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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Strengthening Hwaban Design in the Two-ikgong Style Government Buildings in the Late Joseon Period -Focused on the T-shaped Wooden Shrines and Salleung-dogamuigw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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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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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7.26.2.015

1. 서 론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주요 전각은 다포 또는 익공을 꾸며 격식을 갖추었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관영건축을 살 펴보면, 다포는 궁궐의 정전, 편전 및 정문과 성문의 문 루 등에 한정되고, 나머지 관영건축은 익공으로 꾸몄다.

관영건축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익공식 건축

1)

중 이익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본 논문에서는 편의상 다포, 주심포 및 익공을 갖춘 건물을 다포식, 주심포식 및 익공식 건물로 칭하고자 하며, 익공 숫자에 따라 초익공 식, 이익공식 건물로 명명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초익공식, 이익공식은 새로운 양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기술의 편의를 돕고자 ‘익공을 하나 또는 두 개를 갖춘 형식’을 축약한 명칭이다.

공을 갖춘 경우, 주심도리 선상에 화반을 설치하여 도리 처짐을 방지하고 장식적인 역할을 부가한다.

한국건축에서 화반은 익공식 건물 외에도 주심포식 건 물에도 꾸며져 있으며, 다포식 건물에서도 건물 내부에 갖춤으로써 의장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화반의 역할에 비해 화반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화반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박 기선의 석사논문

2)

한 편 정도이다. 이 논문은 현존하는 주심포식, 익공식 및 다포식의 건축물을 대상으로 화반 의 사용 위치에 따라 도리칸과 보칸으로 구분하여 구조

2) 박기선, 韓國木造建築의 花盤에 關한 硏究 ,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 사학위논문, 1993

조선후기 이익공식 관영건축에서 화반의 의장성 강화

-정자각과 산릉도감의궤를 중심으로-

A Study on Strengthening Hwaban Design

in the Two-ikgong Style Government Buildings in the Late Joseon Period -Focused on the T-shaped Wooden Shrines and Salleung-dogamuigwes-

이 상 명*

1)

Lee, Sang-Myeong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 강사, 공학박사)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rehend strengthening Hwaban(flower-shaped support) design in the Two- lkgong style government buildings in the late Joseon period through the T-shaped wooden shrines, the architectures of royal palace and royal ancestral shrine. Following conclusions have been reached through the study. First, Janghwaban(the long plate carved with flower-shaped support) was installed in Injeongjeon(1805) for the first time.

It took 40 years to introduce Janghwaban to the government building of Two-lkgong style compared with Injeongjeon. Second, the quantity of Hwaban had been increased from 1 to 5 for 300 years in the government building of Two-lkgong style. This had been steadily increased with the aim of strengthening design. Third, there was a limit to the increase in the quantity of Hwaban. The first reason was to control the rhythm between the Hwaban and the Pobyeok(the wall between Hwabans). The second reason was that if the Pobyeok was too narrow, it was difficult to plaster. The latter was solved by introducing the Janghwaban. Fourth, in attempting to stylize differently from Jusimpo(simple bracket system), the quantity of Hwaban increas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the government building of the Two-lkgong style. Since the reconstruction of Gyeongbokgung Palace, Hwaban combined style with Ungong served as the norm of the royal palace architecture in the last Joseon period.

주제어 : 화반, 장화반, 운공, 이익공, 관영건축, 산릉도감의궤, 영건도감의궤

Keywords : Hwaban, Janghwaban, Ungong, Two-ikgong, Government building, Salleung-dogamuigwe, Yeonggeon-

dogamuigwe

(2)

적인 특성을 고찰하였고, 형태 분류를 시도하여 시기별 로 화반 형태의 변화 과정을 도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반 용어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영건도감의궤(營 建都監儀軌) 13건을 대상으로 화반의 용례를 정리한 바 있는데, 세부적인 분석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고, 장화반 (長花盤)이 20세기 영희전 영건 시 사용되었음을 언급하 였다.

3)

박기선의 석사논문에서는 장화반의 용례에 대해

 인정전영건도감의궤(1805)에서 長花班(장화반), 短花班 (단화반)이 쓰였고, 중화전영건도감의궤(1904)에서도 長花盤(장화반)이 쓰였음을 정리한 바 있다.

4)

이외에 화 반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조선 왕릉 내 정자각은 익공식 건축물로, 그중 이익공 식 정자각이 28동 현존하고, 관련 문헌으로 산릉도감의궤 (山陵都監儀軌)가 남아 있어 문헌과 유구의 직접 비교를 통해 10~20년 단위의 변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정자각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5)

이익공식 관영건축에서 화반의 의장성이 강화되 는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정자각에서 보이는 화반의 특 징이 도성 내 궁궐과 종묘 건축 등 관영건축에서도 나 타나는지 분석하여, 도성 및 주변에 건립된 이익공식 관 영건축에 설치한 화반의 특징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산릉도감의궤와 영건도감의궤에 보이는 화반의 용 례를 정리하고자 한다.

연구 대상을 관영건축 중 도성 내 종묘 및 궁궐건축 과 도성 외 정자각으로 한정한 것은 국가적인 재원과 역 량(도감의 설치, 우수한 장인 동원 등)이 발휘된 당대 최 고 수준의 관영건축에서 전례라는 구심력을 깨고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함이며, 향후 지방의 관영건축 및 사찰 등 다른 유형의 건축과 비교분석을 위 한 기초 자료의 확보 차원이다.

연구 범위로 삼은 산릉도감의궤는 18건이고, 그중 산릉 도감의궤와 직접 비교가 가능한 현존 정자각은 12건이며, 그 외 현존 정자각 8건을 포함하여 20건을 연구 대상으 로 삼았다. 정자각의 건립 및 중건 시기는 국립문화재연 구소에서 발간한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6)

를 참조

3) 김동욱·김경표·이왕기·박명덕, 朝鮮時代 建築用語 硏究: 朝鮮後期 營建儀軌書에 기록된 部材名稱의 變遷에 대하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6권, 3호, 1990

4) 박기선, 앞의 논문, 13~14쪽

5)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궁궐건축도 4건을 다루지만 사례가 적고 그 4건도 조선후기의 특징이 이어지는 것으로,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조선후 기로 한정하였다.

하였다. 정자각의 화반 도면과 규격은 실측 및 수리보고 서와 실측 및 수리 관계자로부터 CAD 도면을 제공받아 정리하였고, 현장조사를 병행하여 확인하였다.

No. 능 호 정자각

*

의궤명 (편찬 시기) 1 영릉(英陵) 1622

2 영릉(寧陵) 1870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1659) 3 정릉(靖陵) 1669

4 정릉(貞陵) 1669 5 경릉(敬陵) 1670

6 숭릉(崇陵) 1674 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1674) 7 익릉(翼陵) 1681 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1681) 8 휘릉(徽陵) 1895 莊烈王后徽陵山陵都監儀軌(1689) 9 강릉(康陵) 1695

10 광릉(光陵) 1696 11 현릉(顯陵) 1699

12 명릉(明陵) 1870 仁顯王后明陵山陵都監儀軌(1702) 13 의릉(懿陵) 1724 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1725) 14 홍릉(弘陵) 1757 貞聖王后弘陵山陵都監儀軌(1757) 15 원릉(元陵) 1776 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1776) 16 융릉(隆陵) 1789 莊獻世子顯隆園園所都監儀軌(1789) 17 건릉(健陵) 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1800) 18 건릉(健陵) 1821 正祖孝懿王后健陵山陵都監儀軌(1821) 19 인릉(仁陵) 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1835) 20 경릉(景陵) 1843 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1843) 21 수릉(綏陵) 翼宗綏陵山陵都監儀軌(1846) 22 수릉(綏陵) 1855 翼宗綏陵遷奉山陵都監儀軌(1855) 23 인릉(仁陵) 1856 純祖仁陵遷奉山陵都監儀軌(1856) 24 예릉(睿陵) 1864 哲宗睿陵山陵都監儀軌(1864) 25 휘경원(徽慶園) 1864 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1864) 26 건원릉(健元陵) 1870

※ *은 정자각 건립 또는 중건 시기이고, 능호에 진하게 표시한 것은 화반의 분석 대상이며, 표 셀에 음영을 둔 부분은 정자각과 산릉도감 의궤 간 비교가 가능한 대상임.

표 1. 연구 대상 정자각과 산릉도감의궤

영건도감의궤는 <표 3>과 같이 17건으로, 기존 연구 자료에 의궤 기록을 추가하여 살펴보았다. 궁궐 및 종묘 건축은 현존하는 이익공식 건축물 18건을 대상으로 삼 았다. 실측 및 수리보고서를 참조하여 건립, 수리 시기 및 화반 관련 수치를 정리하였고, 일부는 필자가 조사하 였다. CAD 도면은 확보하지 못하여 정자각에서 시도한 세부적인 수치 분석(화반 간격 상세, 화반 및 행공 규 격) 및 도면 분석(화반 배열 규격 및 방식)은 진행하지 못하였다.

6)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Ⅸ, 2009~2015

(3)

2. 의궤에 기록된 화반 용례

 화성성역의궤 도설 에는 조선후기 관영건축에 설치 된 파련형 화반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림 1. 화성성역의궤 卷首 圖說 의 화반 그림

<표 2>는 산릉도감의궤 중 정자각 건립과 관련된 조 성소(造成所) 내 품목질(稟目秩) 중 목물(질)에 기록된 부 재 명칭을 시기별로 정리한 것이다. 산릉도감의궤에서 화 반 기록은 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1659)부터 확인되는 데, 花盤(화반)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산릉도감의궤에서 두 차례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花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다른 용례로는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1835)에 畵 盤(화반)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가장 늦은 시기인 철종 예릉산릉도감의궤(1864)에서는 長畵盤(장화반)과 沙㐊畵 盤(사슬화반)이라는 용례가 확인된다. 따라서 산릉도감의 궤에서는 花盤이라는 명칭이 기준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花盤은 ‘꽃을 장식한 받침’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화 반의 장식적인 성격에 명칭을 부여한 이두식 음독자

7)

라 고 할 수 있다. 畵盤도 비슷한 의미인데, ‘그림을 그려놓 은 받침’의 의미로 이두식 음독자에 해당한다. 長畵盤은 긴 화반으로 화반이 하나의 판재로 연결된 부재를 말한 다. 沙㐊畵盤은 생소한 용어인데, 장화반과 혼선을 피하 기 위해 일반적인 화반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사슬화 반에서 沙㐊은 의궤에서 주로 긴 고리 형태의 철물을 일컫는데, 화반과 결합하여 명칭을 부여한 것은 매우 특 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슬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는 옛말로 ‘사’로 표기하고 서표(書標), 제비, 표찰(標 札) 따위로 쓰이는 대쪽

8)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7) 의궤 상의 건축 용어를 한자를 빌려 우리말로 기록하던 표기법을 차자 표기법이라고 한다. 차자 표기는 음독자, 음가자, 훈독자, 훈가자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음독자는 한자를 음(音)으로 읽으면서 그 표의성 을 살려서 이용한 차자이고, 음가자는 한자를 음으로 읽되 그 표의성을 버리고 표음성만 이용한 차자이다. 훈독자는 한자를 훈(訓)으로 읽으면 서 그 표의성을 살려서 이용한 차자이고, 훈가자는 훈으로 읽되 그 표 의성을 버리고 표음성만을 이용한 차자이다. [출처: 김왕직, 5. 건축 형 식과 용어의 표기: 2. 건축 용어 표기법 고찰 (영건의궤연구회, 영 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649~651쪽]

‘낱개’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사슬화반으로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No. 능 호 시기 화 반 No. 능 호 시기 화 반 1 영 릉 1659 花盤 10 건 릉 1800 花盤 2 숭 릉 1674 花盤 11 건 릉 1821 花盤 3 익 릉 1681 花盤 12 인 릉 1835 畵盤 4 휘 릉 1699 花盤 13 경 릉 1843 花盤 5 명 릉 1702 花盤 14 수 릉 1846 花盤 6 의 릉 1724 花盤 15 수 릉 1855 花盤 7 홍 릉 1757 花盤 16 인 릉 1856 花盤 8 원 릉 1776 花盤 17 예 릉 1864 長畵盤

沙㐊畵盤 9 융 릉 1789 花盤 18 휘경원 1864 花盤

※ ‘시기’는 의궤 편찬 시기임.

표 2. 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된 화반 용어

영건도감의궤에서는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부터 화반의 용례가 확인되는데, <표 3>과 같이 花盤이라는 용례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畵盤도 세 차례 기록되 어 있다. 산릉도감의궤와는 달리 花班(화반)이라는 용례 가 세 차례 확인되는데, 이는 花(음독자), 班(음가자)의 합성어에 해당한다.

그림 2. 인정전 상층의 포작 상부 장화반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실측조사보고서, 1998)

앞서 언급했지만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서 長花班,

短花班의 용례가 확인되는데, 이는 산릉도감의궤와 영건

도감의궤를 통틀어 장화반이 최초로 기록된 예이다. 短

花班은 장화반에 대비하여 일반 화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長花班, 短花班은 같은 건물의 중수 과정을 기록

한 인정전중수의궤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정

전은 다포식 중층 건물로 내부 포작 상부에 <그림 2>와

8)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main.jsp)

(4)

같이 장화반이 설치되어 있다. 20세기 초인 영희전영건 도감의궤부터는 산릉도감의궤에 보이는 長花盤과 沙㐊 畵盤의 용례가 나타난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서도 長花盤의 용례가 확인된다.

 화성성역의궤에서는 다포식 중층 문루인 팔달문(1794) 과 장안문(1794)에 花盤과 花盤間板(화반간판)을 사용했 는데, 이는 다른 의궤에서는 보이지 않는 용례이다. 花 盤間板은 ‘화반 사이에 설치한 판(재)’라고 풀이된다. 현 팔달문에서도 <그림 3>과 같이 화반과 분리된 별도의 판재가 확인되는데, 이 부재가 花盤間板이다. 화성성역 의궤에는 착고에 해당하는 부재를 浮椽間板(부연간판) 이라 표기되어 있어, 화반간판은 부연간판과 같은 표기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화반간판은 화성성역의 궤에서 한 차례 나타나고 이후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반간판은 인정전에서 처음으로 용례가 확인되는 장화반을 설치하기 이전, 단일 부재 화반에서 장화반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부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 팔달문 하층의 포작 상부 화반과 화반간판

(수원시·화성사업소, 水原 八達門 解體·補修工事 修理報告書, 2013)

이상과 같이 화반은 여러 가지 용례가 보이지만 그중 花盤이라는 명칭이 조선후기에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사 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다포식 중층 문루에 화반과 화반간판이라는 용례가 처음이자 마 지막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이후 다포식 중층 정전인 인 정전(1805)에 쓰인 장화반으로 진화하기 위한 과도기적 인 모습으로 해석된다. 익공식 건물에서 장화반은 철종 예릉산릉도감의궤(1864)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다포식 중층 건물과는 기록상 약 60년 정도의 시차가 확인된다.

장화반에 대비하여 일반 화반은 短花班, 沙㐊畵盤, 花盤 등으로 표기하였다.

No. 의 궤 명 시기 건물명 화 반

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大造殿 花盤

寶慶殿 花盤

2 종묘개수도감의궤 1726 正殿 花盤

3 진전중수도감의궤 1748 正堂 畵盤

4 경모궁개건도감의궤 1776 正堂 花盤

5 화성성역의궤 1801

蒼龍門 華西門

*

東將臺

*

花盤 八達門

*

長安門

*

花盤

*

花盤間板

*

6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05 仁政殿 長花班

短花班

7 현상궁별묘도감의궤 1824 正堂 花班

8 서궐영건도감의궤 1832 會祥殿 花盤

9 창경궁영건도감의궤 1834 通明殿 花盤

10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834 熙政堂 花盤

11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1836 正殿 花盤

12 인정전중수의궤 1857 仁政殿

*

長花班

*

短花班

*

13 남전증건도감의궤 1858 正殿

*

花盤

*

14 영희전영건도감의궤 1900 正殿 長花盤

沙㐊畵盤

15 진전중건도감의궤 1901 正殿 長花盤

沙㐊畵盤

16 중화전영건도감의궤 1904 中和殿 長花盤

17 경운궁중건도감의궤 1906 咸寧殿

景孝殿 長花盤

花盤

※ 본 표는 김동욱 외 3인과 박기선의 앞의 논문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는 필자가 추가한 것임. ‘시기’는 의궤 편찬 시기임.

표 3. 영건도감의궤에 기록된 화반 용어

3. 왕릉 정자각의 화반 배열

3-1. 산릉도감의궤와 정자각의 화반 수량 비교 산릉도감의궤에는 화반 명칭과 함께 수량이 표기되어 있다. 이를 현존하는 정자각과 비교한 것이 <표 4>이다.

산릉도감의궤와 현존하는 정자각을 비교할 수 있는 사례

는 숭릉 정자각(1674)부터이다. 8칸 팔작지붕인 숭릉 정

자각은 의궤 기록상 화반 수량이 24개인데, 현존 정자각

에는 22개가 설치되어 2개 차이가 나타난다. 정전 주심

도리 선상에 어칸은 2개, 협칸 1개, 배위청에는 1개씩 설

치되어 있다. 8칸 맞배지붕인 익릉 정자각(1681)은 의궤

상 수량이 숭릉 정자각과 같이 24개인데, 현존 정자각은

18개로 6개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는 맞배지붕으로 계획

했음에도 숭릉 정자각의 전례를 따라 수량을 산출하면서

발생한 오류로 판단된다.

9)

휘릉과 명릉 정자각도 8칸에

(5)

맞배지붕임에도 의궤 기록이 숭릉 정자각과 동일하게 표 기되어 있다. 이 또한 익릉 정자각에서 보이는 동일한 방식의 오류로 여겨진다.

10)

이러한 오류는 8칸 맞배지붕 인 의릉 정자각까지 이어지는데, 현 정자각의 화반 수량 은 30개로 의궤 기록보다 6개나 많아진다. 이는 정전 주 심도리 선상에 어칸은 3개, 협칸 2개, 퇴칸 1개, 배위청

9) 인경왕후익릉산릉도감의궤, 조성의궤 : 丁字閣 正殿 五間 前退 三間 初立工 二立工 草箭尾 椽蓋板 外木道里 間架制度一如 崇陵丁字 閣 而除衝舌去扇椽 左右翼閣 及拜位廳前面等處 設風遮板.

10)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궤, 조성물력의궤 : 丁字閣 … 架制度

… 一依 翼陵丁字閣; 인현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조성의궤 : 丁字閣

… 間架制度一如 崇陵 翼陵丁字閣.

에는 2개씩 설치되어, 이전에 비해 한 칸당 화반의 설치 수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홍릉, 원릉 및 융릉 정자각의 경우는 의궤 와 현존 정자각 간 화반 수량이 일치하여, 이전 시기에 발생한 수량 산출의 오류가 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화반 수량이 이전의 30개에서 38개로 대폭 증가한다. 정조효의왕후건 릉산릉도감의궤서도 동일하게 38개로 기록되는데, 이는 정조 붕어 후 건립한 건릉 정자각(1800)을 전범으로 삼았 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건릉 정자각(1821)은 효의왕후 사 후에 건립한 것으로, 화반 수량은 42개로 의궤 수량보다 No. 능 호 의 궤

편 찬 시 기 정자각

건 립 시 기 평면

(칸) 지붕 공 포

의궤 기록 현 정자각 총 수량 화 반

현 정자각 주칸당 화반 수량

정전 주심도리 정전 종도리 정 전

측 면 배위청

정 전 배위청 어칸 협칸 퇴칸 어칸 협칸 퇴칸

1 英陵 1622 5 맞 초 초 - - - 1 1 - - -

2 寧陵 1659 1703 [5] [팔] [이] [이] 花盤 18

3 靖陵 1669 5 맞 이 초 1 1 - - - - - -

4 貞陵 1669 5 맞 이 초 1 1 - - - - - -

5 敬陵 1670 5 맞 이 초 1 1 - - - - - -

6 숭릉 1674 1674 8 팔 출이 이 花盤 24 22 2 1 1 - - - 1 1

7 익릉 1681 1681 8 맞 출이 이 花盤 24 18 2 1 1 - - - - 1

8 강릉 1695 6 맞 이 이 2 1 - - - - - 1

9 광릉 1696 6 맞 이 이 2 1 - - - - - 1

10 현릉 1699 5 맞 이 이 2 1 - - - - - 1

11 휘릉 1699 1895 [8] [맞] [출이] [이] 花盤 24 12 명릉 1702 1870 [8] [맞] [출이] [이] 花盤 24

13 의릉 1725 1724 8 맞 출이 이 花盤 24 30 3 2 1 - - - - 2

14 홍릉 1757 1757 5 맞 출이 이 花盤 22 22 3 2 - - - - - 2

15 원릉 1776 1776 5 맞 출이 이 花盤 22 22 3 2 - - - - - 2

16 융릉 1789 1789 5 맞 출이 이 花盤 30 30 3 3 - - - - - 3

17 건릉 1800 5 맞 출이 이 花盤 38箇

18 건릉 1821 1821 5 맞 출이 이 花盤 38箇 42 4 3 - 4 3 - - 3

19 인릉 1835 5 맞 출이 이 畵盤 42立

20 경릉 1843 1843 5 맞 출이 이 花盤 42箇 28(42) 1(4) 1(3) - 4 3 - - 3

21 수릉 1846 5 맞 출이 이 花盤 42箇

22 수릉 1855 1855 5 맞 출이 이 花盤 42箇 28(42) 1(4) 1(3) - 4 3 - - 3 23 인릉 1856 1856 5 맞 출이 이 花盤 42箇 28(42) 1(4) 1(3) - 4 3 - - 3 24 예릉 1864 1864 5 맞 출이 이 長畵盤 6箇

沙㐊畵盤 21箇 28(42) 1(4) 1(3) - 4 3 - - 3 25 휘경원 1864 1864 5 맞 출이 이 花盤 42箇 28(42) 1(4) 1(3) - 4 3 - - 3

26 건원릉 1870 5 맞 출이 이 1(4) 1(3) - 1(4) 1(3) - - 3,2

※ 평면, 공포는 현 정자각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 ]은 의궤 기록상 정자각의 모습임. 지붕에서 ‘맞’은 맞배지붕, ‘팔’은 팔작지붕이고, 공포에서 ‘초’는 초익공,

‘이’는 이익공, ‘출이’는 출목 이익공을 뜻함. ( )는 장화반에 초각된 화반의 수량임.

표 4. 산릉도감의궤 기록과 현존 정자각 간 화반 수량 비교

(6)

4개 많게 설치되어 있다. 이는 정전 주심도리 선상에 어 칸은 4개, 협칸 3개, 배위청에는 3개씩 설치되어, 이전에 비해 한 칸당 설치 수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 의 정자각에는 정전 어칸에 3개씩 설치되어 있으므로, 이 와 같이 배열할 경우 총 38개로 산출되어, 아마도 이러한 방식으로 물량을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1835)에는 화반 수량이 42개로 기록되어 있는데, 건릉 정자각의 화반 수량과 일치하여 인릉 정자각 건립 당시에는 정확하게 화반 물량을 산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1843)부터 수빈휘경원천 봉원소도감의궤(1864)까지는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를 제외하고 모두 화반 수량을 42개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 만 현존하는 경릉 정자각(1843)부터는 주심도리 선상에 장화반이 설치되어 있다. 이 경우 장화반에 새겨진 화반 의 수량과 일반 화반 수량을 합산하면 의궤 기록과 동일 하게 산출된다.

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장화반 6개, 사슬화반 21개로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 정자각의 경우 정전의 주 심도리 선상에는 장화반이 6개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부 위에는 22개가 설치되어 1개의 오차는 있지만 비교적 정 확하게 물량이 산출되어 있다. 장화반은 경릉 정자각 (1843)부터 설치되었는데, 의궤 기록에서는 약 20년 뒤인

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부터 등장하여, 실제 적용된 부재 와 의궤 기록 간 시차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더하여, 1835년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에서 화반 수량이 42개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때에 장화반이 등장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1)

지금까지는 산릉도감의궤와 현존 정자각을 비교하여 의궤 기록상 화반 수량 산출 방식과 오류가 조정되는

11)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에는 내벽 중인방 하부에 판벽을 설치한 기 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기록상 조선후기 정자각에 처음으로 설치된 것 이다. 이후 정자각에서는 내부에 판벽이 설치되는데, 1843년에 건립된 경릉 정자각도 판벽과 장화반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인릉 정자각(1835) 부터 장화반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No. 능 호 시기

주칸 길이 화반수 어칸 화반 간격 화반 규격 행공 규격

어 칸 협 칸 어칸 협칸 기둥 중심 화반소로 ~

행공소로 ~

화반소로 화반소로 간 길 이

춤 폭 길이 춤 폭 최대 상면 하면

1 英陵 1622 4,100(13.0) 3,180(10.0) 1 1 2,050(6.54) -   -   500 428 216 270 105 - - - 2 靖陵 1669 3,844(12.5) 3,230(10.5) 1 1 1,922(6.25) 1,121(3.65) - 766 631 253 * * 1,735 * * 3 貞陵 1669 3,720(12.0) 3,210(10.5) 1 1 1,860(6.00) 1,072(3.46) - 760 654 258 * * 1,800 * * 4 敬陵 1670 4,000(13.0) 3,100(10.0) 1 1 2,000(6.50) 1,270(4.13) - 758 689 276 * * 1,539 * * 5 숭릉 1674 4,388(14.0) 3,138(10.0) 2 1 1,538(4.91) 1,074(3.43) 1,341(4.28) 598 549 256 275 100

,990 155 100

6 익릉 1681 4,290(14.0) 2,980(10.0) 2 1 1,478(4.82)

1,827(2.70) 1,256(4.10) 570 523 311 304 90 1,160 234 90

7 강릉 1695 4,330(14.0) 3,100(10.0) 2 1 1,443(4.60)

1,819(2.61) 1,443(4.60) 484 395 381 270 95 1,343 217 95

8 광릉 1696 4,350(14.0) 3,300(10.5) 2 1 1,636(5.22)

1,901(2.87) 1,078(3.44) 518 456 294 270 90 1,560 210 90

9 현릉 1699 4,410(14.0) 3,150(10.0) 2 1 1,543(4.92)

1,946(3.02) 1,323(4.22) 530 391 353 300 96 1,290 171 96

10 의릉 1724 4,340(14.0) 3,110(10.0) 3 2 1,271(4.06)

1,743(2.37) 1,821(2.62) 543 516 251 300 105 1,148 210 105

11 홍릉 1757 4,230(14.0) 3,450(11.5) 3 2 1,282(4.09)

1,613(1.96) 1,854(2.72) 573 522 180 317 105 1,295 200 105

12 원릉 1776 4,140(13.5) 3,510(11.5) 3 2 1,258(4.01)

1,637(2.03) 1,793(2.53) 568 525 308 306 105 1,404 234 105

13 융릉 1789 4,330(14.0) 3,660(12.0) 3 3 1,367(4.36)

1,798(2.55) 1,798(2.55) 447 376 213 330 90 1,257 240 90

14 건릉 1821 4,330(14.0) 3,690(12.0) 4 3

1,980(3.13) 1,435(1.39) 1,780(2.49) 571 543 272 300 10 1,200 240 110

15 경릉 1843 4,290(14.0) 3,390(11.0) 4 3 1,051(3.35)

1,511(1.63) 1,729(2.33) 519 426 223 330 90 1,170 218 90

16 수릉 1855 4,260(14.0) 3,370(11.0) 4 3 1,049(3.35)

1,499(1.59) 1,724(2.31) 606 549 217 298

6 1,178 235 96 17 인릉 1856 4,260(14.0) 3,660(12.0) 4 3

1,979(3.12) 1,481(1.53) 1,766(2.44) 707 610 252 330 90 1,079 275 90

18 예릉 1864 4,298(14.0) 3,377(11.0) 4 3 1,048(3.34)

1,480(1.53) 1,734(2.34) 674 607 294 361 92 1,228 245 92

19 휘경원 1864 4,320(14.0) 3,400(11.0) 4 3 1,001(3.19)

1,513(1.64) 1,768(2.45) 627 563 221 320 93 1,069 240 93

20 건원릉 1870 4,312(14.0) 3,388(11.0) 4 3 1,071(3.42)

1,545(1.74) 1,723(2.31) 536 453 247 330 96 1,158 280 96

※ ‘시기’는 정자각의 건립 시기임. *는 실측치를 확보하지 못한 것임. 자(尺) 치수는 어칸의 주칸 길이를 완척으로 나누어 산출하여 영조척으로 계산한 값임.

표 5. 정자각 정전의 화반 배열 간격과 부재 규격

[단위: mm(尺)]

(7)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실제 장화반의 등장 시기 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 과정 중에 도리 선상 에 배열하는 화반의 수량이 점차적으로 증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 고자 한다.

3-2. 화반 배열의 수량 증가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정자각은 세종대왕의 영 릉( 英陵) 정자각(1622)이다. 영릉( 英陵) 정자각은 초익공을 갖추어 주심도리 선상에는 화반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정전 종도리 선상에 어칸과 협칸에 화반이 각각 한 개씩 설치되어 있다. 이후 19세기 전까지 종도리 선 상에는 화반을 설치하지 않게 된다.

그림 4. 영릉(英陵) 정자각(1622)의 종도리 뜬창방 상부 화반

1669년에 건립된 정릉(靖陵), 정릉(貞陵)과 1670년에 건 립된 경릉(敬陵) 정자각에서는 정전은 이익공, 배위청은 초익공을 갖추었는데, 정전 어칸과 협칸의 주심도리 선상 에 화반을 1개씩 설치하였다.

이후 1674년 숭릉 정자각에서는 정전은 출목 이익공, 배위청은 이익공을 갖추었는데, 정전 어칸에는 화반 2개, 협칸 및 퇴칸, 배위청에는 화반 1개씩을 설치하였다. 즉 이전 시기에 어칸에 화반 1개를 뒀던 것을 2개로 늘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724년 의릉 정자각을 건립하기 전까지 유지된다.

의릉 정자각부터는 화반 배열의 수량이 이전에 비해 1 개씩 증가하여, 정전 어칸에는 3개, 협칸과 배위청에는 2 개씩 배열하였다. 이러한 배열 방식은 원릉 정자각(1776) 까지 지속된다. 융릉 정자각(1789)에서는 정전 협칸과 배 위청에 화반 배열 수량이 증가하는데, 이전에 비해 1개씩 추가하였다.

건릉 정자각(1821)부터는 융릉 정자각에 비해 정전 어 칸에 화반을 1개 증가시켜 4개를 배열하였는데, 이때부

터는 정전 종도리 선상에도 주심도리 선상과 동일한 수 량으로 화반을 배열하였다.

종도리 선상에 화반 배열을 하게 된 것은 정자각의 구 조 변화와 관련된다. 건릉 정자각 이전, 도리 위치는 대 부분 삼분변작으로 잡았는데, 건릉 정자각부터는 사분변 작으로 가구를 변경하였다.

12)

그러한 과정 중에 지붕의 높이를 일정 범위에서 유지하기 위해 중도리의 위치를 낮춰 잡게 되었고, 따라서 대공의 높이가 그만큼 상승하 였다.

13)

이러한 변화 속에 종도리 하부 뜬창방 위에 화반 을 두어 내부 의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경릉 정자각(1843)부터는 건릉 정자각에 비해 주칸당 화반 배열의 수는 동일하지만 주심도리 선상에는 장화반 을 설치하였고, 1870년에 중건된 건원릉 정자각의 경우에 는 종도리 선상까지 장화반을 설치하였다.

3-3. 화반 간격 축소에 따른 부재 규격 변화 조선후기 정자각의 도리 선상에 주칸당 화반 수량이 증가하였으므로 화반의 배열 간격이 축소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화반 배열 간격을 살펴보기에 앞서 정전 어칸 의 주칸 길이의 차이 정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표 5>와 같이 숭릉 정자각 이전의 주칸 길이는 3,720

~4,100㎜로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2~13자(尺)였는데, 숭 릉 정자각 이후의 주칸 길이는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원 릉 정자각을 제외하고는 19세기 후반까지 14자를 유지하 였다. 따라서 1674년부터는 주칸 길이에 큰 변화가 없었 음을 알 수 있다.

숭릉 정자각부터 앞선 시기보다 최소 1자 정도의 주칸 길이가 증가하였고, 화반 수량도 1개에서 2개로 증가하였 다. 숭릉 정자각부터 17세기 말까지는 화반 2개를 배열하 였는데, 기둥 중심에서 화반소로까지 간격은 4.6~5.22자 이고, 화반소로 간 간격은 3.44~4.60자이다.

14)

의릉 정자각(1724)부터 18세기 말까지 어칸에는 화반 을 3개씩 설치하였는데, 화반소로까지 간격은 4.01~4.36 자이고, 화반소로 간 간격은 2.53~2.72자로 17세기 후반 에 비해 간격이 축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12) 이상명, 산릉의궤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 기술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39~40쪽

13) 원릉 정자각(1776)의 경우 주심도리~중도리 간, 중도리~종도리 간 높이는 각각 950㎜, 1,170㎜이고 합산치는 2,120㎜이다. 건릉 정자각 (1821)의 경우 주심도리~중도리 간, 중도리~종도리 간 높이는 각각 780㎜, 1,350㎜이고 합산치는 2,130㎜이다. 즉 건릉 정자각은 원릉 정자 각에 비해 중도리의 높이를 170㎜ 낮춰 잡았고, 대공의 높이는 그 만 큼 상승하였다. 영릉(英陵, 1622)도 사분변작으로 가구를 구성하였고, 종도리 선상에 화반을 설치하였다.

14) 화반 배열 간격은 당시 조영 계획의 이해를 위해 자(尺) 치수를 중 심으로 기술하였다.

(8)

건릉 정자각(1821)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어칸에는 4개 씩 설치하거나 장화반에 초각하였는데, 화반소로까지 간 격은 3.12~3.42자이고, 화반소로 간 간격은 2.31~2.49자 로 18세기에 비해 간격이 다시 축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반의 배열 간격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화반과 행공의 길이 변화가 동반하여 발생하였다. 정전의 주심도리 선상 에 어칸에 화반을 하나 둔 경릉(敬陵) 정자각(1670)까지 화반의 최대 길이는 758~766㎜로 평균은 761㎜이며, 행 공 길이는 1,539~1,800㎜로 평균은 1,691㎜이다.

정릉(靖陵) 정자각(1669)

익릉 정자각(1681)

그림 5. 17세기 정자각 정전 배면의 화반 배열

숭릉 정자각부터 17세기 말까지는 어칸에 2개씩 화반 을 배열하는데, 화반의 최대 길이는 484~598㎜로 평균은 540㎜이며, 행공의 길이는 990~1,560㎜로 평균은 1,269㎜

이다. 평균치를 기준으로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화반의 최대 길이는 221㎜, 행공 길이는 423㎜로 함께 줄어들었 는데, 그중 행공 길이가 대폭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반의 기능은 도리와 장혀의 처짐을 방지하는 구조적 기능과 장혀와 창방 사이를 꾸미는 의장적 역할을 하는 데, 화반이 2개로 증가함에 따라 하중을 분담할 수 있게 되면서 화반의 길이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전에 화반 1개를 설치했을 때는 행공을 좌우로 최대한 뻗어서 의장과 구조적인 역할을 병행해야 했는데, 화반을 2개 배 열함으로써 행공 길이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릉 정자각(1724)부터 18세기 말까지 어칸에 화반을 3개씩 설치하였는데, 화반의 최대 길이는 447~573㎜로 평균은 533㎜이고, 행공 길이는 1,148~1,404㎜로 평균은 1,276㎜이다. 이는 이전 시기와 거의 유사한 길이이다.

화반 수량을 증가시켰음에도 화반과 행공의 길이에는 변 화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부재 규 격은 유지한 상태에서 화반의 배열 간격만 줄이도록 계

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릉 정자각(1821)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어칸에는 4개 씩 설치하거나 장화반에 초각하였는데, 화반의 최대 길이 는 519~707㎜로 평균은 606㎜이고, 행공 길이는 1,069~

1,228㎜로 평균은 1,155㎜이다. 화반 수량이 증가하였으므 로 화반과 행공의 길이도 함께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지 만, 실제는 이전 시기에 비해 화반 길이가 오히려 약간 증가하였고, 행공 길이는 줄어들었다. 이 또한 이전 시기 와 마찬가지로 화반 간격을 좁히고자 하는 의도로, 화반 과 포벽 간의 율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미세하게 수치를 조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부재 치수 계획은 화반 배열의 간격을 어 떻게 설정했느냐와 연동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다음 절 에서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3-4. 화반 배열의 간격 계획

숭릉 정자각 이전에는 주칸당 화반 1개를 두었으므 로 화반은 당연히 칸의 중앙에 설치하였다. 숭릉 정자 각 이후 어칸에 설치된 화반 수량이 복수로 증가함에 따라 화반 배열 간 간격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강릉 정자각(1695)

광릉 정자각(1696)

현릉 정자각(1699)

그림 6. 정자각의 화반 배열 규격(17세기 말)

숭릉 정자각 이후 어칸에 화반을 2개씩 배열하였는데,

<그림 6>에서 보듯 강릉 정자각(1695)은 주칸을 3등분

으로 나누어 화반 중심을 설정하였다. 이듬해 중건된 광

릉 정자각은 행공의 외단과 화반 외단 간의 길이를 거

의 일치시켜 화반을 배열하였다. 현릉 정자각은 강릉과

광릉 정자각의 중간 정도로 화반을 배열하였다. 세 가지

사례 모두 다른 방식이 적용된 것이다. 강릉 정자각은

(9)

등간격으로 화반을 배열함에 따라 중앙 포벽이 너무 넓 어져 균형감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광릉 정자 각은 그러한 면을 보완하기 위해 간격을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현릉 정자각은 어중간한 선택을 한 것 으로 판단된다.

18세기에는 어칸에 화반을 3개씩 배열하는데, <그림 7>

의릉 정자각(1724)

원릉 정자각(1776)

융릉 정자각(1789)

의릉 정자각(1724)

원릉 정자각(1776)

융릉 정자각(1789)

그림 7. 정자각의 화반 배열 규격(18세기) 그림 8. 정자각의 화반 배열 방식(18세기)

건릉 정자각(1821)

경릉 정자각(1843)

예릉 정자각(1864)

휘경원 정자각(1864)

건원릉 정자각(1870)

건릉 정자각(1821)

경릉 정자각(1843)

예릉 정자각(1864)

휘경원 정자각(1864)

건원릉 정자각(1870)

그림 9. 정자각의 화반 배열 규격(19세기) 그림 10. 정자각의 화반 배열 방식(19세기)

(10)

에서 보듯 의릉 정자각은 화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원 릉 정자각은 화반의 윗면 끝단을 기준으로 화반과 행공 소로 끝단 간 간격이 거의 일치하게 화반을 배열하였다.

융릉 정자각 역시 화반 윗면 끝단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배열하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원릉 정자각에 비해 화반 간보다 화반과 행공소로 간 간격이 약간 넓다.

이러한 화반 배열의 간격 조정은 <그림 8>을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화반의 형상은 윗면이 넓은 역사다리꼴을 취하였는데, 마치 화분을 올려놓은 듯한 외곽선을 유지한다. <그림 8>에서 음영을 둔 부위는 원 래의 화반을 180° 뒤집어 놓은 것으로, <그림 8>은 ‘가 상의 뒤집힌 화반(이하 뒤집힌 화반)’을 화반 사이 또는 화반과 행공 사이에 배열한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 원래 화반과 ‘뒤집힌 화반’이 서로 호응하고 있으며, 약간 간 격을 두거나 약간 겹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면에 서 원릉 정자각(1776)은 화반과 ‘뒤집힌 화반’이 약간 겹 치면서, 화반과 포벽 간의 균형이 가장 잘 맞도록 화반 을 배열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부터는 어칸에 화반을 4개씩 배열하는데, <그림 9, 10>에서 보듯 18세기에 적용된 화반 배열 기법이 이 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릉 정자각은 화반 최외단 간격이 209㎜인데, 행공소로와 화반 최외단 간 간격은 60㎜로 차이가 많다. 나머지 정자각에서는 화반 배열은 화반 간 최외단 간격과 행공소로의 최외단과 화반 최외 단 간 간격을 최대한 비슷하게 설정하여, 그 차이가 9~

31㎜로 매우 작다. <그림 10>을 보면 이러한 차이를 쉽 게 확인할 수 있다.

건릉 정자각의 경우 ‘뒤집힌 화반’이 행공과 화반 간 포벽을 거의 채우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정자각에서는 건릉 정자각보다는 ‘뒤집힌 화반’과 행공 간에 어느 정도 이격 거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건릉 정자각은 19세기 화 반 배열의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반과 포벽의 율동감을 조절하기 위한 조치는 경릉부 터 건원릉 정자각 간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이는 화반과 행공의 크기를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릉 정자각은 화반을 최대한 키워서 여러 개 의 화반이 주는 의장성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 이고, 경릉, 휘경원 및 건원릉 정자각의 경우는 그보다는 율동감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화반 배열을 계획했던 것 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경릉 정자각(1843) 부터는 주심도리 선상에 장화반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화반을 3개씩 배열하는 18세기에 화반 간 간격의 최소치

는 원릉 정자각의 225㎜이다. 화반을 4개씩 배열하는 건 릉 정자각의 경우 그 수치는 60㎜로 더 줄어든다. 장화 반을 설치하기 이전 화반 간 포벽은 미장으로 마감하였 다. 225㎜ 정도 되면 미장이 가능한 범위이지만, 60㎜는 미장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너비이고 미장을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하자가 발생하기 쉽다. 화반을 4개씩 배열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시공상의 문제점이 고려되어야 했 다. 하지만 장화반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릉 정자각의 화반 배열은 장화반이 아니었다면 어려운 화반 배열 방식이라 고 할 수 있다.

4. 도성 내 관영건축의 화반 배열

4-1. 화반 배열 수량의 증가

이익공식 건물의 실례로는 1608년에 재건된 종묘 정 전과 영녕전이 가장 이르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은 주칸 당 화반 1개를 설치하였다.

1692년에 건립된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영화당도 어 칸과 협칸에 화반 1개를 두었다. 정자각에서는 1674년 숭릉 정자각에서 화반 2개를 둔 것과 차이가 있다. 이 는 주칸 길이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숭릉 정 자각은 주칸이 14자인데, 영화당은 8자로 주칸이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성정각은 주칸 이 8자임에도 화반 2개를 배열하였다. 이는 왕세자가 교육을 받는 곳으로서 격식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아닌 가 생각된다.

그림 11. 영화당 그림 12. 성정각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주합루와 승화루 또한 어칸에 화반을 2개 배열하였는데, 이 시기 정자각에서는 어칸에 화반을 3개 배열하였다. 이 역시 주칸 길이의 차이로 인 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부용정의 경우 주칸 길이가 승화루와 동일하게 8자이지만 화반 3개를 배열하였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의 중심인 주합루 권역에 속한 정

자로 十자 형태의 독특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후원을 화려하게 꾸미고자 주칸 길이가 짧음에도 화반의

(11)

수량을 늘려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정자각은 어칸에 화반 4개를 배열하였고, 동시 에 종도리 선상에도 화반을 배열하여 내부 의장을 강화 하였다. 1834년에 지은 환경전과 경춘전은 화반을 3개씩 배열하였는데, 통명전은 4개를 배열하였다. 이 또한 주칸 길이가 반영된 결과인데, 주칸이 14자인 통명전은 4개를, 11자 이하의 경춘전과 환경전은 3개를 배열한 것이다. 이 시기 정자각 협칸의 길이는 11~12자이고, 화반은 3개씩 배열하였다. 따라서 창경궁 건물들도 주칸 길이에 따라 정자각과 동일하게 배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주칸 길이가 20자에 해당하는 경회루는 화반을 5개씩 배열하였다. 1921년 건립된 창덕궁의 편전인 희정 당은 주칸 길이는 14자로 정자각과 동일하지만 화반은 1개 더 많은 5개를 배열하여, 희정당이 익공식 관영건축 에서 주칸당 가장 조밀하게 화반을 배열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궁궐건축에서는 주칸 길이가 12자 이하 인 경우 수정전을 제외하면 화반을 3개씩 배열하였다.

이와 같이 궁궐건축 등에서 어칸에 설치된 화반 배열 의 수량 증가를 정자각과 비교해 보면,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2. 장화반의 등장, 그리고 운공의 부가

1846년에 수리된 창덕궁 구선원전은 현존하는 궁궐건 축 중 장화반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5)

최초의 사 례이다. 정자각 중에서는 경릉 정자각(1843)에 장화반이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므로 1840년대부터 이익공식 관영 건축에 장화반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설하였듯이 다포식 관영건축에서 장화반을 사용한 것은 인정전(1805)에서 처음 등장하였고, 화성의 팔달문(1794)과 장안문(1794)에 화반간판을 사용한 예가 있다. 따라서 다포식 관영건축에서 쓰인 장화반이 이익공 식 관영건축으로 이입되는 데는 약 40년 정도의 시차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 구선원전은 숙종이 1695년 빈 건물로 있던 춘휘전을 고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고쳤다. 기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었는데, 1846년에 정면 2칸을 늘리고, 1853년에 1칸, 1900년에 1칸을 늘려 정면 9칸의 규모로 변모되었다.(출처: 역사건 축기술연구소,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1: 창덕궁_후원_창경궁, 돌베개, 2015, 193쪽) 구선원전은 동궐도 (1830년 이전)를 보면 익공이 아닌 공 포 형식(다포로 추정, 다포인 선정전과 표현 방식이 거의 동일함, 동궐 도에 익공식은 공포 자체를 표현하지 않음)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현재 는 익공식이다. 장화반이 설치된 시기는 1846년, 1853년, 1900년 모두 가능하지만, 운공이 없는 점(익공식에서 운공은 경복궁 중건 이후 등장 함)을 보면, 1846년과 1853년으로 압축된다. 1846년 수리 당시 정면 2칸 을 늘리면서 다포식에서 익공식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장 화반은 그러한 양식적인 변화 속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No. 건 축 명 용 도 건립 연대 어칸 화반 수 장화반 有無 운공 有無 주칸 길이 화반 간격

1 종묘 정전 태묘 1608 1 - - 3,696(12.0) 1,848(6.00)

2 종묘 영녕전 별묘 1608 1 - - 3,700(12.0) 1,850(6.00)

3 창덕궁 영화당 과거시험 1692 1 - - 2,460(8.3) 1,230(4.15)

4 창덕궁 성정각 왕세자 교육 1690 이후 2 - - 2,500(8.0) 833(2.67)

5 창덕궁 주합루 왕실 서적 보관

어진 봉안 1776 2 - - 3,100(10.0) 1,033(3.33)

6 창덕궁 승화루 왕세자 교육 1783 이전 2 - - 2,500(8.0) 833(2.67)

7 창덕궁 부용정 정자  1793 3 - -  2,500(8.0) 625(2.00)

8 창경궁 환경전 침전 1834 3 - - 3,075(10.0) 769(2.50)

9 창경궁 경춘전 왕비, 대비 처소 1834 3 - - 3,390(11.0) 848(2.75)

10 창경궁 통명전 내정전 1834 4 - - 4,003(13.0) 801(2.60)

11 창덕궁 구선원전 어진 봉안 1695(1846) 3 ○ -  3,371(11.0) 843(2.75)

12 경복궁 경회루 연회 1867 5 ○ ○ 5,219(20.0) 870(3.33)

13 경복궁 수정전 편전, 군국기무처  1867(1895) 2 ○ ○ 2,744(9.0) 915(3.00)

14 경복궁 자경전 연침 1888 3 ○ ○ 2,724(9.0) 681(2.25)

15 창덕궁 신선원전 어진 봉안 1921 3 ○ ○ 3,530(12.0) 883(3.00)

16 창덕궁 함원전 왕의 서재 1921 3 ○ ○ 2,600(9.0) 650(2.25)

17 창덕궁 희정당 편전 1921 5 ○ ○ 4,287(14.0) 715(2.33)

18 창덕궁 대조전 침전 1921 3 ○ ○ 3,118(10.0) 780(2.50)

※ ( )는 수리 연도임. 신선원전은 전면은 개별 화반이고, 후면은 장화반임. 화반 간격은 주칸 길이를 화반 수량 + 1로 나눈 값임.

표 6. 종묘 및 궁궐 건축 등에서 화반 배열 및 간격

[단위: mm(尺)]

(12)

1867년 중건된 경복궁 내 이익공식 건물은 모두 장화 반을 설치하였고, 이는 가장 늦은 시기인 1921년에 건립 된 창덕궁 내 희정당, 대조전까지 이어진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익공식 건물의 화반 위에는 관 영건축의 다포식 공포 부재인 운공을 결구하여 의장성을 강화하였는데, 이 또한 1921년에 건립된 창덕궁 내 이익 공식 건물로 이어진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운공을 갖춘 화반은 마지막 시기의 이익공식 궁 궐건축의 양식으로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3. 구선원전 장화반

그림 14. 희정당 장화반과 운공

5. 화반의 의장성 강화와 장화반 등장의 의미

5-1. 이익공식 관영건축의 독자적인 형식미 추구 17세기 초·중반의 이익공식 관영건축은 주심도리 선상 에 주칸당 화반 1개를 설치하였다. 도리 선상의 중앙에 설치된 화반은 장식적인 역할과 도리 및 장혀의 처짐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1674년 현종의 숭릉 정자각을 건립하면서 어칸에 화 반을 2개씩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열 방식이 정자각에서는 1699년 현릉 정자각까지 지속되었다. 숭릉

정자각에서는 화반의 수량만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부터는 최초로 이익공에 외목도리를 두고, 출목첨차를 갖추었으며, 창방과 상인방 사이에는 머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그림 15> 즉 익공 주변에 의장성을 높일 수 있는 여러 기법이 도입된 것이다.

1690년대에 건립된 강릉, 광릉 및 현릉 정자각은 출목 을 두지 않고 이익공으로만 공포를 꾸몄는데, 인방 위에 머름도 두지 않았다.<그림 16> 하지만 휘릉 정자각(1699) 부터는 출목 이익공이 정례화되었고, 현존하는 의릉 정자 각(1724)부터는 인방 위 머름도 정례화되었다. 따라서 1690년대 건립된 세 곳의 정자각은 출목을 둔 이익공식 이 정자각에서 양식화되는 중간 단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 할 수 있다.

16)

숭릉 정자각은 전례를 따르는 관영건축 에서는 변례(變禮)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양식이 정례화 되는 데 약 25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 셈이다.

그림 15. 숭릉 정자각 협칸의 출목 익공, 화반과 상인방 위 머름

그림 16. 광릉 정자각 협칸의 무출목 익공, 화반과 상인방

18세기 정자각에서는 정전 어칸에 화반을 3개씩 배열 하였다. 주칸당 화반 3개를 배열함으로써 구조적 기능은 충분히 만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에 그치 지 않고 19세기 정자각에서는 어칸에 화반을 4개씩 배열 하였다. 이러한 수량 증가는 구조적인 목적보다는 장식 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판단된다. 이러 한 화반의 증가 경향은 궁궐건축 등 도성 내 관영건축에 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19세기에 들어 어칸 주심도리 선상에 화반 4개를 두어

의장성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화반 간격이 좁아졌는데,

16) 강릉, 광릉 및 현릉 정자각의 신문은 두 짝으로 꾸몄다. 신문을 두 짝으로 꾸민 경우는 경릉 정자각(1670)까지만 나타나고, 숭릉과 익릉 정 자각에서는 신문을 네 짝으로 꾸미며, 의릉 정자각부터는 네 짝 신문이 정례화된다. 이는 세 곳 정자각이 전례를 고수하고자 했던 양상을 보여 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13)

그만큼 포벽을 미장으로 마감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이는 결국 미장벽의 하자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1843년 경릉 정자각부터 는 화반과 포벽을 판재로 일체화한 장화반을 설치하기 시 작하였다. 이를 통해 도리 처짐을 방지하는 화반의 구조 적인 목적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화반에 운공을 부가함에 따라 화 반 주변의 입체성이 도드라져, 의장성 강화는 그 정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외관상 차이 가 현격하게 나타난다. 운공을 화반에 교차하여 결합한 것은 화반의 수량적인 증가와 비교한다면, 양식적인 측면 에서 일종의 도약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화반과 운공의 결합이 나타나는 시기는 의미 있게 생각해 볼 대 목이다. 19세기 60여 년간 세도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했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주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궁궐건축의 새로운 형식미를 추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반과 운공의 결합은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까지 이익공식 관영건축의 마지 막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이익공식 관영건축에서는 의장성 강화를 위해 화반 배열의 수량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하지 만 화반을 1개에서 4개로 증가시킨 것이 아니라 1개에서 2개로, 2개에서 3개로, 3개에서 4개로 300년간 점진적으 로 증가시켜, 짧은 기간에 파격적인 양식 변화는 일어나 지 않았다. 이는 전례에 구속되어 양식적 변화가 쉽게 일어나기 어려웠던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특성을 보여주 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화반 배열의 증가와 운공의 부가 등은 이익공식 관영 건축이 양식적인 측면에서 유사한 주심포식에서 분화하 여 독자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려 말 조선 초 주심포식 건축에는 봉정사 극락전과 같이 주 심도리 선상에 화반을 둔 경우도 있고, 부석사 무량수전 과 같이 두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화반을 둔 경우에도 화 반 1개만을 중앙에 설치하였다. 따라서 주심도리 선상에 화반 2개를 둔 숭릉 정자각부터 이익공식 관영건축은 주 심포식과는 양식적인 차별화가 이루어졌고, 이후 화반 수량이 증가할수록 주심포식과의 양식적 격차가 심화하 였으며, 운공을 둔 19세기 후반 이후의 모습은 조선 초 주심포식과는 유사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양 식적인 독자성을 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 가지 고려할 점은 이익공식 관영건축에서 화반의 의장성 강화가 다포식 건축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거나 동시에 다포식에서 장식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다.

현존하는 궁궐의 이익공식 편전 및 침전 등이 동궐도 에는 포를 갖춘(다포로 추정) 건물로 묘사

17)

되어 있다.

따라서 중건 과정에서 다포 건물이 이익공식 건물로 대 체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포의 화려함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다포식 건물의 주간포를 의식적으로 표현하 기 위해 화반의 수량을 증가시킨 것으로 추정할 수 있 다. 한편, 조선중기 다포식과 익공식은 상호 간에 의장적 인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18)

이러한 경향이 이익공식 관영건축에도 반영되어 다포식의 화려한 분위기가 화반 의 수량 증가 및 운공의 부가를 이끌게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5-2. 장화반을 통해 본 판재형 부재의 증가 경향 장화반은 중층의 다포식 건물인 인정전(1805) 중건에 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는 내부 포작 상부를 꾸미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다포식 중층 건물에 예외적으로 쓰 인 장화반이 이익공식 건물에 도입되는 데는 40여 년의 시차가 발생하였다. 경릉 정자각 이후 창덕궁 구선원전 (1846 수리)부터는 궁궐에서도 이익공식 건물에 장화반 을 설치하였고, 이후 1921년에 건립된 궁궐건축까지 이 어졌다.

장화반의 설치는 조선후기 관영건축에서 미장벽 면적 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된 것과 연관된다. 정자각 정전 측면의 합량 하부에 익공과 결합한 인방 부재인 화 인방을 18세기 후반부터는 1단에서 2단으로 확대하여 미 장벽체를 장방형화하였고, 인릉 정자각(1835)부터는 축중 방 부위 내벽도 판벽을 설치하였으며, 경릉 정자각(1843) 부터는 정전 측면의 합량 상부를 미장벽에서 판벽으로 변경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쓰인 주장첨차도 그러한 예의 일환이다. 이러한 미장벽체의 축소는 유지관리 측 면에서도 유리하고, 시공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편이 기도 하다.

19)

이러한 내재적인 조건 외에도 판재화된 부재의 설치 범위가 증가하는 것은 이를 가능케 한 외부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판재 가공을 수월하게 할 수 있 는 톱의 제작 기술이 향상되었을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부족하여 방증할 만한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정자각 건립 시 톱장이

17) 동궐도 에서는 창덕궁 희정당과 구선원전, 창경궁 환경전과 경춘 전이 포를 갖춘 건물로 묘사되어 있다.

18) 홍병화, 조선중기 공포형식 간의 장식요소 상호영향과 그 의미 , 건축역사연구, 25권, 6호, 2016

19) 이상명, 앞의 논문, 358~359쪽

(14)

는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는 인거군(引鉅軍), 걸거군 (擧乙鉅軍) 2종이었는데, 18세기 중엽부터 대인거군(大引 鉅軍), 소인거군(小引鉅軍), 걸거군, 지거군(歧鉅軍) 4종으 로 증가하였다. 그만큼 제재 공종이 세분화되고, 전문화 된 것이다.

20)

둘째는 화성성역을 비롯해 19세기에 들어 판재는 민간 목재상이 취급하는 주요 품목이었고, 관영건 축 공사에서 다량으로 매입되었다.

21)

따라서 18세기 중엽 부터 판재의 제재 기술이 향상되었고, 민간에서 쉽게 판 재를 구입할 수 있었던 여건이 관영건축에서 판재의 사 용 범위를 확대하게 한 요소로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화반은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와 맞물려 등장한 부재라고 할 수 있다.

6. 결 론

지금까지 왕릉 정자각, 궁궐 및 종묘 건축을 통해 조 선후기 이익공식 관영건축의 화반에 대해 의장성 강화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

첫째, 산릉도감의궤와 영건도감의궤를 통해 화반의 용 례를 살펴본 바, 花盤(화반)으로 표기된 용례가 가장 일 반적이었다. 장화반은 다포식 중층 건물인 인정전(1805) 건립 시 기록상 처음 등장하였고, 실례도 확인되었다. 그 이전 화성성역 당시 화반과 화반간판을 다포식 중층 문 루인 팔달문과 장안문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장화반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모습에 해당한다. 장화반이 이익공 식 관영건축에 도입된 첫 번째 사례는 경릉 정자각(1843) 인데, 다포식 건물과는 약 40년의 시차가 나타난다.

둘째, 이익공식 관영건축에서 주심도리 선상에 설치한 화반은 약 300년에서 걸쳐 수량이 1개에서 5개로 늘어 났다. 시기적으로 보면 1674년 숭릉 정자각을 기점으로 17세기 말까지 2개, 18세기에는 3개, 19세기에는 4개, 20 세기 초에는 5개까지 증가하였다. 화반 배열 수량은 1차 적으로 구조적인 역할을 충족하고도 증가하였다. 이는 의장성 강화 경향이 주된 변화의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셋째, 의장성 강화를 목적으로 한 화반 수량 증가는 부 재의 특성상 한계가 상존했다. 첫째는 화반과 포벽 간의 율동감을 조절해야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포벽이 너무 좁아질 경우 미장을 하기 어려운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

20) 이상명, 앞의 논문, 83쪽

21) 김왕직, 조선후기 관영건축공사의 건축경제사적 연구 , 명지대학 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45∼52쪽; 이상명, 앞의 논문, 104쪽

이다. 후자의 문제는 장화반을 도입하여 해결하였다. 장 화반의 도입은 19세기 중엽 이후 미장 부위를 최소화하 고자 판재 형태의 각종 부재로 미장벽을 대체하는 여러 가지 노력과 판재 생산을 가능케 한 연장의 발달, 직종의 분화, 민간 목재상에서 판재 판매 등의 시대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주심포식과 같은 계통이거나 매우 유사한 양식 인 이익공식 건축에서 화반의 수량 증가는 주심포식과는 양식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익공식 관영건축에서는 이전 시기에 유행했던 주심포식 건축과는 다른 형식미를 시도함에 있어 화반의 수량 증 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 세기 후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화반에 운공을 더한 방 식은 조선 말 궁궐건축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영조규범으 로 작용했다. 이러한 화반의 변화는 다포식의 대체물로 서, 또는 주심포식과는 차별화되는 이익공식 관영건축의 형식미 강화를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다포식의 장식적인 영향을 받은 복합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익공식 관영건축의 화반 변화를 의 장성 강화와 독자적인 형식미를 추구하는 과정과 연결하 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화반 변화가 지방의 관영건축인 객사 및 향교에서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서원 및 사찰에서는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연구 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이익공을 갖춘 건축에서의 화반의 특징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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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營建儀軌書에 기록된 部材名稱의 變遷에 대하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6권, 3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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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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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Ⅵ, 2014

10.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Ⅶ, 2014

11.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Ⅷ, 2015

12.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Ⅸ, 201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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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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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화재청, 景福宮 慈慶殿 및 慈慶殿 十長生굴뚝 實測 調査報告書, 2010

18. 문화재청, 慶會樓 實測調査 및 修理工事報告書, 2000 19. 문화재청, 光陵 및 徽慶園 補修工事 修理報告書, 2007 20. 문화재청,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정밀실측조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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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7. 2. 14)

수정(1차: 2017. 4. 3)

게재확정(2017. 4. 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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