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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변동의 제도적 원인

앞에서 지폐의 증가와 신용팽창에 의한 인위적인 이자율 하락이 경기변동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지적했다. 지폐의 증가와 신용팽창, 즉 화폐공급의 증가가 화폐제도와 금융제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화폐제도와 금융제도의 어떤 요소가 화폐공급의 증가에 영향을 주 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사실 화폐제도와 금융제도의 많은 요소가 화폐공급 에 영향을 미치지만 아래에서는 결정적 요소들만 논의하고자 한다.

(1) 정부가 통제하는 화폐제도

화폐공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 또는 중앙은행 이 지폐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간금융기관이 신용팽창을 통해 화폐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물론 민간금융기관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은행의 제도적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화폐공급을 증 가시키는 첫 번째 방법을 분석한다.

정부가 통화정책을 통해 금융시장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화폐발행을 독점 106) 이 절과 제V장에서 다루는 화폐제도와 금융제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전용덕(2007), 제4장과 제5장, 그리고 그 안에 나오는 참고문헌을 참조.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화폐발행을 독점하는 것은 화폐발행을 통해 아무도 알 아차리지 못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민간으로부터 자원을 탈취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107) 화폐의 발행에 따르는 수익을 시뇨리지(seigniorage)라고 하는 데, 정부는 그런 시뇨리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화폐의 발행을 독점한다는 것이 다.108) 정부는 세금의 징수를 통해 자원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금을 징수하는 방법에 의한 민간자원의 사용 또는 탈취는 조세를 납부하는 당사자 인 국민이나 시민의 저항으로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 서부지방의 리디아 왕인 기게스(Gyges)가 처음으로 화폐의 발행을 국가 독점으 로 만들었다.109) 물론 이때 기게스가 독점발행한 것은 주화였다. 이후 정부는 화폐발행에 있어 자신의 경쟁자인 민간은행을 규제하기도 하고 민간은행을 이 용하여 자금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20세기 이래 모든 나라에서 정부가 화 폐발행을 독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법률로 지폐 또는 불환화폐를 표 준화폐로 지정하고 정부 자신이 지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거나 중앙은행이 지 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도록 허가하고 있다.110) 정부에 의한 지폐발행의 독점 도 궁극적 이유는 정부 자신이 손쉽게 민간으로부터 자원을 획득하기 위함이 다. 과거에 민간이 화폐를 발행하는 시기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화폐는 민간에 의해 시행착오를 통해 시장과정에서 기원(originate)했다.111) 그리고 그런 화폐는 상품화폐였다. 민간이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화폐발행에 관한 ‘자유 시장’이다. 정부에 의한 지폐의 독점발행은 발권시장이 더 이상 자유시장이 아 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발권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악화’인 지폐가 ‘양화’

인 상품화폐를 구축하게 만든다. 요컨대 현재는 모든 나라에서 지폐의 존립은

107) Rothbard(1990) 참조.

108) 시뇨리지는 새롭게 발행한 화폐를 누가 먼저 소유하게 되는가에 따라 시뇨리지가 귀 착되는 사람이나 집단이 달라진다. 어떤 경우에도 정부는 시뇨리지의 사용권을 가지 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시뇨리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화폐발행의 독점권을 소유한 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뇨리지의 크기는 화폐발행의 양과 화폐발행에 드는 비용 에 따라 달라진다.

109) 안재욱(2008), 제3장과 그 안에 있는 참고문헌 참조.

110) 어떤 이유로든지 그 자체로서 사용가치가 없는 지폐의 생산이 정부에 의해 이루어지 면 지폐생산은 필연적으로 독점이 된다고 호페(Hoppe)는 주장한다. Hoppe(1994) 참조.

111) 상품화폐의 기원과 특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용덕(2007), 62-66쪽 참조.

시장의 힘 또는 사람들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112)

지폐의 발행을 정부가 독점하는 것은 여러 가지 폐해를 만들어낸다. 첫째, 정부는 화폐발행의 독점권한을 소유함으로써 지폐를 무한정 발행할 수 있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경제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킨 다. 정부가 지폐를 무한정 발행할 수 있는 것은 상품화폐와 달리 지폐의 제조 에는 자원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화폐를 발행하는 데 상품화폐와 같은 정도의 자원이 필요하다면 지폐를 무한정 발행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가 능하지 않다.

정부 또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가 어떻게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경제를 무너뜨리는가를 보기로 한다. 먼저 지폐의 발행을 통해 정부나 중앙은행이 정부의 재정을 지원한다. 또 필요한 경우에 정부는 대기업을 지원 한다. 대기업의 파산은 정치적으로 많은 압박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지원을 하 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부가 언제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정부는 특히 세금보다는 저항을 덜 받는 화폐발행을 선호한다. 심지어 정부는 경제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일에 도전한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에 정부가 한 조치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전의 과다한 화폐발행으 로 더 이상 화폐를 증가시킬 수 없음을 알자 ‘공적자금’이라는 방법을 동원하 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그 정도가 다른 인플레이션의 발생을 초래한다. 극 단적인 경우에는 경제시스템이 마비되는 큰 위기에 처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최근의 짐바브웨, 6・25전쟁 이후의 두 번의 화폐 개혁, 1990년대 이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각국의 경제위기 등이 좋은 예이다.

둘째, 정부가 지폐를 무한정 발행함으로써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은 그 자체 가 소득재분배를 초래한다. 정부가 발행하는 새로운 지폐를 비교적 빨리 받는

112) “소비나 생산을 위하여 쓰임새가 없는 지폐가 어떻게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화폐 대용물(money substitutes) 또는 지폐만이 사용되게 되었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이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전용덕(2007), 66-72쪽 참조.

사람은 이득을 보고 상대적으로 새로운 지폐를 늦게 받는 사람은 손해를 본다.

경제 내의 대략 인구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의 희생으로 이득을 보게 된다. 그 리고 소득재분배현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은 생산활동보다는 투기 활동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결국 지폐의 지속적인 증가는 가속도적으로 생 산활동을 멈추게 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의 증가를 가속화한다.

셋째, 정부의 지폐발행은 앞에서 서술한 경기변동을 초래한다. 정부가 지폐 의 발행을 증가시켜 금융시장의 이자율을 사람들의 시간선호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이자율보다 낮게 규제함으로써 경기변동을 초래한다. 물론 민간금융기관 이 발달한 주요 국가에서 경기변동은 주로 민간금융기관의 신용팽창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용팽창도 궁극적으로는 정부발행의 지폐가 기초가 되기 때문에 정부발행의 지폐증가의 일정 부분도 경기변동의 초래에 한몫을 한다. 물론 그 정도는 실제로 정부가 얼마나 많은 지폐를 발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넷째, 지폐의 독점적 발행의 또 다른 폐해는 미래의 가격변동을 예측하는 일 이 훨씬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지폐발행의 직접적인 비용이 매우 낮기 때문에 언제나 과다 발행되고 그런 과다 발행은 재화들의 가격변동폭을 증폭시킨다.

미래 가격변동의 예측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계획을 세우기가 어렵고, 그것은 인간의 삶에 상존하는 불확실성을 낮추기보다는 증폭시킨다는 것을 의 미한다. 즉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관점에서 지폐는 상품화폐와 비교하여 단점 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지폐는 생산과 공급이 정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은 지폐의 공급이 시장의 외부에서 결정된다는(comes from outside the market)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지폐의 공급이 시장에 대해 외생적이라는(exogenous to the market) 것이 다. 화폐에 대한 수요가 변할 때 지폐의 공급자인 정부는 시장참여자들의 요구 가 반영된 정보를 이용하여 화폐공급량을 결정할 수 없다. 지폐의 이러한 특징 은 인간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 면 치명적인 결점임에 틀림없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품화폐 의 적정량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상품화

폐의 적정량은 시장 내에서 화폐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민간화폐공급자가 공급 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화폐공급이 일정한 상황에서 화폐수요가 증 가하면 화폐의 가치는 상승하고 그런 가치상승분이 화폐주조에 드는 비용을 충분히 보상할 정도가 되면 민간화폐공급자는 화폐의 공급을 늘릴 것이다. 반 대의 경우에는 화폐를 녹여서 해당 금속의 물리적 용도로 전환할 것이고 화폐 공급은 줄어들 것이다. 요컨대 화폐의 공급은 시장에서 내생적으로(endogenous)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치 일반 재화의 경우에 가격의 변화에 따라 공급자가 공 급량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폐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이 제도 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이것이 지폐발행이 시장에 대해 외생적이라는 말의 의 미다. 그리고 지폐의 발행자는 지폐발행의 양과 비례하여 시뇨리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지폐를 과다하게 발행할 유인이 상존한다.

여기에서 지폐의 독점적 발행이 자원비용의 절약을 가져다준다는 Friedman (1986)의 주장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간략히 알아보기로 한다. 1971년에 국제간 에 금태환을 정지함으로써 그때부터 실질적으로 전 세계는 지폐본위제로 들어 갔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현상은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인 영역에서 인플레이 션이 극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정보통신의 발달과 아시아 신흥시장의 발흥으 로 이러한 현상은 더 빈번해지고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지난 세기말에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인플레이션과 함께 화폐와 금융의 위기가 국가경제, 더 나아가 세계경제를 크게 흔들었다. 지폐의 직접적인 발행비용은 아주 적을지 는 모르겠지만 지폐발행으로 인한 범국가적 차원의 손실은 너무나 크다. 지폐 의 사용이 자원비용의 절약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은 너무 좁은 범위에서 비용 을 산정한 것으로 틀린 것이다.113)

(2) 정부는 금융제도도 통제

정부가 지폐의 발행을 독점함으로써 화폐를 무한정 발행할 수 있게 되고, 그

113) Hoppe(1994)는 이외에도 지폐의 사용이 자원의 절약을 가져올 것이라는 프리드만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실증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Hoppe(1994), 63-65쪽 참조.

런 발권력을 이용하여 이자율을 사람들의 시간선호에 의해 결정되는 이자율인 자연이자율보다 낮게 유지함으로써 정부의 지폐공급이 경기변동과 인플레이 션의 발생을 초래한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경기변동과 인플레 이션을 초래하는 화폐공급의 증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민간금융기관의 신용확대이다. 민간금융기관이 신용을 팽창시킬 수 있 는 주요한 장치는 부분지급준비제도이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부분지급준 비제도는 중앙은행과 다른 제도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서는 먼저 부분지급준비제도가 어떻게 신용을 팽창시키며 어떤 문제점을 가진 제도인가를 다루기로 한다.

부분지급준비제도의 본질과 그것이 초래할 문제점을 논의하기 이전에, 은행 을 포함한 금융기관이 하는 역할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금융기관은 기본 적으로 두 가지 기능, 즉 대출은행업과 예금은행업을 수행한다. 오늘날의 금융 기관은 금융기관간 업무영역의 경계가 완화되면서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출은행업과 예금은행업의 기능과 역할은 엄 연히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대출은행업이란 금융기관이 저축자와 투자자 또 는 차용자간의 중간에서 자금을 중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114) 금 융기관이 저축자에게 주는 이자와 투자자 또는 차용자로부터 받는 이자의 차 이는 금융기관이 저축자와 차용자 사이를 중개하는 데 대한 대가이다.

금융기관의 예금은행업 기능은 앞에서 본 대출은행업 기능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금은행업은 기본적으로 예금자에게 안전한 보관장소(safekeeping service)를 제공하고 거래를 결재하는 기능(clearing service)을 하는 것이다. 은행은 이러한 예금에 대하여 이자를 지불하기는커녕 오히려 예금자가 보관과 결제 서비스에 대하여 은행에 사용요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 다. 한마디로 예금은행업은 은행이 창고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15)

19세기 이전까지는 은행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한 혼동이 없었다. 이러한 혼동

114) 대출은행업의 특징이나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용덕(2007), 75-78 쪽 참조.

115) 예금은행업의 특징이나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용덕(2007), 78-80 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