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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하류 지역사회의 대중국해상교섭 전개

문서에서 南海 沿岸 地域과 韓中交流 (페이지 91-95)

사회에서 낙동강의 역사적인 역할을 검토한 글도 있으나,3) 중국과의 교섭 실태나 시 기별 변동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한 해명4)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 히 기존 연구에서는 중국이나 漢나라 군현과의 교섭과정에서 수용된 문화적 성격에 대해 단편적으로 또는 제한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기원 전후 시기부터 고려초기까지 낙동강하류 지역사회가 전개한 대중국 해상교섭의 실체와 변동 과정을 검토하기로 하였다. 우선, 낙동강하류지역이 기원전 이래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문화적 중심부로 발전하 는 과정을 검토한 다음, 4세기 이후 국내의 정치권력의 변동에 따라 이 지역이 주변부 로 전락되는 과정과 그 요인을 진단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들 내용을 토대로 이 지 역사회에 유입된 중국의 문화적․경제적인 내용과 성격을 분석해 볼 것이다.

山․咸安․草溪․昌寧․漆原․鎭海․宜寧]는……7)

창녕․함안과 창원․밀양을 비롯하여 양산․김해를 낙동강의 하류지역으로 설정하 고 있다. 이 범위는 현재 창녕지역으로부터 김해․양산․부산 지역까지를 하류권역으 로 설정하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8)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글에서도 낙동강 하류의 지역적 범위를 창녕으로부터 김해․부산까지 설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 다. 이 지역은 고대 가야문화권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이들 하류지역 가운데 김해․양산지역에 포함되었던 海陽江과 伽倻津․黃山江 및 三叉江9)은 농경문화의 발전과 함께 대외교섭을 기반으로 고대사회 때부터 소국 단계 인 구야국을 거쳐 금관가야로 성장할 수 있었다.10) 이들 지역은 낙동강과 동․남해 연안지역이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지리적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대사회로 부터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역할하는 동시에 대외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다). 倭人은 帶方郡의 동남쪽에 위치한 큰 바다의 가운데 있다.……(낙랑․대방)군으로부 터 왜까지는 해안의 물을 따라 간다. 韓國을 지나 남쪽과 동쪽으로 잠시 가다 보면 그 북 쪽의 해안에 있는 狗邪韓國에 도달하는데 7천여리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바다 를 건너 1천여리에는 對馬國에 이른다.11)

이 내용은 중국의 문헌인 三國志의 기록으로, 3세기 중엽의 역사적 사실이다. ① 에서는 대동강․예성강 유역의 樂浪郡․帶方郡으로부터 서해 아산만 일대의 韓國과 김해의 狗邪韓國을 거쳐 對馬島․倭에 이르는 연안해상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다.12) 이 로써 김해의 구야국은 3세기 중엽에 대동강․예성강 입구 ↔ 서해연안 ↔ 서․남해연 안 ↔ 동․남해연안 ↔ 대마도 ↔ 왜를 연결하는 해상 연안교통의 중요 거점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야국은 확보된 서․남해의 연안교통로를 통해 이들 지역과 문화적 교류를 전개하였다.

라). (弁辰의) 나라에서는 鐵이 생산되었다. 韓․濊․倭가 모두 와서 이를 구해간다. 모 든 매매는 철을 두루 사용하였는데 마치 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한 樂浪郡과 帶 方郡의 두 郡에도 공급하였다.13)

7) “其中洛東江之下流沿江各官[金海․昌原․密陽․梁山․咸安․草溪․昌寧․漆原․鎭海․宜寧]”( 세종실록권150, 지리지, 경상도).

8) 낙동강의 권역은 상류를 태백으로부터 상주지역까지, 중류를 선산부터 고령․대구 달성까지, 하 류룰 합천․창녕부터 김해․부산까지로 각각 구분하고 있다(낙동강네트워크 : http://www.nakdongriver.or.kr),

9) 세종실록권150, 지리지, 경상도.

大東輿地圖(부산광역시․부산대학교, 釜山古地圖, 2008, 166쪽).

大東方輿全圖(부산광역시․부산대학교, 釜山古地圖, 2008, 167쪽).

10) 李在賢, 加耶地域出土 銅鏡과 交易體系 韓國古代史論叢9, 2000.

11)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 餘里, 始度一海, 千餘里, 至對馬國.”(三國志권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제30, 倭).

12) 姜鳳龍, 3~5세기 榮山江流域 ‘甕棺古墳社會’와 그 性格 歷史敎育69, 역사교육학회, 1998.

李釩起, 考古學資料를 통해 본 古代 南海岸地方 對外交流-貨幣와 卜骨을 中心으로- 지방사 와 지방문화9-2, 2006, 125쪽.

라)에서는 弁辰의 소국들이 3세기 중엽에 서․남해의 연안교통로를 통해 철이라는 중요 전략적 물자를 교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김해 지역은 주변 에 우수한 철광석 산지가 다수 분포하는14) 등 철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소국 가운데 구야국이 교역과정에서 중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김 해의 구야국은 3세기 중엽에 이미 대마도․왜 및 韓國과 더불어 중국 漢나라 군현인 낙랑․대방군을 비롯하여 낙랑․대방군의 위에 있던 濊지역과도 서․남해의 연안교통 로를 통해 철을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해지역의 구야국은 3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미 서․남해의 연안교통로를 확보하여, 漢나라의 군현지역이나 중국과 인적․물적 자원을 교류하면서 다양한 선진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김해지역이 3세기 이전에 해상교통의 중요 거점지역으로 역 할한 사실은 1세기에 허왕후가 배를 통해 낙동강 하류의 입구인 김해지역으로 도착하 였으며,15) 신라의 脫解尼師今이 금관국의 바닷가를 거쳐 진한의 阿珍浦(지금의 경상북 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도달하였다16)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해나 그 주변 지역에서 기원 전후의 중국계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낙동 강하류지역이 3세기 중엽 이전부터 이미 해상교통로를 통해 중국이나 한군현지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해지역과 인접한 창원 다호리 1호의 星雲文鏡과 김해 양동리 1․2의 方格規矩四 神鏡․四乳獸帶鏡․內行花文鏡이 각각 기원전 3세기 말~기원전 1세기 중엽에 중국 前漢․新․後漢 때 제작된 漢나라의 청동경이며,17) 김해 양동리 제322호 나무덧널무덤 에서 출토된 “谷口宮鼎 容一斗 幷重十七斤七兩 七”이라는 漢나라 예서체의 명문이 새 겨진 銅鼎도 前漢 전기의 유물이다. 또한 漢나라 무제 재위 4년(기원전 119년)부터 주 조되어 수나라 때까지 사용된 五銖錢이 다호리 1호과 창원의 성산 조개더미에서 발견 되었는데, 기원전 1세기 후반과 기원전 1세기로 파악하고 있다.18) 또한 다호리 유적에

13)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三國志권30, 魏書 30, 東夷傳 제30).

14) 金泰植, 伽倻의 社會發展段階 한국고대국가의 형성, 한국고대사연구회, 1990.

15)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

16)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

17) 鄭仁盛, 낙동강 유역권의 細形銅劍 文化 嶺南考古學22, 1998, 56~59쪽.

한편 다호리의 유적은 김해지역과 하나의 동일 단위지역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발전과정-木槨墓의 출현배경과 관련하여- 嶺南考古學17, 1995, 23쪽.

18) 朴敬源, 金海地方出土靑銅遺物 考古美術106․107합호.

김해시,金海의 古墳文化, 1998.

이건무․이영훈․윤광진․신대곤,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Ⅰ) 고고학지 1, 한국 고고미술연구소, 1989.

최몽룡, 서남구패총 발국조사보고 마산외동성산패총발굴조사보고,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1976.

金京七, 南韓地域 출토 漢代 金屬貨幣와 그 性格 湖南考古學報 27, 2007, 110쪽.

서 발견된 칠기류와 붓 등도 이 지역이 한나라 군현과 다양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려 준다.19) 이처럼 김해지역과 그 인근지역은 기원전부터 해상교섭을 통해 중국계열의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김해 양동리와 함께 대성동에서 발견된 銅 鼎은 漢나라 때 이전에 중국 중부 이남에서 생산된 것으로 중국계 주민의 망명으로 입수되었다20)고 해석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중남부지역과도 직접적인 해상교류 를 전개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3세 기 무렵 중국의 존재가 변한․진한사회에 알려지고 철기기술의 일부가 전래되었을 개 연성도 있다21)는 점에서, 낙랑군․대방군이 설치되기 이전인 漢나라 초기에도 중국과 직접적인 교통이 있었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1~4세기의 유적인 김해 회현리의 조개더미에서는 탄화미․貨泉이, 1~

2세기경의 유적인 김해 부원동에서는 卜骨과 탄화미 등이 각각 발굴되었으며,22) 낙동 강에서 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오른쪽에 위치한 진해 웅천의 조개더미에서는 1~2세기 경의 복골이 발굴되었다.23) 이들 유물은 중국 계열의 문화이다. 벼농사는 중국 華中지 역에서 바다를 건너 전래되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점24)을 고려한다면, 김해지역 역시 서․남해의 연안교통로를 통해 중국 중부지역으로부터 벼농사 기술을 수입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우리나라의 卜骨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나라 군현을 거 쳐 서․남해의 해로를 통해 유입된 점복문화로, 부산 동래 낙민동․영도구 조도와 창 원 남산 및 김해 봉황동 등 낙동강 유역권의 조개더미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25) 그리고 화천은 新나라의 王莽이 14년부터 발행하여 40년까지 유통된 화폐로, 1세기 후반의 회현리의 유물26)을 비롯하여 중국화폐는 중국이나 漢나라의 군현지역과 해상교류27)를 통해 유입되었다. 따라서 김해지역은 기원후 1~2세기까지도 서․남해 의 연안교통로를 통해 중국이나 한나라의 군현지역과 인적․물적 자원의 교류를 지속

19) 李釩起, 考古學資料를 통해 본 古代 南海岸地方 對外交流-貨幣와 卜骨을 中心으로- 지방사 와 지방문화9-2, 2006, 135~136쪽.

20)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발전과정-木槨墓의 출현배경과 관련하여- 嶺南考古學17, 1995.

21)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발전과정-木槨墓의 출현배경과 관련하여- 嶺南考古學17, 1995, 19 쪽.

“眞番旁衆(辰)國欲上書見天子”(史記권 115, 朝鮮列傳 55).

22) 동아대학교 박물관, 金海府院洞遺蹟, 1981.

23) 金廷鶴,, 熊川貝塚硏究 , 亞細亞硏究10-4, 1967.

24) 안승모, 한반도 벼농사 기원에 관한 재논의 한국고대사논총9, 가락국사적 개발원, 2000.

25) 崔盛洛, 韓國 原三國文化의 硏究-全南地方을 中心으로-, 학연문화사, 1995.

李釩起, 考古學資料를 통해 본 古代 南海岸地方 對外交流-貨幣와 卜骨을 中心으로- 지방사 와 지방문화9-2, 2006, 118~120․127~131쪽.

永留久惠 , 神と王と卜官 古代日本人の信仰と祭祀, 大和書房, 1997.

26) 金京七, 南韓地域 출토 漢代 金屬貨幣와 그 性格 湖南考古學報27, 2007, 110․117쪽.

27) 중국 화폐의 유입 경로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낙랑군과의 교섭으로 인한 간접적 형태로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정리되어 있다.

金京七, 南韓地域 출토 漢代 金屬貨幣와 그 性格 湖南考古學報27, 2007, 117~118쪽.

李在賢, 弁․辰韓社會의 발전과정-木槨墓의 출현배경과 관련하여- 嶺南考古學17, 1995, 2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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