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휴와 제왕운기에 대한 연구
*조 남 호**
Ⅰ. 서론
Ⅱ. 이승휴의 생애와 저작 1. 이승휴의 저작과 생애 2. 『동안거사집』
3. 『제왕운기』의 제작연대와 판본
Ⅲ. 단군론
1. 『제왕운기』와 『삼국유사』
2. 단군(壇君)과 단군(檀君) 3. 단군론
Ⅳ. 단군조선이후의 역사 1. 기자조선
2. 부여, 고구려, 백제 3. 신라
4. 발해와 고려 5. 민속
Ⅴ. 결론
* 이 논문은 삼척시립박물관 개관17주년 기념/국학연구원 제 32회 학술대회의 「이승휴 제왕운기 고찰」(2017.3.29.)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하였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국문요약】
이 글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학자들의 『제왕운기』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1930년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동안거사집』
에 대한 논의는 단군에 대한 잠시 꺼져가던 불을 다시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제왕운기』와 『동안거사집』의 발견과 발행은 촉매역할을 하 였다. 그 중에서도 황의돈과 나카무라 히데타카는 발견과 발행에 역할을 하였고, 최익한은 이승휴에 대해 심도깊은 연구를 하였고, 정인보와 안재 홍은 자기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이승휴를 논평하였다. 정인보는 제왕운 기에서 단군의 홍익인간을 말한 점에서 그것을 인정하였지만, 단군을 인 간으로 보기 때문에 『제왕운기』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안재홍은 언어적 관점으로 『제왕운기』를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들은 모두 이승휴의 단군 기록이 조선에서도 정통사관이 되었음을 논증 한 점에서 일치한다. 고려 말에 이어 일제 강점기가 단군연구의 부흥기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 나카무라는 일본인 학자 답게 단군전설이 고려 말에 점차로 만들어진 인물이고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단군의 강역 은 고려시대의 판도를 넓히려는 욕망으로 보고 있는데 비해 대종교계열 의 학자들은 단군전설과 판도가 전조선에 관계한 존재와 국가로 보고 있 다. 이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이 단군을 다르게 보는 점이다.
주제어 : 이승휴, 『제왕운기』, 단군, 대종교, 나카무라 히데타카, 최익 한, 정인보, 안재홍
Ⅰ. 서론
이 글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학자들의 『제왕운기』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동안거사 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1) 정인보, 「오천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1935년, 1월 20일, 22일, 30일, 4월 9일, 24일 01)
2) 황의돈, 「역대흥망의 일편시사. 소명정확한 제왕운기」, 조선일보
, 1939년 2월 17일, 「동안거사집 상, 중, 하」,6월 9일, 13일, 14일
3) 최익한, 「고려문헌계의 유주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상·중·하·완」,
동아일보 1939년 12월 7일, 8일, 12일, 14일
4)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1937-1941년 02)
5) 이병기, 가람일기, 1921-1964, 신구문고, 1976
이 글에서 인용된 정인보와 안재홍은 단군에 상당한 이해와 저술을 남 기고 있는 점에서 대종교계열로 볼 수 있고, 최익한은 공산주의자로 분류 되지만 이병기의 가람일기에 보면 그는 개천절 행사에 이병기와 같이
01) 이 책은 서울신문에서 1946(상), 1947(하)년에 각각 발행하였다. 이 책을 문성재 역주 로 2012년에 우리역사재단에서 출판하였다.
02) 조선상고사감은 1947년에 상권, 1948하권이 민우사에서 발행되었고, 김인회 역주로 우리역사문화재단에서 2014에 간행하였다.
참여하고 있다.03) 그의 동생인 최익채(1899-1930)04)는 1921년 개천절 행 사에 축사를 하였다. 최익한의 대종교에 대한 인식이 이승휴에 대한 연구 로 이어진 것이다. 황의돈05)은 대종교 계열의 학자는 아니지만 동안거사 집을 최초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한 점에서 그의 학설을 소개하고자 한 다.
또한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1902-1984)는 제왕운기와 동안 거사집을 발간하였다. 제왕운기에 대해서는 이마니시나 다카하시 등 의 일본인 학자들도 보지 못한 책이고, 일부 한국학자들만 알고 있는 상 황이었고, 동안거사집은 존재여부 조차도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었다.
따라서 그의 발간은 이승휴 저작집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가능하게 됨 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간이 이승휴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울 러 나카무라의 이승휴에 대한 견해도 아울러 소개하고 이것을 어떻게 평 가하는지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03) “최익한군을 따라서 한배님 가르치시는 길을 따라가다.”(가람일기, 1920년 11월 21 일) 최익한은 이병기, 권덕규, 오철호와 같이 그날 놀았다. 송찬섭, 「일제 강점기 최익 한의 사회주의 사상과 활동」, 역사학연구61, 2015, 155쪽.
04) 최익한의 아우이다. 울진군지에는 “최익채(崔益采) 호(號)는 고원(高原)이며, 강릉인(
江陵人) 참판(參判) 수헌공(睡軒公, 應賢)의 후손으로 소초(素樵) 대순(大淳)의 아들로 1899년에 나곡리(羅谷里)에서 출생하니 천성(天性)이 뛰어나고 인정이 두터웠다. 제동학 교(濟東學校) 교사로 재임하여 향학열(向學熱)을 높였다. 지행(知行)과 견문(見聞) 또한 필법(筆法)이 뛰어나고 말솜씨가 누구라도 감동시켜 세인을 놀라게 한 다능다재(多能多 才)한 문사(文士)이다. 지병(持病)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니 향인들이 슬퍼하였다.”
05) 호는 해원(海圓). 충청남도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 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1907년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 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 국사상을 고취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 를 강의하였고, 휘문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보성학교 교 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다. 이때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을 발견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 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다. 1942년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
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대종교 연구자는 나철·김교헌·서일·윤세복 등 내부의 지도자들과 신채호·최남선·안재홍·정인보·김두봉·이윤재·이병기등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로 구분된다. 내부지도자들은 단군에 관한 본체론적 수양론적 종교 교리를 확립하는데 힘썼고, 학자들은 단군과 관련된 구체 적 자료들을 찾는데 전력했다. 단군학은 이들을 통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때문에 단군학이 종교이면서도 학문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06)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의 실재를 증명하는 중 요한 책이기 때문에 대종교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Ⅱ. 이승휴의 생애와 저작
1. 이승휴의 저작과 생애
이승휴에 대한 일제시대 언급은 1924년 2월 21일 벽계생이 「조선사개 강, 중고사」에서 고려대 역사기록으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언급하면 서부터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제왕운기에 대한 내용설명이 없고, 다 만 일연의 삼국유사에 대해 “사원승려의 손에 된 것임으로 불설을 雜 함이 많고 황탄괴이의 설화를 많이 기재하여 더욱 신용을 두지 못할 곳이 많다”고 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939년 3월 31일 동아일보는 「고서발양에 대하여」라는 사설에서 신시 환웅을 기록한 고기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인용하였고, 본기와 단 군본기는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인용하였다고 하면서, 고서를 발행하 여 고대 문화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자고 하고 있다. 아마도 일본인 학자들이 제왕운기를 발행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우리 손으로 발행하자 고 주장하는 것 같다.
06) 조남호, 「대종교 계열 학자들의 영토인식」, 선도문화22, 2017, 274쪽
제왕운기와 동안거사집을 묶어서 1939년 9월 1일에 조선고전간행 회의 1집07)으로 나카무라 히데타카08)가 발행하였다. 나카무라는 동안거 사집이 경북 안동에 사는 배모씨 소장으로 이조 선조시대의 대학자 임연 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 1534-1588)09)의 장서로, 현재 경성 황의돈씨 가 가진 것이라고 한다. 두 책의 출현은 민멸했던 이승휴의 이름이 다시 선전되어. 조선문화사 연구에서 큰 기여를 할 것이고 보았다.
최익한은 황의돈이 당시 경북 안동 월곡면(月谷面) 도목리(道木里) 배 성환(裵誠煥)10)집에서 동안거사집을 발견하였다고 하여, 구체적으로 이 름을 거명하였다. 그는 조선고적간행회의 인쇄를 소개하면서 당시 제 왕운기는 서울에 있는 장서가의 발견으로 전사되었지만, 동안거사집
은 인쇄본과 등사본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병기는 연희전문 도서관 에서 제왕운기를 보았고(가람일기 1937.10.4.) 교열한다.(같은 책, 1938.2.18.)
나카무라는 「제왕운기·동안거사집의 해설」에서 이승휴의 전기를 소 개하고 세가지 점에 주목한다. 하나는 정치가로서의 식견이다. 고려 봉건 제도는 명종 신종때부터 점차 붕괴하기 시작하여 권신 문사의 발호, 사원
07) 1940년대 이후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접어들기 때문에, 조선고전간행회는 1집이 후의 인쇄물을 내지 못한다.
08) 지바현 출신。동경부립중학교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23年에 東京帝国大学에入学、黒板 勝美의 지도를 받았다. 1926年 東京帝国大学文学部 国史学科를 卒業하고 朝鮮総督府朝 鮮史編修会의 嘱託이 되었다。1927年 修史官、1937年 編修官、1945年 教学官・幹事兼任이 되었지만, 해방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1948年부터 名古屋大学、1966年부터 天理大学 의 교수로 근무하였다. 1977年 천리대학 퇴직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09) 본관은 흥해이다. 1564년 문과에 급제한 후 밀양 교수로 일하면서, 이황의 부탁을 받 고 주희연보 개간 작업을 주도한다. 1573년 홍문록에 들었고, 후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1587년에 陳謝使의 正使로 선발되어 명에 다녀온다. 이 때 종계(宗系)가 바로 잡힌 大明會典 초본을 등사해 왔는데, 이를 기뻐한 선조임금은 친히 모화관까지 나 아가 임연재 배삼익을 맞이한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기아로 고생하는 백 성들을 보살피다가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0) 배삼익의 후손으로 자는 允明이고, 1903년에 출생하였고, 졸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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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횡포, 토지겸병의 격화, 농민반란을 보고, 특히 고종의 시대 몽고 의 침입도 부가되어 민중의 생활이 토탄에 빠졌다. 그의 열전을 보면 군 대 세금 건축에 백성이 매우 괴로워하여 상소문을 올리고 그 폐단을 논했 고, 양(楊)광(廣) 두도의 뇌물을 먹은 7인을 탄핵하고, 그 집을 몰수하였 고, 왕을 만나자 민간의 이해와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고 하고, 강직한 그 는 가차없이 멋대로 하는 관리를 도태시키고, 민간의 폐해를 상소하였다.
둘은 종교자의 수양 측면이다. 그의 정치가적인 공평은 한편으로는 그의 염담강직한 성격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불교를 신봉한 것 에서 나온다. 그의 염담한 성격은 더욱 이것에 의해서 배양되었다. 그의 열전에서 불교서적을 보고, 불교를 매우 좋아 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저 술에 승려의 취미가 가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셋은 문학자의 측면이다.
그의 열전에 그가 올린 표나 사를 올렸는데, 말이 위려하였고, 원대 학자 후현이 그의 시를 마음으로 복종하고 암송하였고 말하고, 서장관으로 보 내진 것도 그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그의 ‘운’(雲 )11)을 찬탄한 시를 지었다고 한다.12)
최익한도 먼저 이승휴의 약전을 소개하면서, 본전에 “본성이 정직하여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고 불교를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 것에 대 해, 당시 고려시대 학자는 일률적으로 정사제도는 유학에 의거하고, 심성 철리는 불교에 의거하여 유불조화가 가장 조화로운 시기였고, 이승휴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카무라가 단순히 불교를 좋 아하였다고 하는 것에 비해서 최익한은 한 걸음 더나아가 유불조화론에 의거하였다고 평가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승휴는 삼교합일론을 주장하고 있다. 김방경은 이승휴에 대해서 “불교의 청정과 유가의 충의 둘의 선후
11) 一片纔從泥上生. 東西南北已縱橫. 謂爲霖雨蘇群槁. 空掩中天日月明
12) 이제현의 시는 없고, 다만 지봉유설에는 이제현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권13, 「東詩」, 李承休詠雲詩曰。一片纔從泥上生。東西南北便縱橫。謂成霖雨蘇群槁。空掩中天日月明。李齊 賢稱之。然此詩全用宋詩不成霖雨謾遮天之意。恐不足稱也。그런데 이 시는 동문선에서 는 鄭可臣의 작으로 되어있다.
없이 하나로 이루었으며 더구나 도교 내단을 수련한 진짜 공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교 수행도 하고 있다”고 한다.13)
2. 『동안거사집』
황의돈은 동안거사집에 간행시기는 없지만, 이색의 서문에 이승휴의 아들 이연종이 자신에게 서물을 청했고, 이색이 지정19년에(1359)에 서문 을 쓴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인출한 것 같지만, 간행장소가 없는 것이 아 쉽다고 한다.14) 윤보 이산 정소에게 보내는 편지는 『제왕운기』 출판에 대 한 감사를 드리는 글로, 인쇄역사에 좋은 재료라고 평가한다. 이승휴의 시에 대해서는 이규보 이제현 두 대가와 백중지세가 된다고 한다. 이 문 집의 가장 핵심은 이승휴가 원 세조 황후 태자 책립 축하사절로 간 기행 문인데 이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다음의 기록으로 아주 귀중한 문헌이 고, 원사에도 실려 있지 않는 것으로 보충할 문헌이라고한다.15)
나카무라에 따르면 동안거사집에서 권1에 이색의 서가 있고, 잡저 끝 에 구양현의 서가 있는데, 이승휴의 외손인 고정온 선사로부터 받은 이 승휴의 시문을 읽고서 느낀 것을 쓴 것이 있다. “생각이 속되지 않고 말 의 뜻이 맑고 고상하여 훌쩍 세상 밖으로 벗어나는 취향이 드러나 있었 다. 가령 金·李의 여러 명사로 기량의 장점을 겨루어 보더라도 아마 그 보다 앞선 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구양현은 이색과 같은 해 합격한 친 구이다. 권7 「빈왕록」은 외교관계 특히 외교사절의 예식절차를 보는 점에 서 중요한 문헌이라고 한다. 나카무라는 이승휴의 문집 가운데 「잡저」에 서 불교관계 문자를, 「빈왕록」에서 외교예식을, 시에서 그의 사조의 일반 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3) 이경룡, 「이승휴 선생의 중국이해」, 삼척시립박물관 개관17주년 기념/국학연구원 제 32회 학술대회, 이승휴 제왕운기 고찰 자료집」, 2017, 101-105쪽
14) 이승휴, 조선일보 「동안거사집 상」,6월 9일, 15) 이승휴, 조선일보 「동안거사집 하」6월 13일
최익한은 동안거사집에 잡저를 소개하는 중에 김방경이 요요암신화 상에게 주는 글이 있는데 신화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김방경에 대한 글을 얻기 어려운데 이승휴의 글에서 읽게 된 것은 기이한 인연이라고 한 다. 그리고 구양현의 발문도 있는데 원문의 ‘金·李 여러 명사’가 김황원(
金黃元)·이궤(李軌), 김부식(金富軾)·이제현(李齊賢), 김극기(金克己)·
이규보(李奎報)인지 모르지만,16) 이승휴의 시문을 최고수준에 비교하려는 극구찬사라고 한다. 시집에서 시의 의미는 유불도가 교착하고 격조는 송 원의 영향이 강하나, 이인로 임춘 일파 7현의 풍운을 답습한 것이라고 평 가한다. 「빈왕록」에 대해서는 이승휴가 50세로 서장관이 되어 원의 황후 태자 책립 축하 사절로 시, 표, 일기로 된 기록으로, 조회시의 예식 광경 을 비교적 자세히 적어서 사료상의 참고가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다 음해 원종이 죽자 다시 서장관으로 가서 충렬왕과 왕비가 고려로 돌아오 게 된 사연은 실록의 사항이므로 이 사연을 문집에 실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17)
3. 『제왕운기』의 제작연대와 판본
나카무라와 안재홍은 『삼국유사』가 『제왕운기』보다 앞서고, 최익한과 권덕규, 황의돈은 『제왕운기』가 먼저라고 한다. 나카무라는 『삼국유사』
는 석 일연의 만년의 작품이기 때문에 『제왕운기』의 찬자 연대로부터 보 면 단지 10년 먼저 나온 것이라고 하고, 안재홍도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쓴 것은 충렬왕13년(1289)이고, 『삼국유사』는 충렬왕 원년 또는 6-7년으 로보아 제왕운기의 제작연대가 10년 혹은 6-7년 늦은 것으로 보는데 비 해,18) 권덕규는 “遺事가 實狀은 一然의 죽은 뒤 30년 동안의 後의 忠肅王
16) 이경룡에 따르면 金과 李가 아니라 金과 元이라고 한다. 이경룡, 위의 논문, 105쪽 17) 최익한, 「고려문헌계의 유주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중」, 동아일보 1939년 12월 8일 18) 안재홍, 조선상고사감133쪽
朝에 완성된 것이요…僧侶아닌 士大夫의 손에 된 書籍에 더군다나 三國 遺事보다 먼저 된 冊에 壇君의 字句가 환히 들어나게 적히었다.” 권덕규 는 『삼국유사』가 일연이 아니라 제자에 의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제왕 운기』보다 뒤라고 한다.19) 황의돈도 이승휴가 1287년에 『제왕운기』를 지어 어전에 진상하여 치국의 사감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때는 『삼국사기』
저자 후 142년이고, 일연이 죽기 전 2년으로 『삼국유사』와 동시대이다.
『삼국유사』는 일연의 사후에 그의 문도의 손으로 완성된 듯한 점에서, 『제 왕운기』가 앞선 듯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권덕규와 같은 입장이다. 『삼국 유사』는 궁벽한 산의 승려의 손에서 소일거리로 우연히 된 것에 비해, 『제 왕운기』는 당시 명신으로서 지존 앞에 올리기 위하여 저술된 것이니 가치 가 『삼국유사』보다 높다고 한다.20) 최익한도 일연이 이승휴보다 18년 연장 자이고, 입적한 해는 1289년이고,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제작해서 올린 해(1287년)보다 3년 뒤여서, 『제왕운기』가 삼국유사보다 후이지만, 『제왕 운기』가 인쇄하게 된 것은 10년(1296년)이어서, 간행에서는 『삼국유사』보 다 먼저이고, 당시의 독자계에 대한 영향도 『제왕운기』가 『삼국유사』보다 더 컸을 것이라고 한다.21)
『제왕운기』 판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이견이 있다. 나카무라는 『제왕운 기』는 중국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읊었지만, 이러한 운기는 역사가의 종류로 이것 이전에도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제왕운기』의 초간은 충렬왕 21(1295) 혹은 22년(1296) 진주에서 발행되었고, 재간은 1360년 (지정20년, 공민왕9년) 조카사위 안극인이 경주에서 간행하였고, 삼간은 이질이 1417(영락 15년, 태종17년) 경주에서 발행하였다고 하고, 출판한 것은 삼간본이라고 한다. 최익한은 나카무라의 판본 조사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만 초간의 연대를 확정한다. 『제왕운기』의 초간본은 연월일이 없지
19) 권덕규, 「大倧敎觀, 大倧敎는 歷史上으로 어떠한가」, 삼천리8권4호, 1936 20) 황의돈, 「역대흥망의 일편시사. 소명정확한 제왕운기」, 1939년 2월 17일 21) 최익한, 「고려문헌계의 유주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하」, 동아일보1939년 12월 12일
만, 원정2년(1296)으로 추산하여, 『제왕운기』가 완성되지 10년 후라고 추 정한다. 이승휴가 「승제 윤보에게 올리는 계」에 세상과 더불어 교제하지 않은지 17년이 되었다고 하고 있고, 이승휴가 구은동에 은거한 것이 충렬 왕 6년이면, 6+17=23년이 된다. 그래서 1296년이 맞다고 한다. 초간본 의 발행지가 진주인 것은 대장경조판과 관련 있어, 강화에 대장도감이 있 고 분사가 진주부근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인쇄본은 재간 본이라고 한다.22) 그런데 이병기는 제왕운기의 판본에 대해 영락간본, 중 각본(선조경자본, 1600년)사본이 있는데 이는 지정본에 표준을 두고 있다 고 하면서, 지정본이 가장 오랜 판본이긴 하지만 착오된 것이 많고, 조선 고전간행회가 출판한 것은 중각본이라고 한다.23)
판본 나카무라 최익한 이병기
초간본 0 0
중간본(지정본) 0 0 출판 0
삼간본(영락본) 0 출판 0 0
중각본(선조 경자본) 0 출판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나카무라가 출판한 것은 삼간본이라고 한다.24) 그런데 이병기는 무슨 근거에서 선조 경자본을 제시하고 있는지 밝혀지 고 있지 않다.25)
22) 최익한, 「고려문헌계의 유주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하」(1939년 12월 12일) 23) 이병기, 가람일기, 1941년 10월 19일
24) 김경수 역주, 제왕운기, 역락, 1999, 24쪽
25) 제왕운기판본에서 세 개의 판본 말고 다른 판본을 주장하는 글이 있다. “제왕운기에 대하여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 교수 김경수씨가 연구하고 번역한 그 대본(亦樂 , 1999)에는 원문의 맨끝[十七面]에 “校正幼學 崔有□”라고 하여 한 글자(□)가 빠져있 는데, 번역에서는 “최유해(崔有海)”라고 했으며, 각주에는 “(崔有海: 1587∼1641): 조 선 중기의 문인. …”이라고 하였다.[위의 책, p. 234] 그렇다면 『제왕운기』는 3판뿐 이 아니라, 다른 4판이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의 판본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 다.http://blog.daum.net/iron0404/8083033
Ⅲ. 단군론
1. 『제왕운기』와 『삼국유사』
나카무라는 『제왕운기』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곳은 하권 즉 조선사의 부분이고, 그 중에서 전조선기 즉 단군기가 가장 귀중한 문헌이라고 한 다. 단군기와 『삼국유사』의 다른 점은 1) 기자가 후조선인 것에 대하여 단 군은 전조선이라는 것, 2) 단군의 단자가 확실히 나무 목변이라는 것. 3)
『삼국유사』는 환인 서자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은데 반해, 운 기는 환인의 자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신으로 변화시킨 후 단수신 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 4) 『삼국유사』에는 판도가 상세하지 않 지만, 제왕운기는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부여, 예 맥 등 조선 반도가 다 그 치하에 들어가고 있다. 즉 이것은 고려의 판도에 대한 욕망의 반영이 라는 것이다.
요컨대 『제왕운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기록과 일치하지만, 별도로 당시에 다소 줄거리를 다르게 하여 『삼국유 사』 풍의 단군신화가 전해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에 의 해서 고려시대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구삼국사, 동명왕편, 『삼 국유사』의 단군조선, 『제왕운기』의 전조선기26)를 통해서 어떻게 불완전한 단군신화가 점차 완전하게 되는 방향으로 성장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단군신화라고 일컫는 개국신화의 이러한 발전은 바로 고려라는 하 나의 민족 사회의 현실적 발전의 반영이다.
황의돈은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26) 원문에는 후조선기라고 되어 있으나 전조선기가 맞다.
제왕운기 삼국유사
本記, 檀君本記 魏書, 古記
上帝桓因 桓國,27) 謂帝釋也
庶子曰雄 庶子桓雄
率鬼三千 率徒三千
太白山 太伯山
神檀樹下 神壇樹下
檀雄天王 桓雄
令孫女飮藥, 成人身 熊得女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 號曰
壇君28)王儉
竝與帝高興戊辰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
據朝鮮之域, 爲王. …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 爲神, 不死故也
都平壤城始稱朝鮮, 又移都於 白嶽山阿斯逹, 又名弓忽山, 又今旀逹禦國一千五百年 與非西岬河伯之女婚而生男, 名夫婁. 姓高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故屍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
貊, 皆檀君之壽也.…先以扶餘沸流. 次有 屍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膺. 此諸君長問 誰後. 世系亦自檀君承
최익한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군에 대한 기술이 비슷한 점에서, 『제왕운기』를 믿을 수 있듯이 『삼국유사』도 인정해 야 된다고 한다.
27) 황의돈은 최남선의 주장을 따라서, 桓因이라고 하지 않고 桓國이라고 한다.
28) 황의돈은 최남선의 주장에 따라서, 檀君이라고 하지 않고 壇君이라고 한다.
“유사와 운기의 인용내용이 대개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아서 단 군전설은 일부인의 疑難과 같이 유사 저자 일연선사의 일시적인 두찬이 아니었던 것을 십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이는 삼국사기가 기자로부터 시작함을 중국을 숭배하는 치우친 마음 이라고 다르다고 한다.
최익한은 『제왕운기』가 전조선의 지역과 단군의 세계를 상세하게 기술 한 것은 『삼국유사』가 언급하지 못한 점이고, 역대 역사서 가운데 탁월한 점이라고 한다. 안재홍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기록은 황당한 전설 을 연결해 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지 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역 사기록이라고 한다.29) 황의돈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믿을 만 한 역사로, 단군, 동명, 발해사등에 앞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도 더욱 상세하고 분명하여 두 역사책을 보충할 많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 리지』의 단군기록이 『제왕운기』에서 나왔고, 단군사에 대한 종종의 의론 도 새로운 견지에서 다시 출발치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정인보는 이승휴가 환인 문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환인으로부터 이어 져 내려온 정통이 변화하였네”라고 하여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고 하 고. 환인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름을 단군이라 하고 조선의 영역에 의 거하여 왕이 되었기 때문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는 모두 단군의 후예다”라고 한 것은 무슨 변화가 있는 신화라 할 것인가, 단군의 고전이 란 그야말로 평탄치 아니하고 여러 가지로 왜곡되어 가설의 장식은 변할 지라도 실체는 변화할 수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30)
필자가 보기에 이승휴는 환인의 정통이 변화하여 기자에게로 넘어갔다 고 하였는데 반해, 정인보는 이 구절을 비판하고 환인의 정통은 그 이후 나라들에게 변화되지 않고 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안재홍은 부여조선이
29)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우리역사연구재단, 2013, 361쪽 30) 정인보, 조선상연구상,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154쪽
래의 상세한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기 보다는 한민족의 영토에 열립한 여러 나라를 개괄하여 단군의 후예라고 설명한 것이라고 한다.31)
2. 단군(壇君)과 단군(檀君)
최남선은 단군(壇君)을 주장하면서 논쟁이 비롯되었다. 그는 단군(壇君 )이 고려 말에 단군(檀君)으로 바뀌면서 단군(檀君)으로 확정되었는데, 원 래의 의미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주로 일본인 학자들이 단군(檀君)이 불교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는 단군(檀君)이 아니 라 단군(壇君)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단군(壇君)은 탱그리로서 천 을 대표한다는 군사(君師)의 호칭이다. 군(君)은 정치적, 사(師)는 종교적 장을 말한다. 언어학적으로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몽골어의 탱그리와 천은 무(巫)를 의미한다. 군주와 무당이 하나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서도 천군(天君)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현대어에서도 무를 탱굴, 당굴 이라고 한다. 그것의 변형이 굿놀이의 대감이다. 흉노의 탱려고도(撑犁孤 屠), 동명설화의 탁리(橐離), 주몽설화의 천제(天帝), 북연의 천왕(天王), 일본의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天津日繼)가 그것이다.32)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제왕운 기가 출판되면서 많은 학자들은 단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황의돈은 『삼 국유사』의 오기로 인하여 단군(檀君)을 단군(壇君)으로 오인하였던 속인 의 오해도 풀리게 되었다고 한다. 손진태는 최남선의 주장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왕운기』의 출현으 로 단군(檀君)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 청천병력적 사건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즉 제왕운기의
31) 안재홍, 위의 책, 368쪽
32) 조남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선도문화
출현이었다. 단군신화를 전하는 최고의 기록이 삼국유사일줄로 만 세상이 다 믿고 있었더니 그보다 전에 제왕운기가 있어 저자 이승휴는 一然師보다 선배이며 또 학문인이오 그 책도 유사와 같 은 근대판이 아니오 당시 고려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당 당히 檀자를 썼다. 그러면 지금까지 檀자를 쓰던 이들은 또 檀자로 고치어 따라올 모양인가? 그것은 내 알배 못되지만 하여튼 壇字派 에 一大痛 棒을 내린 이는 운기의 발견자인 황의돈씨이다.33)”34)
손진태는 『삼국유사』는 근대판(조선판)이고, 『제왕운기』는 고려판임을 들어, 『제왕운기』가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임을 주장한다. 손진태는 단(檀) 과 단(壇)의 논쟁이 일제 강점기 당시가 아니라, 이미 홍만종의 해동이적
의 순양자의 글에도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35)
안재홍도 최남선의 단군이 삼국유사 정덕본(1512년, 경주에서 간행) 에 근거하여 잘못 쓰인 것을 지적하면서, 『제왕운기』의 단군을 인정한다.
3. 단군론
권덕규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을 말하는 점은 “大倧敎로의 檀君은 아즉 두고라도 朝鮮開國始祖로의 檀君-朝鮮族의 始祖인 檀君을 史上으로 무 엇이라 핑계하야 否認할 수 없는 것이다”한다.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단 군은 인간이지만, 대종교의 단군은 신인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개국시조 로서의 단군은 부정할 수가 없다고 한다.
정인보는 단군을 제석천과 연결하려는 불교적 사고와 선인으로 연결하 려는 도교적 사고 모두를 비판한다. 정인보는 단군을 신이 아니라 인간이
33) 황의돈은 제왕운기가 아니라 동안거사집을 발견하였다.
34) 손진태, 「단군 단군」, 손진태선생전집6, 태학사, 1981, 25쪽
35) 按檀君壇君, 未詳孰是. 여기서 순양자는 황윤석을 말한다. 황윤석은 증보해동이적의 저자이다.
라고 주장한다. 먼저 환인에 대해서는 제석이라고 하는데 석가제환인다 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도 하며, 이를 줄여서 석제환인이라고 한다. 산스 크리트어로 석가는 유능하다, 제환은 하늘, 인다라는 황제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단군의 세계는 오래전부터 상제에 비겨서 숭배되어 왔으므로 불교도들은 향찰을 전사하는 과정에 해당 언어와 유사한 불경 속 에서 이들을 차용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원래의 발음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뜻만은 산스크리트어라는 외피 속에서 변함없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36)
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 뻘이므로 인간으로 볼 수 있는데, 불교도가 신 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환인은 천제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고시대 사람들이 그 존엄함을 받들어 천왕이나 천군 이라는 칭호를 붙였을 따름이다. 환인과 단군의 관계도 “환인에서 단군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단군을 통해 환인의 위상을 격상시킨 것이다”37) 환 웅에 대해서 정인보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환인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다.
정인보는 단군도 왕검선인이라고 하는데, 왕검과 임검의 차이를 인정 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본다. 선인이라는 말도 후세인이 도교를 차용해서 아주 높은 존재로 신선 즉 선인으로 미화했다고 한다.
“선인은 속세 너머로 천상의 봉황과 학을 타고 다니는 신선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제에 대한 존호가 불교도들의 손에서 제석으 로 둔갑했듯이 선인의 경우 역시 어쩌면 아주 높은 존재라는 뜻으
36) 정인보, 조선사연구상, 우리역사문화재단, 129쪽 37) 정인보, 같은 책, 132쪽
로 쓰이던 옛 우리 말이 도교를 통하여 선인으로 미화되었을지도 모른다.”38)
단군을 제석과 선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적 해석뿐만이 아니라 도교적 해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인보는 서왕모가 장생불사하듯 이 단군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도인과 개국 시조 는 전혀 다른 범주라는 것이다39)
정인보는 단군이 1308년을 다스린 후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 다고 하고 주석에서 죽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존립기간을 단군 개인의 수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어떤 구담이 쌓여 허구 화된다 하더라도 고조선의 개국인 홍익인간의 이념에서 비롯되었 다는 것과 ‘세 종교를 아우름으로써 여러 생명을 접하고 감화시킨 다’는 우리 겨레 고유의 큰 법도가 그 뿌리를 단군 왕검에 두고 있 다는 사실일 것이다.”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보는 단군에서 불교나 도교적 해석은 뒤에 첨가 된 것이고, 단군왕검의 개국 이념인 홍익인간과 삼교합일의 정신은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재홍은 삼국유사와 차이점을 단군(壇君)을 단군(檀君)이라고 하였 으며, 환웅(桓雄)도 단웅(檀雄)이라고, 태백(太伯)을 태백(大白)으로, 솔 도삼천(率徒三千)을 솔귀삼천(率歸三千)이라고 하였다. 단군에 대한 기 술에서 『삼국유사』는 환웅으로부터 부계혈통을 이야기하는데 비해, 『제왕
38) 정인보, 같은 책, 151쪽 39) 정인보, 같은 책, 150쪽
40) 정인보, 조선사연구하, 533쪽 조남호, 한국 선도사상의 3수문화, 소나무, 2017, 75-77쪽
운기』는 단웅으로부터 모계혈통을 주장한다고 한다. 단군은 단웅의 외증 손자이다. 그러면서 모계사회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고 한 다.41) 그가 모계혈통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의 역사관과 관련이 있다.
“아득한 고대 원시적인 여성 중심의 혈족사회에서 모계의 최대 권위를 가지고 신의 일을 주관하는 족장의 지위에 있는 분을 ‘아 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아지 어머니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라는 뜻이다. 존경을 표시하는 호칭으로 ‘아씨’라고 불렀으며 아씨 가 지배한 땅을 ‘아씨땋’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아사달이라고 한 것 이다. 사회기구는 처음에는 채집경제의 토대 위에서 시작하였으 나 차차 수렵경제의 시대를 지나 채소밭을 가꾸는 등 농경의 방법 을 인식하게 되었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씨족 공동체사회는 이미 남계중심의 체제로 전이되었는데 남계의 수장 중에 가장 영 웅적인 인물이 나타나 신인과 같은 숭배를 받았다. 수장은 세력을 확대하여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덩얼(덩걸) 왕금의 지위에 올랐 다. 덩얼은 하늘 또는 천왕으로 매우 영험하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 이다. 왕금은 위대한 임금(위대한 신 또는 위대한 황제라는 뜻)이 니 후세에 단군왕검으로 일컫는 분이다. 아사달을 중앙의 수도로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그런데 수도인 아사달은 백악산이 라고도 하고 평양성이라도 불렀다.”42)
안재홍은 채집·수렵시대에 여신이 먼저 있었고(삼신 할머니), 정착시 대에 남성의 단군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인류학적인 사고를 받아들 인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모계사회와 부계사회로 나눈 뒤, 먼저 모계사회 가 먼저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신 역시도 여신이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
41) 안재홍, 같은 책, 132쪽 42) 안재홍, 같은 책, 98-99쪽
한다.43) 이는 신채호나 최남선과는 다른 생각으로 삼신할머니의 여성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환인에 대해서 안재홍은 그것이 불교식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결 국은 진방 고유의 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남선이 환인을 버리고 환 국을 선택한데 비해, 안재홍은 환인을 신으로 인정하면서도 환국 또한 인 정한다.44) 그에 따르면 “환웅의 ‘환’이 광명 또는 크다는 뜻이고, 단웅의
‘단’은 달이란 뜻으로 환자와 혼용되었다”45) ‘웅’도 ‘매우 크다’는 뜻을 가 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환웅이란 큰 광명의 신을 뜻한다.
안재홍은 환웅이 신단수아래 내려왔다는 것은 당시 하늘에 제사지내던 신성한 숲이나 제단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의 우파니사드 제단철학을 생 각하게 한다고 한다.46)
단군은 천왕이라는 뜻으로 발음이 덩ㄱ얼로 발음된다고 한다. 덩ㄱ얼은 덩그러니 크고 큰 얼을 망라하는 것으로 한얼이고, 직역하면 대령(大靈) 이라고 한다. 몽골어로는 탱려고도, 부여의 등고신(登高神)이 이에 해당 한다. 등고신은 몽골어로 탱그리(騰格里)이고, 한국어 발음으로는 등거리 덩ㄱ얼이다. 단군은 다른 의미로 신왕(神王) 혹은 명왕(明王)이란 뜻을 가 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태양신에서 변한 신, 신, 부르신, 어신, 성모신이다. 이는 최남선의 과 탱그리의 구분을 그대로 이어 받 은 것이다.
그러나 안재홍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신이 모계사회에서는 모계신, 성모 신으로, 부계사회에서는 부계신, 단군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그는 단군을 모두에 해당하는 신으로 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모신 신에서 단 군 탱그리로 변화해야 한다.
43) 김용환, 말리노브스키의 문화인류학, 살림, 2013, 24쪽 44) 안재홍, 같은 책, 362쪽
45) 안재홍, 같은 책, 368쪽 46) 안재홍, 같은 책, 364쪽
단군의 한자는 단군(壇君)47)과 단군(檀君)인데 모두 덩얼의 표음표기로 혼용하여 쓴 것으로, 단군(壇君)에서 단은 제단을, 군(君)은 제정일치의 군장을 뜻하지만, ᄇᆞᆰ한(明王)이란 점에서는 檀君이 표준이라고 한다.48)
안재홍은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단군은 첫째로 성모사회인 아사달에 서 남계중심의 군장이 된 성스러운 조상이며, 둘째는 선사적인 의미로는 종족의 보호신인 태백산신이라고 한다.49)
최익한이 보기에 환인을 제석환인과 관련시킨 점은 삼국유사와 제 왕운기가 동일하다. 이는 이승휴가 불교적인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 고 한다. 그리고 조여적의 청학집에서는 환인을 환인(桓仁)으로 쓰고, 환인과 단군을 조선 선교의 종조로 소개하고 있다. 이의백의 오계집에 서도 환인(桓因)을 환인(桓仁)으로 썼다고 한다.
“환인과 환인이 모두 한님(천왕)의 음역에 불과한 것인데 불교를 숭상하는 파에서는 특히 불경의 제석환인에 부회하여 환인으로 써 나려 왔던 것이다.”
최익한은 환인(桓因)이 대신에 환인(桓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님(하느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음역이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이 불교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선도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47) 조남호, 위의 책, 62-63쪽 48) 안재홍, 같은 책, 133-134쪽 49) 안재홍, 같은 책, 404쪽
Ⅳ. 단군조선이후의 역사
1. 기자조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관계에 대해서 정인보는 『제왕운기』를 비판적으 로 바라본다. 먼저 사기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한 뒤에 다시, 주나라에 입조하였다고 한 것에 대해, “기자가 조선에 왔다면 그 목적은 주나라 왕 실과는 관계를 끊자는 것인데 입조 운운 하는 것은 더더욱 가당치 않다”50) 이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의심하게 한다. 한서 지리지에 기자가 조 선에 가서 예의 농업 양잠·직조·수공을 가르친 것51)은 가르치는 스승과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사제 관계로 보아야지, 그것을 최고 통치자가 되었 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52) 그래서 정인보는 기자가 조선에 책 봉되었다고 하는 것도 날조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은 최고의 통치자를 검 이라고 불렀는데, 기자·기비·기준이라고 하는 기씨가 등장한 것은 “유 랑하던 한족이 자기 민족의 대외 민족의 대외 개척사를 언급할 때 자랑 삼아 멋대로 기자에게 갖다 붙이기 시작한 것이 역시 이러한 이외의 자손 을 얻게 되면서 기자조선의 시조로 둔갑하게 되었다”53)고 한다. 비(丕)나 준(準)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지 기자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군으로부터 비롯된 조선의 왕통이 위로는 태자 부루로부터 한참 후에 해부루 해모수로 연결되고 또 삼국의 건국에 따라 전적 들이 점차 늘어나니 떨어진 그 동안은 수 천년을 공간해 해서 보면 그야말로 허허벌판과도 같은 셈이다. 바늘 끈만한 핏발이 저기 빌
50) 정인보, 조선사연구상, 176쪽
51) 한서 「지리지」,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52) 정인보, 같은 책, 189-190쪽
53) 정인보, 같은 책, 186쪽
밋 여기 반짝하면서 명멸해왔으니 이것이야 말로 고조선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한 큰 줄기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반면 에 기씨조선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바로 이 중간이어서 조선의 옛 왕통을 어지럽히는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고조선의 문헌상의 줄기 를 이중으로 그려 놓은 꼴이니. 이 점은 사기의 작자도 처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54)
정인보는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것은 두가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이어 서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기자조선의 기자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하여 중국의 기자와 다른 것 으로 보았다. 기(箕)의 고음이 개(蓋)이고, 개는 검(儉)·험(險)과 음이 전 이되는데, 왕검에서와 같이 조선에서 검은 최고의 칭호라는 것이다. 전조 선의 왕이라는 의미에서 기자이지, 중국의 기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위략의 ‘기자지후 조선후’(箕子之後 朝鮮候)55)에서 ‘기자지후’가 기자 이 후라는 범칭인 줄 모르고 자손을 가리키는 후로만 여기어 기자 동래설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게다가 기자묘는 중국 하남성에 있기 때 문에 기자 동래설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56) 그리하여 정인보는 단군조 선이 비왕 준왕까지 이어졌다가 위만조선에 의해서 끊긴 것으로 보고 있 다.
그래서 정인보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기자조선을 서술하는 것 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 두 책은 단군의 왕조의 존속기간을 앞에서 본 것처럼 개인이 연대로 하고, 이것을 기자의 연대에 맞추어 역산한 것이 다. 단군조선은 조선왕 준이 남쪽으로 도망한 것을 마지막으로 보아야 한 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인보는 이승휴가 이러한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54) 정인보, 같은 책, 191쪽
55) 魏略 三國志 「烏丸鮮卑東夷傳」, 韓條 56) 정인보, 같은 책, 조남호, 위의 책, 297-298쪽
것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이승휴가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라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단군의 계보가 기자조선 대(代)로 옮겨지지 않았다.”정인보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57)
2. 부여사, 고구려사, 백제사
황의돈은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부여 유적을 소개한 것에 주목한다.
“신이 일찍이 상국에 사신갈 때 요하강가에 이르니 길가에 만들 어 놓은 무덤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여 부마대왕 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동명왕과 관련된 『제왕운기』의 세부분을 지적하면서 『동명왕 편』의 삼국사를 비교한다.
“본기에서 말한다. ‘한나라 신작 3년 임술년 천제가 태자 해모수 를 보내어 부여 왕의 옛 도읍에서 놀게 하였는데, 오룡거를 타니 따라간 사람 백여명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오승들이 되 만한 큰 알을 왼쪽 겨드랑이에서 낳으니, 구름 낀 흐린 날에 사내 아이 태어났다”
“천제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궁궐을 지으니, 어두운 산골짜기에 나무 찍는 소리 울렸는데, 7일째 되는 날이 끝날 무렵 구름과 안개 걷히니, 화려한 궁궐 우뚝 솟아 비 갠 하늘에 빛을 발했네”
57) 정인보, 같은 책, 186쪽
“『동명본기』에서 말한다. ‘비류왕 소양이 말하였다. 나는 선인의 후손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을 하였다’
그는 위의 동명삼사의 고구려기는 이상국집 「동명왕시편」에 인용한
구삼국사기와 부합한 문헌이라고 한다. 본기 단군본기 동명본기
라 함은 다 구삼국사의 일부 편명인 듯 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가치가 있고, 김부식이 멋대로 뺀 것이라고 하고 이것을 한탄한다고 한 다.
최익한은 이승휴가 『제왕운기』의 고구려기 동명왕조에서 고구려를 마한 과 연결시키는 것은 최치원, 삼국유사와 상통되는 견해라고 한다. 그리 고 최익한은 「광주객산동 불상 각자탐방기(11)」에서 이는 진흥왕은 진흥 대제,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제인것과 같이 극존칭이고, 『제왕운기』에서
‘백제시조 이름인 온조는 동명성제가 그의 아버지다.(百濟始祖名溫祚, 東 明聖帝其皇考)’에서 성제는 성왕과 같은 표현임을 들고 있다.58)
안재홍은 부여사에 대해서도, 단군조선을 이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것의 증거를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찾고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 기』에 아사달, 백악, 평양이 나오는데 이는 부여와 같은 뜻에서 나온 것이 라고 한다. 안재홍은 최남선의 문명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대 한민족은 종족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신명의 종족이라는 뜻이다.
이 한번 변하면 이 되는데 그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태어나서 스스 로 움직이는 번식하는 움직임을 표현하여 스스로는 어족이라고 하였는 데 생장하고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또 신이라고도 일컫는데 신성하고 강 대하다는 뜻으로 항상 호용되는 말이다.59), ᆞᆯ, 가 지명, 족명, 국명, 인명에 영향을 비쳤는데, 에서 백악, 평양, 부여가 같은 범주에 드는 것
58) 최익한, 「광주객산동 불상 각자탐방기(11)」, 동아일보 1939년 6월 29일 59) 안재홍, 같은 책, 295쪽
이라고 한다.60)
지명에서 백악은 산이름이고, 평양은 도시 이름이고, 부여는 국가 이름 이 되었다. 단군이 백악에서 일어나 아사달 사회를 발전시켜 처음으로 도 시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하고 다시 어달 어불로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부여국이 되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의 부여조에서 “동명본기에서 말하기를 부여왕 부루가 늙어 서 자식이 없자 산천에 기도를 하여 대를 이을 자식을 비었는데 자신이 모는 말이 곤연에 이르렀다.”(東明本紀曰, ‘扶餘王夫婁, 老無子, 祭山川, 求嗣. 所御馬, 至鯤淵)고 한 것에 대해서, 여기서 곤연은 큰 못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백두산 천지를 말한다고 한다.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수렵하고, 하백 세 딸이 우발청강에 놀러 간 것에 대해서는 웅심산은 곰마뫼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개마산 또는 백두산 이라고 하고, 우발청강은 우ㅅ벌못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두문으로, 지금 의 백두산 남천평에 있는 삼지역으로 위쪽에 있는 신성한 연못이라는 의 미라고 한다.61)그는 부여국 왕실과 고구려 동명왕 탄생에 관한 모든 전설 의 무대는 백두산이고 천지이고 삼지연이고 천평이라는 것이다. 이곳도 아사달의 변형이다.
금와가 재상 아란불의 충고로 도읍을 옮긴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의 가 섭원은 가시벌이고, 이는 성모원(聖母原)으로, 아사달의 변형이다.62)
비류국의 송양왕도 선인의 후예로 단군의 후예인데,63) 송양왕은 송은 부스, 양은 나의 이두표기여서 부스나를 말하고 부스나는 불에서 온 것으 로, 신국 또는 신명국이란 뜻이다.64) 이는 졸본부여로 개마산맥지역이라
60) 조남호, 위의 책, 64쪽 61) 안재홍, 같은 책, 373-374쪽 62) 안재홍, 같은 책, 113쪽
63) 제왕운기 沸流稱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 日淺, 爲我附庸, 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64) 안재홍, 같은 책, 430-431쪽
고 한다.65)
관직명에 대해서 안재홍은 부여의 재상인 아란불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 라, 관직명으로, 아ᆞᆫᆞᆯ로, 왕자나 귀족의 이름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 다. 부여나 고구려 등에서 성왕 명왕 따위의 ᆞᆯ한 또는 부루한 체제에서 관직명으로 쓰인 것이다.66)
백제의 시조인 온조명왕도 제왕운기주에서 은조(殷祚)라고 되어 있 는데, 이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존경스런 작위 명칭이라고 한다. 현대 어로는 언저는 첨가하다는 뜻으로, 온조명왕은 언저한으로 가상신황이 라는 의미다.67) 온조에 대해서는 주서「백제전」에 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건국하였다고 하고, 양서에서 건길지라고 칭호로 불리었고, 그 이전에 는 크치라고 불리웠다.68) 구태, 건길치는 모두 크치라는 것이다.
안재홍은 비교언어학과 모르간의 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기-지-치의 원칙으로 인류사회 발전의 단계성을 주장한다. 그는 기-지-치 계급이 수 장 혹은 대인적 적위, 족장적 지위, 지방 제후, 고대 국가의 공경 상공적 위격으로 변화해 왔다고 한다. 이(夷), 군자국(君子國), 고죽국(孤竹國, 크치) , 부여의 제가(諸加), 구태(仇台, 크치), 간위거(簡位居, 큰우커) 고 구려의 을지(乙支, 우치), 막리지(莫離支, 마리지), 패자(沛者, 패치), 삼 한의 한기(韓岐), 신지(臣智), 읍차(邑借, 아치), 험측(險側, 한지, 검치, 큰치), 번예(樊濊, 번지), 살해(殺奚, 살치), 백제의 백제(百濟, 배치), 가 야의 금관국(金官國, 큰기)을 그 예로 든다.
안재홍은 단군조선이 만들어져 국가를 완성했지만, 신정(神政)적 체제 여서 산만한 형태였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농업과 목축을 병행하는 농업 경제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다 금속시대로 이행하는데 많은 시간이 경과 하였다. 이 때 평양성을 건설하였고,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여 크치-우크
65) 안재홍, 같은 책, 429쪽 66) 안재홍, 같은 책, 222쪽 67) 안재홍, 같은 책, 531-532쪽 68) 안재홍, 같은 책, 48쪽
치가 다스리는 열국이 병립하여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여조 선을 담당하던 단군의 후손들은 정치적 지위를 사양하고, 장당경에서 아 사달로 옮겨 오직 신과 관련된 일과 교화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 조 단군은 태백신인·태평산군· 평양선인 등의 신격으로 존중되었다고 한다.
국가명에 대해서 안재홍은 “백제가 변한에 개국하니 땅이 비옥하였다”
고 한 것에 주목한다. 변한은 한에서 나 또는 베나로, 베나에서 베나 라 즉 변한이라고 한다. 베나는 평양의 구어로 백제의 도성에도 평양이라 는 명칭이 붙어 한강 이남에 평양이 있게 된 이유라고 한다.69)
3. 신라사
최익한은 신라초엽을 “복희씨 다스리던 옛 세상이라 무엇을 더 베풀겠 는가. 조야가 청렴하여 화목함에 속이는 폐단 없었네. 남녀간 화락하였지 만 다른 길로 다녔고, 행인에게 식량은 주지 않아도 대문은 닫지 않았으 며”라는 구절에 대해 복희황제 상세와 같은 이상적 성세로서 극구 칭송한 점을 지적한다. “화조월석에 손에 손을 잡고 노닐며, 별곡가사 마음 내키 는 대로 지어 불렀네”는 전자를 화랑의 풍류로, 후자를 향가의 성행으로 파악하여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고 한 점은 『제왕운기』의 특이점이라고 한 다. 화랑과 향가를 잡아내는 최익한의 통찰을 볼 수 있다.
4. 발해와 고려
황의돈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함과 동시에 북방민족을 대표하여 전통 을 차지할만한 나라이고, 삼국사기에 발해를 편입하지 않은 것만으로 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제왕운기에서 발해를 본기에 편입하여 신라와
69) 안재홍, 같은 책, 523쪽
같이 남북조로 하였으니, 역사가의 창견이 동시에 그 공이 위대하다고 한 다. 발해가 신당서에서 696년에 혹은 699년에 자립하였다고 하여 기원 을 알 수 없었지만, 제왕운기에서 684년이라고 하고, 발해가 242년이 라고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는 얻기 어려운 사료라고 한다.
최남선은 고려의 개국신화가 단군설화를 모방하였다고 한다. 『삼국유 사』가 환웅+웅녀이라면, 『제왕운기』는 성골장군+과부호랑이다. 여기서 환웅천왕은 구룡산천왕인 성골장군과 같은 점이 있는 반면에 웅녀와 과 부호랑이는 다르다. 웅녀가 호랑이로 대치된 셈이다. 최남선은 호랑이는 토템이고, 호경의 경도 토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70)
나카무라는 「고려군왕세계년대」71)는 고려의 선원을 당숙종 성골장군 등 에 견강부회하지만 이것은 일찍이 충선왕도 원나라 사람 채악(蔡鶚)72)의 힐문에 고심했던 것이고, 당의 숙종이 동쪽으로 왔던 것도 원래부터 없던 것이고, 이것도 고려의 국초부터 김관의의 편년통록을 통해서 전승되어 온 것이다라고 한다.73)
고려왕실의 선대에 대한 논의는 일제시대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조선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은 고려시조의 선대가 당 숙종이라고 하는 주장이나 선종 혹은 귀족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승휴가 고려의 시조가 성골장군의 외손이
70) 최남선, 「民族志上의 虎」, 동아일보, 1926.1.29
71) 원문에는 「이조군왕세계연대」라고 되어 있으나 「고려군왕세계연대」가 맞다.
72) 고려사 「고려세계」에는 원나라 한림학사 이름이 없지만, 나카무라는 채악이라고 한 다. 그런데 채악에 대한 기록이 원사에 보이지 않고 王鶚이 나온다.
73) 「고려세계」에 따르면 이 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과 교유하였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찍이 듣 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 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 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 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하였다.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였으니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 고 하였다.”
라 하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고 한다.74) 유학자의 눈에는 성골장군의 존재 나, 당 숙종이 고려에 왔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일제시기 최남선은 성 골장군을 단군설화와 관련지어 설명하는데 비해, 나카무라는 이것을 견 강부회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고려의 선조에 당 숙종이 있었다고 하 는 것은 금과 송이 멸망하고 원이 등장하자, 당의 혈통을 들어서 고려가 자신이 중화를 이었다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이승휴가 고려를 소중화라고 하는 것은 당의 혈통을 이었다고 하는 것에서 나온 주 장이라면 송시열은 조선이 소중화라고 하는 주장은 명의 문화를 이었다 고 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황의돈은 금나라 사람의 조상 오고랄이 고려의 평주출생임을 증명하였 고, 고려과 금나라가 평등형제의 국교를 행하였음을 말하였다. 최익한은 상권의 금국기, 금나라 사람시,75) 금나라 조서76)를 특이 인용하고 주석한 것은 이채롭다고 평가하다.
5. 민속
이병기는 「날러드는 봉」이란 기사에서 봉새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 라 한국에도 있다고 한다.77) 이는 최남선이 용이나 봉이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하는 주장과 대비가 된다.78) 이병기는 우리나라에 봉이 원래 있 다고 하는 근거를 고려 덕종때 봉새가 날라와서 가마귀떼를 몰아냈다고
74) 立齋集 권9 「東史評證」, 高麗自稱爲唐肅宗之後。又稱宣宗之後。又稱唐貴族。按三說皆無 稽。不過金蛙,解慕漱,高朱蒙,朴昔金金首露之說耳。李承休帝王韻記所謂聖骨將軍外孫。
又或謂高句麗之後者。亦未可攷。不足據也。
75) “‘연지는 신선이 살던 굴이고, 삼한은 부모가 살던 고향이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근 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는 금나라가 고려를 부모국으로 인정하였다는 시이다.
76) “대금국 황제는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라고 하여, 형제의 교분을 맺었다고 한 다.
77) 이병기, 「날러드는 봉」, 동아일보 1939.3.5 78) 최남선, 「民族志上의 虎」, 동아일보, 1926.1.29
하는 이야기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덕이 어찌 네 해에 그치랴, 봉새가 와 상서로다”고 한 구절을 들고 있다. 이글의 원문은 이제현의 익제난고
권9에 나온다. 여기서는 『제왕운기』에 나오지 않고 속담으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79) 그런데 『제왕운기』에는 “文景虎宣尤聖明, 龍與麟鳳來呈 瑞”과 “至今餘慶猶不窮, 鸞臺鳳閣流苗裔”라고 하고 있는데 전자의 주체는 중국 한나라의 문제, 경제, 무제, 선제이고 후자는 신라의 혁거세이다. 그 런데 이병기는 전자의 뒷부분과 후자의 앞부분을 혼용하여 쓰고 있다.
Ⅴ. 결론
1930년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동안거사집』에 대한 논의는 단군에 대한 잠시 꺼져가던 불을 다시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제왕운기』
와 『동안거사집』의 발견과 발행은 촉매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의 돈과 나카무라는 발견과 발행에 역할을 하였고, 최익한은 이승휴에 대해 심도깊은 연구를 하였고, 정인보와 안재홍은 자기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이승휴를 논평하였다. 정인보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홍익인간을 말한 점에서 그것을 인정하였지만, 단군을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제왕운기』
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안재홍은 언어적 관점으로 『제왕운기』를 긍정적 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이승휴의 단군 기록 이 조선에서도 정통사관이 되었음을 논증한 점에서 일치한다. 고려 말에 이어 일제 강점기가 단군연구의 부흥기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나카 무라는 일본인 학자 답게 단군전설이 고려 말에 점차로 만들어진 인물이
79) 李齊賢, 曰頭陁山李承休帝王韻記, 曰德何止四年鳳鳥來呈瑞, 考之實錄無之, 惟俚語相 傳, 鳳鳥來儀於威鳳門, 群鳥隨而噪之, 鳳乃飛去, 國人憎烏, 少長彈射, 德宗一代京城無 烏, 云而爲群烏所遂, 豈, 曰鳳哉, 蓋韻記之無稽耳。德王居喪。能盡子之孝。爲政不改父之 道。任用舊臣徐訥,王可道,崔冲,黃周亮之儔。朝廷無欺弊。而民安其生。雖微鳳鳥。尊號曰 德。不亦宜乎。
고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단군의 강역은 고려시대의 판도를 넓히려는 욕 망으로 보고 있는데 비해 대종교계열의 학자들은 단군전설과 판도가 전 조선에 관계한 존재와 국가로 보고 있다. 이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이 단군 을 다르게 보는 점이다. 그에 대한 적절한 조명이 다시금 요망되는 바이 다. 일제 강점기에 이러한 단군연구가 주목되고 있지 않은 것은 단군연구 사에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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