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극적인 것의 진화
제8강 개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드라마’로의 통용은 한편으로 일상어의 간이(簡易)를 구현하기 위한 화용론적 생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쉬르의 지적처 럼 언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고, 사물과 그 사물의 의미가 결합하는 방식은 필연적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다. 곧 하나의 기표에 대 해 애초의 기의를 밀어내고 새로운 기의가 틈입한다는 것은 유사점과 차이 점에 기반한 문화적 변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드라마의 개념을 둘러싼 문 화적 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8강 드라마, 극적인 것의 진화
드라마라는 번역어
‘드라마’ 개념의 역사성
① 언어는 하나의 기호(sign)이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되 는 바, 하나의 구상(具象) 혹은 추상(抽象)에 대한 의미의 확정은 사회 내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② 근대적 문학 개념으로서의 드라마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된다. 일본을 통해 서구에서 수입된 박래품(舶來品)인 드라마는 광의적 개념으로 극예술 혹은 극문학 일반을 포괄하는 ‘극’을, 협의적 개념으로는 ‘희곡’이나 ‘연극’
을 지칭하여 왔다.
③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언중(言衆)에 의해 통용되는 현실어로서의 드라마는 학술적 개념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문학사 적으로 보았을 때 ‘극’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기표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
의 제1의가 그것과는 시기적으로 거리가 가장 먼 최근의 발명품인 텔레비 전 드라마 텍스트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로 바꾸어 환언하자면 일 상에서는 ‘극=텔레비전극(방송극)’이라는 등식이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
제8강 드라마, 극적인 것의 진화
드라마라는 번역어
‘드라마’ 개념의 괴리
① 드라마는 역사적이고 유동적인 개념
② 광의적 개념은 극 일반을 지시하고, 협의적 개념은 희곡․연극을 지칭
③ 이러한 의미에서 학술어와 일상어로서의 드라마는 전체적인 개념의 범주에 서 보자면 문제되지 않음
④ 일상어에서 작동되는 ‘드라마=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등식은 학술적 견지 에서 보자면 드라마의 광의적 개념 선상에서 통용 가능
⑤ 역으로 일상적 차원에서도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대의 드라마가 포괄하는 하위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축어적 의미로 소통 가능
⑥ 하지만 한국의 문학과 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통용 혹은 소통이―적어도 최 근까지는―사실상 불가능
⑦ 한국에서 드라마 개념은 학술과 일상의 영역에서 서로 배타적
⑧ 학술적 영역에서 보자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고, 일상적 영역 에서 드라마는 오로지 텔레비전 드라마
⑨ 텔레비전 드라마가 예술을 사고하는 자리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의미
제8강 드라마, 극적인 것의 진화
드라마 vs 텔레비전 드라마
드라마와 텔레비전 드라마 사이의 한국적 균열
① 한국문학에 있어서 드라마, 즉 희곡에 대한 장르 인식이 문제이다. 희곡은 19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일본을 거쳐 서구의 근대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문․사․철을 아우르는 전통적인 문의 개념이 서양어 리터러처의 역어인 문학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글쓰기의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문학의 3종(種)으로 분 류되는 시․소설․희곡 가운데 희곡에 대한 장르 인식은 시나 소설의 그것과 같이 용이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② 장르 인식의 상대적 퇴락(頹落)과 연동된 희곡의 주변적 성격이다. 서양 문 학의 경우 희곡은 최초의 문학 이론서이자 비평서로 꼽히는 아리스토텔레 스의 시학(Poetics)이 보여주듯이 문학사의 가장 앞자리에, 그것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장르였다. 하지만 근대문학의 초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국문학의 자장 안에서 희곡은 유독 시나 소설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열등한 장르에 머물고 있다.
제8강 드라마, 극적인 것의 진화
드라마 vs 텔레비전 드라마
③ 희곡의 장르적 주변성이 가져온 대중화의 위축이다. 현대문학은 ‘위기’ 혹 은 ‘죽음’이라는 수사가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로 생산과 소비가 이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글쓰기의 정통성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제도적으로는
‘문단(文壇)’―안에서 창작물은 끊이지 않고 생산되고 있지만 소비는 실상 그 범주 내부에서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러한 범주에 포함하기/되기가 어려운 창작물이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소비 되곤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문학은 더 이상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전일적 인 범용(汎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④ 극 양식의 다원화에 따른 ‘희곡-연극’ 시스템의 상대적 위축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극은 곧 연극과 등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으로부 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영화 및 라디오 드라마․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방송드라마 등은 극 양식의 다원 화를 가져왔다. 극 양식과 과학기술의 결합에 따른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극에 대한 대량 생산과 소비를 가능케 한 반면에 상대적으로 낡은 장르인 연극의 위축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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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vs 텔레비전 드라마
⑤ 극 개념을 둘러싼 문화적 변용이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과 같이 언어 는 문화적 고안물이다. 따라서 하나의 물상에 부여되는 기표와 기의는 자의 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드라마의 전통적인 개념은 그것이 포괄하는 범주에 따라 극 일반 혹은 희곡을 지시하지만 과학기술을 동반한 신생 장르 의 등장과 본격적인 대중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지표성(indexicality)을 획득하였다.
⑥ 엘리트 집단과 대중의 극에 대한 이질적 태도이다. 예술로서의 드라마를 사 고하는 전통적 엘리트 집단에게 텔레비전이라는 대중적 매체와 결합한 텔 레비전 드라마가 심미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 의 장르가 심미적 가치가 있는 예술로 인정받는 과정이 낡은 것에 대한 옹 호와 새로운 것에 대한 배척으로 좀처럼 더디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 해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엘리트 집단의 거부와 저항은 그다지 놀라 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대중의 취미판단에 대한 감각이 과거 예술적 고려 대상을 놓고 행해졌던 엘리트 집단과 대중 사이의 공인과 수용이나 지도-피지도의 관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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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개념의 확장
드라마 개념의 굴절
드라마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의미상 굴절은 유개념으로서의 드라마와 종개 념으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 모두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역사적 개 념으로서의 드라마를 석화된 개념으로 정지시키는 한편 드라마가 포괄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적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개념의 재고
유개념으로서의 드라마가 극 일반을 지시하는 종래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 지만 그것의 세목인 종개념으로서의 드라마는 좀 더 넓은 외연을 허용해야 한 다. 드라마는 기왕의 전통적 장르인 연극․영화와 더불어 라디오 드라마 및 텔레 비전 드라마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변화와 발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그 무엇마저도 아우를 수 있는 유기체적 장르 개념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대문자 드라마(Drama)는 희곡과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극성’
을 토대로 인간에 대해 성찰하는 모든 창조적 고안물에 열린 개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