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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사학위 석사학위 석사학위 석사학위 논문 논문 논문 논문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진주검무의 진주검무의 진주검무의 비교연구 진주검무의 비교연구 비교연구 비교연구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대학원 교육대학원 교육대학원

체육 체육 체육

체육 교육 교육 교육 전공 교육 전공 전공 전공

김 김 김

김 영 영 영 영 란 란 란 란

2005

2005 2005

2005

(2)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평양검무와 진주검무의 진주검무의 진주검무의 비교연구 진주검무의 비교연구 비교연구 비교연구

지 지 지

지 도교수 도교수 도교수 도교수 김 김 김 김 현 현 현 현 덕 덕 덕 덕

이 이 이

이 논문을 논문을 논문을 논문을 석사학위 석사학위 석사학위 석사학위 청구 청구 청구 청구 논문으로

논문으로 논문으로

논문으로 제출함 제출함 제출함 제출함

2006 2006 2006

2006년 년 년 6 년 6 6월 6 월 월 월 일 일 일 일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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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체육 체육

체육 교육 교육 교육 전공 교육 전공 전공 전공

김 김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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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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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 목 목 목 차 차 차 차

Ⅰ Ⅰ Ⅰ

Ⅰ. . . 서 . 서 서 서 론 론 론 론 ···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 1

2. 연구 방법 ··· 3

3. 선행 연구 ··· 5

Ⅱ Ⅱ Ⅱ Ⅱ. . . 검무의 . 검무의 검무의 검무의 역사와 역사와 역사와 역사와 특성 특성 특성 특성 ··· 8

1. 검무의 유래 ··· 8

2. 검무의 단계적 발달과정 ··· 14

3. 평양검무의 역사와 특성 ··· 25

4. 진주검무의 역사와 특성 ··· 29

Ⅲ Ⅲ Ⅲ Ⅲ. . . 춤사위와 . 춤사위와 춤사위와 춤사위와 반주음악 반주음악 반주음악 반주음악 ··· 33

1. 평양검무의 춤사위와 반주음악 ··· 33

2. 진주검무의 춤사위와 반주음악 ··· 36

3. 춤사위와 반주음악의 비교 ··· 40

Ⅳ Ⅳ Ⅳ Ⅳ. . . 복장과 . 복장과 복장과 복장과 구성형식 구성형식 구성형식 구성형식 ··· 45

1. 평양검무의 복장과 구성형식 ··· 45

2. 진주검무의 복장과 구성형식 ··· 48

3. 복장과 구성형식의 비교 ··· 51

Ⅴ Ⅴ Ⅴ Ⅴ. . . 결론 . 결론 결론 결론 ··· 57

참 참

참 고 고 고 문 고 문 문 헌 문 헌 헌 ··· 61 헌

SUMMARY

SUMMARY SUMMARY

SUMMARY ··· 63

(5)

표 표 표

표 목 목 목 목 차 차 차 차

<표 1> 평양검무의 춤사위 내용 ··· 34

<표 2> 평양검무의 음악 구성 ··· 35

<표 3> 진주검무의 춤사위 내용 ··· 37

<표 4> 진주검무의 음악 구성 ··· 38

<표 5> 춤사위 비교 ··· 41

<표 6> 검무의 음악 구성 비교 ··· 43

<표 7> 무복(舞服)과 무구(舞具) 비교 ··· 52

<표 8> 검무의 춤사위 구성 비교 ··· 54

<표 9> 대형 비교분석 ··· 55

<표 10> 음악 형식에 따른 검무의 진행방식 비교 ··· 55

<표 11> 검무의 진행방식 ··· 56

(6)

그 그 그

그 림 림 림 림 목 목 목 목 차 차 차 차

<그림 1> 평양검무 ··· 26

<그림 2> 평양검무 칼(劍) ··· 30

<그림 3> 평양검무 치마․저고리 ··· 45

<그림 4> 평양검무 속치마 ··· 45

<그림 5> 평양검무 전복과 전대 ··· 45

<그림 6> 평양검무 전립 ··· 46

<그림 7> 평양검무 술띠 ··· 46

<그림 8> 진주검무 ··· 46

<그림 9> 진주검무 칼(劒) ··· 48

<그림 10> 진주검무 치마․저고리 ··· 48

<그림 11> 진주검무 전복 ··· 49

<그림 12> 진주검무 전립 ··· 49

<그림 13> 진주검무 술띠 ··· 49

<그림 14> 진주검무 한삼 ··· 49

(7)

악 악 악

악 보 보 보 보 목 목 목 목 차 차 차 차

<악보 1> 도드리장단 ··· 35

<악보 2> 타령장단 ··· 35

<악보 3> 타령장단의 변주 ··· 36

<악보 4> 긴염불장단 ··· 38

<악보 5> 타령장단의 기본형 ··· 39

<악보 6> 자진타령장단의 기본형 ··· 39

<악보 7> 자진모리장단의 기본형 ··· 39

(8)

국문요약 국문요약 국문요약 국문요약

검무는 한국의 전통예술로서 악(樂)․가(歌)․무(舞)의 총체적 합일 속에서 형성, 발 전되어 왔다. 이러한 검무의 역사와 춤에 대한 연구는 전통 검무의 올바른 계승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검무의 지역적 특 성에 따른 구성형식, 춤사위, 음악, 무복 및 무구 등의 특징을 고찰하고 각 지역의 독특한 특성을 비교 분석하는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문헌연구와 무형문화재인 예 능 보유자로 부터의 사사를 통하여 평양검무와 진주검무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평양검무의 춤사위는 두 손 모아 허리춤, 옆으로 허리춤, 한칼사위, 양칼사 위, 기동동작, 반동작, 위로 칼뽑기, 연풍돌기, 까치걸음, 번개사위, 칼옆에 끼고 팔 사위, 칼로 땅치기, 양팔 펼쳐 두 번 돌리기, 반돌아 기본동작, 방석돌기, 숙임사위 등인데, 진주검무의 춤사위는 크게 한삼사위, 맨손사위, 칼사위가 주를 이룬다. 평 양검무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무게가 있고 활달한 느낌을 준다.

평양검무의 맨 처음 방석돌이나 숙임사위도 좋지만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활달한 춤사위를 보여 대륙적인 기상의 고구려의 풍치가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진주검무는 춤의 전반부에 한삼을 끼고 추는 것이 다른 지역과 구분되 는 정재적인 요소이며, 춤사위는 평양검무처럼 활달한 남성적인 기상이 돋보이며 목이 부러지지 않은 곧은 칼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목 놀림에 박력이 더욱 돋보이 게 된다.

둘째, 평양검무의 반주음악은 염불장단-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만장단-타령장 단 순인데, 진주검무는 긴염불장단-타령장단-허튼타령장단-타령장단-자진타령장단 -허튼타령장단 순이다.

셋째, 평양검무의 무복은 청색치마, 노랑 저고리, 청색쾌자, 전립으로 남성적이면 서 화려한데 비해 진주검무는 저고리는 옥색이며 홍색 전대를 매는 점이 여성적이 고 은은한 복장임이 서로 구분된다.

(9)

넷째, 무구로 사용되는 평양검무의 칼이 목이 돌아가는 칼로 실제의 칼이 다양 한 무용의 기능 위주로 변화된데 비하여, 진주검무는 목이 돌아가지 않는 칼을 사 용하여 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다른 점이다.

다섯째, 평양검무의 대형은 2열종대로 마주보고 인사하며 염불장단으로 느리게 시작한다. 양쪽으로 서로 가깝게 다가가서 춤을 추다가 자리를 바꾸는데, 타령장단 으로 다소 경쾌하게 칼춤을 추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자진타령장단으로 넘어 가면서 연풍대를 풀며, 일렬횡대로 서서 두 팔을 위로 들었다가 칼을 앞으로 숙여 바닥을 짚고 인사한다.

이에 대해 진주검무는 2인 대무가 주를 이루며, 처음 시작은 두 줄 종대로 서서 한삼만 끼고 마주보고 춘다. 그 다음 두 줄 횡대로 대형을 바꾸면서 칼춤을 추다가 다시 두 줄 종대로 바꾸면서 맨손으로 추다가 칼을 쥐고 칼춤을 춘다. 그리고 원형 을 만들며 연풍대를 하다가 그것이 끝나면 1열 횡대로 원형을 풀어 서서 두 팔을 위로 돌려 올렸다가 앞으로 내려뜨려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검무를 마친다.

각 검무의 춤과 음악이 함께 전승될 수 있는 국가의 제도적 지원과 교육적 확대 를 위한 보완책이 마련되어야 한국의 대표적 전통춤인 검무가 앞으로도 이 땅의 역사와 함께 하는 춤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10)

Ⅰ. . . . 서 서 서 서 론 론 론 론

1.

1. 1.

1. 연구의 연구의 연구의 연구의 필요성 필요성 필요성 필요성 및 및 및 목적 및 목적 목적 목적

전통춤은 그 나라의 사상과 문화적 이론에 근거를 둔 춤으로 독특한 형태의 창조 적 몸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춤은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형성됐으 므로 자연과의 일치, 생명력의 호흡이 정․중․동(靜中動)의 신체표현으로 이루어 진 다. 또한 그 나라와 민족 또는 지역의 역사와 시・공간을 초월한 미적 체험 속에서 생명력 있는 것들을 춤의 요소로 삼는다.

정은영(2004)은 “한국 전통춤 체험의 현상”에서 ‘춤의 본질적 의미는 단정적 분 석이라는 개념의 틀로서는 추적되어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이는 그것에 대한 학습의 방법이 현상학적 체험(Phenomenal Experience)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전통 춤의 세계가 춤의 본질적 요소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요인은 춤 수행의 ‘미학적 체험의 국면(Aspect of Aesthetic Experience)’이 라고 하였다. 미적체험은 경험이며 춤 수행에서의 체험적 요소는 춤 미학의 근본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춤은 신체 움직임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수량화되고 경험과학적인 방면으로의 탐구는 획일화에 빠져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미학적 체험은 수행자의 춤 수행의 몰입 농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국면을 체 험하고 표출한다. 전통적으로 동양 춤에 있어서 이러한 미적 체험의 순간순간들은 다양하게 표출되어 왔다. 서양의 춤이 미학 또는 예술로서 다루어지고 평가되는 것 이라면 한국의 전통춤은 삶의 문화적 활동으로서 논해져야 할 것이다.

‘춤’이란 춤꾼의 정서와 관념 그리고 상황의 표현을 적절한 율동과 구성에 따라 자기중심의 표현으로 움직여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에 의해 의미전달을 꾀하는 것 을 말한다. 이것은 전달자와 수용자간의 춤을 통한 의사전달이 서로간의 감정 교류 를 암시하고 개인주의적 차원을 넘는 사회집단의 공통적 공유물로 담론화 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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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한다. 이러한 근본을 바탕으로 할 때, 한국문화 속에서의 춤은 한민족 생활 의 가치를 지닌 움직임의 본질과 민족적 정서가 배여 있는 것으로 규명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하면 춤을 통해 한민족의 본질과 정신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 니라 문화의 뿌리를 가늠케 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통춤의 본 질을 이해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오늘에 사는 우리의 원초적이고 중심적인 삶의 양 식을 파악하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를 통해 오늘에 우 리의 삶과 어떤 정신적 유대로 연결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정은영, 2004: 7-8).

검무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보면 진주, 통영, 해주검무를 개별적으로 역사적 관점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거나, 진주검무와 통영검무를 지역적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미시적 관점에서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러나 다른 지역 검무들은 체계적인 정리와 정확한 전승이 어려운 이유로 지금까지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평양검무와 진주검무는 우리 민족의 무용이기는 하나 어떻 게 보면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남한무용과 북한무용이라고 할 수 있 다. 민족 통일의 맥락에서 보자면 남한과 북한의 민속무용에 대한 연구는 민속무용 의 현실을 직시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맹목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무용 이 동질적이라고 단정하거나, 이질적이라고 속단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진주검무는 처음 맨손으로 춤을 시작하여 칼을 어른 다음 칼을 들어 추지만, 진 주검무는 한삼을 끼고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고 맨손으로 다양한 무태(舞態)를 보 이는 것도 특징이 있다. 평양검무는 여러 사람이 같이 추는 군무의 형식을 띠기 때 문에 개인적인 춤에 비해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는 춤이다. 그러나 춤사위나 칼놀림이 다양하고, 지역적 특색을 잘 갖추고 있음 에도 분단국가라는 현실적 한계로 인하여 지금까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두 검무의 변천과정과 특성을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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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와 문헌자료를 통하여 알아보고 특히 평양검무만이 가지고 있는 춤사위의 특 징과 다양한 칼 놀음을 분석하여 두 검무가 가지고 있는 전통춤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이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전수활동을 하고 있는 진주검무에 비해 평 양검무는 예능을 보유하고 있는 보유자의 나이가 연로하고, 체계적인 전수 활동의 미흡으로 그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으므로 보유자가 살아계시는 동안 문헌연 구를 통해 그 역사성을 규명하고 현장조사를 통한 자료정리를 구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요, 두 번째는 북부지방에 대표적인 검무인 평양검무와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검무인 진주검무의 철저한 비교를 통하여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드러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에 두 검무의 구성형식과 춤사위 등의 비 교를 통해 두 검무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기(上 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문제를 설정하였다.

첫째,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평양검무와 진주검무의 역사를 고찰하고 둘째, 평양검무와 진주검무만이 가지고 있는 춤사위와 반주음악을 비교하고 셋째, 무복․ 무구를 포함하는 복장과 구성형식을 비교한다.

2.

2. 2.

2. 연구 연구 연구 연구 방법 방법 방법 방법

무용의 연구 방법은 시간의 경과, 무용의 유형, 무용의 배경 등 3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고찰(考察)할 수도 있지만, 어느 무용을 막론하고 그 배경을 통한 연구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용은 그와 적절한 환경의 범위 내 에서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무용의 문화적 연구(文化的硏究)가 이루 어져야 하기 때문이다(이희병, 2005: 5-6).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5가지의 포괄적 방법론을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13)

1) 본 연구는 북부지방 교방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검무인 평양검무와 남부지 방 교방에서 전승되는 대표적인 검무인 진주검무의 역사적 배경을 각종 문헌과 선 행연구자료 등을 통해 분석 정리하였다. 특히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평양검무는 예능보유자인 이봉애와 그의 수제자인 정은영에게 직접 사사를 받고, 이봉애의 구술면담을 통해 자료를 수집 정리 하였다.

2) 춤사위 분석은 질적 분석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춤사위 전체를 무보화 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검무에 춤사위를 앉은춤, 선춤, 칼춤으로 분류하여 특징적 요소들을 추출하고 이를 비교․분석하였다.

3) 반주음악은 경상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임수정의 “한국의 검무 음 악 연구”(민족음악학회, 2004)에 채보된 악보를 중심으로 각각의 검무에 쓰인 장단의 종 류와 특징을 지역별 특성에 따라 비교 분석하였다.

4) 무복과 무구는 각각의 보존회를 직접방문 촬영하여 무복의 종류와 색상, 무구인 칼 검(劒)의 재질과 모양, 특성 등을 분석 하였다.

5) 구성형식에 있어서 진주검무는 비디오 자료를 통해, 평양검무는 직접 인간문화재인 이봉애에게 사사받으면서 비교분석하였다.

(14)

3.

3. 3.

3. 선행 선행 선행 선행 연구 연구 연구 연구

연구를 수행 하기 위하여 선행연구를 조사하였다. 한국의 전통춤에 관한 연구 , 궁중검무에 관한 연구, 검무 음악에 관한 연구, 지역검무에 관한 연구, 평양검무에 관한 연구 등 5가지 범주로 나누어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전통춤에 관한 연구

박종필(1996) “이매방 전통춤의 전승과정에 관한 연구”: 이매방 전통춤의 전승 과정을 알아보고 전통춤의 특수성과 사회적 기능을 통해 전통춤이 인류에 어떤 전 승을 기여했는가를 연구.

정은영(2004) “한국 전통춤 체험의 현상학적 접근”: 전통춤 체험의 기술로부터 파악된 특성들과 본질적 요소들의 다양한 국면들은 우리 춤의 본질성 및 이론적 기반을 새롭게 구축하게 하는 가능성의 연구.

2. 궁중검무에 관한 연구

김운태(1998) “한국 검무사 연구”: 한국 검무의 역사를 전체적인 맥락, 지방의 향제와의 연계성에 접근하여 통합적인 관점으로 연구.

김혜림(1998) “한국 검무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 대, 조선시대의 검의 발생과 더불어 예술적 가치를 내재하며 정착되는 시기까지의 방전 상황에 따른 검무의 변천과정을 연구.

노수철(1994) “검무의 변천과정과 형태적 비교분석”: 역사적 변천과정과 형태적 비 교분석을 통한 지역적 특이성과 춤사위적 특이성을 분석함으로써 예술적 가치를 내재 하고 있는 검무와 민속 전통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검무를 두 가지 형태로 연구.

이경진(2003) “조선시대 정치 사회상에 나타난 궁중검무의 변화에 관한연구”:

검무의 생성, 변천과정과 더불어 조선시대 전 후기의 시대적 배경에 따른 검무의 흐름을 연구.

(15)

3. 검무 음악에 관한 연구

임수정(2004). “한국의 검무 음악 연구”. 우리나라에 분포되어 있는 각종 검무의 음악을 채록한 악보를 중심으로 특징적 요소들을 연구.

이희병(2005) “조선시대 정재의 악정에 관한 연구- 조선왕조실록 을 중심 으로-” 조선시대의 궁중무용사를 사료를 중심으로 문화사적 관점에서 연구.

4. 지역 검무에 관한 연구

민태금(1983) “진주검무와 해주검무의 비교연구”: 진주검무와 해주검무의 내용과 양식 즉 춤 장단이나 무복, 무구, 구성양식, 춤사위 등을 무보를 중점으로 연구.

정말숙(1987) “진주, 통영, 해주검무의 비교연구”: 비교연구를 통하여 지역 검무 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우리나라 검무의 형태를 통해 파악하고 예술적 특 성을 연구.

정수연(2000) “궁중검무와 각 지역 검무의 비교연구”: 조선시대 문헌상의 궁중 검무와 현행 궁중검무, 진주검무, 통영검무, 해주검무, 평양검무의 내용을 비교 분 석하여 시대양식의 변화와 지역적 성격의 차이점을 밝히고 검무의 원형적 요소를 통해 전통적으로써의 가치를 인식하고 검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

함정은(2001) “진주검무와 해주검무의 비교분석”: 진주검무와 해주검무의 대표 적 춤사위를 사진으로 춤사위별 특징을 비교분석.

5. 평양검무에 관한 연구

정은영(2003) 『숨어있는 춤을 찾아서』: 평양검무의 미적 가치의 연구에서는 평양검무의 동작의 특이성과, 동작에 연결되는 춤사위에 선의 아름다움을 연구.

이지연(2004) “이봉애의 평양검무 연구”: 평양검무의 춤사위특징 중심으로 일반 적인 특징들 이외에도 세부적으로 춤사위의 특징들을 연구.

황지윤(2005) “평양검무 춤사위에 관한 연구”: 평양검무의 역사적인 유래들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지는 한편, 현재 북한에서 활발하게 추어지고 있는 검무와 평

(16)

양검무와의 연관성을 연구.

위와 같은 선행연구 자료들을 검무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하였으나 평양 검무와 진주검무에 관련된 전문적인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평양검무 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와서야 관심을 갖게 된 새로운 학문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남측과 북측의 대표적 검무인 진주검 무와 평양검무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비교하기 위하여 양측 검무의 역사와 변천과 정, 춤사위분석과 반주음악, 무복과 무구, 춤의 구성형식 등을 연구 할 것이다. 이 것으로 두 검무의 특징을 정립하고, 평양검무와 진주검무의 원형보존 및 계승과 함 께 전통문화의 학문화에 기여 하고자 하였다.

(17)

Ⅱ. . . 검무의 . 검무의 검무의 검무의 역사와 역사와 역사와 역사와 특성 특성 특성 특성

1. 1. 검무의 1. 1. 검무의 검무의 검무의 유래 유래 유래 유래

검무는 장례와 사형 집행장에서의 칼춤으로부터 신라 화랑의 설화적 검무, 전통 의례로서의 민간 검무, 기녀들의 연희를 위한 검무, 궁중으로 유입이라는 단계를 거치며 변천하게 된다.

1) 1) 1) 1) 원시적 원시적 원시적 종교 원시적 종교 종교 종교 의식으로서의 의식으로서의 의식으로서의 검무의식으로서의 검무검무검무

검무는 검기무(劍器舞), 또는 황창무(黃倡舞)라고도 하며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 오는 춤이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용도로 칼을 사용하여 추는 춤이 있었다. 무속의식의 대감거리․부정거리․장군거리 등에 칼춤이 있고, 장례에서 상여 행렬의 선두에서 상여를 인도하는 상여꾼이 칼춤을 추며 잡귀를 물리치는 의식이 행하기도 하였다. 예전 현장엔 죄인의 목을 베는 일을 담당하는 망나니가 있었으며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기에 앞서 형장에서 칼춤을 추기도 하였다. 칼춤은 먼 옛날 부터 여러 가지 의식에 연행되었고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목적과 상화에 알맞은 형 태의 춤으로 변형되었다.

우리나라의 검무의 연원은 무속 등 원시종교 의식에 뿌리를 두며, 황창의 검무 설화를 통해서 고대의 검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황창무 이래 검무의 전통은 여기 검무(女妓劍舞), 항장무(項莊舞) 등으로 이어져 왔다. 검무의 전승이 단절되지 않았 던 까닭은 검무가 예술적으로 세련되었고 양식상으로도 개성이 뚜렷한 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

2) 2) 2) 2) 설화적 설화적 설화적 황창검무설화적 황창검무황창검무황창검무(탈을 쓰고 추는 칼춤)

황창검무는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風俗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7세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적국인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따라 죽었다. 고국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희생한 거룩하고 애 절한 사연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죽어간 황창랑을 조상(弔喪)하는 뜻에서 신라 사 람들이 탈을 만들어 쓰고 검무를 추어 그의 영혼을 위로해 준 것에서 검무가 시작되었 다.”

이 설화 속에 나오는 황창랑은 실존 인물인 화랑 관창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 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기록된 이첨(李詹)의 주장에 의하면, 이첨이 을축년 (1385) 겨울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베푼 향연에서 가면동자검무(假面童子劍舞)를 보았고, 그 춤의 유래에 대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황창(黃倡)은 필시 관창(官昌)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의 시에도 관창와오황창랑(官昌訛誤黃倡郞)이라는 구절이 있음을 보아도 황창랑은 관창의 사적이 후세에 잘못 와전된 때문이라는 것 을 명백히 하고 있다.(대한민국예술원, 1985: 320)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에는 “관창은 별명이 관상(官狀)으로 신라 좌장군(左將軍) 품일의 아들이었다. 어려서 화랑(花郞)이 되어 사람들을 널리 사귀 고 의표(儀表)가 우아하여 16세 때 말달리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 ”라는 내용으 로 보아 검무는 화랑 관창의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둔 황창랑(黃倡郞)의 고사와 연 관되어 있다. 신라에는 일찍이 화랑제도가 있었으며 신라는 화랑제도를 통하여 많 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화랑이 단순한 민간 청소년 단체에서 정식군사 교육기관으로 발족한 시기는 진흥왕 때였다. 이 제도는 지증왕 때부터 본격화 된 국가의 군비확충 사업 추진에 따라 군대를 보충할 목적으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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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정이 노린 보다 더 큰 목적은 이 조직을 통해서 국 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 확보하는 일이었다. 화랑도의 수련 과정에서 노래 와 춤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당시 화랑도를 지도하는 과정에 노래와 춤․체조 등 가 무가 집단적인 청소년교육은 물론 단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력의 기본적인 수단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화랑도는 다른 민족의 청소년 집단이나 전사(戰士)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조합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이기백․이기동, 1985: 228-9) 고 볼 때, 이들의 군사훈련 내용 가운데서 가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화랑도의 수련 내용은 체력단련․전술 훈련․검술․무용·노래․교양 등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수련과정을 거친 화랑은 높은 수준의 전문인이자 생활 교양인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황창무는 화랑도의 일 상화된 수준 높은 예능활동의 한 가지(황인덕, 1987: 282-3)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 특히 그 수련 종목 중에 무술인 검술과 예능인 무용․음악이 결합되어 검무라는 표현 양식을 낳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황창무의 연원이 화랑도의 수 련 종목 중 한가지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3) 3) 3) 전통의례로서의 전통의례로서의 전통의례로서의 검무전통의례로서의 검무검무검무

한편 고구려에도 4세기 이전에 검무가 연희 차원으로까지 발전된 단계에 있었 다. 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미천왕릉의 벽화에 나타난 검무 장면을 들 수 있다.

이외 검무에 관한 기록은 『백호통(白虎通)』 「예악편」(禮樂編)에 보인다. 즉 ‘동 방지락(東方之樂) 지모무(持矛舞) 조시생야(助時生也)’라 하여 창을 들고 춤을 추는

‘지모무’(持矛舞)가 있었으니, 이는 지금 무속의례 가운데 남아 있는 대감거리의 춤 과 같은 일종의 무악(巫樂)이었으리라는 견해(대한민국예술원, 1969: 905)도 제시 되어 있다. 중국에도 일찍부터 검무가 있었으며 이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 앞에서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또 양 (梁)나라에 도검기(跳劍伎)이래, 당나라의 도검무(跳劍舞) 등의 검기무가 있어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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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이두현, 1969: 905).

그러나 고대부터 가무를 즐겨 하여 생활의 일부로 삼아 왔던 우리 조상들의 전 통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 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검기무가 발전해 왔으며 그 가 운데 신라의 황창무가 검기무 발전 과정을 설명해 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의 검무는 고려시대에 전승되었는데, 바로 동자가면검무 (童子假面劍舞)의 양식이었다. 고려 신우왕 11년(1385)에 이첨이 계림, 즉 경주에 서 동자가면(童子假面)을 쓰고 검무를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검무는 고려 말에 는 가면을 소도구로 이용하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연희되고 있었다.

4) 4) 4) 4) 연희로서의 연희로서의 연희로서의 기녀 연희로서의 기녀 기녀 기녀 검무검무검무검무

조선시대에 연희되던 검무에 관한 기록은 김종직의 시문집『점필제선생집』(佔 畢齊先生集)에 보이는데, 그는 경주에서 황창의 검무를 보았으며, 이때 처용무도 함께 연희되었다. 숙종 때에는 두 여기(女妓)의 대무로써 이루어진 검무가 있었다.

두 여기는 전복에 전립을 쓰고 각각 쌍검을 사용하나 그 무태는 매우 우아하며 이 전의 칼춤과는 달리 살벌한 느낌이 들지 않으며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로 추는 검 무였다. 이러한 검무는 숙종 38년(1712)에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수원(隨員)이었던 김창업의 『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 검무에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점과 우아한 여기들의 춤으로 변형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제가의 『정유문집』 가운데는 검기무 감상에 관한 글 이 실려 있다. 박제가는 이 글에서 자신이 본 검무의 인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묘사의 대상이 된 검무는 경상도 밀양 출신의 명기 운심(雲心)의 춤이었다. 운심의 검무의 내용은 두 명의 기녀가 갑옷에 솜털모자 차림을 하고 양손에 칼을 들고는 가진 재간을 다 부리며 춤을 추었는데, 이 갑옷은 초기의 동자검무(童子劍舞) 당시 의 의상 양식이 전승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운심(雲心)의 검무에 대한 감상은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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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의 글 이외에도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나타난다. 조선말 고종 9년(1872)에 정 현석이 진주목사 부임 당시에 간행한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사기검무(四妓劍 舞)에 관한 글이 실려 있는데, 동기(童妓) 2명과 소기(小妓) 2명 등 모두 4명의 기 녀가 목이 구부러지지 않은 칼을 들고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삼국시대의 황창검무는 동자가면을 쓰고 추었고 고 려후기에도 동자가면무가 이어지다가 조선 초기 세조와 성종 때에는 황창검무가 처용무와 함께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숙종 때에는 두 기녀가 검무를 추었으며 이때부터는 춤사위가 우아하며 다소 부드러운 풍으로 바뀌고 가면도 쓰지 않게 되었다. 숙종 이후 고종 말기까지 2인 검무 혹은 4인 검무 등 여기무로 이어지 면서, 궁중의 향연에서 연희되었던 사실이 궁중연례에 관한 기록인 『진찬의궤』(進 饌儀軌)․『진연의궤』(進宴儀軌)․『진작의궤』(進爵儀軌) 등에 기록되어 있다(한국문화 예술진흥원, 1979: 50-1).

이와 같이 검무는 오랜 동안의 전승 과정에서 무원의 수의 증가, 가면의 활용 여부 등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다. 그 명칭도 영조 때에는 공막무(公莫舞), 첨수무 (尖袖舞)라는 명칭으로 분화되기도 하였다. 공막무는 여자들의 연희 즉 내연(內宴) 에서 추었고, 첨수무는 남자들의 연희 즉 외연(外宴)에서 추었다. 검무의 의상에 있어서도 시대나 연희 지도자의 개성에 따른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전립 을 쓰고 전복을 입었다. 무구인 칼은 순조 때에는 조선 말기까지는 칼 목이 구부러 지지 않는 것을 사용했으나 근래에 와서는 칼 목이 돌아가는 것을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1900년대 이후에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5) 5) 5) 5) 궁중검무로의 궁중검무로의 궁중검무로의 유입궁중검무로의 유입유입유입

이러한 검무가 궁중에 유입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이며, 궁중에 검무가 궁중 무용의 하나로 정착되어 정리되고 발전되었다. 궁중 여악의 한가지로서의 검무는 지방의 각 교방청에도 파급되면서 일부는 속화(俗化)된 검무의 양식을 파생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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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했다. 각 지방의 교방에서 연희되던 검무의 예는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나타 난 바와 같이 진주 관아(官衙)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의주(義州)의 교방에도 검무가 전승되고 있었다. 이능화는 『조선해어화사』(朝 鮮解語花史)에서 신광수의 『석북집』(石北集)의 관북 지방 풍물시를 인용하여 조 선시대 기녀들의 활동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 가운데는 기녀들의 검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의주의 기생은 말을 달리고 검무를 추는 재주가 있다. 국경의 수비를 맡은 중지(重 地)이기 때문이다. 때로 기녀들은 부임하는 고관을 영접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이 때는 모두 군복을 착용하고 성장(盛裝)을 하고 대열을 짓는다. 뿔피리를 한번 불고 북 을 세 번 치면 차례로 말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고 나는 듯이 달렸다가 돌아오는데 동 작에 털끝만 한 착오도 없었다. 그 중에 경혜(瓊惠)라는 기녀가 있어, 손에 쌍검을 들 고 춤을 추는데, 민첩하기 마치 제비와 같았으니 진실로 장관을 이루었다”(이능화․이재 곤 역, 1995: 317).

의주 교방의 기녀들은 기예는 물론 무예에도 능하여 승마와 검무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으로 기녀들이 전립에 전복을 입어 남장 을 하고 말을 달리며 검무를 추는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909년에는 관기 제도를 폐지하자 이에 각지의 교방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교 방이 폐지된 후로 기능을 대신해서 권번이 설립되고, 교방에서 연희되던 여악은 권 번을 통해 연희되었다. 권번은 각 지역에 설치되었고, 기녀들의 예능은 권번을 통 해서 교습, 전수되었다. 권번에서 교습된 무용 종목은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었는 데, 검무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검무는 인기 있는 종목이었으며 모든 권번 에서 기본적으로 연마해야 하는 필수적인 춤 종목이었다.

이러한 검무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일반 문화의 발전단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장례의식에서 상여꾼의 칼춤이나 망나니의 형장 칼춤과 같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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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식적인 의미로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면에서 시작되었다. 화랑의 설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황창랑의 검무를 거쳐 전통의례로서의 검무로 민간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조선시대에 민간들의 전통무용이었던 검무가, 기녀들이 연희를 목적으 로 부드럽고 우아한 동작으로 양반화 되고, 자연스럽게 궁중으로 유입되어 궁중검 무로 발전하게 된다.

검무는 표현 양식이나 무복과 무구 등에서 매우 개성 있는 무용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유지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잘 전승되어 왔다. 검무는 무용 인원의 구 성방식이나 춤사위 혹은 복식 등 전수자에 따라서 그 진행 방식에 다소 변형을 보 이기도 한다. 현재 전국에 분포하고 있는 검무 가운데 그 계보가 뚜렷하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검무로는 진주검무(제12호)와 통영검무(제21호) 등이 있다. 진주 검무와 통영검무는 전승 가치가 오래 전에 인정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6-7가지의 검무가 전승되고 있다.

2. 2. 2. 2. 검무의 검무의 검무의 검무의 단계적 단계적 단계적 발달과정 단계적 발달과정 발달과정 발달과정

원시 종교의식이나 죽음과 관련된 의식, 상여의식과 사형집행장에서 망나니의 칼춤 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진 의식검무로서 시작된 검무는 삼국시대 화랑, 황창의 검무설화, 여기(女技)검무, 항장무 등으로 변천하면서 세련되어 지고 아름다워져 궁중으로 유입되 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궁중검무로 자리잡기위하여 더욱 예술적이면서 뚜렷한 형식을 갖게되어 현재까지 그 특성과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 1) 1) 1) 삼국시대삼국시대삼국시대삼국시대

(1) 고구려

고구려 시대의 검무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한 양성은 알 길이 없 으나 몇 가지 관련 기록과 고분 벽화 등을 살펴보면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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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할 수가 있다(이지연, 2004: 6).

고구려는 중국과 서역이 가까운 관계로 일찍이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고 왕권국 가로 발전되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고 사람 들은 용맹과 슬기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보다 독특한 예술형태를 이룩하였 다. 고구려 무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통전(通典)에 잘 전해져 오 고 있으며(김운태, 1998: 27-8), 통구(通溝)나 안악(安岳)부근의 벽화나 무용총의 벽화, 동수묘의 대행렬도 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는 당시 음악․ 무용․교예 등 예술의 발달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무용총의 무용도(舞踊圖)에서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과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는 동적인 춤이 잘 나타나고 있고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고 직각으로 춤을 추는 모습 속에서 더욱 고구려무용의 면 모를 엿볼 수 있다. 동수묘의 대행렬도(大行列圖)에서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공의 권위를 통해 검무가 의식무로 연회되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운태, 1998: 28).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나라 안 모든 촌락에서는 밤만 되면 남녀들이 무리 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고 논다. ‘10월 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가 되면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이 것을 동맹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임순자, 1998: 10). 이 기록들을 보면 고 구려에서는 10월에 국중대회로서 제천의식이 베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때 나라 안 모든 마을에서는 남녀가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추고 놀았다고 하는데 이는 곧 가무(歌舞)와 가희(歌戱)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연극(演劇)의 기원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추론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특히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는 무용총 벽화를 보면 더 실증적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때 혹 종교 적인 의식무로서의 칼춤, 용맹스러운 무사들의 칼 동작을 모의하는 칼춤 즉 검무 (劍舞)가 추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신채호(申采浩)도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에서 다음과 같이 검무(劍舞)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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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시대에 무사들이 무예를 연마하였는데 혹 칼로 춤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끔질도 하며 택견도 하며 혹 강물의 얼음을 깨고 물 속 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가무(歌舞)를 연마하며 그 미덕(美德)을 보였 다”

한편 북한에서 나온 『조선문화사』에서도 고구려시대의 검무에 관해 다음과 같 이 서술되어 있다.

“안악 3호 고분에 그린 악무는 세 가지 악기에 맞추어 남자 한 명이 춤추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여기에 보이는 악기는 월금, 장적, 6현금 등 이며 악사들은 무릎을 꿇고 허리를 바로 세우고 연주를 하고 있다. 이 외 에도 고구려의 악무는 백제나 신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악무의 종류도 독무, 쌍무, 군무가 있었으며 그 놀이의 형태는 탈춤, 칼춤, 창춤, 북춤 등이 있다”

또 『조선민속무용』의 고구려의 칼춤이라는 항에서는 우리나라 칼춤의 뿌리와 그 원형을 팔정리 고분, 안악 3호 고분의 벽화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다고 언급하 고 있다.

“우리나라 칼춤은 형식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칼을 한 손에 들고 추는 칼춤, 두 손에 들고 추는 쌍칼춤, 칼자루목이 마음대로 돌아가게 되 어 있는 짧은 칼을 들고 추는 칼춤 등 다양하다. 이 모든 다양한 칼춤의 원형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바로 고구려 <칼춤>이다.”

지금까지 여러 자료에서는 전기 신라 때의 <황창무(탈을 쓰고 추는 칼춤)>를 우 리나라 칼춤의 원형이라고 보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의 <칼춤>을 보지 못 한데서 온 착오이다. 우리나라 칼춤의 원형과 유래를 신라 때의 <황창무>로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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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역사 문헌기록에만 의존한 고찰에서 온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황창무>는 7 세기에 생겨난 칼춤이지만 고구려의 <칼춤>은 4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춤이다. 벽 화에 반영되어 그 형상이 직관적으로 뚜렷하게 안겨오는 고구려의 <칼춤>이 나타 남으로써 우리나라 칼춤의 뿌리는 명백하여졌으며 이게 고구려시기에 훌륭한 칼춤 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론에서 기록보다 벽화를 중시하는 태도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하겠지만 칼춤이 고구려에 존재했다 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팔청리 고분 벽화를 보면 왼편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각을 불며 재주를 부리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완함 반주에 맞추어서 죽마를 타는 사람이 있고 그 가운데에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추어서 칼싸움을 하는 모습과 신라 오기(五技)의 하나인 금환 (金丸)과 같은 농환(弄丸)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의 상무적이고도 진취적인 기질과 어울려 검 무가 민속무용으로 폭넓게 행해여 졌다고 추측된다(황지윤, 2005: 8-11).

(2) 백제

백제는 부여족인 고구려에서 이동해온 민족에 의해 마한 땅에 이룩한 나라로, 중국의 남조 문화를 흡수하고 일본의 큐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아스카문화를 형성 하였다(송수남, 1988: 39).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비옥한 마한의 땅에 지어졌다. 마한 지방은 현재 경기도 한강 이남으로부터 충청도, 전라도에 위치하여 농경문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달한 곳이다. 예로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지방은 기우제나 산신제등의 각종 제례문화가 왕성한 것은 각종 문헌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백제는 중국 북방문화를 수입한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 남조문화를 수용하여 섬 세하고 온후하며 아담하고 이지적인 예술을 만들어 냈다. 이점은 중국의 남쪽이나 백제의 기후가 따뜻하고 온화한 풍토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과 문화교류를 갖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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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 등을 일본에 보내어 한학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 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침류왕(枕流王) 원년(元年)(서기 384)에 해로를 통해 남조 의 동진(東晋)으로부터 불교와 그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다시 발전시킨 연후 일본 에 전파시켰는데 이것이 일본 아스카시대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백제가 멸망 한 후 왕족들과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황족으로 군림하면서 아스카(飛鳥)문화 와 나라(奈良)문화를 번성시켰다(정병호, 2002: 72).

마한(馬韓)에 세워진 백제는 삼한의 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생활했기 때문에 5월 의 하종(下種)과 10월 추수가 끝나면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여러 밤낮동안 가무를 즐겼다. 이것은 백제 무용이 읍락의 풍속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고구려나 신라 무용과도 대등시 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송수남, 1998:

37-42). 검무에 대한 기록은 문헌적으로 나타난 것이 없기 때문에 찾아보긴 힘들 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유이민(流移民)이었던 것으로 감안하여 볼 때, 검무는 고구 려 춤에 많은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신라

신라는 문무왕 17년 삼국을 통일하고 예술에 있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문화를 융합하고 당나라와 교류하여 종합적인 조화미를 이루었다. 춤에 대한 수준도 높아 왕명으로 악무를 가르치고 전문적인 기술인에 의해 무용(舞踊), 음악(音樂), 시(詩) 가 분리되었다. 음악은 통일이전에 가야금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던 것이 통일 후에 는 삼현삼죽(三絃三竹)인 가야금 거문고 비파와 대금, 중금, 소금을 비롯하여 백파 (柏坡), 대고(大鼓) 등 여러 종류의 악기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행해졌다 (송수남, 1998: 45).

무용에 있어서도 통일 후에는 더욱 발전하여 무복(舞服)도 화려해지고 춤도 다양 해졌다. 신라시대에는 통일이전의 춤 혜성가무, 가야지무, 상염무, 검무와 통일신라 이후에 형성된 춤 신라무, 선유락, 처용무, 무애무 등과 같이 규모가 크고 무원의 수가 많은 무용이 있었다. 이러한 춤들은 통일체제하에 많은 문화발전을 이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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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국민생활을 안정시켰다. 신라의 춤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문헌적으로 남아 있 는 기록이 많다. 그중에 특히 검무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살펴보면

『동경잡기』(東京雜記), 『삼국사기』(三國史記),『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그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이경진, 2003: 15).

황창랑은 신라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나이 칠세에 백제의 시가로 들어가 칼 춤을 추니 구경꾼이 담처럼 모였다. 백제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 보고는 당으로 올라와 칼춤을 추라고 명령했다. 황창랑은 그리하여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형상을 본 따서 가면을 만들어 칼춤을 추는 형상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그 칼춤 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김운태, 1998: 37).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보아 검무는 황 창랑(黃倡郞)의 죽음으로 인하여 민중과 가까이 접하게 되고 고려시대에는 처용무 (處容舞)와 함께 궁중의식무(宮中儀式舞)가 되었다.

이첨(李詹)이 변백(辯百)하기를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계림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 배천경(裵天慶)이 향악(鄕樂)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정원 에서 검무를 춘 이야기를 하였다.

신라 때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나이가 15-6세이나 칼 춤을 잘 추었다. 그는 왕을 뵙고 청하기를 ‘신이 원하옵건대 임금님을 위 하여 백제의 왕을 쳐서 임금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하였다. 왕이 허락 하니 곧 백제로 가서 시가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의 구경꾼이 담처 럼 늘어섰다. 백제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을 추게 하고 구 경하니 황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쳐서 살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좌우 의 신하들에게 사해되니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결국 실명(失明) 하였다. 사람들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도록 광명을 찾게 하려고 꾀를 내 어 사람을 시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서 말하기를 ‘황창랑이 와 서 춤을 추는구나. 전에 듣던 이야기가 거짓이었구나.’하니 그의 어머니 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자 도로 눈이 밝아졌다한다(『동경잡기』, 「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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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경잡기』풍속조(風俗條)와 관창조(官昌條)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이름을 관 창(官昌)과 황창(黃昌)랑이라 했음을 볼 수 있다. 나이도 16세에서 17세로 적혀 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후일 나이어린 관찬의 용감한 이야기가 미 담(美談)으로 구전되어 오는 동안 나이 어린 점을 강조한 나머지 7세 혹은 8세가 되어 황창랑과 관창을 비교할 때 동일(同一)한 인물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어 관 창의 평가에서 황창랑의 이야기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다(민태금, 1984: 5).

검무는 검기무 혹은 황창랑무라고도 한다. 신라의 검무는 많은 설화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앞의 문헌에서 밝혔듯이 전투무용이나 묘기를 보이는 검무가 아닌 가 면을 착용하고 좀 더 희극성을 띈 가면동자무검희(假面童子舞劒戱)형태였다. 또한 신라 검무는 민간에서 가면무로 연희되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중기까지 계 속 민간이 전승하게 되었다(김운태, 1998: 38-39).

2) 2) 2) 2) 고려시대고려시대고려시대고려시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918) 태조 왕건(王建)은 수도를 개경에 두고 고구려 후 계승을 자처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호족연합정책(豪族聯合定策)을 실시하고 발해 유민을 수용하는 등 문화의 저변을 확대시켰다(김말애, 1996: 28).

다시 말하면 신라문화는 어디까지나 진골(眞骨)중심의 중앙귀족문화로만 점철되 어 지방문화의 중앙 진출이 가능하지 못했으나 고려는 지방 호족들에 의한 연합정 권을 이룩함에 따라 통일신라의 문화에 비해 확대되어갔다. 고려는 유교(儒敎)를 채택하고 불교를 사상적인 지도이념으로 하여 유․불을 조화시켜 고려 문화의 근대 지주의 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교로서, 연등회(燃 燈會)․팔관회(八關會)․인왕회(仁王會)등 국중대제전(國中大祭典)이 행해지는 등 대축 제가 성행되었다(정병호, 2002: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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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회의 연등은 불(佛)을 받드는 것이요, 팔관회의 팔관은 천령․오악․명산․대천․용 신 등을 섬기는 제사였다. 특히, 팔관회에는 각 지방에서 하례(賀禮)하고 외국사절, 또는 상인에 이르기까지 방물(方物)을 진상(進上)하고 하례한 것으로 보아 연등회 보다 더욱 큰 행사였음을 할 수 있다. 또한, 팔관회 때에는 사선무(四仙舞)와 선유 락(船遊樂)등을 상연(上演)하기도 하였다(김매자, 1995: 67-71).

팔관회에 대한 고려사(高麗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 원년(918) 11월에 팔관회를 베풀었는데, 뒤뜰 한 곳에 윤등(輪 燈)을 설치하고 그 곁에 향등(香燈)을 놓고 밤을 지새우도록 광명을 비쳤 다. 또 줄타기를 두 곳에 설치하였는데 높이가 50척이나 되고 모양은 연 대(蓮臺)와 같아서 바라보면 아른거렸으며 온갖 유희와 노래와 춤을 그 앞에서 펼쳤다. 그밖에 사선악부(四仙樂部)의 용(龍), 봉황(鳳), 코끼리 (象), 말(馬), 수레(車), 배(船)는 모두 신라의 고사(古事)에서 비롯되었다 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대에 이르러는 연등회는 사치하고 공고함이 극치를 이루었고 연등 의 수효가 백만을 헤아렸으며 이 행사 뒤에는 반드시 음악․무용․잡회(雜會) 등이 극 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에게 관현대악재인(管絃大樂才人)이 부족하다 하여 행신(倖臣)을 각도에 파견하여 아름다운 기녀를 뽑아 올리고, 서울의 무녀관비(巫女官婢)중에서 도 가무에 능한 사람을 모아 비단옷과 말총갓을 씌워 대오를 구성하여 남장을 시 켜 노래와 가무를 가르쳤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관기(官妓)가 있었음을 생각해 주 는 글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도 관기들에 의해 검무가 추어졌고 조선 시대의 검 무가 의식무용으로 정착되기까지 고려시대의 검무는 조선시대의 검무에 많은 영향 과 밑받침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유․불이 조화된 귀족문화의 황금기로서 무용도 신라에 비해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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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전개되어 예술성이 짙은 무용으로 승화된 시기였다. 당악과 아악이 수입되 고 향악이 정비됨에 따라 각종 민속무용도 여러 유형으로 분화되었다. 특히, 정 치, 사회의 풍자와 관료, 승려의 비행 등을 무용동작과 음악을 통해 서민의 감정 을 해소시키는 방법으로 은유화 함으로써 화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가 우리 민족예술의 형성기였다면, 고려시대에는 보다 더 예 술적인 가치관을 구축함으로써 무용을 더욱 심층화(深層化)하고 구체화하였다고 하 겠다(김매자, 1995: 69).

3) 3) 3) 3) 조선시대조선시대조선시대조선시대

조선왕조는 불교사회를 유교사회로, 귀족사회를 관료사회로 전환시켰으나 실제 로 많은 변칙이 있었으며 치국(治國)의 이념은 예(禮)와 악(樂)에 그 기반을 두었다 (김매자, 1995: 107). 그러므로 조선초기부터 예악(禮樂)에 관심이 높아 음악과 함 께 정재무용(呈才舞踊)에 많은 종류가 창제되어 당악정재(唐樂呈才)와 향악정재(鄕 樂呈才)가 보편화되었다.

검무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종(世宗 1418-1450), 숙종(肅宗 1661-1720), 영조 (英祖 1724-1776), 정조(正祖 1777-1801), 순조(純祖 1800-1834), 고종(高宗 1864-1907)시대에 많이 나타나 있는데 특히 검무는 항약정재로 악기․악보에 이르 기까지 모든 것들이 총 정리된 세종 때에 궁중정재무용(宮中呈才舞踊)으로 더욱 확 립되었다.

15C 세종 때에는 기녀들이 아닌 무동(舞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박연(朴 堧) 등이 “연향(宴享)에 여악(女樂)을 쓰지 말자고 상소하여 세종 13년 8월 여악을 없애고 대신에 남악(男樂)을 쓰는 것이 좋겠다.”(세종실록, 권53, 13년 8월 갑오 조)라고 하여 세종 13년 12월에 박연이 남악의 수를 정하여 나이 어린 남자아이 50-60명을 선발하여 무동 등을 궁궐에 여기들 대신에 갖추어 놓았다. 이것은 정재 무동(呈才舞童)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회례(會禮), 사신접대(使臣接待), 양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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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老宴) 등 모든 연향(宴享)에 남악을 사용하였고 정전(正殿)에는 가면을 쓴 무동 을 사용하였다(『성종실록』, 권75, 정유년 정월 임자조).

검무에 대한 숙종 38년의 기록은 『서포집』(西浦集) 권2를 보면 「관황창무」

(觀黃昌舞)라는 시가 있어 황창무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중 ‘취미여아황 창무(翠眉女兒黃昌舞)’라는 글귀는 이때부터 여기검무가 있었던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대의 숙종38년(1712)에 연행사행(燕行使行)의 수원(隨員)이었 던 김창업(金昌業)의 ‘왕래문견록’(往來聞見錄)에 의하면 가면을 쓰지 않는 여기 2 인의 검무를 알 수 있어 여기검무가 숙종 때부터 있어 자읍(者邑)에서 여악의 출연 물이 되었고, 이것이 최근까지 전승된 것을 볼 수 있다(이경진, 2003: 19).

18C 초 영조 때 이르러 검무는 2종류로 나누어져 검무를 추기 전에 추는 첨수 무(尖袖舞)와 검무를 추고 난 후에 춤을 추는 공막무(公莫舞)라 하였다. 첨수무는 남자들만 모이는 외연(外宴)에서 무동(舞童)들에 의해 추어지고 공막무는 여자들만 모이는 내연(內宴)에서 기녀(妓女)들에 의해 추어졌다. 이때부터 가면이 벗겨지고 검무가 무기 숭배의 테두리를 벗어나 연희적 검무로 발전하였다(정병호, 2002:

113).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제가(朴濟家: 1737-1805)의 『정유문집』가운데는 검 기무 감상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박제가는 이 글에서 자신이 본 검무의 인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묘사의 대상이 된 검무는 경상도 밀양 출신의 명기 운심의 춤이었다. 운심의 검무의 내용은 두 명의 기녀가 갑옷에 솜털모자 치장을 하고 양 손에 칼을 들고는 가진 재간을 다 부리며 춤을 추었는데, 이 갑옷은 초기의 동자검 무 당시의 의상 양식이 전승된 것이라 여겨진다(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49).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수령이 부임(赴任)하거나 유명 인사를 초대할 때 또는 수령 의 생일(生日) 등 지방 잔치에도 궁중처럼 정재가 등장하여 검무를 추었다. 18C 후반 김홍도(金弘道)의 <평안감사환영도>(平安監司歡迎圖)나 신윤복(申潤福)의 <쌍 검대무>(雙劍對舞)의 그림에서 더욱 뚜렷이 볼 수 있다. 또 『통군정관개시학화 조』(統軍呈官開市學火條)에 기녀가 추는 검무에 관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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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순조(1800-1834)시대에 진연(進宴)에 사용되었던 정재홀기(呈才笏記) 를 보면 다음과 같이 무순(舞順)과 무태(舞態)를 기록하고 있다. 악공들이 무령곡 (武寧曲)을 연주한다(향악과 당악을 섞어 연주함). 악사가 검기(劍器)를 전중(殿中) 의 좌우(左右)에다 놓고 나간다. 박을 치면 춤추는 사람이 서로 마주서서 나가며 춤추고 물러가며 춤추다가 자리를 바꾸어 서며 혹은 등지고 혹은 바로 서서 춤춘 다. 서로 마주 꿇어 앉아 춤추되 검을 희롱하며 검을 잡고 번쩍이며 소매를 놀리며 검무를 춘다. 여러 사람이 연귀소 연풍대를 추면서 나가고 물러서며 음악이 그친다 (이순전, 1974: 14-16).

궁중향연에서 추어진 춤을 정리한 ‘진찬의궤(進饌儀軌)’를 보면 검기무의 기원을

‘항장무검(項莊舞劍)’으로 보고 있다. “항장이 칼춤을 추며 한 고조를 해치려할 때, 항백이 소매로 막아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공막(公莫)의 뜻은 항백 이 항장에게 한 고조를 해치지 말라고 한데서 온 이름이라고 한다.”로 기록되어 있 다.

『순조진작의궤』 부편(附編) 공령조(工伶條)에 의하면 “2명이 고운계를 쓰고, 석죽화(石竹花)를 그린 전복(戰服)에 은속대(銀涑帶)를 하고 호화(胡靴)를 신고 각 각 칼 두 자루씩을 들고 상대하며 춤춘다.”고 기록되어 있다. 첨수무는 무원 2명이 피변관(皮弁冠)을 쓰고, 첨수의를 입고, 칼을 들고, 농검, 연귀소, 연풍대 등의 순으 로 춤춘다. 원래는 손바닥만 뒤집고 제치면서 반복하여 추었기 때문에 엽무(葉舞) 라고도 하였다. 『진작의궤』 권1에 의하면 영조 때 악원에 명령하여 첨수무로 고 쳐 부르게 했다. 말 그대로 첨수무는 좁은 소매를 늘리는 춤이다.

『순조진작의궤』 및 순조 29년(1829)에 순조가 40세가 되는 동시에 재위(在 位)3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잔치의 내용을 담은 『순조진찬의궤』권2 검 기무조에 의하면, 검기무는 춤만 있고, 창사(唱詞)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은 향악을 사용하였으며 여기(女妓) 네 명은 전립(戰笠)과 전복(戰服)을 입고 각각 두 개의 칼을 가지고 두 대열로 나누어 마주하며 춤을 추었다.

근대 구한말기의 검무에 대해서도 순종(1907-1910) 당시 진연 때 연회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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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형태와 종류를 기록한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검무의 무보가 전하 고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조선의 검무는 상고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면서 점 차로 전투나 의식과 같은 생활 속의 기능을 가진 검무에서 서서히 삼국시대, 고려 말까지 동자가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동자가면무희’로 계승되다가 조선시대에 들 어서면서 그 형태와 내용에 변화를 가져와 세조나 성종 때에는 황창랑 검무가 처 용무와 함께 연희되었으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가면을 쓰지 않고 여기(女妓)들 이 추는 형태로 연회되었다. 즉 춤을 추는 주체가 동자에서 여기로 변하였던 것이 다. 다시 말하면 세종 때에는 무동들을 출연시켰고 여기(女妓)를 궁궐에 갖춰 놓음 으로서 궁중정재무용으로 더욱 확립이 되었다.

숙종 때에는 여기검무가 있었으며 춤사위가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풍의 2인 검무 가 등장하였다. 영조 때에는 검무를 첨수무와 공막무라 하여 검무가 2종류로 나누 어졌고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무가 궁귈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상당히 많이 성행했으며 정조 때 에는 왕실의 행사에 포구락, 무고 등 많은 정재무용과 함께 검무가 추어졌고 검무를 춘 여기들의 이름도 또한 정확히 밝혀졌다. 순조시대의 검무는 4인 검무로 향약을 사용하면서 면면히 내려오고 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김운태, 1998: 60).

3. 3. 평양검무의 3. 3. 평양검무의 평양검무의 평양검무의 역사와 역사와 역사와 특성 역사와 특성 특성 특성

1) 1) 1)

1) 평양검무의 평양검무의 평양검무의 역사평양검무의 역사역사역사

평양검무는 평양에서 연행되는 춤이다. 평양은 조선시대 지방 감영이 있었고 교 방청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예로부터 명기(名妓)들이 많았고 그 기예가 뛰어나 전통 예능이 다양하게 연행되어 졌다. 조선시대 평안 감사 부임도에 보면, 연관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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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가 공연되는 장면이 묘 사되어 있고 관찰사가 베푸 는 ‘부벽루(浮壁樓)놀음’에도 검무가 자주 연희되었다고 전해온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궁중여악이 폐지되고자 이 와 함께 지방의 교방청도 자연히 해체되자 평양검무 는 이후 평양권번을 중심으 로 그 명맥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 로 인한 분단국가라는 현실 로 북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평양검무가 사라졌 으며 이미 전통이라는 용어 는 사용되지 않는다. 북한에 서 조차도 평양검무가 소멸

되었다는 점에서 평양검무의 존속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춤을 사회주의 국가적 제한성 때문에 그대로 답습하길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춤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체제의 이질 성에 있다고 보아진다. 북한에는 전통적인 검무 대신 창작 칼춤이 있다. 이 춤은 발레를 개조한 듯 보이며 과거의 평양검무의 동작의 변형이 보이기도 한다. 이 창 작 칼춤은 염불장단으로 느리게 추는 대복을 없애고 종래의 일반적인 검무를 매개 로 하였다. 춤 후반부에 박력을 강화하고 격전에 대비한 훈련의 모습과 결전 장면 을 인상적으로 처리하였다. 평양에서는 평양검무가 소멸되었고 북한의 춤이 남한에

<그림 1>평양검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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