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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대륙.나라 - 김치는 우리 조상님들이 개발한 걸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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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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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발효식품 김치는 언제, 누가 만들게 되었을까?

원시 농경시대에 들어서서 농작물 재배가 어려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지역에 서는 겨울을 나기 위해 각종 식품 재료들을 저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아마 도 여러 저장 방법 중 소금에 절이는 염장법을 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채소 류를 염장하여 저장하는 동안 젖산균의 발효작용에 의해서 젖산을 비롯한 각 종 유기산이 생성되어 상큼한 맛이 나고 저장성이 증진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러한 기술로 김치를 만든 것을 계승₩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김치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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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3000년 전 중국 최초의 시집(詩集) 인『시경(詩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다.

‘중전유려 강장유과 시박시저 헌지황조 증손수고 수천지우(中田有廬 彊場有瓜 是剝是菹 獻之皇祖 曾孫壽考 受天之祐)’

밭 가운데 작은 원두막이 있고 밭두둑에 외가 열려 있다. 이 외를 깎아 김치를 담가 조상에 바침으로써 자손이 수를 누리고 하늘이 내린 복을 받는다.

여기에서 저(菹)라는 글자는 김치를 뜻하는데 원료로 오이를 사용하고 있다. 이후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진(秦)나라 재상인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세기경)가 많은 학자들을 동 원하여 지은『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김치를 뜻하는 저(菹)자가 다시 등장했다.

‘문왕호저 공자문지 축액이식지 삼년연후미지(文王好菹 孔子聞之 蹙額而食之 三年然後美之)’

주나라 문왕이 저를 즐긴다니까 공자가 이 말을 듣고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먹어 3년 후에야 맛이 좋다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자료에 의하면 저(菹)는 오이를 초절임하거나 시어지도록 발효시킨 것으로 일 종의 산미료 역할을 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반도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의 경우에는 서기 752년 나라(奈良)에 지 은 동대사(東大寺)의 정창원(正倉院)이라는 건물 속에 소장된『잡물납장(雜物納帳)』중 염지

김치는 우리 조상님들이 개발한 걸작품이다

조재선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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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鹽漬類) 1종이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와 연희 (延喜) 5년(905) 율령정치(律令政治)를 위한 규칙을 정리해놓은『연희식(延喜式)』을 보면 비교적 상세하게 절임류에 관한 기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8세기의 원평(元平) 연간 (年間) 상황(上皇)의 식료(食料)를 청구한 목간(木簡)중‘수수보리(須須保利)₩과저(苽 菹)₩체지(滓漬)’라고 새겨져 있어 나라(奈良) 시대(645~793)에 저채류(菹菜類)가 이용되 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수수보리 는 백제 사람이었다고 하며 따라서 이것 이 사실이라면 백제에는 이미 침채(딤채의 어원으로 김치를 나타냄)류가 이용되고 있었고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에서는 이미 3000 년 전에 김치와 유사한 제품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1200년 전의 기록에서 등장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에 김치가 나타난 것은 기록상으로는 이 중간쯤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이전의 김치

우리나라에서 김치를 뜻하는 저(菹)자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고려 성종 2년(983년)으로

『예지(禮志)』중 원구진설조 에서이다.

‘두십이 재우위 삼행 재상 제일행 실근저 재전 순저 비석청저차지 제이행 구저 재전이식 어해 토해차지 제삼행 돈박 재전녹해 안해 삼식차지(豆十二 在右爲 三行 在上 第一行 實芹

菹 在前 筍菹 脾析菁菹次之 第三行 豚拍

)’

열두 접시를 오른쪽에 세 줄로 놓되 첫줄에는 미나리김치를, 죽순김치와 순무김치를, 그 다음 둘째 줄에는 부추김치를 밥과 함께 앞에, 어해( )와 토해( )를 그 다음에, 셋째 줄에는 돈박(豚拍)을 앞에, 녹해( ), 안해( ), 삼식( )을 다음에 놓는다.

이 내용을 보면 미나리김치, 죽순김치, 무김치, 부추김치 등이 제사상에 올라간다고 하였 으며,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가포육영(家 圃六詠)』중 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및 박에 대하여 읊은 시(詩)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득장우의삼하식 지염감비구동지, 근반 지저차비대 최호 상도 절사이(菁:得醬尤宜 三夏食 根蟠 地底差肥大 最好 霜刀 截似梨)’

순무로 담근 장아찌는 여름 3개월에 먹으면 아주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는 겨울 내내 반 찬이 되네, 뿌리는 땅속에서 자꾸만 커져 칼로 잘라먹으니 배 같은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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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지만 기타 여러 가지 자료들을 추가적으로 종합해보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김 치가 이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김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조선 중종 13년(서기 1518년)에 편 찬된『구급벽온( )』에서이다. 이 책을 보면 현재의 김치를 뜻하는‘딤채’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우방 온무청저즙합가대소병복불낭다소( )’

무우 딤채국을 집안사람이 다 먹으라

조선시대의 김치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각종 향신료와 젓갈, 고추 등을 사용하게 되었고 18세기가 되어서야 결구 배추가 사용되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포기김치가 개발되었다. 즉 조선시대가 되어서 야 비로소 김치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문헌들이 등장하고 중기 이후에는 그 제조법에 관 한 문헌들이 출판된 것이다.

조선 초기『세종실록(世宗實錄)』의‘사직정배위 찬실도( )’에 나타난 저채류(菹菜類)를 보면 죽순김치(筍菹), 미나리김치(芹菹), 무청김치(菁菹), 부추김치 ( )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고려의『예지(禮志)』에 등장했던 것을 그대로 옮겨 놓 은 듯하다.

한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읊은『순채포유작(巡菜圃有作)』이라는 시를 보면 김 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처음으로 향신료를 함께 사용한 김치의 등장 이다.

‘아원중유수무여연년만의종가소무청라복 와거청개백우잉자소강산총요오미전세심위갱침 위저아생본시류곽 장기지여밀복여당(

)’

우리 뒤안 중 몇 이랑이 남아 해마다 각종 채소 무청, 무, 상치, 미나리, 우엉, 자소를 심고 생강, 마늘, 파, 여뀌 등 5미를 갖추어 김치를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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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 중종 13년(서기 1518년)에 편찬된『구급벽온( )』에서‘딤 채’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하였으며 중종 20년(서기 1525년)에 간행되었던『간이벽온방 ( )』에서도‘박딤채’라는 말이 나온다.

이후 중종 22년(서기 1527년)에 편찬된『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도 저(菹):딤채조 엄 채위저( ) 제( ):채제 엄신물위야( )라 하여 저(菹)를 딤채라 하였는 데 이것은 침채(沈菜)의 발음에서 연유된 것이다.

김치제조의 필수 재료인 고추에 관해서는 임진왜란 전후(서기 1614년)에 이수광이 쓴『지 봉유설(芝峰類說)』중 남만추(南蠻椒)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만추 유대독 시자왜국래고속호 왜개자 왕앙종지 주가 이기맹렬혹화소주이제지음자다사 (南蠻椒 有大毒 始自倭國來故俗呼 倭芥子 往往種之 酒家 利其猛烈或和燒酒以帝之飮者多死)’

고추는 독(毒)이 많고 처음에 일본에서 왔으며 그래서‘왜개자(倭介字)’라고 하였다. 지금 은 왕앙(往往)이 이것을 심고 주점에서는 그 맹렬한 매운맛을 이용하며 때로는 고추를 넣은 소주를 마시고 죽는 사람이 허다하다.

김치류에 관하여 가장 잘 정리된 것으로는 서기 1766년에 유중림이 쓴『증보산림경제(增 補山林經濟)』를 들 수 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증보산림경제는 다시 16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치선(冶膳)편 채소제품(菜蔬諸品) 중에 채소류와 김치류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 에 나오는 절임류는 무려 41종에 달한다.

김장의 방법 및 김치의 형태

고려시대까지는 단순히 채소를 소금에 짜게 절여 저장하는 짠지류가 이용되었다. 따라서 젖산발효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형태의 절임류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부터는 소금을 적게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은 것까지 소위 담저(淡菹)류가 이용되면서부터 젖산발효가 진 행되어 새콤한 맛이 곁들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짠지류와 김치류가 함께 이용되었다.

조선 중기부터는 채소를 소금에 절였다가 다시 다른 재료들을 첨가하여 김치를 담그는 방 법을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소금을 적게 넣어 담가 쉽게 시어지기 때문에 버무린 김치를 독 에 넣은 후 돌로 누르고 밀봉하여 땅에 묻어 숙성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조선 말기에 들 어서면서부터는 일단 소금에 절인 후 씻은 다음 다시 담그는 방법이 보편화되었고 양념의 이용 또한 활발해졌으며 식염 대신 젓갈류를 넣고 해산물과 육류를 함께 담그는 저채류 즉 동치미, 석박지, 총각김치, 배추김치 등이 이용되었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결구배추의 도입으로 통배추김치나 보쌈김치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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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짠지류는 고대로부터 만들어진 짠지류와 고려에서부터 시작된 가지, 오이 등의 장아 찌류가 조선 말기까지 전해져 왔고 젓갈이나 즙장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에는 생 강이나 고추를 간장에 가미하여 절임의 근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상 채소의 종류에 따라 간장, 된장, 즙장, 젓국 등을 선택하여 사용한 제품들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맺는 말

김치는 각종 채소류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하여 숙성시키는 단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소금을 사용하고 겨울을 지내야 하는 지방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자연 발생적으로 만 들어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중국에서 전래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우리 조상들 이 먼저 만들어 이용하였으되 기록상으로는 늦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김치의 종류는 무수히 많고 끊임없이 변천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김치도 옛날에는 없었고 다만 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 있었을 따름이다. 김치는 앞으로도 식생활 양상의 변 화와 더불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천되어 갈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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