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란 인류 문명의 최고(最古) 유산인 동시에, 최신의 기술 집약체다. 구약성서의 바벨,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를 떠올려보라. 도시는 인간들이 집약적으로 모여 살고 있는 ‘삶-의-터’이자, 그 도시가 위치한 자연환경과 습합되어 특수성을 형성하고 무엇보다 그 도시 거주자들의 문화와 역사 를 누층적으로 집약시켜 제시하는 기술 문명적 ‘삶-의-장치’
이다. 따라서 도시를 들여다보면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대 이후에 등장한 메트로폴리스라는 대도시, 최근 초거대 도시인 메갈로폴리스에 이르면 도시는 디스토피아적으로 그 려지거나 비관적으로 묘사되기 일쑤이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 해 도시를 형성했지만, 그 도시가 거꾸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 하는 역기능을 선사하기도 한다. 인간 자체가 결함이 있는 존 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산물인 도시도 완전할 수 없다. 그럼에 도 인간들은 도시를 형성해왔고, 최첨단의 지식과 지혜를 동 원해 자기들 삶의 터전으로서 도시를 형성하고, 가꾸며 이룩 해가고자 한다. 하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도시들의 사례를 통 해 좋은 생의 모습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것은 결국 좋은 도시의 조건이란 무엇일까를 살펴보는 기회 가 되어줄 수 있다.
오늘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도시는 닐 블롬캠프의 영화 <디
디스트릭트 9(2009)
출연: 샬토 코플리, 바네사 헤이우드 감독: 닐 블롬캠프
제462호 2020 April
요하네스버그의 도시재건과 재개발의 상징, 넬슨 만델라 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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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릭트 9>(2009)에 나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 그다. 이 영화 속에서 바퀴벌레의 형상을 한 외계인들이 지구 에 도착한 도시도 ‘요하네스버그’이다. 물론 이는 우연이 아니 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과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 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정책을 1994년까지 시행해 온 것으 로 유명하며 이 정책을 끝장낸 넬슨 만델라의 나라이기도 하 다. 남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도시이며,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 에서 가장 큰 도시 요하네스버그의 상공에 어느 날 외계인의 우주선이 도착한다. 지구까지 날아온 것으로 봐서는 인류보다 더 우월한 과학기술 문명을 소유했음이 분명하지만 우주선의 사고로 지구에 불시착을 하고, 고향 별로 돌아갈 길이 없어져
인간들과 지구에서 함께 생활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생김새의 다름 때문에 요하네스버그의 특정한 지역 에서 빈민굴을 형성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쓰레기 더미의 최종 포식자인 ‘프라운’이라고 부르며 차별과 분리의 정책을 실행한 다. 단지 피부의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역사를 가진 현실 국가와 그 도시들을 상기시키듯 말이다. 인류가 그 러한 차별들을 형식적으로 철폐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며, 또 다른 은밀하고 지속적인 형태의 차별이 아직도 곳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야말로 ‘오래 된 미래’ 같은 영화라 부를 수 있다.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은 지저분하고 하등한 존재, 비루
소웨토지역
소웨토지역의 랜드마크인 올란도 발전소의 쌍둥이 냉각타워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제462호 2020 April 해서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다른 타자들은 공포
스럽지도(에일리언), 신비스럽지도(E.T, 콘택트) 않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게 된, 그러나 기피하고 싶은 대상들이 다. 그래서 그들을 관리해야 하고 처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은 분리와 차별이다. 이 영화 속의 줄거리를 따라가노라 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 그대로 노 출된다.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할 모습의 도시를 위해서 이 영 화 속 도시환경을 조금만 생각해보자.
첫째는 미디어크라시이다. 영화 속 요하네스버그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미디어들을 떠올려보자. 영화 내내 정치가들, 전 문 연구자들, 시민들의 인터뷰가 이 영화 곳곳을 채운다. 관객 들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디어들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는 다. 현실의 우리들이 이미 그런 것처럼 말이다. 다중국가연합 (Mutiple-National Unit)이라 불리는 관료체제의 촬영화면, 뉴 스 보도의 화면, CCTV의 화면들. 심지어 어떤 상점에서도 모 니터가 있고, 거기서는 쉴 새 없이 정보가 흘러나오고 있다.
거기에서는 엄정한 사실을 보도하는 것처럼 하면서 왜곡된 진 실이 방송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 들이 그것을 믿자 그것은 곧바로 사실이 되어 현실을 구성한 다. 즉 대중매체에 의해 관념을 형성하는 정치전략이 실행된 다. 오늘날 우리들의 국가-도시들이 이러한 미디어들을 통해 서 존립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SNS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연합시키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교묘한 미디어 조작을 통해서 자기들의 이득을 실현시키고 있다는 것은 새삼 들추어 내고 싶지 않은 ‘도시-정체(政體)’의 맨얼굴이다.
이러한 미디어를 통해서 두 번째 현실이 구성되는데 그것 은 차별과 분리를 조장하는 공포정치(terrorcracy)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위험 요소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 누가 위 험한 대상이며, 누가 누구에게 그것을 행사하는 것인지 비판 적으로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누군가는 위험하다는 식의 차 별과 배제, 분리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즉 내부의 적들을 생산 함으로써 자신들의 전체적인 정당성을 획책하는 통치방식 말 이다. 그때 형성되는 혐오의 대상이 바로 ‘타자들’이다. 한 사 회에서 타자란 사회체가 스스로를 유지하고 결속하기 위해 배 제와 공포의 담론을 통해 만들어내는 존재들이다. 이를 위해 차이를 생산하고 그 차이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분리와 배제라 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물론 그 차이는 인종이나 성별, 지역이 라는 차이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도시’는 이미 이런 기초적인 차이가 아니라 더 은밀하고 합법적인 차이들을 생산 해내고 있다.
셋째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관료 정치(bureaucracy)다. 외 계인들을 관리하는 담당부서 조직과 기구가 그것들이고, 외계 인들이 철거에 동의한다는 서류 I-27,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두음문자의 조직 기구들이 그렇다. 행정과 서류에 의한 통치 를 뜻하는 이 모습은 동시에 법(규정이나 조항)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들 스스로 외계인의 철거와 이주를 결 정해놓고 그들의 동의 사인을 받으려 하는 것은 오늘날 동의 하지 않으면 가입할 수 없음에도 동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선 택의 자유를 주고 있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다. 그들의 이주와 철거에 대해 선택권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에 동의했다 는 서류만 있으면 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이러한 차별과 분리와 배제의 전략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재 도시의 모습이며, 이런 것들이 없는 곳이 좋은 도시의 모 습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자연환경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공존과 평화의 도시를 표방한다 주인공 비커스가 프라운 크리스토퍼에게 철거를 고지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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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생태도시, 인류 문명의 최첨단을 도 시 깊숙이 생활과 결합시킨 인텔리전트한 스마트도시. 아무리 사람들이 그런 도시의 모습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차별 과 배제가 있는 곳에는 사람다운 삶의 도시가 형성될 수 없음 은 물론이다.
이런 도시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닐 블롬캠프의 후속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엘리시움>(2013)이라는 영화다. 맷 데이먼이 등장하고, <디스트릭트 9>의 주인공 샬토 코플리가 악역으로 등장한다. 엘리시움이란 그리스 신화의 하 데스와 반대되는, 신과 영웅들이 거주하는 사후세계의 이름이 다. 이 이름에 걸맞게 지구는 가난과 빈민의 모습이고 구제불 능의 행성이 되어버렸다. 지구 상공에 인공 생태 과학 기술의 도시를 만들고 거기에는 상류층들만이 고고하고 우아하게 거 주한다. 영화 속에 자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들이 살아 가는 환경에 부족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환경적으로 완벽 하고, 사람들의 모습도 훌륭하며,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보인 다. 굳이 말하자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프랜시 스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 하나 있는데 그 도시는 선택된 사람에게는 낙원이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서 배제된 이들에게는 지구에서 바라보며 꿈꿀 수밖에 없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들만의 낙원’이다. 이 엘 리시움에는 아주 탐나는 최첨단 기술-기계가 하나 있다. 그것
은 어떤 병도 순식간에 고칠 수 있는 최첨단 인공지능 의료캡 슐이다. 사람이 거기에 들어가 누우면, 순식간에 인체의 문제 점을 판단하고 식별하여 그 병을 고쳐버릴 수 있다. 그런데 주 의하자. 이 캡슐은 지구에 사는 빈민들에게는 금지된 기계이 다. 엘리시움 자체에 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기 때 문에 거기까지 올 수도 없고,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시민권 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치료하지 않는다. 고급스런 의료기술이 있음에도 선택된 소수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설정은 결코 황 당하지 않다. 오늘날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기초 상식인 우리 사회가 그 의료 기계를 독점한 엘리시움의 시민들을 욕하긴 어렵다. 하나의 인류이지만 두 개 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에서도 경제력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는 점 을 생각하면 이 영화 속 설정은 결코 공상과학이 아니다.
따라서 엘리시움의 시민들은 어찌 보면 불감증의 미개한 시민들일지도 모른다. 그 기술을 개발하고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독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타자에 대한 상상력 의 결핍은 아닐까. 자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고 있는 것 들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슬프고도 냉엄한 사실 앞에서 자기자신만을 향유하는 누에고치들로 퇴 행해 버린 사람들…….
그리스의 고대 도시 폴리스는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형성되
엘리시움 포스터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엘리시움
제462호 2020 April 었다. 도시의 안과 도시의 밖. 도시 안으로 들어서면 도시의
법률이 작동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경계였고, 시 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분할선이었다. 주지하듯이 인간이 동물 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했고, 그 공동체를 유지 하기 위한 법이 요청되었다. 즉, 도시는 출발부터가 생태적으 로 분할을 통해 형성되어왔다는 얘기다. 물론 그러한 인간 존 재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그러한 차별과 분리와 싸워왔기에 오늘 여기에 이를 수 있었다.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제보다 나 은 우리의 환경을 건설하고 그 조건들을 인식하며 개선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는 법률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었지 만, 여전히 시내 곳곳에서는 차별의 분위기가 조심스레 흐르 고 있고 치안도 불안한 곳이다. 하지만 요하네스버그에는 아 파르트헤이트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넬슨 만델라 국립 박물관도 함께 있다. 2002년에는 바로 이곳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3대 핵심 과제인 환경, 경제, 사회의 상호 의존성과 보 완성을 재확인하면서 빈곤 퇴치, 지속가능한 소비 생활 패턴 으로의 변경, 에너지·자연자원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구체적 이행계획을 촉구하는 세계정상회의도 열렸다. ‘넘버 포’라고 불리던 유색인종 차별로 악명이 높았던 감옥이 자리 잡고 있 던 바로 그 도시 위에서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이 사태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금 재인식하게 되는 것은 지구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전보다 우리는 더 자 주 가깝게 왕래하는 하나의 마을 공동체(지구촌)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 도시처럼 되 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지구의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 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이러한 현실 상황 속 에서 인간과 동물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 서 인간과 자연이, 나라와 민족, 인종과 성별의 차이를 무차별 화하는 것이 아닌 다질적인 종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하 고 모색하는 일은 21세기 지구-폴리스 위에 거주하고 있는 모 든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시민들의 책무일 것이다. 인간 전체 가 환경오염 속에서 자연으로부터 배제당하고 있는, 정치적으 로만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호모 사케르화되고 있는 이 시국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제462호 2020 April
관광객들 앞에서 기타연주를 하고 있는 어린이들
넬슨 만델라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