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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남한산성 침탈과 주민들의 저항 사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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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남한산성 침탈과 주민들의 저항 사례연구

31)

김 명 섭*

❙국문초록❙

본 논문은

20

세기 전반기 일제가 남한산성에서 저지른 파괴와 탄압

,

그리고 주민들의 저항사례를 시론적으 로 고찰한 글이다

.

일제는

1896

년 경기도 이천에서 일어난 남한산성연합의병을 강제 진압한 이후

, 1907

8

월 중기의병들이 재봉기하자 또다시 이 곳이 경기의병들의 집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적극 파괴하고자 하 였다

.

남한산성 파괴는 일본에서 파견된 일본군 정예부대가 맡았는데

,

이 부대는

1907

8

22

일 기병대를 광주 남한산성에 파견하여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였다

.

이로 인해

700

년 된 고찰 인 望月寺를 비롯해

8

개의 사찰이 소각되었다

.

또한 일제는

1917

년 광주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여

300

년간 행정중심 역할을 한 산성마을을 퇴락시키도록 유도하였다

.

나아가 일제는 남한산성 지역주민들의 열띤 지원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높았던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

. 1900

년 廣州小學校에서 출발한 산성마을의 근대 학교는

1906

년 사립 廣興學校로 재건립되었는데

,

이 학교는 지역주민들의 뜨거운 지원과 향학열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

하지만 일제는

1911

년과

1918

년 두 번에 걸쳐 학 교의 이름을 바꿔버리고 식민화 교육정책을 시행했다

.

이러한 일제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

산성마을 주민들은

1919

3·1

만세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

일부 산성마을 주민들은

1927

년 전 민족적 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는데 적극 참여하는 한편

,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

신간회 광주지회의 창립에 앞장선 이 마을 출신 石惠 煥은 문맹퇴치와 소비조합 설립 등에 적극 나섰으며

,

타 지역 노동운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

하지만

1931

5

월 신간회가 해소되자

,

석혜환과 마을 주민들은 비합법적 사회주의운동을 꾀하였다

. 1936

1

월 일제에 의해 적발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남한산성 마을에서 형성된 항일의 정서가 지역 계몽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으 로 이어진 것이며

,

이 경험이 사회주의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여 타 지역으로 확산된 항일 저항운동의 한 사례 라 할 수 있겠다

.

[

주제어

]

남한산성

,

광흥학교

,

노동공조회

,

신간회 광주지회

,

광주공산당협의회

* 단국대학교 강사 / hak6278@hanmail.net

(2)

❙목 차❙

.

머리말

. 1896

년 남한산성 연합의병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진압

.

일제의 남한산성 파괴와 주민탄압

.

산성마을 주민들의 저항 사례

.

맺음말

Ⅰ. 머리말

남한산성이 자리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은 백두대간 중 철령 부근에서 뻗어나온 광주산맥 끝자락 청량산 에 위치해 있다

.

광주시는 북위

37

34

,

동경

126

58

분에 위치한 경기도 중앙에 위치하여 동으로 여 주

·

이천과 인접해 있고

,

서로는 수원과 시흥을 이웃하였으며

,

남은 용인과 접하고

,

북은 한강사류로 경계를 지여 고양과 양평군에 대립해 있다

.

이같이 광주시는 산악이 많아 높은 봉우리를 포위하고 있는데

,

동의 武 甲山

,

서에 淸溪山

,

남에 文衡山이 있고

,

북에 劍丹山 등 있고 중앙에 日長山이 자리잡고 있다

.

또한 광주시 는 사면에 다양한 하천 연안과 산간계곡을 끼고 있는데

,

북으로는 漢江과 동으로 南漢江

,

서쪽으로는 炭川과 남쪽에 慶安川 등이 남한산의 사방을 자연스럽게 방어시설인 垓子시설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적 요새를 만 들어갔다

.

이에

하늘에서 만들어준 천혜의 요새

라는 뜻으로

天作之城

이라 일컫는다

.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시 중부면 청량산의 지형은 서울 방향인 서측이 높고

,

동측이 낮은 西高東底의 형태 이다

.

특히 서울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서측 성 밖의 경사가 급하여 오르기 힘들 정도이다

.

따라서 그 형 세는 일찍이

안으로는 넓고 밖으로는 깍아지른 듯

,

하늘이 만든 높은 성곽

이라 하여 서울 근교 보장터로서 중요성이 부각되어 왔다

.

이러한 우수한 지리환경을 가진 남한산성은 성내에 넓은 활용가능한 공간이 있으 며

,

사방이 높은 능선을 따라 산성이 축성되었다

.

성곽은 높은 고지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함으로서 자 연스런 곡면을 이루고 있다

.

남한산에 본격적인 석성산성을 쌓은 것은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660

)

와 고구려

(668

)

를 차례 로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2

(

문무왕

12)

무렵으로 여겨진다

.

뺷삼국사기뺸에 기록된 당시 성의 이름은 晝長城인데

,

둘레

8

㎞의 석축산성을 쌓는 데에 연인원

300

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남한산성이 속해 있는 광주는 양주

(

현재 서울로 포함

)

와 함께 지방행정상 요충지 였다

.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

고려시대에 廣州府使를 지낸 李世華의 묘지명에 의하면

, 1231

11

월 몽고군 의

2

차 침입으로 많은 적군이 광주성

(

남한산성

)

을 포위하여 여러 달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물리쳤다고 한다

.

조선초기에는 태종이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갖추기 위해 전국의 산성 옛터를 수리하게 하였고

,

이에 남한산성도 새로 수축되어 군사시설로 사용하였다

.

이후

1626

년 남한산성 수축공사가 완료되어 성내에 임금 이 머물 수 있는 행궁을 비롯한 각종 군사시설물을 지었다

.

공사가 끝난 후 광주 춘궁동에 있는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군사와 행정도시로서 기능하였다

. 1636

년 인조

14

12

월부터 다음해

1

월까지 벌어진 병자호

(3)

란은 청군

12

만명에 맞서 인조와 문무백관 및 병사 등

1

4,300

여 명이

45

일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 며 항전하였다

.

삼전도의 치욕

이후 인조

15

년 수어사인 이시백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남한산성을 개축하 고 포루와 대포를 설치하였다

.

또한 성역군

1

천여 명을 동원해 망월대에서부터 옹성까지 성역을 시작하였다

.

나아가 숙종 대에는 원성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성인 蜂巖城과 漢峰城

·

新南城을 신축하여 적의 화포 공격에 방어하도록 하였다

.

정조 대에는 남한산성이 다른 곳과 달리 수어청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

무너진 성벽과 암문과 군포 등을 전면 보수하였다

.

이로서 남한산성은 원성의 취약점을 보완해 외성을 갖추고 안성의 죽주산성과 수원의 독산산성

,

용인의 석성산성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도성과 경기도를 방위하는 핵심 보장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

또한 산성의 꾸준한 유지를 위하여 부역을 면제해 주는 정책을 통해 성내 마을을 조성하게 되며

,

이러한 정책을 통해

18

세기 중엽 산성마을에는

1,076

호에

4,108

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고 한 다

.

산성마을은 남한산성 안에 자리한다고 해서 城內洞으로 불리었다가 山城里 – 山城洞으로 변천되었다

.

1)

이처럼 남한산성과 산성마을은 삼국시대부터 구한말까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전시 수도방위 시설로써 조 성된 계획적인 군사

·

행정도시로 기능하였다

.

하지만

1895

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반포를 계기로 경기지역 의병들이 봉기하며 남한산성에 연합의진이 구성되자

,

일제는 남한산성 마을을 무력점령하여 주둔하 면서 항일역량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

고대로부터 수도방위의 계획적 군사도시와 조선시대 약

300

년동안 광주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했던 남한산성은 이러한 일제의 적극적인 침탈로 인해

1917

년 광주 경안리로 군 청을 옮김에 따라 퇴락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지금껏 한말 의병항쟁에 대한 일제의 진압과정과 조직적 탄압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남한대토벌

로 일컬어 지는

1909

년 호남의병 진압과 영남

·

충청지역 의병학살에 관해 이루어졌으나

,

2) 경기지역은 개괄적인 상황 파악만 있어왔다

.

나아가 남한산성에 대한 학술연구는 역사지리적 고찰과 함께 축성 및 건축물

,

취락마을 형 성

,

조선시대 국왕들의 행차 등에 관한 연구 등이 진행되어왔다

.

3) 구한말부터 일제강점시기에 일제가 남한산 성에서 저지른 파괴와 탄압사례를 다룬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이에 본고에서는

1896

년 남한산성연합의진에 대한 일제의 진압과

1907

년 사찰 파괴를 비롯해 사립학교기관에 대한 탄압사례 등 식민통치의 실상을 살펴보고

,

그곳에서 지역주민들이 소극

·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례를 통해 어떻게 남한산 성 마을이 훼손

·

굴절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

1)뺷廣州府邑誌뺸, 1899; 광주시사편찬위원회, 뺷광주시사뺸, 광주문화원, 2009; 강진갑 등, 뺷숲과 역사가 살아있는 남한산성뺸, 경 기농림진흥재단, 2008.

2)근래 발표된 일본군의 의병탄압에 관한 연구로는 신주백, 「호남의병에 대한 일본군·헌병·경찰의 강압작전」, 뺷역사교육뺸 87, 2003;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학살」, 뺷제노사이드연구뺸 3, 2008; 김상기, 「‘제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일본군의 의병탄압」,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44, 2013;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전술의 변화과정」, 뺷한국독립운동사연 구뺸 45, 2013; 이승윤, 「후기의병기 일본군의 사찰 탄압」, 뺷한국근현대사연구뺸 70집, 201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3)이현희, 「남한산성의 축성」, 뺷동국사학뺸 33, 1999; 류승우, 「남한산성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뺷한국사연구뺸 120, 2003;

최완기, 「남한산성의 역사지리적 고찰과 천주교신앙의 전파」, 뺷교회사학뺸 1, 2004; 홍금수, 「산성취락연구:남한산성 광주읍 치의 형성과 쇠퇴」, 뺷한국지역지리학회지뺸 제10권 제2호, 2004;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 뺷조선시대사학 보뺸 60, 2012; 최준흥, 뺷1900년대 남한산성 마을배치의 복원에 관한 연구뺸, 명지대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4)

Ⅱ. 1896년 남한산성 연합의병 투쟁과 일제의 진압

1896

년 경기지역 항일의병들의 투쟁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 1895

10

8

일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해

11

월 발표된 단발령에 반발한 이천과 여주

·

광주

·

용인

·

양평 등 경기지역 의병들은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남한산성에 운집해 일제로부터 궁성을 탈환하고자 했다

.

이천수창의소는 서울에 있던 유생들인 金河洛

·

趙 性學

·

具然英

·

金泰元

·

申龍熙 등이 경기도 이천에 모여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

12

31

일 의진 을 구성하였다

.

4)

김하락 의진이

900

여명 넘는 군사를 모집하자

,

용인

·

안성

·

포천

·

시흥

·

수원

·

안산 등 인근 지역의 민 중들이 호응해 이천에 몰려들었다

.

중간 지도부 역시 이천

·

여주

·

광주 등 경기 각 지역에서 활약하던 대표 자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

김하락의 뺷陣中日記뺸에 따르면

,

1

천여 명에 이르는 관포수가 의진에 참여 하였다

.

이천수창의소는

1896

1

17

일 광주군 魄峴에서 서울 용산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

180

여명과의 전 투 끝에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

이어

2

12

일 梨峴에서 재차 투입된 일본군

200

여명과 전투 를 벌인 후

,

이천으로 재집결하였다

.

이어 여주의 군사

500

여 명을 모집하여

2

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 2

28

일 남한산성으로 진입하였다

.

남한산성에는 이미 광주의진이 진을 치고 있었고

,

양근의병도 합세해 있었 다

.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도한 일본의 뺷東京朝日新聞뺸에 따르면

,

남한산성 내 의병 수는 약

1600

명에 이 르렀고 이중

600

명이 광주의 농민이었다고 한다

.

5)

산성에는 군수물자도 풍부하여 군량과 무기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

이곳에 비축한 군량미는 약

5

~8

만여 석에 달할 정도였다

.

무기로는 天字砲와 地學砲 등 대포류와 千步銃 수백자루

,

조총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

탄약 철환도 산더미 같았다고 한다

.

이에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 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했다

고 적고 있다

.

6)

이에 대해 친일정부는 의병의 남한산성 점령 소식에 크게 당황하였다

.

곧 친위대와 강화병을 합쳐

3

개 중 대와

2

개 소대를 파견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

정부군은 남문 밖의 梅着里에 지휘소를 설치하여

1

개 중 대를 배치하고

,

동문 밖 佛堂谷과 鄕校里에 각

1

개 중대

,

서문 밖 석회당과 동문 쪽 菴峴里에 각

1

개 소대를 분산 배치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며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

이어 관군은

3

5

일 공격을 벌였으나

,

오히려 크게 패하여 대포

1

문까지 빼앗긴 채

겨나고 말았다

.

7)

이에 관군은 다수의 일본군과 함께 재공격하였으나

,

험난한 지형을 이용한 의병의 공격으로 수차례 패전 을 거듭하였다

.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마침내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

이 계획은 의병들이 지리 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다수의 병력과 무기들

,

수차례에 걸친 전투 경력이 갖고 있었기에 가 4) 金河洛, 「陣中日記」, 뺷독립운동사자료집뺸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5) 뺷東京朝日新聞뺸, 1896년 4월 1일자. 6) 金河洛, 「陣中日記」, 591쪽. 7) 뺷東京朝日新聞뺸, 1896년 3월 18일자.

(5)

능했다

.

또한 춘천과 광주 등 다른 지역 의병들까지 같이 참여하려는 모습들도 보이고 있다

.

즉 의진의 서울 진공작전은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환궁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

이를 위해

3

차에 걸친 계획을 세웠는 데

, 1

차로 산성 근방의 의병들이 연락하여 수원을 점령하고

, 2

차로 협공으로 산성 주변 일본군을 타파하고

, 3

차로 충청

·

전라

·

경상도 지방 의병까지 규합하여 경성을 진공하겠다는 내용이다

.

8)

당시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

이미 경기도의 안성과 충청도 온양

·

장원

·

평택

·

목천 등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남한산성의 의병들과 협의해 곧 수원을 공격할 것이란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

또 강화도의 지방병

200

여 명이 수원에 왔다가 남한산성에 파견되어 있으므로 수원이 비어 있어 매우 위태한 지경에 있으며

,

수원이 이미 의병들에 의해 함락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보도하였다

.

9) 이처럼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우세한 형세 속에서 서울진공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 진공계획은

1896

3

22

일 갑자기 붕괴하고 말았다

.

관군의 꼬임에 빠진 의병부대 지휘관이 성문을 열어주어 관군을 끌어들인 것이다

.

당시 식량보급로 차단으로 동요가 일었다고 하지만

,

계속 항전하 자는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간의 알력으로 지도부가 분열하였기 때문이다

. 3

22

일 새벽 두시

,

일본군 과 관군의 남한산성 침공이 시작되었고 전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당시의 전투로 사망 자가 의병

500

여명

,

관군

300

명이었다고 하며

,

성을 빠져나간 의병은

400

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

10) 남한산성에서

긴 의병들은 대부분 스스로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

다만 이천으로 모여든 의병들이

4

7

일경 김하락 등과 함께 재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

일제와 관군의 추격이 집요하여 양평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

결국 김하락 의병장은 나머지 의병

100

여명을 인솔하여 영남지방으로 남하하여 끝까지 일제에 항전 하였다

.

11)

Ⅲ. 일제의 남한산성 파괴와 주민탄압

1. 사찰 파괴와 군청 이전 조치

일제는

1895

년 남한산성연합의진 봉기를 진압한 이후

,

또다시 산성이 의병들의 항전지로 전락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

각 사찰을 비롯해 곳곳에 많은 무기고와 탄약

,

식량이 비축되어 있기 때 문이다

.

이에 일본군은

1899

12

월 초 수비대

4

중대가 산성에 숙영하며 지형을 파악한데 이어

,

관내의 모 든 병기와 탄약을 회수하였다

.

그리고 산성마을 안에 광주헌병분견소를 설치하였다

.

8) 뺷東京朝日新聞뺸, 1986년 3월 28일자. 9) 뺷東京朝日新聞뺸, 1986년 3월 31일자.

10) 金泰元, 뺷集義堂遺稿뺸(뺷韓末義兵資料集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11)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유한철, 「전기의병운동」, 뺷경기 도항일독립운동사뺸, 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26~41쪽; 김상기, 뺷한말 전기의병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23~129쪽.

(6)

경기도내에서 활동한 항일의병들도 전략요충지로서의 남한산성을 탈환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

남한 산성 인근지역에서 재기한 중기의병은

1904

5

월 말에서

6

월초에 나타난다

.

즉 의병들이 광주부 都尺面 일 대에서 일본군의 총기를 탈취하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는 한편

,

친일인사들을 척살하였다

.

광주군 낙생면 출신의 南相穆 등이 이끈 의병부대가

1907

7

월 용인

·

안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

또 용인의 李 益三 등 의병부대가 광주

·

수원

·

양지군 등에서

1909

6

월까지 항일 유격전을 펼쳤다

.

12)

경기의병들은 일제가

1907

7

월 네델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던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 8

1

일 구한국 군대를 강제해산시키자

,

재봉기하기 시작했다

.

서울 시위대의 봉기 이후 원주진위대의 봉기

,

홍천

·

충주

·

강화 등 지방 진위대에서도 저항을 준비하였다

.

의병들의 저항은

8

14

일 광주 경안면에서 한 무리 의 의병들이 집합하여 광주성을 공격

·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신문지상에 보도될 정도였다

.

13) 이에 일본군은 남한산성이 또다시 경기의병들의 집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본국에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 며 무력진압에 나서고자 했다

.

당시 경기도 일대에는

1907

7

월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

12

여단

(

47

연대와 제

14

연대

)

이 맡아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

14) 이중 산하의 제

14

연대는 주로 구한국군 진압을 목적으로 편성되었는데

,

1

대 대는 용산에 대대본부를 두고 개성과 인천

·

수원

·

영등포에 중대병력을 배치하였다

.

1

대대는

7

27

일부 터 수원수비대를 양평

·

용인

·

광주 등지에 정찰병을 파견하고

, 8

23

일 광주 곤지암 동쪽의 望月嶺에서

50~60

여 명의 의병과 교전을 벌여 의병

2

명을 사살하였다

. 8

24

일에는 제

3

중대 能村 중대가 이천 출신 의병장으로 남한산성연합의진에도 참여한 바 있는 具然英 부자를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

15)

1907

8

월 남한산성에 파견된 부대도 제

14

연대 제

1

대대 소속 병력일 것으로 여겨진다

.

이 부대는

8

22

일 기병대를 광주군에 파견하여 무기 전부를 압수하고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였다

.

16) 파괴는 오전

9

30

분부터 오후

5

시까지 진행되었는데

,

산성 안의 사찰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아 진행되었다

.

사찰이 의병들의 무기와 군수물자 보급처인 동시에 초모활동을 벌이는 근거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

당시 산성 안에는 開元寺를 비롯해 전국

6

도에서 올라온 부역승군들이 머물던

9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

17) 산성을 수비 하는

400

여명의 승군이 관리하던 병기고와 화약고

,

식량창고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

일제는 이 사찰의 시설 물 모두를 파괴하였는데

,

당시 주민들은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할 정도

였다고 전하고 있다

.

18)

이로써

9

개 사찰 중

8

개 사찰이 전소되었고

,

산성 동문쪽의 長慶寺만 겨우 소실을 면하였다

.

파괴된 사찰

12) 뺷폭도사편집자료뺸, 513쪽; 김순권, 뺷경기지역 의병운동 연구(1904~1911)뺸,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2, 20~36쪽. 13) 뺷대한매일신보뺸 1907년 8월 18일자.

14)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전술의 변화과정」,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45, 2013.8.

15) 김상기, 「‘제14연대 진중일지’를 통해 본 일본군의 의병탄압」,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44, 2013, 12쪽.

16) 「(명치40년 8월 22일)龍仁에서의 日本人被殺事件 및 淸風, 提川討伐計劃等 報告」, 뺷통감부문서뺸 4, 국사편찬위원회, 1999, 89쪽.

17) 東國輿地志에는 사찰의 대략적인 위치와 함께 6도에서 올라온 赴役僧軍을 배정한 사찰이 명시되어 있는데, 天柱寺는 전라 도, 漢興寺는 경상도, 長慶寺는 충청도, 國淸寺는 강원도, 望月寺는 경기도, 玉井寺는 황해도 등의 이름이 올라있다(뺷東國輿 地志뺸 廣州牧 寺刹條). 南壇寺와 東林寺는 그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편, 뺷남한산성 품에 안긴 산성마을뺸, 1999, 28~30쪽.

(7)

은 僧將이 머물던 開元寺를 비롯해 동문쪽의 望月寺

,

남문쪽의 南壇寺와 漢興寺

,

벌봉의 東林寺와 玉井寺

,

서 문의 國淸寺와 天柱寺 등이다

.

이 중 望月寺는 조선초기 태조가 천도할 당시 한양에 있던 壯義寺를 헐어버리 고 불상과 화엄경을 이 곳에 안치했을 정도로 가장 오래된 절로 알려져 있다

.

19) 이 부대는 이틀후인

8

24

일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내에 있는 龍門寺와 上院庵도 불태워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

20)

항일정서가 여전히 남아있는 남한산성이 또다시 의병과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이 제 산성마을 자체를 해체시키려 노력하였다

.

일제는

1912

년부터

2

년간 서울에서 광주군 酒幕里

(

오늘의 경안 동

)

를 지나 이천에 이르는 신작로를 개설하여 행정조직의 개편을 유도하였다

.

이후

1914

3

월 취해진 행정 구역 통폐합 조치를 통해 일제는 남한산성을 광주부가 아닌

,

광주군 중부면에 편입하여 위상을 격하시켜 버 렸다

.

파괴된 행궁 터에는 중부면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21)

나아가 일제는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광주군청을 임의로 옮겨 버렸다

.

일제는

1917

12

7

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경기도 廣州郡廳을 광주에서 京安里로 이전한다

.”

고 고시하였다

.

22)주막리를 慶 安面 慶安里로

,

다시 京安里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

아울러 경찰서 등 치안기관과 광주우체국 등 관공서 기 관도 함께 옮겨 버렸다

.

23) 이러한 일방적인 조치로 인해 군 청사를 비롯한 행정기구와 치안

,

통신 및 체신기 관 등이 모두 산성마을을 떠나야 했다

. 1930

년대 중반까지

283

, 1,675

명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던 慶安驛 村과 주막리는 군청이 이전된 이후 京安里

(

현재의 경안동

)

로 행정명이 바뀌면서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로 부 상하였다

.

24)

이로 인해 조선초기부터 약

300

년간 행정과 군사도시로서 기능했던 남한산성 마을은 중심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궁벽한 산골마을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

당시 산성 안에는 매일 인근 잠실과 송파

·

거여동을 비롯해 성남

·

하남 등지로부터 행정사무를 보려는 사람들과 시장과 장터로 모여든 사람들로 매우 번화했다고 한다

.

마을에는 양조장을 비롯해 우체국

,

문방구점

,

푸줏간

,

대장간집

,

잡화점

,

주막과 심지어 고급 요정집 등 각종 상점과

1

천여 호를 넘는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

25)

하지만 번화했던 산성마을은 일제가 의병진압을 본격화하던

1907

년과 광주군청을 경안으로 옮긴

1917

년 을 계기로 급격히 퇴락하기 시작했다

. 1871

년 편찬된 뺷광주부지뺸에 기록된 산성 내의 호구 수가

1,161

호였 는데

, 1907

년 조사에 따르면

,

성내동의 전체 호구는

844

, 3,382

명로 감소하였다

.

26) 더욱이

1930

년대 중 19) 長慶寺는 이후 開元寺의 누각을 이건하여 겨우 사세를 유지하였으며, 1943년 법당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남단사·동림사·천주사·옥정사·한흥사 등은 여전히 복원을 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잇다(문화재청·불교문화연구소, 뺷한국사지총람뺸 상, 문화재청, 2010, 75~80쪽; 전보삼, 뺷남한산성과 팔도사찰뺸, (재)대한불교진흥원, 2010 참조) 20) 이승윤, 「후기의병기 일본군의 사찰 탄압」, 뺷한국근현대사연구뺸 70집, 2014, 77~80쪽.

21) 이완재, 뺷한국사에 비춘 ‘성남지역’의 역사뺸, 민족문화사, 1993.

22) 뺷朝鮮總督府官報뺸(제1602호) 1917년 12월 7일자. 23) 조선총독부 고시 제276호.

24) 홍금수, 「산성취락연구:남한산성 광주읍치의 형성과 쇠퇴」, 뺷한국지역지리학회지뺸 제10권 제2호, 2004, 322~335쪽. 25) 산성마을 주민 柳度載(1924년생)는 “아마 당시 1,200에서 1,300호가 있었다지. 그리고 이 동네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어

요. 외부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가을 추수가 되면 땅세를 거둬들여서 여기에서 생활했어요.”라고 진술하였다. 산성동 에서 태어나 평생 살아온 金有德옹(1916년생)은 “양조장과 주막 등이 엄청 많았고 매일 장도 열렸으니 없는 게 없었다.”면 서 “당시 일본사람들은 면사무소와 지서에 순사 3~4명 정도 늘 상주하였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2011년 11월 1일 광주시 산성동 노인회관에서 청취).

(8)

반의 보고에는 더욱 급감하여 산성리에

241

가구

, 1,402

명으로 조사되었다

.

이후

1940

년대 중반 무렵에는

70~80

호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

27)

산성마을은 원래 풍부한 농경지가 있던 곳이 아니라 상업마을이었으므로 행정과 군사

·

상업 기능이 사라 지자 그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

게다가 교통상황도 불편하고 장사도 활기를 띠지 못하 니 주민들은 생계를 잇기 어려워 서울과 광주

·

여주

·

양평 등지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

2. 사립학교 탄압

일제는 남한산성 마을을 점령한 이후

,

민족학교로 성장하고 있던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

.

산성마을에 근 대적인 사립학교가 설치된 것은 경기도를 비롯한 전국 도처에 사립소학교가 설치되던

1895

년 이후이다

.

광 주부 남한산성 마을에는

1900

년 전 승지였던 李胤鍾이 그의 집에 廣州小學校를 처음 세웠다

.

당시 교과는 국한문과 역사지지

,

산술

,

체조 등이었다

.

28)대한제국 정부는 이 학교를 공립소학교로 인정하고 교원을 파견 하였다

.

즉 ≪관보≫

1788

(1901

1

19

)

“1901

1

17

일 沈承悳을 광주부 공립소학교 교원 판임 관

6

등으로 임명

하였고

,

이어

1901

3

23

일자로 부교원 韓聖澤을 해임한 뒤 李普泳으로 교체하였음을 공시했다

.

29)

개인 집에 설립된 광주소학교가 본격적인 근대 사립학교로 재건립된 것은

1906

3

3

일 설립된 사립 廣興학교이다

.

학교 설립은 당시 광주부윤이었던 吳泰泳30)이 직접 주도하였는데

,

그는 자신을 비롯해 지역 유지들로부터 보조를 받아 학교를 세웠으며

,

사범학교 출신 교사를 초빙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

31) 광흥학교 의 설립을 알리는 뺷대한매일신보뺸의 기사는 이 밖에도

1906

3

31

일자

<

잡보

>

를 비롯해

, 7

16

일자와

17

일자

, 21

일자와

24

일자 등에서 알 수 있다

.

그 내용은 산성동 내에 학교를 세웠는데

,

교실을 새로 지을 수 없어 옛 營庫 터인 營府廳을 빌렸다는 것이다

.

32) 당시 학생은

60

여 명에 달하였는데

,

군수의 적극적인

26) 政府財政顧問本部, 1907(홍금수, 「산성취락연구:남한산성 광주읍치의 형성과 쇠퇴」, 뺷한국지역지리학회지뺸 제10권 제2호, 2004, 322쪽에서 재인용).

27) 광주문화사업회설립준비위원회, 뺷백제구도 남한비사뺸, 1956; 홍금수, 「산성취락연구:남한산성 광주읍치의 형성과 쇠퇴」, 뺷한국지역지리학회지뺸 제10권 제2호, 2004, 322쪽에서 재인용.

28) 뺷황성신문뺸, 1900년 10월 27일자. 설립자 李胤鍾은 1907년 2월 광주군 중대면 송파의 廣成학교 설립에 관여해 부교장을 역임했다(뺷대한매일신보뺸, 1907년 2월 10일자). 또한 궁촌의 水西학교 건립에도 관여해 1908년 교장과 교감을 맡았다(뺷대 한매일신보뺸, 1908년 3월 1일자; 5월 22일) 그는 기흥흥학회의 광주군 회장을 맡았다(뺷기흥흥학월보뺸 제2호, 1908년 9월).

그는 또 1923년 5월 6일 중대면 송파리에 위치한 廣成학교에서 열린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뺷광주시사뺸 1, 418쪽).

29) 뺷관보뺸 1788호(1901년 1월 19일자); 뺷관보뺸 1788호(1901년 3월 23일자).

30) 吳泰泳 광주부윤은 1906년 7월 29일 경안면에 漢山학교를 세웠으며, 1907년에도 수서동의 소학교에도 기금을 기부하여 학 교를 재건하도록 도왔다. 그는 관내에 9개에 이르는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각 학교에 양식을 기부하는 한편 유지들과 협력 하여 재정지원을 하도록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뺷대한매일신보뺸, 1907년 2월 1일자; 1909년 12월 24일자).

31) 뺷대한매일신보뺸, 1906년 3월 18일자, 「잡보」.

32) 뺷대한매일신보뺸, 1906년 3월 31일자. 영고 터는 오늘날의 남한산초등학교 자리인데, 규모는 201칸으로 성내 건물 중 가장 장대하였다. 예전부터 금·은을 비롯해 포목과 소금·간장 등을 저장한 곳이었고, 관리가 근무했던 관청이었던 만큼 학교 로서의 면모도 대강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9)

후원과 지역주민들의 협조

,

교사들의 열띤 교육과 학생들의 향학열로 인해 학생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어 주 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

33)

1906

8

월 조선통감부가 보통학교령을 발표하여 전국의 많은 사립소학교들을 폐교하였는데

,

다행이 광 흥학교는 폐교를 면하고

4

년제인 보통과와

2

년제의 보습과가 설치되었다

. 1910

4

월에 보통과

4

회 졸업증 서 수여식이 거행된 것으로 보아 광흥학교는

1907

년경 제

1

회 보통과를

, 1909

년 보습과에게 졸업증서를 수여 한 것으로 보인다

.

34)광흥학교는 교사와 학생 모두 학교의 재정난을 위해 타개하기 위해 기부금 모금에 열성 적이었다

.

뺷황성신문뺸

1907

5

16

일자에 실린 학교성금 기부자 명단에는 광흥학교 임원들과 학도들의 이름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

많게는

20

환을 쾌척하고 지역유지를 비롯해 학생 등이 각기 성의껏 성금을 내어 재정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

35)

이렇게 성장하려는 광흥학교에 대해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위한 교육체계를 강화시켰 다

. 1908

8

26

일 조선통감부에서 반포한

사립학교령

을 제정한 후

,

사립학교 재원을 차단하기 위해

1909

2

27

일자로 「기부금모집취체규칙

(

寄附金募集取締規則

)

」을

,

같은 해

4

1

일자로 「지방비법

(

地方 費法

)

」을 공포하였다

. 1909

4

월 말까지 인가를 청원한 총

1,708

개 학교 중 인가를 받은 곳은

242

개교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은 기부금모집을 중지시키고

,

잡세의 수납을 지방관아로 이전하는 새 제도가 민족교육을 실시하려는 사립학교를 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

36)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

지역주민의 열띤 지원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뜨거웠던 광흥학교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종시험을

1

년 만에 치루었다

.

이 학년말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학생들이 진급증서를 받았 다는 사실은 뺷황성신문뺸

1907

3

6

일자에 실려 있다

.

37) 신문에는 여름시험 결과도 보도하는 등 많은 관 심을 보였다

.

38)나아가

1908

3

10

일 치러진 광흥학교의 첫 졸업식 장면은 뺷대한매일신보뺸와 뺷황성신문뺸 에 자세히 보도되어있다

.

39)

광흥학교의 학교생활 중 눈에 띄는 활동은 당시 광주군내에 설립된

5

개 학교를 초청해 가진 연합운동회이 다

.

뺷황성신문뺸 보도에 의하면

, 1908

5

12

일 광흥학교 옆 연무관에서

5

개 학교 연합운동회 행사가 열렸 다

.

40)연합체육대회에서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에 대한 감사와 충군

·

애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자주독립 정신을 세계만방에 널리 떨치자는 내용의 운동가가 불려졌다

.

41) 이처럼 연합운동회가 학생과 지역주민들의

33) 뺷대한매일신보뺸, 1906년 7월 16일; 7월 17일; 7월 21일자; 7월 24일자.

34) “광주군 城內 사립 廣興學校에서 지난 2일에 보통과 제4회 졸업증서 수여식과 보습과 제2회 수업증서 수여식을 함께 거행 하다.”(뺷대한매일신보뺸, 1910년 4월 13일자)

35) 뺷황성신문뺸, 1907년 5월 16일자. 기부금을 낸 지역유지 중 石璣煥은 1909년 광흥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石世煥은 경복궁 창건에 거액을 헌납하여 정3품 참의의 벼슬을 하사받은 부호이다. 鄭煥敎는 당시 교사에 재직 중이었으며, 宣永益·李容 瑋·石松煥 등은 당시 학생신분이었다. 이로 보아 지역유지와 교사, 학생들이 합심하여 학교기부금으로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36) 최기영, 뺷애국계몽운동Ⅱ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60~64쪽. 37) 뺷황성신문뺸, 1907년 3월 6일자.

38) 뺷황성신문뺸, 1907년 9월 14일자. 39) 뺷황성신문뺸, 1908년 3월 21일자. 40) 뺷황성신문뺸, 1908년 5월 24일자.

(10)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항일연설의 장으로 활용되자

,

일제는 이를

완연한 무장적 시위

로 단정하고

1910

년부 터 연합운동회를 폐지시켰다

.

하지만 남한산성 마을 학교에서는 연합운동회가

1930

년대까지도 열린 것으로 보인다

.

42)

일제의 다양한 민족교육 탄압에도 불구하고

,

남한산성 내 광흥학교는 높은 향학열과 지역주민의 도움으로 꾸준히 성장하였다

.

광흥학교 임직원들의 열정과 학생들의 향학열은 경기지역 유림들의 학술모임인 뺷기호흥 학월보뺸를 비롯해 당시 신문의 학계동향란에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

43) 재학생 수는

6

학급에

150

여 명에 이르렀으니

,

한 학년당

20~30

여 명 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忠良한 제국 신민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

·

하급관리

·

사 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방침을 세우고

, 1911

8

월 전문

30

조로 이루어진 제

1

조선교육령

을 공포 하여 공립보통학교를 신설하였다

.

이에 따라 종래의 공립소학교는 물론 사립소학교의 대다수는 공립보통학 교로 변경되었다

.

조선총독은 총독부 제

231

호에 의해

1911

7

1

일자로 공립보통학교의 설치를 허가한다고 고시하면서

,

경기도 광주군 군내면에 위치한 公立 廣州普通學校를 명시하였다

.

44) 이어

7

15

일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 된 관보인 뺷朝鮮總督府官報뺸 제

263

호에 의하면

,

조선총독은

경기도 광주군 군내면에 위치한 公立廣州普通 學校의 설치를 허가한다

.”

고 고시하였다

.

45) 이로서 사립 광흥학교는 일제의 식민화교육 정책에 따라 공립 광 주보통학교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

46)

조선총독부로부터 공립광주보통학교의 설치를 인가받은 이후

,

학교는 일제치하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이는 행정기관을 이전해 버려 주민들이 대거 이주해 버린 산성마을의 쇠퇴과정과 그 궤를 같 이한다

.

더욱이 일제는 학교의 이름조차 빼앗아 버렸다

. 1918

4

11

일자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관보인 뺷朝 鮮總督府官報뺸 제

1701

호에 의하면

,

조선총독

(

長谷川好道

)

경기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4

1

일자로 南漢 山公立普通學校로 개칭한다

.”

고 고시하였다

.

47) 이와 함께 같은 해

4

23

일자에 발표된 뺷朝鮮總督府官報뺸 제

1713

호에 의하면

,

조선총독이 광주군 慶安面 京安里에 위치한

廣州公立普通學校의 설치를 허가한다

.“

41) 당시 연합운동회에서 불려졌던 운동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화 우리 학도들아 운동가 불러보세, 황상폐하 右文至治 우 리 학교 흥왕하이, … 어화 우리 학도들은 체조 운동하여세, 禮樂書數進步하니 문명기초가 아닌가 … 평화 한맘 단체되어 忠君愛國 열심으로 공고공고공고하세, 독립주권 공고하세 乾坤坎離 태극기를 오대주에 빛내보세 文武竝用 長久術이 국가반 석이 아닌가.”(뺷대한매일신보뺸, 1906년 6월 2일자). 이와 함께 학생들은 1907년 4월 金裕澤이 지은 다음과 같은 운동가를 연합운동시에 불렀다. “大韓帝國 光武日月富强安泰는 국민교육 보급함에 존재함일세. 우리들은 덕을 닦고 智能發하여 문명 개화 선도자가 되어 봅세다 … 학도들아 학도들아 청년학도들 忠君心誠愛國精神 잊지마시오.”(뺷황성신문뺸, 1907년 4월 26 일자 ‘각 학교운동가의 일치).

42) 뺷동아일보뺸, 1930년 10월 17일자.

43) 뺷기호흥학월보뺸 제7호, 1909년 2월, 「學界彙聞」. 이러한 기사를 통해 1909년 당시 광흥학교는 오태영 광주군수가 가장 열 심히 교육을 장려하여 날로 번창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의 향학열과 단결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44) 뺷朝鮮總督府告示뺸(제231호).

45) 뺷朝鮮總督府官報뺸(제263호), 1911년 7월 15일자.

46) 吳天錫, 「조선신교육과 파란 많은 그 행적(3)」, 뺷동아일보뺸, 1935년 1월 3일자. 47) 뺷朝鮮總督府官報뺸(제1701호), 1918년 4월 11일자.

(11)

고시하였다

.

4

1

일자에 기존의 남한산성 마을 안에 위치한 학교의 이름을 먼저 바꾼 다음

, 23

일만에 원 래 학교 이름을 이전한 곳으로 가져가 버린 것이다

.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동생이 생겨 형의 이름을 동생한 테 주고 형의 이름을 다시 지어준 격

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

48)

Ⅳ. 산성마을 주민들의 저항 사례

1. 남한산성의 3·1운동과 신간회 광주지회 활동

일제의 산성마을 침탈과 가혹한 식민탄압

,

경제수탈에 분노한 광주 민중들의 저항은

1919

년 전 민족적 만 세운동과 함께 분출되었다

.

광주군의

3·1

만세운동은

3

26

일 중대면 송파일대에서 시작되어 저녁까지 진 행되었다

.

이어

3

27

일 새벽부터 광주와 성남 일대에서 일기 시작한 만세시위운동은 남한산성 마을을 중 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 1919

년 당시 광주군 중부면은 면 소재지인 산성리를 비롯해

13

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

중부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은 성남출장소 관내 丹垈里

·

炭里

·

壽進里 등의 동리 주민들이

300

여 명이 주도하였다

.

49)

광주 남한산성에서의 만세운동은 그 주동인물이 밝혀지지 않아 자세한 경과를 알 수 없으나

, 3

27

일 새 벽 남한산에서 횃불을 밝히고 이를 신호로 시작되었다

.

단대리

·

탄리

·

수진리의 주민

300

여 명은 남한산성 남문에 집결하여 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

단순 시위운동에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나타났다

.

,

평소 일제에 적극 협력한 당시 중부면장에 대한 감정이 폭발하자

,

일부 시위대가 면장을 끌어내어 곤봉으로 폭행하여 실신시켰다

.

결국 경비 중이던 일본 헌 병이 총기를 발사해 시위운동을 좌절시켰다

.

50)

일제는 광주 일대의 시위주도자인 돌마면 율리

(

현 율동

)

출신의 韓百鳳 등 수 십명을

3

29

일에 체포하 여 판교의 헌병주재소로 연행했다

.

일제는 시위자들을 남한산성의 용인헌병분견대 광주분견소에 이송하여

4

일간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

그 후 대부분의 인사들은 방면되었으나

,

한백봉은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을 거쳐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어 징역

1

년을 복역하였다

.

51) 이후 만세시위는 곤지암과 실촌면

,

남종면 등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어

4

6

일까지 전개되었다

.

거족적인

3·1

만세운동 이후

1920

년대 들어서는 전국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스스로 민족적 자각을 하고

,

의식개혁을 위한 계몽활동을 적극 벌여 나갔다

.

농민들은 일제와 친일지주의 토지수탈에 맞서 소작쟁의를 벌

48) 뺷남한산초등학교 백년사뺸, 남한산초등학교동문회, 2013, 140~142쪽.

49) 김정인·이정은, 뺷국내3·1운동Ⅰ – 중부·북부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67~70쪽.

50) 일본육군성,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0보)」 1919년 3월 29일, 뺷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뺸 1920; 경기도사편찬위원회 편, 뺷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뺸, 835~836쪽.

51) 성남문화원 편, 뺷성남의 역사와 문화유산뺸, 2001.

(12)

였고

,

노동자들도 전국의 생산현장에서 공제회와 조합을 조직해 의식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

남한산성 마을에서도 식산조합과 공제회를 통한 계몽활동이 일어났다

.

광주군 산성마을 안에는

1917

년 무 렵부터 남한산구락부가 창립되었는데

, 1927

년 당시 회원이

300

여 명에 달하였다

.

52) 이어

1920

5

1

일 산성마을의 유지인 石東均이 마을 안에 廣州南漢殖産組合을 조직하였다

.

설립 당시 자금은

5

만원이었으며

,

회원은

42

명이라고 한다

.

또한

1923

12

1

일 마을주민 崔基喆을 회장으로 한 廣州南漢公濟會

(

후에 노동 공조회로 개칭

)

가 설립되었다

.

이 모임에는 회원이

73

명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

광흥학교

3

회 졸업생인 石惠 煥과 朴準浩 등이 주로 참여하였다

.

노동공조회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야학을 개최하였고

,

광주공동조합을 통한 공개활동도 벌여 나갔다

.

53)

공조회 활동에 앞장 선 이들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하는 마을주민들을 위해 야학활동도 전개하였다

.

석혜환은

1926

7

20

일 초등학교 뒤산에 南漢山勞動夜學院을 설립하였다

.

이 학 원에는 생도

50

명이 무료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

원장은 최기철이 맡았다

.

54)

야학활동은 이후

1930

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 1933

2

월 남한산 농민야학이

10

세 전후의 남녀 어 린이

50

여명을 교육하였다

.

농민야학은 노동공조회관을 빌려 학예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

이날 참석한 부 모들과 미신타파를 위한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

이러한 비정규 교육시설은 교육기관이 부족하였던 광주지역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

55) 이 밖에도 남한산성 내에는 소 비조합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 <

동아일보

>

1929

5

18

일 광주군 산성리에 남한산성소비조합과 구매 조합이 발기되었다는 소식을 싣고 있다

.

56)

산성마을 주민 중 일부 지식청년들은

1927

년 전 민족적 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은

1927

5

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서

민족단일당론

이 대세를 장악하게 된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

뺷조선일보뺸

1927

7

10

일 기사에서는 광주군에서

유지 제씨의 발기로 조선민중의 총역량을 집중하고 조선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 지회를 설치하고자 임시사무소를 송파중앙청년회 내에 설치하고 회원을 모집하며 지회 설립 준비에 노력하고 있다

고 보도하였다

.

57)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8

14

일 중부면 산성리 동문쪽에 있는 사찰로 유일하게 전소를 면한 長慶 寺에서

20

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 8

24

일 오후

1

30

분 남한노동공조회관에서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 대회가 개최되었다

.

임시의장인 韓順會의 사회로 경과보고를 거쳐 강령과 규약이 낭독되었다

.

이어 임원선거 에 들어가 지회장에 한순회가 선임되었고

,

부회장에 산성마을 출신인 石惠煥이

,

간사로는 韓百鳳

·

韓百鎬

·

李大憲

·

兪仁穆

·

朴基煥

·

韓龍會 등이 선출되었으며

,

지회를 경안리에 두기로 하고

4

30

분에 폐회하였 52) 뺷동아일보뺸, 1929년 5월 19일자.

53) 광주남한공제회는 적어도 1927년 이전에 남한노동공조회로 명칭을 개정한 것으로 보이며, 산성마을 안에 회관을 갖고 있었 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1927년 8월 시간회 광주지회의 설립대회가 남한노동공조회관에서 개초되었다는 기사로 알 수 있다(뺷조선일보뺸, 1927년 4월 10일; 뺷동아일보뺸, 1929년 1월 11일자).

54) 뺷동아일보뺸, 1929년 1월 11일자. 55) 뺷동아일보뺸, 1933년 2월 16일자. 56) 뺷동아일보뺸, 1929년 5월 19일자. 57) 뺷조선일보뺸, 1927년 7월 10일자.

(13)

.

58)참가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

주로 돌마면 출신의 한순회 등 천도교 구파세력과 산성리 출신의 석혜환 등 젊은 사회주의성향의 지식인들에 의해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59)

신간회 광주지회는 이듬해인

1928

12

20

일 오후

3

시 제

3

회 정기총회를 열어 지회장에 석혜환을

,

부 회장으로 한순회를 선출했다

.

이날 회의에서는 문맹퇴치와 소비조합 설립문제

,

미신타파와 회원모집의 건

,

회비징수의 건 등이 논의되었다

.

60)석혜환 지회장은 나아가

1929

1

월 원산에서 일어난 부두노동자 총파업 에 격려문을 발송하였는데

,

이 일로 인해

10

일간 구류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

61) 총무간사인 卞重熙도

2

22

일 같은 이유로 구류

10

일에 처해졌고

,

남한산노동공조회 상무이사인 延濟鴻도

3

5

일 구류

5

일 처분을 받 았다

.

62)

2. 광주공산당협의회

3·1

만세운동과 신간회 광주지회 활동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일부 산성마을 주민들은

1931

5

월 신간회가 전격 해소되자

,

민족주의운동과 합법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점차 비합법 사회주의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

산성마을 주민들이 주로 참여하여 주도한 저항운동으로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꼽을 수 있다

.

주도 인물은

1890

년 산성리에서 태어나 광흥학교를 졸업하고

,

남한산노동공조회와 신간회 광주지회 등에서 집행 위원장과 지회장 등을 역임한 석혜환이다

.

일제 검사국의 조사에 따르면

,

남한산노동공조회를 운영해 오던 석혜환은

1933

12

월 마을 동료인 具喜 書 등과 함께 이 단체를 廣州共同組合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비합법 지하운동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

이들은 조합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

·

상인 등을 규합한 후

,

산하에 廣州共産黨協議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야학 과 강연회를 열어 항일사상과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였다

.

협의회 회원들은 이념도서를 공동 구입하여 회람 하는 동시에 매월

1

회씩 모임을 갖고 선전문을 작성해 동지들에게 보내었다

.

나아가 이들은 회원들을 서울과 인천

·

영등포 등지의 각 공장에 취업하도록 하여 동지를 규합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

63) 하지 만

1935

2

월 일제에 의해 광주공동조합이 해산당하게 되자

,

석혜환을 비롯한

13

명은 비밀조직으로 전환하 여 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

64)이들은

2

6

일 밤 산성리

68

번지에 사는 김흥종의 집에 모여 광주공산당협의 회 모임을 갖고 석혜환을 비서부장으로 선임하였다

.

이 조직은

1936

1

5

일 한 조직원이 실수로 노상에서 조직문건을 분실하여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감 에 따라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

이에 영등포경찰서 형사들이

1

9

일 석혜환과 鄭永麟

·

吳顯求 등

13

명을

58) 뺷동아일보뺸, 1927년 8월 27일자; 뺷조선일보뺸 1927년 8월 29일자.

59) 조성운, 「일제하 廣州지역의 신간회운동」, 뺷사학연구뺸 100, 2010, 768~777쪽. 60) 뺷동아일보뺸, 1928년 12월 2일자.

61) 뺷동아일보뺸, 1929년 3월 5일자.

62) 뺷조선일보뺸, 1929년 2월 27일; 3월 12일자. 63) 뺷동아일보뺸, 1936년 3월 17일자.

64) 뺷동아일보뺸, 1936년 1월 10일자.

(14)

체포하였고

,

경기도경찰부 고등사찰계에서 취조하였다

.

65) 일제는 이들

13

명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 하여

3

5

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

이어

3

16

일 석혜환 등

7

명이 공판에 회부되고

,

구희 서 등

5

명은 기소중지로 석방되었다

.

66)

일제는 석혜환에게 징역

3

년의 중형을

,

나머지

6

명은 징역

6

개월형을 선고하였다

.

이후 석혜환은 대전형 무소에서 복역한 후 만기 출옥하였다

.

67) 이 협의회 회원 중 산성마을 출신은 석혜환을 비롯해 鄭永培

(1911

년생

,

산성리

138

번지

),

金興鍾

(1901

년생

,

산성리

68

번지

),

최청룡

(1903

년생

,

산성리

143

번지

),

具喜書

(1912

년생

,

산성리

524

번지

)

등이다

.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남한산성 마을에서 형성된 항일의 정서를 바 탕으로 지역 계몽활동과 노동조합 경험 등이 사회주의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여 서울과 인천 등지로 전파된 지역단위 항일 저항운동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

.

68)

Ⅴ.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시기 일제가 남한산성에 저지른 파괴와 탄압

,

주민들의 저항사례 를 고찰해 보면

,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

첫째

,

일제는

1895

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해 이천에서 일어난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강제 진압한 이후

, 1907

8

월 중기의병들이 재봉기하자 또다시 이 곳 이 경기의병들의 집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적극 파괴하고자 하였다

.

남한산성 파괴는 일본 본토에서 파 견된 일본군 제

12

여단

14

연대 산하의 수원수비대가 주로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

이 부대는

8

22

일 기병대 를 광주 남한산성에 파견하여 무기와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였는데

,

이로 인해 총

9

개 중

8

개의 사찰이 전소되었다

.

또한 이 시기를 전후로 남한행궁을 비롯한 객사와 관청

,

사직단 및 성황단 등 각종 고건축물이 함께 파괴 또는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

또한 일제는

1917

년 광주군청을 경안리로 이전하여

300

년간 행정중심 역할을 한 산성마을을 퇴락시키도 록 유도하였다

.

군청사와 통신 및 체신기관 이전으로 인해 산성마을은 궁벽한 산골마을로 전락하여

1907

3,382

명에 이르던 인구가

1930

년대 중반에

1,402

명으로 감소하고 말았다

.

이후

1940

년대 중반 무렵에는

70~80

호만 남았으니

,

주민들은 생계를 찾아 서울과 광주

·

여주

·

양평 등지로 떠나야 했다

.

둘째

,

일제는 남한산성 마을 안에서 지역주민들의 열띤 지원과 학생들의 향학열이 높았던 사립학교를 탄

65) 뺷동아일보뺸, 1936년 2월 4일자. 66) 뺷동아일보뺸, 1936년 3월 17일자.

67) 석혜환은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였으나, 1949년 보도연맹에도 가입하였다. 한국전쟁 시 기에는 조선인민군 점령 하에서 경기도 광주군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나, 보도연맹 가입사실이 밝혀져 직위해제되었다. 이후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일가친척 모두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혜환에 관한 글로는 강만길·성대경 엮음, 뺷한국사 회주의운동인명사전뺸, 창작과비평사, 1996; 조규태, 「일제강점기 석혜환의 민족해방운동」, 뺷제1회 광주시 3·1운동 학술발 표회논문뺸, 2011.8 참조.

68) 뺷광주시사1뺸, 431~438쪽.

(15)

압하였다

. 1900

년 광주소학교에서 출발한 산성마을의 근대 학교는

1906

년 사립 광흥학교로 재건립되었는데

,

이 학교는 광주부윤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역주민들의 지원

,

교사들과 학생들의 뜨거운 교육열로 인해 재정난 을 극복하며 꾸준히 성장하였다

.

하지만 일제는

1911

년 이 광흥학교를 공립 광주보통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

식민화 교육정책을 시행했다

.

더욱이 일제는

1918

4

1

일자로 산성 마을안에 있던 광주보통학교란 이름을 남한산공립보통학교로 먼 저 개칭한 다음

, 23

일만에 경안리에 있는 학교를 광주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꿔 설립을 허가했다

.

이는 먼 저 생긴 학교의 이름을 빼앗아 뒤의 학교에게 준 꼴로

,

항일정서가 많이 남아있는 남한산성 마을을 퇴락시키 고자 하는 일제의 계획된 의도라 할 수 있겠다

.

셋째

,

일제의 적극적인 남한산성 파괴와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

산성마을 주민들은 만세운동 시위와 각종 계몽활동 등 각종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

남한산성에서의 만세운동은

1919

3

27

일 새벽 남한산에 서 햇불을 신호로 시작되었는데

,

단대리

·

탄리

·

수진리의 주민

300

여 명이 산성 남문에 집결하여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

시위대는 평소 일제에 적극 협력한 중부면장을 끌어내어 곤봉으로 실신시키는 등 폭력적으로 진 행되었다

.

일부 산성마을 주민들은

1927

년 전 민족적 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는 한 편

,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

8

24

일 남한산성 안의 노동공조회 관에서 개최되었는데

,

초대지회장은 돌마면 출신의 한순회가 맡았지만

,

부회장에는 산성마을 출신인 석혜환이 선임되었다

.

석혜환은

1928

12

월 지회장에 선출된 이후

,

문맹퇴치와 소비조합 설립 등에 적극 나섰다

.

석혜환 등 남한산성 마을주민들은

1931

5

월 신간회가 해소되자

,

비합법적 사회주의 단체인 광주공산당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 1936

1

월 일제에 의해 적발된 이 사건은 남한산성 마을에서 형성된 항일의 정서가 계몽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으로 확산된 항일 저항운동의 한 지역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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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

,

뺷애국계몽운동Ⅱ뺸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2009.

최준흥

,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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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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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권

,

「한말 일본군의 의병진압과 의병전술의 변화과정」

,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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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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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취락연구:남한산성 광주읍치의 형성과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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뺷한국지역지리학회지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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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편

,

뺷남한산성 품에 안긴 산성마을뺸

, 1999.

*

이 논문은

2015

2

26

일에 투고되어

,

2015

3

9

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 2015

3

31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

2015

4

3

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17)

❙Abstract❙

Case Study of Namhansanseong Destruction of Japanese Imperialist’s and Resistance of the Citizens

69)

Kim, Myungseob*

In this paper, Namhansanseong was destruction and oppression by the Japanese imperialists, during the 20th century, and resistance of the villager of the case Preliminary consideration of the article by. Namhansanseong destruction led by the cavalry unit on August 22 in 1907, and dispatched arms and ammunition storage and a powder keg and a weapons depot blast. This, Mangwol Temple, including the consideration of a total 800 years of due to 8 temple was cremated. Also, Japanese imperialists, in 1917, Gwangju, Gyeongan-ri the county administrative role in 300 years by moving a mountain fortress town of the decline, to take the lead.

Japanese, which was very strong desire to learn of the students with enthusiastic support of the namhansanseong residents and cracking down on private schools. In 1906, private school the village of acid which start in Gwangju elementary School, 1900 modern Gyanghyung school into hot support from local residents and desire to learn this school, but also be rebuilding as schoolHave been growing steadily. However, This school was in 1911 and 1918, two times over the school to change the name of the education and colonization policy.

Despite the destruction, villagers deploy 3.1 Movement of 1919, patriotic various campaigns including the age of enlightenment activities for development. Many villagers after been devastated by Japanese’s colonial rule protecting forests and associations continued its activities to organized activities to the bailout, the poor.

But, after 1931 May, the dissolution of Shinganhoi Gwangjugihoi, Many people make a transfer the soci ali st movement, vi llagers were unlawful. January 1936, caught by Japanese coloni sts,

‘Gwangju commuist conference’ case Namhansansung town formed in the anti-Japanese sentiments of the area of enlightenment activities and lead to unlawful labor movement. And socialist experience in other areas to develop into a campaign for ideas against the proliferation of exercise as part of owner/schema-unification.

* Lecturer, Dankook University

(18)

[Key Words] Namhansanseong, Gyanghyung school, labor Cooperation Union, Shinganhoi Gwangjugihoi, Gwangju Commuist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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