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전환국가의 국가조직과
관련법제 연구 제3차 워크숍
1. 일시 : 2017년 9월 22일(금) 16:00 ~ 19:30
2. 장소 : 토즈 강남점
3. 세부일정
주제 1 : 헝가리 민주화, 선거제도, 그리고 정당체제: 협상(약)을 통
한 민주화
주제 2 : 중 동부 유럽의 과거 청산 사례 및 경험: 헝가리, 폴란드, 체코의 과거청산 관련법을 중심으로
발표 : 김지영(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박사)
토론 : 참석자 전체
4. 참석자
김래영(단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김지영(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박사)
김정현(전북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이상경(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임지봉(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연주(한국법제연구원 위촉연구원)
발표자료
헝가리 민주화, 선거제도, 그리고 정당체제: 협상(약)을 통한 민주화 /
김지영··· 7
발표자료
중 동부 유럽의 과거 청산 사례 및 경험 - 헝가리, 폴란드, 체코의
과거청산 관련법을 중심으로 - / 김지영··· 41
헝가리 민주화, 선거제도, 그리고 정당체제: 협상(약)을 통한 민주화
1)김 지 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박사)
목 차
1. 헝가리 민주화의 배경과 특징 1) 헝가리의 역사적 유산 2) 공산당의 변신과 생존 3) 공산체제 하 부분적 자유화 4) 취약한 민주운동세력 5) 합의에 의한 민주화 2. 선거제도와 정당체제
1) 혼합선거제도의 도입 2) 초기 정당체제의 등장 3) 정초선거와 6당 체제의 등장 4) 1994년 선거와 구 공산당의 부활 5) 민주화 이후 선거패턴의 변화
6) 2010년 선거와 정당체제의 대전환 : 거대 우파의 집권과 극우
정당의 진입
3. 헝가리 정치체제의 변화 1) 헝가리 정당체제의 특징 2) 헝가리 정당체제의 전개 3) 헝가리 공산당의 부활 4. 선거제도와 의회제도
1) 공산당의 선거제도 전략 2) 자유민주진영의 선거제도 전략 3) 단원제 의회
5. 헝가리 정부형태: 의회제 vs. 대통령중심제
1. 헝가리 민주화의 배경과 특징
헝가리는 가장 안정적으로 이행기를 통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불과 2년 만 에 이룬 정치적 안정으로 헝가리는 1990 92년 동안 동유럽 해외투자 전체 의 절반 이상을 흡수했다.2) 유효정당수는 3.8에서 2.6으로 감소하여 다당제 경향은 크게 감소했다. 동구 지역에서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 면 에서 폴란드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그림 1). 1989년 민주화 이 후 중요한 헌법 개정은 없다. 1993년 의회진출 장벽을 4%에서 5%로 높인 것 이 헌법개혁의 전부다. 1989년 혼란의 와중에서 공산당(온건파)은 반공산 자 유주의 운동과 협상을 시도하고 사민주의 정당을 표방함으로써 자체개혁을 시도하고 이에 성공했다. 공산당은 즉시 사회당으로 개명하였고 불과 4년 만 에 집권당이 되었고 2010년 선거에서 지지율이 급락했으나 여전히 의회의 주요 정당으로 건재하고 있다. 안정적 측면은 정당체제의 안정에서 잘 나타 난다. 초기 선거에서 20여개의 정당이 난립하여 투표에서 경쟁했으나 두 번 째 실시된 1994년 선거에서 의회정당은 6개로 줄어들고 이들이 약간의 변화 를 제외하면 향후 의회정당으로 존립을 지속하고 있다. <표 2- -8>에서 보2
듯 1990년 최초 선거 이후 정당 수는 급격히 줄었고 이에 따라 불비례 정도
를 나타내는 불비례지수도 시간이 갈수록 낮아졌다.
<표 2- -8 정당체제의 안정 1990 2009>
년도 효과적 의회정당 수 절대적 불비례지수
1990 3.8 3.0
1991 3.8 3.0
1992 3.8 3.0
1993 3.8 3.0
1994 2.9 2.6
1995 2.9 2.6
1996 2.9 2.6
1997 2.9 2.6
1998 3.5 1.0
1999 3.5 1.0
2000 3.5 1.0
2001 3.5 1.0
출처: Comparative Political Data Set III 1990-2009
헝가리 공산당 정부는 1989년 12월 의회를 해산하고 다당제를 대비하여
1990년 3월 16일 총선을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1990년 3월 선거에는 무려
50개 이상의 정당이 도전했고 12개의 정당이 전국적 경쟁에 참여했다. 12개
정당 가운데에서도 당시 반공산체제 운동을 주도했던 헝가리민주포럼(MDF), 자유민주연합(SZDSZ), 농민당(FKGP) 그리고 공산당을 계승한 사회당(MSZP) 가 두드러졌다. MDF 등 반공산세력은 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지지를 호 소했다.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MDF는 신중한 사유화를 그리고 자유민주연 합은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다.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MDF는 점진적으로 비동 맹 외교를 강화할 것을 그리고 자유민주연합은 서방과의 긴밀한 외교를 즉 각 실시할 것을 강조했다.
1) 헝가리의 역사적 유산
헝가리의 전환은 진공상태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역사적 경 로로부터 구조적 영향을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역사적 영향은 단기적 및 장 기적 구조적 영향이 있다. 역사적 유산은 하나의 획일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종류가 있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기적인 유산이 있는 반면 이행기 초기의 결정이 남긴 영향도 있다. 초기 유산은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는 기간 동안에 형성되는 점에서 가시적 영향을 남긴다. 선거제도와 정부형태의 선택 은 대표적인 단기적 그리고 초기적 유산의 효과를 갖는다.3) 한편 공산당의 부활이나 존립 여부는 붕괴의 성격도 영향을 준다. 헝가리처럼 철저하게 협 상을 통한 전환에서는 지배적 정당의 경험이 많은 공산당은 유리한 국면에
년도 효과적 의회정당 수 절대적 불비례지수
2002 2.2 0.6
2003 2.2 0.6
2004 2.2 0.6
2005 2.2 0.6
2006 2.6 0.1
2007 2.6 0.1
2008 2.6 0.1
2009 2.61 0.08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갑자기 붕괴하는 경우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탈공산화의 경쟁에서 운명은 불투명해진다. 결과 적으로 개혁적 공산당의 정도와 노조와의 연대가능성은 구 공산당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헝가리는 동구에서 가장 처음으로 의회주의를 수용했던 나라이다. 1848년 혁명으로부터 1949년 국가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기 까지 법적으로 정부는 의회에 책임을 지는 의회주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실패로 근대적 의회주의는 좌절되었고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은 선거규제가 비민주적인 제한적 의회주의를 허용했다. 1867-1918년 동안 자본주의가 발전 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의회주의가 발전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민주 적 선거제도를 설치하지 않았다. 제2차 대전 이후 비민주적 장애물이 제거되 자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근대적 의회주의를 지향했다. 1949년 헌법은 의회 중심주의와 약한 대통령을 두었다. 그러나 근대적 의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 가 본격화되면서 형태만 남았다.
전전 헝가리는 반권위주의 체제였으며 보편투표권의 정당경쟁이 허용되었 으며 선거결과는 엘리트에 의해 관리되었다. 1930-40년 대 헝가리 정부는 파 시스트 국가로부터 정치적 동원의 기술을 습득했으나 실천하는 데는 성공하 지 못했다.4)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의 억압 하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제1차 대전 후 1919년 부다페스트에 수립된 사회주의 공화국은 빈농 정책에 실패하여 반혁명세력에 의해 패퇴했다. 이후 공산주의는 도시지 역에 고립된 채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자 유선거와 1947년의 선거에서 중산계급과 농민이 연대하여 공산당을 물리쳤 다. 소련의 물리적 지원이 아니었다면 공산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산당의 취약성은 1953 56년 발생했었던 반스탈린 저항운동이 광범하게 전파하면서 다시 등장했다. 1956년은 헝가리 민주화 역사에서 “결정적 국면 (critical juncture)”에 해당한다. 1956년 저항운동은 동구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헝거리 공산당을 약화시켰다.5) 소련군의 대대적 지원을 받은 Kadar 공산당
4) 제2차 대전 후반에 독일 나찌의 후원 하에 파시스트 정부가 들어섰었다.
정부는 저항운동을 분쇄하였다. 헝가리 공산당은 몇 차례의 위기를 맞았으나 소련의 지원으로 지탱할 수 있었으나, 소련의 방관은 민주화를 허용하는 것 을 의미했다.
2) 공산당의 변신과 생존
민주화 과정에서 보듯, 탈공산화 사회에서 이행기 과정에 대한 구공산당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중요하다. 구 공산당 문제는 정당체제의 안정과 정치 문화에 줄 영향을 고려할 때 중요하다. 첫 번째 탈공산화 시대에 구공산당 정당이 어떻게 생존 그리고 나아가 확대재생산에 성공했는가를 분석할 필요 가 있다. 이는 특히 공산주의의 유산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탈공산화 사회의 정당은 세 가지 종류이다. 첫째는 반대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화된 정당 이다. 둘째는 공산화 이전부터 있었던 ‘역사적’ 정당의 후예이다. 셋째는 구 공산당의 후신이다.
헝가리 이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구 공산당을 계승한 사회당이 민주화 과정의 협상은 물론 선거에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위했다는 사실이다. 헝가리 공산당은 1988년 5월부터 시작된 전환과정에서 서서히 위축되었다. 이 과정 에서 헝가리 공산당은 반공산세력과 협의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헝가리 공산당은 하루 아침에 소수세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서 스스로 권력을 양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Ziblatt 1998, 125). 이는 집권세력에게 중대한 딜레마를 제공했다.
1988년 5월 헝가리 공산당 즉 사회주의노동자당은 궁정쿠테타를 경험한다.
여기서 이전까지 31년 동안 통치하던 Kadar가 실권한다. 당 내부에서는 연합 세력이 권력을 잡는다. Karoly, Grosz, Pozsgay, Berecz 등 핵심실세로 등장하 여 1956년 이후 구축된 Kadar 세력을 몰아낸다. 이들은 사전에 Kadar 세력을 예방적 차원에서 제거함으로써 자유화를 주도했다. Grosz와 Berecz의 목표는 경제개혁과 다당제의 도입 등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의도하지 는 않았지만 변화의 길을 열었고 결국 공산당 차제의 몰락을 초래했다.
헝가리 공산당은 Pozsgay가 이끄는 개혁파와 Grosz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 가 서로 대립했다. 전환과정에서 대세는 개혁파에게 돌아가 Grosz의 보수파 의 세력은 서서히 위축되었다. 1989년 1월 헝가리 의회가 자유연대법을 통과 시킴으로써 정당수립과 활동이 허용되었다. 1989년 2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다당제를 결의했다. 1989년 6월 보수파 핵심 Grosz가 물러났으며 Pozsgay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권력을 장악한 후 1980년대 등장하기 시작했던 개혁 반대세력과 전환을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의 핵심목표는 자유선거를 도 입하고 민주적 선거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공산당의 개혁파가 대결전략으 로부터 경쟁의 전략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이에서 오는 기회, 인센티브, 그 리고 이점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조직이나 인적자원 면에서 상대세력이 아직 취약한 조건에서 경쟁을 하여 승리하려는 전략이었다 (Bruszt and Stark 1991, 232).
3) 공산체제 하 부분적 자유화
헝가리 이행기의 특징은 본격적 전환에 앞서서 이미 정치적 다원주의가 출 발했다는 사실이다. 1988년 동구 전역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는 헝가리에도 찾아왔다. 당시 동구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헝가리 공산당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56년 이후 장기집권을 한 Janos Kadar가 공산당 명예
총재로 퇴진하고 새로운 서기장으로 Karoly Grosz가 취임했다. Grosz는 당시 의 힘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제한적 자유화 정책을 천명했다. 경제적 위기 를 벗어나기 위해 서구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위해서도 자유화는 필요했다.
Kadar 세력은 저항운동의 재발을 우려하여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기 보다
경제자유화와 소비자요구의 충족을 위한 정책을 강화하는 등 사회적 합의 전략에 의존했다. 카다르 공산정부는 제한적 자유화는 이행과정에서 다당제 가 정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6) 제한적 자유화는 헌법위 원회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1982년 헝가리 정부는 헌법위원회를 도입했다. 헌 법위원회는 헌법을 폐기할 권한은 없으나 정부 차원의 규제에 대해서는 시
정할 수 있었다. 헌법위원회의 설치는 다원주의로 향하는 신중한 첫 행보였 다. 다원주의화는 나중에 이행기 동안 다당제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정치적 자유화가 찾아 온 것은 1980년대 헝가리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 고 외채가 증대하여 Kadar 정부의 정통성을 침해했을 때 비로소 가능했다.
국민의 폭증하는 불만에 공산정부는 반대세력과의 유화정책을 강화할 수 밖 에 없었다. 폴란드처럼 공산정부와 반대세력 사이에는 오랜 협상의 과정이 있었지만 헝가리는 반대세력 내에 정당들이 일찍 만들어지는 등 폴란드와 몇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헝가리는 폴란드 Soliartiy처럼 1980년대 초 공 개적으로 공산정부와 대립하면서 모든 시민운동의 우산조직 기능을 제공했 던 조직은 없었다. 둘째, 헝가리 공산당의 개혁파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포 폴리즘과 민족주의적 반대세력을 육성했으며 스스로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셋째, 1989년 여름 폴란드에서 개혁세력이 공산정부에 승리한 다음 발생한 헝가리 민주화의 타이밍은 헝가리 개혁파 공산당 세력 으로 하여금 공개적인 민주적 선거를 선택하는데 확신을 주었다.
헝가리 공산당은 폴란드 공산당에 비해 훨씬 앞서서 시장개혁을 실시했다.
탈공산화 이행을 둘러싼 협상은 공산당, 민주진영, 그리고 노조를 포함한 시 민단체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89년 6월-9월 사이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실제
로는 1987년부터 1989 1990년 겨울 동안 협상이 계속됐다. 나아가 개혁은
전면적이기 보다 부분적이지만 폴란드에 비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협 상의 핵심 의제는 선거제도와 정부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민주화 노력은 국 민적 지지를 받았고 헝가리 공산당과 그 후계정당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신 뢰를 얻었다.7) 헝가리 구 공산당이 개혁을 지지하고 실시하면서 자유세력 정 당은 경제개혁에 전념하기 곤란했으며 다른 분야의 개혁을 모색해야 했었다.
이 결과 반대세력은 정책은 기독교적, 민족적, 그리고 포퓰리즘적 지지에 주 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헝가리 민주포럼(MDF)는 민족적-문화적 측면을 강조하고 호소함으로써 1990년 선거에 승리하여 제1당으로 부상할 수 있었
다.8) MDF의 경제정책은 점진적 시장개혁으로 다른 정당과 차별성이 없었다.
7) Kitschelt 1999, 234-5
공산체제에서 오랜 동안 형성된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제도적 구조가 체 제가 붕괴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과거 체제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많은 탈공산 체제에서 구 공산당계열의 정당이 부활하여 집권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과거 구조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 이다. 역사적 유산의 접근에서 볼 때 헝가리의 정치적 전환, 즉 민주화에 공 산체제의 정치는 무슨 영향을 주었으며 그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과거의 유산이 제도의 도입과 정당의 형성과 활동에 어떻게 그리고 언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헝가리 공산당 정부는 1980년대 점진적으로 자유화 조치를 실시했다. 1989 년 정부는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인 25,000 명의 국경통과를 허용했다.
또한 당명도 공산주의를 버리고 사회당으로 바꿨다. 당시 당원은 850,000 명 이었으나 1997년 50,000 명으로 감소했다. 공산당은 정부정책에 대한 통제권 을 포기했으며 이는 1989년 10월 18일의 헌법에 반영되었다.
헌법개정은 탈공산화 당시의 조건을 반영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강력한 행정부에 대한 두려움을 야기했다. 이를 의식하여 대통령은 약화되었고 의회 의 우위가 천명되었다. 예를 들어 의회는 대통령의 약화된 비토권을 무효화 할 수 있다. 인민주권을 강조하여 국민투표제도가 도입되었다. 재정, 조세 그 리고 외교정책을 제외한 모든 문제는 국민투표로 결정가능하다. 선거제도는 개별 지역구와 정당리스트의 비례대표제가 혼합되었다.
구 공산당은 외적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변하지 않으면 안됐다. 1980년대 헝가리는 이미 동유럽 전반에 흐르는 개혁의 분위기에 있 었다. 공산당 일당체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은 폴란드보다 그 세력은 약하지 만 분명히 존재했다. 1980년대 동안 사회주의 경제위기가 악화되면서 개혁의 목소리는 더 커져갔다. 초기 개혁을 주도한 집단은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1985년 처음으로 Monor에서 모임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나라의 운
명을 걱정했다. Monor회의에서는 중요한 시민단체는 모두 초청되었고 1956 년 반소비에트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1956년 세대’, 작가 그리고 공산정부를 반대하는 민주진영도 참가했다. 이들은 자유노조,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 자유롭고 개방적 공론의 허용을 주장했다. 이러한 요구는 ‘애국인민전선’이라
는 조직의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1988년 5월 헝가리 공산당 회의에서 당서기 장 Janos Kadar와 그 일파가 실각함으로써 32년의 장기집권이 막이 종식했다.
4) 취약한 민주운동세력
민주화 세력은 폴란드와는 달리 강력하지 않았고 분산적이고 수적으로도 적었다. 민주반대진영은 자신의 목표는 거대한 희생을 필요로 하는 공산체제 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시민사회를 구축하고 인권존중을 위해 국 가권한의 제한하려 했다. 1987년 여름 민주반대진영은 기관지 ‘스피커 (Beselb)’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담은 사회적 계약이라는 프로그램을 발표했 다. 여기서 구 엘리트는 물러나고 광범한 정치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새로운 체제는 기존의 공산당이 참여하는 상원과 자유비밀선거 를 통해 선출된 하원으로 구성된 헌정 ‘당-왕정’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1987-1989년 상황이 급변하자 헝가리 민주진영은 새로운 기회를 맞아 더욱 과격해졌고 타협책으로서 민주적 헌정체제의 도입을 제안함으로써 정치제제 의 완전한 이행을 요구했다. 1987년 9월 27일 민주세력은 대규모 모임을 갖 고 후일 민주화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헝가리민주포럼(MDF)을 출범시킨다.
한편 대학생 운동은 국가의 독점적 권력은 붕괴되어야 하며 대안적 권력을 구축해야 하려 노력했다. 1988년 3월 30일 학생운동은 청년민주연합(FIDESZ) 을 결성했다. 후자는 공산당을 제외하면 헝가리 최초의 정당이었다. 1989년 가을 자유민주연합은 정당으로 발전했으며 MDF도 뒤를 이었다. 같은 해 ‘역 사적 정당(historic parties)’’ 즉 농민당(KPFG), 기민당(KDNP) 등이 다시 등장 했다. 민주진영이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구 공산당 MSZMP)는 스스로 해산한 뒤 사회당(MSZP)로 개명했다.
헝가리의 민주세력은 초기 협상테이블회의를 통해 통합세력을 구축했다.
동구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협의를 위해 구성된 협의체(EKA)가 최초 선거에 하나의 거대 세력으로 참여하지 않고 각각 독립 조직으로서 참여한 것은 선 거 후 거대연합이 내분함으로써 불안정한 것에 비해 정치안정에 기여한다.
또한 민주세력이 또한 하나의 구심점을 통해 공산당과 전환을 협의한 것은
정치적 경험이 빈약한 민주세력이 인적 자원을 획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헝가리 민주화는 1989년 1월 국내적으로 1956년 저항운동을 기념하는 행사 를 통해 대전환을 맞았다. 해외방문 중인 Grosz를 대신하여 Pozsgay가 당 조 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956년 저항운동을 민중봉기로 선언했다. 한편 강경
파는 1956년 봉기를 여전히 반혁명적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공산당의 내분은
더욱 격화되었고 민주세력은 이 기회를 분수령으로 취약한 위치에서 강력한 도전운동으로 발전했다. 1989년 2월 10 11일 당 중앙위원회 다수는 자유선 거를 통해 평화롭게 의회민주주의로 이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공산 당 온건파는 공산당 주도로 이행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5) 합의에 의한 민주화
헝가리의 전환은 협의를 통한 이행이다. 이는 이웃국가 폴란드에서 일어난 협의를 통한 이행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의 전환 협약이 끝난 두 달 후인 1989년 2월 17일 헝가리의 반대정당과 연대세력이 폴란드가 수 용한 다당제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환영하고 헝가리 공산당(MSZMP) 지도부 를 향해 동일한 개혁을 추진토록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와는 달리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여 헌정질서를 만들지 않고 기존의 의회가 협의를 통과시킨 점에서 점진적이었다.
반대세력은 권력의 분리와 민주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주장했다. 이에 공산당은 처음에는 주저하면서 자유진영 각각의 정파와 별개의 논의를 제시 했다. 당시 공산당은 자유선거가 실시될 경우 공산당이 1/3의 지지를, 헝가리 민주연합(MDF)은 13%, 그리고 자유민주연합(SZDSZ)는 6%을 받는다는 자신 에게 유리한 여론조사결과를 믿었다. 당시 여론조사는 공산당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정치인 후보가 많은데 이들이 선거에서 유리하다고 발표했다. 공산당 이 아직 여론을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서 반대진영은 이제 본격적 투쟁에 나 서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1989년 3월 22일 민주진영은 공산당 개혁가 주도하는 개혁에 대항하고자 부다페스트 법대에서 야권협상회의(EKA)을 조직할 것에 합의했다. EKA는
본래 1988년 11월 5월 출범한 독립변호사회의(FJF)의 제안으로 출범했고 참
여는 변호사회의의 초청형식이었다. 민주진영의 핵심조직인 헝가리 민주포럼
(MDF)과 청년민주연합(SZDSZ)이 참여했다. 그 외에 초청된 정당 및 단체는
농민당(KDNP),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민당, 자유노조연합(Liga) 등이다.
민주진영은 국가권력이 여전히 공산당에 있는 조건에서 통합하여 힘을 합 하지 않으면 취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1989년 6월 13일 국가정 당과 민주진영 사이에 이행문제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다. 협상의 의제 중 핵심적인 것은 의회민주주의로의 전환과 합의를 통한 새로운 헌정의 준비에 관한 것이었다. 공산당과 민주진영의 합의는 의회에서의 개혁 중지와 의회는 협의 내용을 아무런 변경 없이 입법화하는 것을 포함했다. 결국 협의는 다음 과 같은 합의에 도달했다.
1. 헝가리 국가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회중심제 민주주의이다. 공산당은 정치적 안정을 명분으로 약한 대통령과 의원이 직접 선출되는 강력한 의회 제의 결합을 선호했다. 반면 민주세력은 이행기의 상황에서 폴란드처럼 대통 령제를 택할 경우 강력한 대통령으로 변하기 쉽고 반대세력에 불리하게 하 는 등 정치적 경쟁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헝가리민주연합 (MDF)는 대안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직선제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2. 합의는 정당활동의 법적 규제에 관한 것이다. 헝가리는 오랜 독재를 경 험했기 때문에 독일처럼 중립적 국가를 만드는 것과 헌법은 정치적 독점의 반대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합의했다.
3. 합의는 탈공산화 상황에서 실시될 선거법에 관한 것이다. 역사적 정당들 은 비례대표제도를 선호한 반면 자유민주연합(SZDSZ)와 공산당(MSZMP)는 각각 다른 이유에서 소선거구제 또는 단순다수제를 주장했다. 결국 현행의 혼합선거제도는 헝가리민주연합(MDF)이 중재한 것으로 비례대표제와 다수제 의 장단점을 모두 포함한다.
협의과정에서 민주진영의 통일은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처음에는 반발했으
나 Poszgay의 지도력으로 결국 합의에 참가했다. 반대진영 가운데 헝가리시
민연합(FIDESZ), 자유민주연합(SZDSZ), 그리고 자유노조연합은 협상이 끝난 후 공개적으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중요 쟁점 네 가지를 공개적으로 밝혔
다. 의회는 1989년 10월 23일 임시의장의 사회로 협상에서 만들어진 합의를
법으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Nemeth 정부는 합의되지 못한 사항 중 노동민병 대와 정당규제 부분은 1989년 10월 30일 입법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2. 선거제도와 정당체제
현대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이다. 정당은 선거를 통해 경쟁하고 선거 후 일부는 정부를 맡는 집권당이 된다. 따라서 민주화에서 정당은 가장 기초적 시작이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체제와 같은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사회주의는 공산당 독재를 기초로 한다. 다원적 장치체제가 가 능하려면 정당이 필요하며 정치적 자유화는 정당의 활동을 허용한다.
1) 혼합선거제도의 도입
헝가리 혼합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를 혼합한다. 176명은 지역 구에서 선출하는 한편 나머지 210 의석은 정당리스트를 통해 뽑는다. 전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기반으로 한 지역리스트가 있으며 전국리스트도 있다. 전국구 의석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5%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지 역구에 출마하는 후보는 최소 750 명의 추천을 얻어야 한다. 지역리스트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정당은 한 지역에 최소 2명 이상의 후보를 내야 한다. 또
한 7개 이상의 지역리스트를 제출한 정당이 전국리스트를 제출할 수 있다.
1994년 선거에서 지역리스트를 제출한 정당은 15개에 달했다. 이들 15개 정
당은 전국적 정당이라 할 수 있으나 의회에 진출한 정당은 6개에 불과했다.
사회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 이후 경제개혁으로 경제적 곤란이 심각해졌기 때문에 투표자가 집권세력에 등을 돌리고 과거 공산당의 후계정 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사유화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노사의 공동참여를
기반으로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연정에 참여한 자유주의 정당 SZDSZ 는 진정한 시장경제로의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작은 국가와 재정지출의 삭감 을 주장했다.
2) 초기 정당체제의 등장
1989년 최초의 민주선거에 대비하여 많은 정당이 만들어졌다. 반공개적으
로 활동하던 단체도 정당으로 전환했고 농민당(FKGP)처럼 전전에 존재했던 정당이 부활했다. 농민당은 공산화 이전 마지막 자유선거였던 1947년 선거에
서 57%의 득표를 했던 역사적 정당이다. 신생정당으로는 청년민주연합(SZDSZ),
자유민주연합(FIDESZ), 그리고 불법단체였던 민주포럼(MDF) 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가운에서 1990년 선거에서 4%의 장벽을 넘은 것은 6 개 정당 에 불과했다(표 2- -9). 2 공산당은 1989년 분열되어 다수는 사회당(MSZP)을 창당했다. 헝가리는 4%-5%의 진입장벽을 설치했는데 이는 정당의 수를 제한 하여 정당체제의 안정에 기여했다.
<표 2- -9 헝가리 정당과 의석 1990 2012>
1990 1994 1998 2002 2006 2010
MSZP(사회당) 33 209 134 179 186 59
SZDSZ
(청년민주연합) 92 69 24 19 18
MDF(민주포럼) 165 38 17 11
FKGP(농민당) 43 26 48
KDNP(기민당) 21 22
Fidesz
(자유민주연합) 21 20 148 188 164 263
MIEP 14
MSZP_SZDSZ 6
극우 Jobbik 47
녹색당LMP 16
기타 11 2 3 1 1
총의석수 386 386 386 386 386 386
민주포럼은 초기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활발했던 정당으로 민 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며 처음 선거에서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다. 마찬 가지로 공산당과 대립했던 청년민주연합과 자유민주연합은 모두 자유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고 초기 시기에는 상호협력 했었다. 한편 역사적 정당도 태어 났다. 농민당은 1949년 공산화 이전에 실시되었던 마지막 선거에서 49%의 지지를 얻은 기록을 갖고 있다. 기민당 역시 전전에 존재했었던 정당이다.
3) 정초선거와 6당 체제의 등장
새로운 헌정질서를 기반으로 1990년 3월 22일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 다. 선거결과는 50년의 공산당 독재를 지난 후에 마침내 다당제로 나타났다.
최대승자는 헝가리민주연합이었다. 헝가리민주연합은 농민당 및 기민당과 연 합하여 총의석의 60% 의석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1990년 5월 2일 취임한 신정부는 그러나 1989년 봄 협상회의에서 이루어진
합의로 인해 원활한 운영이 힘들었다. 따라서 신정부는 최대 야당인 청년민 주연합(SZDSZ)와 개헌을 합의했다. 최대 의석을 가진 두 정당이 만든 합의 는 탈공산화 이후 처음으로 출범한 민주정부에게 정치적 안정성을 가져다주 었다. 수많은 난제에 직면하고 있던 헝가리에서 이 타협이 아니었다면 갈등 은 통제되지 못하고 분출되어 국정운영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신정부와 야당이 합의한 개헌은 불신임발의를 도입하고 대통령 지위를 1946년 정신을 따라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의회에서 선출하도록 수정했다.
합의의 대가로 정부는 최대야당인 청년민주연합에게 대통령 선출권을 위임 했다. 그리고 신정부는 야당과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는데 합의했다.
4) 1994년 선거와 구 공산당의 부활
1994년 5월 29일 실시된 두 번째의 자유선거 결선투표는 사회당의 압승으
로 끝났다. 공산당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MDF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연정 은 개혁 후유증으로 1994년 선거를 앞두고 10%의 낮은 지지도를 기록했다.
1993년 12월에는 연정을 이끌던 총리가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또한 MDF
안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당 대표와 총리가 분리되는 분열에 빠졌다. 연정에 참여한 다른 정당들 역시 지지도가 하락했다. 제2의 파트너 기민당(KDNP)은 보수층을 대상으로 5-10%의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제3의 파트너로 참여한 농 민당(FKGP)는 농민을 지지층으로 했으나 지지도는 5-10%를 넘지 못했다.
공산당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 공산체제의 개혁적 성격에서 비롯 된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헝가리의 공산당은 개혁적 성향을 보여왔다. 폴 란드 공산당 또한 개혁적이지만 헝가리보다는 약하며 체코 공산당은 반대로 수구적 경향의 전통이 강해 탈공산화 과정에서 부흥하는데 실패했다. 공산당 체제에서부터 존재하던 개혁파는 공산당 일당독재가 붕괴되자 노조 등 조직 적 세력과 제휴하여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유선거의 경쟁을 이겨냈다. 자유연 정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은 사회당으로 돌아갔다. 탈공산화 이후 처음오로 집권했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실망은 과거 공산당 정부에 대한 향수를 만 들어냈던 것이다.
사회당은 179 선거구에서 149 선거구에서 승리했다. 사회당은 총 209석을 얻어 전체의석의 54%를 차지했다. 비례대표 지지는 불과 39%였으나 의석에
서는 54%를 얻는 제도의 효과를 보았다. 사회당은 단독집권이 가능했지만
연정을 선호하는 여론을 의식하여 연정 파트너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선거 종료 후 40일 이내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법에 따라 사회당은 연정에 참여 할 잠재적 정당으로서 자유당을 꼽았다. 7월 15일 Horn을 총리로 하는 연정 이 성립했다. 내각은 사회당이 압도적으로 차지했다. 단 3개 자리가 자유당 에게 할애됐다. 1990년 선거 때와는 달리 연정을 문서화하여 구체적 기준이 공표되었다. 이는 연정의 원칙을 담고 11개 정책에 대한 구체적 업무를 포함 했다.
5) 민주화 이후 선거패턴의 변화
1990년 전환이후 선거가 시소게임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탈공산화 사회의 투표자가 회고적 투표를 하는 것과 연관된다. 전환기 체제는 경제개혁이 뒤 따르는 만큼 경제의 좋고 나쁨은 정책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공산당이 변신
한 사회당이 집권하여 사회적 보호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실패할 경우 모든 책임은 집권당이 질수 밖에 없다. 1994년 선거는 1990년 선거에 이어 공산체 제 붕괴 이후 두 번째의 자유선거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최초 선거였다. 1990 년 선거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전혀 경험이 없는 새로운 정당과 후보가 난립했던 반면 1994년 선거는 달랐다.9)
1998년 선거는 탈공산화 이후 실시된 세 번째 선거인데 선거결과는 정당체 제의 안정감을 보여주었다. 다시 또 집권세력이 교체되었다. 1990년 이후 집 권당은 세 번째 교체되었다. 우파진영의 지배적 위치에 있는 청년연합은 기 민당(KNDP) 분열로 인한 분열을 통합하고 헝가리시민연합(MDF)와 선거연대 를 꾀함으로써 제1당이 되었다. 특히 1차 투표를 마친 후 가능성이 높은 지 역구에 공동후보를 세움으로써 사회당 후보를 패배시켰다. 청년연합은 우파 진영의 군소정당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19개의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 다. 사회당 진영은 반대로 선거연대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당과 연대의 대 상인 자유민주연합(SZDSZ)은 오랜 동안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어서 타합 하지 못했다. 결국 1998년 선거의 최대 피해자는 사회당의 하위파트너인 자 유민주연합이다. 1994년, 1994년 선거에서 각각 92석과 69석을 얻었었지만
1998년에는 불과 24석을 얻었다. 자유민주연합을 지지했던 투표자는 실정에
등을 돌리고 청년민주연합 진영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림 2- -1] 헝가리 정당 역대 득표(%) 1990 2001
공산당 후신인 헝가리사회당은 2002년 압승을 거두고 자유당((Alliance of Free Democrats)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사회당은 1차 선거에서 42%을 얻어 중도우파연합(Fidesz-HCP)를 1% 차로 따돌렸다. 결선투표에서는 Fidesz가 지 방에서 지지를 강화한 결과 사회당의 과반지지를 막았다. 그러나 사회당은 소수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구성했다. 5.5%를 얻어 의회진입에 성공한 자유당은 본래 공산당과 초기 탈공산화 과정에서 반대했었던 집단이다. 한편
4.5%를 얻는데 그친 극우세력 정의와 생명의 당은 의석획득에 실패했다. 자
유연대 외에 5당 연정에 참여한 소수 정당은 헝가리민주포럼, 기민연맹, 그 리고 루마니아계 정당이다.
2002년 선거는 탈공산화 이후의 정당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예상
과는 달리 보수세력이 패배하고 사회당이 승리했다. 첫째, 우파의 생명과 정 의의당(MIEP)과 농민당(FKGP)이 의석을 얻지 못했다. 탈공산회 이후 처음으
로 ‘역사적 정당’ 즉 전전부터 존재했었다가 탈공산화이후 재건한 정당이 사
라진 것이다. 농민당의 퇴장은 자유주의 정당이 Fidesz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농민당의 지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행기에서 생겨난 정당이 크게 약화되었다. 헝가리민주연합(MDF)과 자유민주연합(SZDSZD)의 의석이 크게 줄었다. MDF는 1994년 38석에서 24석으로 그리고 SZDSZD 의석은 69석에서 20석으로 줄었다. MDF는 사실 헝가리시민당(Fidesz)와 연합하지 않았다면 의 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연정은 1994 1998년 연정을 결성했던 사회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이번에도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94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회당은 과거 에는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고려에서 자유당에 연정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188석의 보수연합을 상대해야 했다. 178석의 사
회당은 20석의 자유당과 합해 198석으로 과반을 넘는다. 자유당은 연정에 참
여한 결과 보상차원에서 각료 14 자리 중 네 자리를 얻었다.
6) 2010년 선거와 정당체제의 대전환 : 거대 우파의 집권과 극우정당의 진입
헝가리 정당체제는 2010년 선거를 통해 가장 중대한 변화를 경험했다. 헝 가리시민연합이 이끄는 우파연합이 예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지방선거에서 도 마찬가지로 압도적 승리를 했다. 시민연합과 기민당과 연합하여 소선거구
에서 176석 중 173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비례대표 의석에서 90석을 얻어
266석으로 2/3 이상의 거대여당이 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두 신생정당이 의회진입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첫째, 극우정당에 해당하는 우익헝가리(Jobik)이 16.7%의 지지를 얻어 47석을 획득했다. 한편 녹색정당인 LMP는 7.5%의 득표로 16석을 얻었다. 두 번째로 획기적 사건은 1990년 민주화 이후 의회에 진출하여 연정에 참여했었던 자 유주의계열이 자유민주연합(SZDSZ)과 보수진영의 헝가리민주연합(MDF)가 5%
득표에 실패함으로써 의석을 얻는데 실패했다. MDF는 탈공산화 이후 헝거리 최초의 집권여당이었다. MDF와 자유민주연합을 지지했던 표는 녹색정당으로 이동했다.
이 같은 대대적 정치변화의 배경에는 경제적 곤란이 지속되어왔다는 점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적 불안은 선거 이전부터 집권당인 사회당에게 불리하고 제1야당인 보수당의 승리를 예견케 했었다. 헝가리 국민은 정치가 경제문제 를 해결하는데 효력을 내지 못하면서 정치에 실망했으며 이러한 실망감이
2010년 선거에서 표로 표출되었다. 또한 집권당인 사회당이 경제문제를 푸는
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국민이 외면했다는 평가이다. 사회당 정부에 대한 실망은 사회당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과거 사회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했었던 자유민주연합에게로 향했다.
사회당의 선거 전략은 제2당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당은 새롭게 생겨난 극우정당과 경쟁해야 했다. Jobbik은 보수진영 제1당 이 되고자 노력했다. Jobbik은 기성정치권에 대한 염증을 이용하기 위해 정치 부패를 비난했다. 또한 공공질서를 강조하고 집시범죄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소수계에 대한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또 다른 신생정당 녹색당 LMP 역시 자
신이 새로운 대안정당임을 부각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자유주의 및 보수층 은 물론 녹색운동에 관심을 갖는 젊은 투표자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했다. 당
초 LMP는 최초의 녹색정당인지로 의회의 진입여부가 주의를 샀었지만 의석
획득에 성공했다.
2010년 선거에는 우파연합이 승리했다. Fidesz와 기민당 연합은 지난 선거
보다 10.4%를 더 얻어52.7%의 압도적 지지를 획득했다. 의석은 263석으로 전
체 의석대비 지난 의회에서 보다 24%가 많은 68% 이상이다. 한편 사회당 MSZP는 지난 선거에 비해 24%를 잃은 19.3%에 그쳤다. 2010년 선거의 특징 은 처음으로 총선에 참여한 극우정당 Jobbik가 16.7%의 지지를 얻어 47석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3. 헝가리 정치체제의 변화
헝가리 정당체제는 1989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미국 부시 대통령과 말타 회 담 후 나온 고르바초프 독트린 2호에서 탄생했다. 이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연방 내부가 아닌 중동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를 약속했다. 소련 을 자구책으로 얄타회담에서 확정했던 공산권 체제를 포기했다.
1989년 9월 18일 구공산당과 자유주의 세력은 헌정질서의 개편과 관련한
회의를 개시했다. 여기서 헝가리 사회당은 선거제도와 관련 단순다수제를 선 호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지형을 이용하는데 단순다수제가 유리했다. 공 산당은 지방조직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정당에 비해 여전히 많은 명망가 정치 인이 공산당과 관계하고 있었다. 한편 반공산 세력은 비례대표제를 선호했 다. 반공산 자유주의 세력은 주로 도시에 기반하기 때문에 잘 알려진 인물이 많지 않았을 지방하부조직 역시 구공산당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또한 반대 세력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공배수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반 대세력은 단수다수제와 비례대표제가 반반씩 차지하는 혼합형에 합의했다 (Elster, 외 1998, 118). 정당명부로 의석의 반을 나머지 반은 지역구에서 다수 제를 통해 선출하는 것이다.
한편 구공산세력과 반공세력이 협의하는 전국협상에서는 다른 안이 제시되 었다. 1/3은 정당 명부를 통해 뽑고 나머지 2/3는 지역구에서 다수제로 선출 하는 안이다. 지역구 의석을 더욱 강화한 까닭은 사회집단 등 정당에 속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보다 많은 선출 가능성을 주려는 것이다. 나아가, 전국협상 에 참여한 정파는 정당이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당과 자유주의 세력은 정당법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조직만이 의회선거에 참 여해야 하는데 이해를 같이 했다. 결국 의회는 약간 다른 혼합형을 통과시켰 다. 386 의석은 소선거구에서 176석, 지역리스트에서 152석, 그리고 전국리스
트에서 58석을 선출하게 되었다.
176 개의 소선거구는 결선투표를 도입했다. 절대다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 을 경우 득표가 가장 많은 3인 후보와 15% 이상을 획득한 후보가 일 주 후 에 실시되는 결선투표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2 투표는 지역리스트를 통해 행 사한다. 각 지역은 크기에 따라 일정 의석을 배정받는다. 각 지역의 의석은 비례대표원칙을 통해 정해진다.
의회의 효율성을 부여하기 위해 네 가지 제한이 도입되어 정당 수를 제한 했다. 첫째, 지역 및 전국 리스트는 4% 이상의 득표를 하지 못하면 의석을 얻을 수 없다. 둘째, 소선거구에 참여하는 후보는 최소한 지역구민 750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정당명부는 정당 자신이 적어도 소선거구 가운데 1/4 이상에 후보를 공천했을 경우에 한해 의석을 배정받을 수 있다. 넷째, 전 국정당리스트는 정당이 적어도 7개 지역리스트를 제안했을 경우에 한해 적 용된다.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는 탈공산화 이후 개혁을 지향하는 헝가리 사 회주의당(MSZP)과 보다 레닌주의를 추구하는 MSZMP로 분화되었다. MSZP 는 주요 정당으로 살아난 반면 MSZMP는 1990년과 1994년 선거에서 득표하 한선 5%를 넘지 못해 의회에 진입하지 못했다.(Pop-Eleches 1999, 118). MSZP 는 두 단계를 거쳐 변신했다. 첫째, MSZP는 1989년 9월과 1990년 5월 사이 에 헝가리 진보세력을 계승한다고 자처하고 사민주의를 표방함으로써 1989 년 이전의 개혁공산당과 서구 사민주의 사이에 위치했다. 둘째, 1990년 선거 패배 이후 MSZP는 공산당 과거를 청산하고 서유럽 사민주의를 따르는 실용
주의적 전문가 정당임을 표방했다. 이러한 변신은 1994년 선거에서 전면에 내세워 과반이상의 의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세력인 연대를 약 속했다. 1994년 8월 선거에서 선거법은 약간 개정되어 최소득표는 4%에서
5%에 높아졌다. 또한 헌법은 선거법개정을 위해서는 의석 2/3의 찬성이 필요
한 조항을 신설했다. 즉 선거법개정은 큰 정당 사이의 대연정을 요구하는 것 이다.
선거법은 정당체제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초기 무수한 정당이 난무했으 나 득표율 제한은 오직 6개의 정당만이 의회에 진입하도록 했다. 헝가리 혼 합형 선거제도는 득표와 의석의 차이를 심하게 왜곡시켰다. HDF는 24.7%의 득표율로 42.8%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반대로 AFD는 21.4%의 지지를 받았지만 단 23.6%의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94년 선거에서 의석왜곡은 극에 달했다. 사회당은 33%의 지지를 받았으
나 의석은 54.1%를 얻어 과반 이상을 차지했다. 혼합선거제도는 다수를 ‘조작 해냈다’(manufactured majority). 따라서 이 같은 선거제도는 정당성 문제를 안 고 있다. 정당성 문제를 의식한 사회당은 과도 연정을 통해 소수 세력의 통합 을 시도했다. 정당성 문제는 나아가 헌정문제를 유발했다. 사회당-자민연합의 연정은 72% 의석을 차지하여 언제라도 훤하면 헌법개정을 할 수 있었다.
HDF는 자신에게 불리한 선거제도를 문제삼아 정부의 정당성을 비판했다.
1988년 5월 Kadar 숙청 이후 1989년 6월까지 헝가리 정당은 실체적 존재로 부터 법적 존재로 전환했다. 첫째, 헝가리 의회는 1989년 1월 11일 자유결사 의 법을 통과시켜 정당의 자유로운 설립을 허용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 당의 중앙위원회는 1989년 2월 11일 다당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89년 3월 23일 반대세력의 협상이 마련되었고 오랜 준비 끝인 1989년 6월
13일 사회주의노동자당 및 기타 사회조직과의 공식적 협상이 개시되었다.
1989년 6월 약 24개의 정당이 생겨났으며 약 50개의 정치조직이 정당으로의
변신을 위해 노력 중이었다.
정당의 법적 전환과 전국협상의 출범은 새로운 정당의 기회를 만들었다.
1989년 말이 되면서 공산권이 붕괴되고 그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자 헝
지배적 정당은 새로운 상황에서 경쟁해야 했다. 체코의 바클레프 하벨과 같 은 정당을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는 헝가리에서 1989년 11월 국민투표에서
Pozsgay는 사라졌다. 초기정당은 전문성이나 당원 등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
족했다. 현재 지배적 정당의 위치에 있는 청년민주당(Fidesz)는 1992년 당원 수는 13,252 명, 그리고 지방조직은 468개에 불과했다.
1) 헝가리 정당체제의 특징
헝가리의 혼합형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에 양당제보 다는 다당제를 유도했다. 첫 선거에서 이미 6당이 의회에 진출했다. 1990년 선거에 무려 20개 이상의 정당이 경쟁에 참여했다. 득표율을 기준으로 하여 유효정당의 수를 보면 1990년 선거결과는 7.1이다. 이후 득표유효 정당수는 1994년, 1998년, 2002년 선거를 거치면서 각각 5.7, 4.8, 2.9로 하향추세를 보
인다. 그리고 2006년 선거에서는 2.7로 떨어졌다가 2010년에는 3.2로 증가했
다(표 2- -10 2 참고).
헝가리 정당체제는 서구의 오랜 경험을 갖는 정당체제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유권자의 구성이 전혀 다르다.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와 는 달리 아직 정당이 대표할 사회적 균열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부여된 투표권은 서구민주주의가 경험했던 경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생 민주주의는 신생정당들이 새로운 유권자를 상대로 지지경쟁을 벌인다. 헝가 리 유권자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정당과 구조적 연계를 맺었던 서구적 경험 과는 달리 어느 정당과도 특수한 인연을 갖지 않는다. 한마디로 완전자유경 쟁에 가깝다. 헝가리 유권자는 지지정당을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라 도 바꿀 수 있다.
<표 2- -10 헝가리 정당체제 1990 2010>
선거 정당체제의 유동성 득표유효정당수
1990 38.8 7.1
1994 20.7 5.7
1998 23.2 4.8
2002 20.4 2.9
출처: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각호
둘째, 정치 엘리트 수준의 정당체제도 다르다. 헝가리 정당체제의 두 번째 특징은 주요 정당이 신생정당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서구의 오랜 정당이 사회적 균열을 기반하고 이를 동원함으로써 유지해왔다면 신생정당은 아직 지지기반과 정체성이 없다. 당의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고정지지자의 저항으 로 인해 변화를 힘들게 하는 반면 일정한 수준의 지지를 고정적으로 확보하 는 점에서 정당체제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정체성이 약하면 정당 엘 리트는 지지자의 압력을 고려할 필요가 없고 선거마다 수시로 분당을 하거 나 합당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생민주주의에서 합당과 분당이 잦은 이 유는 바로 신생정당이 정체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2) 헝가리 정당체제의 전개
헝가리 정당체제는 시기 별로 구분하면 네 시기를 거쳐 진화했다 제1기는 우후죽순의 창당의 시기이다 이른바 고르바초프 독트린는 자유화 운동에 불 을 당겼다. 1989년 1월 11일 자유결사의 법이 통과되자 다양한 단체와 조직 이 법적 정당으로 변신했다. 민주진영의 협상테이블에 가담했던 단체들은 자 유노조와 BZSBT를 제외하고 모든 정당이 되었다. 1989년 6월 ‘정치참여’의 폭풍 속에서 약 24개의 정당과 정당역할을 하는 단체가 약 50개 존재했다.
짧은 시간에 선거를 의식하여 만들어진 정당은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한 외 부로부터 만들어진 엘리트 정당이었다. 제2기는 극도의 정당분열 현상을 노 출한다. 합법화된 정당은 지지기반을 구축하려고 시도했으나 여전히 조직과 자원은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자유민주연합의 당원은 불과 13,252 명에 불과했고 지방조직의 수는 468개였다. 정당의 차이 는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하위문화나 특정 정치담론에 머물렀다.
선거 정당체제의 유동성 득표유효정당수
2006 4.3 2.7
2010 35 3.2
제3단계는 선거 이후의 모습으로 주요정당과 군소정당이 확연히 구분된다.
선거를 통해 우후죽순 정당은 정리되고 6개의 정당이 의석을 획득했다. 그
가운데 3개 정당 즉 민주포럼(MDF), 농민당(FKGP), 그리고 기민당(KDNP)이
중도우파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나머지 3개 정당 즉 자유민주연합(FIDESZ), 사회당(MSZP), 그리고 청년민주연합(SZDSZ)는 야권을 형성했다. 헝가리의 6 당 체제는 폴란드나 체코에 비해 안정적이었다. 제4단계는 6당체제의 붕괴를 특징으로 한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시장자유화가 속도를 내면서 전에 없던 사회적 균열이 드러나고 이는 다시 정당의 명암을 갈랐다. 최초의 최대 피해 자는 역사적 정당 농민당이었다. 농민당은 지도부와 의원 사이의 갈등이 커 져 분당되었다. 농민당이 약화된 후 1993년 5당 체제로 바뀐다. 두 번째 분 열은 민주포럼에서 발생했다. 중도파와 민족주의 파벌간의 대립이 심각하게 발전하여 1993년 초 파국을 낳았다. 한편 기민당은 이념적으로 경직되어 연 합세력이 약화되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채 종교정당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연합정부에 참여했던 3개 정당이 지리멸렬하면서 1994년 선거는 이 미 결정되었다. 제5단계는 2010년 선거 이후이다. 2010년 선거는 헝가리 정 당체제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첫째, 자유민주연합/시민연맹은 52.7% 득표하 여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둘째, 녹색당(LMP)과 극우정당(Jobbik)의 의회진 입이다. 셋째, 1990년 이후 의회에 계속 진출하고 집권하기도 했던 자유민주 연합과 민주포럼이 5% 득표에 실패함으로써 의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경제위기의 지속적 악화는 기존 정당 특히 당시의 사회당 정부에 대한 회의 를 낳았고 신생정당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3) 헝가리 공산당의 부활
공산당의 후예로서 거듭난 정당이 민주화에 준 영향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하나는 부정적 효과로서 구공산당의 부활은 동 구의 과거를 미화하는데 기여함으로써 향후 정치문화에 부정적 효과를 준다 는 것이다. 둘째는 긍정적 효과를 강조한다. 탈공산화로 인해 소외될 유권자 를 정치체제내로 통합함으로써 정치안정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셋째, 구공산
당 엘리트의 존속은 민주적 안정을 위협하기보다 민주적 경쟁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다고 본다.
헝가리 공산당은 중동유럽 전환기 정당 중 대표적으로 위기를 극복한 정당 으로 손꼽힌다. 모든 공산당이 변신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헝가리와 폴란드 공산당은 사민당으로 변신하여 재기에 성공한 반면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공 산당은 부활하지 못했다. [그림 2- -1]에서 보듯 헝가리 공산당을 계승한 사2 회당은 탈공산화 이후 초기 선거에서 크게 패배한 후 곧 바로 전열을 정비 하여 집권당이 되었고 이후에도 지배적 정당으로 살아남았다. 처음 선거에서 는 고전했으나 다음 선거에서는 제1당으로 부상했을 정도로 많은 지지를 얻 었다. 이처럼 공산당 계승정당은 광범한 좌파의 지지를 얻는 캐치올 정당으 로 거듭났다.
헝가리 공산당이 생존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전 환기에서 개혁의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전환기 헝가리 국민은 개혁 과 유럽연합가입을 희망했는데 헝가리 사회당은 이 같은 국민적 요구를 충 족시키려고 노력했다. 둘째, 공산당 정부에서 장기집권을 했기 때문에 노조 등의 이익집단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점에서 다른 신생정당보다 강력한 지 지기반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전환기 체제의 정당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공산정부에 반대하는 이념적 정 당, 후견인적 정당, 그리고 사민주의적 정당 등이다. 첫번째 정당은 구체제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정당으로 소수의 엘리트가 반공산체제 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었으며 대중적 기반은 약하다. 후견인적 정당은 전체의 다양한 이해를 후견인적 연줄망을 통해 조직화한 정당으로 이념적 통일은 없고 다만 단기 적 이해를 추구하는 편의적 기반에서 만들어졌다. 셋째는 공산당 엘리트를 중심으로 공산정부 시대의 조직적 이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과거 레닌 적 강령을 사민주의적 정책으로 대체했다.
헝가리 공산당은 폴란드 공산당처럼 경제개혁의 후폭풍으로 이행기 직후 집권했던 반공 자유주의 정부가 인기를 잃으면서 기회를 틈타 사민주의 개 혁과 친유럽연합 정책을 표방함으로써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체코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발생했다. 체코공산당(KSCM)의 강경파가 득세 하여 사민주의 노선을 거부했다. 당시 유로바로미터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 하면 체코 공산당원의 성향은 슬로바키아나 헝가리 공산당원의 태도에 비해 두배 정도 거리를 보인다. 다른 곳 공산당과는 달리 체코 공산당은 공산당 명칭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구 전체를 볼 때 공산당 강경파에 대한 지지는
약 10-15%에 해당했으나 새로운 투표자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고 새로운
민주적 체제를 희망했던 노조와 연대하지도 않았다. 1994년 5월 실시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공산당 지지층의 70%는 1989년 이전에 공산당 당원이었던 투 표자였다. 반대로 같은 시간에 실시된 헝가리 및 폴란드 조사를 보면 공산당 원 비중은 각각 28%와 26%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을 계승한 새로 운 사민정당의 지지층 가운데 구 공산당의 지지를 소수였던 것이다.
공산당 계승정당이 부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노동조합이었다.
동구에서 노조는 서유럽과 비교하면 강력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시민사 회에 비해서는 가장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 헝가리의 노조(MSZOSZ)는 120 만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헝가리 인구의 12%에 해당한다. 이 는 최대 경쟁조직은 SZEF보다 두 배나 많은 숫자이다.10) MSZOSZ는 1993년
5월 실시된 사회보장선거에서 45-50%의 지지를 그리고 노사협의회 선거에서
는 71.7%를 얻음으로써 작업장에서의 동원능력을 과시했다. 헝가리 노조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공산체제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지방조직이 건재 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사민연대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노조 는 연금생활자를 조직하여 선거에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었다.
헝가리 사회당은 어떻게 1994년 압도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나? 1990년 처 음 선거에서 사회당의 핵심적 지지자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지식인, 중년세 대, 도시거주민, 그리고 남성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1994년 선거에서 는 이들 외에 여성, 청년, 노인, 지방거주민,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 등 모든 계층이 사회당을 지지했다. 이행기가 시작된 다음 해
1991년 사회당은 헝가리노조연맹(MSZOSZ)와 공식적 연대를 맺어 “좌파적
10) 마찬가지로 폴란드 노조(OPZZ)의 조합원 약 4백만 명으로 총 인구의 12%에 달했다. 조합원 수는
가치”를 공유하는데 합의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노조는 선거에서 사회당을 적극 지지했다. 항거리노조의 위원장은 사회당 정당리스트 2번으로 출마했으 며 노조간부는 대량으로 사회당 후보로 입후보했다.11)
4. 선거제도와 의회제도
헝가리는 정부형태는 의회중심제를 그리고 선거제도는 혼합형비례대표제도 를 선택했다. <표 2- -11>에서 보는 것처럼 헝가리의 이 같은 조합은 다른 2 동구 국가와 비교해도 매우 독특한 것이다. 혼합형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 와 비례부분을 동시에 허용하여 결과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데 기여했 다. 그렇다면 헝가리는 왜 의회제와 혼합형선거제도를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정치제제에 어떤 효과를 주었는가?
<표 2- -11 동유럽의 선거제도와 정부형태>
자료: Comparative Political Data Set III 1990 2010
선거제도 대통령제 의회우위 반대통령제 의회제
비례대표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슬로베니아
체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술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몰다바
다수제
투르쿠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몽골
혼합비례
러시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헝가리 알바니아 리투아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