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을 지나 남산을 오르다
서울 성곽길 약 18km를 하루 만에 종주하기 위해 숭례문 앞에 모 였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낯설게 느껴진다. 남대문이라 고 부를 때 더 친근해지는 숭례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어이없 는 화재로 상자 속에 갇혀 복구되어야 했던 숭례문은 도성의 4대 문과 4소문 중 남쪽으로 나 있는 정문이었다. 조선 태조 7년(1398 년)에 창건된 숭례문은 세종 30년(1448년)에 재건되었다. 당시 재 건하려 했던 이유가 「세종실록」 15년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경복궁의 오른팔이 대체로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멀리 헤벌어 지게 트여서 품으로 껴안은 형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 연못을 파고 문 안에 지천사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 터가 지금같이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그 땅을 낮추어서 평평하 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 땅을 다시 돋우어서 양편의 산맥과 잇닿게 한 다음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고 임금께서 말씀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좋다고 하였다.”
지금은 남대문이 밤낮으로 항상 열려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밤 이 되면 4대문을 닫고 통행을 막았기 때문에 밤에는 아무리 고관 대작이라 할지라도 성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남대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N서울타워로 오르는 길에는 옛 성곽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산과 북악산 은 도성을 상징하는 산이라서, 태조는 이 두 산에 신사를 세우고 백 악대왕, 목멱대왕이라는 벼슬을 내린 뒤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북악산으로 가는 길
목멱산, 인경산, 마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남산은 그 모양이 주마탈안형(走馬脫鞍形)이고, 서쪽 봉 우리 중 바위가 깎아지른 곳을 누에머리인 ‘잠두(蠶頭)’라고 한다. 그 능선에 태조 때 쌓은 성벽이 남아 있 다. 정상에는 봉수대와 국사당이 있었지만, 봉수대는 헐리고 없으며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갔다.
걸음 옮기는 곳이 다 꽃이고,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도 저마다 다 꽃이다. 흩날리는 꽃잎들의 세례를 받 으며 걷다 보니 남산의 정상에 이른다. 서울 시가(市街)가 눈 아래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흥인지문
남산에서 순환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어진 길에 늦게 핀 산 벚꽃들이 온통 난리다. 길은 성곽과 잠시 떨어져 가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선다. 타워호텔 부근에서 신라호텔 쪽으로 이어진 성곽길은 그나마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장충체육관이 있는 장충동에 성은 사라졌고, 광희문교회를 지나 광희문에 이른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고도 부르는 광희문은 광희동2가에 있는 성문이다. 원래는 세조 2년(1456년)에 서울 동남방, 즉 장충동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내고 광희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예 종 원년(1469년)에 경복궁에서 황천문이 된다 하여 그 문을 막았고, 광희동2가에 새로 수구문을 내는 동시 에 남소문의 현판인 광희문을 가져다가 새 문에 달았다. 옛날에는 서울 시민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이 문으 로 내어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쪽으로 가져다 매장했으므로 속칭 시구문이라 부른다.
광희문에서 성은 끊어지고 도시의 중심부 를 지난다. 빌딩 숲을 가로질러 복원된 청계 천의 오간수교를 지나 포장마차 숲까지 지나 자 흥인지문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동대문으 로 익숙한 이 문은 조선시대 나라의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 든 도성의 문으로, 성곽 여덟 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원래 현판은 ‘흥인문’이었으나 세조 이후에
‘흥인지문’으로 수정되어 네 글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풍수설에서 기인한 것으로, 풍수 설에서 ‘인’은 ‘목’에 속하고 ‘목’은 ‘동’에 속하 므로 ‘흥인’은 ‘동방’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를 더한 것은 서울의 지세가 북·서·남 은 산과 고지로 되어 있고, 오직 동쪽이 험하 므로 그 험한 곳을 메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 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대가 도성의 북 우리 옛길 걷기 32
흥인지문(동대문)
인지문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렸고, 반대로 긴 장마가 져도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영제를 올렸 다. 그 이유는 큰 장마가 들수록 문에 항상 물이 들었기 때문이다. 흥인지문은 도성 여덟 개 성문 중 유일하 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다.
낙산에 올라 조선 오백 년을 굽어보다
관동대로의 출발점인 동대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낙산으로 오른다. 낙산은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아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하며, 그것이 변하여 타락산이라 하기도 한다. 성벽에 걸터 앉아 성 밖을 보면 아스라하게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자리 잡은 아차산이 보인다. 서쪽을 보면 인왕산이 보이 며, 인왕산 남쪽에 무악재가 있다. 인왕산의 동쪽에는 북악산이 있고, 그 아래로 청와대와 경복궁이 자리 잡 고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도성 안에서 조선 오백 년의 사직을 일구었던 것이다.
낙산으로 오르는 길, 성벽 아래의 집들이 마치 1980년대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불과 30여 년 전의 모습 일진데 이렇게 아득한 세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산 동쪽에 자리 잡은 봉우리는 동망봉으로,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아내였던 정순왕후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간 단종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 던 곳이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자 한성대입구역에 다다르고, 지하도를 건너가자 혜화문이 나타난다. 동소문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특이하게도 문루 천장에 봉황을 그렸는데, 이유인 즉 유독 새의 피해가 잦았던 곳이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태조 때는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중종 6년(1511년)에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
낙산에서 혜화동으로 가는 길
낙산공원
장충체육관 홍련사
와룡공원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촛대바위
인왕산
북악산
남산 숙정문(북대문) 창의문
(북소문)
돈의문 (서대문·멸실)
숭례문 (남대문)
흥인지문 (동대문)
광희문 (남소문) 혜화문(동소문)
소의문 (서소문·멸실)
었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혜화문고개 또는 혜화동고개라 하는데, 혜화문의 속칭인 동소문의 이름을 따서 동소문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혜화문고개를 넘어 북악산 정상에 서다
혜화문에서 경신중학교를 지나 최순우옛집을 지나는 길 의 성곽은 끊어져 있다가 서울과학고등학교 부근에서 다시 나타난다. 길은 와룡공원 쪽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부터 계속 오르막길인 북악산 등산로다. 와룡공원 쉼터
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큰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곳이 삼청각이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잘 정돈된 길을 따라가다가 만나는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조선시대 정북문이며, 1963년 1월 21일 서울 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 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정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 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의 기능은 하지 않았다.
도성의 북쪽에 자리 잡은 숙정문을 지나면 촛대바위에 이른다. 북악산은 경복궁의 북쪽에 대나무 숲같 이 우뚝 솟아 있는 산으로 백악산 또는 공극산, 면악산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숙종 9년(1104년)에 남경(한 양)을 설치하려 궁터를 찾던 중 윤관이 아뢰기를 “삼각산의 면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가히 궁궐을 세울 만하다”라고 하였다. 신라 말 풍수지리가인 도선도 “충천목성(衝千木星)이 가히 궁궐의 주룡이 된다”라고 하였던 곳이다.
이 산에 오르면 서울을 받치고 있는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고, 앞으로는 경복궁과 청와대가 펼쳐져 있으 며, 조선에서 현재로 이어진 서울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북악산 정상에서 자하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만 만치 않다. 자하문터널을 지나면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새겨져 있고, 다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 나타난다. 숨이 턱턱 막히게 가파르다.
죽란시사로 맺어진 옛 선비들의 풍류
드디어 인왕산 정상이 지척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궁궐의 터를 잡을 때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용호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자고로 제왕은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한 것은 듣지 못하였다”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북악산 아래 궁궐이 들어섰다. 일이 좌절 우리 옛길 걷기 32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성곽길로 이어진 끄트머리에는 선바위라고 부르는 입암이 있다. 조선을 개국한 뒤 처음 성을 쌓을 때 무학 대사는 이 바위를 성 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정도전은 안 된다고 버텼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으로부 터 “이 바위를 넣으면 불교가 왕성하고, 성 밖으로 내놓으면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라는 말을 듣고 성 밖으로 내놓게 하였다고 한다. 아쉽지만 그쪽 길로 가보지는 못하고, 인왕천 약수터 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길을 따라 쭉 내려가다가 홍난파의 옛집과 백범 김구의 최후를 지켜본 경교장을 지난다. 그곳에서 서대 문 터가 지척이다. 이곳에는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남아 있다. 장기와 강진의 유배지, 그 열악한 환경 속 에서 수많은 저작을 남긴 정약용도 젊은 날에는 풍류를 즐겼는데 아래의 글은 「여유당전서」에 실린 것이 다. 당시 정약용과 친교를 맺었던 이치훈, 이유수, 한치응 등 열네 명의 뜻맞는 선비들이 죽란시사(竹欄詩 社)라는 풍류계를 맺고 다음과 같은 규약을 정했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西 蓮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면 다시 한 번 모이기로 했다.”
서련지의 연못에는 연꽃이 많기도 했지만 연꽃이 크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죽란시사로 맺어진 선비들 이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 배를 띄우고 연꽃 틈에 갖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 렸는데, 그것이 바로 연꽃이 필 때 내는 소리였다. 잎이 필 때 청랑한 미성을 내며 꽃잎이 터지는 연꽃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마치 꽃이슬을 마음속에 떨어뜨리는 듯한 그 청량감, 즉 청개화성(聽開花聲)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그 윽하고도 절절한 멋인 풍류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선비들이 연잎에 술을 가득 따라놓고 구멍이 연근처럼 뚫린 연대로 그윽한 연의 향기와 함께 술을 마시던 풍류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서대문역을 지나 중앙일보, 대한상공회의소를 지나 다시 출발점인 남대문에 닿는다. 여정을 시작한 지 거의 아홉 시간 만이다. 행복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꽃피는 봄날, 연둣빛으로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과 빗방 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맞으며 걸었던 성곽길이 꿈속인 듯 아련하다.
남대문(숭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