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1. 프루스트와 거짓말의 위상

1.3. 거짓말의 층위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거짓말은 텍스트의 다양한 층위에서 나타난다.

58) 자크 샤보(Jacques Chabot)에 따르면 프루스트의 소설에 ‘알고 있는 화자(narrateur informé)’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가 소설의 주요 주제로서 타자 문제를 다루는 방식 의 특수성 때문이다.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창조자보다는 자신이 가진 사료에 의거하여 사태를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는 역사가에 가깝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찾기’ 일반은 발견의 과정으로 제시되며, 완성된 탐구의 결과를 전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Jacques Chabot, L’autre et le moi chez Proust, Honoré Champion, 1999, pp. 266-269.

59) 라바제토는 거짓말 문제가 1인칭 시점의 소설 쓰기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ainsi seulement pourra-t-il représenter la dimension tragique d’un univers peuplé par des corps impénétrables qui, frappant sans relâche et avec une patience infinie à des centaines de portes, ne pourront être « lus », interprétés et conduits à la transparence des personnages de roman que lentement.” Mario Lavagetto, op. cit., p. 303.

60) 여기서 우리는 제라르 주네트가 제안한 이야기(histoire)/서사(récit)/서술(narration)의 구 분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주네트가 프루스트론을 겸해서 쓴 서사학 이론에 따르면, 야기는 서사의 기의 혹은 서사적 내용을 가리키며, 서사는 기표 혹은 서사적 담화 자 체를 가리킨다. 서술은 담화를 만드는 서사적 행위, 나아가 서사적 행위를 포함하는 사 실적 또는 허구적 상황의 총체를 가리킨다. Gérard Genette, “Discours du récit”, in:

Figures III, Seuil, coll. « Poétique », 1972, pp. 71-72.

거짓말은 서술의 대상이 되는 이야기 내적(intradiégétique) 층위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서술 행위가 일어나는 이야기 외적(extradiégétique) 층위에서 나타나기도 한 다. 기존의 연구들은 인물들의 거짓말과 같은 이야기 내적 층위의 거짓말에 집중 되어 있고, 이 논문 역시 인물들의 거짓말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야기 외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화자 또는 작가의 거짓말 역시 프루스트의 거짓 말 주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구하고자 할 때 외면하기 어렵다.

이야기 외적 차원의 거짓말은 넓게 보아 화자의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화자는 주인공 마르셀을

1인칭 대명사로 부르는 인물로서 텍스트 속에 모습

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야기 뒤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전자에 해 당하는 화자는 인물들의 거짓말에 대해 성찰할 때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때때로 서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진실을 깨닫고, 자신이 앞에서 거 짓말을 했다고 고백하면서 정보를 보충하기도 한다.61) 이렇게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서술이 참말임을 암시하는 경우도 있다.62) 또한 화자 는 서술상의 왜곡을 미리 해명하여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차단하 기도 한다.63) 이런 것들은 화자가 자신의 성실성 및 허구 이야기의 진실임직함

(vraisemblance)을 확보하고자 하는 장치로서,

화자의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 혹은

진실된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소설의 전통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64)

화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에도 거짓말은 서술의 전략으로서 유효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 제기는 글쓰기 자체가 거짓말을 매개 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며, 소설이 진실을 전달하는 허구라는 관점과 연결된다. 뤽 프레스는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화자의 거짓말을

61) 『갇힌 여자의 서두에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묘사가 이에 해당된다. 화자는 알베 르틴과의 관계가 진행되면서 세계의 복수성을 체감한 뒤, 앞의 묘사를 수정한다. “Oui, j'ai été forcé d'amincir la chose et d'être mensonger, mais ce n'est pas un univers, c'est des millions, presque autant qu'il existe de prunelles et d'intelligences humaines, qui s'éveillent tous les matins.” La Prisonnière, Ⅲ, p. 696.

62) “Je mentirais en disant que ce côté terrien et quasi paysan qui restait en elle, la duchesse n’en avait pas conscience et ne mettait pas une certaine affectation à le montrer.” La Prisonnière, Ⅲ, p. 544.

63) “De même, sauf des cas relativement assez rares, ce n’est guère que pour la commodité du récit que j’ai souvent opposé ici un dire mensonger d’Albertine avec (sur le même sujet) son assertion première.” La Prisonnière, Ⅲ, p. 659. “Si le lecteur n’en a que l’impression assez faible, c’est qu’étant narrateur je lui expose mes sentiments en même temps que je lui répète mes paroles.” La Prisonnière, Ⅲ, p. 850.

64) 서사의 진실임직함을 주장하는 서술적 장치들이 오히려 거짓말의 가능성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 거짓말하는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3장 1절에서 분석할 것이다.

‘작가의 거짓말’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거짓말은 작품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철학자의 거짓말과 허구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예술가의 거짓말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거짓말은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65)

이야기 내적 차원의 거짓말은 크게 사회적 관계 속의 거짓말과 내밀한 관계 속의 거짓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사교계에서, 후자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사교계에서 거짓말은 대개 언어 자체와 진실 사이의 괴리에서 출발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는 사회적 삶이 거짓 말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말의 진실성을 담보해야 할 자아(moi)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말을 할 때 표면에 나서는 사회적 자아는 항 상 복수로 존재하는 내면적 자아들과 분열을 일으키며 거짓말은 그 분열을 통제 하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다.66) 사교계의 거짓말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데, 기본적인 방식은 사회적 약호에 따르는 것이 정해진 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 인 경우이다. 베르뒤랭(Verdurin) 부인은 자신의 사교 모임이 특정한 맹목을 공유 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의 약호를 제정한다. 주네트는 사교계의 의례적인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쌍방이 알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약호들이며 이런 약호들이 말을 무의미한 표면과 실제 의미로 분화시킨다는 점, 즉 사교계의 언어 가 일종의 공공연한 거짓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67) 요컨대 사교계는 약호에 따 라 거짓말을 발신하고 해독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하며 이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 는 자를 배제한다. 약호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거짓말인 셈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특정 개인이 계획적으로 꾸며내는 거짓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 속 거짓말의 두 번째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이런 거짓말들 은 사회적 약호와 그것을 지배하지 못하는 정체성 사이의 긴장에서 온다. 코타르

(Cottard)나 사니에트(Saniette)

같은 부적응자들, 르그랑댕이나 블로크 같은 속물

들, 샤를뤼스와 같은 동성애자들에게 거짓말은 사교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 인 도구이다. 그들은 사교계에 속하기 위해 사교 생활 이전의 정체성을 숨겨야

65) Luc Fraisse, “Proust et l’écriture du mensonge”, pp. 126-136. 소설 장르에서 거짓과 진실 의 문제에 대한 프루스트의 입장에 대해서는 Vincent Descombes, Proust. Philosophie du roman, Minuit, 1987, pp. 67-87 참고.

66) Mario Lavagetto, op. cit., pp. 243-247.

67) Gérard Genette, “Proust et le langage indirect”, pp. 251-259. 힐리스 밀러도 유사한 주장 을 한다. 사회적 삶은 거짓말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이런 생각은 외교 주제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Joseph Hillis Miller, op. cit., p. 406. 한편, 사회적인 성격의 거짓말이 사교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르네 지라르는 콩브레의 가족 공동체에서도 거짓말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적 규약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René Girard, Mensonge romantique et vérité romanesque, Grasset, 1961, pp. 221-226.

하며, 정체성을 숨기는 행위 자체를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

1부에서 화자의 논의에 따르면 동성애 정체

성의 핵심은 자기 부정에 있다.68) 그들에게서 자기 욕망에 대한 수치심은 평생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숙명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으로, 모든 욕 망의 궁극적인 실현 불가능성으로, 삶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적, 예술 적 활동과 자기 내면의 철저한 분리로 이어진다. 이들에게 거짓말은 사회적 삶과 내밀한 개인적 삶이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밀한 관계 속에서 거짓말의 관건은 내면을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자아로 가리는 것보다 내면의 현실을 감추는 것 자체에 있다. 이 관계 속에서 거짓말은 분명히 특정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발화주체가 선택하는 수단이 된다. 연인 관계 에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힘은 사랑의 비대칭성이다. 프루스트의 소설 에서 연인들은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욕망을 교환하지 않으며, 늘 주체와 대상으 로,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갈라진다. 이런 구도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주체가 소유할 수 없는 타자가 된다. 타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주체의 헛된 상상을 자극할 때, 타자는 주체가 원하는 것을 감추는 사람으로, 즉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견해를 간명하게 정식화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랑의 기호들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

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기호들이다.”69) 한편 질투하는 사 람은 타자가 감추고 있는 미지의 세계를 밝혀내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에 의존하 기도 한다.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70)이며, 또 해석의 빈틈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할 대상은 내밀한 관계 속의 거짓말이다. 연구의 대상을 한정하는 이유는 연인 관계 속에서 거짓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마찬 가지로 거짓말이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도 연인 관계의 맥락이기 때문이 다.71) 다양한 층위의 거짓말이 작품의 모든 편에 나오지만, 거짓말이 가장 높은 비중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은 「스완의 사랑」과 『갇힌 여자』와 같이 서술의 초점 이 연인 관계에 맞추어지는 부분이다.

앞서 우리는 거짓말이 쾌락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람

68) Sodome et Gomorrhe, Ⅲ, pp. 16-19, 32-33.

69) Gilles Deleuze, op. cit., p. 16.

70) Ibid., p. 16.

71) 라바제토와 브라운의 연구는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Mario Lavagetto, op. cit., p. 288, Llewellyn Brown, op. cit., pp. 187-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