해 갔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5년 5개 월간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일본에 ‘정책감시인(Policy Watcher)’이라 는 집단을 만드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정책 과정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경제정책이든 외교정책이든 정치적 과정 을 무시한 정책 논의 등은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입 장에서 본서에서는 정책결정의 과정에 대해서 실제 체험을 토대로 논 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목표는 앞의 정책결정 과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여론・ 저널리즘과 정책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다. 한 사 회에 있어서 좋은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정치가나 관료가 제대로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결국 정책은 “국민의 뜻(民意)”

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란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국민(well

informed public)’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우정 민영화를 둘러싼 2005

년의 총선거, 그리고 그 결과는 국민의 뜻의 중요성을 다시금 명확하 게 나타낸 것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민과 직접 대화하는 데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지도자이자 정치가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내각은 5년 5개월의 오랜 시간에 걸쳐 국민의 높은 지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을 단순히 언론

정치(one-phrase politic), 포퓰리즘 등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

이며 생산적인 논의가 못 된다. 그간의 구조개혁은 정책으로서 전문적 인 지혜를 겨루는 측면도 있었지만 얼마나 국민에게 그것을 잘 호소 할 것인지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했다. 이른바 여론과의 경쟁이란 측면 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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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구성

우선 제1장 ‘고이즈미 내각이라는 기적’에서는 어떠한 배경 속에서 이른바 이색적인 내각이 탄생하였고 왜 구조개혁을 진행할 필 요가 있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90년대의 폐쇄된 경제사회를 통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일본 국민은 ‘걸림돌’을 갖고 있지 않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했었다. 걸림돌에 둘러싸인 종래의 일본 정치풍토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적의 총리’, ‘기적의 내각’이 탄생한 배경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또한 이 내각이 출범한 뒤 12일째에 행해 진 최초의 총리소신 표명 연설을 통해, 자신감 속에 고이즈미 내각이 발진한 경위를 돌아본다. 내각의 운영에 있어서 처음 시작할 때의 기 세가 무척 중요한데 고이즈미 내각이 어떻게 그것을 실현했는지 다시 금 검증하고자 한다.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구조개혁의 중요 문제를 테마별로 다룬다. 제2장에서는 90년대 경제 침체의 근본원인이었던 부실채권 문제해결 을 위한 개혁을 다룬다. 내각이 발족한 지 1년 6개월 후인 2002년 9 월, 경제재정장관직뿐만 아니라 금융장관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엄 청난 ‘다케나카 때리기(Bashing)’에 처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부실채권 처리의 지지부진함을 비판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개혁에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책이 그 후 경제회생의 길을 열었 다고 확신하고 있다. 금융장관이라는 특수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간 의 실제 정황에 대해서 지금까지 충분히 밝힐 수 없었는데, 본서를 통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또한 포괄적으로 금융개혁의 진실을 밝히 고 싶다.

금융장관 때부터 스스로의 정책 방향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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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그러나 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에 대해 서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항상 그 과정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 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 고난스러운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은 다름아닌 총리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제3장에서는 개혁의 본류인 우정 민영화에 대해 언급한다. 금융개 혁이 진전되고 우정 민영화의 기본방침이 결정된 2004년 가을, 금융장 관직을 그만두고 우정 민영화 담당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민영화에 임하게 된 것이다. 우정 민영화에 대해서는 법안의 부결과 중의원 해산, 그 후의 총선거에 있어서 고이즈미 자민당의 극 적인 승리라는 결과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물론 2005년 9 월 총선거는 내각의 운명을 건 선거였으며, 나도 이 전쟁에 본격적으 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권력투쟁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중요한 것은 오히려 경제정책 문제로서, 우정 민영화는 앞으로 일본에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와 관련된 정치공방은 정책결정의 정치적 과정의 개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많은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족(族)의원1_과 관료와의 관 계, 정부와 여당과의 줄다리기, 자민당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총무회의 변화, 각의에 있어서 만장일치제로의 변화 등 우정 민영화 담당장관의 경험을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분석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제4장에서는 고이즈미 개혁의 또 하나의 기둥인 ‘정책과정의 개혁’, 구체적으로는 경제재정자문회의의 실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부터 일본의 정책결정은 관료와 족의원에 크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정책결

1_ 각 부처의 해당 관청이나 관련 업계 출신의 정경유 착된 정 치인을 일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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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총리에 의하여 주도되도록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폭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시모토 정권 때의 행정개혁 일환 으로 2001년 1월에 중앙성청(中央省廳) 재편이 이루어지고 그 중핵으 로서 ‘경제재정자문회의’가 설치되었다. 이 회의가 설치된 3개월 후에 탄생된 고이즈미 내각은 총리주도의 정책을 집행하는 수단으로서, 이 자문회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는 첫 입각 후부터 4년 6개월 동 안 경제재정장관으로서 이 회의를 운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러한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행착오 와 맹렬한 저항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 사이에 자문회의를 적대시했던 정치가 그룹이나 관료도 차차 이것 을 잘 활용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나아가 내가 담당장관을 그만둔 마 지막 1년 동안은 유감스럽게도 자문회의의 기능이 크게 변화되었는데 이것은 정책을 둘러싼 여러 당사자들의 힘의 정치를 반영한 것으로, 이 또한 개혁의 어려운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경제재정자문회의는 일본의 정책결정, 특히 경제정책의 결 정과정을 크게 바꾸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이른바 커다란 방향을 정 리하게 되어서 예산편성 과정도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경제재 정자문회의 없이는 고이즈미 개혁도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정책과 정 모습도 염두에 두며 5년 5개월의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면서 그 의 의도 총괄해 보았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앞으로의 더욱 진전된 개혁 과제를 제시하고 일본경제를 전망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개혁성과 는 분명하지만 앞으로의 과제도 많다. 개혁은 끝이 없는 것이다. 새로 운 문제는 항상 어디에서든지 발생하며 고이즈미 내각의 뒤를 이은 아베 내각에서는 재정건전화의 구체화, 지방의 활성화, 소득분배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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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등 많은 과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일본의 잠재적인 경제력에 자 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개혁 모멘텀이 떨어지는 순간 일본 전체가 엄 격한 국제환경 속에서 다시금 헤맬 것이라는 위기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일본경제에는 ‘개혁이 진행되어 경제가 개선됨으로써 재정도 건 전화되며 결과적으로 큰 폭의 증세를 피하게 되어 경제가 더욱 활성 화되는’ 호순환 시나리오도 있을 수 있고, 역으로 ‘개혁이 진행되지 않 고 경제가 침체되어 재정적자가 지속되어 결과적으로 큰 폭의 증세가 불가피하게 됨으로써 경제가 더욱 침체된다’는 악순환 시나리오도 있 을 수 있다.

내가 5년 5개월간의 각료생활을 통해 배운 가장 큰 것, 그리고 독자 에게 그야말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의 핵심은 ‘일본을 개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이라고 하는 난제’에 앞 으로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 전체의 생활을 풍족하 게 해줄 정책이 일부 이해관계자의 반대로 실현될 수 없는 많은 사례 가 엄연히 이 나라에 존재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와 같은 특별한 총 리가 있었기 때문에 부실채권 처리나 우정 민영화가 이루어졌지만, 아 직 손도 대지 않은 문제 그리고 앞으로 가속해야 할 문제가 끝이 없 다. 앞으로 일본에서 더욱 건전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 으로 ‘정책감시인’이라는 정책 전문가집단이 필요하고, 이에 근거한 민 간으로부터의 건전한 정책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다. 본서는 고이즈미 개혁 5년 5개월의 결산이며, 앞으로 일본에 대한 내 나름의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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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블이 붕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한 사람의 정치가를 중심으로 공부모임이 만들어졌다. 내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어느 경 제인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닌교죠(人形町)에 있는 로얄파크호텔에 서 조찬회를 겸하여 열렸다. 거기에 참석했던 나는 다양한 토론을 통 하여 이 특이한 정치가를 알게 된다. 전에도 몇 번 안면은 있었지만 정책문제를 갖고 시간을 내어 차분히 고이즈미 씨와 논의할 수 있었 던 것은 그야말로 이 공부모임을 통해서였다.

당시 버블 붕괴로 인한 영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가운데 정책 토 의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경제학자인 내가 말했던 것은 당시 정 책의 주류였던 안이한 재정확대로는 결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실채권 문제의 빠른 처리, 작은 정부를 목표 로 한 규제완화 등 구조적인 개혁을 통하여 경제활성화와 재정건전 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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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그때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부모임에서 메모는 하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가끔 눈을 감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고 이즈미 씨의 모습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총리에 취임한 이후에 도 이러한 스타일은 일관되었다. 즉 쓸데없는 부분은 다 지워버리고 본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대국적인 판단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세부적인 것을 버리는 용기는 그야말로 지도자 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만을 취하기 때문에 고이 즈미 총리의 주장은 그 기본적인 부분에 있어서 결코 흔들림이 없었 고 발언은 항상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찰 정도로 강렬함과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버블 붕괴 후 일본에서 갖가지 변혁이 빠르게 전개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보신과 위험회피를 우선시하는 족의원들과 관료중심의 정책 결정 때문에 필요한 개혁은 항상 뒷전이었다. 국민의 자괴감은 절정 에 이르렀으며 대내외적으로 일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 었다. 예를 들어 2001년 2월 1622일자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일본경 제에 관한 기사에서 ‘일본의 은행문제는 세계경제에 대한 최대의 금 융위협’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일본발 세계공황까지도 생길 수 있 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일본경제에 대한 인식은 절망적이었다. 강력한 정치지도자하에서 필요한 개혁을 진행함으로써 일본경제를 회생시켜야 할 필요성이 명백했다.

본질을 절대 왜곡하지 않는 지도자, 완고하게 원칙을 관철할 지 도자, 이러한 특이한 인물이 일본에서 총리라는 리더로 취임한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되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것이 다반사이고 상명하달식 의사결정을 부정하는 종래 일본정치의 관행으로 볼 때 이러한 인물이 조직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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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1년 4월 26일, 국민적인 열광 속에 기적과도 같이 고이즈 미 총리가 취임했다. 그야말로 ‘기적의 내각’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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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거리낌 없는 지도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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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고이즈미 총리를 원했다

당시 일본 정치에서는 상식적으로 총리가 될 수 없다고 생 각되는 특이한 인물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어떻게 일본 총리가 되었 으며, 5년 5개월씩이나 국민의 높은 지지를 계속 받아온 걸까? 그 배경 에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경제의 정체기가 있다. 그 10년 은 단순히 경제가 악화된 것뿐 아니라 정치를 포함하여 사회 시스템 전체가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일본이란 나라 전체가 현저하게 기능 저 하에 빠졌던 기간이다.

구체적으로 경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사회의 기초체력을 튼튼히 해야 했다. 즉 단기적 수요정책뿐만 아니라 폭넓은 구조개혁으로 경제의 공급측면 전체를 강화해야만 했다.

경기순환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경제학자 쥬글러(C. Juglar)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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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불황의 유일한 원인은 호 황이다.” 쥬글러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경제는 좋았다가 나쁘게 되는

‘순환’을 반드시 거친다는 것이다. 정부나 중앙은행은 정책을 통해 가 능한 한 그 진동 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순환 그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즉 일시적 불황이나 호황은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쥬글러의 발언을 다시 뒤집어 보면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순환은 불가피하지만 도대체 어떤 수준에서 순환할 것인지 가 중요하다’라는 점이다. 즉 경제는 1% 성장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좋 아졌다가 나빠지는 것인지, 아니면 3% 성장을 중심으로 순환하고 있 는 것인지 등과 같은 부분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버블 붕괴 후 일본경제는 평균 1%의 낮은 성장에 만족해 왔

다. 1% 성장이라는 낮은 수준의 주변에서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80년대에 4%대 중반의 성장과 비교하면 꽤 낮은 수치이다. 쥬글 러가 이야기하듯이 경제는 좋아지든지 나빠지든지 하는데, 일본경제 는 이토록 장기간에 걸쳐 나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 체질에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앙정부는 계속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경제를 회 복시키려고 하였다. 만일 일시적 수요부족에 의한 불황이라면 재정확 대를 통해 그야말로 순환을 작게 하고자 하는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 다. 이토록 오랫동안 저성장이 계속된다는 것은 일시적인 수요부족이 아니라 경제의 체질, 바꾸어 말하면 공급측에 문제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체질을 강화하기 위해 갖가지 구조개혁이 요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일본정부의 주된 경제정책은 재정확대에 의한 수요자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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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사실 구조개혁의 중요성은 이미 오부치 게이조(小渕惠三)내각 때부 터 정부 내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어 왔었다. 「경제전략회의」의 보고 가 그것이다. 히구치 히로타로(桶口廣太郞, 당시 아사히맥주 회장) 씨 가 좌장을 맡고 나가타니 이와오(中谷巌, 당시 히토츠바시대학 교수, 현 타마대학 학장) 씨, 그리고 내가 참가했던 이 회의에서는 경제환경 의 변화를 전제로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진척시키고 민간의 자유로운 발상을 끌어내어 성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동서 냉전 구조가 끝나고 시장경제가 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글로벌 경쟁이 일시에 고조되었다. 동시에 디지털 혁명이라 불리는 획기적인 기술진 보가 실현되어 그에 걸맞는 사회경제시스템이 요구되었다. 즉 ‘시장’과

‘기술’이라는 새로운 프런티어(frontier)가 출현한 가운데 세계의 경쟁 환경이 크게 변화하고 있고 일본도 그야말로 그 중심에 놓이게 되었 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실물 경제정책은 오로지 공공사업 증가에 의한 재정 확대에만 집중되었다. 90년대에 나타난 보정예산(補正豫算)2_ 등에 의 한 추가 경제대책만 해도 누계 130조 엔에 달하였다. 80년대 말에는 GDP대비 6.4%였던 정부 고정자본형성이 95년도에는 8.6%로까지 상 승했다.

이렇듯 90년대를 통하여 계속 공공사업 확대가 추진되었던 것은 단 순히 경제적 처방전이 잘못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공

2_ 본 예산(本豫算) 편성 후에 재 해 발 생이나 정책 변경 등으 로 본 예산 항목이 나 금액 에 변경을 가하는 예산으 로 이에 는 수정예 산(修正豫算)과 추가 경정예 산 (追 加更正豫算 )이 포함 된다. 한국에서 는 보정예산 이라는 말 을 사 용하지 않 지 만, 일 본의 재정법 에서는 추가예 산과 수정예 산으로 나누 고, 이것을 합 하여 보 정예 산이라 부 르고 있는데 , 한국 의 추가경 정예산과 비슷한 개 념으로 보면 타 당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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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업 확대 정책에는 확실히 정치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건설사업에 관련된 업계와 여당이 강하게 결탁되어 있다는 것은 모 두 아는 사실이다. 업계는 정치헌금이나 선거협력 등을 통해 여당을 도 와주고, 여당은 공공사업을 확대하여 건설업계를 지탱해 준다. 그리고 양자 사이를 서로 연결해 주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조직이 존재했다. 업계・ 정치가(족의원)・ 관료의 관계를 많은 정치학자들이 ‘철 의 삼각형(Iron Triangle)’이라고 일컫고 있다.

부실채권 처리나 규제완화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재 정에 의한 수요확대를 펼친다고 해도 그 효과는 단기적일 수밖에 없 다. 그렇기 때문에 90년대를 통하여 130조 엔의 추가경제대책을 실시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성장률은 1%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 결과 이 기간 동안 경제는 정체되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재정적자만 더욱 확대되어 갔다. 90년에 일단 해소되었던 재정적자는 90년대에 더 확대되었고 재정은 더는 지속하기 어려워 보였으며, 실제로 ‘파탄’ 의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잃어버린 10년을 해소하고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구조개혁’이라는 처방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정치와 업계의 유착관계라는 정치 근간에 손을 써야 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불가피했다. 이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기적의 총리 이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자민당을 박살내야 한다.’ 또 그 후에 ‘우정 민영화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주장했 던 강력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는 국민으로부터 열렬히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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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2) ‘

별난 사람

(

変人

)’

이 아니었다면 개혁 같은 것은 할 수 없다

고이즈미 총리를 표현하는 단어 중 종종 별난 사람(変人) 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것은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 다나카 마 키코 씨(田中真紀子, 고이즈미 1차 내각 때 외무장관)가 썼던 표현이 다. 이때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오부치 게이죠(小渕惠三),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그리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세 사람이 출마했 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씨는 각각을 평범한 사람(凡人), 군인(軍人), 별난 사람(変人)이라고 표현해 화제가 되었다. 총리 후보를 이렇게 표 현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따져보지는 않더라도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별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제대로 본질을 꿰뚫 고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본이 안고 있는 구조문제는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다. 그것을 지지하는 정치적 이해와 떼어놓고 볼 수 없 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있는 보통의 정치가로서는 설령 그가 총리와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하더라도 결코 이런 일을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득권에 얽매임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 라, 그러한 얽매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나 그룹・ 집단으로부터 자유로 운 인물이 지도자가 되지 않는 한 개혁은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인 물이 총리라고 하는 정치・ 행정의 최고직에 취임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일본 정치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가 되기 전인 1995년 및 1998년에 자민당 총 재 선거 후보로도 나왔었다. 1995년 입후보했을 때는 하시모토 류타 로(橋本龍太郞)에게 큰 차이로 패배하였고, 오부치(小渕)・ 가지야마(梶 山)와 경쟁했던 1998년 선거에서도 3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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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계는 기득권에 얽매임이 없이 개혁을 하고자하는 후보자에게는 이렇게도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의 자괴감 속에서 국민은 드디어 고이즈미 준이치로라고 하는 이색적인 지도자를 절실 히 원하고 있었다. 2001년 4월의 자민당 총재선거는 11일에 시작되어 24일 투표일까지 후보자의 호소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과거 두 차례 의 선거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결코 유리하게 보이지 않던 고이즈미 후보가 중간 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인 것으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중간 조사가 있었던 직후 나는 아카사카의 한 요릿집에서 고이즈미 총리(후보)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총리와는 아주 가까우면서 공부 모임의 간사역을 맡고 있던 한 경제인과 함께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고이즈미 후보는 ‘야아! 흐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라고 여느 때와 다 름없이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이때 정말 대단한 지도자가 탄생할지 모 른다고 부지불식간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인 4월 17일에 봄 야유회가 열렸고 나도 참석하였는데 거기 서 아베 신조 의원(安倍晋三, 후에 수상이 됨)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 다. 당시 아베 의원은 모리(森) 파벌의 젊은 의원들 중 대표주자로 고 이즈미 후보의 당선을 위해 분주하게 뛰고 있었다. 아베의원도 총재선 거에 대해 자신의 정세분석을 피력하며 흥분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정세는 확실히 고이즈미 씨에게 유리해졌습니다.” 고이 즈미 총리 탄생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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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3)

기득권과 철저히 단절

고이즈미 총리의 개성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런 일화 들로 그를 별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핵심을 벗어났다고 생 각한다. 중요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라는 인물은 한 가지 것에 철저하 며 보통 사람과는 달리 강인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각료로 일을 하게 된 후부터 항상 그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각 이 만들어진 뒤 고이즈미 총리가 6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어떤 각료가 축하 꽃다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은 누구로 부터도 절대로 물건을 받지 않기로 했다며 그 꽃을 일부러 돌려보냈 다고 한다.

또 한번은 해외출장을 갔다 온 각료가 넥타이를 선물로 사왔는데 총리는 그것도 같은 이유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작은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정치활동 동안에는 어떤 걸림돌도 만들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친한 사람에게조차 생일선물을 받지 않 는다는 의미에서 별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이것이 바로 고이즈미식이라는 것이다.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철 학을 관철시키는 이러한 자세가 있다면 전혀 흔들림 없이 철저하게 개혁을 단행할 수 있다. 아마도 국민은 이러한 자세를 직감적으로 느 끼고 고이즈미 총리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총리의 이러한 자세는 나중에 이야기할 개혁의 여러 가지 국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인간관계를 무척 중시하며 과거에 신세를 진 정 도가 무척 중요시되는 일본 정치풍토에서 무엇보다 고이즈미같은 인 물이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당선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더 욱이 총리직과 같은 가장 높은 자리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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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일이었다. 총재선거에서의 승리가 확정되고 고이즈미 씨로부터 장관취임의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분명히 이 나라가 변화될 것’이라 고 직감했다.

사실 나는 전에도 다른 내각이 발족할 때 비슷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한 사람의 학자로서 이러한 요청을 받는 것 자체가 영광 이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대학교수로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길을 걸 어온 사람이었고 연구자로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내가 익숙하지도 않 은 정치세계에서의 활동은 생각하지 않았던 탓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거절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씨에게서 그런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기적의 총리이다. 이 총 리가 전력투구하여 일본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만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망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 는 것이 아닌가.

지금 돌이켜보면 유치한 생각이었으며 정치세계에 있지 않았던 인 간의 무모한 결단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그러 한 생각을 갖게 할 만한 커다란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고 이즈미 씨의 개인적인 매력이라든가,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관계가 아 니었다. 또 일부의 사람들이 야유하듯이 전문가로서 자신의 생각을 실 천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차원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을 초 월한 뭔가를, 소위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가 내뿜는 시대의 목소리와 같은 것의 후원을 받아 고이즈미 씨가 정면에서 맞서가는 모습을 봤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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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고이즈미 내각의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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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공부모임

고이즈미 씨가 총재선거에 정식으로 입후보를 발표하기 조금 전, 앞서 언급했던 경제인의 배려로 특별한 공부모임이 시작되었 다. 여차하면 정권을 운용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구체적인 정권구상에 무언가 도움을 주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전부 56차례 모임이었 지만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정권운영을 전제로 집중적으로 정책을 논 의했고, 그때마다 강사 인선은 내가 맡아 했다.

나는 지금까지 연구자로서 접해 왔던 전문가 중에서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분야별로 뽑아 강사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들 은 모두 가장 일선에 있는 연구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을 뿐 아 니라 좋은 나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모두가 고이즈미를 위한 일이라면 긍정적으로 임해 주었다. 총재선거로 바쁜 일정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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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고이즈미 후보는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여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여기서 논의했던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고이즈미 내각의 출 범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나에게 인상깊었던 것은 정치학자로 초 대되었던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도쿄대 교수(후에 국제연합 부대 사로 활약)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까지 자민당에서는 당선 횟수에 따라 각료의 자릿수가 할당되 고 이것이 파벌간의 균형 속에 이루어져 왔다. 또 일정 횟수 이상 당선 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평과 편중이 없이 자리가 돌아갈 수 있도록 자 주 내각을 개편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면 아무리 힘있는 정치가 가 장관이 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 사람이 책임있는 정책을 펴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관료의존의 무사안일한 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위기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때문 에 정말 제대로 된 정책을 펴려면 그야말로 최적의 인재를 담당장관으 로 뽑아 ‘한 내각 한 각료’를 하겠다는 식으로 인선을 해야 한다.”

실제로 기타오카 씨의 발언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파벌 단위 의 정치를 뛰어넘고 더 나아가 관료의존을 넘어서고자 했던 고이즈미 총리에게도 ‘한 내각 한 각료’라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 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실제로 그동안 다섯 번 내각을 개편했지만, 당 선횟수에 따라 돌아가며 맡는 인사를 전혀 하지 않았고 파벌이 통하 지 않고 소위 한 마리씩 낚아올리는 ‘낚시하는 식의 방법’을 관철시켰 다. 그런 의미에서 ‘적재적소, 한 내각 한 관료’의 정신을 견지했다.

그 밖에도 부실채권 처리를 신속히 진행시킬 것, 재정건전화에 있어 서도 다른 나라들이 행하고 있듯이 우선 ‘기초적 재정수지(primary

balance)’의 회복을 목표로 할 것, 시간을 두면서도 착실하고 계획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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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개혁의 진실

로 일을 진행시킬 것 등이 논의되었다. 또한 정부정책에 대한 정보 발 신을 전략적으로 실행할 것에 대해서도 중요한 논의가 행해졌다.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내각 발족 직후 행해진 첫 소신표명연설에서 는 ‘개혁 없이는 성장도 없다’나 타운미팅(Town Meeting) 등 개혁에 대한 의욕을 나타내는 키워드가 많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내각의 힘찬 출범에도 공헌했다. 이 공부모임에서의 논의가 그 후 구체적인 개혁정 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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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내각 구성

2001년 4월 26일, 국회에서 총리지명이 이루어졌다. 정부・

여당일체를 원칙으로 하는 오늘날의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여당의 제1 당 당수가 내각 총리로 선출된다. 이리하여 제87대 내각 총리대신으 로 고이즈미 씨가 선출되었고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한 것이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내각이자, 이색적인 총리의 탄생이기도 했다. 매 스컴의 보도는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내각 구성에 있어서 첫 번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인사, 즉 내각 의 얼굴이 누구인가였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파벌을 완전히 무시하고 총리가 재량껏 관료를 발탁하여 임명하는 방 식이었다. 조직운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일본정치에서는 최고 책 임자가 스스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간부를 임명하는 경우가 없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을 해냈을 뿐인데, 이 일이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보통 파벌별로 추천을 받아 파벌 단위로 개별 입각 후 보자가 선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자들은 각 파벌을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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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으로써 대체로 사전에 후보를 예측할 수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성 각료 5명과 국회의원이 아닌 일반인 3명을 각료로 발탁한 것이었다. 당선 횟수가 많은 사람이 장관직에 앉는다는 지금까지의 암묵적인 약속을 무시한 대담한 기용이었다. 이것이야말 로 파벌과 당선 횟수의 균형을 초월한 내각 구성을 행한 결과였다.

내각 구성에 있어서 고이즈미 총리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단독 으로 각료 인선을 단행했다. 그날 이른바 ‘호출’은 오후 3시 반경에 있 었다. 전화를 받고 총리관저로 달려가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플래시 세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2층의 내각 응접실로 안내되어 새로이 각료가 된 사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농림수산장관이 된 타케베(武部勤, 후에 간사장이 됨) 씨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오! 다케나카 선생, 이번 내각이 할 개혁은 정말 중요합니다.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해준 고마운 한마디였다. 타케베 씨는 그 뒤 광우병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사를 철저하게 해 농림수산성 개혁 에 공헌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드러 내어 개혁을 제대로 하고자 했던 타케베 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왜곡 된 결과를 초래했고 이러한 압력과 맞서 싸워가야만 했던 것 또한 개 혁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매스컴은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이나 시오카와 마사 주로(鹽川正十郞) 재무장관 등 개성있는 각료를 주목하여 연일 대서특 필하였다. 그러나 그 보도내용이나 태도는 당시의 매스컴이 ‘극장형 내각’이라고 비유한 것에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대 체적으로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 위주로 각료를 발탁한 것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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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있어 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식의 보도경향을 보였다.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는 종래와 같이 파벌이나 당선 횟수 위주로 조각을 했다면 장관이 될 수 없었던 관료가 나를 포함해 여럿이었다.

특히 다나카 외무장관의 거리낌없는 발언에 대한 보도가 주목을 받 았다. 그 보도 형태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진기함을 전면에 내세 우는 식이었다. 언론의 화제를 만들고 나서 공격해 나가는 모습이 눈 에 선했다. 그런 보도에 노출되고 싶지 않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각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에서 관방 장관(국무장관 및 총리비서실장 역할)을 지낸 후지나미 다카오(藤波孝 生) 씨와 저녁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전에 근무한 일본개발 은행(현재 일본정책투자은행)의 어느 선배 소개로, 이전부터 여러 가 지 정책에 대해 논의했던 적이 있었는데 후지나미 씨는 생각지도 않 게 내가 장관직을 수락한 것에 대해 선배로서 조언해 주고 싶었던 것 이다. 후지나미 씨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온갖 어려움에 직면할 것입니다. 정치가는 전부 대단합니 다. 상대가 정치가라면 그래도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됩니다. 그러나 매스컴은 어떻게 대처할 방도가 없으니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해서 잘 대처해 주길 바랍니다.”

후지나미 씨는 리쿠르트 문제로 매스컴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았 던 적이 있다. 나는 솔직히 그때 후지나미 씨가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나카 외무장관에 대한 상식을 뛰어넘은 보 도 행태를 보면서 장관으로서 정부의 핵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얼 마나 힘든 것인지를 나름대로 느꼈다.

어쨌든 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이상하리만큼 떠들썩했던 매스컴 보 도 속에 고이즈미 1차 내각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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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바꾼 소신표명연설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5월 7일 본 회의에서 고이 즈미 총리의 소신표명연설이 있었다. 내각이 출범한 지 12일째의 일 이었다.

총리가 국회에서 행하는 연설은 연초에 국회 모두(冒頭)에서 행하는 시정방침연설, 내각 발족 후나 임시국회 등의 모두에 행하는 소신표명 연설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정방침연설은 정책 전반을 아우르는 것으로 시간이 좀 긴 데에 비해, 소신표명연설은 총리로서의 주장을 명확히 나타내는 성격의 연설로 대개 시간이 짧고 중점을 말한다. 그 러나 어느 쪽 경우에도 총리가 국회에서 행하는 연설로 내각운영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야당이 어떻게든 공격 의 재료를 찾고자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국회에서의 총리연설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은 통상 길고 어려운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한다. 우선 정부 내에서 각 성청(省廳)의 이해관계를 조정하 여 방침을 정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제도를 설계해 나가야 한다. 그러 나 그 후의 과정은 더 어렵다. 의원내각제하에서는 이른바 ‘정부・ 여당 일체’의 원칙에 따라 정부정책을 할 때 여당 프로세스라는 합의의 과 정을 거쳐야만 한다. 구체적으로는 정무조사회 심의, 그리고 최종적으 로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총무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러나 총리 연설에는 이러한 번거로운 과정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 연설 초고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총리가 주도하는 것으로서 정 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러한 첫 소신표명연설의 초고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도 어떻게든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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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려고 노력하였다.

국회연설의 초고는 대체로 총리관저, 구체적으로는 내각 총무관실 에서 작성한다. 각 성의 각료들은 국회연설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만 큼 필사적으로 연설 원고에 자신들의 부처에 유리한 표현을 삽입하려 고 애를 쓴다. 그래서 관저는 철저한 정보단속하에 총리 주도로 원고 를 작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러한 사정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내각 총무관에게 다케나카의 의견이 잘 반영되도록 특별지시까지 해두었 다. 이는 구조개혁의 힘찬 출발을 확실하게 알리는 내게는 아주 고마 운 지시였다.

참고로 5년 5개월 동안 총리의 국회연설은 항상 똑같은 식의 총리 지시를 받아 내각 총무관으로부터 사전에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복잡한 여당 프로세스를 피해서 총리 주도로 개혁을 진행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연설문을 만들 수 있었다.

2001년 5월 7일 151회 국회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표명연설은 각계의 주목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여당석에서는 환성이 터졌고, 야당 의원들까지도 몸을 내밀어 이 특별한 총리의 연설을 경청하고자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내용은 개혁의욕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출발점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설에서는 우선 ‘개혁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이념 아래 개혁을 단 행하는 내각임을 선언했다. 과거의 경험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구애되지 않고”의 자세를 관철시킨다는 것을 천명 한 것이다. 구체적인 경제정책 메뉴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23년 사이에 부실채권을 전부 처리한다는 것- 2장에서 상세하게 다 루겠지만 부실채권 처리의 성공 없이 고이즈미 개혁은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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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21세기형 경쟁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표현이 추상적 이긴 했지만 그 당시 우정 민영화와 규제개혁, 행정개혁의 단행도 시사 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셋째, 재정구조개혁이다. 이 에 대해서는 공공사업의 삭감 등 지금까지의 정책으로부터 확실히 방 향을 전환하여 “과거의 채무원금과 이자지불 이외의 세출은 새로운 채 무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물론 이것은 기초재정수지, 즉 프라이머리 밸런스(Primary Balance)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것들을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해나갈 것이고, 타운미팅(Town

meeting)이나 메일매거진(Mail magazine)을 개시할 것이라는 점도 이

국회연설에서 확실히 했다.

분명 이들 내용의 골격은 앞서 말한 고이즈미 공부모임에서 논의되 었던 것들이다. 또 타운미팅과 메일매거진은 내가 게이오대학 교수로 있을 때 세미나에 참여한 학생의 아이디어였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발상은 나에게도 대단히 자극적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메일매거진 이 신기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기껏해야 홈페이지를 만드는 정도 였기에 내각에서 원하는 국민을 상대로 메일매거진을 배달한다는 발 상은 상당히 참신한 것이었다. 이것을 꼭 실현시키고 싶다고 총리에게 부탁해 연설문에도 넣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내 예상에서 벗어난 것은 ‘다음 해 국채발행을 30조 엔 이하로 억제한다’고 하는 더욱 단기적인 목표가 제시되었던 것이 다. 따져보면 국채 발행액이라고 하는 것은 세출과 세입의 ‘차액’이다. 그러므로 세출과 세입의 양쪽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차액인 국채발행 은 크게 변동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 차액에 대해 단기적인 목표를 세 우는 것은 알기 쉬운 장점이 있는 반면 위험(risk)도 따르는 것이었다. 아마 재무성 관료들의 훈수도 있었겠지만 총리로서는 총재선거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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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이기도 했기 때문에 30조 엔이라는 목표가 국회연설에 들어가 있 었다. 하지만 주세국의 세수예측 실패로 첫해 30조 엔 목표를 달성하 지 못하게 되어 물의를 일으켰다. 나는 지금도 이 점에 대해서는 재무 성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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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런 국회에서의 답변

결코 길지 않았던 첫 국회 연설은 그 외에도 ‘민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민간에게’, ‘지방이 할 수 있는 것은 지방에게’라는 기본방침 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뎌 좋은 내일을 만든다 는 ‘고메핫표(米百俵) 정신’3_ 등 많은 키워드를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던 것은 이 연설에 대한 중의원의 질문에 대한 총리의 답변이었다. 이 답변에서 나타나듯이 ‘고이즈미 스타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총리 자신이 공격적으로 논쟁을 벌여 강력하게 정책을 리드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항상 국민과 매스컴으로부터 주목 을 받았다.

국회연설이 있은 지 이틀 뒤인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일이었다. 대 표질문에 나선 민주당의 에타노(枝野幸男) 씨는 고이즈미 총리가 오랫 동안 주장해 온 우정 민영화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총리는 이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한 답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의 긴장감

3_ 고 메핫표 정신은 1868년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등장 한 고 사로 당시 나가오 카 번(현재 니 가타현 나가오카 시)은 유신파 와의 싸 움에 패 해 초 토화되었다 . 이에 규휼 미가 지급되었 으나 번은 이를 팔아 학 교 설 립 자 금으로 충당했 다. 잠시 의 배부 름보다 훗날을 기약했 다는 점 을 들어 개혁 의 고단 함을 설 명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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