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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베트남과 비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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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

세기 베트남과 비엔동:

호앙사 부대(黃沙隊)의 편성 배경과 활동

이미선*

Ⅰ. 머리말

Ⅱ. '호앙사 부대' 편성의 역사적 배경

Ⅲ. 17-18세기, 호앙사 부대의 편성 및 활동 : 반관반민(半官半民) 반경반군(半經半軍)

Ⅳ. 19세기, 호앙사 부대의 재편 및 활동 : 전민전경(全民全經)

Ⅴ. 맺음말

◁ 목차 ▷

*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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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Vietnam and Bien Dong in the 17th and 19th Century:

Organization Background and Activities of Hoang Sa Company

Lee, Misun

The conflict between Vietnam and China over Bien Dong is getting severer. Both countries, bordered by land and sea, had to go through several adjustments between ‘colonial times border’ and ‘historical border’ to define the current border, and in the end, the land border and Tonqing bay border issues were settled, but the 'Bien Dong dispute' remains as a problematic issue. Both Vietnam and China are claiming sovereignty over ‘Bien Dong’ based on historical reason.

Then, What is Vietnam's position? What historical material would prove the jurisdiction of the 17th century Bien Dong? It is Hoang Sa Company that emerges in this discussion. Hoang Sa Company was the organization established for the maritime management and safety at the time when Nguyen's regime extended its territory to the south.

Since the 17th century, along with the activities of Hoang Sa Company, Bien Dong has gradually been incorporated into the real jurisdiction of Vietnam. The activities of the Hoang Sa Company are the primary source of evidence for Vietnam's jurisdiction over Bien Dong, creating new perceptions of ocean boundaries and territories and requiring a series of inequality trea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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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Hoang Sa Islands, Truong Sa Islands, Hoang Sa Company, Paracel Islands, Spratly Islands

I. 머리말

베트남은 ‘비엔동(Biển Đông)’, 중국은 ‘남중국해(南中國海)’라고 부르 는 바다를 둘러싼 갈등은 양국의 끝나지 않는 ‘천년전쟁’의 축소판과도 같다.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나라에 대항한 쯩 씨(Hai Bà Trưng) 자매의 반란부터 1979년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을 지나 비엔동 갈등까지 양국의 대립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베트남은 중국 역대 왕 조와의 전쟁에서 때론 패배하기도 하고, 朝貢을 바치는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해왔다.

베트남과 중국은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다. 따라서 약 1,400㎞에 이르는 육로 국경 획정 문제, 북부만(통킹만) 국경 획정, 그 리고 호앙사, 쯔엉사 군도에 관한 분쟁이 얽혀 있다. 과거부터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 형성과 획정은 긴 시간을 끌어온 복잡한 문제로 ‘현재의 국 경’을 획정하기 위해서 ‘식민지 시대의 국경’과 ‘역사적 국경’ 사이에서 수차례에 걸쳐 재조정되었다(응우옌 티 한, 2015: 173). 다만, 육상 국경 과 통킹만에서의 국경 획정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비엔동 분쟁은 현재에 도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난제로 남아있다.

베트남과 중국은 비엔동 분쟁 당사국 중 유일하게 역사적 권원을 들어 자신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이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비엔동를 최 초로 발견하고 이름을 명명하고, 개발 및 이용해 왔으나 20세기 이전에 는 어느 국가도 주권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베트남은 15세 기에 처음으로 비엔동에 대한 해양인식이 태동했으며 17세기 이후부터는 비엔동을 실질적으로 관할했고, 19세기 초에는 영유권 선언을 통해 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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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 대한 영유권을 확인하면서 베트남의 비엔동에 대한 실효지배가 정 착되었다는 입장이다. 부족한 비엔동 관련 연구 속에서도 15세기 영유권 인식의 태동에 대한 증거로는 찬집천남사지노도서(纂集天南四至路圖書, 19세기 영유권 선언의 증거로 1816년 자 롱 황제 관련 阮朝硃本1)이 곧 잘 등장하는데 17세기 비엔동의 관할을 증명할 사료에 관한 언급은 찾아 보기 힘들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호앙사 부대(đội Hoàng Sa, 黃 沙隊)’이다. 그렇다면 호앙사 부대란 과연 어떠한 성격을 띠는 조직이며 어떠한 배경에서 편성되었는가? 주요한 활동은 무엇이며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무엇인가?

실제 국·내외 연구자들이 호앙사 부대 자체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소개하는 경우는 있으나 이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경우 는 드물다.2) 이는 비단 호앙사 부대에 관련된 문제뿐 아니라 비엔동 분 쟁에 관련한 연구 자체가 대체로 국제법, 국제 관계의 측면에 초점이 맞 추어져 있기 때문에 영유권 주장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에 대해서는 소략 하거나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3) 또 한편은 대부분의 비엔동 연구는 중국의 자료를 토대로 한 중국 중심의 역사서술4)에 치중하고 있다. 따라 서 본고는 베트남 측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호앙사 부대가 역사적 측 면에서 어떠한 의미와 중요성을 띠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제Ⅱ장

1) 1802년 자 롱이 왕위에 오른 해부터 1945년 바오 다이 황제가 폐위될 때까지 응우옌 왕조의 행정 문서 모음집.

2) 윤대영(2019). 남중국해 문제의 기원과 쟁점화―중국과 베트남의 파라셀 군도 및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하여. 동양사연구 148. 409-455;

Marwyn S. Samuels(1982). Context for the South China Sea. New York:

Methuen. 43; 浦野起央(1997). 南海諸島国際紛争史: 研究・資料 年表. 東京: 刀 水書房. 1-408.

3) 김동욱(2012). 남사군도를 둘러싼 관련국의 대응과 그 해결 방안. 영토해양연 구 3. 84-111; 정갑용(2015). 남중국해 해양분쟁의 국제법적 쟁점. 해사법연구 27. 31-63.

4) 李昌偉(2009). 중국의 도서와 해양경계 문제. 國際法學會論叢54. 129-153; 변 창구(2014). 중국의 동아시아 해양전략과 남중국해 분쟁, 한국동북아논총 71.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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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호앙사 부대 편성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 제Ⅲ장에서는 17∼

18세기에 호앙사 부대가 편성된 지역, 시기, 역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제Ⅳ장에서는 응우옌 왕조가 개창한 19세기 이후 호앙사 부대의 재편성 그리고 소멸 과정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호앙사 부대’ 편성의 역사적 배경

베트남의 역사는 북부 지역의 반 랑(文郎)―어우 락(甌雒), 중부 지역 의 럼 업(林邑)―참파(占婆) 그리고 남쪽 지역의 푸난(扶南)과 같은 세 개 나라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왕국들은 모두 함께 비엔동을 공유했고, 모두 비엔동을 자신의 바다라고 인식했다. 정확한 시점을 특정 지을 수 는 없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비엔동을 漲海라고 불렀고 한 무제 시대에 이미 남중국해의 존재를 인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廣東省地名委員會編, 1987: 54). 베트남은 대략 기원전 600년 경 보르네오(Borneo)에서 이동하 여 현재의 베트남 중남부에 정착한 오스트로네시안 어족(the Austronesian)과 관련이 있는 사 후인(Sa Huỳnh, 沙黃)이 한때 베트남 중부지역의 주인이었다고 보고 있다(윤대영, 2018: 104). 베트남사회과학 원 고고학 연구소는 쯔엉사 군도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 쯔엉사 군도에 속하는 네 개의 섬5)에서 사후인 혹은 초기 참파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유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Nguyễn Quang Ngọc, 2018: 88-89). 이를 토대로 매우 이른 시기부터 베트남 중남부 지 역의 해양인들이 비엔동를 생활터전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6) 그리고 현 재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의 베트남 사후인 문화가 역사시대의 참파(Champa) 문화로 발전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

5) 네 개 섬은 각각 쯔엉사(Spratly), 남 옛 (Nam Yit), 씬 코에(Sin Cowe), 샌드 케이(Sand Cay)이다.

6) 청동기 말기부터 철기 초기 시대에 해당한다.

(6)

다.7)

참파는 2세기부터 약 15세기까지 베트남 중부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 던 왕국으로 길쭉하고 좁은 영토, 농업 경제가 발전하기 힘든 자연·환경 적 요소로 인해 농업 이외에 임산업, 해상무역, 노예매매업 그리고 해적 활동 등을 주로 하는 해상제국이었다(Trần Quốc Vượng, 1991: 20). 당시 참파는 북쪽으로는 베트남과 중국, 남쪽으로는 캄보디아와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그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해상진출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참파는 해양을 부단히 개발하여 전성기였을 때 는 푸난, 스리비자야 등과 함께 아시아 지역의 무역 강자였다. 그러나 17 세기 말 베트남의 메콩 델타의 진출과 함께 완전히 멸망하여 소수민족으 로 전락하였고, 베트남 당 쫑(Đàng Trong)8)이 참파 왕국의 영토를 흡수 하고 충적 평원을 개발하는 한편 참파 왕국의 무역 발전 전통을 계승하 게 된다.

16, 17세기 베트남은 막(Mạc) 왕조(莫朝, 1527–1683)와 후레(Hậu Lê) 왕조(後黎朝, 1428-1789)가 대립함과 더불어 남과 북의 실권자였던 찐 (Trịnh, 鄭)씨 정권과 응우옌(Nguyễn, 阮)씨 정권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찐씨와 응우옌씨는 일곱 차례에 걸쳐 전투를 펼쳤지만, 찐씨는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여 남과 북은 서로 대치하 고 있었다. 그 중 호앙사 군도가 위치한 중부지역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이 바로 당 쫑, 응우옌씨 정권이었다.

응우옌씨 정권은 북으로는 찐씨, 남으로는 참파로부터의 위협을 방어 하여 생존의 터전을 마련하고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배양 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해야만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

7) 참파문화는 사후인 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발전 과정에서 베트남, 중 국, 인도 등 다양한 외부 세력과의 교류와 접촉을 통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최종적으로 참파 문화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8) 본시 당쪽은 <남으로 들어가다>(vào Nam), 당응와이는 <북으로 나아가다(ra Bắc)>라는 방향의 의미였으나, 응우옌씨가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면서 <內地.,

<外地>라는 뜻에 근접한 정치적 개념으로 바뀌었다; 유인선(1996). 베트남인 의 남진과 남방문화의 형성. 동방학지 105. 3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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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몇몇 나라와의 교류에서 대외관계가 서구로 확대된 것이다. 마침 유 럽 각국들은 자국의 부를 증대하기 위한 대외 무역과 해외 식민지 건설 에 몰두하며 동인도, 그리고 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이 봇물을 이루었다.

중국은 명나라 초기 홍무제(洪武帝)가 중국 연근해에 왜구들이 나타나자 해금령을 선포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고, 영락제(永樂帝) 이 후에는 해금정책이 최고조에 달해 가정(嘉靖)년간(1522-66)에는 조그만 배도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고 청나라 시기에도 일관되게 해금정 책을 실시하였다(박정현, 2005: 174-175). 따라서 당 쫑은 포르투갈, 네덜 란드 등과 같은 유럽 상인들 그리고 태국, 캄보디아, 찐씨 정권, 중국, 일 본 등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응우옌씨 정권은 ‘중부 항구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며 해상 무역은 번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 및 해적들과 빈번하게 충돌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1559년에 는 스페인 함대가 응우옌씨 정권의 경고사격에 물러났고, 1585년에는 일 본 해적을 소탕했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18세기에는 영국군과 꼰 다오(Côn Đảo) 섬에서 충돌한 사례도 있었다(Lê Tiến Công, 2015: 21).

1627년에 응우옌씨는 찐씨와 암묵적 평화체계에 들어가게 되면서 응우 옌씨의 남진정책은 훨씬 더 적극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1611년 참파가 꽝 남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반격하여 꾸 몽 관을 넘어 다이 라인 갑까 지 영토를 확대하고, 1653년에 참파가 다시 푸 옌을 공격하자 3천 병사 를 일으켜 참파군을 격파하고 오늘날의 카인 호아성을 넘어 판두랑가까 지 확대된다(유인선, 2012: 218). 특히 정권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중국인 들이 베트남으로 적극 이주하면서 당 쫑의 영토 확장과 대외통상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처럼 남쪽지역으로 영토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해상에서의 충돌이 증가하자 그에 상응하는 해상 정책의 수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른 한편 매우 실질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 호앙사 군도가 위치한 중부 지역은 서쪽의 벵갈 만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이 쯔엉 썬 산맥에 부 딪혀 펜 현상을 일으키며 농사에 악영향을 미쳤고, 여름만 되면 중부 연 안부인 탄 호아(Thanh Hóa)부터 뀌 년(Quy Nhơn), 뚜이 호아(T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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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a)에 이르는 지역은 혹서로 벼가 말라죽어 버렸다. 또 태풍이 오면 쯔 엉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급류가 전답을 쓸어 갔다(Nguyễn Việt, Vũ, Minh Giang, and Nguyễn Mạnh Hùng, 1983: 421-423). 이처럼 험지로 인식되는 호앙사 군도는 중국과 일본의 선박들이 호이안에 오거나, 무역 거래를 마치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돌아가는 서양 선박들이 거쳐야만 하 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항해 중 태풍이나 좋지 못한 기상 여건으로 인해 암초에 부딪치고 좌초하는 선박들이 적지 않았다. 응우옌씨 정권은 호앙 사 군도 일대를 자신들의 관할 지역으로 인식했으므로 조난선에 대한 구 조 작업과 적재 화물들을 처리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비엔동 입출입의 관문이자 해상의 요충지라 할 수 있는 베트 남 중남부 사 끼(Sa Kỳ: 오늘날의 꽝 응아이省에 속하는 항구)―꾸 라오 제(Cù lao Ré: 올벼가 많은 섬이라는 의미임) 지역에 호앙사 부대를 편 성하게 된다.

III. 17∼18세기 ‘호앙사 부대’의 편성 및 활동: ‘반 관반민(半官半民) 반경반군(半經半軍)’

‘호앙사9) 부대’라는 명칭을 들으면 바로 비엔동 지역 중남부에 위치한

‘호앙사 군도’를 떠올리게 된다. 호앙사 군도를 활동 무대로 삼던 ‘부대’

라고 짐작하게 되는 호앙사 부대는 민병대(民兵隊), 수군(水軍), 어병(漁 兵), 순해대(巡海隊)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진다. 프랑스어로는

‘Compagnie Hoang Sa’, 영어로는 ‘Hoang Sa Company’라고 불리기도 한 다(Marwyn S. Samuels, 1982: 43). 이와 같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호앙 사 부대의 특수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호앙사 9) 호앙사(Hoàng Sa) 중 ‘Hoàng’은 ‘황금’, ‘Sa’는 ‘모래’라는 의미로 ‘황금 모래’

를 뜻한다. 포르투칼인들이 16세기 초에 ‘Paracel’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했고,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프랑스인들도 항해도에 ‘Paracel’이라고 기록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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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가 편성된 시기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호앙사 부대의 편성 시기를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렵다. 다만 남아있 는 기록들을 토대로 응우옌씨 정권 초기라고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단 서가 있다. 그 첫 번째 단서는 1776년 편찬된『무변잡록(撫邊雜錄)』에서 찾을 수 있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략) 응우옌 왕조 초기 안빈(An Vĩnh)社 사람들을 (모집하여) 70명으로 구성된 호앙사 부대를 편성하였다. 매년 3월이 되면 삼일 밤낮을 노를 저어 목적지에 도착했고, 물품을 수집한 후 8월이 되면 에오(Eo)10) 포구로 돌아와 (이를) 푸 쑤언(Phú Xuân, 富春)에 바쳤다(하략). (Phủ biên tạp lục Ⅱ, 1997: 148).

큰 틀에서 『무변잡록』의 내용과 다르지 않으나 레 꾸이 돈이 기술한 내용을 國史에 포함시켜 공식화시켰다는 의의가 있는 『대남식록속편(大 南寔錄續編』에도 “안 빈社 바다 쪽으로는 130개가 넘는 많은 섬이 있는 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배로 하루를 가고 혹은 몇 更의 시간을 더 가 야 도착한다. 섬에는 대략 300리가 넘는 길이의 바이 깟 방(bãi cát vàng, 擺葛鐄: 황색의 사주(黃砂))이라는 평평한 (모래)사장이 있다. 섬에 는 수많은 제비집이 있고, 모래사장에는 우렁이, 해삼, 대모 등이 있으며 (중략) 70명으로 구성된 호앙사 부대는 안빈社 거주민들로 충원하고, 서 로 교대로 노를 저어 섬에 도착하여 물자를 찾았다. 매년 3월이 되면, 여 섯 달 분량의 식량을 가지고 삼일 밤낮을 노를 저어서 섬에 겨우 도착한 다. 어떠한 물품을 얼마큼 수집했든지 8월이 되면 에오(eo) 포구로 돌아 와, 푸 쑤언(Phú Xuân)에 가서 바쳤다(Đại Nam thực lục tục biên, 1993: 243-244)”는 기록이 있다.

상황을 정리해 보면, 호앙사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음력 8월경 에오 10) 후에(Huế)에서 동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투언 안(Thuận An) 포구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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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로 입항하여 푸 쑤언(Phú Xuân: 오늘날의 후에)에 위치한 정전(正 殿)에서 진상품 (進上品)을 올렸다는 것이다. 응우옌씨 정권의 초대 왕인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 阮潢, 1558-1612)이 아이 뜨(Ái Tử, 愛子:

오늘날의 꽝 찌 시 부근)에 자리를 잡은 이후, 응우옌 푹 란(Nguyễn Phúc Lan, 阮福瀾, 1635-1648) 치하인 1635년에는 오늘날의 후에 지역에 위치한 낌 롱(Kim Long)으로, 응우옌 푹 타이(Nguyễn Phúc Thái, 阮福 溙 , 1687-1691) 치하인 1687년에는 푸 쑤언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가 장 빠르게는 응우옌 푹 란 늦게는 응우옌 푹 떤 당시에는 호앙사 부대가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Trần Công Trục, 2014: 79).

또 다른 추정이 가능한 사료가 있다. 꽝 응아이城 안 빈社에 위치한 보(Võ, 武)씨 사당에는 안 빈 꾸 라오 제坊의 영대랑(靈臺郎) 하 리에우 (Hà Liễu)가 호앙사 부대를 재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11)이 보관되 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호앙사 부대는 이미 1631년 이전에 편성되 었고, 1663년 이후에 30명 규모의 다이 마오 하이 바(Đại Mạo Hải Ba) 와 꿰 흐엉 함(Quế Hương Hàm) 부대가 편성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Nguyễn Quang Ngọc, 2011: 31). 또한 1636년 응우옌 푹 란 왕은 네덜란드 대리점 대리인 뒤익커(Duijcker)를 접견하게 되는데 뒤익 커는 “그로턴브록(Grootenbroeck)호가 호앙사 군도 인근에서 좌초되었고, 승선해 있던 선원들은 당 쫑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동시에 총금 액 23,580 레이크스달더를 탈취당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 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이에 대해 응우옌 푹 란 왕은 “그 일이 발생 한 것은 응우옌 푹 응우옌(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 1613-1635) 치 하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으며, 지금부터 네덜란드인들의 상품 판매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상품에 대한 면세 조치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이후에 네덜란드 선박이 해상에서 좌초될 경우 더 이

11) 원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본디 우리 면에는 호앙사와 꿰 흐엉 두 개 부대가 있었습니다. 보 헤(Võ Hệ) (독전)督戰은 辛未년(1631)에 다이 마오 하이 바 (Đại Mạo Hải Ba), 꿰흐엉(Quế Hương) 부대를 30명 규모로 추가 설립해 줄 것을 요청하는 간청서를 올립니다. (하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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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적재물에 대한 약탈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밝힌다 (Nguyễn Quang Ngọc, 2018: 146, 재인용). 여기서 언급된 그로턴브록호 구조에 참여한 것이 바로 호앙사 부대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상 언급 한 세 가지 근거를 토대로 호앙사 부대가 편성된 시기는 응우옌 푹 응우 옌이 왕위에 오른 17세기 20년대 말이나 30년대 초로 추정해 볼 수 있 다.

호앙사 부대원들의 선발에 관해서는『월사통감략고(越史通鑑略考, Việt sử cương giám khảo lược』제4권에 “(상략) 우리 왕조 개창기부터 먼 바다에 나가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호앙사 부대를 편성하고 안 하이縣와 안 빈社의 장정들을 항시 까다롭게 선별하였다. (하략)”라고 기록되어 있 다(Việt sử cương giám khảo lược, 1998: 47a, 47b). 이를 통해 볼 때 호앙사 군도와 인접한 지역의 거주민을 선발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인 원은 안 빈縣 토착 거주민을 대상으로 선발하고 일부는 인근 육지에 위 치한 안 하이縣 혹은 꾸 라오 제 섬의 거주민들로 채웠다. 매년 항해가 가능한 약 70명의 장정을 선발하여 호앙사 부대와 같은 1개 소부대에 배 치했고, 매년 상황에 따라 호앙사로 출항하는 선박의 수는 적게는 4, 5척 많게는 18척에 이르렀다.

호앙사 부대는 초기에는 연근해 지역에 위치한 섬들에서 주로 활동을 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특히 1708년 중국에서 건너온 막 꺼우(Mặc Cửu, 鄚玖)가 남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후 하 띠엔(Hà Tiên) 지역을 응우옌씨 정권에 바치면서 영토가 남쪽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하 띠엔 지역이 당 쫑 영토로 편입되면서 응우옌씨가 남부 지역, 즉 오늘날의 쯔엉사 군도에 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자 호앙사 부대가 비엔동 전체 도서를 관할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응우옌 푹 쭈 (Nguyễn Phúc Chu, 阮福淍, 1691-1725) 왕은 호앙사 부대 외에 박하이 (Bắc Hải, 北海) 부대를 편성하게 된다.12) 이후 호앙사 부대와 박하이 부

12) 비엔동 전체적인 측면에 쯔엉사는 남쪽에 위치하지만, 하 띠엔(Hà Tiên) 지 역에서 바라보면 동북쪽에 위치하므로 ‘北海’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Phủ biên tạp lục Ⅱ에서는 “응우옌씨는 또한 박 하이 부대를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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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북쪽으로는 중국 海南島 염주(廉洲: 현재의 廣西 合浦)로부터 남쪽 으로는 하 띠엔, 꼰 론(Côn Lôn) 섬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게 된다. 호앙사 부대가 비엔동 전체 지역을 직접 관할할 수는 없었지만 박 하이 부대 등 타 부대를 통솔하는 과정에서 꽝 찌, 후에 등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부터 그 아래로는 현재의 쯔엉사 지역에 이르는 넓은 해역을 활 동 무대로 삼게 된 것이다(Nguyễn Nhã, 2015: 102).

호앙사 군도는 전통적으로 항해가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 많은 섬과 위 험한 암탄(暗灘)이 존재하여 험지로 인식되는 곳으로 일년 내내 상주하 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여지지(輿地誌)』,『황월지여지(皇越地輿誌)』,

『대월사기속편(大越史記續編)』,『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에는 호앙사 부대가 매년 음력 3월에 출항하여 음력 8월에 귀항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찬집천남사지노도서(纂集天南四至路圖書)』만이 겨울 끝자락에 출 항한다고 되어 있으나 귀항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기록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음력 3월부터 8월, 즉 양력 약 4월부 터 9월은 꽝 응아이(Quảng Ngãi) 지역이 건기 상태이며, 서남풍이 불어 바다로 나가기에 순조로운 여건이므로 출항하고, 음력 8월에서 11월(양력 9월에서 12월)은 태풍이 집중되는 시기이므로 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 럼 약 육 개월 간은 항해를 멈출 정도로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곳에서는 국·내외 특히 서양 및 중국 선박이 좌초되는 일이 잦았다. 『무 변잡록(撫邊雜錄)』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 기록도 있다.

했다. 이 부대는 몇 명의 인원으로 구성할 것인지 미리 확정하지 않고, 뜨 찐 (Tứ Chính)社 즉 빈 투언 푸府에 속하며 빈 투언(Bình Thuận) 인근 지역이 나, 까인 즈엉(Cảnh Dương) 마을 거주민 중 자원자가 있을 경우 보충하는 형 태로 이루어졌다. 자원자가 있을 시, 허가증을 발급하고 그 부대가 공무를 수 행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박 하이 부대는 여타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부역 면제와 나루터, 초소 통행료와 같은 소소한 금액을 감면받기는 했지만, 조세를 감면받은 것은 아니다. 박 하이 부대는 개인의 소형 범선, 나룻배를 이 용하여 꾸 라오 꼰 론(Cù lao Côn Lôn), 하띠엔(Hà Tiên) 지역 도서를 이동 하여 선박의 화물, 바다 자라, 玳瑁, 전복, 해삼 등을 수집하였고 호앙사 부대 該隊의 통솔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Phủ biên tạp lục Ⅱ, 1997: 120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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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꾸인 쩌우(Quỳnh Châu), 반 쓰엉(Văn Xương)縣의 관원이 투언 호 아(Thuận Hóa)에 띄운 공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다: 1753년 乾 隆(건륭) 제 18년, 安南國 꽝 응아이府, 쯩 응이어縣, 깟 리엠, 안 빈社 병사 10명이 각종 물자를 수집하기 위해 萬里長沙에 도착했고, 그 중 8명은 섬에 상륙하고 나머지 두 명은 선박에 남았는데, 예기치 않게 태풍이 불어 선박이 중국으로 떠밀려갔다. 중화정권은 사건을 조사한 후 2명의 병사를 베트남으 로 송환했다. (Phủ biên tạp lục Ⅱ, 1997: 62).

동 기록에서 언급된 안 빈社 병사는 호앙사 부대원으로 추정할 수 있 으며 호앙사 부대의 이와 같은 활동에 대해 중국은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왕의 명령 하에 응우옌씨 정권의 관리 가 중국 측에 감사의 서한을 띄운다는 것은 부대의 활동이 공식적이었다 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선박의 잦은 침몰로 인해 적재 되어 있던 화물을 처리하는 것이 호앙사 부대의 주요한 임무가 되었다.

특히, 당시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호앙사에서 침몰한 선박에서 획득한 총기와 포탄들은 매우 귀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주요한 임무 는 호앙사 군도 북부지역에서 나는 진귀한 각종 해산물을 수집하는 것이 었다. 이와 관련하여 『무변잡록』에는 “70명으로 구성된 호앙사 부대를 조직하여 (중략) 칼, 금, 은, 화폐, 구리제품, 주석 덩어리, 볼펜, 총기류, 상아, 벌꿀, 자기 등이 수집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Phủ biên tạp lục Ⅱ, 1997: 51).

그렇다면 과연 호앙사 부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섬을 개발하고 해산 물과 적재 화물을 수집하여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집단이었을까?

1749년부터 1750년까지 당 쫑을 방문했던 피에르 포이베르(Piere Poiver)라는 프랑스 상인이 “응우옌씨 정권은 매년 몇 척의 배를 호앙사 에 보내 자원을 채취한다고 기록하고(Nguyễn Quang Ngọc, 2018: 167.

재인용) 있는 점으로 보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하게 되는 사료가 있다. 레 꾸이 돈(Lê Quý Đôn, 黎貴 惇)은 “수집한 물품의 양은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고, 빈 몸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중략) 己丑年(1769)년부터 癸巳年(1773)까지 5년 동안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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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玳瑁, 바다거북 몇 마리만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주석, 도자기와 총기 두 정만을 획득한 해도 있었다(Phủ biên tạp lục Ⅰ, 1997:

120). 이를 통해 볼 때 실제 호앙사 부대가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 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

호앙사 부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이 전해지는데 첫 째는 앞서 언급한 1775년 호앙사 부대의 재편성을 요청하는 상소문에

“외침 세력과 응전할 굳은 결의”가 있다13)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는 꽝응아이府, 빈 썬縣 안빈 마을의 例規에 따르면 응우옌씨 정권 은 18세기 중반부터 응우옌 득 쯩(Nguyễn Đức Trường)으로 하여금 군 사를 이끌고 가서 스프래틀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응우옌 주 부(Nguyễn Du Vũ)로 하여금 호앙사에 진지를 구축하여 섬을 관리하고 백성들을 보 호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마을 例規에는 “누구의 것이라도 선박의 상태 가 매우 좋지 않거나 식량이나 무기가 충분하지 않으면 출항을 허가하지 않는다(Hồ Đức Thọ, 1999: 242-243).”라는 기록이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종합해보면, 호앙사, 쯔엉사로 출항하는 부대원들은 전쟁이 발생할 시

‘응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활용한 선박 또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무장된 선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응우옌씨 정권은 파라셀 군도와 스프래틀리 군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섬과 거주민을 직접 관할하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실제 호앙사 부대가 척박한 비엔동 을 노 저어 다니는 시절에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인 식이 강하여 임무를 수행하던 중 희생 된 병사들을 기리고, 곧 출정할 병사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카오 레 테 린 호앙사(khao lề thế lính Hoàng Sa)라는 의식이 진행되기도 했다(Cao Nguyễn Ngọc Anh, 2011:

15–16). 물론 수집한 물품을 규정에 맞게 조정에 바친 후 남은 일정 부 분을 개인적으로 취하거나, 임금으로부터 받은 포상과 일부 세금 감면 13) 꽝응아이省, 다오 리 썬현縣, 리 하이社, 떠이村 보(武)씨 집안에서 보관 중인 자료를 토대로 한 내용으로, 응우옌 꽝 응옥(Nguyễn Quang Ngọc.(2018).

Chủ quyền của Việt Nam ở Hoàng Sa, Trường Sa. 170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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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택이 어려운 시기에 큰 장점으로 다가왔겠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조국 에 대한 희생정신이 없이는 호앙사 부대원이 되기로 결심하기란 쉽지 않 았을 듯하다. 이처럼 호앙사 부대는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조정이 부여하는 지역 관리, 군사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복 합적인 성격을 띠는 조직이었다.

18세기 말에 접어들며 임무를 부여하는 주체에 변화가 생긴다. 신흥세 력 떠이 선(Tây Sơn, 西山, 1778-1802)이 반란을 일으키고 응우옌씨 정 권이 남부의 쟈 딘(Gia Định, 嘉定) 땅으로 밀려나자 호앙사 부대는 떠 이 선의 감찰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떠이 선 왕조는 오랜 시간 존속한 것은 아니지만, 水軍력을 증강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폈다. 특히 대규모 전투함을 건조하고 서양 군사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해상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해적을 활용하여 해상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해적들과 대립하기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칙령을 발 표하여 조속히 투항할 경우 관용을 베풀겠다고 밝히기도 한다(Lê Tiến Công, 2015: 22–23). 그러나 지휘 체계 자체가 바뀌어 버린 상황에서 호 앙사 부대는 기존의 역할을 수행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앞서 언급한 대 로 안 빈社, 꾸 라오 제에 위치한 보(Võ, 武)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1775년 꾸 라오 제 주민들은 떠이 썬 정권에 호앙사 부 대가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Nguyễn Nhã, 2015:

110)고 한다. 그러나 떠이 썬 왕조는 신흥 세력으로써 전쟁을 지속하던 상황이었으므로 호앙사 부대의 재편성 요청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기록 은 없고, 다만 1776년 편찬된 레 꾸이 돈의 『무변잡록』에 호앙사 부대 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Nguyễn Nhã, 2015: 110).

17세기 응우옌씨 정권은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 책으로 적극적인 남진정책과 대외무역 확대정책을 펼쳤으며 그러한 과정 에서 비엔동 해상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됨으로써 17세기 초에 호앙사 부 대를 편성하게 된다. 호앙사 부대는 민과 관의 성격을 동시에 띠는 조직 으로 매년 약 육 개월 간 호앙사 군도에 상주하며 조정이 지시한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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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호앙사 부대의 비엔동을 무대로 한 활 동을 통해 베트남이 최소 17세기 이후부터는 호앙사 군도와 쯔엉사 군도 에 대한 구체적인 해양 인식이 발현했으며 조정의 주도 하에 양 군도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떠이 썬 왕조를 물리 치고 통일 왕조를 건립한 응우옌 왕조에 접어들어서는 호앙사 부대의 성 격이 어떻게 변화했을까?

IV. 19세기, 호앙사 부대의 재편 및 활동: 전민전경 (全民全經)

응우옌(Nguyễn) 왕조(阮朝, 1902∼1945)는 떠이 썬 정권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룬 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고 공고 화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서양 제국들이 식민지화 작업 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베트남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주권에 대한 위 협을 느끼게 된다. 한편 열악한 생활환경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농 민들의 반란이 확산되자 왕조의 힘이 쇠약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서구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대내적으로는 백성들 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농민 반란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 롱 (Gia Long, 嘉隆, 1802~1820 재위) 황제는 왕위에 오른 뒤 불과 몇 개월 후인 1803년 호앙사 부대를 재편할 것을 결정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 남식록정편(大南寔錄正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 롱 제 2년(1803) 7월, 보 반 푸(Võ Văn Phú) 해대(該隊)를 사 끼의 수영으로 삼아 외지인을 모집하여 호앙사 부대를 편성하라. (Đại Nam thực lục chính biên Ⅰ, 2007: 566)

또한, 빈 투언 지역에는 응우옌씨 정권의 응우옌 푹 쭈 치하에 편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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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이 부대와 동일한 부대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자 롱 황제는 호앙사 부대, 박하이 부대를 민병대로서 유지하면서도 해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복잡한 정세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선박과 무기를 증강하고 군사 활동을 강화했다(Nguyễn Quang Ngọc, 2018: 193-194). 그리고 『대남식 록정편』에서 자 롱 황제는 1805년 5월에 호앙사 부대, 박하이 부대 등 부대를 조정의 ‘장타제대(長舵諸隊)’14)로 편입한 기록이 있다. 임금이 “꽝 빈 이남부터 빈 투언까지 지역에 위치한 ‘장타제대’의 선박 수와 인원수 를 (조정에) 아뢸 것”을 명령하는데, 그 ‘장타제대’에 호앙사 부대와 박하 이 부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Đại Nam thực lục chính biên Ⅰ, 2007:

634).

또한 호앙사 부대가 태동한 지역인 리 썬(Lý Sơn) 섬에는 호앙사 부 대와 박하이 부대가 응우옌 왕조 초기까지 활동한 흔적이 보이는 사료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자 롱 2년(1803) 10월 1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가 안빈坊을 시찰한 후 看守亭(간수정) 직책이 없는 것을 보고 주민들과의 회합을 통해 관리를 임명하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자 롱 제 3년(2014) 11월 안빈坊을 안빈社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인 행정체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 달라(Nguyễn Quang Ngọc, 2018: 195)고 요청하는 안빈坊의 상소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자 롱 왕 초기에 호앙사 부대를 재건 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호앙사 부대 부대장이 사 끼 연근해 지역 공동체 까지 관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자 롱 황제는 호앙사 군도와 쯔엉사 군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 치는데 먼저 1815년에는 “乙亥年 정월 (자 롱 황제는) 팜 꽝 아인(Phạm Quang Ảnh, 范光影)15)에게 호앙사 섬으로 나가 물길과 수심을 탐사할 것”을 명령하는 기록이 있다(Đại Nam thực lục chính biên Ⅰ, 2007:

898). 이어서 1816년에도 “丙子年 임금은 水軍과 호앙사 부대에게 배를

14) 긴 조타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선박을 일컫는 말.

15) 현재도 안 빈(An Vĩnh)社, 동(Đông) 마을의 팜 씨 가문 사당에서는 팜 꽝 아인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 마을에서는 “Lễ khao lề thế lính Hoàng Sa”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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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호앙사 섬으로 나가 시찰을 실시하고 하고, 물길과 수심을 탐사할 것을 명했다”고 되어있다(Đại Nam thực lục chính biên Ⅰ, 2007: 922). 응 우옌 왕조는 1816년의 탐사를 기해 호앙사 군도에 깃발을 꼽고 푯대를 세우면서 오늘날의 의미로 영유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正史의 기록은 매우 개괄적이어서 정확한 내용이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호앙사 부 대가 水軍과 결합된 형태로 활동하였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면 19세기 이후 호앙사 부대의 어떠한 성격을 띠는 부대로 보아야 할까?

대체적으로는 이전에 호앙사 부대가 단독으로 수행하던 임무가 응우옌 水軍으로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 표현에 있어서는 반 군사, 반 무장 세력이던 호앙사 부대가 고성능의 선박과 무기를 장착하 고 한층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는 정규군화 되었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 임무 수행 차 떠나는 수군의 항해를 돕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축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 뜨 득(Tự Đức, 嗣德, 1847년∼

1883) 치하의 기록물인 『대남식록(大南寔錄)』 제 4권의 범례에는 정례 화 된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 민망 (Minh Mạng, 明命, 1820∼1841 재위) 제 17대(1836년)부터 호앙사 부대 의 활동이 정례화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19세기 이후 호앙 사 부대는 ‘민간’ 조직의 성격이 더욱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1877년에 편찬한 응우옌 통(Nguyễn Thông, 阮通)의『월사통감강목(越史通鑑綱 目)』에 이 서적이 편찬되기 오래 전에 호앙사 부대가 해체되었다고 기 록되어 있는 것 외에 그 어떤 문서도 호앙사 부대의 해체 결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Nguyễn Nhã, 2015: 113). 따라서 호앙사 부대가 조정의 결 정에 의해 해체된 것은 아니며 일부는 정규군 편제에 포함되고 일부는 水軍을 측면 지원하는 쪽으로 재편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는 당 시 어려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효율적인 해상 관리를 하고자 하는 조정 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Đỗ Bang, 2015: 1-2). 결국 19 세기 이후 더 이상 호앙사 부대, 박하이 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 았지만 호앙사, 쯔엉사와 관련된 활동을 지속했고 비엔동에서 수행하던 자신들의 임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Nguyễn Quang Ngọ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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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14-215).

민망 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베트남의 호앙사, 쯔엉사에 대한 영 유권 이행 작업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고 더불어 水軍의 활동은 더욱 구 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변화한다. 기존에 주로 하던 조차 측정, 지도 제작 외에도 표지석 설치, 주권비 건립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응우옌 왕조 티에우 찌(Thiệu Trị, 紹治, 1841∼1847) 치하 말기 부터 서양 식민지 세력이 중부 해상 지역에 등장하며 충돌이 늘어만 갔 다. 그들이 의도를 명백히 드러낼수록 응우옌 왕조와 서방의 관계는 더 욱 긴장상태에 놓이게 된다. 응우옌 왕조는 해상 방어와 순찰 활동에 더 욱 만전을 기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고 그러한 의지도 드러냈지만 여전 히 전통적인 방어 방식에 머물러 있을 뿐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서양 제국들과의 전투는 대부분 바다에서 펼쳐졌고, 최신식 무기로 장착한 프 랑스를 물리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앙사 부대도 응우옌 왕조의 水軍도 무력화됨으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19세기에 들어와서 응우옌 왕조는 호앙사 부대를 재편하고 호앙사 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하였다. 또한 강한 水軍을 편성하여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호앙사, 쯔엉사에 대한 순찰을 강 화하고 표지석을 매립하는 등 호앙사 군도에 대한 베트남의 실효 지배가 점차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호앙사 부대의 활동이 때로는 두드러지 고 때로는 미약하고 심지어 응우옌 왕조 水軍과 활동이 겹치기도 했지만 비엔동 지역을 실질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특수 부대를 편성한 유일무이 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호앙사 부대는 민과 관의 성격을 동시 에 띠는 특수한 조직으로써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비엔동을 주 무대로 경제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세기 이 후에는 호앙사 부대는 경제적 목적 달성을 주로 하는 활동을 펼치고 필 요에 따라 응우옌 왕조 水軍을 측면 지원하는 민간 조직의 형식을 띄게 되고 호앙사 부대의 기능과 역할은 응우옌 왕조 水軍에게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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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맺음말

본 연구는 베트남 영유권 주장의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호앙사 부대의 편성 배경과 주요 활동에 대해서 응우옌씨 정권과 찐씨 정권이 대립하고 있던 17세기 ∼ 18세기, 그리고 응우옌 왕조라는 새로운 왕조 가 개창된 19세기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17세기 초 응우옌씨 정권은 남진정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토가 확장 되고 서구, 중국 등과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해상을 관리하고 안전을 도모할 필요성을 느끼고 베트남 중남부 지역의 주요 관문인 사 끼 지역 에 호앙사 부대를 편성하게 된다. 호앙사 부대는 호앙사 인근 지역 거주 민을 주로 선발하여 조정이 지시한 임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민과 관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난파선의 적재물과 진귀한 해 산물을 수집하는 등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활동만을 한 것이 아 니었다. 매년 약 6개월 간 호앙사 군도에 머물며 난파선의 인명을 구조 하고, 조정이 주도하는 조차 측정, 지도 제작 등 다양한 공적 활동을 수 행하며 비엔동을 점차 베트남의 영토 속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했 다. 다르게 표현하면 비엔동을 실질적으로 관할한 부대인 것이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자 롱 황제는 호앙사 부대를 재편성하고 오늘날의 의미로 영유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자 롱 황제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작업 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떠이 선과의 전쟁을 통해 水軍의 중요성을 인식 하고 강한 군대를 편성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졌고, 특히 水軍을 중시했다.

응우옌 왕조 水軍은 1816년부터 이전에 호앙사 부대가 단독으로 수행하 던 임무를 넘겨받게 되면서 호앙사 부대의 일부는 정규군에 편입되고 일 부는 완전한 사적인 영역으로 돌아가 필요에 따라 水軍을 지원하는 성격 으로 탈바꿈한다.

서구 열강이 교역과 군사적 목적을 갖고 베트남에 접근해 온 이후 호 앙사 부대도, 응우옌 왕조의 水軍도 무력화 되었지만 17세기 초 편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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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앙사 부대의 활동은 서구 열강의 해군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연안에 나타나서 해양의 경계와 영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어넣으며 일련의 불평등 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이전부터 지속된 것으로 비엔동에 대한 베 트남의 관할을 입증하는 주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남중국해를 최초로 발견하고 이름을 명명하고, 개 발 및 이용해 왔으나, 20세기 이전에는 어느 국가도 주권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는 입장이며, 그러한 근거로 남중국해를 암시하는 지명, 영토의 편 입 및 실질적인 관할을 입증하기 위한 史書와 考籍을 제시하고 있으나 대부분 그 표현이 매우 포괄적이고 두루뭉술하여 실제 중국의 비엔동에 대한 영유권을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베트남 또한 중국과 유사 한 사료들을 쏟아 내고 있으나 호앙사 부대의 편성과 활동과 관련한 사 료들은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여 베트남의 영유권 주장에 힘 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베트남과 중국의 비엔동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 되는 상황 속에서 베트남에서는 호앙사 군도를 자신들의 내해(內海)처럼 누비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호앙사 부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 다. 이를 통해 호앙사 군도를 중국에 빼앗겨버린 쓰라린 상처가 한때 남 중국해를 관할했던 영광스러운 역사로 재조명되면서 베트남 민족적 자긍 심의 원천이자 귀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거듭나고 있다.

주요어

호앙사, 쯔엉사, 호앙사 부대, 파라셀, 스프래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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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Lee, Misun

Belong Dpt. of History, Dankook University E-mail nahanoi@gmail.com

투고일 2019/11/15 심사일 2019/12/10 게재확정일 2019/1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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