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및 참고문헌
1. 손기섭, <동북아 국제관계와 한반도>
(부산외대, 2017)
2. 하영선 편,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EAI, 2006)
3. 전재성 편 <미중 경쟁 속의 동아시아와 한 반도> (늘품플러스, 2015)
4. E. Vogel, Y. Ming, A. Tanaka, <The Golden Age of U.S.-
China-Japan>(2002)
I. 서론
II. 전후 일본의 대중외교 구도
III. 사토 내각기의 국교정상화의 정치과정 IV. 다나카 내각기의 국교정상화의 정치과정 V. 결론
- 목차 -
II – 전후 일본의 대중외교 구도
대미자주 – 대미독립 - 대미협조 충돌
요시다 내각 대미협조노선· 미일동맹, 미일협조외교,
· 점진적 재군비, 경제중심주의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체결
→ 중국본토와 정상화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
※ 미일안보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일화평화조약
⇒ 전후 일본 외교구도
중국일본 보수정권에 현실적 접근 시도
1954. 10 - 일본정부와 국교정상화 희망
일본6·25 → 미·중 관계 악화 → 요시다 내각의 신중한 태도 (통상관계 중심)
→ 상해 재외사무소 설치 고려 → 미국의 반대
⇒ 요시다 서한 작성
· 결과 : 미국의 압력 → 대만 선택 (20년 지속)
중일 민간무역 발전·1952, 제1차 중일 민간무역협정
·1953년 제2차 중일 민간무역협정
·1954년 12월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성립
: 대미자주 지향,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지지와 협력’
·1955년 제3차 중일 민간무역협정
중일 관계의 단절과 이케다 내각의 LT무역·1956. 12. 이시바시 내각
·1957. 2. 기시 내각
: 미일안보개정(중요과제), 대미관계 우선정책
중국: 통상대표부 설치, 외교특권 부여일본
일본: 통상대표부 특권적 지위 부여 X (대만 의식)
⇒ 1958. 5. 중일 통상문화관계 단절
양국 내정변화 -
중국대약진운동 실패, 중소관계 불안, 적대적 미·중 관계 지속
일본1960. 7. 19 이케다 내각 출범 → 중일 관계의 회복 1960. 8. 주은래 수상
: 민간 계약 체결 시사, ‘정경분리’ 양국관계가 재개 1962년 9월 ‘LT무역’ 체결
· 일본 –
수출입은행의 자금을 대중 플랜트수출 사용 허가
→ 미국과 대만의 압박, 허가 취소 ⇒ 제2차 요시다 서한
III – 사토 내각기의 국교정상화 과정
·1964. 11. – 사토 내각 성립 대중 정경분리를 강조
시이나 외상, 중국의 유엔 가입+대만 추방 반대
→ 대중수출입은행 융자 거부 ⇒ 중국과의 관계 악화
중국 –문화대혁명이 가속화 → 일본 우호적 세력 숙청 LT무역 → 각서무역 전환
정경불가분 원칙 강조 → 중국 내 사토 내각 비판 확대
일본 –미국에 협조를 해야하는 상황 → 중국과 대립 (한국, 대만 관계)
닉슨 쇼크 (1971. 7. 15)· 일본 – 중국과 대립(미국 의식)
→ 미국의 방중 소식을 접한 이후 일본 사회에 충격
· 일본 : 비 정식 외교채널을 가동
※ 미중 접근 : 일본과 중국의 국교수립에 최대의 환경적 제약 제거
재계 - 각서무역 (MT무역)+주은래 수상 4조건· 주은래 4조건 : 해당 기업과는 거래 X
대만+한국 관련 기업, 미 제국주의 병기탄약 기업 일본에 있는 미일 합작회사, 미국의 자회사 등
· 일본기업의 조건 수락 → 무역규모↑
자민당 비주류의원+공명당, 사회당 -· 각 당의 방중단 → 중일 국교정상화 요구 공명당 : 중국과 ‘중일 국교회복 5조건’ 발표
⇒ 중일관계 정상화+미일동맹의 양립가능성을 암시
사토 내각 – 닉슨쇼크 이전에도 중국과 관계개선 노력
1. 중화인민공화국이란 중국의 정식명칭 사용
2. 자민당 외교조사회 중국문제위원회 위원장 노다 다케오를 중국에 파견시도 3. 방일한 중국 사절단과의 접촉 시도
4. 요시다 서한에서의 수출입은행자금 사용을 가능하게 변경 5. 중일 국교회복 결의안 작성 = 두 개의 중국론에 가까운 안
사토 내각은 대중접근에 신중한 모습
1. 당내 균열 2. 오키나와반환
그러나, 국교정상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고 중국의 강압적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흘러갔다.
3) 중일 국교회복 요구의 고조
IV – 다나카 내각의 국교정상화
사토 내각 –오키나와 반환 (1972. 5. 15) → 퇴진표명 (6. 17) → 자민당 총재선거 (다나카, 후쿠다 중심) ⇒ 다나카 내각 탄생
후루이 다가와 : 중국 주은래 수상과 접촉 → 중일 국교회복 환경조성
오히라 외상 : 국교 회복 → 대만과 경제·문화적 교류
⇒ 일화평화조약은 사라질 것
※ 하나의 중국
주은래 수상 (중국) 다나카 내각 (일본) 1972. 5. –
중일 국교회복을 원하는 다나카 환영
일중 문제 : 외교문제 X, 중대한 국내문제
→ 조속히 추진
주요 정책결정 라인 : 다나카 수상과 오히라 외상 장악
오히라 : 외상 취임 → 외무성 내 핵심그룹 형성 원인 : 중일 국교 추진이 정치가 주도,→ 외무성 역할 한정, 적극적 역할 수행 X
1971. 1. ‘중국경사’의 인사이동
→ 7월 닉슨쇼크 (의사통일 X)
하시모토 : 비밀리에 중국과 접촉→ 중일 공동성명문안 작성, 다나카 방중의 선발대장 역할 수행 중국 – 일본의 야당(공명당)을 다양한 교섭 루트로 활용
: 다케이리 공명당 위원장
중국과장 하시모토
조약과장 구리야마
조약국장 다카시마
다케이리 위원장 : 비 정식 외교접촉자 역할 수행 + 4월 민사당 방중단, 7월 사사키 전 위원장사사키 : 1972. 7. 16 주은래 수상 회담 → 중국의 유연한 자세 (일화조약, 배상청구권 행사 포기)를 다나카에게 보고
7. 25 다케이리의 중국회담 (주은래-료승지-왕효운)
→ 국교정상화 초안
중국의 중요한 양보 포함
대만문제 : 공동성명과는 별도의 ‘묵약사항’ 제시
미일 안전보장조약 언급 X→ 중일 국교정상화 양립될 수 있음을 시사
⇒ 다케이리 메모 (회견 기록)
다나카 수상 : 8월 중 자민당 내에서 조정
→ 1972. 8. 23 중일 국교정상화 + 다나카 방중을 당론 확정
→ 8. 31 미일 정상회담,
※ 미국의 양해로 받고 대만의 이해도 구함
다나카 내각 탄생 이후 : 중일 국교정상화 추진→ 미국과 아시아 각국 우려
미국 – 다나카 수상이 중국 문제에 성급히 대처한다는 우려
↳ 다나카 내각이 대만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
→ 대만을 미일 안보조약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
⇒ 일본 국내의 급속한 국교회복 움직임과 압력에 대한 우려
미국 – 키신저 보좌관을 돌연 방일→ 중일 국교회복에 대한 일본의 진의
+ 미일 무역 불균형 문제에 대한 적극적 시정조치 요청
1972. 8. 31 미일 하와이 정상회담
- 미일 하와이 정상회담 - (1972. 8. 31 ~ 9. 1 다나카 – 닉슨) 성격 : 미국이 일본에 적극 배려하는 형태(대등)
목적 : 중일 국교정상화,
미일 양국의 의견조정 도모 + 미국의 양해를 받는 것
미국의 주요 관심사 : 중일 국교문제 + 미일 간 무역불균형 문제 닉슨 : 소극적 자세 일관→ 다나카, 미 군용기와 민간 항공기 긴급수입 결단 일본 – 대만 관계 단절
→ 지위 변경하지 X, 양립가능, 양국 국익 해치지 X
⇒ 전후 일본의 두 외교과제 조화, 동아시아 외교 구도 변화
‘다케이리 메모’로 나타난 중국의 구체적 방안① 미일안보와 중일 정상화가 양립 가능
② 중국이 전쟁 배상권을 포기한다는 점을 명확히 함
→ 다나카는 두 이유에서 일거에 국교 수립이 가능하다고 판단
다나카 수상 : 방중 이전 두 개의 방중단을 중국에 보냄 자민당 대표단 (23인, 고사카 단장)↳ 역할 : 자민당이 대만 문제로 내부 분열을 설명 후루이-다가와 비공식·비공표 방중단
↳ 임무 : 공동성명의 외무성안 초안에 대한 외교적 절충
과정후루이 다가와가 ‘일중 공동성명 요강의 일본 측 기본방침 요지’를 휴대하여 중국 방문 → 1972. 9. 10 중국의 료승지 등에게 전달
→ 9. 12 주은래 수상이 후루이, 다가와와 회담
⇒ 9. 29 ‘중일 공동성명’ 서명
주요 쟁점 : 대만 귀속문제, 일화평화조약과의 정합성→ 중국이 일본의 주장에 이해를 표시하는 형태로 처리 중국 – 다나카 방중 수용
↳ 중일 국교정상화 의사↑, 일본의 비 정식 외교채널 적절히 기능
※ 미중관계 및 중소관계에서 오는 전략적 사고
중일교섭 내의 타협사항① 전쟁상태 종료, ‘비정상적인 상태’의 종료 선언
② 대만의 귀속 및 일화평화조약의 취급,
오히라 외상 : 일화평화조약은 존속의의를 잃어버려 종료되었다
③ ‘전쟁배상 청구권’의 포기 문제, ‘권’ 용어 삭제
→ 전쟁배상 청구 포기
V – 결론
1. 수상관저 주도의 정치적 결정
중일국교 회복 : 자민당 주요 3파 간의 정책합의자민당 라인 : 가교 역할 (공명당-중국, 공명당 – 수상관저) + 비공식 외교채널 역할
2. 미중일 삼각관계의 구조변화 발생 (일중국교 가능)
닉슨 방중 뉴스 : 일본외교에 큰 충격→ 중일 국교, 미중 접근이라는 중대 변경 속에서 추진 다나카 내각 : 동북아 구조 변경 이용 → 중일국교 성공
3. 중일 국교는 중국의 유연, 실용적 판단이 적극적 중일 국교실현 초안 : 전쟁배상 청구권 포기(중국) + 미일동맹 용인 속에 가능
중일관계 회복 : 미일관계 대체 모색 X, 조화 모색4. 다나카-사토 내각 차이 : 양 내각의 정책결정 차이
사토내각 - 오키나와 반환 정책 → 미일 협조외교 필수적
⇒ 중일외교 의탁 성격
다나카 내각 - 중일국교가 가장 큰 정책과제→ 3파 정책연합을 통해 성립, 역할 분담을 통해 국교 실현
5. 비 정식 외교채널을 적절히 활용
양국 간 정식 외교교섭 마찰요인↓, 공개외교 위험부담 분산 6. 일본의 전후 처리외교의 성격
미국 요인 : 한국과의 국교교섭에 긍정적으로 기능, 중국과는 제약요인 작용, 소극적 반응
한국 – 일회성의 유·무상 경제협력 방식 귀결
중국 – 배상청구의 포기를 통한 정치적 해결⇒ 1979. 12. 오히라 내각이 5년 내지 7년 단위의 복수 연도 총액결정 방식의 정부 간 경제협력으로 발전
출처 –
• 손기섭 『현대 일본외교와 중국』, 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2)
• 사진 ‘미일 하와이정상회담’ :
http://www.japantimes.co.jp/news/2013/08/23/national/politics-diplomacy/nixon-called-tanaka- nationalistic-new-boy/
• 사진 – 인물(수상) :
http://www.google.co.kr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