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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사진 사건의 수행성

1926년 7월 22일 형무소 감방

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자살했다는 소식

이 식민지조선에 알려진 것은 7월 31일이었다

. ‘대역

범 박열의 애인

77)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소식과 함께

,

대심원 판결이유서에서 재판장 마 키노가 대역죄를 저지른 원인으로 언급한 가네코 후미코의 성장 환경이 다시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

78) 공판에서 변호를 했던 후세 다쓰지는 가 네코 후미코를 “사랑과 주의를 박렬과 공명한

,”

최후 판결 때 박열보다 먼저 두 손을 들고 만세를 고창한 “사나희다운 여자

”라고 했다 .

79)

8월

1일 자살 방법

이 ‘속보

’로 전해

졌다

.

염세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해서 여

간수 한 명이 특별히 경계해 왔는데, 22일 오전 6시반경에는 아침볕이 드는 철창 아래서 삼노끈을 잇는 일을 하는 걸 봤는데 6시 40분경에 보 니 철창에 삼노끈으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80) 했다

.

77) <대역범 박열의 애, 복역 중 옥중에서 자살>, 뺷동아일보뺸, 1926.7.31.

78) <자애란 무엇인가 세상은 오 허무>, 뺷동아일보뺸, 1926.7.31; <불경죄수 박열 처, 金 子文子의 적!>, 뺷시대일보뺸, 1926.7.31.

79) <남자다운 여자 上村변호사 담>, 뺷동아일보뺸, 1926.7.31; <주의를 위하야 水火도 불 , 上村변호사 담>, 뺷조선일보뺸, 1926.7.31.

자살 소식이 알려진 후 유해 인도와 관련해 다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

그녀의 사체는 우쓰노미야형무소 측에 의해 서둘러 공동묘지에 가매장되 었고

, 후세 다

쓰지 변호사와 원심창

·

육흥균 등 흑우회 회원 7명이 우쓰노 미야형무소로 몰려가 사인 규명과 사체 인도를 요구했다. 30일 친모와 후세 다쓰지 변호사 등 몇몇의 일행이 공동묘지에서 파내어 31일 유해를 화장하고 후세 변호사 집에 잠시 보관 후 박열의 고향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묘지에 묻을81)

계획이었다 . 그

런데 경찰이 유해를 탈취하려 했고

,

이로 인해 김정근

, 구리하라 가

즈오 등이 검속되기도 했다

.

82) 일본 경시청 은 박열의 가족이 도쿄로 오면 유골의 이송을 허가하겠다고 제안했다

.

83) 흑우회 회원들은 박열의 형 박정식을 일본으로 초청했고

, 8월 14일 경북

상주를 출발했던 박정식은84)

16

일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고

,

85)

29일 가네

코 후미코의 유골을 가지고 식민지조선으로 향했다

.

86)

4-1.

논란과 분란의 생산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

’ 직후인 7월 말 ‘긔

괴한 사진을 첨부한 괴문서

’가

일본의 신문사에 뿌려졌다는 소식이

, 가네

코 후미코의 유해 관련 소식으

80) <아츰해를 바라보면서 麻繩으로 結頸, 남편 박열에게는 절대로 안 알려>, 뺷동아일

뺸, 1926.8.1; <은사에게 보 문자의 서간 발견>, 뺷조선일보뺸, 1926.8.1.

81) <금자문자의 유해는 조선에 매장, 그의 남편 박열의 고향인 경북 상주 화북면에>,

뺷동아일보뺸, 1926.8.2.

82) <금자문자 유해 운반도중 검>, 뺷동아일보뺸, 1926.8.4; <문자의 유해는 시형에게 내

주어>, 뺷동아일보뺸, 1926.8.7; <절도죄로 처분? 문자 유골을 가져간 사람>, 뺷동아일 뺸, 1926.8.7.

83) <문자의 유은 청구강에 永葬. 박정식씨가 동경 도착한 후 받아 가지고 돌아올터

이다>, 뺷조선일보뺸, 1926.8.5.

84) <박열 친형 渡東, 문자의 유을 가지러>, 뺷동아일보뺸, 1926.8.16.

85) <문자 유해 수취, 弟도 면회. 하관에서 박정식씨 담>, 뺷조선일보뺸, 1926.8.17.

86) <금자문자 유해 도, 박정식씨가 가지고>, 뺷동아일보뺸, 1926.8.30.

로 들썩이던 1926년 8월 중순 식민지조선에도 전해졌지만

,

87)

‘긔

괴한 사진

을 첨부한 ‘괴문서

’의 내용

은 확인할 수 없었다

. 1926년 7월 29일부

터 괴문 서 게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긔괴한 사진’이 조성한 의문과 갈등은 끊임없는 기삿거리를 제공했고

, 괴사진의 주인공인 박

열과 가네코 후미코 관련 기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기사가 실리는 지면도 확대되었다

.

이전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수감 소식이나 재판 기사는 주로 신문의 2면에 실렸다

. 그

런데 괴사진 관련 보도는 1면에 실린 경우가

많았고

, 1면과 2면에 동시에 실리기도 했다 . 그래서 1926년 8월 중

순부터

괴문서 게재 금지가 해제된 1927년 1월 20일까지

, 괴사진 관련

기사들은 거의 연일

,

때로 1면과 2면에 동시에

, 뺷동아일보

뺸지면을 덮었다

. 독방

에 수감 중인 두 사람이 ‘긔괴하게

함께 찍힌 사진은 대역 사건 피의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 것이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찍었는가

,

누가 사진을 유출했는가

,

누가 사진을 첨부한 괴문서를 작성해서 신문사에 보냈는가 등을 둘러싼 추리와 사실 확인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

사진 찍은 이는 일찌감치 밝혀졌다

. 도

쿄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다테마 쓰 가이세이

(立松懷淸 )는 사진 찍

은 게 문제되자 1926년 8월 9일 사직서 를 제출했고 1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 그러나 사진을 왜

언제 찍었느냐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계속되었다. 회유책으로 사진을 찍었다고도 하 고

,

88) 예심 종결 후 박열이 “금자문자의 얼굴도 모르는 박열의 집에 두 사람이 같이 박힌 사진 한 장을 보내고 싶다고 여러 가지로 애원

”해서

찍었다고도 했다

.

89) 촬영 시기에 대해 4월 9일이라는 얘기도 나오고,90)

87) <궁내성 사의 수범을 재, 박부부의 괴사진의 정?>, 뺷동아일보뺸, 1926.8.15.

88) <立松 예심판사가 취조 당시에 촬, 의문 중에 있던 박부처의 사진 취조중 판사가

힌 것으로 판명>, 뺷동아일보뺸, 1926.8.25.

89) <박열부처사진 사의 그후, 영 찰라 광경 사진을 박히든 당시의 전광경>, 뺷동아

일보뺸, 1926.8.27.

5월에 찍

은 사진을 절도하여 예심결정서와 함께 형무소에 있던 이시구로

(石

)에게 주었다고 박

열이 자백했다는91) 기사도 나왔다

. 이 사진의 유

출자에 대한 논의도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 다

테마쓰가 예심판사실 책상 서랍에 둔 사진을 서기가 빼서 정당에 팔았다는 의심이 있어 서기가 취조 를 당했고

,

92) 다테마쓰가 박열에게 주었을 가능성과 다테마쓰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박열이 빼돌렸을 가능성 등등이 논란이 되었다

.

독방에 있으면서 따로따로 심문을 받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포즈를 취할 수 있었는지를 둘러싼 논의는 대역죄인을 ‘우대

’한 잘못

으로 논의되었다

.

전 법상

(法

)인 오가와 헤이키치 (小川

平吉

)는 ,

방약무인의 행동을 한 박

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우대하고 감형의 은전을 주청한 책임을 물어 현 법상인 에기 다스쿠의 불신임과 내각 불신임을 거론했다

.

93)

의심과 의문이 일로 확대되자

, 1926년 9월 1일 사

법성이 괴사진 사건의 전말을 발표했다

. 사

법성 보고에 따르면

, 사진은 1925년 5월 2일경 예

심판

사 다테마쓰가 예심 제

5호 조사실에서 촬

영한 것이다

. 다

테마쓰가 막 사진

을 찍으려 할 때 “피고인 문자는 돌연히 피고인 준식의 의자로 덤벼들어서 같이 안고 동시에 준식은 그 왼편 손을 피고인 문자의 어깨에 얹었는 고로 그를 제지하였으나 그들은 그에 불응하였는 바 방심하고 그대로 촬

”했고 심문할 때

박열의 청구에 의해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박열이 교묘

90) <박열부처사진 사건의 그, 인간애로 촬영 사진 박은 날자는 작년 사 구일...立松

氏 담>, 뺷동아일보뺸, 1926.8.29.

91) <문제의 사진은 예심정에서 절취, 진상 일체를 박열 자백>, 뺷매일신보뺸, 1926.9.1.

92) <서기가 절취하여 모 정당에 賣食해>, 뺷동아일보뺸, 1926.8.26.

93) <박열사진 사으로 결국 내각 와해? 촬영시기 문제로>, 뺷동아일보뺸, 1926.8.28; <박

열사진 사건에 정부 총사이 가, 本黨 간부의 의 / 귀족원 태, 박열사진 사 대한 / 박열사진 사건으로 인한 인책 사 단연 불위 / 少壯組 정부 규탄운동

개시, 박열사진 사에 대하야 / 박열사진 사의 정부회 여하로 단연 정계은퇴

川平吉 전 법상 결의 / 박열사진 사건의 책임은 당연, 江木法相에 있다 小川平吉 代일지라도>, 뺷동아일보뺸, 1926.8.29.

히 손에 넣었다94)고 했다

. 9

월 2일 사법성은 추가 설명을 붙였다

. 피고인

들이 5월 2일 결혼식을 올렸다거나 한 방에 기거한다는 것은 ‘허전

(虛傳 )’

이라며,95) 피고인을 ‘우대

’했다는 논의를 일

축했다

.

96)

괴사진 사건에 대한 사법성의 발표는 사진이 찍힌 경위를 밝혔을 뿐

,

그 사진이 어떻게 형무소 밖으로 빼돌려져 괴문서를 작성한 사람 손으 로 넘어갔는지

,

그 괴문서 작성자가 누구인지 등은 여전히 밝히지 않았

. 그래서 논

란이 더욱 가열되었고

,

사법성의 발표는 곧 다른 증거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 괴사진 촬영 시기를 1925년 5월 2일이라고 정부는 주장했지만

,

정우회 측에서는 괴사진 뒤에 박열이 쓴 글 ‘대정십사년 십

월 칠일 차

(此 )를 촬

영하였다

’가 발

견되었다며97)

10월 7일 설을 주장했

. 1926년 12월에는 이치가야형무소 간수 두 명이 사진 유출 관련

자로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98)

4-2.

이야기성 기사의 확장

기사화가 금지되어 괴문서의 내용을 알 수 없던 식민지조선에서는

,

이야기식 기사를 통해 사진의 이동 경로와 이동 가담자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 뺷동아일보

1926년 9월 18일 , 19일 이

틀에 분재된 기사는 기

자가 우연히 구하게 된 이시구로 에이치로

(石

黑銳一郞

)가 쓴

「西下의

94) <박열부처의 괴사진 사건과 사성 당국의 발표>, 뺷동아일보뺸, 1926.9.3.

95) <촬영 시일은 5월 2일 결혼식은 허전, 박쳐의 괴사진사건과 사법성의 제2차

>, 뺷동아일보뺸, 1926.9.4.

96) 연구자에 따라 5월 2일 괴사진 촬영을 하게 된 이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이에 대

해서는 야마다 쇼지, 뺷가네코 후미코뺸, 정선 역, 처럼, 2003, 268-276쪽 참고. 97) 사진 촬영한 날이 10월 7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촬영 시일 판명, 대정 14년 10

7일 박열이 자서 발견>, 뺷동아일보뺸, 1926.9.11; <괴사진의 촬영 시일은 작년 10월 7일이다>, 뺷매일신보뺸, 1926.9.11.

98) <양간수 수감>, 뺷매일신보뺸, 1926.12.1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