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제2차 ‘핵위기’ 이전 북·미관계
북·미간 직접대화를 촉진시킨 것은 북핵문제였다. 핵문제는 현재까지 도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 되고 있다. 북한은 1985년 12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착오로 인해 무려 6년 1개월 만인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와 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했고 이것은 4월 10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비준되 었다. 핵안전협정이 체결된 후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이 제출한 최초보 고서(Initial Report)를 바탕으로 1992년 5월 25일~1993년 2월 6일 사 이에 총 6차에 걸쳐 북한 내 모든 핵시설에 대한 임시사찰을 진행했다.
미국과 한국은 보다 확실한 사찰을 위하여 남북한 동시상호사찰을 제의 하였으나 북한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북한은 1990년 단 1회의 재처리를 통해 플루토늄 90g을 추출했다고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는 방사화학실험실에서
17 _ 허문영, 북한외교의 특징과 변화 가능성 (서울: 통일연구원, 2001); 척 다운스
(Chuck Downs), 송승종 역, 북한의 협상전략(Over the Line) (서울: 한울, 1999).
18 _ 본 내용은 역사적 사실관계이기 때문에 주로 1991년부터 2007년까지 발행된 통일연
구원 연례정세보고서인 통일환경과 남북한관계 및 통일환경 및 남북한관계 전망
을 기본 자료로 하고, 서훈, 북한의 선군외교 (서울: 명인문화사, 2008)를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한 것임.
채취한 샘플을 정밀 조사한 결과 최소 3회(1989년, 1990년, 1991년)에 걸쳐 총 8kg의 플루토늄이 추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국제원자 력기구는 1992년 12월 12일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규명하기 위해서 영변 핵 단지 내에 있는 두 군데의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 했으나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요구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원자력기구는 1991년 9월 12일 핵안전협정 승인 및 협정서명을 촉구했으나 북한은 한반도비핵지대화를 주장하면서 맞섰 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 소멸시까지 3단계 미군 철수안을 보류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난국타개를 위해 북한은 김용순 노동당 국제부장을 미국에 보냈다. 19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조선노동당 국제 부장이었던 김용순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었던 캔터가 최초로 북·
미간 고위급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미국이 한반도내 핵무기 철 수를, 북한은 핵안전협정 서명 계획을 밝혀서 양국관계가 개선될 것으 로 보였으나 양국간 회담의 격문제로 좋은 결실은 보지 못했다. 다만 추후에 김용순이 주한미군 성격변화를 전제로 미군남한주둔을 용인하 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북핵문제는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새로 운 국면에 돌입하였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 하자 미국은 1993년 3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고, 주한미군의 2단 계 철수를 동결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11일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빌미로 NPT 탈퇴를 선언했고, 거의 3개월 동안 심각한 위기상황이 조 성되었다. 제1차 북핵위기는 1993년 6월 2~11일까지 뉴욕에서 진행된 제1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6·11 합의를 도출하면서 대화국면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간에는 북한내 핵사찰 문제와 관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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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드디어 국제원자력기구는 1994년 3월 15일 사찰단을 철수시키면서 북한의 핵 활동을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위기는 1994년 6월 15~18일 사이에 카터 미국 전 대통령 이 김일성 주석과 북핵문제의 대타협을 이루어낼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시기에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고, 군사적 제재 방안을 검토한 후 실행을 준비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은 심각한 위기상황이 조성되었다.
북·미 양국은 1993년 7월 14~19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2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남북 대화와 북한-국제 원자력기구간 대화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북한과 국제원자력기 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방식에 대한 합의를 시도했고, 8월 3일 국제 원자력기구 사찰단이 방북했다. 북한은 북·미 합의에서 국제원자력기구 의 사찰에 동의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가 사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과 거 핵 활동 규명을 위한 핵심적 절차인 샘플채취와 감마매핑을 방해함 으로써 또다시 위기를 고조시켰다. 국제원자력기구는 9월 이사회와 10 월 1일 총회에서 북한의 핵사찰 수락을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11 월 1일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에 대한 북한의 협 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국제원자력기구와 북한은 1994년 1월 7일~2월 15일까지 7차례의 사찰협상을 개최했고, 국제원자력기구가 요구하는 7개의 신고시설에 대한 핵 사찰 실시에 합의했다. 북한은 최대 쟁점이었던 방사화학실험 실 사찰문제와 관련해서는 샘플채취를 포함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을 수용하는 것에 합의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94년 2월 25일 북·미 합의와 북한-국제원자력기구 합의에 따라 사찰단을 파견했다. 북한은 사찰활동이 개시되자 모든 합의를 깨고, 일부 핵심시설에 대한 사찰활
동을 또다시 거부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3월 15일 사찰단을 철수시켰 고, 1994년 3월 21일 특별이사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에 회부하기로 결정했고, 안 보리는 국제원자력기구 특별이사회의 보고에 따라 3월 31일 의장성명 을 채택했다.
북한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이 중단됨에 따 라 유엔은 대북제재의 실행을 논의했고, 미국은 병력증강을 포함한 군 사적 조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1994년 3월 21일 유사시에 대비하여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조기 배치하고 1994년도 팀스피리트 훈 련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전군에 특별경계강화 명령을 시달했 다. 미 국방부는 북한이 유엔의 제재 조치에 반발하여 군사 도발로 맞서 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한국 내 주한미군 기지에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등 첨단무기들이 배치되었 고, 비상용 군수물자도 비축되었다. 한국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한 공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강석주를 통해서 5월 12일부터 연료봉 인출작업을 시작했다 고 미국에 통보했다. 북한은 5MW 원자로의 연료봉 인출작업을 단행함 으로써 과거 핵 활동을 입증할 수 있는 플루토늄 추출기록을 없애버리는 벼랑끝전술(brinkmanship)을 펼쳤다. 제1차 북핵위기에서 최악의 위기 상황이 조성되었고, 미국과 국제사회는 대북제재의 실행을 준비했다.
안보리는 5월 31일 의장성명을 채택했고, 국제원자력기구는 6월 2일 5MW 원자로의 계측 가능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안보리에 보고했다.
국제원자력기구 특별이사회에서는 6월 10일 북한에 대한 일체의 핵관 련 기술 지원을 중지하고 북한에 대해 안전조치와 관련된 모든 정보와 장소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것을 촉구하는 대북한 제재조치를 결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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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북한은 6월 11일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로 맞섰고, 유엔의 제재를 전 쟁으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무력대응 가능성을 시사했다.
북·미 관계는 또다시 초긴장상태로 돌입했다.
미국은 유엔의 대북제재 조치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군사적 대응방안 의 실행을 준비했다. 대북제제의 실행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카터 미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과의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제 1차 북핵위기는 또다시 외교적 협상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나. 제2차 ‘핵위기’ 이후 북·미관계
2001년 1월 등장한 부시행정부는 강한 대북 압박 정책을 채택하였다.
클린턴 정부가 취했던 대북 개입정책은 소멸되고 ABC(Anything but
Clinton)차원에서 대북 압박정책이 등장하였다. 이런 가운데 9·11테러
사건이 발생하였고, 미국 국민들의 반테러정세에 편승한 부새 정부의 테러 및 테러지원국가들에 대한 압박은 전례없이 강력하였다. 드디어
2002년 1월에는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대통령
연두교서가 발표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2002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방북한 미국의 켈리(James Kelly) 특
사 일행은 대북 협상 첫날 김계관 부상에게 제네바 기본합의, 테러리즘, 재래식 무기, 미사일, 인도주의와 인권문제 등 부시 행정부의 대북 관심 사를 설명하였다. 또한 켈리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통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비밀계획을 시작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강석주 등 북한외교관리들은 1일간의 숙의후 에 핵보다도 더 한 것을 가지게 돼 있다라고 시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19 미국은 이러한 사실을 켈리 특사가 워싱턴에 복귀한 후 11일 만에 대내외에 공표함으로써 제2차 핵위기가 시작되었다.
북한이 제네바협정의 내용을 준수하지 않았고 핵확산금지조약, 한반 도비핵화공동선언, 국제원자력기구의 전면안전조치협정 등과 같은 국 제적 합의를 위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02년 10월 7일 외무성대변인은 “미국의 강경압살정책에 대해 모든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대변 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북한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불가침을 확약하며 북한의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조건에서 핵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KEDO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10월 20일 미국 은 “북한의 HEU 핵개발 시인으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 것으로 간주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KEDO이사회는 11월 15일 대북 중유공 급 중단을 선언하였다. 12월부터 KEDO는 중유 공급을 중단했으며 경 수로 건설 공사를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북한에게 고농축우 라늄 프로그램의 폐기를 요구했다.
북한은 12월 21일부터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을 빌미로 영변 핵 시설 의 동결을 해제했고, 22일에는 핵시설에 설치한 국제원자력기구 감시카 메라와 봉인을 제거하고 25일에는 5MW원자로 시설에 새로운 연료봉 을 반입하였다. 29일에는 외무성 대변인이 NPT탈퇴 가능성을 시사하 였고, 31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요원들을 강제 추방했다.
이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 특별이사회는 2003년 1월 6일 북한의 핵 시설 감시체제 복원을 촉구하는 대북 결의문을 채택했다. 북한은 2003 년 1월 10일 성명을 통해 NPT 및 IAEA 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이라크전쟁에 몰두한 미국이 북한에 대한 강경조치를 취할 수 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