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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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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 밥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의

󰡔서술󰡕과 18세기 프랑스 중국학

123)

정 철 웅*

❙국문초록❙

27명의 예수회 선교사의 원고를 바탕으로 1735년 파리에서 출간된 장 – 밥티스트 뒤 알드의 󰡔서술󰡕은 18세 기 유럽의 중국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이 책에는 중국 본토와 만주, 몽골, 西藏, 新疆은 물론, 조선과 일본의 다양한 풍속, 物産, 제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중국 원전의 번역, 선교사들의 포교에 대한 관심이 들어 있다. 그 방대한 내용 탓에, 여기서는 주로 당시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원전의 번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그들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과 잠재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중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동식물에 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이런 설명을 통해, 당시 그들이 대체로 중국 문명의 우수성을 인정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파악한 점, 역사 제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 등의 한계도 드러난다. 특히 󰡔서술󰡕에 실린 중국 텍스트의 번역은 원문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번역된 중국 원전을 향후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프랑스 중국학은 󰡔서술󰡕에서 집대성된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의 개별적인 사항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중국 原典에 대한 정치한 번역이 이루어진 사실도 󰡔서술󰡕이 프랑스 중국학에 끼친 중요한 영향이었으며, 프랑스 자체의 역사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도 했다. 이 논문이 󰡔서술󰡕

의 매우 단편적인 측면만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중국 인식에 대한 각 선교사들의 시각 차이와 각자의 관심 분야, 이 책에 포함된 다양한 내용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주제어] 강희제, 󰡔福惠全書󰡕, 󰡔서술󰡕, 18세기 프랑스 중국학, 예수회, 장 – 밥티스트 뒤 알드

❘목 차❘

Ⅰ. 서 론

Ⅱ. 장 – 밥티스트 뒤 알드의 󰡔서술󰡕

Ⅲ. 󰡔서술󰡕에 드러난 18세기 프랑스 중국학의 단면

Ⅳ. 결 론

*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 woong@mju.ac.kr

(2)

Ⅰ. 서 론

현재 출간된 우리나라의 중국사 관련 번역서는 물론

,

대다수 논문에서도 서양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인용과 소개는 미국학계에 집중되어 있다

.

아마도 그 가장 큰 이유는 언어의 제한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단 지 언어의 한계라는 이유로 미국보다 훨씬 앞서 동양학을 발전시킨 프랑스의 학문적 성과를 도외시하기에는 의외로 그들 연구 성과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

.

따라서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은 프랑스가 과거 이룩한 중국학의 한 측면을 환기시키는 한편

,

그들의 실질적인 연구 내용을 확인하는 데 있다

.

프랑스에서 중국사를 연구한 연구자들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

프랑스어도 사실상 死語에 가까운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면

,

프랑스 중국학에 대한 관심의 환기가 자칫 일회성에 그칠 위험성도 물론 있다

.

하지만 꾸 준히 제기돼 온 전근대 시기 유럽과 동양 사이의 관계 속에는 특정 시기 동양의 우위에 대한 강조

,

근대 유 럽 제국주의 발전의 근저에 있는 문화적 우월성과 인종주의적 관점

,

그리고 다양한 층위를 지닌 동양과 유럽 의 교류가 들어 있다

.

1) 이처럼 동서양의 다양한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예수회 일원이었던 장 – 밥티스트 뒤 알드

(1674~1743)

1735

년에 편찬한 󰡔중국과 이민족 중국 제국의 지리

,

역사

,

연대기

,

정치

,

자연에 대한 서술

( Description ge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i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 )

󰡕2)이란 저서다

.

18

세기 당시 유럽에서 중국에 대한 최고의 저서로 알려진 이 책을 통해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히고 자 한다

.

첫째

, 18

세기 프랑스 중국학의 중요한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

이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프랑스 중국학에 대한 소개가 여전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3)을 염두에 두었다

.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책의 구성과 내용

,

시대 배경

,

그리고 집필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예정이다

.

둘째

,

󰡔서술󰡕의 내용을 토대로 당시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언급하려 한다

.

일부 지적처럼

, 18

세기 프랑스의 중국 연구는 극동의 강국을 알고자 하는 단순한 열망을 넘어

,

당시 통치자들의 정치적 의도도 내재되어 있었다

.

4) 이 책이 출간된

1735

년 당시 중국과 프랑스는

盛世

의 시기였지만

,

프랑스나 유럽 지식

1)각각 안드레 군더 프랑크(저), 이희재(역), 󰡔리오리엔트󰡕, 이산, 2003; 존 M. 홉슨(저), 정경욱(역),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 되었다󰡕, 에코리브르, 2005; 데이비드 E. 먼젤로(저), 김성규(역),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 1500~1800󰡕, 휴머니스트, 2009 와 데이비드 E. 먼젤로(저), 이향만 등(역), 󰡔진기한 나라, 중국:예수회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 나남, 2009 등 참조. 2)이하 이 책은 󰡔서술󰡕로 표기함. 1735년과 1736년에 출간된 이 저서의 초판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언어연구소

(Institut des langues orientales, INALCO), 마자린 도서관(Bibliothèque Mazarine), 콜레쥬 드 프랑스의 중국학 고등 연 구원(I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 du Collège de France, IHEC), 파리 외방선교회(Missions Etrangères de Paris)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원본 대신, http://www.chineancienne.fr을 참조했다. 위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저 서는 편집 방식이 달라, 1735 원본의 쪽수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18~19세기 중국 관련 다른 프랑스 서적들도 위 사이트에서 참조했음을 밝힌다.

3)문학, 철학과 관련된 프랑스 연구자들에 대한 소개와 연구는 찾아볼 수 있지만, 중국학 자체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제한적이 다. 다만 박상수, 「“漢學”에서 사회과학으로 – 프랑스와 근현대 중국사학」, 󰡔중국학보󰡕 48집, 2003과 안종수, 「부베와 라이프 니츠」, 󰡔철학논총󰡕 52집, 2008과 같은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4) Catherine Jami, “Pékin au début de la dynastie Qing:capitale des savoirs impériaux et relais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de Paris”, Revue d’histoire moderne et contemporaine 55: 2, 2008, pp.65~66.

(3)

인들의 중국에 대한 생각은 획일적이지 않았다

.

일부 연구자는

18

세기 중국의 관료제를 매우 효율적인 사례 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

5) 당시 프랑스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프랑스보다 열등하며

,

많은 인구 때문에 행복하 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

6) 그렇다면 후진적인 이미지의 중국7)이 근대 유럽인인 뒤 알드의 저서에서는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

이 질문은 여전히 논쟁 중인 전통 중국의 이미지8) 대신

,

유럽의 근대성에 대한 재고의 기 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

끝으로

, 18

세기 프랑스 중국학의 수준과 그 이후 영향을 고찰하려 한다

.

󰡔서술󰡕이 워낙 방대한 탓에

,

일회 성 연구로는 이러한 종류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

그러나 당시 중국학의 수준을 살펴보기 위해

,

일단

17

세기 중요한 官箴書 중 하나인 󰡔福惠全書󰡕의 번역 문제를 거론할 예정이다

.

한편

,

향후 영향이라는 문제도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

전망을 담은 결론 부분에서 간략하게 언급할 예정이다

.

이런 연구 목적 외에도 󰡔서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부차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중국학자인 이사벨 란드 리 – 드롱

(Isabelle Landry-Deron)

1999

년 발표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최근 󰡔중국의 증거󰡕9)라는 제 목으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

그녀의 저서는 약

300

여 년 전에 출간된 뒤 알드의 저서를 되새김질 하고 있다는 점에서

,

과거 프랑스 중국학에 대한 현재 프랑스 중국 학자들의 관점을 살펴보는 데 유용할 것이다

.

Ⅱ. 장 – 밥티스트 뒤 알드의 󰡔서술󰡕

1. 󰡔서술󰡕의 구성

󰡔서술󰡕은

1

권이

754

, 2

권이

1249

, 3

권이

933

, 4

804

쪽으로 구성된 매우 방대한 책이다

.

10) 따라 서 요약하기 어려운 이 책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

우회적으로나마 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

5) 피에르 – 에티엔 빌(저), 정철웅(역), 󰡔18세기 중국의 관료제도와 자연재해󰡕, 민음사, 1995 참조.

6) Michel Lutfalla, “La Chine, vue par quelques économistes du XVIIIe siècle”, Population(French Edition) 17: 2, 1962, pp.290~291.

7) 18세기 당시 유럽인들의 이러한 시각은 특히 Montesquieu, Extraits de l’esprit des lois concernant la Chine, 1748 전 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8) 중국과 관련된 전통과 근대라는 논의의 오류에 대해서는 Pierre-Etienne Will, “Chine moderne et sinologie”,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49: 1, 1994, 특히 pp.9~11 참조.

9) 원제는 La preuve par la Chine:La ≪Description≫ de J.-B. Du Halde, jésuite, 1735, Editions de l’EHESS, 2002이 다. 이하 이 책은 󰡔증거󰡕로 표기함. 이 책은 許明龍, 󰡔淸中國作證󰡕, 商務印書館, 2015에 번역·출간되었다.

10) 출판가이자 편집자인 피에르 – 질 르 메르시에(Pierre-Gilles Le Mercier)가 1735년 파리에서 출간한 󰡔서술󰡕은 이듬해 네덜 란드에서 해적판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영국(1736, 1738, 1741년), 독일(1747, 1756년), 러시아(1774~1777년)에서 각각 출간되었다. 󰡔증거󰡕, 37쪽.

(4)

권 목차 비고

권1

서문11) -

부베, 퐁트니, 콩트, 비들루 神父들의 여정 寧波 ~ 北京(1687년)

퐁트니 신부의 여정 북경 ~ 江浙 ~ 남경(1688년)

부베 신부의 여정 북경 ~ 광동(1693년)

샴에서 북경까지의 육로 여정 -

각 省別 개황12) -

중국 역대 왕조 일람 夏 王朝 ~ 淸朝 雍正帝

권2

중국 왕조의 장구성과 범위 -

황제의 권위13) 제국의 수입과 지출, 궁궐, 기능 등

귀족 -

비옥한 토지와 농업 -

공예품과 민간 수공업 -

중국 민족의 재능과 기질 -

중국인들의 모습 -

중국의 名所 다리, 문, 성벽, 축제

중국인들의 의례 상호 방문과 선물 교환, 결혼과 장례

감옥과 형벌 -

중국의 다양하고 풍부한 물산 인구, 가축, 물고기, 배, 산과 하천 등

호수, 운하, 하천 -

역대 유통 화폐 화폐와 동전 도판 포함

중국인들의 상업 -

중국의 漆 -

도자기 -

비단14) 사직업 관련 도판 포함

중국어 문자, 발음, 문법, 품사

<표 1> 󰡔서술󰡕의 목차

11) 서문 속에는 1. 중국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 2. 중국과 만주를 구분하고 있는 만리장성, 3. 감숙, 신강, 서장 사람들, 4. 코 코노르 민족, 5. 라라족, 6. 묘족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12) 북직예, 강남, 강서, 복건, 절강, 호광, 하남, 산동, 섬서, 산서, 사천, 광동, 광서, 운남, 귀주성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다. 13) 이 항목에는 다시 1. 중국 행정부의 구성, 2. 군사제도, 3. 치안제도가 들어 있다.

14) 이 항목은 徐光啓, 󰡔農政全書󰡕 권31~32, 「蠶桑」을 번역·발췌한 부분이다.

15) 청소년에 대한 교육을 다룬 이곳에서는 다시 1. 黃六鴻, 󰡔福惠全書󰡕의 「立義學」, 2. 󰡔朱子全書󰡕의 「易學啓蒙」 발췌문, 3.

(5)

권 목차 비고

종이, 먹, 붓, 인쇄, 제본 -

청소년 교육 방법과 科擧15) -

易經 최고 권위 경전의 첫 번째 서적

書經 최고 권위 경전의 두 번째 서적

詩經 최고 권위 경전의 세 번째 서적

春秋 최고 권위 경전의 네 번째 서적

禮記 최고 권위 경전의 다섯 번째 서적

공자의 생애 -

大學 두 번째 등급의 서적

中庸 두 번째 등급의 서적

論語 두 번째 등급의 서적

孟子 두 번째 등급의 서적

孝經 -

小學16) -

徐乾學, 󰡔御選古文淵鑑󰡕 발췌 역대 관리들의 奏疏

唐順之, 󰡔荊川先生文集󰡕 발췌 -

󰡔王陽明文集󰡕 발췌 -

劉向, 󰡔古列女傳󰡕 발췌 -

권3

중국의 종교17) -

중국의 철학18) -

李九功, 󰡔文行粹抄󰡕 발췌 -

중국인들의 과학지식19) -

抱翁老人, 󰡔今古奇觀󰡕 발췌20) -

「趙氏孤兒」21) -

중국의 의학22) -

虞韶, 󰡔日記故事󰡕의 발췌문, 4. 󰡔福惠全書󰡕의 「生童課試」 발췌문을 각각 담고 있다.

16) 여기서는 󰡔小學󰡕의 1. 「內篇」(立敎1), 2. 「明倫」, 3. 「敬身」, 4. 「積古」, 5. 「實敬身」이 들어 있다.

17) 이 안에는 각각 1. 중국인들의 조상 숭배, 2. 도교, 3. 불교, 4. 당시대 일부 지식인들이 믿는 종교, 5. 인간의 기원과 현 상황에 대한 소회를 밝힌 ‘진(Tchin)’이라는 당시 한 철학자와의 대화, 6. 기독교당과 그 확산이 각각 담겨 있다. 여기에는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永曆帝의 王皇后가 永曆 4년(1650) 교황에게 보낸 편지도 들어 있다.

18) “중국 근대 철학자가 본 중국인들의 기질과 풍속”이라는 큰 제목 하에,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 친구 사이의 도리, 심신 단련, 학문 애호, 수양 등에 관한 24개 항목이 다시 들어 있다.

19) 여기서는 논리학, 수사학, 음악, 수학, 기하학, 수학, 기하학 이외의 분야인 수학, 천문학 등이 언급되어 있다.

(6)

권 목차 비고

권4

만주 지역의 지리 개관 몽골 지역 포함

만주족의 역사 -

몽골족이 점령한 지역의 지리 -

만주족의 언어 -

베르비스트의 만주 지역 여행 강희 21~22년 여행기

제르비옹의 만주 지역 여행 강희 27~37년의 8회 여행기

조선 왕조의 지리 개관 레지 신부의 기록

조선 簡史 레지 신부의 기록

베링 대장의 시베리아 여행 -

티벳 지도에 대한 지리적·역사적 관찰 레지 신부의 기록

권4에 등장하는 중국어와 만주어 단어 설명 -

각 권에는 이처럼 매우 다양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지만

,

그 특징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우선

1

권에는

󰡔서술󰡕의 편찬 의도

,

각 권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

,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 내용과 목적

,

그리고 중국 전체의 행정 체계 등이 들어 있다

.

이어

2

권에는 중국 텍스트의 번역이 들어 있다

.

󰡔서술󰡕에 등장하는

21

개의 번역 문 중

18

개의 번역문의 출처를 란드리 – 드롱은 밝히고 있다

.

23) 이처럼 뒤 알드가 일부 번역문의 출처를 명 확히 밝히지 않은 이유를 란드리 – 드롱은 그가 이후 프랑스에서 중국학이 발달하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지만

,

24)적어도 상당수 내용은 당시 중국의 정평있는 책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

󰡔서술󰡕

이 프랑스 중국학에 미친 향후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

한편

,

중국인들의 학문적 성과를 다룬

3

권에 󰡔今古奇觀󰡕의 에피소드가 포함된 건 특이하다

.

이는

18

세기 초엽부터 번역된 중국 소설이 유럽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유럽과 중국 상황의 유 사성을 발견했다25)는 사실과 일치한다

.

더구나 뒤 알드도

“(

여기에 소개한

)

일련의 일화는 최근 대단히 유행 하고 있는 프랑스 소설과 거의 흡사하다

26)고 지적했다

. “

이 이야기를 통해 堯舜과 그 후 황제들이 풍속을

20) 1. 「呂大郞還金完骨肉」, 2. 「懷私怨狼僕告主」(서문), 3. 「懷私怨狼僕告主」(본문), 4. 「莊子休鼓盆成大道」라는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21) 원대 紀君祥이 편찬한 󰡔元人雜劇百種󰡕에서 발췌한 것임.

22) 1. 󰡔脈訣󰡕의 번역, 2. 󰡔本草綱目󰡕 발췌문, 3. 󰡔本草經󰡕, 4. 󰡔神農本草經󰡕 발췌문, 5. 梁 나라 陶弘景의 󰡔名醫別錄󰡕 발췌문, 6. 다양한 치료법 모음이라는 제목 하에 인삼, 차, 코끼리, 낙타, 해마, 石蟹, 사향, 동충하초, 三七, 大黃, 백랍, 오배자, 梧 樹, 중국의 이질 치료법, 7. 長生法이 포함되어 있다.

23) 󰡔증거󰡕, 183쪽과 189쪽. 란드리 – 드롱이 밝히지 못한 세 개의 번역문은 권3, 「중국의 종교」에 등장하는 ‘인간의 기원과 현 상황에 대한 소회를 밝힌 ‘진(Tchin)’이라는 당시 한 철학자와의 대화,’ ‘중국 근대 철학자가 본 중국인들의 기질과 풍속’이다. 24) 󰡔증거󰡕, 186쪽.

25) Isaac Yue, “Missionaries (MIS-) Representing China:Orientalism, Religion, and the Conceptualizing of Victorian Cultural Identity”, Victorian Literature and Culture 37: 1, 2009, pp.6~7.

(7)

완전하게 하고 국가의 평화를 위해 했던 일을 읽을 수 있다

27)는 그의 언급으로 미뤄

,

그가 이 소설을

3

권에 넣은 이유는 그것을 통해 중국인의 정치 실상과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4

권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 관련 서술이다

.

중국의 설명 방법과 동일하게 조선의 지방 행정 단위와 생 산물을 적고 있지만

,

한반도가 堯 임금 시대부터 중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종류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

여기서도 동해는 일본해

(La mer du Japon)

로 표기되어 있는데

,

28) 뒤 알드의 지적처럼

,

이러한 오류는 당시 선교사들이 전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

29) 또한

4

권에는 티벳 지역 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들어 있다

.

강희

50

(1711)

에 제작된 지도의 오류를 레지

(Régis)

신부가 지적함에 따 라

,

좀 더 완비된 형태의 티벳 지도가 강희

56

(1717)

에 작성되었다

.

지도는 영역만이 아닌 사람을 통제한 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30)에서

,

티벳 지도 제작은 청 정부의 티벳에 대한 통치 강화와 함께

, 17

세기부터 발 달한 프랑스의 지도 제작 기술이 레지 신부를 통해 청 정부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31)

2. 󰡔서술󰡕의 저자들

󰡔서술󰡕은

27

명의 신부들이 보낸 원고를 바탕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

엄밀한 의미에서 뒤 알드는 단순한

편찬자

에 불과하다

.

그러나 󰡔서술󰡕 편찬 당시

,

뒤 알드가 어떤 기준으로 선교사들의 원고를 취사선택했는지 는 대단히 불투명하다

.

한편

27

명의 처지와 생각도 동일하지 않았다는 사실32)을 고려한다면

,

󰡔서술󰡕 출간 전후 시기 중국의 기독교 문제와 당시 선교사들의 면면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프랑스에서는 󰡔서술󰡕 출간

50

년 전인

1685

년 루이

14

세가

수학자들

(Mathématiciens)’

을 중국에 파견하 기로 결정했지만

,

당시 保敎權

(Padroado)

을 가지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반대33)로 마카오를 통한 중국의 입 국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

34) 다른 한편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만이 기독교인이며

,

예루살렘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봉사자가 시민으로 구성되는 성스러운 도시

(

교회

)

라고 주장하는 장세니즘35)과 제주이트가 대립하고 있

26) 󰡔서술󰡕 권3, 548쪽. 27) 󰡔서술󰡕 권3, 546쪽.

28) 각각 󰡔서술󰡕 권4, 735쪽과 736쪽.

29) 자르투(Jartoux) 신부나 레지 신부가 한국을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Henri Cordier, “De la situation du Japon et de la Corée:Manuscrit Inédit du Père A. Gaubil S. J. Publié avec des notes”, T’ung Pao 9: 2, 1898, p.106과 p.108 참조.

30) Peter C. Perdue, “Boundaries, Maps, and Movement:Chinese, Russian, and Mongolian Empires in Early Modern Central Eurasia”,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20: 2, 1998, p.265.

31) 지도 제작에는 직접 간여하지 않은 레지 신부가 지적한 오류는 고정점의 부재와 거리의 부정확성이었으며, 이러한 제작 기 술은 17세기 이후 등장했다. 따라서 강희제는 欽天監에서 지리와 대수학을 배운 두 명의 라마에게 지도 제작을 일임했다.

󰡔서술󰡕 권4, 780쪽.

32) 알레니(Aleni, 1582~1649) 신부가 남명정권의 唐王에게, 안드레아스 코플레르(Andreas Koffler, 1612~1652)와 마이클 보 임(Michael Boym, 1612~1659) 신부가 永曆帝에게 협력했던 사실이 그러한 예이다. 󰡔증거󰡕, 76쪽과 󰡔서술󰡕 권3, 161쪽 참조.

33) 1381년부터 시작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보교권(Padroado)의 실상에 대해서는 원정식, 「17世紀 地域과 世界의 만남:天 主敎의 福建 傳來」, 󰡔역사문화연구󰡕 35, 2010, 232쪽 참조.

34) 󰡔증거󰡕, 71~72쪽.

(8)

이름 중국명 생몰 연도 중국 도착 시기 원고 분량(쪽수) Martin Martini* 衛匡國 1614~1661 1643 100**

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 1659 12

Philippe Couplet 柏應理 1622~1693 1659 12

Gabriel Magalhaens* 安文思 1610~1677 1640 6

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1687 8**

Joachim Bouvet* 白晉 1656~1730 1687 50**

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 1654~1707 1687 360

François Noel 衛方濟 1651~1729 1687 50

Louis Le Comte 李明 1655~1728 1687 10

Claude Visdelou 劉應 1656~1737 1687 6**

Jean-Baptiste Regis* 雷孝思 1663~1738 1698 44 Joseph-Henri de Prémare* 馬若瑟 1666~1736 1698 60 François-Xavier Dentrecolles* 殷弘緖 1664~1741 1699 220

Julien-Placide Hervieu* 赫蒼壁 1671~1746 1701 360

Cyr Contancin 龔當信 1670~1732 1701 30**

Pierre de Goville 戈維理 1668~1758 1701 는 상황이었다

.

1735

년 중국은 옹정제가 사망하고 건륭제가 막 등극한 무렵으로

,

일부 연구자들의 비판적인 견해가 있긴 하지만

,

36) 중국 역사상 최고의 발전을 구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雍正

2

(1724) 1

10

일 雍正帝는 기독교 포교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

따라서 󰡔서술󰡕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렵 게 중국에 들어간

1687

년부터

1700

년대 초반 사이에 작성된 원고를 토대로 편찬되었다

.

따라서 뒤 알드가

모든 논쟁을 회피하고

”,

옹정제의 禁令을 고려해 󰡔서술󰡕을 편찬할 수 있는 방법은 󰡔교훈적이며 흥미로운 서 간집

( Lettres édifiantes et curieuses )

󰡕에 등장하는 종교 관련 내용을 훨씬 축소하는 것이었다

.

37) 일단 다 음

<

2>

를 통해 󰡔서술󰡕의 집필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

<표 2> 󰡔서술󰡕의 저자들 일람표38)

35) Catherine Maire, “Les jansénistes et le millénarisme Du refus à la conversion”,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63: 1, 2008, p.10.

36) 강원묵, 「康乾 시기 江南 乞丐 문제와 ‘盛世’의 虛像」, 󰡔東洋史學硏究󰡕 111, 2010과 牛貫杰, 󰡔17~19世紀中國的市場與經濟 發展󰡕, 黃山書社, 2008 참조.

37) 󰡔증거󰡕, 73쪽.

38) 󰡔증거󰡕, 69~70쪽과 󰡔서술󰡕 권1, 61쪽.

(9)

이름 중국명 생몰 연도 중국 도착 시기 원고 분량(쪽수) Jean-Armand Nyel 夏德修 1670~1737 1712

Dominique Parrenin* 巴多明 1665~1741 1698 30

Pierre Jartoux* 杜德美 1669~1720 1701 10

Vincent de Tartare* 湯尙賢 1669~1724 1701

Joseph-Anne-Marie de Mailla* 馮秉正 1669~1748 1703 20**

Jean-Alexis de Gollet* 郭中傅 1664~1741 1700

Claude Jacquemin* 彭加德 1669~1734 1703 20**

Louis Porquet* 卜文氣 1671~1752 1701

Emeric de Chavagnac* 沙守信 1670~1717 1701 6 Antoine Gaubil* 宋君榮39) 1689~1759 1722 10 Jean-Baptiste Jacques* - 1688~1728 1722

* 중국에서 사망한 선교사들임.

** 원고의 분량이 불분명한 경우를 의미함.

<

2>

를 통해

, 17

세기에는 마르티니와 제르비옹

, 18

세기 초반에는 당트르콜과 에르비외의 원고가

󰡔서술󰡕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가운데 루이

15

세 당시 프랑스 예수회 초창기 핵심멤버 는 제르비옹이 유일하며

,

당트르콜과 에르비외는 이들 핵심 멤버보다 약

10

년 뒤에 중국에 도착한 인물들이 다

.

반면

,

마르티니는 약

40

년 전쯤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다

.

40) 또한 일찍이 楊光先의 상소로 康熙

3

(1664)

투옥을 당한 바 있으며

,

강희제의 曆法과 대포 제작에도 간여하는 등

,

41) 수많은 활동을 한 베르비스 트의 원고량은

12

쪽에 불과하다

.

이런 원고 구성상의 불균형을 해명하기 위해 청과 유럽의 기독교 관련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우선

,

三藩의 亂 당시 청조의 대포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베르비스트의 포교 방법은 예수회와 경쟁 했던 유럽의 여러 선교 단체에게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

도미니칸 사제인 도밍고 페르난데스 나바레트

(Domingo Fernández Navarrete, 1610~1689)

의 베르비스트에 대한

1676

년의 공격이 그 예이다

.

이러한 비난은

1681

년 교황 이노센트

11

세의 옹호로 일단은 가라앉았다

.

42)

39) 앙리 코르디에는 A. 고빌의 중국명을 孫璋德이라 표기했다. Henri Cordier, “Situation de Ho-Lin en Tartarie, Manuscrit inédit du Père A. Gaubil, S. J. publié avec une introduction et des notes”, T’oung Pao 4: 1, 1893, p.37.

40) 도미니칸과 프란체스칸 교단이 반대하는 문화 적응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예수회는 1654년 마르티니를 중국에서 로마로 파 견했으며, 특히 만주족의 중국 본토 정복에 대한 자세한 뉴스를 유럽에 전했다는 점에서, 그는 17세기 말 중국의 정황을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린 인물이다. Edwin J. Van Kley, “News from China:Seventeenth-Century European Notices of the Manchu Conquest”,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45: 4, 1973, p.563.

41) 신의식, 「康熙帝의 天主敎 認識 – 康熙年間에 파견된 敎皇廳 特使와의 關係를 中心으로 –」, 󰡔中國學論叢󰡕 24, 2007, 371~

372쪽.

42) Joanna Waley-Cohen, “China and Western Technology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98: 5, 1993, p.1532.

(10)

한편

, 1680~1690

년 당시 중국의 천주교인은 약

30

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

이 시기 활동한 선교사들 의 수효가 약

64

명 정도였으며

,

적어도

200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성당이 존재했다

.

43)이런 상황에서 뒤 알드 는 가능한 한 종교와 관련된 논쟁을 피하하기 위해

,

베르비스트의 원고를 많이 싣지 않았을 것이다

.

이제 예수회 선교의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퐁타니 일행이 강희

26

(1687) 7

월 寧波에 도착한 전 후 상황을 언급하기로 하겠다

. 1682

년부터 파리 천문대 책임을 맡고 있던 지안 도미니코 카시니

(Gian Dominico Cassini, 1625~1712)

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으로 향한 퐁타니가 당시 동반하려 했던 신부들은 일단 기 타샤르

(Guy Tachard, 1648~1712),

요하임 부베

,

클로드 비들루였으며

,

루이 르 콩트와 장 – 프랑수 아 제르비옹은 나중에 합세했다

.

먼저 이 무렵 기독교 포교와 관련된 사항을 먼저 언급하기로 하겠다

.

1630~1640

년 중국의 포교 방법과 제례 문제를 사이에 두고 각 천주교 교단 사이에 여전히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며

,

이러한 논쟁은 강희제가 베르비스트를 欽天監에 다시 앉힌 강희

8

(1669)

까지도 지속되었 다

.

이런 와중에

1669

11

20

일 교황 클레망

9

(Clément IX)

반대와 찬성이 모두 존속할 수 있으 며

,

달리 드러나는 상황과 요구에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

두 측 모두 진리이다

라는 칙령을 공포했다

.

사실상 프랑스인들이 포르투갈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동양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건 교황의 교시

(Decet Romanum)

가 발표된 강희

12

(1673)

이후부터였다

.

44)

물론 니콜라스 롱고바르디

(Nicolas Longobardi, 1559~1654)

의 󰡔중국 종교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한 논설󰡕

1701

년 파리에서 출간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

45)예수회 선교자들의 포교권 획득이 곧 바로 전례 문제 에 대한 선교사들의 입장차가 해소되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

46) 그리고 󰡔서술󰡕 편찬의 바탕이 된 원고 를 보낸 일련의 협력자들이 바로 이 무렵에 중국에 도착했다

.

그러나

1669

년부터 포교 금지령이 내려진 옹 정

10

(1732) 8

20

일까지의 약

70

년 동안 발생한 일련의 변화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우선

, 1690

년부터 강희제는 유럽의 과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해

,

제르비옹

,

토마스

,

부베에게 교

재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

선교사들은 長城 이북을 넘지 못한다는 규칙도 강희 제 당시 완화되었다

.

이어 강희제가 부베를 프랑스에 보내 서양 과학에 정통한 신부들을 더 데려오도록 했으 며

,

부베는 평신도 한 명과

9

명의 신부를 데리고

1699

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

47)

당시 중국으로 건너온 신부 중 강희제는

5

명만을 자신 곁에 두었으며

,

나머지는 모두 자유롭게 중국을 돌 아다닐 수 있게 했다

.

이 무렵이야말로 여러 교단들이 동시에 포교 활동을 전개한 시기이기도 했다

.

다른 한 편

,

강희

39

(1700)

그리말디

(Grimaldi, 1638~1712),

앙투완 토마스

(Antoine Thomas, 1644~1709),

43) 󰡔증거󰡕, 76쪽. 44) 󰡔증거󰡕, 83쪽.

45)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인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Traité sur quelques points de la religion des Chinois, 1701, 제10장 참조.

46) 󰡔증거󰡕, 92쪽.

47) Theodore E. Treutlein, “Jesuit Missions in China during the Last Years of K’ang Hsi”, Pacific Historical Review 10:

4, 1941, p.436과 pp.438~439 참조. 이 당시 중국으로 들어 온 신부가 도멩게(Domenge), 바르보리에(Barborier), 돌쩨 (Dolzé), 파르농(Parnon), 브로아씨아(Broissia), 프레마르(Prémare), 레지(Régis), 파르넹(Parennin), 제네익스(Geneix) 였으며, 평신도는 벨빌(Belleville)이었다.

(11)

마스 페레이라

(Thomas Pereira, 1645~1708)

는 제사와 공자의 숭배는 전적으로 민간 차원의 것이라는 내용 의 청원을 올리자

,

강희제가 그것에 동의함으로써

,

전례를 둘러싼 예수회 선교사들의 논쟁과 갈등이 사실상 사라졌다

.

48) 따라서 당시 전례 문제의 종식과 함께

,

선교사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중국을 여행할 수 있었으 며

,

강희제가 적극적으로 서양 과학을 배우려 했을 뿐 아니라

,

프랑스와 중국이 외교적 접촉을 전개했다

.

그 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제르비옹이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음 두말할 나위 없다

.

49)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의 원고량이 단연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서술󰡕 저자들의 면면을 모두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

시기적으로 살펴 본 저자들과 강희제 사이의 교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

첫째

,

순치 연간보다 강희제 시기에 이르러 선교사들의 활동 영역이 훨씬 증가했다는 점이다

.

그 구체적인 예로 퐁타니 일행이

1687

년 영파에 머무르는 동안

,

자신들의 학문 분 야를 분담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들 수 있다

.

퐁타니는 천문 관측과

,

천문학

,

중국 지리

,

부베는 의학

,

제르비 옹은 중국 행정 체계와 풍속

,

비들루는 중국 역사와 서체

,

르콩트는 인문학 분야와 기계학을 각각 담당하기 로 했는데

,

50)이들 가운데 강희제의 부름을 먼저 받은 사람은 제르비옹과 부베였다

.

51)베르비스트 사망 이후

,

그들이 강희제에게 가르친 분야는 우주구조학

,

측지학

,

해시계제작법

,

원근법

,

정역학

,

수리학

(hydrology)

등은 물론

,

음악과 기계학에까지 걸쳐 있었다

.

52)

둘째

,

선교사들이 프랑스에 전달한 중국의 지식과 중국 궁정에 전파한 서양 학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

궁극적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은 두 왕조의 권위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다

.

27

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22

명이 프랑스인이었다는 점53)은 󰡔서술󰡕이 매우 프랑스적인 가치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사 실을 말해준다

.

그러므로 프랑스 입장에서 본다면

,

선교사들은 왕이 과학 분야에 대한 심사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지식인 공동체

(communauté de savants)

를 위해 일했다

.

반면

,

중국에서 그들은 그러한 권위를 국 가 기관으로부터 부여받은 황제와 직접 일했다고 볼 수 있다

.

54)결국 그들의 존재는 루이

14

세가 파견한 왕 의 수학자들

(Mathématiciens du Rois)

이자

,

황제의 수학자들

(mathématiciens de l’empereur)

이었다

.

55)

48) 󰡔증거󰡕, 88쪽. 물론 중국의 전례 논쟁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시기는 베네딕트 14세의 특별 칙령(Ex quo singulari)이 공포 된 1742년 7월 11일이었다. 󰡔증거󰡕, 93쪽.

49) 실제로 제르비옹은 1699년 북경 최고 지위의 예수회 선교사였으며, 1700년에는 전체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선교 사였다. Henri Cordier, “Cinq lettres inédits du Père Gerbillon, S. J.”, T’oung Pao, second series 7: 4, 1906, p.438.

50) Catherine Jami, op. cit., 2008, p.53.

51)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강희제 곁에 머물지 못하게 된 퐁타니는 르콩트와 함께 南京에서 5년을 보내야만 했다. 이후 퐁타니 도 강희제 곁에서 천문학 관련 활동을 했지만, 그는 강희 43년(1702) 귀국했다. 당시 퐁타니와 르콩트가 강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페루에서 수입한 키니네를 헌상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이 무렵 예수회의 선교 활동이 단지 프랑스 왕 립과학원(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의 후원이 아닌, 전 세계적인 예수회 조직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Catherine Jami, op. cit., 2008, p.55 참조.

52) Catherine Jami and Han Qi, “The Reconstruction of Imperial Mathematics in China during the Kangxi Reign (1662~1722)”, Early Science and Medicine 8: 2, 2003, p.93.

53) 󰡔증거󰡕, 18쪽

54) Catherine Jami, op. cit., 2008, pp.64~65.

55) Catherine Jami, op. cit., 2008, p.67 참조. 강희제가 서양학문에 열중한 이유는 휘하 관리와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열 망 때문이었다.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Catherine Jami, “Imperial Control and Western Learning:The Kangxi

(12)

셋째

,

위 두 사실로 미루어 볼 때

,

강희 연간 선교사들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중국의

세속사

에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당시 프랑스의 일반 대중들도 중국의 상품이나 생산물에 대한 소개를 매우 반 기는 한편

,

56) 그것을 종교나 포교의 본질과는 별도로 생각했다

.

중국에서 돌아와 부이용 공작부인

(Duchess of Bouillon)

에게 중국 도자기의 우수성을 소개한 내용이 포함된 르콩트의 저서를 소르본 신학자들은 종교 적으로 매우 해악하다고 판단했지만

,

이미

10

개 이상의 판본으로 번역

·

출간되었다

.

이것은 당시 일반 대중 들이 소르본 신학자들의 종교적 검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57)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세속적인 관점은 거의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 포교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장과 매우 달랐다

.

인도에서도 선교 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지만

,

그 궁극적인 관심은 종교 문제에 머물 러 있었던 반면

,

58)중국 선교사들의 관심이 포교에서 중국의 엄청난 富와 제도

,

영토 등에 관련된 매우 세속 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

59) 아울러 선교사들 대부분이 당시 학문과 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프랑 스 왕립과학원

(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의 일종의

파견자

(correspondants)’

60)라는 점에서 선교사 들의 정치적 입장도 자유롭지 않았다

.

결국

,

󰡔서술󰡕의 편찬은 이런 분위기를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

이 점과 관련해

,

뒤 알드는 꽤 분명한 태도 를 보여준다

.

󰡔서술󰡕의 맨 처음을 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중국에 관해 현재까지 알고 있는 지식은 전혀 불완전해서, 흥미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를 자극하는 데 사용된다. 이 때문에 나는 수년전부터 쉬지 않고 이 위대한 제국과 현재 제국에 합병된 만주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61)

이 문장에 뒤 이어 그는 거의

30

년 동안 북경과 각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귀국 후 자신의 원고를 엄밀히 읽고 철저한 비평을 가했다고 서술했다

.

전체적으로 볼 때 󰡔서술󰡕은 뒤 알드를 포함한 그 참여자들이 초기 단계의 중국 선교에서 일종의 선지자로 서보다 학자로서 성공을 거둔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의 전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

62)이런 점에

Emperor’s Performance”, Late Imperial China 23: 1, 2001 참조.

56) 18세기 당시 이러한 상황은 Henri Cordier, La Chine en France au XVIIIe siècle 1910 참조.

57) Anne Gerristen and Stephen McDowall, “Material Culture and the Other:European Encounters with Chinese Porcelain, ca. 1650~1800”, Journal of World History 23: 1, 2012, p.101.

58) 이 문제에 대해서는 Iñes Zupanov, “Le repli du religieux:Les missionnaires jésuites du 17e siècle entre la théologie chrétienne et une éthique païnne”,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51: 6, 1996 참조.

59) 초기 선교사들의 이러한 관심은 마이클 에이더스 저·김동광 역,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산처럼, 2011, 108~119쪽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안에는 중국의 기술 수준에 대한 유럽인들의 회의와 비판도 동시에 들어 있지만, 건륭 58년(1793) 熱河를 방문한 매카트니(Macartney) 卿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인들은 중국 생산품에 대해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일종의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Anne Gerristen and Stephen McDowall, op. cit., 2012, pp.110~111.

60) James E. McClellan III, “The 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699~1793:A Statistical Portrait”, Isis 72: 4, 1981, p.542. 당시 왕립과학원 구성원들 중 32.4%가 수학에 대해, 그리고 58.5%가 지도학이나 수리학을 포함한 물리학에 관심 을 가지고 있었다는 지적도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좋은 시사를 던져준다. 그의 논문, 559쪽 참조.

61) 󰡔서술󰡕 권1, 1쪽.

62) 물론 마테오 리치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청초 선교사들이 마테오 리치의 補儒論처럼 이론적 토대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13)

서 란드리 – 드롱처럼 강희

~

옹정 연간 선교사들의 활동을 지나치게 교리 문제와 결부시키는 건 당시 선교사 들의 관심을 제한적으로 파악할 우려가 있다

.

63) 오히려 선교사로서의 임무와 과학자로서의 역할 사이의 긴 장감이 더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지만

,

이 문제는 중국 선교 방식이라는 전체적인 틀에서 아직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

Ⅲ. 󰡔서술󰡕에 드러난 18세기 프랑스 중국학의 단면

1. 󰡔서술󰡕에 등장하는 중국의 이미지

󰡔서술󰡕에 앞서 출간된 마르티니의 󰡔중국사󰡕64)에서 알 수 있듯이

, 17

세기에 출간된 중국 관련 저서들은 대부분 유학이라는 단일한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

일부 여행기가 있긴 하지만

,

󰡔서술󰡕의 방대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

󰡔서술󰡕은 분명히 당시까지 존재한 중국 관련 내용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저서다

.

그러므 로 여기서는 당시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

,

그리고 제

2

권에 등장하는 󰡔福惠全書󰡕를 토대로 중국 사료 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65)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주제로 택한 이유는 선교사들이 많은 곳에서 유럽이나 프랑스를 중국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

66)이렇게 볼 때

,

당시 그들이 가장 흥미롭게 본 건축물은 역시 만리장성이 아니었을까

?

선교 사들은 만리장성을

北直隸

,

山西

,

陝西의 세 省에 걸쳐 있으며

,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서있을 뿐 아니라

, (

장성 축조

)

와 동일한 비용이 소요된 일련의 군사 요충지로 방비를 튼튼하게 한 이러 한 종류의 축조물을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67)고 언급했다

.

따라서 선교사들은 만리장성을 직 접 답사해 그 높이와 전략적 의의를 기록했지만

,

그런 만리장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들의 능력과 선 의

(vertu)

가 없다면 만주족의 중국 점령을 통해 알 수 있듯이

,

무용지물이라는 의견을 동시에 적었다

.

68) 그 들이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관심을 보인 또 다른 건축물은 자금성이었다

.

69)

물음은 남는다.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에 대해서는 안대옥, 「마테오 리치(利瑪竇)와 補儒論」, 󰡔東洋史學硏究󰡕 106, 2009, 143~144쪽 참조.

63) 그러므로 일부 연구자들은 1630~1666년 사이 선교사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Catherine Jami and Antonella Romano, “Observer, vénérer, servir:Une polémique jésuite autour du Tribunal des mathématiques de Pékin”,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59: 4, 2004, p.736 참조.

64) 라틴어로 기술된 Sinicae Historiae dicas prima라는 제목의 책을 루이 – 앙투안 르 플르티에(Louis-Antoine Le Peletier) 가 1692년 Histoire de la Chine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했다.

65) 란드리 – 드롱은 번역 자체 문제보다는 󰡔서술󰡕에 등장하는 중국 텍스트의 출처를 밝히는 데 좀 더 주력했다. 󰡔증거󰡕, 제6장 참조.

66) 󰡔서술󰡕 권1, 91쪽; 󰡔서술󰡕 권1, 103쪽; 󰡔서술󰡕 권1, 185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수시로 중국의 풍경이나 물산을 유럽이나 프랑스와 비교했다.

67) 󰡔서술󰡕 권1, 125쪽. 68) 󰡔서술󰡕 권1, 126쪽. 69) 󰡔서술󰡕 권1, 257~273쪽 참조.

(14)

한편

,

당시 선교사들이 소수민족 지역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

물론 소수민족 존재의 역사 적 의의 대신

,

대체로 이들 지역의 물산과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금

,

묘 족의 말이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는 언급 등이 그러한 예이다

.

70)아울러 그들의 복장이나 관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

71) 일찍부터 시작된 프랑스인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이후 프랑스의 중국 연구 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

72)

분량이 많으며

,

통일성도 결여된 위와 같은 종류의 서술을 모두 언급하는 건 무의미하다

.

그러나 중국의 번영과 생산품에 관련해 선교사들이 느낀 지역 차이

,

그리고 정치와 종교라는 주제는 그들의 중국 인식을 확 인할 수 있는 좋은 예라는 점에서 실례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우선 발전 지역에 해당하는 江蘇省 松江 府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

“송강부 관할 縣은 네 개에 불과하지만,73) 매우 비옥하고 부유하다. 이 지역이 행정 등급으로는 세 번째 등급(府)에 해당되지만, 그 규모, 1년 내내 모든 지역에서 몰려드는 엄청나게 많은 상인들, 그리 고 여기서 행해지는 다양한 종류의 상업 덕분에, 가장 훌륭한 곳에 비견될 수 있다. 上海縣이 그러한 데, 福建의 선박이 이곳으로 계속 들어오며,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역시 많은 선박들이 밖으로 나간 다.”74)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종류의 번영과 감탄은 대체로 장강 하류 지역의 도시에서 동일하게 등장하며

,

杭州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곳의 유명한 상품인 비단을 거론하기도 한다

.

75) 한편

,

중국이 당시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상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원인은 중국인의 기술이 아닌 중국에서만 생산되는 원료에 있다는 언급도 주목할만하다

.

76)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의 물질적 풍요가 유 럽을 능가한다고 파악했다

.

그 좋은 예가 퐁타니 일행이

1687

11

26

일 영파를 떠나 북경으로 가는 여행 기에 등장한다

.

그들은 운하를 이용한 까닭에

,

명대 이래 경제가 가장 발달한 장강 하류 지역을 통과했는데

,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

70) 각각 󰡔서술󰡕 권1, 109쪽과 157쪽.

71) 󰡔서술󰡕 권1, 154~155쪽. 라라족에 대한 관심은 Henri Cordier, “Les Lolos:Etat actuel de la question”, T’oung Pao 8: 5, 1907에 잘 나타나 있다.

72) 󰡔서술󰡕 출간 후 정확하게 50년 뒤에 등장한 Abbé Grosier의 Description générale de la Chine ou Tableau de l’état actuel de cet empire, Paris, Moutard, 1785의 권2(première partie), “중국 변방민족(De la Tartarie chinoise)”이 그러 하다. 이런 점에서 이미 1970년대 프랑스에서 중국소수민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등장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클로딘 롱바르–살몽 저·정철웅 역, 󰡔중국적 문화 변용의 한 예:18세기 귀주성󰡕, 세창, 2015 참조. 73) 淸初 松江府는 南直隸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는 華亭縣, 上海縣, 靑浦縣을 관할했지만, 順治 2년(1645) 江南省을 설치하고 화정현의 일부를 떼어 婁縣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글은 順治 연간의 기록이다. 牛平漢 主編, 󰡔淸代政區沿革綜表󰡕, 中國地圖 出版社, 1990, 124쪽.

74) 󰡔서술󰡕 권1, 287쪽. 75) 󰡔서술󰡕 권1, 347쪽.

76) 이를테면 중국 도자기가 훌륭한 이유를 그들은 도자기 제조에 사용되는 물을 들고 있다. 󰡔서술󰡕 권1, 303쪽.

(15)

“紹興과 거의 杭州 일대까지, 가옥과 촌락이 연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장기간) 영속된 도시처 럼 생각되었다. 이 지역 농촌과 도시의 가옥은 다른 일부 도시의 일상적인 가옥보다 좀 더 매끈하게 세워졌으며 그 상태가 잘 유지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마을들은 유럽 마을의 흔한 풍경보다 더 예쁘고, 쾌적하다.77)

발전 지역에 대한 묘사가 이처럼 많은 인구

,

상품

,

잘 정비된 거리 등에 초점을 맞춘 반면

,

변방 지역에 대한 묘사는 험난한 지형 때문에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

,

그리고 천연자원에 집중되어 있다

.

廣西省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

“광서성은 그 규모, 아름다움, 상업에 있어 대다수 다른 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 되어 있 다. 광서성에는 여러 개의 큰 하천이 흐르지만, 지세가 평탄하고 기후가 온난한 동부와 남부 하천 유역 일대만 개발되었을 뿐이다. 남쪽 지역 대부분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산들이 차지하고 있다……광서 성에는 모든 종류의 광물, 특히 금과 은이 매장되어 있지만, (광산 개발)에 따른 소요가 발생할지 몰라 중국 당국은 항상 禁礦 조치를 취했다. 산맥을 따라, 金鑛, 주석광, 동광, 납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 래전부터 알려져 있다.”78)

이런 종류의 서술을 운남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

그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

그들은 사금

,

白銅

,

대리석 에 대한 특산물을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설명한 반면

,

이 지역 사람들의 심성을 언급하고 있다

.

“省都는 쾌적하고 비옥하다. 대지는 낮은 구릉 있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대부분 평야지대와 닿아 있다. 물이 매우 맑으며, 기후도 온화하고, 운하가 건설된 덕분에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좋은) 성품과 자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군사 업무와 농업으로 나눠 사용한 다. 이곳의 말들은 작지만 용맹하고 튼튼하다. 靑石과 대리석이 산출되며, 장미나무가 존재한다.”79)

그러나 이런 천연자원이나 착한 심성과 병렬해

,

그들은 운남성의 낙후된 경제 상황을 동시에 지적한다

.

다 음 글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

“무엇보다 현재 운남의 省都는 그 물산의 풍부함에 비한다면 유명세는 없는 편이다. 상점에는 물건 이 고루 갖춰 있지 않으며, 부유한 상인도 드물고, 건물도 초라하며, 다른 省의 省都와 비교해도 사람 들 사이의 경쟁이 심하지 않다.”80)

77) 󰡔서술󰡕 권1, 168쪽. 78) 󰡔서술󰡕 권1, 433쪽. 79) 󰡔서술󰡕 권1, 443쪽. 80) 󰡔서술󰡕 권1, 442쪽.

(16)

이처럼 발전 지역과 변방 지역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지만

,

공통적으로 그들은 중국이 매우 방대한 나 라이며

,

상품과 특산물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나라라는 사실을 곳곳에서 피력했다

.

결국 중국이라는 공간의 광대함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과 함께

,

사실상 중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

81)

반면 정치와 관련된 서술은 묘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

이 사실과 관련해 퐁타니 일행이 거의 북경에 도착 해서 겪은 일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멈춰 있는 동안, 한 사람이 다가와 내 가마의 문을 열고 황제에게 바칠 조공품을 가져왔는 지 물었다……사방이 사각형으로 믿고 있는 중국인들은 중국이 그 사방에서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은 자신의 제국을 지칭할 때, 하늘 아래라는 뜻의 天下라는 말을 사용한다……지리 체제에 대해 이처럼 놀라운 선입견을 가지고 있 는 그들은 四方 안에 있는 여타 사람들을 구분해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그들을 조공국으로 인정해주는 엄청난 명예를 그들에게 부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것이 지식인이건, 선물이건 혹은 사신이건 간에, 외국에서 온 모든 사람과 물건들은 모두 복종의 표시이자 조공으로 간주한다……유럽의 왕국이 지식인 은 물론, 선교사, 상인 혹은 그 밖의 다른 경로를 통해 왕국의 이름으로 선물을 보내지 않으려 조심하 는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보내는 왕국은 그 즉시 중국의 조공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82)

위 인용문은 그들이 조공제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

당시 자신들을 그런 외교적 틀과 별도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또한 바로 뒤이어 일등 조공국으로 당시 조선을 거론하고

,

뒤이어 일본을 들고 있다는 점 은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천하관을 오히려 저항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

이처럼 선교사들이 제도와 실제 운용상의 괴리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

중국의 당시 정치 현실에 대한 묘사에서도 그런 한계가 등장한다

. 6

部를 모두 법원에 해당하는 트리뷔날

(tribunal)

로 번역한 게 대표적인 예이다

.

보통 법정이나 법관을 지칭하는 이 단어를 선교사들은 모 든

6

부와 그 휘하 관청의 번역어로 사용했다

.

83)이런 용어상의 오류와 함께

,

국정을 설명하는 대목은 아무래 도 그들이 그 외양만을 관찰한 듯하다

. 6

부 운용의 한 예를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황제 휘하의 이 6부는 황제가 國事를 (내려)보내 그들에게 토론을 명령하거나, 그 시행을 위임했을 때만 국사에 간여한다. (국사를 처리할 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는 자금, 병력, 관료, 장비를 정해진 시간에 갖추기 위한 공동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각부는 자신의 관할업무에 만 간여하며, 꽤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84)

81) 󰡔서술󰡕 권1, 85쪽.

82) 󰡔서술󰡕 권1, 198~199쪽. 굵은 글씨는 필자 표기.

83) 󰡔서술󰡕 권1, 268쪽. 그들은 欽天監을 Tribunal des mathématiques라 번역했음은 물론, 거의 모든 관직을 트리뷔날로 번 역하고 있다. 󰡔서술󰡕 권1, 70~71쪽.

84) 󰡔서술󰡕 권1, 268~269쪽.

(17)

이 서술은 분명 중대 사안과 일상적인 사안의 처리 방법에 대한 차이점을 논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되지 만

,

황제의 명령이나 위임이 있을 때만

6

부가 반응한다는 언급은 당시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설명이다

.

또한 중국의 역사 서술과 특히 연대기를 기독교 연대를 토대로 설명한 점도 중국 역사의 해석에 적지 않 은 오류를 가져왔다

.

일단 중국 최초 황제들의 생애와 그 존속 기간이 성서에 등장하는 인간의 탄생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

85) 나아가 중국의 전체 연대기가 초기 성서 번역서인

70

인 聖書 번역에 등장하는 연대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

이 부분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

“중국의 연대기가 70인 공동번역 성서(Septante)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이 성서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부터 예수 (등장)까지 3258년이다. 중국인들의 건국 始元을 거 슬러 올라가면, 예수 탄생 이전에 2357년을 통치한 堯 임금 시대와 정확히 일치하며, 따라서 이후 노 아의 홍수 시기부터 요 임금 시기까지 900년 이상이 지났다고 할 수 있다.”

뒤이어 그들은 노아의 후예들이 대홍수가 발생한

200~300

년 이후 중국에 들어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

이처 럼 중국의 모든 연대를 기독교 연대와 동일시하는 건 분명 비역사적인 태도다

.

물론 이런 기도교적 발상에도 불구하고

,

이후 서술된 각 시기별 황제들에 대한 시간 기록은 대체로 정확하다

.

그러나 적어도 淸初 황제들의 경우

,

기독교에 대한 정책이나 선교사들에 대한 환대의 차이를 토대로 해당 황제들의 성격을 규정했다

.

따라 서 선교사들에게 비친 가장 위대한 황제는 당연히 康熙帝였다

.

선교사들은 강희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제국의 통치자로서 매우 바쁜 황제는 자신이 특별한 취향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과학에도 여전히 시간을 할애한다. 그는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중국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과학, 다시 말해 기하학, 대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해부학을 배우기를 원했다. 신부 제르비옹, 부베, 토마스는 만주어로 교재를 만들어 북경(의 궁정)이나 別宮에서 하루 두 차례 황제에게 (그러한 학문)을 가르치느 라 여러 해 동안 바쁘게 보냈다.”86)

강희제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

학습 능력을 갖춘 제왕일 뿐 아니라

,

국정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

공평무사

,

검약을 시행한 聖君이었다

.

강희제에 대한 이런 서술에 비하면

,

옹정제에 대한 언급은 선교사들에 대한 雍正帝의 박해 실상과 그의 독재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

그들은 옹정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과학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선교사들 없이 생활하고자 했던 옹정 제는 선교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드러내는 것에 그쳤다……나아가 옹정제는 자신이 전념한 국정 에 열정을 다했다. 그는 확고부동하고 단호했으며, 上奏文에 즉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몸소 국정 전반을 담당했다. 따라서 옹정제보다 더 두렵고 절대적인 군주를 만나기는 어렵다.”87)

85) 성서와 연대기를 연결해서 서술한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위 내용은 󰡔서술󰡕 권1, 460~461쪽 참조. 86) 󰡔서술󰡕 권1, 742쪽.

(18)

종합하자면

,

󰡔서술󰡕에서 드러나는 중국관은 일단 중국의 지리와 풍부한 물산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

중국 행정 체제에 대한 호기심과 그 효율성을 자세히 묘사했다

.

한편

,

논의를 제한하기 위해 󰡔서술󰡕에 등장하는 중국의 포교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중국인의 인식을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

적어도 마테오 리 치 이래 성립한 중국 상층부에 대한 포교의 중요성이 󰡔서술󰡕에서도 그대로 등장한다

.

88) 나아가 일반인에 대 한 포교도 중시했던 사실89)을 고려하면

, 17~18

세기 유럽 선교사들의 뇌리에는 이 거대한 제국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다는 잠재적 인식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

그런 점에서 선교사들의 포교에 대한 관심이 󰡔서술󰡕

전반에 여전히 등장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2. 󰡔서술󰡕의 󰡔福惠全書󰡕 번역

󰡔서술󰡕에는 주로 經書와 함께 소설이나 奏疏類가 텍스트로 등장하지만

,

󰡔복혜전서󰡕90)가 官箴書91)라는 이 유 때문에 이 책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

󰡔서술󰡕에 번역된 󰡔복혜전서󰡕의 내용은 주로 교육제도 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

앞서 설명한 당시 선교사들의 중국 제도에 대한 인식과 비교가 가능하다

.

14

部로 구성된 󰡔복혜전서󰡕에서 刑名府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

이 책의 의도는 백성들의 행복 자체보다는 관리들에게 실질적인 통치 방법을 언급하는 데 있었다

.

하지만 󰡔서술󰡕에서 이 책 의 제목을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

(L’art de rendre le peuple heureux)

󰡕이라고 번역한 건 분명 黃六鴻의 서문 때문이다

.

황육홍은 自序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대체로 이런 책은 정치에 관련된 일을 (밝히고 있다)……‘福’라는 말은 복을 만드는 마음(造福之心) 이란 의미이다. ‘惠’라는 말은 은혜를 베푸는 일(施惠)을 말한다. 무릇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져야, 이후 그런 일(福慧)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 사람들은 먼저 지방에 복을 가져와야 한다는 마음을 반드시 지녀야, 이후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92)

따라서 황육홍의 이런 언급과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

이라는 번역은 상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

그러 나 󰡔복혜전서󰡕의 「敎養府」와 「學規儀注」를 번역

·

발췌한 부분은 매우 혼란스럽게 구성되어 있다

.

이 부분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87) 󰡔서술󰡕 권1, 747~748쪽.

88) 이런 사실이 잘 드러나 있는 󰡔서술󰡕 권1, 37~38쪽 참조.

89) 이점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일화는 유럽으로의 파견 명령을 받은 부베 신부가 북경에서 광동으로 내려갈 당시인 강희 32년 (1693), 그가 강서성 南昌府에서 만난 한 스님과의 대화이다. 부베 신부는 그 스님이 심지어 자신이 섬기는 신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조차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천주의 존재와 그 주요 속성을 그에게 가르쳤다고 기록했다. 󰡔서술󰡕 권1, 235쪽 참조. 90) 이 판본은 四庫未收書輯刊編纂委員會編, 󰡔四庫未收書輯刊󰡕, 北京出版社, 2000의 권30에 수록된 󰡔福惠全書󰡕이다. 91) 역대 관잠서의 출간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김형종, 「명·청 시대 중국의 관잠서 – 황육홍(黃六鴻)과 󰡔복혜전서(福惠全

書)󰡕를 중심으로」, 󰡔다산과 현대󰡕 7, 2014 참조. 92) 󰡔福惠全書󰡕, 「自序」, 1쪽 상.

(19)

“옛날 중국에는 일부 가족에게 ‘塾’이라 부르는 곳과 (가족보다) 좀 더 넓은 범위에는 ‘庠’이 있었는 데, 이 두 곳은 제국의 청년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목적으로 세워졌다. 庠에서는 우수한 자질을 가진 지 식인들(lettrés)이 (학문)을 완성시킨다. 그것이 鄕學으로서, (학문을) 완성할 수 있는 드문 자질을 지 닌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지식을 가늠해 儒學班의 입학 허가를 얻은 사람 들이 이곳에서 젊은 학도들을 위한 교육에 입문한다.”

“현재 궁정과 모든 마을에는 학문을 가르치는 기구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학문을 통해 분명 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날 많은 장점과 놀랄만한 변화에 향촌민들을 참여시키고자 하는 게 짐의 의도이 다. 이런 이유로 관리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향촌에 학교를 세우도록 했으며, 유능한 선생을 보내는 데 유념하도록 했다. 官이 인정해 준 이들 유능한 선생들은 어디서든 아이들에 대한 첫 번째 주요한 업무 가 교육이며, 교육에 탁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93)

이제 위 인용문에 해당하는 황육홍의 원문을 보기로 하자

.

“옛날 家에는 塾이, 黨에는 庠이 있었던 까닭은 백성들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 가운데 뛰어난 사람은 鄕學에서 庠序로 옮기도록 했으니, (이는) 현재 童子試를 통해 頖宮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해당 관청에게 다시 社學을 설치하고 유학을 공부한 선생을 초빙해 민간의 子弟를 가르 치도록 명령을 내리셔야, 백성들을 선도하고 풍속을 순화시킬 수 있는 옳은 (방법)을 기대할 수 있습니 다. 사학 설치와 유학을 공부한 선생의 초치는 모두 해당 관청에게 그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94)

번역에서 늘 발생하는 언어등가의 문제를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

󰡔서술󰡕에 등장하는 번역과 원문 사이에 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95) 먼저 有司

,

,

童生

,

鄕學과 庠序와 같은 중국 고유의 언어를 잘못 번역하거나

,

어정쩡하게 넘어간 게 그러한 예이다

.

다음으로는 과거제도와 관련된 용어나 단계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

물론 해당 원문을 축약시켜 번역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

童子

(

童生

)

가 생원에 합격해 학교로 정식 들어가는 과정 부분을 자세히 번역하지 않은 점과

,

社學을 궁정에 있는 시설로 파악한 점을 보면 이 문장을 번역한 당트르콜96)은 분명히 중국 과거제도의 실상을 잘 몰랐다고 판단 할 수 있다

.

93) 위 두 인용문 모두 󰡔서술󰡕 권2, 477쪽 참조.

94) 󰡔복혜전서󰡕 권25, 「敎養部」(立義學), 11쪽 하~12쪽 상. 이 부분은 대조를 위해 원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古 者, 家有塾, 黨有庠, 所以敎民之子弟爲學也. 其有秀異者, 移鄕學于庠序, 猶今之童子試而入于頖宮也”이며 두 번째는 “……宜 令有司更置社學, 延師儒以敎民間子弟, 庶可導民善俗則是. 置社學延師儒, 皆有司責也”이다.

95) 일례로 󰡔서술󰡕 권2, 「비단」의 도판은 실제로 비단을 짜는 모습이 아닌 면포를 짜는 모습이다. 각각 󰡔서술󰡕 권2, 416쪽과 徐光啓, 󰡔農政全書󰡕 권35, 979쪽 참조.

96) 󰡔증거󰡕,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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