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7.26.4.045
1. 서 론
법주사 원통보전은 1647년(순치 4, 정해)에 건립한 전 각이다.
1)
정면과 측면 모두 3칸 크기의 정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지붕은 사모지붕이다. 공포 구성은 일반적 인 조선시대 전각과 차이가 있다. 개별 공포는 전형적인 다포식으로 구성했지만 주간포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주 상포만을 사용했다.처마 구성에서도 다른 조선시대 전각과 큰 차이를 보 인다. 법주사 원통보전
의 처마는 부연을 사용 하지 않고 장연만을 노 출시킨 홑처마다. 이런 경우라면 추녀부도 추녀 하나만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법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보은군·문화재청, 법주사 원통보전 실측·수리 보고서, 2010
주사 원통보전은 추녀부에 2개의 부재를 사용한 특징이 있다. 즉 처마는 전체적으로 홑처마로 구성했지만 추녀 부분에 있어서만은 겹처마 형식을 하고 있다. 포집이면서 홑처마를 갖는 전각 중, 추녀부를 2개의 부재로 구성한 사례는 법주사 원통보전을 제외하면 쉽게 찾기 어렵다.
법주사 원통보전의 독특한 건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법주사 원통보전과 같이 홑처마이면서 추녀부를 2개 의 부재로 구성한 경우, 각 개별 부재의 명칭을 어떻게 부르는 지에 따라 서로 다른 2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추녀와 사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다.
처마는 사변 모두 부연을 쓰지 않은 흘처마지만 네 귀에 는 추녀뿐 아니라 사래까지 갖추었다. 부연이 없는 집은 사래를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통보전은 사모지 붕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입면 구성상 지붕이 너무 답답하게 내리 누르는 듯한 느낌을 줄 우려가 있어 네 귀를 들어올려 균형을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2)
2)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건축: 한국건축사연구자료 제18호, 1996, 44쪽
조선후기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갖는 건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ingle Eaves Buildings Constructing Sarae in the Late Joseon Dynasty
이 연 노*
1)
Lee, Yeon-Ro(공학박사)
Abstract
This thesis mainly deals with the meaning of single eaves buildings which have Chunyeo with Sarae. As a rule, building with single eaves does not construct Sarae. But we can find some special buildings using Chunyeo with Sarae in the corners of the eaves. At this time, many people say that lower part of the member so called Alchunyeo, and upper part of the member so called Chunyeo. And they also say that the using of Alchunyeo was caused by the shortage of timber which can make Chunyeo properly.
As a result, single eaves buildings using Chunyeo with Sarae in the corners of the eaves were not caused by the shortage of timber. That kinds of buildings were made by the hierarchy of building. Single eaves buildings with Sarae have lower rank than double eaves buildings, and also have higher rank than those without Sarae.
And we have to say that lower part of the member is Chunyeo, and upper part of the member is Sarae.
주제어 : 겹처마, 홑처마, 추녀, 사래, 알추녀
Keywords : Double eaves, Single eaves, Chunyeo, Sarae, Alchunyeo
그림 1. 법주사 원통보전 추녀
하부에 사용한 부재를 추녀, 상부에 사용한 부재를 사 래라고 칭했다. 홑처마이면서 처마를 2중으로 구성한 것 은 지붕의 앙곡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라고 기술했 다. 또 다른 하나는 알추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다.
추녀는 조로 곡선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춤이 충분히 높아야 한다. 그러나 조로 곡선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 로 큰 단면 높이를 지닌 부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추 녀는 휜 부재를 활용한다. 그래도 조로 곡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목재를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추녀 아래에 부재 하나를 덧댄 위에 추녀를 올려놓는다. 이때 아래에 덧댄 추녀를 알추녀라 부른다.
3)
이 경우는 하부에 사용한 부재를 알추녀, 상부에 사용 한 부재를 추녀라고 칭했다. 알추녀를 사용한 이유는 추 녀곡에 맞는 부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 고서를 포함한 각종 건축서적에서는 알추녀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현상에 대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 용하고 있다. 또 이렇게 처마부를 구성한 것에 대한 해 석도 각각 다른 양상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홑처마 이면서 추녀부에 2가지 부재를 사용한 경우 각각의 부 재를 어떻게 칭해야 할지 고문헌에 표기된 사례를 통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후 홑처마이면서 추녀부에 2가지 부재를 사용한 다 양한 유형의 건축물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인 경 우와 다르게 처마부에 또 다른 부재를 추가해서 건물을 구성한 것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고 판단된다. 다양한 건축 사례 검토를 통해 이와 같은 추녀부 구성이 앙곡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함인지 또는 적합한 추녀재를 구하 지 못한 결과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부재의 명칭: 알추녀와 사래
알추녀[卵春舌]라는 용어는 중화전영건도감의궤와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도설 중화전척량에 등장하는 용어다. 조선 말에 이르러 거대한 전각을 짓고자 할 경 우 합당한 추녀재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의 부재로 추녀를 만들려면 길이도 길어야 할 뿐만 아니라, 추녀곡에 맞는 매우 굵은 목재 또는 휜 목재가 필요했다. 이런 까닭에 몇 개의 부재를 합성해서 추녀부 를 구성하는 방법이 고안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3) 김도경,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현암사, 2011, 261쪽
그림 2. 중화전 추녀도
(문화재청, 중화전 실측·수리보고서, 2001)
에 창덕궁의 인정전, 경복궁의 근정전, 경회루, 경운궁의 중화전, 중화문, 대한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경운궁 중화전의 경우 적합한 추녀재를 구하기 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장역기철 1905년(을사) 3월 10일자 기록에는 적합한 추녀재를 찾기 위해 편수 2 명이 동래 범어산성, 양주 설령(雪嶺), 광주 헌릉(獻陵)을 다녀와 여비를 지급한 내용, 4월 23일에는 강원도의 인 제, 춘천, 전라도의 무안, 나주, 함평, 완도, 4월 25일에는 수원, 양주 당창리 치설령을 다녀와 여비를 지급한 내용 이 기록되어 있다.
4)
최종적으로 중화전의 추녀재는 파주 소령원(昭寧園)에서 구했다.5)
하지만 이곳에서 구한 재 목 역시 중화전의 추녀곡에 부족한 것들이었다. 그 결과 중화전의 추녀부는 총 4개의 부재를 조합해서 만들었다.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중화전의 추녀부에 대해 다음 과 같이 기록했다.
추녀[春舌] 4개 각 길이 35자 폭1.2자 덧추녀[加春舌] 4개 각 길이 35자 폭1.2자 사래[沙乃] 4개 각 길이 16자 폭1.2자 알추녀[卵春舌] 4개 각 길이 23자 폭1.2자
현재의 건물과 비교하면 추녀부 최하단에 위치한 부재 가 알추녀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알추녀는 추녀곡에 적 합한 목재를 구하지 못했을 때 추녀곡을 보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한 부재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창덕궁의 인정전, 경복궁의 근정전, 경회루, 경 운궁의 중화전, 중화문, 대한문은 모두 겹처마 건물이다.
과연 법주사 원통보전과 같이 홑처마인 경우에도 알추녀 라는 용어가 적합한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홑처마이면서 추녀부에 2개의 부재를 사용한 사례가
4) 장역기철, 8권, 1905년(을사) 3월 10일; 장역기철, 9권, 4월 23일
· 4월 25일
5) 장역기철, 5권, “甲辰十二月十五日 昭寧園所在 中和殿春舌八介斫
伐時匠募雇價合錢陸百拾參兩陸戔上下事”
조선 왕릉에서 발견된다. 효종(孝宗) 영릉(寧陵)의 재실 중에서 안향청(安香廳)이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했다.
영릉 안향청은 1659년(현종 즉위)에 처음 만들어져, 1673 년(현종 14)에 천봉하면서 1차 이건됐고, 1674년(현종 15)에 인선왕후 능을 조성하면서 2차로 이건된 건물이다.
모두 산릉도감의궤가 전하고 있어 창건과 이건 과정에 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재실에 사용한 부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의궤는 1659년 (효종영릉)산릉도 감의궤와 1674년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다.
(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에 따르면 안향청은 인조(仁 祖) 장릉(長陵)의 어재실(御齋室)을 본 따서 만들었다.
6)
조성소 에는 안향청 6칸(4면팔작), 집사청 7칸, 전사청 8칸, 참봉청 6칸, 곳간 2칸, 행랑 12칸, 대문 1칸, 침가 2 칸을 포함해 총 47칸의 목물을 기록했다. 이 중 팔작지 붕을 하고 있는 것은 안향청이 유일하다. 부재 내용 중 에서 “衝椽四 樓柱四條, 舍羅四 材木二條”를 확인할 수 있다. 목부재 및 철물 기록에서 부연에 대한 언급은 없 다.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 조성소 에는 안향청 6칸(4면팔작), 집사청 6칸, 전사청 9칸, 허청 6칸, 참봉청 6칸, 행랑 14칸, 침가 2칸, 1칸문 4좌를 만드는 데 사용 한 목부재를 기록했다. 이들 부재 중에서 “衝椽四 樓柱 四條, 蛇羅四 材木二條”를 확인할 수 있다. (효종영릉) 산릉도감의궤와는 사래의 표기 방법에서만 차이를 보 이고 있다. 두 의궤에서 알추녀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사래만 등장한다. 이를 통해 당시에는 영릉 안향청 추녀 부 목부재에 대해 하단을 추녀, 상단을 사래로 인식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이후에도 조선 왕릉의 안향청은 영릉과 같은 모습으 로 조성됐다.
7)
1674년에는 숭릉(崇陵)의 안향청을 만들 었다.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에 숭릉 안향청은 영릉 안향청 제도를 따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조성 소 재실에 사용한 목부재 기록에서 “衝椽四 中不等四 條”라는 기록만 보일 뿐, 사래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철물을 기록한 부분에는 “舍羅項朴只一尺釘 四箇, 尾朴 只九寸頭釘 四箇, 加叱防朴只八寸頭釘 八箇”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1681년 인경왕후 (仁敬王后) 익릉(翼陵)은 숭릉의 제도를 따라 만들었고, 1688년 장렬왕후(莊烈王后) 휘릉(徽陵) 역시 숭릉의 제 도를 따라, 1701년 인현왕후(仁顯王后) 명릉(明陵)은 익6) 우희중·김동욱, 조선후기 왕릉재실의 변천과 여주 영릉 재실의 건 축특성 연구 , 건축역사연구, 18권, 3호, 2009.6.
7) 1757년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 이후부터는 안향청의 형태에 변화가 있었고, 더 이상 사래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3. 영릉 안향청(좌)과 장릉 비각(우) 추녀
릉의 제도를 따라 안향청을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 목부 재 기록에 사래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철물 부분에서는
“舍羅項朴只一尺釘 四箇, 尾朴只九寸頭釘 四箇”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일관되게 목부재에 사래를 기록하지 않 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철물 기록을 통해 계속적 으로 사래가 결구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추녀부를 구성하는 부재에 대해 하단에 위치한 것을 추녀, 상단에 위치한 것을 사래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홑처마이면서 추녀부에 2개의 부재를 사용한 사례는 조선 왕릉의 비각에서도 확인된다. 인조의 장릉, 효종의 영릉, 익종(翼宗)의 수릉(綏陵) 비각이 홑처마이면서 추 녀부에 2개의 부재를 사용했다. 이 중 문헌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 건물은 인조 장릉의 비각이다. 장릉 비각은 1731년(영조 7) 인조의 능을 현재의 위치로 천봉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인조장릉천봉)산릉도감의궤 조성소 신해년 6월 5일자 기록에 비각에 사용한 목부재를 기록 해 놓았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앞서 안향청과 마찬가지 로 사래가 보이지 않고 오직 추녀만 기록되어 있다. 하 지만 6월 10일자 비각에 사용한 철물 기록에 “舍羅㖙朴 只一尺釘 八箇, 舍羅朴只一尺釘 四箇八寸頭釘 四箇”라는 내용을 기록했다. 각각 ‘사래갓박이’, ‘사래박이’로 읽히는 부재다. 이를 통해 장릉 비각을 건립하면서 추녀부 하단 에 사용한 부재를 추녀, 상단에 사용한 부재를 사래로 인식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궁궐 및 궁집의 사례
3-1. 궁궐건축 (1) 의두합, 운경거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의두합(倚斗閤)은 “영화당 북쪽에 있는데 옛날 글을 읽던 자리다. 순조 27년 정해 즉 익종이 춘궁에 있을 때 고쳐지었다.”
8)
고 했다. 이를 통해 의두합과 운경거(韻磬居)가 1827년에 만들어진 것 을 알 수 있다. 의두합은 도리통 4칸, 양통 3칸이지만 규8) 倚斗閤 在暎花堂北舊讀書處基純宗二十七年丁亥翼宗在春邸時改建
그림 4. 의두합(좌)과 운경거(우) 추녀
모가 그리 크지 않은 소규모의 건물이다. 홑처마, 납도리 집이며, 단청을 칠하지 않았고, 지붕에 막새도 사용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하지만 추녀부에는 추녀에 더해 사래를 설치한 것이 독특하다. 건물에 사용한 추녀 길이 가 짧기 때문에 추녀곡에 맞는 목재 수급 때문에 추녀를 2개로 설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운경거는 1칸반짜리 면적을 갖는 건물로 현전하는 궁 궐건축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다. 의두합과 마찬가지로 홑처마, 납도리집이며,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추녀부에 사래를 사용했다. 건물에 사용한 추 녀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 추녀부에 사래를 사용한 것이 오히려 어색한 모습이다.
(2)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수강재는 1785년(정조 9)에 동궁의 일부로 만든 건물 이다. 1848년(헌종 14) 수강재 인근에 낙선재와 석복헌을 건립하면서 수강재를 하나의 영역으로 포함하는 중수가 이뤄졌다. 낙선재는 헌종의 거처로 삼았고, 석복헌은 후 궁 경빈김씨(慶嬪金氏), 수강재는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 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의 처소로 삼았다.
낙선재 일곽을 구성하는 건물 중에서 오직 낙선재 본 채만 겹처마로 만들었다. 그 외에 석복헌, 수강재, 행각 들은 모두 홑처마로 지어졌다. 석복헌에는 3개의 추녀 부가 있고, 수강재에도 3개의 추녀부가 있다. 그런데 석 복헌과 수강재의 추녀부는 추녀에 사래를 덧대 2중으로 구성했다.
석복헌과 수강재 본채만이 아니라 정면에 놓인 행각 역시 모든 추녀에 사래를 결구했다. 현재 낙선재 행각 역 시 추녀를 2중으로 결구한 모습이다. 낙선재 행각의 2개 추녀부는 근래에 복원하면서 새롭게 첨가한 것으로 추정 된다. 행각을 복원하면서 석복헌과 수강재 행각의 추녀부 형태를 참조한 결과로 판단된다.
낙선재 일곽을 구성하는 건물의 추녀부는 모두 추녀에 사래를 덧대 2중으로 구성했다. 추녀의 길이가 길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추녀재를 구하기 어려워 방편으로 사용했 다고 하기에 무리가 있다. 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 지는 행각도 추녀와 사래를 동시에 사용했다. 앙곡을 크
그림 5. 낙선재 배치도
(문화재청, 창덕궁 낙선재 일곽 정밀실측 조사보고서, 2016)
게 하려고 추녀에 사래를 덧대 사용했다고 추정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3) 연경당
연경당은 1865년(고종 2)에 중수하면서 현재의 모습 이 갖춰졌다.
9)
연경당은 사대부 주택과 마찬가지로 안 채와 사랑채 영역을 구분해 독립적인 공간을 갖도록 구 성한 특징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일견 하나의 건물 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 세부에서 안채 와 사랑채의 위계에 차이를 두었다. 사랑채는 굴도리와 장혀를 사용한 굴도리집이지만, 안채는 납도리 하나만 으로 구성한 납도리집이다. 남행각의 출입문에도 위계 에 차이를 두었다. 사랑마당으로 출입하는 장양문(長陽 門)은 솟을대문,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수인문(修仁門)은 평대문으로 만들었다.10)
그림 6. 연경당 앙시도
(주남철, 한국주택건축, 1980)
연경당 본채에는 총 7개의 추녀부가 있다. 이 중 사랑 채의 추녀부 4개는 추녀와 더불어 사래를 같이 사용했 다. 반면 안채의 추녀부 3개는 사래 없이 추녀만으로 추 녀부를 구성했다.
행각의 추녀 역시 사랑채 쪽과 안채 쪽에 차이를 두 었다. 연경당 전면에는 남행각이 있고, 남행각 바깥쪽에 는 외행각이 있다. 남행각에는 동쪽에 하나의 추녀부가 있고, 외행각에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의 추녀부
9) 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 건축역사연구, 13권, 1호, 2004.3.
10) 주남철, 연경당, 일지사, 2003
그림 7. 연경당 안채(좌)와 사랑채(우) 추녀
가 있다. 이들 중 사랑채 쪽에 위치한 2개의 추녀부는 추녀와 사래를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안채 쪽(외행각 서쪽) 추녀부는 사래 없이 추녀만 사용했다.
연경당은 굴도리와 납도리, 솟을대문과 평대문 같이 추 녀부 구성에 있어서도 위계에 따라 차이를 뒀을 가능성 이 크다. 즉 추녀에 사래를 덧댄 것이 추녀만으로 구성하 는 것보다 위계가 높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2. 궁집[宮家]
(1) 화순옹주 궁집 (김정희선생 고택)
이 주택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1758)와 부마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궁집이 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에는 3개의 추녀부, 안채에는 5개의 추녀부가 있다. 사랑채의 추녀부 는 모두 추녀 위에 사래를 덧대 2중으로 구성했다. 안채 의 추녀부도 모두 추녀 위에 사래를 덧대 2중으로 구성 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안채의 추녀부는 형태가 다 른 2가지 유형이 발견된다. 안채의 본채를 구성하고 있는 추녀부는 사랑채 추녀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 만 안채 정면에 놓인 행각에 사용한 추녀부는 다른 형태 를 하고 있다. 추녀의 하단을 빗잘라 마감한 다음 그 위 에 사래를 결구했다. 추녀와 사래를 마치 하나의 단일부 재로 만든 것처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모양의 추녀 결구 는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추녀와 사래의 결구 를 생각한다면 하나의 추녀재로 추녀부를 구성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또 하나의 추녀재만 사용하더라도 안 채 본채와 행각의 위계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추녀부를 2중으로 구성한 것은 다른 건축적 목적 이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림 8. 화순옹주 궁집 안채(좌)와 안채 행각(우) 추녀
(2) 화길옹주 궁집 (남양주 궁집)
이 주택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
1772)와 부마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의 궁집이다.
이 주택은 총 7개의 추녀부를 갖고 있다. 안채에는 3개의 추녀부, 사랑채에는 4
개의 추녀부를 사용했 다. 안채의 추녀부 중 에서 배면의 2개는 추 녀 위에 사래를 결구 한 2중의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정면 행각 출입문에 사용한 하나 의 추녀부는 오직 추녀 하나만을 사용해 안채 와 차이를 두었다. 사
랑채의 추녀부 4개 중에서 동쪽 2개는 추녀와 사래로 구 성했지만, 서쪽 2개는 추녀만 사용했다. 정면 서쪽에 위 치한 누마루만을 놓고 보면 추녀부 구성에서 동쪽과 서 쪽에 차이가 있다. 건물 초창 당시 누마루의 추녀를 좌우 가 다르게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랑 채의 추녀부는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3) 복온공주 궁집 (창녕위궁재사)
이 주택은 순조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
1832)와 부마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궁집이다.
사랑채에는 총 6개의 추녀부가 있다. 이 중에서 동쪽 누마 루에 사용한 3개의 추녀부만 추녀 위에 사래를 결구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추녀부를 추녀 하나만으로 만들었다.
안채는 5개의 추녀부를 사용했는데 이 중에서 2개의 추녀 부만 추녀에 사래를 덧대 만들었다. 사랑채는 동쪽 모서리 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반면, 안채는 두 추녀부의 위치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서로의 연관성을 찾기 어 렵다. 복온공주 궁집은 안채와 사랑채 모두 초창 이후 추 녀부가 크게 변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0. 복온공주 궁집 배치도
(문화재청, 홍파동 홍난파가옥 등 8개소 등록문화재 기록화보고서, 2006)
그림 9. 화길옹주 궁집 앙시도
(문
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14: 궁집,
2006)
(4) 덕온공주 궁집 (장위동 김진흥가)
이 주택은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
∼1844)와 부마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의 궁집이 다. 사랑채 상량문에 ‘을축년’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전했 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이 주택은 186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주택이기 때문 에 건물에 사용한 추녀부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로 많다. 하지만 이들 추녀부 중에서 추녀 위에 사래 를 사용한 것은 단 1곳뿐이다. 안채 서북쪽 모서리에 사 용한 추녀부만 추녀 위에 사래를 결구했다. 덕온공주 궁 집을 대상으로 건축적 고찰을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장 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규모가 큰 경우로서 현재의 모 습은 어떤 한 시점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변화가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다.”
11)
고 기술했다. 즉 안채와 사랑채 뿐만 아니라 별채 및 행랑 등 모든 건물이 계속 변경되거나 증축되었다 는 것이다. 현재 안채 서 북쪽 모서리에서 유일하 게 확인되는 추녀부가 혹 시 초창 당시의 원형이 아닐까 짐작된다.
4. 관아 및 주택의 사례
4-1. 관아건축 (1) 경아문
한양에 설치한 관아 중에서 현전하는 것으로 삼군부 청헌당과 총무당, 종친부, 우정총국이 있다. 이들 중 청헌 당, 총무당, 종친부는 겹처마로 만들어졌고, 우정총국만 홑처마로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우정총국 청사의 건립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 다. 매천야록에 “우정
국을 전의감(典醫監)에 설 치했다”
12)
고 기록한 것을 통해 우정총국이 원래 전 의감이 사용하던 건물이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의감은 정삼품아문(正
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장위동 부마의 한옥, 고려문화사, 2010 12) 황현, 매천야록 (http://www.history.go.kr)
設郵政局于典毉監 置總辦司事等官 朴泳孝洪英植等主之
三品衙門)에 해당한다. 삼군부와 종친부는 정일품아문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정총국은 건물의 위계나 규모면에서 다른 건물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정총국의 처 마는 홑처마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4개의 추녀부는 모두 추녀 위에 사래를 얹었다.
(2) 객사
객사는 정청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수령이 향궐망배하는 곳으로 읍성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축이 다. 정청 좌우에는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어 왕래하는 사 신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통상적으로 정청은 맞배지붕으 로 만든다. 반면 동·서익헌은 정청에 인접한 쪽을 맞배지 붕으로, 반대쪽을 팔작지붕으로 만든다. 정청은 처마를 겹처마로 구성하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동·서익헌은 겹 처마인 경우와 홑처마인 경우가 혼재한다. 객사 중에서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건물로 팽성객사, 청안객사, 서산객사를 들 수 있다.
팽성객사는 1760년(영 조 36)에 처음 지어졌고, 건물의 망와에서 1801년 (순조 1)에 해당하는 명 문이 발견되어 이때 다 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 고 있다.
13)
팽성객사는 정청을 겹처마, 동·서익헌을 홑처마로 만들었다. 현재 동·서익헌의 처마부는 모 두 추녀에 사래를 더해 2중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1994년 복원공사 이전에는 동·서익헌의 정면 추녀부에만 사래를 사용했었고, 배면의 추녀부는 사래 없이 추녀만 사용했었다고 한다.
14)
홍산객사는 1836년(헌종 2)에 군수 김용근(金龍根)이 건립했는데,
15)
다른 객사들과 달리 서익헌에 비해 동익 헌의 규모를 훨씬 크게 만든 특징이 있다. 서익헌은 도 리통이 3칸이지만 동익헌은 도리통 5칸의 크기를 갖고 있다. 조선시대 객사에서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높은 위계를 갖고 있었다. 사신으로 나간 관리들 사이에서 서 로 동익헌에 머무르려고 분쟁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홍산객사에서 동익헌의 규모를 서익헌보다 크게 설정한 것은 이런 위계의 차이로 판단된다.
홍산객사는 정청을 겹처마로 구성했고, 동·서익헌은 홑처마로 만들었다. 그런데 같은 홑처마라 하더라도 추
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14) 평택군, 팽성읍객사 실측조사보고서, 1994
15) 이왕기, 한국의 건축문화재: 충남, 기문당, 1999
그림 13. 팽성객사 동익헌 정면 추녀
그림 11. 덕온공주 궁집 추녀
그림 12. 우정총국 추녀
그림 14. 홍산객사 서익헌(좌)과 동익헌(우) 추녀
녀부에서는 차이를 두었다. 서익헌의 추녀부는 추녀 하 나만을 사용했지만, 동익헌은 추녀에 사래를 결구했다.
즉 서익헌은 추녀부를 1개의 부재로, 동익헌은 2개의 부 재로 만든 차이가 있다. 동익헌과 서익헌의 처마는 돌출 길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앙곡은 서익헌에 비해 동익헌을 크게 설정했다. 동익헌의 추녀부에 사래를 덧 대 앙곡을 크게 설정한 것은 건물의 위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 동헌
동헌은 수령의 집무처로서 읍성에서 객사 다음으로 높은 위계를 갖는 건축물이다. 처마가 홑처마이면서 사 래를 사용한 동헌으로 부여동헌, 청안동헌, 홍산동헌, 여 산동헌을 들 수 있다. 이 4채의 건물은 크게 두 가지 유 형으로 구분된다. 부여동헌과 청안동헌은 처마를 모두 홑처마로 구성한 사례다. 반면 홍산동헌과 여산동헌은 정면만 겹처마로 하고 다른 면은 홑처마로 구성했다.
부여동헌은 1869년(고종 6)에 세워져, 1880년에 중수하 고, 1985년에 다시 중수한 건물이다.
16)
청안동헌은 건립 시기가 알려지지 않았고, 1915년과 1981년에 중수한 건 물이다.17)
두 건물은 모두 팔작지붕이며 홑처마를 갖고 있다. 하지만 홑처마이면서 4개의 추녀부 모두 추녀에 더해 사래를 사용했다.그림 15. 부여동헌(좌)과 청안동헌(우) 추녀
홍산동헌은 1871년(고종 8)에 당시 군수였던 정몽화 (鄭夢和)가 건립했다.
18)
여산동헌은 1662년(현종 3)에 부 사 여태제(呂台齊)가 건립했고, 1806년에 중수했다.19)
이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림 16. 홍산동헌 정면(좌)과 배면(우) 추녀
두 채의 건물은 정면만 겹처마로 만들고, 좌·우측면과 배면은 홑처마로 만든 사례다. 정면은 겹처마이기 때문 에 추녀와 사래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배면은 홑처 마여서 추녀 하나만 사용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홍산동 헌과 여산동헌은 배면에도 추녀에 더해 사래를 사용했 다. 정면 겹처마와 앙곡을 맞추기 위해 배면 추녀부에도 사래를 사용했다고 추정하기 쉽다. 그런데 청풍동헌과 같이 정면만 겹처마이면서 배면에 사래를 사용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20)
청풍동헌 역시 정면과 배면의 앙곡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배면에 사래를 사용하지 않고 도 앙곡을 맞추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즉 배면에 사래를 결구한 것이 정면 겹처마와 앙곡을 맞 추기 위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목적으로 추녀에 사래를 더한 것으로 이해된다.
(4) 부속관아
읍성의 관아를 구성하는 건물은 매우 다양하다. 객사를 중심으로 동헌, 내아, 향청, 육방의 관청(작청 또는 이청), 옥사(獄舍)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향청이나 작청과 같은 유형의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극히 소수의 건 물만이 전하고 있다.
통진이청은 건립 연대를 알 수 없는 건물이며, 1869년 (고종 6)에 부사였던 백낙선(白樂善)이 중수했다고 전한 다.
21)
상주향청은 1500년대 말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으 로 소실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진사 한정(韓珽)이 중건 했다고 상산지(商山誌)에 전한다.22)
두 채의 건물은 모두 팔작지붕이면서 홑처마를 갖고 있다. 통진이청은 4곳의 추녀부 모두 추녀에 더해 사래를 사용했다. 반면 상주향청은 정면 2곳의 추녀부만 추녀와 사래로 만들고, 배면 2곳의 추녀부는 추녀 하나만을 사용
19) 익산시,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실측조사보고서, 2011, 77쪽 20) 동헌이 아닌 건축물로 안성 청룡사 대웅전, 병산서원 입교당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정면만 겹처마로 만들었고, 배면의 추녀부는 사래 없이 추녀만 사용했다. 청룡사 대웅전은 배면에 비해 정면의 앙곡을 크게 설정했다. 반면 병산서원 입교당은 정면과 배면의 앙곡에 큰 차 이를 두지 않았다.
21) 김포시, 통진향청 고증 및 복원을 위한 학술용역, 2009
22)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그림 17. 통진이청(좌)과 상주향청(우) 추녀
해서 정면과 배면의 추녀 구성을 다르게 했다. 그렇다 하 더라도 정면과 배면의 처마내밀기나 앙곡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정면에만 사래를 첨가한 것이 적합한 추녀 부재를 구하기 어려웠다거나, 앙곡을 설정하기 위한 것보다 건물의 위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4-2. 주택건축
(1) 논산 명재고택 (윤증고택)
명재고택의 건립 연대는 자료가 부족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윤증(尹拯)이 건축했다고 하지만 현존 건물은 19세기 중엽의 건축 양식을 보인다 고 한다.
23)
명재고택은 사랑채에 3개, 안채에 2개, 행각에 2개의 추녀부가 있다. 이들 중에서 안채 2개, 행각 2개, 사랑채 1개는 추녀 위에 사래를 얹어 2중으로 추녀부를 구성했다. 주택건축 중에서 행각까지 추녀부를 2중으로 구성한 사례는 명재고택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사랑채 정면의 추녀부 2곳을 사래 없이 추녀로만 마감했 다. 외부에 노출되는 곳의 추녀부를 하나의 부재로 구성 했고, 상대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배면의 추녀부는 2개의 부재로 마감했다. 후술할 다른 주택들의 경우 는 사랑채 정면만 2중 으로 추녀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 다. 따라서 다른 주택 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녀부를 구성한 사례 라 할 수 있다. 한편 사랑채의 앙곡은 사래 의 사용 여부와 관계없 이 모두 일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강릉 선교장
1748년 이내번(李乃蕃)이 현재의 위치로 이주한 이후
2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림 19. 선교장 사랑채 추녀 (좌: 정면 동쪽, 우: 정면 서쪽) 선교장의 개개 건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안채는
‘1853년(함풍 3) 계축(癸丑)’에 상량했다는 상량문이 있어 서 1853년에 중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에 건립했다고 한다.
24)
홑처마이면서 추 녀와 사래를 동시에 사용한 부분은 안채와 사랑채에서 확인된다. 안채의 네 모서리 추녀부에는 추녀 위에 사래 를 결구했다. 다른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통상적인 형 태의 추녀와 사래 구성이다. 그런데 사랑채는 일반적인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인다. 열화당 동쪽 정면에는 누를 설 치했는데 누 상부에 사용한 두 개의 추녀는 크게 휜 곡 재를 사용했다. 이 두 추녀의 끝단은 수평으로 잘려 있고 이 위에 사래와 같은 짧은 부재를 결구했다. 이런 까닭에 추녀와 사래는 마치 하나의 부재인 것처럼 보인다. 사랑 채에 사용한 다른 추녀부 역시 안채와 다른 모습이다. 하 부의 추녀를 매우 길게 돌출시키면서 높이를 낮게 만들 었다. 이 위에 사래를 결구시킨 결과, 마치 하나의 부재 를 조각해서 추녀를 만든 듯한 모양이 되었다. 선교장에 서 활래정은 처마를 겹처마로 구성했고, 안채와 사랑채는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했다. 그 외 다른 건물들은 통 상적인 홑처마 건물이다. 각 건물의 위계에 따라 처마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여주 보통리 고택 (김영구가옥)
1753년(崇禎紀元後 三癸酉)에 조명준(曺命峻)이 건립한 주택이다. 이곳에 세거한 창녕조씨는 명문 집안으로 여주 를 대표하는 성씨다. 보
통리 고택은 ㅁ자형 평면 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를 2개 갖고 있는 특징이 있 다. 보통리 고택은 총 9 개의 추녀부를 갖고 있 다. 이 중 4개의 추녀부 에서 추녀와 사래를 동시 에 사용했다. 안채의 추 녀부 2곳은 모두 추녀와 사래를 사용했다. 또 작
24)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15: 강릉 선교장, 2007
그림 20. 보통리 고택 앙시도(여주시, 한국의 전통가옥: 여주 김 영구 가옥, 2016)
그림 18. 명재고택 앙시도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17: 윤증
선생고택, 2007)
은사랑채의 추녀부 2곳 역시 모두 추녀와 사래를 사용 했다. 반면 정면에 위치하고 있는 큰사랑채에는 전혀 사 래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주택들의 사례는 대부분 사 랑채 정면 추녀부에 사래를 사용해서 외부에 노출시킨 경우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현재 보통리 고택의 큰사 랑채는 기존 주택에 더해 후대에 증축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4) 예산 이광임선생 고택
이광임선생 고택은 1820년(순조 20)에 이광임(李廣任) 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사랑채는 지붕의 망와를 통해 18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문간채는 상량문을 통 해 1887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25)
홑처마이면서 사 래를 사용한 부분은 사랑채 정면에 한정됐다. 그런데 추 녀의 형태가 일반적인 모습과 전혀 다른 형태다. 통상적 으로 추녀를 걸고 난 후, 추녀 끝에 사래를 올려 결구시 킨다. 하지만 이광임선생 고택에 사용한 부재는 추녀와 사래의 모습을 하나의 부재로 깎아 만들었다. 이런 모양 의 추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추녀보다 도 훨씬 굵고 긴 목재가 필요하다.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것이 추 녀곡에 적합한 부재를 구 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는 의견과 완전히 배치 되는 모습이다.
(5) 경주 무첨당, 청도 운강고택 만화정
경주 무첨당과 청도 만화정은 별동형 사랑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경주 무첨당이 주택 담장 안쪽에 위치했다면, 만화정은 운강고택에서 멀리 떨어진 천변에 위치한 차이 가 있다. 무첨당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 으며, 만화정은 1856년(철종 7)에 건립됐다.
26)
규모 및 형 태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두 건물은 모두 ‘ ’자형그림 22. 무첨당 추녀(좌), 만화정 앙시도
(우: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22: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 2007)
25) 예산군, 이광임선생고택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5
26) 문화재청, 한국의 전통가옥 22: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 2007
평면을 하고 있다. 이 중 정면으로 꺾어 돌출한 누마루 의 2개 추녀부에 추녀와 사래를 동시에 사용했다. 이를 제외한 다른 추녀부는 모두 사래 없이 추녀만 사용했다.
외부로 돌출되어 가장 눈에 띄기 쉬운 부분에만 사래를 사용해 강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5. 결 론
이상으로 법주사 원통보전과 같이 홑처마이면서 추녀 부에 추녀와 사래를 사용한 건물들을 살펴봤다.
지금까지 홑처마이면서 추녀부를 2개의 부재로 구성 한 경우 하단의 부재를 알추녀, 상단의 부재를 추녀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효종 영릉 안향청 과 인조 장릉 비각의 추녀부에 사용한 부재를 산릉도감 위궤와 비교한 결과, 조선후기에는 하단에 사용한 부재 를 추녀, 상단에 사용한 부재를 사래로 인식하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홑처마이면서 추녀부를 2개의 부재로 사용하는 것이 앙곡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추녀부를 2개의 부재로 구성하면 앙곡을 크게 설정하는 데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연구대상 중에서 부여동헌은 앙곡을 매우 크게 설정한 경우다. 앙곡이 매우 커서 유 사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일반적인 홑처마 건물이라면 이런 앙곡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홍산객사나 무첨당의 경우는 추녀부를 2개의 부재로 구 성한 부분이 추녀 하나만을 사용한 부분에 비해 큰 앙곡 을 갖고 있다. 그러나 상주향청, 이광임선생 고택과 같이 정면 추녀부에만 사래를 사용한 경우라 하더라도 앙곡에 큰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정면이 배면의 앙곡에 비 해 훨씬 커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앙곡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것은 앙곡을 원만 하게 처리하기 위한 것과 그다지 상관관계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23. 부여동헌(좌)과 상주향청(우)의 좌측면
또 추녀곡에 합당한 부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2 개의 부재를 합성해서 추녀곡에 맞추기 위함이었다는 그림 21. 이광임선생 고택 사랑
채 정면 추녀
견해도 있었다. 현전하는 궁궐건축 중에서 단청을 칠하 지 않은 건물들은 모두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설치하고 있다. 창덕궁 의두합과 운경거 같이 매우 작은 규모의 건축물도 홑처마이면서 추녀부에 2개의 부재를 사용했 다. 상대적으로 부재 수급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궁궐 건축이 모두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하고 있다. 이광 임선생 고택은 추녀와 사래의 모습을 하나의 부재로 만 들었다. 하나의 부재로 추녀와 사래의 모습을 동시에 가 공하려면 추녀 모양만 만드는 것에 비해 훨씬 굵고 긴 목재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 한 것이 추녀곡에 적합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서 방편 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조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추녀곡에 적합한 부재를 구하지 못해 2개의 부재를 사용했다는 의견 역시 합당한 해석이 아닌 것으 로 판단된다.
추녀곡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부재보다는 2개 의 부재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하단 의 추녀를 곧은 직재로 만들더라도 추녀곡을 설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부재 수급만을 따진다면 수많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에서 추녀부를 2중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전하는 궁 궐건축 중에서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들은 모두 홑처 마이면서도 사래를 설치했다. 또 궁집으로 알려진 대부 분 건물도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특징이 있다. 다 른 건축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궁궐 내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들과 궁집들이 모두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서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것이 건물의 위계 또는 등급과 관련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창덕궁 연경당은 사랑채 쪽에만 사래를 사용하고 안 채 쪽은 사래를 사용하지 않았다. 관아건축 중에서 홍산 객사는 정청을 겹처마로, 동·서익헌은 홑처마로 만들었 다. 같은 홑처마라 하더라도 동익헌에는 사래를 사용했 고, 서익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즉 안채보다는 사랑채 가, 서익헌보다는 동익헌이 위계가 높기 때문에 추녀부 구성 역시 다르게 설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 주택에서도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사 례가 발견된다. 하지만 연구대상으로 포함하지 않은 건 물들
27)
을 합하더라도 10여 채에 지나지 않는다. 현전하 는 조선시대 주택의 수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수다. 많은 조선시대 주택이 전하는 양동마을의 경우, 무첨당에서27) 남원 홈실마을 죽산박씨 종가 사랑채, 성주 한개마을 하회댁 사랑 채, 영천 만취당 보본재 등이 있다.
누각을 구성하는 2개의 추녀부에만 사래를 사용했다. 홑 처마이면서 사래를 사용한 것이 건물의 위계와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홑처마이면서 사래를 설치한 건물은 겹처마 건물에 비해 낮은 위계이면서, 일반 홑처마 건물에 비해서는 높 은 위계를 갖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추녀곡에 적합한 목재를 구하지 못해 사용한 알추녀와 건축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건축: 한국건축사연구자료 제18호, 1996
2. 김도경,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 우리 건축의 구조와 과학을 읽다, 현암사, 2011
3. 김왕직,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동녘, 2007 4. 보은군·문화재청, 법주사 원통보전 실측·수리 보고서,
2010
5. 장기인, 목조, 재판, 보성문화사, 1991 6. 주남철, 궁집, 일지사, 2003
접수(2017. 6. 15) 수정(1차: 2017. 7. 17) 게재확정(2017.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