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심:疑/ M

문서에서 월간 審評(심평) 제54호 (페이지 36-41)

= 幻

앗,이')비무야 ) 느方

—之

어시산^가다 A A _ 5

너 g 백잘이 고와서 ) { 멋셔부외다!,'

丄=딱쁵己 어조『

음乂

2 아주 멋신'데아

D 음.'/

네,'화사오다보니

너무 예봐서

몆개와나' g X"

A

•<-

丁이 부장님이 붙여놓으신기

rSM 分// >

>(가이

>2

fZ/iu

0 합니다!!

P

b? 폐%^ II

• 6 W

g X 1} ① b 玄

fcx

= —노란효오 %『自

열심 ii' 하라는''경고고

ZWW 더심한

호잔효느

문화와 여행 고전의 빛 •소리 •향

어 사

박 문 수

이 야 기

낙조가 석양을 토해내며 푸른 서산에 걸리니 금까마귀들 흰구름 사이률 자척재尺I로 날아가네 목장의 소들은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망부대에선 아낙네가 머리쪽을 낮추어 멀 리 바라보는데 나룻터 묻는 나그네의 회초리는 급해지고

절을 찾아 돌아가는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가 않구나 고목나무 푸른 연기 피어나는 시냇가 남쪽 마울에 짧은 초동이 피릣블며 유유자적 돌아오네 落照吐紅抵g 金빼尺進白雲間

.放牧園中牛帶影望夫始上妾低«

問津.® 客戰應急 專寺歸僧杖不閑 蒼ffltt木漢南里 短髮#童罪Sig

박문수(1691〜1756)어사才 과거보러 가는 길에 칠장사란 절에 들러 조청을 바치고 일곱나한에게 꿈에 얻어들은 싯구로 과거급제한 시#이다. 참으로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풍경화이다.

후에 호남지방과 영 남지방으로 암행의 길을 떠나는 전날 밤에 그를 전송하려》온 친척되는 사람 이 “경상도 함양땅에 가면 과부된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이진사라는 자가 있는데...” 하는 말을 무심코 했다. 며느리를 데리고 산다? 박문수는 이 말이 며느리를 보통으로 데리고 산다는 뜻이 아님을 짐작하고 기 억해 두었다.

며칠 후 박문수는 함양땅에 들어섰다. 드디어 주인을 찾아 들어가니 이진사는 뜰에서 며느리와 함께 멍석을 펴고뽕잎을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며느리의 나이는 삼십이 못 된 듯한 아름다운 여 자였고 이진사는 육십이 가까워 보이는 중노인으로서 속이야 어떻든지 아담스럽고 맑은 인물이 었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노자도 떨어지고 몸도 피로해서 댁에 좀 머물게 해주셨으면 고맙겠 습니다.” 하며 박문수가 청을 하자의진사는 아무런 불편한 기색이 없이 손님을 사랑채로 인도했 다. 그리고 저녁 대접이라든지 모든 것이 매우 친절했다. 더욱이 밤에 사랑에 나와서 상대해 주는 이진사의 행동을 보니 상스러운 티나 탐욕스런 기색없는 결백한 장자{長者)같았다. 글에도 포부 가 깊고 시사에도 식견이 높았다. “뵙건대 퍽 고독하신 듯 한데 동네 사람들과 상종을 하시며 어 울려 지내시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진사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그저 불민하여 동네 사 람들과 잘 어울려지질 않습니다.” 할 뿐 자세한 대답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동정이나 더 살

펴보리라 생각하고 박문수는 베개에 의지해 있는데 이진사는 “그럼 나는 내 처소로 가겠소이다.

피로하신데 일찍 주무시오.” 하며 이부자리를 펴 주고서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가 어느 방으로 가나하고 박문수가 문틈으로 내다보니 이진사는 윗채에 딸린 머릿사랑으로 들 어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바야흐로 이진사와 그의 며느리와의 실제 행동을 정탐할 참이었다.

며느리가 어느 방에 거처하는지 문을 살그머니 열고 이 집의 내부구조를 살피었다. 안마당 저쪽 나무 틈으로 등불이 새어나오는 곳이 안방이며 시아버지가 자는 머 릿사랑에서 윗방들과 대청 하 나를 건너서 멀직하게 떨어져 있는 그 안방이 며느리의 방임이 분명하였다. 박문수는 다시 문을 반쯤 닫고 그 문틈 옆에 앉아서 뚫어져라 윗채 머 릿사랑의 동정을 살피 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첫닭이 •꼬끼요’ 하고 울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과연 이진사가 사랑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옳다. 저자가 안방으로 들어 가려나보다’ 박문수는 이진사의 뒤라도 밟아 들어갈 듯이 긴장한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이진사는 일단 유건을 쓰고 담뱃대를 든 자태 로 안마당으로 내려서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저쪽 들창문 옆으로 옮 겨가서 역시 문틈으로 내다 보았다. 이진사는 울창한 뽕나무 사이로 자기집 주위를 한바탕 돌아 다니는 모양이었다. ‘사방에 인적이 없음을 살피고 나서 안방으로 들어가겠지’ 이렇게 추측한 박 문수는 이 틈을 타서 재빨리 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서서 안방쪽으로 갔다. 안방은 두 칸이나 되는 큰 방이었다. 박문수는 다시 그 방 앞마루 밑으로 들어가 엎드려서 숨결을 죽이고 엿보고 있 었다. 과연 이진사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서 안방 마루 아래 댓돌 위에까지 올라섰다. 그리고는

‘에헴 에헴’ 하고 가벼운 기침을두 번 했다. 그래도 며느리 방에서는 아무 동정이 없었다. 시아버 지는 다시 담뱃대를 가지고 똑! 똑! 마루를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에 안방 문이 열리며 술상이 마루로 나오는 것이다. 이진사는 술을 두어잔 따라 마시고는 “애기는 잘 자고 있느tr 하고 혼자

말로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자기 방으로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마음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자기도 객실로 나왔다.

이튿날 밤, 박문수는 계속해서 이 집에 묵어서 이진사와 며느리의 행동을 살폈으나 여전히 전날 밤과 같을 뿐 아무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밤낮 으로 누에를 기르기 위해서 안방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 어두운 새벽에 며느리의 방 에 가서 술을 마시는 건 무슨 뜻인고? 박문수는 최후의 실험단계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밤. 박문수는 이진사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장을 하였다. 행장 속에 예비했던 유건이 랑 긴 담뱃대랑 얼굴에 수염까지 붙였다. 박문수는 안방 마루앞까지 가서 “얘야! 얘야!” 하며 가벼운 기침을 했다. 그런 다음에 얼마 있다가 담뱃대로 마루바닥을 똑! 똑! 두드렸다. 그리고서는 혹시라도 며느리에게 정면으로 얼굴이 보여질까 겁이 나서 마루 끝에 걸터앉아서 안마당을 향하여 수염을 쓰 다듬은 다음 왼손으로 볼과 턱배기 언저리를 가리었다. 그러자 전날 밤과 같이 방문이 열리며 며느 리의 술상이 나오는참이었다. 순간박문수는 빠르게 손을 뻗쳐서 그 여인의 손목을 꽉잡았다.쫴

글 박상준(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 역서 :『출삼장기집」,「아비담 비바사론」

문화와 여행 수필

어느홍위병의 의리

(2) 정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J— 많이 전해오고 있다. 친구를 위해 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옛 선비의 이야기라 거나 어려울 때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를 도 와준 이야기들이다. 그런 우정을 찾아보기 힘든 요새 같은 세월에는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단어조차 낯설다

그 옛 이야기 거리 하나를 나는 요새 직접 겪 었다. 그것은 중국 문화혁명 때 목숨을 걸고 선배의 목숨을 건져준 한 홍위병의 이야기다.

중국 상해의과대학 張교수를 만난 것은 15

전의 일이다. 한국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에 중국교수들 몇이 초청을 받아 참석했는데 그때 그들을 내가 점심에 초대한 일이 있다.

다른 중국교수들은 영어를 하지 못해서 벙어 리처럼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張교수는 영어

를 곧잘 했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래 영어는 금기시해 왔기 때문에 대학교수든 학자든 영 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연이 영어 가 통하는 張교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된 것이 친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눈치나 보고 조심성 많은 공산권 사람들과는 달리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그의 모습에 서 호감을 느낀 것도 있다. 그 후 얼마 지나 지 않아서 중국과 공동연구를 하게 되었다.

연구비도 좀 받았던 터 라 張교수에게 공동연 구 제안을 했다. 그는 좋다고 하면서 조건을 하나 내거는 게 아닌가. 후배인 陸교수와 공 동으로 연구할 터이니 그를 연구팀에 넣어달 라는 것이었다. 그야 어렵지 않으니 그러자 고 했다. 연구 조정을 위해 상해에 갔을 때 張교수는 陸교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언

제나 그를 앞세우곤 했다. 陸교수와 나 사이 에는 張교수가 늘 통역을 해주었다.

그 다음해에 張교수가 한국에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해서 초청을 했다. 외국에 나갈 기회 가 좀처럼 없던 중국 형편을 고려하면 외국 에 나가보는 것이 대단한 행운이었던 시절이 다.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나 연구협력이라 는 명분으로 연구소에서 초청한 것이다.

그때에도 陸교수와 함께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하는 수 없이 둘을 함께 초청했다. 한 국에서 그들과 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 국 대륙의 소식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들과 산정호수에서 지낸 하룻밤은 참으로 오붓한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6.25때 전사

한 한국군, 중공군, 인민군 그리고 유엔군 젊

은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막걸리 잔을들어 건배를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물었다. 당신네 둘은 왜 그 렇게 함께 붙어 다니는가 하고. 나는 陸교수 가 張교수를 감시하는 공산당 당원일지도 모 른다고 의심했다.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고 말을 통 하지 않으니까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이 늘 함께 따라 다니니 이상하지 않은가. 공산당 나라에서 는 외국 학회에 갈 때 교수나 학자를 가장해 서 감시원이 항상 따라붙는 것을 나는 잘 알 고 있었다. 1977년엔가 하와이에서 세계 정 신의학회가 열렸을 때다. 정신과 의사인 소 련의 보건부 장관이 학회에 참석했다. 어떤 중년남자가 늘 따라다녔다. 회의에서 그 장 관이 발언을 할 때 마다 옆에 붙어 앉은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를 사사건 건 물어보고 나서야 그의 지시를 따라 발언 을 하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 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 의과대학 교실에는 교수 아닌 교수가 한 사람씩 각과에 있었다.

그들은 당에서 내려온 감시원인 것이다. 그 러나 직함은 버젓이 교수다.

그러나 張교수의 말은 아주 의외였다. 그의 이야기는 문화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張교수가 상해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과 의국원으로 있을 때 문화혁명이 터졌다. 그 는 홍위병에게 잡혀서 갖은 곤욕을 치렀다.

어린 중 • 고등 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 퇴 학생, 뒷골목 망나니, 학교를 다지지 못한 어 린 건달패 이런 잡동사니들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총을 둘러메고 떼 지어 다니면서 공 부깨나 좀 한 사람, 학교 선생, 대학 교수, 밥 이나 제대로 먹는 사람, 멀끔하게 생긴 사람, 기독교인, 목사와 신부, 스님들을 마구잡이 로 잡아다가 모욕을 주고 때리고 굶기고 심 지어는 찔러 죽이기까지 하던 때였다. 길가 는 사람들을 붙잡고 모택동 어록을 외우지

못하면 잡아갔다. 중학교 학생들이 자기네 선생을 잡아다가 학교 뜰에서 몰매를 주기도 하고 집안 어른들을잡아다 패기도 했다.

張교수는 의사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 요, 거기에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처 지이니 단연 숙청 1호 감이다. 갖은 고초를 겪다가 동북지방으로 끌려갔다. 그것도 상 해에서 흑룡강까지 걸어서 간 것이다. 도증 에 굶어죽거나 맞아 죽은 사람도 수두룩했 다. 거기서 그는 채찍을 맞아가면서 중노동 을 해야 했다. 이때 陸교수는 상해의대 학생 이었다. 자기를 귀여워해주던 선배 張교수 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陸교수는 홍위병 에 자원했다. 붉은 완장을 팔에 차고 총을 들 고 중국 동북지방으로 향했다. 張교수를 찾 으러 나선 것이다. 여러 곳을 여러 달 헤매다 가 드디 어 張교수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 고 張교수를 빼내서 함께 상해로 돌아온 것 이다. 돌아온 즉시 총을 버리고 붉은 완장을 찢어 버렸다. 이 때 陸교수의 행동은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만일에 그 사실을 누군가 가 알아차리고 고발했더라면 陸교수도 처형 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張교수의 말이다. 이렇게 생명을 걸고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데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겠 는가. 평생을 떠받들어도 그 은혜는 갚을 길 이 없다는 것이다. 陸교수가 의대를 졸업하 고 정신과에 입국한 것도, 그 후에 교수가 된 것도 모두 張교수의 덕이었다. 논문을 하나 써도 육교수의 이름을 반드시 넣어주었고 초 청받아 강연을 할 때에도 강연자 이름에 그 의 이름을 넣고서 늘 그와 함께 가곤 했다.

외국에 나갈 기회가 좀처럼 없던 시절에 張 교수는 기회만 있으면 그를 모시고 다녔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나서 陸교수를 공산당의 감시원쯤으로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 웠는지 모른다. 그들과의 인연은 계속되었 다. 공동연구를 계속해왔는데 그 결실이 국

제 유명 학술지에도 여러 편 실렸다. 지난해 에는 서울에서 자그마한 국제학회가 열렸 다. 중국 본토에서 학자를 한 사람 초빙해서 초청강연을 듣도록 되어 있었다. 상해의 張 교수를 초청하기로 했다. 기꺼이 응하겠노 라 하면서도 조건을 또 건다. 陸교수도 함께 초청해달라는 것이다. 학회에서 한 사람만 초청하기로 했고 예산도 한 사람 분만 책정 되어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나 張교 수의 고집은 대단했다.

<당신이 회장으로 있는 국제학회이니 당신 이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느냐. 그렇게 될 것 으로 알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혼자서 는 오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난처해 진 것은 나다. 그들의 사연을 잘 아는 처지에 마다할 수도 없고 둘을 다 초청하자니 경 비 도 갑절 든다. 준비위원들을 설득하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하는 수 없어 陸교수의 초청 경비는 내가 사비로 충당하기로 하고 두 사람을 정식 초청하기로 하였다.

한국에 오면 어 디를 구경하고 싶으냐고 물었 더니 제주도를 가보고 싶단다. 이것도 내가 사비로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에 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만 나고 싶고 뭐든 도와주고 싶은 것은 그들의 소중한 우정과 의리에 감동해서이다. 그들 을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대견하고 흐뭇 해진다. 그런 우정을 평생 나누고 있는 그들 이 몹시 부럽기만 하다.

중국사람들의 의리는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홍위병 난동 때도 그런 아름 다운 우정이 있었고 그 우정을 평생 잊지 않 고 보답하는 의리가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동스러웠다. 그들의 우정과 의리가 오가 는 길목에 내가 가끔 서 있었다는 것도 소중 한삶의 체험이었다.

O

김광일김광일신경정신과 원장 - 한양대학교 명예 교수

일러스트 박공우

문서에서 월간 審評(심평) 제54호 (페이지 36-41)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