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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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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천도시역사관 학술조사보고서 제2집

(2)

인천도시역사관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2019

○ 학술적 또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조사 보고서를 공개하는데 동의함

인천도시역사관 학술조사보고서 제2집

(3)

06 Ⅰ. 조사개요

Ⅰ-1. 조사배경

Ⅰ-2. 조사대상 및 방법

10 Ⅱ. 송도 일대기: 욕망, 섬을 만들다.

30 Ⅲ. 송도 이야기: 사람, 섬을 채우다.

Ⅲ-1. 송도유원지 Ⅲ-2. 송도역과 역전시장

Ⅲ-3. 옥련동 토지구획정비 및 주택개발사업 Ⅲ-4. 송도국제도시

98 Ⅳ. 조사결과

목차

(4)

조사개요

Ⅰ-1. 조사배경

Ⅰ-2. 조사대상 및 방법

(5)

조사개요 9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8

인천도시역사관에서는 2016년부터 인천의 도시생활문화와 관련된 학술조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2016년

‘인천의 여행·관광’에 대한 문헌조사를 시작으로 2017년부터는 2년에 걸쳐 인천의 오래된 가게에 대한 기초 조사와 심층 조사를 실시하였다. 2019년에는 송도와 관련하여 학술조사를 진행하였다.

‘송도(松島)’는 말 그대로 소나무 섬이라는 뜻의 한자식 표현이다. 인천에 송도라는 지명이 붙게 된 시기 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송도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암암리에 이곳을 송도라고 불렀던 흔적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소나무가 많은 섬이어서 송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었다. 송 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에는 일본의 3대 절경 중 하나인 미야기현(宮城県)의 마츠시마(松島)에서 유 래하였다는 설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사용된 일본 해군의 방호순양함인 마츠시마함(松島艦)에서 유래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렇게 암암리에 송도라고 불렸던 공간은 1936년 인천부의 부역확장 과정에서 송도정(松島町)이라는 이 름으로 공식화되었다. 처음으로 행정지명에 송도라는 이름이 포함된 것이다. 그러던 1945년 해방 이후 송도 는 다시 옥련동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곳을 송도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 던 데에는 1963년 송도유원지 재개장의 영향도 있었다. 그리하여 송도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 은 이름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1994년 송도유원지 앞바다에 새로운 해상 신도시 사업의 기공식이 열렸다. 이 신도시의 이름은 송도였다.

해상 신도시의 이름을 가지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결국 송도라는 이름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섬이 아닌 곳에 붙었던 송도라는 이름은 만들어진 섬의 이름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천에는 2군데의 송도가 존재하게 되었다. 지금은 ‘구송도’라고 불리는 송도유원지 근방 옥 련동·동춘동 일대와 ‘신송도’라 불리는 새로운 해상 신도시를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인천 내에서 서로 각기 다른 지역에 시기를 달리하여 ‘탄생한 송도’를 어떠한 공간으로 봐야할 까. 보통 특정한 공간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공간 자체의 물리적인 내용이나 공간의 역사만을 알면 된다고 생 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공간을 살펴보면 공간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놓치게 된다.

공간 자체와 역사를 만들어 나간 것은 그 공간에서 과거에 살아왔고, 현재에도 살며 생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반쪽짜리 이해에 그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사람을 함께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천도시역사관에서는 인천 송도라는 공간의 이해를 위해서 역사에 대한 탐구와 사람에 대한 탐 구를 병행하려 한다. 이를 통해 송도를 바라본다면, 과거에만 파묻힐 수 있다는 역사 탐구의 단점과 깊이 없는 내용이 나올 수 있다는 사람 탐구의 단점을 극복하여 진정한 송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번 조사는 기본적으로 인천광역시에서 송도라고 불리는 공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여기서 송도는 옥련동 일대의 송도유원지 부근을 가리키는 ‘구송도’와 그 앞바다를 메워 새로운 국제도시를 형성한 ‘신송도’를 포함 한 공간이다. 새로운 국제도시로서의 ‘신송도’는 범위가 확실하나 송도유원지 부근의 ‘구송도’는 그 범위가 명 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송도정(松島町)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쓰인 시기도 10년을 넘지 않았 고, 해방 이후에는 ‘옥련’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였기에 그 범위를 확실하게 구분 짓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조사를 이어가면서 사람마다 생각하는 구송도의 범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좁게는 지금은 폐 역이 된 구 송도역 부근부터 청량산 자락을 따라 송도유원지에 이르는 공간까지만 송도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넓게는 옥련동 전체와 동춘동 일부(앵고개를 기준으로 서쪽)를 포함하는 지역을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청학동 일부 혹은 예전 학익동의 동양화학 공장까지 송도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송도의 범위가 다양했던 것은 송도라는 지명이 공식적인 지명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구전되어 전해진 지명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번 조사에서는 구송도의 범위를 옥련동 전체와 동춘동 일부를 포함한 지역만을 설정하였다. 이는 문헌조사를 통해 살펴본 송도정의 범위와 송도유원지 개발 영역, 해방 이후 송도와 관련하여 부수적으로 개 발된 공간이 지금의 옥련동과 동춘동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정된 구송도와 신송도를 합쳐 이번 조사 의 범위로 정하였다.

이번 조사는 문헌조사와 구술조사 두 단계로 나누어 조사를 진행하였다. 문헌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를 시점으로 하여 송도 지명의 유래와 송도유원지의 탄생, 옥련동 토지구획정리 및 주택개발사업의 진행 그리고 송도국제도시의 조성을 다루었다. 문헌조사를 바탕으로 세 명의 외부조사원과 담당 학예연구사, 연구 원 등 다섯 명의 조사단을 꾸려 구술조사를 진행하였다. 구술조사는 크게 송도역과 역전시장, 송도유원지, 옥 련동 토지구획정리사업 그리고 송도국제도시의 계획과 실제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담아 내고자 했다. 이렇게 조사된 내용들은 총 13회에 걸쳐 인천일보와 공동기획기사로 연재되었다.

구술조사 대상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송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 중 실명 공개를 거부한 사람들은 모두 익명 처리하였다. 이들의 기억 속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지만 모두 담아내지는 못하였다.

조사명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조사기간 2019년 7월 1일 ~ 11월 30일 총괄 유동현(인천시립박물관장)

조사기획 배성수(인천도시역사관장), 박민주(인천도시역사관 학예연구사), 최병훈(인천도시역사관) 조사자 유한나(인천도시역사관), 김희주(인천역사교육연구소 소장), 박진서(인하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구술채록 조율재(인하대학교)

조사개요

※ 소속·직위는 조사 당시의 시점 기준임.

조사배경 조사대상 및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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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11

10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7)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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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없었던 섬, 송도

우리나라 해안에는 송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많이 존재하지만, 인천의 경우처럼 섬이 없음에도 송도 지 명이 붙은 곳도 여럿 존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개항장으로 일찍부터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지역인데, 인 천을 비롯하여 부산, 포항, 목포, 청진 등에도 [소나무 송(松)]과 [섬 도(島)]의 한자를 사용하는 송도 지명이 확 인된다. 인천에는 송도해수욕장과 송도유원지가 존재했고, 부산과 포항에는 송도해수욕장이 일제강점기 조 성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또한 목포에는 송도신사가 존재했다.

한국의 과거 개항장 지역에 존재하는 송도 지명과 관련하여 일본에도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송도가 존재 한다. 일본 미야기현[宮城県]의 센다이 만에는 송도라는 이름을 가진 해안 관광지가 있는데, 이 지역의 이름이 마츠시마[松島]이다. 마츠시마는 소나무가 무성한 260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섬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고, 계절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변화무쌍하다하여 예로부터 일본 3대 명승지(日本三景)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마 츠시마를 우리 식으로 읽게 되면 송도가 된다.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県], 사가현[佐賀県] 등 많은 지역에 미 야기현의 마츠시마와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

한국의 섬이 없는 지역에 붙은, 과거 개 항장들에 붙은 송도는 일제강점기 재조일본 인들의 욕망에 의한 결과물이 아닐까하는 것 이 필자의 추측이다. 본래 어느 지역의 지명 은 과거부터 불리던 지명을 한자의 음만 빌 려와 기록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 유 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앞서 언급

한 지역에 붙은 송도의 경우는 해당 지역에 섬이 없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며 일제강점기에 들 어서 송도 지명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즉 조선에 거주하던 재조일본인들 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특정 공간을 본국의 유명한 명승지인 마츠시마와 같아지기를 욕망하면서 이름 을 붙인 결과인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실제 일본에서도 풍경이 아름다운 명승지에 마츠시마 이름을 붙인

1. 머릿말

인천의 송도(松島)라는 지명은 언젠가부터 우리 곁에 존재해 왔지만, 실제로는 인천 어디에도 없던 섬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바다를 일구며 살아가던 한적한 해안가 마을에 어느 날부터 유원지가 들어선다는 소문 이 돌더니 난데없이 송도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반세기가 지나고 마을 앞 바다를 메워 신도시를 만든다더 니 여기에도 송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리하여 우리는 없었던 섬, 송도에서 두 개 의 공간을 떠올리는 혼란 속에서 살고 있 다. 애초에 없었던 섬 송도가 지금의 우리 에게 익숙한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 면 욕망(慾望) 때문은 아니었을까. 욕망이 만들어낸 섬 아닌 섬, 송도의 일대기를 이 야기하고자 한다.

2. 첫 번째 욕망, 이름을 가져오다

송도의 일대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송도(松島)’라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송도 지명을 둘러 싼 이야기는 인천도시역사관 2019년 기 획특별전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 들다>(이하 송도전) 중 ‘첫 번째 욕망, 이 름을 가져오다’에서 다룬 내용이다.

송도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필자는 특정한 장소와 같아지고 싶은 욕망이 작 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특정한 장소와 같아지고 싶은 욕망은 따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때, 따라 하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유명한 건물의 디자인을 모방하여 짓는다던지, 그 장 소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름을 가져오는 것은 그 장소와 같아지기를 욕 망한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송도 역시 이름을 가져온 곳 중의 하나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그림 2. ‘첫 번째 욕망, 이름을 가져오다’ 전경(박민주 제공) 그림 1.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전시실 입구(박민주 제공)

그림 4. 1895년 발행된 일본 마츠시마 전도(全圖)(박민주 제공)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그림 3.

한국에 있는 송도 지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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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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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를 확인할 수 있는 것과 함께 고려한다면, 이것 역시 마츠시마라는 유명한 명승지와 같아지고 싶은 욕망 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2) 인천의 송도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천의 송도는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에 처음 공식적인 행정명칭으로 등장하였다. 1936년 당시 인천부 가 1차 부역 확장이 되면서 인천부로 편입된 지역에 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송도정(松島町)이라는 이름 이 붙게 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인천도호부 먼우금면[遠又今面]에 속했고, 1914년 조선총 독부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는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가 되었던 곳이었다. 1915년 당시 존재했던 옥골 [玉洞], 독바위[瓮巖], 한나루[漢津], 큰앰[大岩]과 같은 우리식 마을 이름은 송도정이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인천에 송도 지명이 붙게 된 것에는 ‘송도함 설’과 ‘일본 마츠시마 설’의 2가지 가설이 알려져 있다. 송도함은 1890년 일본이 프랑스의 기술지원을 받아 건조한 방호순양함 세 척 중 하나였다. 일본은 이들 전함을 건조하 면서 일본의 3대 명승지인 마츠시마[松島]와 이츠쿠시마[厳島]1), 하시다테[橋立]2)의 이름을 붙였다. 송도함 은 일본연합함대의 기함으로 청일전쟁 풍도해전과 러일전쟁 제물포해전에 참전하였고, 1908년 대만 앞바다 에서 화약폭발로 침몰하였다. 송도함 설은 이러한 송도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다. ‘일본 마츠시마 설’

은 일본의 3대 명승지인 마츠시마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다. 마츠시마는 에도시대부터 삼경(三景)으로 유명했고, 근대 이후 관광지로 이름나면서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효도관광 및 수학여행지로 알려진 지역이 다. 인천 송도 지명의 유래를 둘러싼 이러한 가설들에서 중요한 부분은 송도함 설이든 일본 마츠시마 설이든 결국은 이름을 가져온다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가설이 지닌 속성은 같다 고 생각할 수 있다.

인천의 송도 지명과 관련하여 송도가 공식 행정명칭으로 등장한 것은 1936년이나, 이미 1920년대 중반부 터 이 지역을 송도라고 불렀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존재한다. 1920년대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송도라는 이 름을 확인할 수 있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명승지로 저명한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 해안의 속칭 송도 는 인천을 거(距)하기 이리내외에 위(位)한터이나 통로의 비편(非便)으로 인하 야 탐승객(探勝客)의 발길끌기가 곤란한 터임으로 항상 유감으로 역여오든 부천 군에서는 내년도 예산의 도로계획으로 인천부로부터 해지(該地)에 통하는 현재 의 도로를 개수키로 내정된 규모이며 인천 일부 유지 등은 목하 송도에 유원지 시설을 경륜(經綸)할 계획도 유하다는 전설(傳說)도 잇는바 양자가 실현될 시에 는 경인 양지 시민의 일대 향락향을 현출하는 동시에 동지(同地) 주민들은 지가(

地價) 기타의 관계로 어인(漁人)의 공을 좌수(坐收)할 규모이라더라 매일신보 1926년 12월 16일자 경인 간의 별천지 송도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그림 5. 매일신보 1926년 12월 16일자 경인 간의 별천지 송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그림 6. 『경승의 인천』 중 청량산 부분(붉은 색 원)을 보면, ‘송도금강’이라 표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인천의 송도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시 기의 신문기사는 1926년 발행된 기사이다.

1926년 11월 29일자 중외일보에서는 「승경 지 송도에 대유원개설」이라는 기사가 확인되 며, 위에서 인용한 1926년 12월 16일자 매일 신보에서도 확인된다. 「경인 간의 별천지 송 도」를 살펴보면, ‘속칭 송도’라는 표현을 통 해서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이 지역을 송 도라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백사청 송의 명승지’라는 표현을 통해 근대적 관광 개념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과 1937년에 개 장하는 송도유원지의 조성에 대한 이야기가 192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신문기사를 통해 1920년대 중반부터 송도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 확하게 몇 년부터 이 지역이 송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지는 자료의 한계로 인해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천 송도 지명과 관련하여 1937년 인천부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서인 『경승의 인천』을 보면 흥미로 운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승의 인천』은 인천을 외부에 소개하는 관광 안내서로 발간된 것이다. 1937년에 발간되었고 송도유원지가 표시되어 있어, 유원지 개장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자료이다. 해당 자료 의 송도유원지 부분을 살펴보면 유원지 인근의 청량산을 ‘송도금강’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일본 의 유명한 명승지인 <송도>와 조선의 유명한 명승지인 <금강>이 합쳐진 지명이 아닌가 추측한다. 즉, 유명한 장소의 이름을 가져오고 싶은 욕망이 조선과 일본의 유명한 명승지의 이름을 가져오게 해 결합한 지명을 탄생 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송도유원지를 운영했던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발행한 송도유원지 팜플렛 에서는 송도유원지 근방의 아암도를 ‘신송도’라 표기했다. 이 역시 『경승의 인천』에서의 송도금강과 같은 경 우라 생각된다. 일본 마츠시마를 그린 전도(全圖)를 살펴보면 신마츠시마[新松島]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송도 유원지의 아암도 역시 이에 대입하여 신송도로 표기한 것이라 추측된다.

3. 두 번째 욕망, 관광 인천을 향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에 거주했던 재조일본인들은 근대적인 관광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적인 관광 은 서양에서 등장하였는데, 득도와 신앙심을 추구하기 위한 고행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중세의 관광과 달리 위락과 휴식, 기분전환, 새로운 경험, 교양의 확대 등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주를 이루었다.3)

근대 관광은 제국주의 정책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식민지 본국인이었던 재조일본인들에게는 국가

1) 일본 히로시마현[廣島]의 히로시마 만에 있는 섬

2) 일본 교토부[京都府]의 미야즈시에 있는 곳을 의미한다. 정식명칭은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이다.

3) 조성운 외, 『시선의 탄생』, 선인, 2011,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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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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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강화시키면서 식민지인인 조선인들에게는 식민지 본국의 근대 문물 소개를 통해 열등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4)

한편, 개항 이후 항만과 철도 등 편리한 교통과 서울에서 가까웠던 입지조건은 인천을 상업과 공업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지조건은 일본 자본가의 관심을 관광으로 돌리게 했다. 월미도 에 건설한 조탕과 해수욕장이 관광지로 대성공을 거두자 관광을 통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재조일본인들의 욕 망은 송도로 향했다. 이렇듯 근대적인 자본은 근대 관광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에 수 반하여 성장했다. 근대 관광에 욕망했던 재조일본인들은 자본에도 욕망하게 되었다.

인천의 송도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들이 가졌던 이러한 욕망이 드러났던 장소 중의 하나가 1937년 개장한 송도유원지였다.

그림 7. ‘두 번째 욕망, 관광 인천을 향하여’ 전경(박민주 제공)

1) 관광 인천을 향하여

193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인천에는 당시 부윤이었던 나가이 테루오[永井照雄]에 의해서 ‘관광 인천’에 대 한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1933년 8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인천부윤을 재임했던 나가이 테루오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던 잡지 『조선』 1936년 7월호의 기고문을 통해 인천부의 부시(府是) 를 주창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관광도시의 건설 곧, ‘관광 인천’이었다.

당부(當府)의 역사를 연구하여, 동시에 인천항 개항의 목적에 감안하여 판단한 결과, 인천부의 부시(府是)는 인천 을 상업도시로서 공업도시로서 관광도시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경인간(京仁間)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장차 형 식적이든 실질적이든 경성과 인천이 하나가 되어 대도시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하 생략)

그림 8. 「조선」 잡지 표지(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인천부윤 나가이 테루오

「반도 도부(都府)의 대관-인천부」, 『조선』 1936년 7월호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이와 같이 표출되기 시작한 ‘관광 인천’은 나가이 테루오의 글을 비롯하여 1936년 7월을 전후하여 여러 신문기사에서도 확인된다.

‘관광 인천’이 확인되는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다.

“관광인천” 건설목표로 5백만평의 대유원지(동아일보 1936년 3 월 20일)

월미도, 송도, 영종도를 야영지대로 시설 관광인천에 또 희소식(매 일신보 1937년 5월 26일)

용궁각, 송도유원 관광인천의 호화(동아일보 1937년 6월 4일) 관광도시 인천에 대동원된 상춘객 객월중 입사만여명 돌파(동아일 보 1938년 5월 5일)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관광 인천’은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관광과 그에 수반하는 자본을 향한 욕망을 상징적으 로 보여주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재조일본인들은 ‘관광 인천’을 이룩하기 위해 기존에 유원지가 존재했던 월미도 에 버금가는 유원지를 송도에 건설하고자 했다.

2) 송도유원지의 개발

송도유원지는 1937년 송도정에서 개장했는데, 이 지역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1936년 인천부 1차 부역 확 장으로 새롭게 인천부에 편입되었던 지역이었다. 송도유원지의 조성과 관련하여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 간한 인천시가지계획에 대한 설명서인 『인천시가지계획 구역 결정 이유서』에 송도 일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참고할 만하다.

다만 문학면 옥련리는 주택 뿐만 아니라 그 해안은 속칭 송도라고 불리는 자연의 경치가 좋은 유람의 적합지로 알 려져 있다. 현재 이 지역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장래 주택지 혹은 위락지로서 적합하므로, 특히 계획 구역에 편입해야 한다.

조선총독부, 『인천시가지계획 구역 결정이유서』, 1937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인천시가지계획 구역 결정이유서』에 언급된 송도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앞서 살펴보았던 매일신보 1926년 12월 16일자 기사 「경인 간의 별천지 송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속칭 송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천시가지계획 구역 결정이유서』는 1937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1937년 이전에 작성되 었다고 봐도 될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 조선총독부 역시 송도유원지 개발 이전부터 이 지역에 관심이 있었다 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4) 조성운, 「일제하 조선총독부의 관광정책」, 『동아시아 문화 연구』 46, 2009,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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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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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천의 주요역할을 연할 송도유원주식회사는 지난 12일 창립총회를 하엿는데 이 송도유원지는 총 연평 50 만평, 총 자본금 2백만원으로 그 시설에 잇어서도 면적 5만 평의 대“풀”, 조탕, … 근대적 국제유원지로서 손색이 없이할 모양으로 주로 “스포츠”적 유원지를 형상할터로 토지분양도 하야 별장지대를 형성하고 각종 시설을 충당 하리라는데 월미도의 향락적 유원지와 상부하야 춘하추동을 통한 연속적 유원지로 전조선 굴지의 관광인천을 현 출하리라 한다.

동아일보 1936년 4월 15일자 오만평의 대“풀”!

1936년 4월이 되면 경인지역 자본의 출자로 송도유원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대유원지 건설 계획이 발표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10만 여 평의 해안매립지에는 조탕, 호텔, 해수욕장, 아동유희장 등이 건설되었다. 제 방을 축조하여 수문을 통해 바닷물을 막고 두 개의 인공호수를 조성했다. 북측 호수 무의도 해안의 모래를 옮 겨와 백사장을 조성한 뒤 해수욕장으로 이용했다. 수질은 조수에 맞춰 수문을 개폐하여 개선할 수 있도록 했 다. 남측 호수는 보트장 및 화월환(花月丸)5)을 띄워 해상 연회장으로 활용했다. 1937년 7월 21일 송도해수욕 장도 개장하였다. 송도유원지는 전시체제기로 들어갔던 1937년 개장하였지만, 1940년 여름에는 중일전쟁 기 간이었음에도 1일 입장객이 3천명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천부는 문학권 일대의 지역발전을 이끌어갈 송도유원주식회사의 유원지 개발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참 여를 높이기 위해 해수욕장뿐만 아니라 장차 거대한 해수 ‘풀’을 갖추고 오락장과 조탕, 골프장을 갖추어 경인 지역 최고의 별장지로 개발할 것임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홍보했다.6)

3) 광복 이후의 송도유원지 재개장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월미도유원지는 제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송도유원지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1950년 1월, 표양문 당시 인천시장은 시정 연설을 통해서 송도유원지 재개장 계획을 발표하였다.

인천시장 표양문씨는 당면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식량대 과징금 사건(食糧代過徵金事件) = 구(具) 도지사명과 인천 시장 명의로 정식식량 공사에 지불토록 요 청을 하였다

▲ 송도유원지 개방 = 목하 추진 중임으로 금년은 개방될 것이다

▲ 부정배급소 사건 = 동회에서 직접 배급을 하여 부정사건이 있는 모양인데 곧 시정하겠다

▲ 경인간 수도관 시설 = 내무장관의 승인으로 1억원 기채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50년 4월 11일자 송도유원지 금년엔 개방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재개장을 준비하던 송도유원지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개장이 무산되고 만다. 1950년 9월 15일 인 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송도유원지는 유엔군의 휴양지로 징발되었고, 참전국이었던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전란이래 “유엔”군이 사용해오던 인천 송도유원지 해수욕장 “풀”은 10일 징발이 해제되었으므로 올여름부터는 경인지방 피서객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풀”은 영국군이 계속 징발사용해왔던 것인데 국방부와 주한영국 군 간에 정식으로 그 징발해제 수속을 완료한 것이다.

경향신문 1958년 6월 12일자 인천 송도해수욕장 징발조처를 해제

1950년부터 주둔했던 영국군은 전쟁이 휴전된 이후에도 휴양지로 사용하였는데, 1958년 10월이 돼서야 철수하였다. 영국군의 철수 이후 인천 지역사회에서는 송도유원지 재개장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며, 재개장 을 위한 초석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의 송도유원지 재개장에 대해 다룰 때 먼저 살펴봐야하는 것은 송도해원관광회사와 송도임해토 지주식회사와의 대립이다. 송도해원관광회사는 6.25 전쟁 직전 송도유원지 재개장 운영권을 취득했던 회사 였다. 송도임해토지주식회사의 경우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회장(흥한재단)이 1대 주주로 있던 회사였다. 당 시 송도유원지에 있었던 유원 시설과 토지 및 별장의 소유권이 두 회사에 분리되어 있었는데, 유원지의 재개 장을 위한 개발과 운영권을 둘러싸고 두 회사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이 지속되자 인천시가 두 회사를 중재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호텔·식당·놀이기구 등 편의시설은 운영을 중단한 채 1961년 7월 해수욕장만 임시 개장하게 되었다.

한편, 5.16 군사정변 이후 인천시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유승원 시장에 의해 인천시가 전면에 나서 송도유 원지 개발을 추진하는 계획이 수립된다. 송도유원지 재개장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1962년 8월 건설부의 인천도시계획 유원지 결정 및 실시계획 인가가 떨어지면서 흥한재단과 송도해원관광회사의 운영권 분쟁이 일단락되고, 송도유원지 개발공사가 착공되었다. 1963년에는 송도유원지 운영을 위해 인천시가 토지를 대

5) 선박 형태의 연회장으로 근대식 관광을 즐긴다는 생각이 투영된 장소의 하나였다. 화월환은 광복 이후 재개장한 송도유원지에서 수정각으로 계승되었다.

6) 박진한, 「조감도를 통해 살펴본 1920~30년대 인천의 심상지리와 시가지 계획」, 『도시연구』 17, 2017, p. 32 그림 9. 송도유원지 팜플렛(인천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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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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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울·인천의 자본이 공동 출자하여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당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에 는 인천시 부시장을 포함한 11명의 등기 이사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이 흥한재단 소속이었다. 또한 흥한재단 이사장이었던 박흥식 사장이 실질적인 소유주였다.

3백만 경인시민들의 유일한 피서지인 인천 송도유원지가 옛모습을 되찾아 오는 6월 15일에 문을 연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송도 개발 사업이 그간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에 의해 착수되어 당초 7월 1일 개장하려던 것을 보름 동안을 앞당겨 6월 15일경 개장을 목표로 작업에 급 「피치」를 올리고 있다.

70만 평의 널따란 놀이터 송도 유원지는 5개년 개발사업에 따라 제1차 연도인 금년에는 40만 평을 활용, 「풀」과 각종 부설물을 신축하리라하는데 하루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만 4천 3백 13평방 「미터」의 「수영장」이 이미 지난 4월 20일경 준설작업이 완료됨으로써 요즘에는 모래반입 작업과 정지 작업이 한창이다.

그리고 「풀」 주위에는 매점 20개소 탈의장 20개소 「방갈로」 50동 「샤워장」 2개소 임시숙소 2개소 천막촌 「콘세 트」 등을 화려하게 신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곧 공사에 착수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63년 5월 10일자 송도유원지 공사 급(急) 피치

송도유원지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끝난 이후, 그야말로 재개장을 위한 ‘급(急) 피치’를 올린 송도유원지는 1963년 7월 24일 재개장하였다. 재개장한 송도유원지는 해수욕장 외에 호텔, 보트장, 놀이시설, 캬바레 등의 시설을 갖춘 종합리조트였다. 그리하여 1970년에는 1일 입장객 2만 명을 넘어서는 수도권 최대의 휴양시설로 부각되었다. 인천시는 서울에서 오는 관람객들이 송도유원지를 편하게 올수 있게끔 1968년 개통된 경인고속 도로 종점과 송도유원지를 잇는 송도임해관광도로 건설에 착수하여 1976년 개통하였다.

인천시 남구 용현동(시외버스종합정류장 앞)과 송도유원지를 잇는 길이 5.1km의 해안관광도로가 31일 개통됐 다. 인천시가 총 공사비 5억2천만원을 투입한 이 도로는 지난 71년에 착공되었으나 73년까지 1억9천1백50만원 을 들여 토공만을 끝낸 후 다시 75년까지 1억 4천9백만원을 투입, 호안공사 등 유지공사를 했다. 이 도로는 올해 폭 20m의 노폭 중 2차선 7m를 1억 5천 6백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포장, 이 날 개통된 것이다.

매일경제 1976년 7월 31일자 용현~송도유원지 해안관광도로 준공

재개장한 송도유원지는 전국임해촬영대회라는 이름의 사진촬영대회와 옛찾기 노래자랑대회, 씨름대회와 같은 각종 문화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또한 유원지 주변에는 여러 호텔들도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을 맞이하였 다. 1987년에는 전국 1호로 송도유원지가 종합휴양업에 등록되면서 명실상부한 수도권의 관광지로서 자리 매김하였다. 그러던 송도유원지는 2011년 9월 14일을 마지막으로 유원지로서 영업을 종료하였고, 현재까지 유원지 부지는 중고차 수출매매단지로 활용되고 있다.

4) 송도유원지와 수인선

일제강점기 송도유원지의 개발은 1937년 개통했던 수인선과도 연관이 있었다. 수인선은 경동철도주식회사 가 건설한 협궤철도이다.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수인선 개통 이전에 1930년 11월 여주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인 수여선을 개통하여 운영 중이던 회사였다. 수여선은 여주, 이천 등 경기 내륙의 곡창 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수

원까지 운반하고, 이를 다시 경부선으로 부산까지 실어 나른 뒤,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철도였다.

벽지 연락의 중요 철도 수인선 개통식은 기보한 바와 같이 20일 인바 인천상공회의소와 인천부(仁川府)가 경비 부담 으로 10만 부민이 출동 축하회를 개최할 터이라는 바 자 세한 축하회순은 경동철도회사 당국과 협의하야 정할터이 라 한다.

동아일보 1937년 7월 9일자 수인철도개통축하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중국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일 제는 1937년 7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장하는 수인선을 개 통하게 된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중국에서 가까운 인천항을 경유하는 것이 군수미의 운송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시체제기였기 때문에 수인선은 공사기간의 단 축과 공사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수여선과 마찬가지로 협궤

철도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인천항에 종착역을 두어 운송되는 미곡을 선박에 그대로 선박할 수 있게 하였다. 또 한 남동, 소래, 군자 염전 등 인천 연안의 염전 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하는 역할도 담 당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졌던 수인선의 건설 도중 송도유원지 조성공사가 착수되었다. 일제는 송도유원지의 운영 과 송도유원지를 운영했던 송도유원주식회사가 진행한 임해주택 분양의 활성화를 위해서 송도역을 신설하게 된 다. 그리하여 1937년 7월 송도유원지 개장에 맞춰 수인선이 개통되었고, 송도역의 운영이 개시되었다.

4. 세 번째 욕망, 공간을 사유하다

인천 송도에 작용되던 욕망은 지명과 관광, 자본에 대한 것을 넘어 공간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공유지를 사유지로 변화시키는 욕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일제강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 했는데, 관광 인천을 향했던 욕망의 뒤편에 자리했던 땅을 통해 부를 쌓고자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경치 좋은 청량산 중턱으로 집들이 들어서더니 시간이 흘러 조상님의 선영은 상가로 변했다. 그 리고 평생을 일구었던 논밭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공간을 사유하고자 했던 자본의 욕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 고, 바닷가 사람들의 터전이던 갯벌을 메워 땅으로 만들었다. 바다가 뭍이 되어버린 이곳을 사람들은 또 다시 ‘ 송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1) 일제강점기 송도임해주택의 분양

일제강점기 송도유원지를 운영했던 송도유원주식회사는 유원지 내의 별장 건설과 청량산 자락의 임해주 택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송도유원지에 투자했던 경성 자본가의 토지개발에 대한 관심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

그림 10. 수인선 송도역 표지판(인천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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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여 송도유원주식회사는 송도임해토지주식회사라는 자회사를 설립하였다.

관광인천의 명승지인 교외 송도유원지는 깃허가는 봄에 따라 산과 바다의 풍정을 감상코저 상춘객의 살도(殺到 : 쇄 도)로 매일 번잡을 이루고 잇거니와 여름의 피서와 해수욕을 목적하고 별장을 건설코저 토지분양 희망자가 만은터 이라 한다. 이에 유원회사에서는 금년 삼만평을 100구로 분활하리라는데 1평 3원 내지 8원이라하며 매출기한은 4 월 16일부터 말일까지라는데 매출기한내 게약에는 1활 3월 이내 건축 착수시 5활인의 특전이 잇다하며 월부와 연 부의 편리를 도모코저 조탕의 신설로 하리라는바 이에 소요공비 12만원으로 이미 착공을 본터인데 오는 7월 말중으 로 준공코 8월 1일부터는 개원하리라는대 금회의 송도유원지는 해수욕장으로서의 설비가 완비할 것이니 원근욕객 의 살도(殺到 : 쇄도)가 예상되는 터이다.

동아일보 1938년 4월 12일자 인천송도유원지 토지 삼만평 분양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송도임해토지주식회사가 진

행했던 토지 분양은 크게 송도 유원지 내 별장지 분양과 2번에 걸친 택지분양으로 나눌 수 있 다. 먼저 별장지 분양의 경우에 는 1938년 4월에 진행되었는데 송도유원지 동북쪽 사면 3만 평 을 대상지로 하여 분양구수(分 讓口數)는 100구였다. 분양금액 은 구당 3엔~8엔이었는데 부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토지구획정리사업」

8) 표준국어대사전 「토지 구획 정리 사업법」

공사비 10% 할인 및 할부의 특전이 있었다.

택지분양의 경우 1938년 10월에 제1회 분양이, 1939년 5월에 제2회 분양이 이루어졌다. 제1회 분양은 청량 산 서쪽 사면 2만 5천 평을 대상으로 하여 70구를 분양하였다. 분양면적은 구당 150평부터 시작해서 구당 3엔에 서 15엔으로 분양하였다. 별장지 분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지 공사비의 할인 및 할부가 특전으로 제공되었다.

제2회 택지분양은 청량산 주변 등 3개소가 분양대상지로 선정되었다. 1구(區)는 현 가천인력개발원 언덕의 1 만 7천 평이었고 2구(區)는 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건너편 송도소방서 언덕으로 1만 평이었다. 3구(區)는 정확히 특정되지는 않으나 3만 5천 평으로 분양금액은 평당 2엔에서 15엔이었는데, 평균 5엔에서 6엔 정도였다.

토지의 분양 결과 별장지 및 제1회 택지분양지는 조성이 완료되었다. 제2회 택지분양의 경우는 미분양된 것으 로 보인다. 그리고 별장지의 경우 주택 건설이 어느 정도 이루어 졌으나, 제1회 분양지는 택지조성 후 주택 건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주택 건설을 송도유원주식회사에 일임할 경우 건축공사도 시행해 줬는데, 갑 호 주택(약 65.3㎡, 19.75평)의 공사비는 1,700엔부터였고 을호 주택(약 33.1㎡, 10평)의 공사비는 850엔부터였다.

2) 옥련동 토지구획정리사업과 주택개발

1936년 1차 인천부 확장으로 송도정이라는 지명을 얻었던 지역은 광복이 되면서 옥련동이 되었다. 인천 옥련 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1990년대에 이르러 주택이 건설 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대지로서의 효용증진과 공공시설의 정비를 위하여 토지의 교환·분합, 기타의 구획변경, 지목 또는 형질의 변경이나 공공시설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업”을 의미하는데, 크게 계획·개발·환지의 3단계로 나 뉜다.7) 관련 법령으로는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의 집행 절차, 방법 및 비용 부담 따위에 관한 사항을 규정8)했던 <토지 구획 정리 사업법> 등이 있었다.

옥련동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관련해서는 1967년 1월 24일의 관보에 실린 <건설부 공고 제16호>가 참고할 만 하다. 해당 공고에는 ‘인천도시계획 주안 제2공구 및 송도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에 관하여 시행을 명한 것의 공고 가 수록되어 있다. 이 공고를 살펴보면, 사업 시행지구 중 옥련동은 송도지구로 지정된 것과 시행면적이 72,000평 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송도지구의 토지구획정리는 시행되지 못했다.

8일 인천시는 1백20만평에 달하는 택지조성구획안을 세웠다. 앞으로 10년 후의 인구 1백만명을 내다보고 있는 시 당 국은 구 시가지에만 밀집한 인구를 균등하게 분산시켜 짜임새있는 근대도시를 형성코자 송도 및 용현지구의 45만평, 주안지구의 56만평과 부평·송림·숭의동지구 구획정리지를 합해 모두 1백20만평의 신시가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한편 산업시설의 정비계획의 하나로 부두 매립지 60만평, 주안염전 매립지 22만평, 부평지구 22만평 도합 1백4만평 을 공업단지로 사용할 방안도 아울러 세웠다.

매일경제 1966년 6월 9일자 신시가지 조성 계획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그림 12. 송도임해주택분양포스터(인천시립박물관 제공) 그림 11. ‘세 번째 욕망, 공간을 사유하다’ 전경(박민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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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6일자 관보에서는 건설부 공고 제62호를 통해서 ‘송도 제2공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시행 명령이 공고되었다. 송도 제2공구의 시행지역은 옥련동과 동춘동이었고, 시행면적은 112,000평이었다. 하지만 송도 제2 공구에 대한 토지구획정리사업 역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건설부에서는 1976년에 송도 제1토지 구획정리 사업의 시행을 명령하고, 1977년에는 제1 토지 구획정리 사업의 시행 인가를 내주게 된다. 그리하여 1977년 5월경부터 1986년 12월까지 토지구획 정 리가 진행되었고, 송도비치호텔의 건설과 주거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잠잠해지나 싶었던 부동산 투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토개공(土開公)이 발표한 2월 중 땅값 동향에 따르면 서해안개발지역과 동해안 일대, 경기 북부 및 대전·중부권 등 전국 대부분의 땅값이 큰 폭의 오름세를 지 속하고 있다.

보도되는 바로는 작년 말이래 불과 3개월여에 최고 1백%이상 오른 곳만도 인천 옥련동을 비롯 춘천 등 강원도 북 부지역의 논밭 등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새해 벽두부터 전·월세 값의 급등이 선도하는 아파트 등 주택가격의 상승추세를 감안할 때 조만간 전국이 또 한차례 부동산 투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이하 생략

매일경제 1990년 3월 30일자 심상찮은 부동산 동향 투기 유인 제거에 적극 나서라 (제목 외에 굵게 표시된 것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서 한 것임)

그 이후 송도 제2공구에서의 토지 구획 정리가 진행되었고, 신문지면 상에 이 지역에서 아파트 건립과 관련 된 내용의 기사들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부터는 벽산대재빌리지 공급 공고, 한샘빌라 분양 공고, 세광양지빌라 분양 공고, 송도럭키아파트 분양, 현대아파트 분양, 우성아파트 분양, 한국아파트 분양, 쌍 용아파트 분양 등 아파트를 비롯한 다양한 주택들의 분양 광고들이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앞서 제시한 기사와 같이 옥련동 지역의 땅값 상승과 관련한 신문기사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 송도국제도시의 조성

세간에서 흔히 ‘송도신도시’라 불리는 송도국제도시는 노태우 정부에 의해 1988년 5월 주택 200만호 건 설 계획이 발표된 이후, 인천시에서 해상도시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었다.

오는 2010년*까지는 인천 송도 앞바다에 여의도 넓이보다 23배가 큰 해상도시가 건설된다. 인천시가 서해안시 대를 맞아 중공과의 직교역에 대비, 야심작으로 내놓은 이 해상도시는 항만 및 입항시설 주거시설 위락 및 유통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 25만 명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계획이다. 지도에도 없던 땅에 중소도시 규모의 새로운 항 구도시가 생겨나는 셈이다.

이하 생략

매일경제 1988년 6월 6일자 해상도시건설계획 인천 ‘술렁’

* 기사에서는 2110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오타로 생각됨.

1988년 6월 6일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에 대해서 “새 도시가 건설될 송도 앞바다는 잘 발달된 간 사지”이며, “4천2백90만㎡에 달하는 흙더미를 쏟아 부어 1천90백만 평의 새로운 땅을 만들어낼 계획”이라 소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91년 4월 18일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인천 송도해상신도시에 지상순환 모노레일 (경량전철)이 건설된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는 인천시가 송도해상신도시에 순환 모노레일을 건설키 로 한 것은 50만 인구를 수용할 해상신도시와 인근에 남항, 북항 등 신항이 들어서게 되면 버스노선만으로는 교통 수요를 소화하기 어려운데 따른 것이라 적고 있다.

한편, 1991년 5월 2일자 연합뉴스를 살펴보면 “인천시가 송도 앞 해면에 건설키로 한 송도해상신도시 조성계 획이 확정”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공사는 1, 2단계로 나누어 1단계 공사가 1991년 10월부터 2001년 까지, 2단계 공사가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완공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1991년 9월 중앙도시계획심의위원회는 이 사업이 영종도 신국제공항 건설과 병행될 경우 인구급증, 교 통난 심화 등 각종 도시문제가 생긴다며 사업자체를 재검토키로 결정한다. 1992년 2월에는 건설부가 종합적인 인 구, 교통 환경 영향평가를 실시해 그 결과를 토대로 도시기반시설 확충 및 환경오염 방지대책도 수립해야 한다고 하 면서 송도국제도시 공사는 착공되지 못하다 1994년 9월이 돼서야 송도해상신도시 조성 매립 공사가 착공되었다.

여의도의 6배 면적에 국제적인 통신망과 금융시설을 갖춰 서해안 제1의 국제교류도시로 육성될 인천 송도신도시 조 성사업이 10일 기공식을 갖고 사업계획 추진 6년 만에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5백35만평 규모로 조성될 송도신도 시 건설사업은 1조7천4백24억원을 들여 2001년까지 매축공사를 끝내고 2002년부터 본격적인 시가지 조성공사를 벌 여 오는 2006년 완공될 예정이다.

이하 생략

경향신문 1994년 9월 11일자 인천 송도해상신도시 착공

1994년 9월 11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송도해상신도시는 공공시설 용지, 공원 및 녹지지역, 주거지, 상업 지역으로 나뉘어 개발될 계획이었다. 주거지역은 미래형 생활공간으로 꾸며지며, 상업지역은 국제적 규모의 금융센터와 증권거래소, 컨벤션센터, 무역정보 및 정보관리센터, 통신위성지국, 방송국 등을 갖춘 산업·정보·

무역·통신의 복합기능을 갖춘 국제교육의 거점으로 조성될 예정이었다. 또한 공원 및 녹지지역은 수로·해안·

도로권 등 3개권으로 나누어 만들려 했다.

한편, 인천광역시는 1998년 『인천 송도신도시 기본계획(안)』을 발행하였 다. 인천 송도신도시 기본계획(안)은 송 도신도시 개발계획을 정리해놓은 문 서로 개발개요, 토지이용계획, 교통계 획, 공원녹지계획, 단계별 개발계획으 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계획 당 시 추구했던 송도신도시의 성격을 확인 해볼 수 있다.

기본계획(안)에 따르면, 송도신도시 의 개발전략은 “베드타운(Bed Town)

이나 비즈니스 파크(Business Park)과 그림 13. 인천 송도신시가지 조성 조감도(인천시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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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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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단일 기능을 지양하고, 균형 있는 업무와 주거로써 자족적인 개발을 유도할 수 있는 도시조직을 창출해 내는 데에 목적”이 있고, “고용의 주된 초점은 정보통신산업, 연구, 첨단 산업, 업무 등”이었다. 송도신도시 의 주된 성격에 대해서는 “높은 질의 공공용지와 조경이 될 것이며, 공원도시로의 이미지를 주민과 방문자들 에게 인지시켜 주면서, 공원들과 공공용지들은 다양한 옥외활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주간선도로와 지 역도로 주변의 조경, 완충녹지, 공원, 수로는 전원도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것”이라 서술하였다. 또한 “이러 한 요소들은 연속성을 가지고 개발구조의 한 요소로 제공될 것”이라 적었다. 이밖에 기본계획(안)은 “해안선 을 따라 증가해온 공업지역 때문에 시민들이 바다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빼앗겼던 현 인천시를 위해 송 도신도시는 유례없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송도신도시의 해안선은 레저, 문화, 주거용도로 개발될 것”이라 언급하였다.

2003년 8월이 되면서 재정경제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에서는 인천 ‘송도, 영종, 청라지구’를 우리나라 최 초의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였다. 그에 따라 연수구 송도지구는 중구의 영종지구, 서구의 청라지구와 함께 인천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5. 맺음말

예로부터 인류는 욕망에 압도당해 왔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인간의 욕망은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근대의 물결이 밀려들었던 100년 남짓의 시간.

자본과 땅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이곳에 없었던 섬, 송도를 탄생시켰다.

탈무드는 말한다.

“올바른 자는 자기의 욕망을 조정하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는 욕망에 조정당한다”고.

우리는 욕망에 조정당하지 않게끔

과거를 기억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나아가야 한다.

욕망에 의해 탄생한 섬, 송도

우리는 앞으로 또 어떠한 욕망에 집중해야 할까.

‘사람’이다.

인천도시역사관 박민주

부록. 지도로 본 송도의 변화

송도라는 공간은 지난 100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변해왔다. 해당 파트에 수록된 사진들은 <송 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전시 당시 인천도시역사관에서 제작했던 1917년부터 2017년까지의 송도 공 간 변화에 관한 영상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1917년은 당시 제작된 5만분의 1 지도를 사용하였으며, 1917년 이외의 사진은 인천광역시 스마트GIS에서 서비스하는 과거 항공 지도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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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이야기 : 사람, 섬을 채우다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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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이야기 : 사람, 섬을 채우다.

Ⅲ-1. 송도유원지

Ⅲ-2. 송도역과 역전시장

Ⅲ-3. 옥련동 토지구획정비 및 주택개발사업

Ⅲ-4. 송도국제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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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7년 개장하였던 송도유원지는 광복이 되면서 폐쇄되었고, 1963년이 되어서야 재개 장할 수 있었다. 송도유원지는 1963년 재개장 이후 영업을 마감했던 2011년까지 인천 시민들이 찾는 대표 적인 유원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민들이 기억하는 송도유원지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앞선 2장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에서는 송도유원지의 역사적인 면에 보다 집중하여 다루었다. 이번에 는 송도유원지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혹은 일반 시민으로 이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송도유원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광복 이후 송도유원지의 새로운 시작 : 1960~1980년대

경인지구의 유일한 피서지인 인천 송도유원지를 옛모습대로 복구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운동이 인천시 당국 에 의하여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이 송도유원지는 6.25 동란 후 군에서 사용해오던 것을 혁명정부에서 군으로부터 반환받고 관광개발 5개년 사업 의 하나로 작년 12월 교통부에 의해 민간자본을 투입 개발토록 결정을 보았다.

그런데 이 개발사업은 송도유원지 관계자들인 흥한재단과 송도해원관광주식회사 간에 주주권 다툼으로 분규가 일어나 개발사업은 중단되어 왔었는데 인천시 당국에서는 송도유원지 개발을 위해 부득이 정부에 건의 62년 8월 1일 건설부 장관으로부터 “인천도시계획 유원지 결정 및 실시계획” 인가를 받게 되어 내분만 일삼던 송도유원지 관계자들이 손을 떼게한 것이다.

그리고 인천시 당국은 도시계획법 13조에 의하여 공작물, 토석 등 공사는 시장의 허가를 얻게하고 지역적 관광사 업을 위하여는 시에서 단계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시당국은 앞으로 관광개발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했는데 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은 이미 확보해놓고 있 으며 개발면적은 70만평으로 공사는 내년에 착공하게 된다.

경향신문 1962년 8월 24일자 송도유원지 분규에 종지부 시(市)서 공사하기로

광복 이후 송도유원지의 재개장과 관련하여 1967년부터 1977년까지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1)에서 근무하 며 총무부장을 지낸 최우철에 따르면 송도유원지는 당시 흥한재단의 이사장이었던 박흥식 사장이 소유했던 용 현동 부지와 군용지였던 송도유원지의 땅을 교환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인천시에서 박봉자 라는 사람의 땅을 농지개혁법으로 수용하여 출자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박흥식 사장과 인천시가 반반의 지분 을 가지고 송도유원지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2)의 정관 말미에는 인천시에서 출

1) 구술 당시 최우철은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고 구술하였는데,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를 잘못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정관(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제공)

자한 땅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 다. 또한 창립발기인 11명에는 박흥식을 비롯해 화신그룹 임 직원 6명이 포함되어 서울의 자본이 대거 투입되었다.3)

이는 현재 송도로터리에서

‘경북마트’라는 가게를 운영하 고 있는 최도상이 송도유원지 가 처음 군부대였던 것으로 회 상하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생 각된다. 최도상은 송도골프클 럽 쪽에 영국 군부대가 있었

고, 1938년에 처음 만들어져 지금은 없어진 연수경찰서 송도파출소 앞으로 부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유류창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이후 대략 1963년 쯤에 유류창이 용현동의 노인복지관 자리로 이전하 게 되면서 송도유원지가 개발되었다고 구술하고 있어, 최우철의 구술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 최우철이 입사하였을 때는 송도유원지 앞은 구멍가게 하나를 제외하고는 상점이 없었고, 송도역을 오가는 교통편도 따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가 되면서 번화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부터는 시내버스가 오갈 정도로 번화하였다고 말했다. 최우철은 본인이 근무하던 시절의 송도유원지에는 탈의실과 샤워장, 매점,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입장료는 경기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1,000원에 서 2,000원이었다고 했다.

당시 송도유원지의 조직도는 사장과 전무가 있었고, 그 밑으로 영업부장과 총무부장이 있었다고 한다. 다 시 그 밑으로 경리계장과 영업계장, 경비계장, 서무계장이 있었는데 사무실은 10명 내외의 인원들이 근무했 다고 한다. 또한 매표소 직원 4명과 경비 6명이 평소에 근무했는데, 성수기인 7월에는 임시로 사람을 늘려 매 표소 직원 10명과 경비 20명 정도가 일했다고 한다.

2)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는 정관에 따르면 본사를 인천에 둔 주식회사로서 존립기간을 설립등기일로부터 30년으로 하였다. 또한 필요한 지역에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할 수 있음을 명기하였다. 회사의 경영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제2조 본 회사는 좌의 사업을 경영함을 목적으로 함 1. 관광 및 유원지 조성에 관한 사업

2. 일단의 주택지 조성에 관한 사업 3. 주택 건설에 관한 사업

4. 토지 및 주택의 수탁·관리·대여에 관한 사업 5. 지역개발에 관한 사업

6. 공익시설에 관한 사업 7. 보건후생에 관한 사업

8. 앞의 각 호에 부대(附帶)되는 사업 일체

이를 통해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가 송도유원지의 운영뿐 아니라 토지와 관련된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오윤영, 박흥식, 김섭, 김승문, 길영희, 이덕근, 김정복, 김중하, 김용해, 김중길, 이천승(정관에 실린 순서대로 나열)

송도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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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이야기 : 사람, 섬을 채우다

없었던 섬, 송도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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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63년 8월 신문에 실린 송도해수욕장 광고

직원은 그때 사장, 전무, 그 다음에 총무부장하고 영업부장, 그리고 총무과장, 영업과장, 경비계장, 서 무계장, 영업계장, 경리계장 그렇게 사무직이 열 몇 명 되고, 경비가 처음에는 6명인가 있다가 나중에 여름에는 한 20명까지 늘었다가 여름 끝나면 해직되고 그랬어. 매표원도 있었어. 표 파는 여자. 매표원 도 한 10명 됐어. 평상시에는 4명인가 그랬는데, 여름에는 한 10명 일했어. 여름에는 굉장했어.(최우철) 최도상은 유원지가 생겨난 이후인 1970년대 중반 이후 송도로터리가 버스정류장으로 활용되었다고 기억 했다. 송도에서 들어와 동인천을 오가는 버스가 1시간에 1대씩 오고가곤 했다 한다. 당시 송도유원지는 수도권 에서 유일한 유원지였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찾았다고 말했다. 8월 10~15일 경에 특히나 유원지를 찾는 사람 들이 많았는데, 강릉이나 대천 등으로 여름 피서를 다녀온 후 다시 가기 어려워서 이곳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 다고 한다. 대체로 8월 15일이 지나면 더위가 꺾였기 때문에 ‘여름이 가기 전 한 번 더 수영하러 가자’며 찾아온 곳이 송도유원지였다는 것이다.

송도유원지에 사람들이 70년대부터 많이 왔잖아요. 대략 몇 명 정도 방문했었나요?

여름에는 하루에 몇 십만이야. 주로 왔던 사람들이 인천시 내의 관공서, 경찰관서, 또 일반 관공서, 공무원 들 가족들이 많이 왔지. 여름에.(최우철)

최우철은 당시 송도유원지를 가장 많이 찾았던 손님들은 주로 공무원이었다고 기억했다. 일반 관공서의 공무원들이 가족 단위로 많이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청학풀장을 선호하였다면, 어른들은 송도 유원지를 선호하였다고 말했다.

송도유원지의 시설과 관련해서 최도상은 1970년대에는 송도유원지 우측으로는 큰 수영장이 하나 있었 고, 왼쪽으로는 보트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송도해수욕장은 바닷물을 받아 들여 침전을 시켰기 때문에 물 이 검고 흐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도시 사람들은 종종 송도해수욕장 물을 가리켜 ‘똥물’이라고 하기도 했다 고 말했다.

그림 3. 1966년 6월 신문에 실린 송도유원지 광고

4) 경북상회는 경북마트의 사업자등록증 상의 이름이다.

5) 고개에서 출몰하였던 강도를 산적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가게를 열었던 장소도 이곳이었나요?

장소는 딱 여기는 아니지만, 이 근처에서 시작했어요. 그때는 차도가 많이 안 넓었어요. 지금이야 이렇게 확 장했지만 그때는 이 앞에서 가게를 했었지요. 그렇게 장사를 했던 가게가 5~6군데 정도 됐어요. 식당도 하고 그랬 어요. 그리고 로터리 가운데 부분 마스코트를 걷어내면 우물이 하나 있었어요. 그때 당시 우물을 완전히 매립하지 는 않았어요. 거기에 철판 같은 것을 덮었어요. 그 우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보존하려고 그 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어요.(최도상)

한편, 최도상 역시 1960~70년대의 송도유원지와 관련된 기억 가운데 앞서 언급한 인터뷰 내용과 같이 1960년대 송도유원지 부근에는 경북상회4)를 포함하여 쌀가게, 잡화상 등 5군데 정도의 가게가 있었다고 했 다. 그러면서 이들 가게 중에서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가게는 경북상회뿐이라는 말도 했다. 또한 송도로터리 가운데에는 당시 완전히 매립되지 않은 우물이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최도상은 1960년에서 70년대 초, 동네 아주머니들이 늦은 저녁시간 경북상회를 종종 찾기도 했었다는 이 야기도 들려주었다. 송도에서 연수동을 가야 하는 아주머니들이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려면 앵고개길(현재의 여성의 광장 고개)을 넘어야 했는데 당시 그곳에 ‘산적’이 나온다는 소문5)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늦 은 밤 산길을 넘어가기 무서웠던 아주머니들은 2~3명씩 모여 경북상회에서 잠을 청하고 가기도 했다는 흥미 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산적’과 관련해서 이 지역에서 당시 발생했던 사건들을 보고서 작성 과정에 서 찾지 못해 실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당시 이 지역이 번화한 지역이 아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렇듯 1960년대에서 1970년대의 송도유원지는 구술을 통해서 보았을 때, 송도유원지에 관하여 흔히 떠 오르는 북적이는 유원지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송도유원지가 광복이 된 이후 재개장한 것이 1963년임을 고려할 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송도유원지는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부터 인천 시민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최고의 유원지’라는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 송도유원지의 전성기 : 1980~1990년대

인천 송도는 청량산을 등지고 멀리 서해를 바라보고 있다. 송도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아암도 주변을 지나는 해 안도로는 시원한 드라이브 코스. 소래포구나 연안부두·월미도 쪽으로 갈 수 있다.

63년 개장한 「송도유원지」는 해수를 가둬 만든 「수문개폐식」 해수욕장을 갖추고 있다. 매립공사로 바다와 멀리 떨어졌지만 물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만조 때를 이용해 15일마다 물갈이를 한다. 송도유원지의 명물은 해상 물썰매장. 경사진 트랩을 따라 썰매가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내려온다. 스프링클러가 뿜어내는 안개비는 한 낮 더위를 식힌다. 물썰매와 유아·성인용 풀장이 있다. 겨울에는 눈썰매장도 운영한다.

백사장 옆엔 수심 1m내외의 보트장이 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있는 놀이동산은 뮤직익스프레스, 바이킹, 청룡열 차 등 20여종의 놀이시설을 갖췄다. 주변에 높이 25m의 번지점프대가 설치돼 공중낙하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

수치

그림 8. 「조선」 잡지 표지(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그림 10.  수인선 송도역 표지판(인천시립박물관 제공)
그림 12.  송도임해주택분양포스터(인천시립박물관 제공)그림 11. ‘세 번째 욕망, 공간을 사유하다’ 전경(박민주 제공)
그림 2. 1963년 8월 신문에 실린 송도해수욕장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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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