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호 2021 August
시면 상하이의 바람 속에 섞여 있는 역청 냄새와 바닷물의 소금기 냄새 그리고 축축한 습기 냄새를 맡을 수 있겠지만, 얼굴 위로 불어오는 그 바람을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선 안 된다.
- 왕안이, 상하이, 여자의 향기, 180쪽
벌써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중국 상 하이를 헤매고 다니던 때였다. 우기(雨期)가 시작된 즈음이라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웬만한 우산은 순식간에 무용지 물로 만드는 상하이 여름비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까 운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마침 상하이의 옛 프랑스 조계(租界) 지역을 답사 중이었던 덕분에, 우연히 찾은 가게는 유럽의 어 느 곳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근대시기 상 하이 조계지역에 주로 지어진, 정원이 딸린 서양식 건축 ‘화 원양방(花園洋房)’을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이었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거 장제스(蔣介石) 부부의 상하이 별 장이라고 했다. 잠깐 사이 젖은 몸도 말리고 옛 상하이의 분위 기도 느껴볼 겸 하루 식비에 맞먹는 비싼 차를 주문하고 자리 를 잡았다. 엄청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 오래된 건 물 특유의 냄새, 지붕과 창문을 두드리던 세찬 빗소리와 갖가 지 열대과일로 만든 과일 차의 향기와 달콤한 맛이 어우러진 그때는 아마도 보통 정동, 감응, 정서 등으로 번역되는 ‘정동 (affect)’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사실 필자는 오랫동안 상하이에서 근대시기의 역사적 장소
옛 프랑스 조계지
들이 식민지배와 치욕의 상징에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전 환된 극적인 변화에 관심이 있었다. 2000년대 초부터 상하이 에서는 근대시기에 형성된 장소를 둘러싸고 다양한 집단 기억 들이 충돌하거나 경쟁하고, 때로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과거는 통상 조각난 이미지 형태로 회상되기 때문 에 현재의 목적에 따라 선택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되기 쉽다.
이때 보통 1930년대 상하이의 흑백사진, 상품광고 등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는 근대시기 상하이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구성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근대 상하이에 대한 이미지들에는 무감해진 반면, 그 여름 상하이의 찻집 안 에서 느낀 습기, 향기, 맛과 같은 몸의 감각은 오히려 생생했 다. 상하이라는 도시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난징루(南京路)의 백화점, 빅 벤을 본뜬 와이탄(外灘)의 해관 건물,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울창한 옛 프랑스 조계지역의 낭만적 이미지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따라서 문학을 통해 상하이의 진짜 모습 을 찾기 위한 시도는 근대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넘어, 상 하이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 다양한 정동을 포착하는 데서 시작해야 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장아이링
‘동양의 파리’, ‘모험자들의 낙원’은 상하이를 다루는 여행안 내서의 단골 표현이다. 그러나 이 별칭들은 현재의 상하이가 아니라, 1842년 난징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1930년대 국제적 대도시가 되었던 근대시기의 상하이를 부르는 말이다. 급속
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오늘날 G2로 칭해지는 중국에서 상하 이는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이지만, 상하이에 대한 외 부의 관심은 ‘올드 상하이’라 불리는 근대시기에 집중되어왔 다. 필자를 비롯한 국내외 연구자들 또한 1990년대 중국 전 역에서 나타난 이른바 ‘상하이 노스탤지어’에 주목했다. 흥미 로운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보통 장아이링(張愛玲, 1920~1995년)과 왕안이(王安憶, 1954년~) 두 명의 여성 작가 가 지목되며,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들의 작품들은 보통 상 하이 노스탤지어와 연관 지어 이해된다는 점이다.
1920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0년대 상하이에서 작품활동 을 시작한 장아이링은 당시 여성 작가로 명성을 얻기는 했지 만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중공 성립 후 홍콩으로 이주하고 몇 년 후 미국에 정착한 장아이링 은 부르주아적 태도와 친일 및 반공 행적으로 인해 오랜 기간 중국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 작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타이 완과 홍콩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1980 년대부터 <경성지연>(1984년),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1994 년), <반생연>(1999년), <색, 계>(2007년) 등 일련의 작품이 영 화화되면서 중국에서 작가 장아이링 ‘열풍’은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상하이는 장아이링의 고향이며 대부분 작품의 배경이었다.
1930년대 중국의 문학계는 베이징과 상하이의 비교로 뜨거웠 는데 전통적, 귀족적, 관료적인 베이징의 경파문학(京派文學) 과 달리 상하이의 해파문학(海派文學)은 서구적인 동시에 상 업적이라고 여겨졌다. 장아이링은 1940년대 해파문학을 대표 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문학과 공간 • 8
1930년대 상하이 와이탄 모습 1930년대부터 ‘4대 백화점’으로 유명했던 상하이 최대 쇼핑가 난징루
제478호 2021 August 해파문학의 특성에는 작은 어촌이던 상하이가 개항 이후
국제적인 대도시로 변모하고, 서양의 문화가 조계에 사는 중 국인들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킨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조계 는 19세기 불평등 조약으로 항구를 개항한 한·중·일 3국에 만 있었던 공간이다. 개항장(開港場) 내에 일정한 범위를 외국 인 거주지역으로 정하고, 그 지역 안의 행정권을 외국 정부나 거류 외국인들에게 위임한 식민지적 도시공간이었다.
당초 외국인 전용 거주공간이었던 상하이의 조계에는 주변 지역의 혼란을 피해 온 부유한 중국인들과 부동산 개발 같은 상업적 기회를 찾아온 각국의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게 된다.
불과 수십 년 만에 국제적 대도시가 된 상하이의 조계에는 영 국 빌라식으로 지어진 이농주택(里弄住宅), 서양식 정원과 테 라스가 딸린 화원주택, 엘리베이터를 갖춘 고층 아파트, 네온 사인이 빛나는 백화점과 댄스홀 등 중국의 전통도시와는 전혀 다른 경관이 나타났다.
이처럼 서양의 영향이 깊게 새겨진 근대 상하이의 조계 풍 경은 루쉰(魯迅)이나 마오둔(茅盾) 같은 좌익계열의 작가들에 게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자본주의 폐해의 상징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상하이의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나 영국유학을 준비하던 장아이링에게 조계는 살고, 사랑하고, 즐기는 일상 의 장소였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장아이링의 작품들은 대
부분 화원주택, 이농주택, 아파트 같은 상하이 조계를 배경으 로 하며, 주인공의 관심사는 조국의 식민지적 현실, 동서문화 의 충돌,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가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에 있었다. 상하이의 도시성에 대한 세밀한 묘사, 세속적 사랑에 대한 관심 등의 특징을 보이는 장아이링의 작품들은 1990년 대 주로 도시의 소비문화공간과 ‘모던 여성’을 주제로 한 상하 이 노스탤지어의 유행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았고, 장아이링은 시대를 뛰어넘는 근대적 도시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는 7월의 멋진 구름을 보는 것,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부는 백 파이프 소리를 듣는 것, 등나무 의자에 앉아 미풍을 쐬는 것, 소 금물에 삶은 땅콩을 먹는 것, 비 오는 밤 네온사인을 감상하는 것, 이층버스에서 손을 내밀어 녹색의 나뭇잎을 따는 즐거움을
잘 안다.
- 장아이링, 장애령 산문선, 30쪽
왕안이와 도시의 정동
근대시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장아이링과 달리 왕안이는 1954년 난징(南京)에서 태어나 10살 때 상하이로 이주한 후 현 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
플라타너스 가로수
구하고 왕안이를 보통 장아이링이나 근대 상하이 노스탤지어 와 연관 짓는 이유는 1995년 출간된 소설 「장한가(長恨歌)」의 영향 때문이다.
「장한가」는 중국 내에서 각종 문학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화, TV 드라마, 발레극으로 제작되었을 만큼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사실 출간 직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근대 상하이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부상한 2000년 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으면서 왕안이는 장아이 링의 계승자로, 「장한가」는 새로운 해파소설이라 불리게 된다.
지금 웨이웨이가 보고 있는 상하이는 왕치야오가 보기에는 이 미 그 본연의 모습을 잃은 것이다. 전차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소리였지만 이미 사라져버렸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소음 중에 서 이제는 더 이상 땡땡거리며 달리는 전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큰길에 있던 레일도 이미 철거해버렸고 난징루에 깔려 있던 목재 바닥도 20년 전에 이미 철거하고 시멘트로 바꾸어버 렸다. 황푸강변의 조지(george)식 석재 건축도 벽이 검게 변했 고 창문은 회색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었다. 강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혼탁해져서 방파제를 치는 물결 소리도 어느새 몇 음조 낮아졌다.
- 왕안이, 장한가, 126쪽
「장한가」는 1940년대 미스 상하이에 오른 주인공 왕치야오 의 40여 년간 일대기를 다룬다. 급속한 체제변화 속에서 상하
이 부르주아의 화려했던 장소들은 주인공의 몰락과 함께 사라 지거나 쇠락하였고, 이는 독자로 하여금 강렬한 회고의 감정 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왕안이는 여러 차례 이 작품 을 근대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연관 짓는 시각과 거리를 두었다. 「장한가」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노스탤지어는 결코 작가의 의도가 아니며, “내 본의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사 람들은 운명적으로 부여된 시간과 공간에 몸을 기탁하고 살기 마련인데 그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생동성이다”라고 언급했다.
왕안이는 「장한가」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다룬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를 상하이라는 도시공간 을 배경으로 전달하고자 하였음을 강조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와이탄과 난징루 등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대표적 장소가 아니라, 옛 조계의 골목 안 낡고 좁은 집, 양쯔강 하류 강남수향(江南水鄕)의 전통적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강변 마 을, 1970년대 변화된 상하이의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보통 상 하이 사람들의 생활을 생동감 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학작품의 독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들의 몫이지만, 분명 근대 상하이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장아이링과 왕안이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두 작가 의 다양한 작품들, 특히 작가의 경험이 담긴 수필들을 찬찬히 재독(再讀)하면서 두 사람의 새로운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바 로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미각과 같은 다양한 육체 적 감각을 통해 상하이라는 대도시의 정동을 포착한 방식이다.
문학과 공간 • 8
골목 안 작은 공장을 예술문화 공간으로 개조한 타이캉루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점으로 이용되는 스쿠먼주택
제478호 2021 August 왕안이가 상하이의 변화를 근대시기 도심을 누비던 유궤전
차 소리가 사라진 것으로 표현하였다면, 장안이는 수필에서
“난 도시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보다 더 문학적인 사람들은 베갯머리에서 소나무 소리와 파도 소리를 듣는다 하 는데, 난 전차 소리를 들어야지만 잠을 잘 수 있다”라면서 도 시만의 소리를 통해 상하이 도시성을 그려냈다.
나아가 왕안이는 여러 작품에서 좁은 골목길을 마주하며 생활하는 상하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소리, 냄새, 습도, 맛과 같은 다양한 감각으로 표현했다. 특히 무시무시하게 습 한 상하이의 여름, 맞붙어 있는 비좁은 집들에서 나는 냄새와
터는 소리에 자기 집 빨래를 널고, 옆집의 밥 짓는 냄새에 쌀을 씻을 것이다. 이는 바 로 상하이가 사진처럼 멈춰 있는 것이 아니 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만들어내는 소리 와 냄새로 생동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노인들은 거리에 낮은 의자를 들고나와 콩 을 까고, 초등학생 아이들은 네모난 의자를 거리에 내다놓고 숙제를 한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밥을 먹는 사람도 있다.
바람을 쬐거나 햇볕을 쬐는 사람도 있다. 삶 이 이처럼 문밖으로 확장되어 거리 위까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거리는 이처럼 연기 와 열기 속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며칠 동안 날 이 흐리다가 오랜만에 해가 나올 때면 집마다 이불과 요를 밖으 로 내다가 대나무 장대에 얹어 창문틀에 널어놓는다. 이렇게 오 후 서너 시까지 햇볕을 쪼이다가 등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먼지 를 턴다. 이럴 때면 세상이 온통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해진다.
- 왕안이, 상하이, 여자의 향기, 52쪽
따라서 장안이와 왕안이의 작품들이 상하이에 대한 노스탤 지어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화려했던 근대시기의 상하이가 아니라 상하이에서 일상의 정동이 살아 있던 순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마천루와 고가도로로 가득 차 세계의 어느 대도시와 너무도 닮아버린 현재의 상하이에서 그 러한 순간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것 같다.
왕안이. 2017. 상하이, 여자의 향기. 파주: 한길사.
_____. 2009. 장한가 1, 2. 서울: 도서출판 은행나무.
장아이링. 2005. 경성지련. 서울: 문학과 지성사.
_____. 2011. 올드 상해의 추억: 장애령 산문선. 고양: 도서출판 학고방.
한지은. 2014. 도시와 장소 기억: 근대역사경관의 노스탤지어를 이용한 상하이의 도심재생.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참고문헌
스쿠먼주택을 고급상업공간으로 개조한 상하이 신톈디 상하이 구도심의 골목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