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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영과 정신분석과 Sigourney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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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Special Issue 1 精 神 分 析 :第 14 卷 第 1 號 2 0 0 3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4, No. 1, page 8~10, 2 0 0 3

조두영과 정신분석과 Sigourney Award

김 이 영

*

Doo-Young Cho, Psychoanalysis, Sigourney Award Eyong Kim, M.D., Ph.D.

*

지금부터 23년 전 가을 어느 날이다. 그 때 나는 정신분 석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뇌전기충격요법이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느라고 정 신이 없었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 학교실 실험실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생화학교실로 조두영 선생께서 전화를 하셨고 그래서 의대본관 중앙정원의 유서 깊은 분수대옆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정신분석학회(그 때는 이 말을 쓰지는 않았다) 창립 에 관한 것들이었다.

조두영님께서는 미국유학 초기부터 이미 정신분석에 뜻을 두었고, 그 많은 한국출신 미국 정신과의사들이 힘들어서 감 히 접근하기를 꺼리던 정통 정신분석(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반발한다. Freud학파만 정통이냐고!)만을 고집하면 서 공부를 해 오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1년차 때 일시 귀국하셔서 하신 특강이“심청” 의 정신분석에 관한 것 이었고, 그 때 서울대병원 정신과에 기증하신 도서가 정신 분석에 관한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생님께서 생화학교실을 드나들던 내게 왜 정신분석을 같이 공부하자고 하셨는지 지금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막 연하게 같은 조직내에서 매일 접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교육분석이건 일반적인 것이건 정신분석은 불가능하다는 입 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었던 나를 주의깊게 보고 계시지 않 았나 하고 추측할 뿐이다. 물론 비록 사정상 생화학 실험을 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관심이 사회심리학적 접근 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연구모임 을 위한 초기 접촉(유혹?)대상으로 나를 골랐을 것이라고 생 각한다.

이렇게 시작한 정신분석공부모임은 그해“10-26” 과, 최 규하대통령의 허약한 권력으로 인한 혼란과, 찬란했지만 비

극으로 끝난 빛나는 그“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요동치는 정치사회적 격변기임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한 준비과정을 거쳐 비극적인 광주항쟁을 며칠 앞둔 상황에서 1980년 5 월 6일“서울정신분석연구회”란 이름으로 찬란한 출생을 신고했다.

오로지 조두영회장의 고집스러운 열정의 결과였다.

서울정신분석연구회란 이름 때문에 오해도 많았다. 왜 회 원을 공개모집하지 않느냐는 오해에서 시작해서 서울대 출 신만 모이는거냐, 서울 사는 사람만 회원자격이 있느냐, 왜 그렇게 폐쇄적이냐, 라는 비아냥과 항의가 들어 왔다. 설명 하자면 그 때의 상황이 지방에 계신 회원들을 접촉하기가 힘들어서 많이 접촉하지를 못했고, 서울에 계신 서울대 출신 이 아닌 몇분에게 같이 공부할 것을 청하였지만 충분히 이 해를 못시켜서였는지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있는 서울대 출신으로만(6명)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소규모로 시작한다는 뜻에서“서울” 이란 이름을 쓰게 되었 는데, 한편으로는 혹시 독자적으로 같은 성격의 연구회가 생긴 다음 연합하는 것도 가정하여 한국이란 말을 쓰지 않 았다.

이 때 학회란 이름을 안 쓰고, 가입자격에서 엄격한 규정 을 둔 것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각종 규칙과 내규를 그 당 시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안에서 지키려는 노력의 하나였 다. 이런 우리의 태도는 그 후 우리와 국제정신분석학회와의 교류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 때 모임에서 회원가입의 대 전제는“국제정신분석학회 에서 인정하는 정신분석가가 되고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정식 지역(국가)정신분석학회로 발전시키는 데 동의한다”였다.

어쭙잖게도 우리는 이런 목표가 10년이면 가능하리라고 생 각하였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공부를 시작하였다.

격주 수요일 저녁에 모여서 두 시간 이상씩 정신분석의 책과 논문을 읽고 토론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증례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삼성서울병원 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Sungkyunkwan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amsung Medical Center,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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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 영

9 토론도 시작하였다. 감독자도 없었고, 게으르다고 야단칠 사

람도 없었다. 다만 결석자에게는 약간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래도 열심이었다. 참 많은 책과 논문을 읽었다. 정규 시간 이 끝나고 2차에서도 아는 것, 모르는 것 할 것 없이 많이 떠들었다. 야간 통행금지제도가 없어진 것이 얼마나 반가웠 는지 모른다.

가능한 대로 세계 여러 곳의 정신분석학교의 교과과정을 얻어서 거기에 맞추어 읽을 책과 논문을 선정하였다. 많이 참고한 것이 New York Psychoanalytic Institute의 교과 과정과 토의 논문 목록이었다.

이러는 한편 부지런히 국제학회의 소식을 얻고 접촉의 기 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 일은 전적으로 조두영두목의 몫이었다. 다른 회원들은 당시에는 외국여행을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고 조선생님만이 그래도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었 다. 없는 돈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국제학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가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던 조두영선 생께서는 그 무섭다는 뉴욕의 할렘의, 전화도 제대로 걸 수 없는, 한 방에 여러명이 거처하는 싸구려 여인숙에 머물면 서도 세계의 석학들을 찾아다니시기에 혈안이셨다. 내가 평 생 단 한번 콜렉트 콜 전화를 받았는데 그것이 이 때 조선 생님이 뉴욕의 길거리에서 거신 전화였다.

미국의 Arnold Cooper, Edward Josef을 비롯한 여러 석 학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고 영국에서는 타계하기 직전의 Anna Freud를 만나서 그들에게 우리의 포부를 설 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일을 혼자 다 하셨다.

1982년 봄에 대만에서 열린 PRCP대회에 참가한 조교수 님과 나는 그 곳에 참석한 Dr. Normund Wong으로부터 정 신분석학회에 대하여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여러 가지 정보 를 알게 되었다. 이 때부터 마침 1984년에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PanPacific Psychiatric Congress를 적극 활용하 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84년 환태평양정신의학회 학술대회에는 Dr.

Alan Frazer, 김명희선생님, Dr. Normund Wong(이상 미 국), Dr. Nishizono(일본), 이렇게 4분의 정신분석가가 서 울을 방문하였고, 서울정신분석연구회가 최초로 공개 학술 발표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에 우리가 국제정신분석 학회의 회원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구체적이고도 확 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를 돕겠다는 후원자를 얻은 점에서 는 고무적이었지만 우리 앞에 놓인 험난한 미래를 확인하였 다는 점에서는 좌절감을 안겨준 그런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두영선생은 낙심하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투지 를 불태웠다.

이 때 두 가지 계획이 세워지고 그것은 실천되었다.

하나는 우리끼리 공부하는 것은 실력을 쌓는 것으로나 국 제학회의 인정을 받는 면에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명한 분석가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자 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계획은 적극적으로 국제적인 분석 학술대회에 얼굴을 내밀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 세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회원을 기다리기만 할 것 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회원의 추가 모집이 있었고 두배로 늘었다.

이 두개의 계획은 1985년 5월 Dr. Normund Wong의 초 청 세미나와 조두영, 오승환 및 김이영이 동년 7월말, 나치 에게 쫓겨난 후 무려 50여년 만에 독일내(함부르그)에서 개최된 제 34 차 국제정신분석학회(34th IPAC)에 참석함으 로서 구체화되었다. 외국 석학 초청 세미나는 그 후 지금까 지 연면히 계속되어 오고 있고, 우리 학회 발전의 큰 밑거름 이 되고 있다. 최초로 참가한 IPAC에서 조두영선생님은 국 제학회에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체면불구하 고 접근해서 우리의 뜻을 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오 승환선생님과 나는 감히 거물들과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 기에 눈치 보아 가면서 우리와 비슷하게 주눅이 든 것처럼 보이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잡고 우리를 알리 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IPAC에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우 리 회원들이 참가하였다.

결과적으로 1985년은 우리 학회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정식 산하단체가 아님에도 한국에도 정신분석의 열기가 뜨 겁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린 획기적인 해가 되었다.

이때까지 우리 학회의 조두영 독주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조두영교수의 정신분석에 대한 열정 하나로 국제 정신 분석학계에 한국의 존재를 알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일을 마치시고 우리의“조짱” 은 한국정신분석 학회의 회장직을 내 놓으시고 오직 분석에 대한 공부와 국 제학회와의 관계정립에 일로 매진하신다. 그의 모든 연구활 동은 정신분석과 관련된 것뿐이었고, 해외학회참석, 단기연 수, 단기출장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로지 세계적인 정신 분석학자와의 교류, 초청, 토론에 할애되었다.

그 결과가 구체적 업적이 학문적으로는「임상 행동과 학」 ,「행동과학」 ,「프로이트와 한국문학」 이라는 저서로, 수 십 편의 정신분석관계의 논문으로 나타났다. 행정적으로는

“Seoul Psychoanalytic Guest Study Group” 으로 구체화 되었다. 아는바와 같이 몇몇 우리의 회원이 이제는 정식분 석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전의 단계에 와 있다.

그의 공이다.

서울정신분석연구회의 초기 구성원들이 각자 정신분석외

의 여러 가지 일에 몰려서 정신분석의 공부를 소홀히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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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영과 정신분석과 Sigourney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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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조교수님만은 한눈팔지 않고 발족당시의 초심을 그대 로 유지하여 오직 관심은 정신분석뿐이었다. 이제는 좀 물러 앉아서 후배들에게 일을 시켜도 될만 하건만 늘 앞장서서 후 배들이 감히 따라붙지 못할 정도의 정열로서 우리 정신분석 의 발전을 위하여 뛰셨다. 그런 조교수님을 한편으로는 시 샘이 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같이 돕 지 못하는 죄책감을 가지고 보고 있었다.

일요일인 2002년 12월 8일 저녁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와 한국정신분석학회 홈페이지를 열었다. 아직 열어본 흔적도 별로 없는 이무석선생의 글을 여는 순간, 이것이 무 슨 경천동지의 소식이란 말인가. 지난 22년간의 일들이 주 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일국의 대학교수가 커다란 선물 덩어리를 들고 객지의 호텔들을 돌면서 느꼈던 묘한 감정까 지도 떠오르면서 무엇이건 한마디 남겨야겠다고 글을 쓰려 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겨우 쓴 것이

“이 기쁜 소식을! 더 이상 쓸 말이 있을까요!” 이다.

그러면서 생각은

“이 입 무거운 양반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었다.

밤이 이미 늦었음에도 전화를 드렸고, 아직 아무 연락도 못 받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면서 잠이 들었다.

서울정신분석연구회로 시작하여 한국정신분석학회로 22년, 이제 우리는 이 자리에 와 있다.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다른 어떤 정신분석학회나 연구회 에 소속되지 않고 오직 한국정신분석학회에만 소속된 조두

영회원에게 공식적으로 상을 수여한다.

1980년 5월 6일 창립당시 우리가 잡았던 목표의 7부 능 선을 넘는다는 뜻이다. 22년만에!

그 공로의 대부분은 조두영 그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가 그에게 할 일은 무엇인가?

늙은 몸을 이끌고 전투의 최전방에서 물불 안가리고 앞장 서는 수색중대의 선임하사의 직책에서 이제는 그를 해방시 키는 것만이 우리가 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길 고 긴 터널을 지나온 역전의 용사에게 이제는 위험한 전초 병이나, 힘에 겨운 기동타격대의 임무를 벗겨드리자. 그래서 그가 이제는 오직 정신분석 그 자체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휴식을 드리자.

조두영과 정신분석과 Sigourny Award, 그것은 조두영의 영광이요 한국정신분석학회의 영광이다. 이 영광 끝없이 계 속되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기원한다.

조두영선생님! 이제는 힘든 일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오직 환자진료와 정신분석 논문 쓰기에 더욱 힘써 주시기를 부탁 합니다. 게으른 후배인 제가 따라가지 못하고 도와드리지 못 해서 죄책감이 든다면 그것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2002년 12월 14일 제자요, 후배요, 동료이면서

이제는 새까맣게 앞서가시는 선생님을 질투하는 김이영이가

선생님의 영광이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회고하면서 씁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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