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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회적 의미구성과 의식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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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칸트, 푸코, 정동이론, 신경미학, 사회적 체계이론 비교

신 현 진*

1)

Ⅰ. 서론: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의식

Ⅱ. 예술의 사회적 의미구성에 초월적 인식론을 적용한다는 것 1. 의식 활동(지각과 인지) 관련 용어정리

2. 칸트와 푸코의 이론에서 인지의 초월적 위치 3. 푸코의 통시적 접근과 루만의 예술체계의 분화

Ⅲ. 예술의 사회적 의미구성에 공시적 차원을 적용한다는 것 1. 사회 안에서의 예술과 지각

2. 정동이론과 신경미학에서 지각과 공명 3. 사회적 체계이론이 구성하는 예술의 의미

Ⅳ. 결론

Ⅰ. 서론: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의식

미술관에서 뜻밖의 오브제(예를 들어 변기)를 발견할 때, 우리는 한 번쯤 이

* 독립연구자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9.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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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가 왜 예술이라 불려야 하는지, 더 나아가 예술을 예술이라 부르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바로 그 (변기) 오브제 이미 지가 짤이나 밈으로 둔갑해 온라인의 네트워크 사이를 옮겨 다니는 것을 발견한 다면 우리는 이를 예술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그렇다면 이를 비예술로 구분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지 생각해봤을 법도 하다.1) 더구나 짤의 경우 시각예술과 마찬가지로 시각 이미지의 형식까지 갖추고 있는 데다가 그것이 전달하는 감성적, 직관적 메시지와 상상력에 경탄해 반사적으로 이를 다시 친구들과 SNS를 통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면 그러한 짤과 밈이 예술적 위상을 결핍한다고 해야 할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요소를 결핍하기에 우리는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벨팅(Hans Belting, 1935- )은 근대를 예술의 시대라 명명하면서 예술의 구분이란 그저 근대의 산물일 뿐이며 오히려 예술보다 더 포괄적인 역할을 했던 이미지에 주목하자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요청했다.2)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도 이미 지가 포화된 오늘날에는 이미지가 예술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3) 어떤 짤이나 밈은 고흐의 작품 이미지 만큼이나 많은 25억 페이지가 검색되고, 소통되는 오늘날의 양상을 돌이켜 보았을 때, 현대 예술의 사회적 의미가 구성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는 생각해 볼만한 주제일 것이다.

짤이나 밈이 제기하는 문제는 결국 예술/비예술의 구별과 판단, 즉 미적인 것을 규정하는 과정의 문제이고 그 과정에서 개별 감상자의 의견이, 즉 의식 활동이 반영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토는 1964년, 예술이 일상의 오브제(이미지)와 구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데 덧붙여 1) 밈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가 그의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 Selfish Gene (1976)에서 진화생물학의 맥락으로 소개한 용어로, 시각 이미지, 생각, 행동, 분자, 양식과 같은 일종의 문화적 요소가 모방이나 변조 등의 방식을 통해 확산,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달의 매개체로 기능하는 유전인자와 같은 정보의 기본단위를 일컫 는다. 한국에서는 ‘짤’이라는 유머러스한 시각 이미지의 확산과 함께 짤이라는 유의어가 더 널리 통용되고 있다.

2) Hans Belting, The End of the History of Art, trans. Christopher S. Wo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p. 3.

3) David Joselitt, After Ar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p. 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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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전문가의 네트워크로 설명되는 예술계에 의해서 예술의 지위를 부여받는 다고 했다.4) 따라서 이후 예술에서 미적 체험의 개별주체인 관람객의 지각과 인지는 예술의 사회적 의미 형성과 상대적으로 무관해졌으며 결과적으로 오늘날 관람객은 미술관에 가더라도 예술을 판단할 자격이 없음을 의식하게 된다. 미학 자의 논리나 순수예술은 점점 더 사회에서 비교우위를 잃어가고 예술을 지각하고 인지할 때 준거자로 사용할 보편 규범을 제시했던 미술사 혹은 미학이 더는 유효 하지 않게 되어가는 상황이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안적 시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예술을 전혀 다른 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정동이론, 신경미학이나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의 사회적 체계이론은 각각 철학, 과학, 사회이론의 영역에서 개개인의 의식 활동 기제를 수용하고 예술/비예술의 판단이라는 논의를 인간이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경험적 차원에서 출발시킨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각 이론이 추구하는 바에는 큰 차이가 있겠으나 이들은 개별적 감상 주체의 지각 활동과 인지 활동을 원인자로 규정하고 현재의 혹은 미래 사회에서 예술의 의미가 이에 따라 산출됨을 인정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예술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준거자들을 사용해 왔으며 그 준거자들은 감상자의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설정했는지를 비교하고 지향할 바를 고민하려 한다. 방법으로는 근대 이후 발견되는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과 관련한 논의들을 개별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인 의식 활동, 즉 지각과 인지 활동을 키워드로 추적한다. 특히 칸트, 푸코, 정동 이론, 신경미학,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이 미적 주체의 지각과 인지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리고 개인의 의식 활동을 이론 정립에 어떻게 수렴되는가를 비교 검토한다.

4) Arthur Danto,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예술의 종말 이후, 김광우, 이성훈 옮김 (미술문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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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예술의 사회적 의미구성에 초월적 인식론을 적용한다는 것

1. 의식 활동(지각과 인지) 관련 용어정리

먼저, 의식 활동과 관련된 용어가 일상에서는 포괄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 논문에 적용되는 용어와 그 의미의 한계를 지정할 필요가 있다.5) 예를 들어 지각은 감각정보를 감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인식 또는 인지와도 호환되는 한편 사리 구별, 분별력의 유무를 지칭하는 ‘지각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의식이라는 단어 또한 다르지 않아서 언어학, 마취학, 심리학, 철학과 심리학 등에 서는 맥락에 따라 각각 그 범위를 다르게 분석, 규정하는 상황이다. 특히 의식은 인간의 정신활동 전체를 지시하는가 하면 제럴드 에델만과 같은 뇌과학자는

“의식을 생각할 때 가장 주춤하게 되는 게 바로 의식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에게 의식은 기본적 생명현상일 뿐이다. 그에게 의식은 뇌 스스로가 환경에 대하여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의 여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지 이건 실질적 움직임이건 운동에너지로 전환될 준비가 된 기계적 상태를 의미한다.6) 본 연구자는 서술의 편의상 상대적으로 최근에 연구된, 그리고 경험주의에 근거 하는 인지신경과학의 연구를 기준으로 삼아 의식 활동을 지각과 인지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지각을 감각정보의 감지라는 의미로, 인지를 의식 활동 중에 판단 및 추상화 행위와 연루된 활동으로 제한해 사용하기로 한다.

먼저, 인간의 의식 활동은 의식 활동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① 지각, ② 1차 의식, ③ 고도의식 이렇게 3단계로 나뉜다. ①단계인 지각은 감각정보를 조직, 동일시하여 의식에 재현하는 일을 한다. 지각은 신경체계가 수행하는 감각의

5) 본 논문의 뇌과학과 관련된 용어의 정리는 대부분 박문호 박사의 연구에서 왔다.

박문호,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휴머니스트 2013), p. 656.

6) Gerald M. Edelman, Bright Air, Brilliant Fire: On the Matter of the Mind (New York: Basic Books 1992),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황희숙 옮김 (범양사 출판부 1998), pp. 167-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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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이라 대부분의 연구는 지각을 판단의 영역인 인지와 구별한다. 하지만, 의식 활동은 지각과 인지가 서로 공명을 통해 연동되어야만 가능하다. 신체 상태의 80%를 차지하는 정서적 상태인 정동은 지각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판단과 관련된 활동인 인지는 정동 이후의 과정으로

②단계인 1차 의식과 ③단계 고도의식으로 나뉜다. 대상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②단계에서 뇌는 주어진 시각정보를 과거 경험에 비추어 패턴을 인식 하는데 이를 개념화 또는 범주화라고 한다. 패턴을 인식한다는 것은 지향성과 관계되므로 개별주체는 주어진 감각정보를 모두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패턴 형성에 유효한 것만을 선택, 처리한다. 이때, 범주화는 예측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지각으로 들어오는 정보에서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이 위험하리라 예측한다. 이때 예측한 의미가 통한다고 판단되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발생한다.

결국, 감정은 지각된 정보로 발생한 정동을 개념으로 의미화한 결과 값이어서 무조건적 반응이라기보다는 인지활동으로 구별된다.7) 예측이 맞아떨어진다고 판단 되면 의식은 ③단계 고도의식으로 옮겨가지 않고 행동에 옮긴다. 이 단계까지 두뇌의 판단은 개인의 과거 경험에만 근거해 이루어지므로 그 결과 값은 개인마다 고유한 창조적 정보처리라 할 수 있다. ③단계 고도의식에서는 ②단계에서 범주화 된 데이터를 토대로 계산이나 논리화, 관념화, 추상화, 총체화 등이 수행된다.

이 단계에서는 지식, 도덕, 사회규범이 연산자로 활용된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③단계의 인지활동 내용이란 경험세계에서 들여온 연산자를 활용하기 때문에 사회적 실재가 반영될 뿐만 아니라 결과 값을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외연화 될 수 있어서 개인의 고유한 의지는 오롯이 주관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7) Julian Jaynes, 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 (Mariner Books 1976), p. 461; 박문호,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

,

p.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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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칸트와 푸코의 이론에서 인지의 초월적 위치

20세기까지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근대 미학의 토대는 칸트에 의해서 정초되었다고 하겠다. 칸트는 인지를 다룬 「판단력 비판」 등의 비판 시리즈 저작을 통해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은 알 수가 없고 오직 현상만을 알 뿐이라고 의식 활동의 한계를 상정했다. 따라서 칸트는 관념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적어도 그는 인간의 인지 과정을 양, 질, 관계, 양태 이렇게 네 개의 경험적 계기를 사용해 서술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의식 활동을 지각, 오성(이해), 이성으로 구분한다. 그는

①단계인 지각을 대상의 양과 질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비-자발적 능력으로,

②단계인 오성부터는 감지된 정보를 직관과 상상력을 활용해 표상을 산출하는 자발적 이해능력으로 구분했다. ③단계인 이성은 정보를 총체화하는 능력이 있다.8) 여기까지는 뇌과학의 분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에게 인간의 인지는 상상과 이해가 통일성을 이루는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있으며 이는 경험적 원칙에 부합하여9) 결과적으로 공통감(상식) 형성을 가능하게 하므로 객관적인 취미판단이 가능하다고도 서술했다.10) 또한, 미학적 예술과 구분되는 순수예술의 지위를 인지가 수반된 예술에만 부여하는 등,11) 이성에 초월적 지위를 부여해 궁극적으로 관념의 세계에 손을 들어주었다. 달리 말하자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 론은 사회의 영향 아래에 있는 ③고도의식인 이성을 보편성을 담보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주관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으로든 어떤 개념 혹은 이념을 전제하는 순간 미감적 판단의 반성과정은 본래의 유동적이며 열린 상태를 벗어나게 되고, 이 반성 과정에서 오성 내지 이성과 유희하고 있는 상상력의 활동과 자유는 일정한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12) 여기에 ③단계 고도의식이 주관성을 담보하지

8) 김상현, 칸트의 판단력 비판(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p. 98.

9) 김상현, 칸트의 판단력 비판, p. 15.

10)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1790), The Critique of Judgment, trans.

James Creed Meredith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 96, p. 37.

11) Immanuel Kant, The Critique of Judgment, p. 72.

12) 하선규, 「미감적 경험의 본질적 계기에 대한 분석-칸트 미학의 현재성에 대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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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는 현대 뇌과학의 발견을 적용하면 우리는 칸트의 논리가 이성을 통해 개별주체의 주관적 의식 활동의 결과 값을 억압 내지 배제했다는 논리를 도출할 수 있다. 즉, 그의 이론은 영원불변한 이성의 선험적 논리에 미학을 종속하게 하므로 주관성이 발현되고 수렴될 때 가능해지는 사회 안의 다양성 형성이란 희생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개별주체가 의식의 ①단계와 ②단계에서 경험 하는 차원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개념도 도출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미학에 근거해서만 미술을 논할 수 있을 뿐 개별주체가 작품을 제작하거나 감상할 시점은 물론 예술/비예술 판단에서 ①단계의 지각과 정동, ②단계 1차 의식은 배제된다.

이러한 결론은 미적 거리를 상정했던 미학의 정치가 감성을 분할해 노동자 계급의 감성을 미적 체험에서 배제했다는 랑시에르의 주장과 공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대 미학이 예술/비예술 판단의 근거로 온전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13)

사회로부터 영향 받는 이성(③단계 고도의식)이 상상력이라는 주관을 이끎 으로써 빚어지는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아포리아를 비판한 이론가 중에는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가 있다. 그는 이 아포리아를 벨라스케스의 회화작 품, <시녀들>을 예시로 들어 「말과 사물」에 서술하였다. 먼저 고전 시대의 에피 스테메를 칸트의 방식으로 적용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14) <시녀들>의 화면 구도는 그림을 제작 중인 역사화가 벨라스케스의 방에 공주와 시녀, 호위병, 난쟁이, 수도사 등이 방문해 화가의 주변을 서성이는 상황을 포착한 스냅숏이다. 고전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이 대상을 재현한다고 전제한다. 이 기준자로 이 회화 작품을 읽을 경우, 17세기 회화라는 표상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이념, 즉 판단 준거자를 충족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시녀들>은 제목에 걸맞게 시녀들이 등장 한다. 한편, 1656년 제작 당시 원제목인 <필립 4세 가족 La Familia de Felipe

美學 44권 (2005), pp. 115-152 (UCI(KEPA): I410-ECN-0102-2009-600-000441187) p. 126.

13)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 비 2008), pp. 25-26, p. 77 참조.

14) 푸코에 의하면 각 시대는 지식이 출현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존재하며 그 조건이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이를 에피스테메(episteme)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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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을 적용하더라도15) 제목이 암시하는 국왕 부부와 가족을 구도에서 찾아낸다면 이 회화작품은 역사화 형식을 충족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 역시 이를 위반하지 않았고 관람객이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의 원경에 그려진 작은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시녀들>에 고전시대 인식론의 원리를 대입하는 방식이다.

[도 1] 푸코의 공간들: <시녀들>이 그려지는 예술가의 작업실 A, 국왕부부가 위치한 자리 B, 관람객의 위치 C16)

칸트, 혹은 벨라스케스와는 다른 시대에 태어난, 그래서 현대의 에피스테메를 자신의 준거자로 삼는 푸코가 <시녀들>을 지각하는 방식은 칸트와는 달랐다.

①단계인 지각 활동을 수행하면서 그는 뭔가 특이하다는 것을, 직관을 위배함을 지각한다. 그는 ②번째 인지 단계로 넘어가 지각된 시각정보인 등장인물들의 시선에서 패턴을 인식하고 예측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

15)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현재 이 작품을 소장하는 프라도 미술관이 1843년에 제작한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6) B. M. Fiol, “≪LAS MENINAS≫ COMO MITO DE ≪PIGMALION≫”, in: Traza y baza Cuad. Hisp. simbología, arte y Lit. 0 (1972) (DOI: 10.1344/traza01972%25x), p.

121. 본 도판은 Fiol의 이미지에 화살표와 알파벳을 본 연구자가 덧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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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시선이 모두 화면 너머 이쪽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시녀들>은 화면에 그려진 공간인 공간 A와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이 위치한 공간인 공간 B, 그리고 이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관람객으로서의 자신이 위치한 공간 C를 전제했다 [도 1].

그리고 이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등장인물의 시선이 모아지는 화면 너머 이쪽에 있는 국왕 부부임이 분명하며 거울은 그의 예축이 의미가 통함을 증명한다고 확신한다. 이어서 그는 ③단계 고도의식 활동을 수행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시녀들>의 화면이 표상하는 바는 라파엘의 걸작으로 가득 찬 작업실을 소유한 국왕의 문화적 소양과 공주와 시녀들의 순종적인 눈빛이 향하는 대상이 가진 국왕의 권위는 재현했지만 정작 그 소양과 권위의 주인인 국왕의 현전을 화면에서 제거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는 표상으로 재현이 가능하지 않음을 증명하므로 푸코는 고전적 에피스테메가 한계에 도달하였다고 결론짓는다.17)

푸코가 고전적 에피스테메의 한계점을 밝히는 과정은 인식론이 설정하는 의식 활동의 위상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푸코는 이성의 ③고도의식이 처리한 결과를 우선하던 고전적 에피스테메를 푸코의 ①단계 지각과 ②단계 직관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주장이란 ‘내 눈엔 다르게 보인다’라는 주장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표상이 재현 가능하다는 고전의 에피스테메가 상정했던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칸트의 이성 중심의 인식론이 개별주체를 소외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적했다.18) 이는 푸코가 고전이 아닌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대의 에피스테메를 준거자로 삼았기 때문에 발견 가능했던 차이였다. 그가 국왕을 라캉의 결핍된 주체의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차이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표상과 재현을 동일시하는 특정 체계를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인 준거 자로 강제할 수 없다는, 즉 의식 활동이 주관적 관점을 포함한다는 후기구조주의적 설계이기도 하다.

17)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Gallimard 1966), pp. 525-526;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pp. 40-43.

18) 미셸 푸코, 말과 사물,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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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푸코의 통시적 접근과 루만의 예술체계의 분화

푸코는 칸트적 인식론에 내재한 인간 주체의 소외를 고전주의 시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면서 발생한 변화를 추적하는 통시적 접근방법을 사용해 증명하였다.

그의 통시적 접근 방법은 칸트의 인식론에 시간 차원을 더하는 업적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푸코의 <시녀들> 독해 또한 이성이 감성을 이끌고, 이성에는 이율배반이 포함된다는 칸트의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데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이는 <시녀 들> 독해에서 그가 상당 부분 칸트적 인지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그 또한 인식론의 한계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램플리는(Matthew Rampley, 1966- ) “뒤르켐을 계승하는 푸코의 담론의 역사 역시 인식론적 체계의 역사이다. 이러한 개념 정립은 비판의 여지가 많은데 개별 행위, 사건, 발화 혹은 사회적 전환 과정과 원인이 고려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제시하지 못한다”라고 했다.19) 그의 주장은 푸코의 논리 또한 칸트와 마찬가지로 관념에 머무르며, 개별주체가 작품을 관찰하는 지각활동이 진행되는 미적 체험의 공시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관념이 경험 세계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자면, 푸코는 바로 그 소외된 현대적 주체가 재귀적(self-reflexive) 성격을 가지며 그것이 재귀적이라는(recursive) 점은 충분히 서술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재귀성이란 관찰 자가 자신이 준거하는 기준자에 종속되기 때문에 비판에 필요한 초월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결국, 관찰자인 푸코 또한 의식의 주체이고, 즉 주관 적인 생각을 가지므로 자신의 준거자인 현대적 에피스테메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비판적 거리의 확보 불가라는 조건을 가진 재귀적 관찰자의 논리는 각자 주관이 다른 다수의 관찰자와 이에 따른 다양한 관찰 결과 값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푸코는 이를 수렴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19) Matthew Rampley, “Art as a Social System: The Sociological Aesthetics of Niklas Luhmann”, in: Telos, vol. 148 (September 2009), pp. 111-140 (DOI:

10.3817/0909148111),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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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시녀들>을 관찰하는 상황으로 되돌아 가보면, 그는 주체성을 결핍한 현대적 주체인 국왕 부부가 위치한 자리 B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푸코 자신이 위치한 공간 C는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회화를 관람하고 있을 오늘날의 관람 객이 위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푸코가 관람객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푸코의 글은 <시녀들>의 화면인 공간 A와 국왕 부부가 위치한 공간 B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공간 C에 위치한 관람객(Espectator)라고 이름 붙여진 남성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면의 벨라스케스가 바라보는

“지점은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육체, 우리의 얼굴, 우리의 눈이므로, 관람자인 우리는…”이라고 전제하는, 자신과 관람객을 동일시하는 시점에서 서술하였다.20) 따라서 그의 서술방식은 벨라스케스 시대의 관람객은 물론, 이후 몇 백 년이 지난 현재 미술관에서 <시녀들>을 관람하는 관람객의 개별적 경험과 오해를 배제하고 푸코라는 한 명의 관람객 시점과 시대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 푸코는 시간은 물론이고 주체와 타자마저 동일시하는 초월적 관점을 적용한 것이다. 결국, 익명의, 그래서 유(類)적이자 다수인 관람객21) 개개인의 관찰이라는 인지 활동의 개별성을 직접 반영하지는 못했으며 그림 읽기를 자신의 준거자인, 고전적 에피스테메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논리로 환원했다. 그럼으로써 칸트가 상정했던 초월적 인식론 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데 실패한다.22)

우리는 푸코의 이론을 통시성을 접목해 초월적 인식론을 일부 극복했지만 재귀적 관찰자의 다수성을 설명하는 공시성이라는 측면은 실패한 논리라고 전제

20) 미셸 푸코, 말과 사물, p. 26.

21) 유적 다수의 개념은 바디우가 지칭하는 현대적 주체의 특징이다. 유적 다수는 generic 혹은 일반적인 존재자로서 이데아와 같은 특이성을 미래완료형으로만 담지할 수 있는 익명의 개별 존재의 복수형이다.

22) 이러한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이끈 푸코에게 공정한 주장이 아니다. 다만

말과 사물은 푸코 저작 중에서 구조주의 시기에 쓰인 저작물이기도 하고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의 실패에 주목한 저작이어서 구조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질 뿐이다. 허경,

「신도 인간도 없는 언어의 우주—말과 사물에 나타난 푸코의 소쉬르 수용—」, 개 념과 소통 23권 (2015), pp. 309-332 (DOI: 10.15797/concom.2015..16.008), p. 3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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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의 의미의 사회적 구성이란 푸코의 에피스테메에 공시적 분석을 접목하는 시각을 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래야 경험세계에서 개별주체가 스스로 적용하는 인식을 수렴하는 예술의 이론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루만 연구자 노진철은 아니라고

“인식된 모든 것은 자기-준거적으로 수립된 구성이다”라고 주장한다.23) 그는 푸코의 논리는 물론이고 모든 인식론은 한 사람의 서술 주체로 환원되는 구조를 갖기 때문에 유적 다수라는 공시적 차원은 포섭할 수 없다는 인식론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고도의식, 그 중에도 의식 바깥으로 외연화 될 수 있는 영역인 언어를 토대로 이론을 정립한다는 행위는 이미 시작부터 칸트의 아포리아를 전제한다는 의미이다. 이 맥락에서 푸코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칸트의 아포리아가 봉착한 문제는 ‘공간’의 문제이며 여기서 문제해결의 관건은 관념이 실천에서 만나는 체험 세계에서의 작동임을 드러낸다.

푸코의 증명은 표상=재현의 장치로 작동하는 근대적 소통에 내재한 구조적 한계의 발견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회화가 제작된 시기는 후기 르네상스 이후의 시기이자 고전주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확산된 계몽주의는 인간의 위상을 높였고 칸트 또한 인간에게 이성을 사용하라고 요청했지만24) 시기 문학 작품에는 “상상 가능한 것들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의식과 소통 사이의 분리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자주 찾아진다고 루만은 지적한다.25) 여기서 우리는 루만이 발견한 것 또한 표상=재현의 소통이 인간의 의식 활동을 온전히 아우르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으로부터 도출한 루만의 결론은 달라서 17세기 유럽 사회에는 소통의 실패를 보완하려는 필요가 생겨났으며 의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간접 소통”의 매체가 요구되었고

23) 노진철, 「체계이론적 인식론에 대한 이해」, 니클라스 루만 워크숍: 사회의 기능체계들의 기능과 구조적 연동 (한국루만사회적체계이론학회 2018), p. 6.

24)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1784), 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편역 (서광사 1992), p. 13.

25) 니클라스 루만, 예술체계 이론, 이철, 박여성 옮김 (한길사 2015),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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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소통 너머의 영역인 직관과 지각을 활용하는 간접 소통 기능을 수행하는 예술이 사회적 체계의 하나로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에 언어를 사용 하는 소통에서 주체가 소외되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또한 주체의 일부, 즉 개별적 주체가 언어 바깥의 ①단계 지각, ②단계 1차 의식 활동에 할애하는 시-공간 차원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요구일 것이다. 이와 관련 하여 루만은 예술체계의 분화가 이루어져 “예술이 노력하는 지점은 비활성화된 가능성을 재활성화 하는 것이라 표현될 수 있다” 했다.26) 이때, 간접 소통매체로 서의 예술은 ③단계 인지활동에 포함되는 이성의 언어가 놓치는 그래서 비활성화된 가능성을, 그리고 ①지각과 직관 그리고 ②1차 의식 영역이 처리한 주관적 결과 값을 예술가가 재활성화 함으로써 이전에는 소통되지 못했던 부분을 경험세계에 제시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체계로서의 예술이 기능하는 바는 ①단계 지각, ②단계 1차 의식이 산출하는 내용을 감각을 활용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그의 주장은 근대를 살아가던 복수의 개별주체, 유적 다수로서의 인간은 300년이나 지나 한 명의 천재 학자인 푸코가 고전적 에피스테메의 실패를 이론으로 정립하기(1966) 이전에 이미 표상=재현의 불가능성을 보완하는 간접 소통방식인 예술을 만들어 언어소통의 한계를 개선하는 진화를 스스로 이루어냈음을 증명한다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진화는 ①단계 지각, ②단계 1차 의식을 주목하므로 개별주체가 예술/비예술 판단을 내리는 동안의 시-공간 차원도 사회적 의미 차원에 수렴했다 하겠다. 그렇다면 예술의 사회적 의미는 그 구성원이 진화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이론의 역할은 이를 그저 관찰하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간접 소통 매체로서의 예술을 활용하고 예술이 사회적 체계 중의 하나로 분화한 진화과정을 정리한 루만의 예술체계는 결과적으로 공시적 차원을 수렴한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로서의 예술은 예술을 매개로 발생하는 소통 사건 으로부터 예술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 결과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를 유비적으로27)

26) Niklas Luhmann, Art as a Social System, trans. Eva M. Knod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p. 352.

27) 유비는 a와 b 사이의 동일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a와 b 사이의 관계와 c와 d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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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악, 체계로 정리한 결과 값이다. 그러나 고전적 존재론에 입각한 인식론자도 아니고 미학자도 아닌 사회학자 루만은 예술이 무엇인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의 이론은 예술 실천의 저변에서 보이지 않는 작동을 체계라는 형식으로 도출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별적, 구체적 사안에 처할 때마다, 소통을 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의미가 통한다고 판단되면(sense-making) ‘예/아니 오’와 같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행동에 옮기든지 다음 소통 으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나간다. 예술의 경우에서도 예술가와 감상자 라는 개별주체는 각자가 (다르게) 잠정적으로 전제한 의미로 예술을 소통하고,

‘예/아니오’를 표현하면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방식으로 실천하면서 그럭저럭 예술을 작동시키고 있다. 예술이 이렇게 경험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동안 그 안에는 통용되는 의미는 체계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자기생산(autopoiesis)을 지속 한다면 사회적 의미를 성취한다고 루만은 전제한다. 이때의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 소통을 관찰하고 이를 체계라는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그의 사회적 체계로서의 예술이다. 이때 파악되는 예술 체계는 ‘예술이 매개하는’ 소통의 결과에서 예술이 작동된 바를 회고적으로(posteriori) 기술한 결과물이지 선험적 지식이 아니다.

그에게 미학은 ‘예술에 대한’ 소통이고 예술작품은 소통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매체이다. 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할 때 “미적 판단(취미 판단)이 의식 안에서 만들 어지지만 초월적 통제로 일반화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칸트의 견해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28) 결국, 그의 체계의 실체는 개인이 예술/비예술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소통 행위가 조직해낸 것이다. 이렇게 예술체험이라는 개별주체의 의식 활동이 작동한 바를 역추적하는 방식이 그가 공시적 차원을 수렴하는 양상이라 하겠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론은 “작동적 구성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29) 또한 루만의 사회적 체계이론이 유적 다수로서의 개별적 주체가 소통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

관계 사이의 동일성을 찾는 것이며 이 관계의 동일성은 유사성이 아닌 차이를 전제로 한다. 루만은 자신의 저서에 자신의 이론은 차이-이론에 근거한다고 밝혔다.

28) Niklas Luhmann, Art as a Social System, p. 23.

29) 니클라스 루만, 예술체계 이론, p.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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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이라면 그의 이론은 이미 소통하는 개별적 주체가 (소통 중에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린 예술/비예술의 판단을 모두 수렴한다. 이러한 유적 다수인 개별주체의 경험이 세계를 산출한다는 작동적 구성주의 특징들은 예술체계 이론이 사후적으로만 그것도 다수로 인식될 수 있음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체계이론 안에 각 체계를 파악 서술하는 개별주체가 비평적 거리를 가지거나 초월적 위상을 차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이른바 재귀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의 한계를 피해 간다. 또한, 루만이 기술한 예술 체계도 자기-준거적으로 수립된 ‘다수’의 인식론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지위만을 갖는다.

Ⅲ. 예술의 사회적 의미구성에 공시적 차원을 적용한다는 것

1. 사회 안에서의 예술과 지각

지금까지 칸트와 푸코의 인식론적 측면이 의식 활동에서 지각과 ①단계 의식 활동을 제외하는 한계를 가짐을 살폈다. 그리고 애초에 예술이 의식에 온전히 다가가기 위해 분화된 것이라면 예술은 모든 개별주체의 의식 활동이 수렴되어야 함과 더불어 루만의 이론이 모든 개별주체의 의식 활동에서 ①단계 지각과, ②단계 1차 의식, 그리고 ③단계 고도의식을 어떻게 포섭하는가를 살폈다.

그런데 만약 언어소통이 의식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예술체계가 분화되었 다면 개념미술, 특히 언어를 강조하는 개념미술은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언어 위주의 개념미술은 간접 소통매체로 진화한 예술 본연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까? 개념미술이 언어라는 인간의 ③단계 고도의식에 배타적 권리를 부여한 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루만은 그가 작고하기 직전인 1995년, 언어를 매체로 사용할 것을 강조했던 아트 앤드 랭귀지(Art & Language) 그룹의 행사인 ‘아트 앤드 랭귀지와 루만(Art & Language & Luhmann)’에 초대되어 이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루만은 행사를 관찰하고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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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만약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철학이 된다면 [체계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작동할까? 금융시장이 재화로부터 파생되는 것처럼 예술체계 안에서 일어 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지식으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이 될까?”30)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술체계 이론」에서 이들 활동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했음을 인정했다. 그가 관찰했을 때, 개념미술은 예술 그 자체를 주제로 다루면서 일종의 체계적인 판단 기준자를 형성하고 재생산되어왔다. 이는 개념미술이 자기생산(autopoiesis)에 도달해 예술체계로부터 분화된 하부 체계로서 지위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개념미술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는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론을 끌어들여 와야만 개별 작품의 의미가 설명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들을 설명해줄 전문 가의 필요성이 증가하였고 전문가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지는 한편, 관람 객과의 연결은 단절될 위험에 처하게 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은 스스로의 진화에 개념미술을 포함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31)

개념미술이 관람객과 분리되어 예술 본연의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 한편, 동시대 시각문화연구 분야는 이미지의 포화 현상을 보고하고 있다. 시각 이미지가 문화에서 예술 및 언어를 뛰어넘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표현 양식이 되었다고 선언되는가 하면32) 이미지는 바이러스처럼 빠른 속도로 확산 유통될 수 있는 표현 수단이어서 순수예술은 꿈도 꿀 수 없는 양적, 질적, 시-공간적 권력을 가진다고 주장된다.33)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서 우리는 혹시, 개념미술이 간접 소통매체라는 사회적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완재로 짤과 밈이 발명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만약 이미지가

30) 아트 앤 랭귀지와 루만이 함께한 행사는 1995년 비엔나의 쿤스트라움(Kunstraum)에서 치러졌다. 독일 칼스루헤의 미술관 제카엠(ZKM)은 2005년 이 행사를 기념하는 심포 지움 ‘Art & Language & Luhmann Ⅲ’를 개최하였다.

https://zkm.de/en/event/2005/11/art-language-luhmann-iii-symposium (2019년 6월 10일 최종 접속).

31) Niklas Luhmann, Art as a Social System, p. 82, p. 96, pp. 166-167.

32) W. J. T. Mitchell, “The Pictorial Turn”, in: Artforum (March 1992), pp. 89-94.

33) David Joselitt, After Art, p. 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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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양적으로 대체할 만큼 포화된 현상이 언어 주도적인 동시대 미술의 지배적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면 그것은 이미지가 수행하는 기능이 있어서일 것이다.

오늘날 트위터를 통해 소통이 활발한 양상을 연구한 김남시의 경우 그는 트위터 소통이 정보의 소통을 넘어 발화자의 경험을 교환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잠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34) 그의 주장이 맞다면, 이미지의 포화는 예술의 결핍을 대신해 우리가 의식에 근접하려는, 경험 안에 현전하는 지각과 인지를 잃지 않으려는 요구를 해소해주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체계이론이 규정하듯이, 어쩌면 예술은 “원칙상 소통될 수 없는 것[지각]을 사회의 소통 네트워크 안으로 통합”

하는 기능을 좀 더 주목했어야 했다.35) 이성적 언어가 놓치는 지각의 시간을 작품에 담아 소통함으로써 사회적 소통의 네트워크 안에 재기입했어야 했다.

그랬을 때에서야 의식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예술 본연의 기능에 충실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2. 정동이론과 신경미학에서 지각과 공명

예술/비예술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서 미적 체험을 수행하는 개별주체의 현전을 지각과 인지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은 존재론적 전환이라 일컬 어지는 사회학에서의 지각변동과 궤를 같이한다. 사회학의 존재론적 전회는 사회 학의 관심이 선험적 인식론의 구조를 전제하고 세계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경험세계에서 주체가 대상과 관계 맺는 과정의 면면을 자세하게 살피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관심이 돌려진 상황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36)

34)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Erzählung’ 개념을 중심으로」, 기호학연구 30권 (2011), p. 18 (UCI: I410 –ECN- 0102- 2012- 700- 002852560).

35) 니클라스 루만, 예술체계이론, pp. 139-141.

36) 루만은 자신의 이론을 대상의 극단적 탈존재론화라고 자신의 저서 Social System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p. 177에 밝혔다. 루만의 위치는 사회학계와 일견 다르지만 현상을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현대의 존재론과 많은 부분 공유하는 지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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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예술과 관련해서 부르디외에서 랑시에르로 이어지는 연구는 예술체계를 보증하는 과정에서 인간 본성을 분할한 미학에 의한 ‘감성의’ 정치를 주목하였고,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인류 사회의 발전경로가 인간과 사물이 동등한 행위자로서 맺는 동맹 ‘관계로부터’ 초래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신경미학과 특히 정동이론은 인간이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①단계 지각에 포함되는 정동과 수용자(관람객)의 주관이 미적 판단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함을 증명했다. 먼저, 정동 이론은 명칭에서부터 이미 개별주체의 ‘지각을’ 토대로 삼는다.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56- )는 햇볕에 녹아내리던 눈사람을 그늘에 옮기고 작별인사를 하는 내용의 영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실험을 분석해 정동이 인간의 판단을 바꿀 만큼 영향력을 가졌음을 증명해냈다.37) 이 실험에 의하면, 영상을 본 피실험자의 초기반응은

‘무섭다’였지만 이 영상의 내용을 해설하는 캡션이 덧붙여진 버전을 다시 보여주자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기쁜가/슬픈가’라는 두 개의 단어를 주고 각 장면에 대한 반응을 살폈을 때는 가장 슬픈 장면이 가장 기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로부터 마수미가 도출한 첫 번째 결론은 시각정보를 지각하는 의식 활동의 ①단계에서 감성적 어필의 강도인 정동이 시각정보의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였다. 이 실험에서 영상 이미지 해설을 위해 덧붙여진 캡션은 의미의 차원, 즉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는 ③단계 인지 활동 중에서 특히 언어학적 자질에 관한 것이다. 영상에 언어가 덧붙여졌을 때조차 가장 슬픈 장면을 기쁘다고 표시하는 반응은 ①지각단계에서 발생하는 정동의 효과가 캡션과는 무관하게 피실험자의 판단에 그대로 유지, 반영됨을 의미한다. 즉 정동이 이해 논리와 상반된,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보인 것은 정동이 언어의 효과를 중지시켰다는 의미 이다. 마수미는 이를 통해 정동이 사회언어학적 영향 아래 처리되는 ③단계 고도 의식 단계로부터 자율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도의식보다 우선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같은 논문에서 이 주장을 보강하는 추가 실험을 제시했다. 이 실험은

있다.

37)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의 자율」, 가상계(갈무리 2011), pp.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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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실험자들에게 A나 B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상황을 주고 뇌가 반응하는 시간과 피실험자가 의사를 표시하는 시간을 측정했다. 이 실험은 피실험자들이 자신이 결정한 바를 표현하기 0.5초 전에 이미 뇌파측정기(Electroencephalograph)에서 뇌파가 활성화됨을 감지해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피실험자들이 결정을 계산 하기 전에 (시간적으로는 신체가 먼저) 선택과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뇌보다 신체가 먼저 정동의 형식으로 의사 표현을 한다는 의미는 ①지각의 단계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 거꾸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리도 성립된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자유의지는 개인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 하는 능력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 의하면 의사결정은 실상 최초의 의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향이 정동의 형태로 발생한 후 그것을 거부하거나 동참하는 논리적 반응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즉, 인간 주체의 이성적(지적) 판단이나 자유 의지는 ①지각의 단계의 판단 값을 ③단계 의식 활동을 통해 타협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③단계 의식 활동이 사회로부터의 압력을 받는 과정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자유의지가 개별주체의 고유성을 대변한다는 통상적인 관념을 위배한다.

그는 이렇게 자유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지향성이 발현되는 장소를 신체로 이전하여 초월적 인식론에 저항한다. 하지만 정동이란 구체적인 이미지나 언어와 결합하지 않는 한 계량화 될 수는 없다고도 서술한다. 때문에, 정동을 독자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 이러한 의식의 지각 단계를 그는 잃어버 리는 0.5초, 가상계(the virtual)라 명명했다. 결과적으로 계량화가 어려운 그의 증명은 예술의 사회적 의미의 형성에서 개별적 주체가 경험하는 정동을 고려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표명하지만, 예술/비예술 판단 과정, 더 나아가 예술의 의미의 사회적 구성에 직접적인 분석자로 활용하는 데에는 한계를 부여한다.

신경 미학의 경우, 이 학문 분과는 미적 경험을 인지적, 정감적 처리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도식화한 ‘미적 경험 모델’을 내놓았다. 신경 미학의 모델 또한 관람객의 지각과 과거 경험이 예술을 해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침을 증명했다.

미적 체험에서 의식 활동을 추적하는 윌리엄 실리(William Seeley, 1971- )의 연구에 의하면, ①단계의 지각은 맹점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눈이 대상을 2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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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으로 감지하기 때문에 관람객이 작품의 시각적 자극제로부터 제작자의 의도를 알아챈다는 것은 보장될 수 없다. 작품의 의도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관람객에게 정동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②단계 의식 활동으로 옮겨가는 관람 객의 두뇌는 지향성을 갖는다. 즉, 감각된 시각정보가 두뇌에 가하는 과부하를 피하려 지각되는 정보에서 일부만을 선택해 이름표를 붙이고 패턴화 한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과거 경험에 각인된 형태와 기능 분류를 토대로 정보를 재구성한 다음 작가의 의도를 예측/해석한다. 이는 작품 감상에서 관람객은 미학의 도움 없이 드러난 시각정보 중에서 무엇이 주목할 만한 것인가를 판단하고 의미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 단계에서 관람객은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만든다. 예술 가도 자신의 의도를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동일한 작동 원칙 아래 작품을 계획, 제작하지만 관람객이 작가 의도의 파악은 물론이고 이에 동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③단계 고도의식 활동이 진행되면서 감상자는 미술에 관한 지식을 찾아 읽고 자신의 해석을 보완하거나 다른 사회적으로 더 널리 수용될만한 의미를 선택할 수 있다.38)

3. 사회적 체계이론이 구성하는 예술의 의미

마수미와 실리의 연구는 예술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이 관람객의 과거 경험에 의존해야 하므로 예술/비예술의 판단 기준자는 선험적 지식처럼 일방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 작동에 의한 것임을 증명 한다.39) 이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미적 경험 도중 ①단계에서 지각된 정동의 강도가 ②단계에서의 과거 경험과 비교되고 ③단계 고도의식에서 추상화를 거쳐

38) William Seeley, “Naturalizing Aesthetics: Art and the Cognitive Neuroscience of Vision”, in: Journal of Visual Art Practice, vol. 5, no. 3 (2006), pp. 195-213 (DOI:

10.1386/jvap.5.3.195_1), pp. 196-198, pp. 206-210.

39) William Seeley, “Naturalizing Aesthetics: Art and the Cognitive Neuroscience of Vision”, 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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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량화되는 순서로 작동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그 과정에 언어나 지식과 반드시 결부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은 물론 신체와 직결된 부분도 포함됨을 증명 했다. 미적 체험에서 신경계와 두뇌라는 서로 분리된 신체기관이 언어의 매개 없이 예술/비예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두 기관이 연동되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분리된 두 기관 사이에 그리고 대상과 주체의 사이에 공명이 필수 불가결함을 증명한다.40) 예술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과정에서 ③단계 고도의식 활동만큼이나 ①단계의 정동을 통한 신체의 공명과 ②단계 예측 과정이 미적 판단에 커다란 변수가 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예술/비예술의 판단에 앞서 언급한 칸트와 그를 계승하는 초월적 인식론의 설정이 재고되어야 함을 그리고 주체의

①②③단계의 지각과 인지 활동을 모두 수렴해야 온전하게 됨을 다시 진술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미지, 정동, 신경미학으로 이어지는 논의가 성취하는 바는 예술/

비예술의 판단과 예술의 의미 확립 과정에 개별주체의 의식 활동이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뿐이다. 그 이유는 공명 또한 정동과 마찬가지로 해석에 계량적 기준자를 제공하기 어려워서이다. 이 경우 특정되지 않는 유적 다수로서의 개별적 주체들이 주관적으로 그리고 재귀적으로 내리는 복수의 결정이 예술/비예술의 판단에 수렴되는가는 보장할 수 없다. 즉 개별적 주체들의 공시적 차원이 실질적 수렴은 보장하지 못한다.

예술/비예술의 판단과 관련해서 새로이 고려해볼 만한 이론은 의식 활동의

①②③단계를 수렴하는, 즉 공시적 차원을 적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의 의식을 먼저 밝혀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루만의 이론은 인지는 커녕 아예 주체를 배제하는 이론이다. 그에게 의식은 인간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들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언제든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 있으므로 의식에 정확히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41) 루만의 이론은 대신에 인간이 아니라 소통을 살핌으로써 의식 활동의 결과를 수렴한다. 그에게는 성공한 소통이 만들어내는 의미만이 사회 체계를 구성해 나간다. 소통에 실패한다면 40)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의 자율」, pp. 57-63.

41) 니클라스 루만, 예술체계이론,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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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소통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소통이 성공해서(sense making) 사회적 으로 의미가 있다고 인지되어야 그 소통은 후속소통으로 연결될 수 있다. 루만의 이론은 후속 소통으로 이어진 소통만 관찰한다. 루만은 후속 소통으로 이어진 소통내용을 2차질서관찰(second-order observation)이라 부른다. 후속, 즉 2차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1차의 주관적인 사고 내용을 그 사고의 바깥의 시선 에서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2차 질서로 구분되는 루만의 관찰은 사회적으로 의미를 획득한 소통 내용을 대상으로 다룬다.

여기서 루만이 2차질서관찰에 의한 소통만을 다룸으로써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질서관찰에 의한 소통만을 바라보는 행위는 인간의 주체성으로부터 분리된 사회의 ‘작동’만을 체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루만의 장치이기도 하다.42) 청자는 화자의 발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거나 혹은 거부할 수 있고 화자가 통지한 정보는 후속 소통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소통이 다음 소통으로 진행되는 동안 혼란과 모순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의식 활동이라는 관념의 (혹은 마수미의 이론에서는 가상의) 공간과 소통이라는 시간을 통과해 어떻게든 무언가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다음 소통(2차질서관찰)에 연결되고 사회적 체계를 작동하게 한다는 것은 사회적 으로 의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이를 관찰한다는 것은 인간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활동이 완료된 ‘이후’의 결과 값 차원만을 관찰하는 셈이 된다.43) 하지만 인간 의식의 관여 없이, ①②단계인 정동, 감정, 예측 없이 과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을 근간으로 하는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예술은 소통을 다루는 체계이기 때문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더구나 루만은 예술이 의식에 좀 더 다가갈 잠재성을 지각과 직관에서 찾았다. 예술이 의식 활동의 ①단계에 해당하는 지각과 ②단계에서의 예측에 해당하는 직관을 활용한다면 (정동이론과 신경미학이

42)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정치, 서영조 옮김 (이론출판 2018), pp. 13-20. 인간의 본성과 독립된, 조직된 상호작용의 특성을 가진 따라서 사회적인 층위만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43)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후속소통에서 발견된 인식의 정리가 아니라 인식들의 작동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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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듯이) 예술 소통에는 개인의 과거 경험과 정동을 통해 신체가 개입하는 것 이다. 따라서 루만 이론의 관찰대상은 그리고 특히 예술 소통은 2차질서의 관찰의 이전의 단계에서 개별적 인간의 지각이 관여한다.44) 이 지점은 예술/비예술의 판단할 때 (루만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체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소통만을 다루 지만, 주체의 지각과 직관은 그 소통의 전(前) 단계에서 간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별적 주체들이 소통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의사가 공시적 차원 으로 수렴될 것을 약속한다. 다만 그 방식은 자신의 의사가 체계에 수용되는지의 여부를 후속 주체에게 개진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정동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인지를 예술/비예술 판단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까지만 편다. 하지만 체계이론은 의식 활동을 직접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다수의 관찰자가 의식 활동을 통해 경험하는 그 시-공간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수렴한다.

예술의 분화는 유적 다수의 주체가 소통을, 즉 공시적 차원을 통과해 진화를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고 진화의 결과를 관찰하는 사회적 체계 로서의 예술은 특정되지 않는 유적 다수 혹은 다중이라 부를 수 있는 예술 소통에 참여하는 이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결과이자 이를 이론으로 정리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의미가 통하는 것을 관찰해서 알게 된 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고 결국 그러한 인간의 행동이 세계를 창출한다는 발제적 인지 이론의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45) 의식 활동이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게 한다면 예술/비예술의 판단 또한 의식 활동 전체가 수렴되어야만 온전하다 할 것이다.

44) Francis Halsall, “Niklas Luhmann and the Body: Irritating Social Systems”, in: the new bioethics, vol.18, no.1 (2012), pp. 4-20 (DOI: 10.1179/2050287713Z.0000000001), p. 4.

45) 움베르또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베른하르트 푀르크젠과의 대담,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p. 29. 마뚜라나의 인지는 고도의식뿐만 아니라 지각 및 ①단계의식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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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결론

본 연구는 칸트, 푸코, 정동, 신경미학이 규정하는 지각과 인지활동을 루만의 작동적 구성주의 시각과 비교하였다. 이는 짤이 발휘하는 폭발적인 영향력과 감상 주체의 적극적인 참여 양상이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드러낸다는 판단에서 시작된 연구였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개념미술을 강조하는 현대미술이 충족하기 어려운 부분, 언어 너머의 감성을 소통하고자 하는 다중의 욕구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정동 이론과 신경 미학이 미적 체험에 개별감상자의 과거 경험이 필연적으로 개입됨을 증명하는 상황에서는 칸트, 푸코 등, 철학자의 정합성 있는 이론조차도 환원이라는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미적인 것의 판단은 진리에 다가가는 어느 한 사람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적 감상 주체의 의식 활동이 수렴된 이론에 의해서만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본 연구자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 연구를 통해 작동적 구성주의에서 대안을 찾을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작동적 구성주의는 의식 활동의 ①②단계가 세계를 산출할 여지를 준다. 그의 방법론이 인간을 이론에 직접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직관을 위배하기는 하지만, 좀 더 인본주의에 가까울 수 있다. 개념미술의 사례에서처럼 사회에서 의미가 통하고 작동되는 ‘시간’이 경과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된다.

이렇게 세계를 만들어가는 여정에 소통에 참여하는 한 모든 인간의 의식을 수렴 하는 방식은 어쩌면 반 인본주의적으로 보이는 체계이론의 이면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의식 활동을 모두 수렴해 보려는 시도란 민주적일 것이다. 작동적 구성주 의의 시각은 유적 다수로서의 인간의 소통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세계를 산출하도록 담보하며, 역설적으로 공시적 차원을 수렴해 소통하는 한, 개별적 인간 모두를 세계의 진보 또는 진화의 주체로 상정하는 셈이다.46)

* 논문투고일: 2019년 11월 10일 / 심사기간: 2019년 12월 16일-2020년 1월 5일 / 최종게 재확정일: 2020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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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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