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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과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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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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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과 서울대학교

김정락

김정락은 1965년생으로서울대학교미술대학서양화과를졸업하고, 독일프라이부르크에서

술사, 고고학, 기독교미술사로석사그리고 2003년에피라네시와 18세기 건축이론에 관한논문으로박사학위를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 카이스트,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 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등에서강사를했으며, 김종영미술관의학예실장을지내고 현재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교수로재직중이다. 주요저서로는예술의이해와감상 미술편(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4)”, “세계의도시와건축 (한국방송통신대학

출판부, 2007)”, “미술의불복종 (서해문집, 2009)”, “장욱진 (서울대미술관, 2009)”

있으며, 주요논문으로는피라네시와델라마니피첸차 (미술사학보, 2010)”, “18세기 독일과이탈리아의예술교류 (미술사학, 2009)”, “마리니후작의그랜드투어와프랑스 신고전주의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2007)”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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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Chong Yung and Seoul National University

Kim, Jung Rak

(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Kim Chong Yung was born in 1915 in Changwon Kyungnam as the first son of a rich farmer. He visited Whimoon high school, where he met Chang Bal, later to become his teacher and longtime mentor. He studied sculpture at the Tokyo Art School (1938-41) in Japan. Until 1948, when he was appointed to be a pro- fesso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Kim had been hiding in his hometown to avoid the compulsory service imposed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and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in the just-liberated Korea. In the university he served as a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Sculpture and as the third Dean, and tried to produce many artists of distinguished talent until his retirement in 1980.

In addition, he played an important role at the Korea National Art Exhibition as a judge a position he held 18 times. He is today regarded as a pioneer of Korean contemporary art.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was founded according to the bill for the establishment of a national university, on August 22, 1946. The College of Art was newly organized and integrated into the University. The relationship between Kim and the university was indivisible.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insti- tute, although his appointment came two years later. Together with Chang Bal, who introduced the American educational system for the new college, Kim made preparations for the modern curriculum. In those times, contemporary art began to directly influence the Korean art world.

In 1953, namely during the war time, Kim’s work was awarded at the inter- national competition in London for “Monument for the Anonymous Political Prisoner.” It was the first time in Korean art history that a Korean artist won official recognition from the international art society. Kim was probably stimu- lated by the actual trends in the catalogue he received from that competition.

Since then he tried to produce modern sculptures. However, factors of producing modern sculptures can also be found in other places. One was the exhibition “8 Contemporary Artists of the U.S.A,” which took place in 1957, and the other was an exchange exhibition between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Minnesota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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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during the same period. In light of this, Kim Chong Yung understood what came together, and thought seriously about the direction that Korean art should go.

Kim’s works, Bird of 1953 and Legend of 1958, are regarded as signals for the opening of abstract sculpture in Korea. Above all, Legend was more notice- able, because it was made just when the abstract expressionism from the U.S. was regarded as the most contemporary style and influenced the Korean art world strongly. The work is a welded sculpture. Kim gathered scrap metal and made a form resembling a gate through welding. It shows a rough and accidental form and evokes a pathetic sense. He was not the first sculptor in Korea to use metal for his work, but was among others, such as Kim Jeong Sook, and Song Young Soo, who was his student.

His art theory was based on traditional Taoism, and interpreted the mod- ernism of Western art autonomously. Despite his intellectual thoughts on art, there were almost no theoretical lectures or books that delivered his idea and theory to his students. The only information available is the references he gave intermittently. For example, there is a quotation from Kim Chong Yung: “Gen- erally the making and the reflection are sufficient to instruct artists. The only way to humility, timidness and virtue of humans is the making.”

To Kim Chong Yung, art was not simply to produce a beautiful thing, but to train ethical attitudes through the act of making. His education of art tran- scended the style, formality or subject of the work. He established art as practical ethics and such education became an ethical guide for his students and himself during the worst political and economical situations of his time. Kim did not force his style and method upon others, but rather, he encouraged his students to create their work with passion for life and endeavor for making. It may be fairly said that he was the Socrates of modern art history in Korea. Although he did not establish or reform the institutions, education and exhibition system, Kim, as one of the founding professors, gave lectures on modern art and educated many stu- dents. Preferably, he did his best in the definite school system. Despite such posi- tive evaluation, he also had responsibility for the situation in which the academic traditio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could not overcome the past Japanese one.

In fact, the University made it even more solid. Consequently, the status and con- tribution of Kim could be devaluated. In view of his very temperate attitude and life path, we can say that though his influence on the Korean art world was not remarkable, he did stand at the center of development of the art institution.

Key words: Kim Chong Yung, College of fine art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n national art exhibition, Bills to establish the national univer- sity, Modern sculpture, Abstract sculpture, arts education in college of fine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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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과서울대학교

1. 서론

2. 김종영과서울대학교미술대학초기의약사 3. 전후한국미술계의상황과서울대학교 4. 김종영의대학미술교육

5. 김종영과대한민국미술대전 6. 결론

목차

1. 서론

1915년 6월 26일경남창원에서출생한김종영은휘문고를나와일본동경미술

학교에서 조각을수학하고돌아와 서울대학교에재직하며 조각미술의발전에 전념했던 조각가이자미술교육자이다. 그는 1982년 12월 15일 6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김종영은서울대학교 미술대학조소학과의 교수로재직하면 서한국현대조각계를이끌어나갈수많은조각가들을배출하였다. 그가지닌한 국현대미술사내에서의입지에도불구하고, 김종영에대한인지도는동시대다 른조각가들에비하면상대적으로낮다. 그와함께현대조각을선도했던김경승 과윤효중은물론, 그가배출했던김세중, 송영수, 최종태등과비교해도김종영 에대한대중적인식이나미술계내의지명도는낮다고하겠다. 그것은 그의예 술인생과교수로서의삶이긍정적이든부정적이든간에주목할만한이슈를불 러일으키지못한점도있지만, 무엇보다그가취했던중도적태도에기인한다고 볼수있다. 졸고는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초기역사속에서 김종영의예술과 교육행적을고찰함으로써, 역사적인물로서김종영의가치를밝히려고한다.

김종영은 1948년에서울대학교에교수로임용되었으며, 1980년정년퇴임

할때까지 33년간을서울대학교미술대학조소학과에봉직하였다.1이재직기 간은 한국현대미술이일제지배시의 근대주의를벗어나현대를거쳐 후기현대 로이행하는 시기에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현대미술의중심에서 활동하 며, 현대미술을견인했던중추적인인물이었다고할수있다. 그는고등학교동 문이자함께 동경에유학했으며, 서울대학교의 동료로서 오랜동안 친분을 유 지했던박갑성을이어서울대학교미술대학의제3대학장을역임했다.2대외적 으로도김종영의 활동은주목할 만하다.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에 서무려 18회나심사위원을역임하였다. 이기록은한국의미술가중에서김종 영과김경승만이보유한최다기록이다. 김종영은또한한국미술협회의대표위 원을지냈으며, 한국디자인센터이사장을지내기도하였다. 1976년에는대한민 국예술원회원으로선출되었다.

그는또한다양하고권위있는상을수상하면서그의예술적기량을 인정

1 서울대학교미술대학초창기교수중에서정년을채운사람은이순석과김종영뿐이다. 2 재임기간은 1968–197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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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_아카이브 김종영과서울대학교

받았다. 전쟁의막바지에이르렀던 1953년에영국런던의테이트갤러리가주최

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공모전에서 입상을하면서, 김종영은 한국현대 조각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알렸다.3 1960년에는 철용접조각인 ‹전설›로서울 특별시문화상의미술상을수상하였다.4 1965년에는상파울로비엔날레의초청 작가로지목되었다. 1968년에서 69년에는 유네스코초청으로유럽을 여행하였 다. 74년에는국민훈장동백장을받았으며, 78년에는예술원상을수여받았다.

김종영이 한국현대조각의선구자중에 하나임은자명하다. 그는 이전구 상(具象)적자연주의에 천착했던 한국의조각미술에 추상조각의지평을 열었 다. 이러한미술사적평가는현재 그가남긴예술적유산이나영향력을유추해 보면지나친것이아니다. 하지만이보다김종영이 끼친구체적인업적들을파 악하려면 단순히작가로서의평가를넘어서미술교육자로서 그리고미술교육 제도를형성하고실천했던그의교육사적인업적에대해서도논의하여야한다. 아직까지미술교육자로서김종영에관한연구는미진한상태이며, 이를뒷받침 할학술적 자료도전무하다. 그리고무엇보다 구술에의존하는 역사적 복원은 주관적인 판단과 파편화된기억으로 인해 객관성을확보하기 어렵다. 다양한 관점에근거한구술 자료와이를증빙할만한 자료의발굴과데이터화가절실 한형편이다.

본연구는우선서울대학교미술대학의초창기역사와김종영의교육및 전시활동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교육자로서의 활동과유·무형으로 나타난그 의교육의지와이념을밝혀내고자한다. 또한대한민국미술대전을비롯한전시 제도에주체로서참여했던김종영의역할과업적을보다심층적으로고찰하면 서, 당시 대학미술교육과한국미술계에대한그의 입장을정리하고, 그것을통 해김종영의미술교육이념과이후서울대학교미술대학의제도적정체성에대 해가늠해보고자한다.

3 공모전시는영국의현대미술연구소(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후원으로 1953 3 14일부터 4 30일까지런던의테이트갤러리에서열렸다. 영국은 1952한국의 문교부에 출품작가를 의뢰하였다. 원래 김경승, 윤효중, 김종영이 참여할 것으로 결정했지만, 이후김종영과김세중이출품하게되었으며, 김종영의나부상이입선되어전서되었다. 작품은구상작품이면서도이후그가전개할추상조각의경향을미리보여주고있는역사적인 작품이라고있다.

4 『경향신문』, 1960 11 4일자빛나는문화일꾼들이란제명의기사참조.

2. 김종영과 서울대학교미술대학초기의약사

1946년 8월 22일서울대학교는경성제국대학의후신으로 해방된한국에서최 초의국립종합대학으로출범하였다.5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하국대안)으로 통합되었던다른학부나학과와는달리미술대학은예술학부로음악과와더불 어신설되었다.6 당시 서울대는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던 이순석(1905–1986)과 서울시학무과장이었던 장발(1901–2001)을중심으로 김용준, 장우성, 길진섭, 김환기, 윤승욱등을 교수진으로 출범하였다. 여기에장발은 초대 학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서울대학교는장발을위시하여일본에유학한작가들이대 거등용하였다는사실을알수있는데, 회화과에길진섭, 김용준그리고조소과 에윤승욱이 동경미술학교 출신이었으며, 김종영 또한 동문이었다. 그러나 김 종영의임용은다른이들에비하여약 2년간의시차가있었다.7

우성김종영은윤승욱에이어서서울대학교의조소과에 1948년 3월에조 교수로임용되었다.8서울대학교의교직을얻게된계기는무엇보다그의고등 학교은사이자 초대 학장이었던장발의추천이었다. 1930년김종영은 당시사 학의 명문이었던 휘문(徽文)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장발은 휘문고

5 1945 11 100명의인사들로구성된조선교육심의회일제가설립한경성제국대학건물을

활용하여국립종합대학교를설립할것을제안하였다. 이에 1946 8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법령이공포되었고, 이어 10월에국립서울대학교로개교하였다.

6 1954년에 4미술과는미술대학으로승격되었으며, 장발은예술학부장에서학장으로

발령받으면서, 미술대학교의초대학장이되었다.

7 일반적으로김종영은 1943년에동경미술학교의연구과(지금의대학원과정)마치고 귀국하였고, 일제의강제징집을피하고자향리에칩거하였다고전한다. 해방이후에도 3 간을 향리에 은거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추정하는 바에 의하면, 광복 후 좌우난립의사회속에진입하기를꺼려했던것으로알려져있다. 간혹김종영의임용시기가

46년으로잘못알려진경우도있다. 시기에대해서는최종태, 『한예술가의회상. 나의스승

김종영을추억하며』, 2009, pp.74–78참조.

8 서울대학교의교직에관련된서류들은김종영이 48년에부임하였음을증명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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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_아카이브 김종영과서울대학교

에미술교사로재직하였다.9장발은휘문고의미술반을지도하면서한국현대미 술을주도할인물들을배출하였었다. 김종영의동기나비슷한연배의동문으로 는이쾌대, 윤승욱등이있었다. 장발은김종영에게예술가로서의 길을열어주 었을 뿐만아니라당시에접하기어려운미술사를 비롯해다양한미술의이론 들을알려주었고, 이것은김종영이지적인조형사고에천착하게끔계기를마련 해주었다. 더나아가김종영을회화가아닌조각의분야로이끈 장본인이바로 장발이었다.(도판1)

해방된 한국의조각계는 열악한 환경과인적자원으로 인해 참담한 지경 이었다. 이경성이 이것에대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10당시 대부분의 조각 가들은일본에서유학한사람들이었다. 특히동경미술학교출신들이주류를이

루었는데, 1925년에졸업을한김복진을필두로하여윤효중과박승구등이있

었고, 김종영도 이부류에 속했다.11(도판2) 초기미술대학교육을 형성했던 시 기에김종영은장발과더불어가장주도적인역할을수행했던인물이었다고할 수있다. 장발은일본의전문학교적미술교육보다는미국의미술대학에준하는 학제와 교과과정을 도입하였다. 김종영은스스로 일본 유학을 통해 체험했던 일본의관학적인교육방식을지양하고장발과함께보다현대적인대학미술교 육을준비하고수행했었다.

9 장발은서양화가이며서울대학교미술대학의초대학장을역임했으며, 이승만정권말기 국무총리를지냈던장면의동생으로이탈리아의대사로임명되기도하였다. 1901인천에서 났으며,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2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2년에 중퇴하고 도미하여컬럼비아대학에서미학과미술사를전공하여 25수료했다. 1934년에이종우, 구본웅, 김용준, 길진섭, 이마동등과함께예술단체인목일회를결성하였으나, 이는정치적이며 사회적인문제에봉착하여 38년에2회원전을개최하고해체되었다. 장발은 1945해방 이후서울시학무과장을역임하고교육행정의실세가되었다. 또한당시고희동, 김용준등과 덕수궁에모여미술학교설립발기대회를가졌고군정하에국대안을추진하는장본인이 되었으며, 초대학장이되었다. 그는 1961년까지미대학장을역임하였다. 장발의활동과이력에 관해서는 정영목의 「장발평전, 1946–53」, 조형연구소학술대회, 2010, 「조각교육의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미술교육과서울대학교미술대학 1946–1960, 서울대학교개교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1996 참조.

10 이경성, 『한국근현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80, p.117.

11 비유학파의경우는김만술이거의유일한인물이다.

3. 전후한국미술계의상황과서울대학교

일제하에전무했던한국에서의대학미술교육을위하여장발의존재는선택의 여지가없는것이었다고할수있지만, 좌익적성향을가진예술가들이국공립 의교육기관에서제외된것은아무래도제도가지닌보수적인성격을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교직의 임명권을행사했던 장발이 자신의고등학교 제자 들이었던 윤승욱과 김종영을 조소과의교수로 초빙한것을 보면, 학연을우선 으로하는그의선별력을엿보게한다.12

초기서울대는 1947년국대안파동으로내적인진통을겪어야했다. 이사

건은서울대미술대학에는 그다지큰의미를지니지않은 것으로알려져있지 만,13이부분은좀더심층적인연구가요구된다. 초기에미대를다녔던여러사

12 이외에도길진섭이나김용준과같은이들은장발과함께목일회를구성했던인물들이었으며, 장발주도로서울대의교수진구성이이루어졌음을확인할있다.

13 서세옥교수등은구술을통해국대안이미대내에서좌우의대립보다는교수들간의이권이나 이해대립의양상으로나타났다고전했다.

[도판1] 장발과김종영, 1949.

[도판2] 김종영과동경미술학교조각과학생들,

앞에서번째가운데가김종영,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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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_아카이브

람들이공통적으로 말하는내용은, 알려진 것처럼국대안파동의 여파가미대 에미쳐서좌우대립의극한상황으로치달았던것보다는미대교수들간의불신 과반목이이러한상황에즈음하여불거져도출된것이라고일반적으로이해되 고있다. 특히장발의독자적인행보에불만을품었던교수들의반발이있었다. 하지만국대안파동은미대에서도동맹휴학으로번졌으며, 이를계기로학생이 었던 김진항이 퇴학당하고,14 학생들은 등교를거부하였다. 이와 함께 김용준, 길진섭등이 국대안에반대하여, 사표를던졌다. 이러한혼미한시기에김종영 은서울대에 채용되었던것이다. 국대안파동이수습된직후인 1949년 4월대 학본부는미대를국립공업연구소건물로이전하도록하였다. 이로인해다시금 교수와학생들사이에소요가일어났다. 이내부소요로인하여김환기가 10월 에교수직을사임했으며, 노수현이그자리에임용되었다. 이해에처음으로교 내전시가제1회학생미술전람회라는이름으로 5월에동화백화점에서열렸다.

1950년 6.25동란의 와중에서장발 학장과 당시 학생과장이던 윤승욱은

궐석상태에서학생들에 의해단죄되었고, 국대안에반대하여사퇴했던김용준 이 학장으로 추대되었다.15이러한 일련의사태에 대해 김종영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잘알려져있지않다. 그러나장발의제자로서김용준을비롯한좌파 성향의교수들과밀접한관계는아니었다고판단할수있다. 전쟁초기에김종 영은 수신에신중을 기했던것으로만 알려졌다. 윤승욱은 좌파학생들의 밀고 로인민군들에의해강제납북되다가사망했다고전한다. 국대안으로사퇴했던 김용준, 길진섭은 자진월북하였다. 김종영은다른 교수들과함께 납북될상황 에서간신히도주하였으며, 직후삼선동의자택에은신함으로써몸을보존하였 다.16 1.4후퇴당시김종영은부산으로피난을갔으며, 거기서송도에자리잡은

14 김진항은해방시기남로당활동을했던미술대학내의가장대표적인인물이었다. 국대안 파동시기에동맹휴학에가담주모자로서제적처리되었다. 김진항역시휘문고를다녔으며, 장발에게서배웠다. 북한의서울점령당시인민위원회의서기국에서근무했으며, 당시잔류했던 서울대학교교수들을공산당의적출로부터보호했다고전해진다. 9.28 수복이후에월북했다. 15 김용준은 그 사이에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75.

16 6.25전쟁초반김종영은자택에은신하였다가 1.4후퇴에부산으로가서서울대학교에

합류하였다. 기간동안김종영에대한행적은그의부인인이효영여사가구술로전하고 있다.

임시캠퍼스에서수업을계속 진행하였다. 윤승욱의 납북으로조소과는김종영 혼자서책임을질 수밖에없었다.17이러한상황에서도김종영은 송영수, 김세 중, 장기은을 비롯한제자들과 수업을진행하였으며, 1952년런던 테이트갤러 리공모전에출품할작업을수행하였다.(도판3)

전후한국미술계는전반에걸쳐피폐함을면치못했다. 50년대자체가정 치적으로나문화적으로암흑기에해당한다고볼수있다.18그러나자세히살펴 보면, 여러면에서이러한상황을벗어나고자하는노력을읽어낼수있다. 그럼 에도불구하고개별적인노력은이데올로기와학교를중심으로한계파이해관 계의대립으로혼란을가중하고있었다.19대한미술협회의주도권을행사해오 던고희동과윤효중의행태는매우당파적이었다. 1955년 5월대한미회총회에 서재선을기대하던 고희동파는 과반수득표에실패했으나, 같은부류였던 윤

17 장발은 6.25직후도강을하였으며, 수복이후에는미국유학이라는명목으로전란에서피신해

있었다.

18 박용숙이언급한것처럼, 1950년대한국미술은암흑기에해당한다. 특히좌우의대립이남북의

대립으로 고착되고, 친일의 문제보다 반공의 문제가 강조되면서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창작을 위한환경은억압당하는형국을띠게되었다. 박용숙, 『한국현대미술사이야기』, 예경, 2003, p.167.

19 고희동은미술의탈정치성을강조하면서오히려체제에순응하는정치적인모습을보여주었다.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89.

[도판3] 부산송도캠퍼스에서

조소과학생들과김종영,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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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_아카이브 김종영과서울대학교

효중이이를과반득표로발표하여공식화했다. 이에반발한서울대파는장발을 중심으로독자적인한국미술가협회를 1955년에출범시켰다. 이협회가창립되 었을 때, 김종영은조각분과위원으로서활동하였다. 홍대와서울대간의 반목 이최초로공식화된것이다. 이것은이두한국미술계의주류들이국전과다른 제도 내에서 이해대립하고, 장르에 불문하고 이러한상황은 유사하였다. 국전 내에서홍익대의교수이자심사위원인김경승과윤효중에맞서야했던김종영 은홀로고군분투할수밖에없었다. 그가이러한상황을헤쳐나갈수있었던것 은그가지닌합리적사고와천성적성실함이었다고말할수있다.

이러한 암흑기 속에서도 김종영의 예술의지는 부단하였다. 한국 최초의 용접조각중의하나인 ‹전설›을제작했으며, 이에상응하는실험적인작품들을 전시하였으며, 대학 내의 강의를통하여또한 국전의제도를운영하는 주체로

서꾸준히제자들을육성해내었다. 1959년국립공보관에서장우성과함께한 2

인전은 전후의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한 작업과발전을 도모하였다고할 수있다.(도판4)

[도판4] 김종영과장우성, 중앙공보관에서 2인전을기념, 1959.

4. 김종영의 대학미술교육

일제시대에비하여초기대한민국의대학미술교육은서구모델을참고로하여 보다 발전된양상을보여주었다. 종합대학 내의미술대학의 설치는선례가없 었던것이다.20그러나미국의미술대학을경험했던장발등에의한미술대학의 창립은국대안에서적극적으로수용되었다. 그러나자율적인교육제도나교육 경험이전무했던 한국의대학미술교육은처음부터 난관에봉착하였다.21미술 분야를회화과나조소과등근대적인 학제로나누기는 했지만, 근간은거의초 기일본식모더니즘의교과과정을답습하는것이었고, 첨예한현대미술을수용 하기에는 모호한구조를띠고있었다.22학과편제나명칭에서도 동경미술학교 와큰차이를보여주지못했다. 특히조각과라는이름대신에 ‘조소과’라고한것 은일본의전례를따른것이라볼수있다. 또한도학(圖學)과같은과목은그정 체성이모호한것이었다.

학제나 교과과정과는별도로 미술대학은 이제 제도화된교육기관으로서 그곳에 속한교수들의 입지를 미술계 내에서 공고히 하는 최적의 수단이 되어 갔다. 최열은당시의대학미술교육의정치적인구조를다음과같이비판하였다.

“일본 유학생 출신들은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미학, 창작방 법을무비판적으로가르쳤다. 비판능력이크지않은학생들은이런

20 과거일본에서는미술대학이란학제는존재하지않았다. 종합대학내의미술학부의설치는 미국의대학을경험했던장발과그에협력했던고희동과이순석에의해제안된것으로보인다.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20.

21 장우성, 「화맥인맥」, 『중앙일보』, 1982, p.94. “이러다해방을맞고, 미술전문교육도시작하게 되었으니대학으로서는무엇보다새로운방향설정이문제였다. 미술학부교수들은

민족미술건설을위해계획을세워야했다. 우리들의전통을어떻게살리고이어갈까하는현안 문제를놓고근원(김용준)나는책상을마주놓고앉아서틈만나면이야기를나눴다.”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79.

22 이경성, 『한국근현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80, p.281. “그들의 교과과정은 전근대적인 방법을답습하여양에비하여질이떨어지는형편이요오늘날대부분의미술교수가일본에서 미술학교를나온사람들이어서예전의일본식적당주의의감각교육만이핵심을이루고 있다.” 초창기미술대학의교과과정에대해서는서울대학교미술대학, 『서울대학교미술대학사 1946–1993, 1993, p.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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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식에시비를가릴수없었을뿐아니라교수들이사회에서차 지하고있는 그위력적인 지위와역할따위 권위에어떤 도전도할 수 없었다. 그 권위란 단순히 대학교수라는 지위 혹은 교육자로서 뛰어난 능력때문에 생기는것이 아니라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 위원, 미술협회 간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따위의외적인조건, 매 우유기적으로연결된그러한조건으로부터비롯하는것이었다.”23

50년대에들어와젊은학생들은일본에서수용한근대적추상개념이아닌미국 을비롯한서구가동시대에 출현시켰던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에수입되기 시작하였는데, 미술대학은이를충족할만한교과과정이나 수업을형성하지는 못했다. 김종영또한이새로운경향에대해신중한태도를보였다.24김종영은 스스로일본의 관학적교육에거리를두었듯이, 이 새로운미술사조에대해서 도비판적으로대응하였다.25

김종영은조소실기외에도해부학등부분적으로나마이론수업을담당한 것으로알려져왔다. 하지만남겨진자료로유추해볼때, 김종영은전적으로실 기수업을담당했던것으로판단된다. 하지만미술사를전공했던장발의경험과 그에게서 배운 김종영의 조각과 미술 전반에걸친 풍부한 이론은 실기강의를 풍부하게만드는요인이되었다.26하지만이론강의에대해서김종영은큰비중 을두지않은것으로비추어진다. 그는언어로미술을이해한다는것이불가하 다는견해를피력했다.

23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76.

24 논문에수록된 5장의김종영의칼럼을참고.

25 김종영, 『초월과창조를향하여』, 열화당, 2005, p.124. “나는일찍이예술의보편적형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특히 그리스 고전에 심취하였고, 부르델과 마욜을 숭앙하였다.

미술학교시대에지도한사람들은모두가로댕이전의근대조각의형식을벗어나지못한 사람들이었는데, 나는이러한지도자들의예술을별로존경하지않았다. 그보다부르델, 마욜, 데스피오, 아르키펭코와같은조각가들의작품에더욱관심을가졌다. 따라서모델에의한학교 과제에서도다른동료들이하고있는사실적인묘사에는비교적열중하지않았고, 기념비적 형태라든지 볼륨이나 매스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지도교수인 아사쿠라 후미오 씨는 언제나작품을가리켜하리코(종이인형)같지않느냐고비꼬던것을기억한다. 그때의 이러한나의성향은역시개체의미보다도보편적인형식에더욱관심을가졌던것으로보겠고 입체와구조에대한논리적추구에서조각의미를찾으려고것이었다.”

26 장발은실기보다는미술이론강의에전념했었다고전한다. 정영목의「장발평전, 1946–53, 조형연구소학술대회, 2010 참조.

“예술은얘기가되는것이아니다. 도시예술에관한강의가있다는

사실은예술이변변치못하거나또는전혀그것이불가능하다는것 을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화가는자기의 예술에관해서 결코수다 한말을하지않는다. 또한많은말을한예가없다. 최대의예술가는 전혀 말이없다. 레이놀즈까지도그예에 빠지지않는다. 그는자기 로서 되지않는 일에 대해서는쓰기는했으나 자신이한일에관해 서는전연입을봉했던것이다.”27

이렇듯미술의이론화는예술의직관성이나순수성을저해하는부차적인것으 로취급되었다.

미술대학의정규적인교과과정보다는서구의현대미술이여러매체와통 로로전해진것이오히려당대미대생들의창작의지와예술적충동을촉진했던 원인이되었다. 그렇지만이러한것을 수용했던주체 또한미술대학이었다. 예 컨대한국추상조각의전개는전적으로김종영과김정숙그리고약간의격차를 두고윤효중등대학의교수들이능동적으로참여하면서이루어졌다. 윤효중은 1951년에 유네스코의초청으로 최초로세계미술인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이탈 리아에서마리노마리니등과교우하면서현대적인조각을직접체험하고돌아 왔다. 이에비하면김종영의현대미술에대한수용은늦은편이라고할수있다. 한국에서 추상조각의 지평을연 것은 재야의미술계가 아니라제도권 안에서 시작되었던셈이다. 다시말해, 모더니즘의수용창구가미술대학이라는제도였 다는점을 명시하는 부분이다. 최초로용접조각을 배우고도입했던 이는홍대 의교수로있었던김정숙이었다.28

김종영은 처음부터추상조각을제작하거나이를학생들에게가르치거나 장려하지는 않았다.29남아있는 작품들로측정해 볼때, 김종영이본격적으로 추상조각을시도한시기는 50년대 중반부터이다.30김종영이 참여하여수상을

27 김종영,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열화당, 2005, p.92.

28 김이순, 『한국의근현대미술』, 조형교육, 2007, p.121.

29 56국전에송영수그의제자들이용접조각을출품하였다. 시차로보건데, 김종영은오히려

제자들에게서새로운기법에대한자극을받은것으로추정된다.

30 목조조각인이미 1953년에제작된것으로보아이른시기로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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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무명정치수를 위한기념비’ 공모전에서 보내준전시도록을 받은 김종영 은서구의현대조각의흐름에적지않은영향을받았다고추정된다. “부산피난 지에서전시도록을받아본김종영은 다른작품들에 자극을받았는듯이후본 격적인추상을모색하게된다.”고다른연구는보고있다.31동기는다른곳에서

도찾을수있다. 우선 1957년에 열린 ‘미국현대8인작가전’이그렇다.32이전시

는전후피폐, 정체되었던한국현대미술계에는이정표와같은영향력을미쳤다 고할수있다.33

추가적으로서울대와미네소타대학간의교류전을통해서미국의현대조 각을만나게되었다는것도 들수있다.(도판5) 간접적으로는윤효중이유네스 코의 초청으로 세계미술인대회에참여하고 오면서, 한국미술계의 지각변동은 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 김종영은변화를적극적으로감지하 고, 현대미술의자율적향방에대해서고민하였다.

“(중략) 최근에미국미네소타대학 미술부에서교수와학생들의 작 품을 우리 미술대학으로많이 보내왔는데 이제곧전시를하게 되

31 김윤수(), 『한국미술 100년』, 한길사, 2006, p.601.

32 전시는 1957 4 9일부터 21일까지국립박물관에서열렸다.

33 이경성, 『한국근현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80, p.130; 김영나, 20세기의한국미술』, 예경, 1998, p.169.

[도판5] 미네소타대학과의교류전현수막이걸린

연건동캠퍼스입구, 1958.

[도판6] ‹전설›, , 65x70x77cm, 1958, 김종영미술관소장.

면여러분들도보시겠지만그중에어떤교수의조각하나를여기서 잠깐소개해드리겠습니다. 명제를 ‘생장’이라고하고서식물이나동 물과같은구체적인자연물을설명적으로만든것이아니고, 단순한 놋쇠의철봉을다소불규칙하게종으로횡으로용접을시켜마치아 이들의 놀이터에세워 놓은 철탑을 축소시켜 놓은 것같이 된것인 데, 아무런장식도없이대단히단순한작품인데도황금색의묵중한 광택과금속의무거운중량감이주는전체의분위기가어딘가자연 의법칙을말해주는것같고힘찬생명을느끼게합니다. 물론이작 가는대자연의질서를몇개의종선과횡선으로요약한것이지만예 술이란참으로마술과같은작용을하는것으로생각됩니다.”34

철용접조각을현대조각의새지평을연것으로평가한김종영이이듬해에 ‹전 설›을출품했던것은 스스로국제미술계의 변화에대해 신속히응답한것이었 다.(도판6)

1957년은 한국미술계에있어서전환점이되는시기였다. 이해에는과거 와달리 현대성을 지향하는많은 미술단체들이 결성되었으며, 위에 언급한국 제교류전 외에도조선일보가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이열렸다. 전후 점차가 속되는현대성(혹은모더니즘) 예술에대한다양한활동과실천에도불구하고,

조각은그다지 친절한평가를얻지는못했다. 이경성은 1958년 6월 20일조선

일보를통해서다음과같이평하고있다.

“그것(현대에의의지)은영원한 미를 수립하려는 고전적 형태라든 가인간의 감정과정열을극적으로 표현하려는낭만적인 태도라기 보다는 오히려오늘이라는입장에서 오늘의세계상이나 오늘의미 의문제를설정하려는즉오늘적인것이관심의초점이되는것이었 다. 그렇기에그들의 의지는몰입하거나도피하는그러한것이아니 고어디까지나현실과대립내지대결하여그것을극복또는해명하 려는논리적전투적태도를지니고있는것이다. 그들의의지가논리

34 김종영, 『초월과창조를향하여』, 열화당, 2005, pp.1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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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기 때문에자연그들은 설득력을지녀야 되고, 전투적이기 때문 에그들은강인하여야만되었다. 꿈이나기분또는분위기가아니고 현실을 파고드는 탐구력과날카로운 관찰력 이러한실험심리가그 들미의식을 형성하고있는것이었다. (중략) 그들의의지는 현대에 서근대적망령을찾으려는어리석음을범하지않는다. 그들이우선 찾아야할것은현대의진실이다. 그러나현대는이미결정된것이나 이루어진것이아니고 부단히 움직이고 형성되어가고있는것이다. 그들의 고뇌와편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부단히움직이고 있는 현대를잡으려고그들도늘유랑의길을헤매야만된다는것이다.”35 같은글의하단에서이경성은조각에대해더신랄한비판을가했다.

“전반적으로볼적에는조각도구태를벗어난것같다. 그러나실질 에있어 그들은현대적인 것을파악 못하고한낱 그림자를쫓고 있 는 것같다. 그것은그들의 발상이작가 개성에서 추출된본질적인 것이아니고어느시각적회상이나연상에서오는것같기에그렇다 는것이다.”36

이경성의기고문외에도당시서울대조소과에출강했던미국대사관문정관의 부인이었던마리아 M. 핸더슨이쓴평문도시사하는바가크다.(도판7)

“현대작가미술전에 조각이 출품된것은처음으로 조각이전시되었 다는 데서 의미가있는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조각가들은화가들 의수준을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경향은 현재각국의 미술 계전체에서 볼수있는 통례적인 현상인 것인데한국에서도 천박

35 이경성, 「조형의 연금술(상)」, 『조선일보』, 1958년 6월 20일자; 최태만, 「한국 근. 현대조각에서의 현대성」, 『한국현대조각과김종영』, 2005덕수궁미술관춘계학술발표회논문집, 2005,

p.17에서재인용.

36 최태만, 「한국. 현대조각에서의현대성」, 『한국현대조각과김종영』, 2005덕수궁미술관춘계 학술발표회논문집, 2005, p.17–18.

한장식품에불과한조각들이진열되고있는것이다. 대개의작품들 은추상주의를완전히이해하지못하는작가거나순수한 ‘아리아’를 꾸준히추구하지못한 작가들의것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조각 계가몇사람의재질을살리고있다는것이명백하게나타나고있으 며, 이러한재질들은격려되고 육성되어야하는일반미술계에서도 정당한지위가부여되어야할것이다. 조각작품들은완전한자연주 의로부터 추상주의에이르는 여러가지 분야에속하는 작품들이었 다. 비교적 ‘센스’가있고, 조각 ‘콤포지션’을살릴수있는기술을가 진작가는 전상범씨였고, 그의 ‹대지›와 ‹형태›란두작품은이런 재질을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훌륭한 ‘포름’은 ‘다이나믹’한정력 에충만되어 있다. 최기원 씨의 교묘한 작품들도 볼만한 것이었다. 전뢰진씨의매력적이석상들과백문기씨의초상은이번출품된작 품가운데가장예민한감수성을발휘한창작이었으며, 찬양받을만 한것이었다. 이와같은조각가들의친분은현재의고립된생활에서 해방되어건축, 가구, 회화등의 세계와유기적인관계를 맺어정당 한조각의위치를차지하게될때보다거보적인진보를갖게될것 으로보인다.”37

37 마리아 M. 핸더슨, 「서구에의지향」, 『조선일보』, 1958 7 4, 5, 7일자. [도판7] 마리아핸더슨여사와서울대학교교수와학생들, 가운데김세중과김종영선생사이,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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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역사적상황속에서국전에출품했던작품인 ‹새›와 ‹전설›은김종영이 이미추상미술의지평을열었다는신호로받아들여진다. 특히 ‹전설›은 1957년 추상표현주의(혹은 앵포르멜)가 가장 현대적인 미술로서 인식되면서 한국미 술계를흔들었던시기에제작된작품이라더욱주목된다. 버려진철조각을모 아용접을한이작품은거칠고우연적인형상과철질감이안겨주는비장함으 로인하여서사적성격을띤것으로평가된다.38이작품은송영수, 최만린, 오종 욱등그의제자들이발전시켜나갈추상적인철용접조각(Welded Sculpture)의 출발을알리면서도이미완숙한조형미를보여주는작품이다. 김종영은이러한 현대적인재료와작업을소개하는데에그치지않고직접실험하고제시함으로 써후학들에게모범이되었던것이다.

긍정적으로보면 김종영의미술교육관은 ‘자유의지’에입각한것이며, 불 가지론적인예술이론을설파하면서 초월적이며관념적인 색채가짙은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정적으로보자면, 그의예술이론은당대의열악한미술교육환경 이나 미술계의 후진적인 상황속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것이었으며, 또한초 관념적이었다고 할수있다. 그의 예술이론은전통적인 도가사상이그기본토 대를형성하고있었으며, 서구의모더니즘을자율적으로해석하는능력을지니 고있었다. 그의 예술사상은인문학적인배경을가지고있었지만, 그러한이념 과 이론을제자들에게전파할 구체적인강의나 저술따위는 부재하였다. 유일 하게그의사상을만나는것은그가간혹던지는화두와같은언술행위를통해 서였다. 그의교육론을그가남긴어록을통해보면다음과같다.

“대체로예술가를훈련시키는것은제작과반성으로족하다. 겸양과 용기와사람의미덕을길러주는것은오직제작의길뿐이다.”39

김종영에게 미술이란 단순히 아름다운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38 박용숙은 김종영의 작품이 문학적인 제목을 차용함으로써 추상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박용숙, 『한국현대미술사이야기』, 예경, 2003, p.224) 하지만전설이란제목은작가가 직접붙인것이아니라완성후에박갑성이지어준것이다. 김종영은박용숙의의미대로 전설이란문학적주제에상응하는작품을만든것은아니었다.

39 김종영, 『초월과창조를향하여』, 열화당, 2005, p.52.

통해 윤리적 덕목을 수행하는일이기도 하였다. 그의 미술교육은 스타일이나 형식혹은 작품의내용적 사유를초월한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실천윤리로 서미술을 설정한김종영의 교육은 당시 이념과 이해의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자신과제자들에게도덕적지침이되었던것은분명하다.

5. 김종영과 대한민국미술대전

김종영은앞서언급한것처럼국전의심사위원으로활동하면서많은제자들을 미술계에등단시켰다. 국전은 80년대까지한국미술계에서거의유일한등용문 으로서권위를지니고있었다. 제2회국전의심사위원을맡으면서시작하여그 는홍익대의이해를대변하는김경승이나윤승욱에맞서서울대학교출신들의 입상에주력했다.40홍익대학교와더불어양대미술인맥을만들었던서울대학 교는국전에서도모교의동문들에게유리한환경을조성하려고하였다. 이것은 이후홍대와서울대미대간의갈등과반목그리고두대학과기타대학들간의 불합리한오해와이해관계를형성했던원인이되었다.

김종영은국전의심사위원으로서출품작품에대한평가에서타비평가들 에못지않은비판적인태도를보여주었다.41그리고비평은단순히작품을평가 하는 데에 그치지않고 당시 한국미술의 현황과 총제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 다. 김종영은 1953년(제2회)과 1954년(제3회)의심사를마친후에그소감을공

40 최열,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청년사, 2010, p.777. “조각분과도마찬가지로동경미술학교 출신의윤효중, 김종영, 김경승사람이홍익대와서울대교수이자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계속했다. 더욱이조각에서는서울대와홍익대출신이외의누구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심사위원으로참가한적이없다. (중략) 조각부문(수상자필자)

이와달리홍익대출신이우위를보였다. 모두 66가운데홍익대출신이 37석으로 56%,

서울대출신이 23석으로 35%차지하고있으며 (중략) 기타학교출신입상자는 6명으로 9%에 머무르고 있다.”

41 그의비평적감식안에대한의지는그의글을통해간접적으로전해진다. 김종영, 『초월과

창조를향하여』, 열화당, 2005, p.134: “(중략) “서화감상에는금강안(金剛眼)이어야하고

잔혹한형리(刑吏)손길같이무자비해야한다완당의예술감상태도는, 사람의비범한 예술정신과사물에대한투철한관찰력을짐작할있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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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으로대학신문을통해공식화하였다.

*대학신문 (1953년 12월 7일자, 國展片感)42

“(중략) 특히새롭기를원하는신진작가들에게한가지지적하고싶 은것은아무래도예술이란기계제품이아니라는이새삼스런이야 기를끄집어내지않을수없는것은남의형식을받아들이는그들의 태도가나빴기때문이다.

자신의생리를 망각하고 남의 인격의투영에만 쫓아다니는 것 은무모하기짝이없는일이며도시작품을무엇때문에제작하는지 를모른다고볼수밖에없다.

자기를키우기 위해서남의 생활과교섭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없을수없는일이겠지만그러한대타적(對他的) 관계가오직자기 완성에그목적이있을진대왜자기의속임없는생리의과정을보여 주기위해서노력하지 않는가. 예술가의 작품이란정신의행동에서 보여주는생활에소식에지나지않는것이며우리는그의작품에나 타난어떤이해의심도라던가또는해결의방법이나량을통해서작 가의 역량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제작태도가 좀 더진지하여인격의완성을위해서지혜롭기를바란다.”

김종영은당시개방된입구를통해들어오는서양미술에대한무조건적인수용 이나모방에대해경계심을 가지고있었다. 비록원리적인차원에서 비판을가 하고있지만, 김종영은이글을통해주체적인조형사유를강조하면서, 서구미 술의일방적인 추종에대해서비판하고있다. 더나아가인격의소양이나실제 삶과 결부된창조적 정신을중요한다는점에서, 김종영이예술관이나 그가 이 후제자들에게전파할작가윤리등을예상하게하는글이라고할수있다.

*대학신문 (1954년 11월 15일, 시평: 작가의조형의식빈곤 –제3회국전을보고)

42 인용된칼럼은현대의맞춤법으로수정하지않고그대로수록되었다.

“(중략) 그러나수백에달한국전참가작품중에서가려운데를시원

하게긁어주는작품을하나도발견못했다는것이나의솔직한고백 이다. 물론이러한문제의해결이가능하기에는기술과정신의어려 운수련을거쳐야만되는것이고보니오늘날의우리현실에서그러 한 難課題의해결을목전에서구한다는것은지나친요구라고할는 지모르겠으나적어도작가들의노력이예술의본질적인문제를추 구해보려는진철성(眞掣性)까지43상실하고 있는데대해서는분노 의감조차갖지않을수없었다. (중략) 원래인간의사회생활이란습 관이나타성의힘을빌리는면이적지않다고보겠으나예술가의정 신은때로는타성을버리는것이생존과직결되는때가있다는것을 알아야한다. 전통을살린다는것이기껏해야형식의피상적인답습 (踏襲)에불과하다면전통은거기서끊어지고만것이며고전의가 치란것은그것이우리의현실에새로이해석되어가는데서만언제 나그빛을갖게되는것이아닌가.

(중략)

20세기초두에불란서를 중심해발단한소위 신흥미술의영향으로 미술의정치적국경이없어진사실은너무도유명하지만그후다시 2차대전을 겪은 미술사조는더욱 단일적인 성격을갖게 되어 好不 好간에전세계는동질의과제를공유하기까지이르렀다.

이러한정신의포용성은인류의역사가시작된이래처음보는경이 가아닐수없으며또수습(收拾)하기어려운현대의혼란성도또한 여기서발단되었다고보겠다. 아무튼현대의예술가들은각자국경 을초월한공통의현존을살고있다는신념과동등한위치에서자기 들의전통을주장하고제각끔다다른발상을하면서도서로통할수 있는 세계적인 현실을가지게 된 것은 좋은 일이나 이러한현대적 사조를잘못인식하는데서또한그것을악용하는대서 예술의절조

(節操)를우습게알고문화를모독하는비행이있지않기를원한다.

이상으로 나는 금년국전에서 느낀 작가들의 조형의식의 빈곤

43 신문의오기로인하여진취성잘못인쇄한것이아닌지추측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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