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북한의 대외관계 변화추세
북한의 대외관계 변화는 부시 행정부 이전과 이후의 시점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전자의 경우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 해 대화와 협상 중심의 외교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의 경우 미국과의 대결적 외교노선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대화를 이끌어 내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대중/ 대러/ 대 EU를 포함한 여타 외교 외교활동 의 확장을 꾀해 왔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시 행정부 이전 대외관계: 대미관계 정상화 기반 구축과 외교 다변화 모색
김정일 정권이 공식적으로 전면 등장하게 된 1998년부터 조지 부시 정부 등장 이전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대미외교를 중심으로 미국과 협상과 대화 노력에 집중되어 온 것으로 분석된다.115 북한은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개정과 국가지도기관 선출을 통 하여 국방위원장 중심의 새로운 통치체제를 공식화하였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국가통치체제를 뒷받침 하는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거창한 정 치적 구호를 내걸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군정치 논리를 제 시하였다.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 전반을 밀고 나가는 령도방식”116으로 설명되는 선군정치는 북한의 외교전략을 결정하는 핵 심요소다.
115 _ 본 부문은 통일연구원 통일환경 및 남북한 관계 전망 1999∼2000 중심으로 정리.
116 _ 로동신문, 1992년 6월 25일.
북한은 선군정치로 ‘제국주의와의 대결’ 즉, 미국과의 대결에서 승리 를 이끌어 내겠다는 것이다. 선군정치는 군사력을 우선하는 힘의 정치 로 설명될 수 있다. 북한은 힘 즉, 군사력을 수단으로 ‘제국주의와의 대 결’에서 전면 대처하겠다는 것이 선군정치의 외교적 표현이다. 이에 따 라 대미관계에 있어서 미국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경우 강경 한 군사적 표현으로 이에 맞선다는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함으로써 미국의 대북압력을 차단하는 행태 를 보인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같은 해 8월 초부터 북한이 금창리 핵시설로 추정되는 지하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의혹이 증폭되면서 미 국의 대북압력이 다시 강화되었다.117 이에 직면하여 북한은 군사적 강 공으로 대응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북·미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보다 대화와 협상국면으로 접 어들게 되었다. 미국과 북한은 대화 지향적 자세를 바탕으로 뉴욕 북·미 고위급회담(8.21~9.5), 워싱턴 실무회담(9.28), 북·미 미사일 회담(10.
1~2), 제네바 4자 3차 본회담(10.21~24), 금창리 핵시설 관련 북·미간
협상(11.16~18) 등을 연달아 개최하였다. 이듬해(1999년) 들어가서도 북·미간의 이러한 대화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특히 금창리 사찰 관련 북·미 회담 4차 협상(2.27~3.16, 뉴욕) 북·미 양측은 최종합의하고 미 국조사단이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5.20~24)한 후
117 _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북한과 미국은 대화를 통해 관계개선을 위한 다양한 협상노력
을 기울여 왔다. 북한과 미국은 베를린에서 고위급회담(1998. 3. 13)을 개최하여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 미사일 협상 재개, 한국전 실종미 군 문제 등 현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3월 16일 4자회담 제 2차 본회담에서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철수문제 우선 토의를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후 북한은 미군유해 공동발굴 작업 시작(4월), 유엔사와 북한군 간 장성급 접촉 재개(7월) 등을 거치면서 미국과의 대화채널을 유지하고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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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리 지하시설 관련 의혹에 대해서 일단락 지음으로써 양국 간의 대 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금창리 지하시설 관련 문제 해결 이후 북한은 또 다른 군사적 강공태 세를 보임으로써 미국에 대한 유리한 대화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자 하 였다. 실제로 북한이 사거리 4,000~6,000km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 험발사 준비 움직임을 보이게 되자 미국은 비공개 협상(6.2~23, 베이
징) 재개, 6차 4자회담(8.5~9) 및 미·북 협상(8.3~4) 등을 통해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요구하였다. 결국 베를린 회담(9.7~12)에서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하는 대신 미국은 대북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북·미간의 관계개선 조짐이 확대되 었다. 미국이 평양에서 미군유해를 직접인수(10.25)하게 된 것은 대북 관계 개선을 보다 본격화 하겠다는 미국의 의지 표현으로 이해된다.
클린턴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00년에 들어와서 북한은 이러한 여세 를 몰아 대미접근을 보다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찰스 카트만 미국무부 한반도평화회담특사의 베를린 회담(1.22~28), 뉴욕회담(3.7~15), 로마회담(5.24~30)이 개최되었으며, 말레시아 콸 라룸푸르 미군유해송환 협상(7.10~12) 및 제 5차 미사일 회담(7.10~
12)도 연달아 열렸다. 이어 ARF 회담직후 백남순 외상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회담(7.28)이 있었고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 관련 회담이 평양에서 개최(8.9~10)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은 미국과의 다 양한 회담을 통해서 핵 및 미사일 등 군사적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테러지원국 해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였다. 동시에 북한은 테러지 원국 해제를 포함한 대미관계 정상화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하여 북한 고위급 인사의 미국방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김계관-카트 만 뉴욕회담(9.27~102)에서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 1 부위원장의
미국방문이 합의됨으로써 북한의 일차적인 외교목표를 달성하게 된 것 이다. 이어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은 미국을 방문하여 상호 적대관계 포기 및 교류·협력 확대,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 약속, 정전협 정을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대화채널 구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북·미공동성명(10. 12)을 이끌어 내었다. 이어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의 평양방문(10. 23~25)이 있었고 콸라룸푸르 제6차 미사일회담(11.
1~3)이 개최되어 클린턴 미 대통령의 평양방문 문제가 제기되었고 클 린턴 대통령 역시 방북계획을 추진할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러나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계획은 미국 내의 부정적인 여론으로 말미암 아 취소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은 핵 및 미사일 등과 같 은 군사적 수단을 활용하여 세계 최강국이며 그들의 최대 적대국인 미 국과의 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키는 단계까지 이르게 한 외교적 성과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반면 2000년대 이전 김정일 정권의 대미 이외의 외교 전선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은 채로 유지되어 왔다. 1998년 북한과 중국은 의례적인 축전교환과 중국의 대북한 경제지원 이외의 특기할 만한 교류와 접촉은 없었다. 북·러관계 또한 약간의 관계개선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기존 추 세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북·일 관계는 오히려 악화된 상태를 유지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은 대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외교적 성과 축적과 함께 여타 국가들과의 외교적 확장을 위한 전 방위 외교활 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개선 노력을 강화 해 나가는 가운데 일본과의 3차례에 걸친 수교회담을 진행함으로써 양 국 간의 관계진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6‧15일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도 이러한 북한의 전 방위 외교노력 차원에서 성사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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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대외관계:
대미 ‘초강경정책’을 통한 북·미관계 갈등 극복과
전 방위 외교활동 확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정부는 포용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클린 턴 행정부와는 달리 엄격한 상호주위를 강조하는 대북 강경정책을 표방 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적인 대화를 요구하면서도 미 국을 강하게 비난하는 대미 부정적 태세를 보였다. 평양 당국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조미사이의 대결이 해소되고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
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클린턴 집권 시기 미국과의 여러 갈래의 대화를 진행”118했다고 강조함으로써 미국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미국이 내놓은 6자회담을 수용한 배경 역시 북한의 북·미 대화 중심의 관계 정상화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 종료 선언 (2003. 5. 1)이후 미국은 북핵문제 해결 관련 6자회 담을 추진하게 되었다. 미국은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의 유일한 당사 자 의무에서 벗어나 여타 국가들과의 다자적 대북위협을 통해 보다 효 율적인 핵문제 해결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집요 한 반대 입장을 보이다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6자회담을 통한 북·미대화 를 이어가기를 희망하였다. 이후 6자회담 틀 내에서 미국은 북한의 완 전한 핵 포기 및 폐기를, 북한은 미국으로부터의 체제보장을 요구하였 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지속적인 대북 위협과 강경 정책적 태도에 맞서 핵무기 보유 선언 → 미사일 발사 →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의 ‘초 강경 정책’ 선택함으로써 6자회담 9‧19 공동성명 및 2‧13 합의를 이끌 어 내고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성 공하였다.
118 _ 로동신문, 2001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