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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간접체험자로서의 의미

<자기록>은 주로 어머니와 남편의 질병 체험을 지켜본 저자의 기록이 다. 따라서 질병체험서사가 아닌 질병의 간접체험서사의 성격을 지닌 다. 주목할 점은 저자가 질병의 목격자나 관찰자로서 환자들의 질병을 단순히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와 남편의 질병 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보살피며 간접적으로 체험을 하고 있다. 때문에

<자기록>은 단순한 목격서사나 관찰서사가 아닌 질병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의미를 갖는 간접체험서사라 할 수 있다.

1. 증언으로서의 의미

질병체험서사의 대부분은 저자의 삶을 한순간에 바꾼 어떤 사건에 대 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81) <자기록>은 어머니와 남편의 비통한 죽음 이란 사건에서 서사를 시작한다. 이어 어머니와 남편을 여읜 비극과 설 움이 가득한 자신의 삶을 한탄한 뒤 창작의도를 밝힌다. 저자는 어릴 적 의 행적, 특히 친정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이 잊히는 것이 서러워 글을 대강 기록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아버지의 인자하고 명철함을 전하 81) John Wiltshire, “Biography, Pathography, and the Recovery of Meaning”,

Cambridge Quarterly 29(4), 2000, p.414.

며, 자신의 궁박한 팔자와 혼인으로 느낀 모든 설움, 특히 남편 투병의 과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질병서사의 창작 과정에서 질병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자기록>에서 질병체험을 떠올리는 과정이 얼마나 고 통스러운지는 거듭 나오지만 특히 본문 맨 마지막 문장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쓴다고 고백하는데 이 대목을 통해 질병체험을 기억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격한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조용히 물러나 있는 가운데 옛날 일을 추모하니 세세하게 눈앞에 벌어 져 하늘 끝에 닿을 듯 가없는 설움이 새로워 나의 어릴 적에 있었던 행 적만 대강 기록한다. 그때 내가 어렸을 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온갖 좋은 점을 갖추어, 막힘없는 식견과 활달한 도량에 깊고 신중한 지혜로 모든 일을 시기에 맞게 하셔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이 많았 으니 어찌 다 형용하여 기록할 수 있겠는가. 겨우 만에 하나를 기록하고, 아버지의 남보다 인지하고 명철하신 두어 가지 일을 올린다. 그리고 다시 나의 궁한 팔자와 혼인으로 느낀 설움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 능히 기억 하지 못할 것이라 혼인하고서 남편이 병을 앓기 시작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일을 당하기까지의 대강을 기록한다. 내가 갈아 있는 동안 두고 보면서 눈앞의 일같이 잊지 말고 또 뒷사람들에게 옛 일을 알게 하고자 잠깐 기록하나, 정신이 황량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그리 자세하지 못하다.

(13~14면.)

선행연구에서 <자기록> 창작의 핵심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을 초래한 어머니, 남편과의 관계와 거기 따르는 경험, 그들이 저자의 삶에 남긴 발자취를 ‘성실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 지적하며 이때 ‘기억’이 란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82)

위 논의는 인물을 ‘기억’하기 위해서 기록을 남겼다는 점을 창작 의도 로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 82) 홍인숙, 앞의 논문, 2016, 91-92면.

고 있다. <자기록>이 자신만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호킨스는 질병서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질병체험을 알려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했다.83)

또한 프랭크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큼이 나 타자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아픈 사람의 이야기하기 는 타자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나타내며, 이를 통해 타인을 인 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84) 이처럼 청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 픈 사람의 이야기가 전달된다는 점은 질병서사의 사회적 측면이라 하겠 다.85) 아울러 호킨스와 프랭크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기본적으로 증언적인(testimonial)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질병서사로서 <자기록> 창작의 핵심 의미는 무엇인가? 인용 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자는 어머니와 남편의 죽음과 관련되어 자 신이 겪었던 모든 설움과 고통을 뒷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고 지적한다. 저자에게 뒷사람 가운데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 게 될 사람이 있다면 저자가 남긴 질병서사를 통해 그들의 고통과 아픔 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가족의 죽음 과 관련된 감정을 기억하기보다 환자를 약으로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한 다는 것, 의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것, 질병의 증상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 등 다른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자기록>을 창작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86)

한편 <자기록>의 증언적인 성격을 다른 측면에서 논의할 수도 있다.

저자는 남편의 발병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 는지, 예컨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인 일까지 낱낱이 기술하고 있다. 열 녀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자기고백에서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83) Hawkins, Anne, 위의 책, pp.10-11.

84) Arthur Frank, 위의 책, pp.17-18.

85) 위의 책, p.3.

86) 이렇듯 <자기록>은 현대 한국의 투병기와 상당히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 다. 황임경은 여러 투병기를 분석하면서,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이타적인 의도로 쓴 글이 대부 분임을 밝혔다. (황임경, 앞의 글, 2011, 77-78면.)

치유하고자 하는 고백의 심리를 읽을 수 있지만, 역으로 고백을 통해 후 손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특정한 형상’으로 보여주려는, 다 른 국면의 고백의 심리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여필종부의 유교 윤리를 온몸으로 체현하고자 하는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 을 수 있다고 여기는 일종의 편집증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환자나 간병인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질병체험 을 알려주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질병서사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87) 그렇다면 <자기록>의 독자는 누구일까? 질 병서사로서 <자기록>을 읽었던 독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있다. <자기록>의 맨 마지막 필사기는 친정언니가 남긴 것인 데, 언니는 ‘이 책을 보고 제문을 베끼니 마음이 더욱 감회에 젖어 능히 슬픈 눈물을 금치 못하리로다’88)라고 했다. 능히 슬픈 눈물을 금치 못한 다는 맨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의 언니가 책을 베끼며 저자의 체험을 떠 올리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언니가 물론 동생이 겪은 질병의 체험을 하나의 증언과 정보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 았겠지만, 언니가 베낀 책의 내용은 다른 사람에게는 일정하게는 증언과 정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2. 분노로서의 의미

풍양 조씨의 남편은 본래 튼튼하지 못했다. 남편은 쌀쌀한 날씨에 사 람들이 붐비는 과거장에서 오랜 시간 머문 것이 원인이 되어 잔병을 얻 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록>은 발병의 원인에 집중하기보다 질병이 악 화된 원인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선행연구는 남편의 사소 한 병을 방치하여 악화시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시아버지와 시할아 버지에 대한 저자의 반감과 불만, 원망을 부각시켰다.89) 저자는 남편이 87) 최근에 들어 질병서사의 독자가 더욱 늘고 있는데, 이는 질병서사의 독자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Hawkins, Anne, 위의 책, p.10) 88) 풍양 조씨 지음, 김경미 역주, 앞의 책, 142면.

89) <자기록>에 나타난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박옥주 (2001, 앞의 글, 179-180면)와 홍인숙(2012, 255-257면)의 논문에서 살핀 바 있다. 또한 저자와 관계성의 측면에서 시어른들의 모습을 검토한 연구는 홍

과거장에서 병에 걸려 집에 들어와 썰렁한 사랑방에서 어른을 모시게 되 면서 질병을 악화시켰다고 서술했다. 남편이 매일 아침 어머니 방에 들 어와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사정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찬 것이 낫 다고 여기는 시어른들 두 명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병이 악화되 었다는 것이다. 시어른들은 병이 깊어지는 남편을 보면서도 약재를 복용 할 필요가 없으며,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서사 초반 저자는 남편의 질병을 악화시키는 모든 요인을 말하며 시어 른들의 태도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남편의 질병이 위중한 상황 에 이르자 저자는 쌓인 불만과 원망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 시작한다.

다음 인용문은 저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핵심 대목이다.

시아버지, 시할아버지 두 어른이 처음부터 중한 줄을 모르고 의원이 증 ㅅ가 중하다고 일러도 충동질하는 것으로 알고 의원의 말을 구태여 안에 이르지 않으신 것이다. 다만 눈앞에서 병이 오래 낫지 않는 일이 민망하 고 근위가 가볍지 않은 것을 애태웠으나 차마 어찌 위독하다 여겼겠으며, 등장 밑이 어둡다고 경중을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우연히 염려하다가 편지를 보니 친정아버지는 병중을 많이 겪어서 밝은 식견으로 자세히 관 찰한 것이 한 집에서 늘 보는 사람과 달라 반드시 일의 실마리를 폴 도 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71-72면.)

호킨스가 말한 분노 투병기는 1980년대에 의학이나 의료에 대한 불만 족을 토대로 쓰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의료행위와 관련된 다른 요소를 비난하는 분노 투병기 또한 존재한다. <자기록>의 경우 저자는 의학지 식의 부족으로 의료행위를 부정하는 시어른들에 분노하며, 남편을 제대 로 간호하고 치료하지 못하는 그들의 실패를 지적한다. 저자는 남편의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시어른들이 결국 질병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남 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셈이다. 이렇듯 <자기록>

은 시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담은 서사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인숙(앞의 글, 2016, 87-91면)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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