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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峯 閔鼎重의 정치활동과 경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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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老峯 閔鼎重의 정치활동과 경세론

70)

오 항 녕*

❙국문초록❙

노봉 민정중(1628~1692)은 조선 효종~숙종 초반 시기에 학자이자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간 관료, 정치가 였다.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형 이었다.

민정중의 문집인 󰡔노봉집(老峯集)󰡕이 수 년 전 번역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해제」 외에는 연구가 제출되 지 않았다. 개인 – 인물 연구는 삶에 묻어 있는 관계와 구조, 의지의 작용을 살펴보는 역사 연구의 기초라는 점 에서 그의 삶을 검토하는 것이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뜻에서 본고는 그의 생평 을 아우이자 동료였던 민유중(閔維重), 이들의 스승으로 주로 재야에서 공론을 담당하던 송준길과 송시열, 조 정의 동료였던 김수항(金壽恒) 등의 인적 교류 속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노봉집󰡕을 통해 민정중의 정치활동, 민생과 재정을 중심으로 한 경세론에 중심을 두어 검토하였다.

민정중은 반정 이후 태어났고, 사회와 민생, 국가정책의 시대적 과제가 공적으로 드러나 추진되던 시기에 조정에 들어왔다. 송준길, 송시열을 스승으로 삼았던 그는 서인 산림계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 아래 있었다. 또한 효종 연간에 호남과 영남 어사, 수어청 종사관으로 그는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내던 현종 연간에도 기근과 진휼에 기여할 수 있었다. 갑인예송 이후 굴곡에 도 불구하고 좌의정에 올라 기사사화로 귀양을 가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내수사 혁파, 공납제 개혁 및 진휼 등 재정과 민생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노양처종모법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재정 의 검약을 통한 부세 경감의 기본 원칙을 견지하여, 숙종 후반에 펼쳐진 정책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주제어] 경세론, 송시열, 윤휴, 민유중, 예송, 기사사화, 공납제, 대동법

❘목 차❘

Ⅰ. 머리말

Ⅱ. 학자관료 민정중과 그의 시대

Ⅲ. 정계 활동, 그리고 부침(浮沈)

Ⅳ. 재정과 민생의 경세론(經世論)

Ⅴ. 맺음말

* 전주대학교 사학과(대학원) 교수 / hallimoh@hanmail.net

(2)

Ⅰ. 머리말

노봉 민정중

(1628~1692)

은 조선 효종

~

숙종 초반 시기에 학자이자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간 관료

,

정치가 였다

.

본관은 여흥

(

驪興

),

자는 대수

(

大受

)

이며 호가 노봉이다

.

민여준

(

閔汝俊

)

의 증손으로

,

할아버지는 경주 부윤을 지낸 민기

(

閔機

)

이고

,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

(

閔光勳

)

이며

,

어머니는 판서 이광정

(

李光 庭

)

의 딸이다

.

송준길

(

宋浚吉

)

과 송시열

(

宋時烈

)

의 문인이었던 민정중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둘째 큰아 버지이자

,

숙종의 장인 민유중

(

閔維重

)

의 형이다

.

당시 많은 사림

(

士林

)

이 그러했듯이 지식인이면서 양반

-

관 료였으며

,

사료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얼마간의 전답과 노비를 가진 지주였을 것이다

.

민정중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

그의 문집인 󰡔노봉집

(

老峯集

)

󰡕이

2015

년에 번역되었고

,

해제가 첨부되 어 있다

.

1) 함경도에서 열린 별시

(

別試

)

를 그린 󰡔북새선은도

(

北塞宣恩圖

)

󰡕를 모티브로 김수항과 민정중의 함 경도 활동과 정치사적 의의를 다룬 논문이나

,

2) 민정중의 생애를 일별하고 그의 예론

(

禮論

)

을 살핀 연구가 주 목된다

.

3)

역사 – 현실이 구조로만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의지가 이러저러하게 반영되는 마당이라는 점에서

,

역사 행위 자에 대한 탐구는 피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

필수적이다

.

인간의 오감

(

五感

),

피와 살을 거치지 않은 역사는 없 기 때문이다

.

이런 점에서 역사 연구에서 인물 탐구는 일종의

방법론으로 선택한 개인 연구

(a methodological

individualism)’

일 것이다

.

개인 – 인물 연구는 삶에 묻어 있는 관계와 구조

,

의지의 작용을 살펴보는 역사 일

반의 연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

그 탐구의 한 방법으로 어떤 인물을 통로로 삼겠다는 취지이다

.

따라서 본 고에서 민정중의 아우이자 동료였던 민유중

(

閔維重

),

스승으로 주로 재야에서 공론을 담당하던 송준길과 송 시열

,

주로 조정에서 민정중과 두 축을 이루었던 김수항

(

金壽恒

, 1629~1689)

등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

,

사건 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

본고에서는 󰡔노봉집󰡕4)을 통해 민정중의 정치활동과 민생

,

재정을 중심으로 한 경세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

거기에는 사림들이 보여준 일련의 흐름

,

운동

(

運動

)

이라고 볼 수 있는 경향도 있고

,

민정중의 개성과 특징이 드러나는 사건과 계기도 있다

.

가능하면 포괄적으로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경세론을 제시하여 추후 연구의 발제문으로 삼고자 한다

.

1)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역, 󰡔국역 노봉집󰡕1, 2, 3, 흐름출판사, 2015.

2) 정다운, 󰡔17세기 후반 西人의 咸鏡道 경험과 정치활동:金壽恒과 閔鼎重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내석사, 2019.

3) 김준태, 「노봉 민정중의 생애와 禮論 연구」, 󰡔牛溪學報󰡕38, 2020.

4)󰡔노봉집󰡕은 저자 사후 40여 년이 지난 1734(영조 10)에 민정중의 증손인 민백남(閔百男)에 의해 간행되었다. 민백남이 저 자의 시문을 수집, 편차하였다가 태인(泰仁)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이재(李縡)에게 서문을 받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승정 원일기󰡕 영조 7317, 419, 10928; 󰡔도암집(陶菴集)󰡕 권41 「좌의정노봉민공묘지(左議政老峯閔公墓誌). 한편 현전하는 󰡔노봉집󰡕 판본은 모두 같은 판본으로, 126책의 목판본인데, 규장각(4223), 장서각(K4-5852), 국립중앙 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4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전북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3)

Ⅱ. 학자관료 민정중과 그의 시대

“홀로 서서 외솔에 기대자니 獨立倚孤松 북풍은 어찌 그리 스산한가 北風何蕭瑟 서리와 이슬 또한 서로 치니 霜露且相侵 너희로 인해 걱정 절절하도다 爲爾憂念切 곧은 마음 정녕 스스로 고달퍼 貞心良自苦 오래 추위 이기는 절개 지니니 久有凌寒節 힘쓰거라 해 저물 때 보전하면 勖哉保歲暮 은밀한 기약 길이 결실 있으리 幽期庶永結”5)

󰡔노봉집󰡕의 편차로 보아 이 시는 민정중이

42

세 때인

1669

(

현종

10)

동지사

(

冬至使

)

로 청나라에 사신 갔을 무렵 지었다고 추정된다

.

외솔

,

홀로 선 소나무는 그 자신일 수도

,

조선이라는 나라일 수도

,

그가 생각 하는 공동체일 수도 있다

.

서리와 이슬로 소나무는 근심이 많다

.

그러나 날이 추워지고 해가 바뀔 때 늠름하 게 버티면 결실이 있을 것이다

. ‘

은밀한 약속

[

幽期

]’

이라는 표현은 드러내놓고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

復讐雪恥

)

를 말할 수 없는 시대임을 보여준다

.

민정중은 계해반정

(1623)

이후 태어난 세대이다

.

광해군은 혼군

(

昏君

)

으로 폐위되었고

,

정인홍

(

鄭仁弘

)

과 이이첨

(

李爾瞻

)

은 참형에 처해졌다

.

6) 광해군의 인척이었던 유희분

(

柳希奮

이이첨

(

李爾瞻

박승종

(

朴承 宗

)

등 삼창

(

三昌

)

이 몰락했으며

,

정치집단 대북

(

大北

)

은 조선의 학계와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

북인은 재편되 었는데

,

계축옥사나 폐모론에 대한 처신 여하나 테크노크라트의 실무 능력 유무에 따라 반정 이후 행보가 달 라졌다

.

광해군의 혼정을 비판하다가 귀양을 가거나 조정을 떠났던 북인 인사들은 반정과 함께 다시 등용되 었다

.

이수광

(

李睟光

)

과 임숙영

(

任叔英

)

이 그들이었다

.

이들은 광해군대의 깨끗한 처신으로 명망을 얻었으 며

,

이식

(

李植

이정구

(

李廷龜

장유

(

張維

)

등과도 교유하였다

.

반정 이후 도승지로 등용된 이수광은 정구

(

鄭逑

정경세

(

鄭經世

이준

(

李埈

)

등 영남 남인계 학자들과도 교유하면서

, ‘

북인계 남인

이 형성되는 과정 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

7) 민정중의 처는 평산신씨

(

平山申氏

,

申昇의 딸

,

申翊聖의 손녀

)

인데

,

신씨의 어머 니가 이수광의 손녀이자 이민구

(

李敏求

)

의 딸인 완산이씨

(

完山李氏

)

,

이민구는 민정중의 처외조부가 된 다

.

8) 후술하겠지만 민정중이 윤휴

(

尹鑴

)

와 교유하였던 것은 이민구의 조카

,

즉 이성구

(

李聖求

)

의 아들 이동 규

(

李同揆

)

가 윤휴와 가까웠던 데 계기가 있었던 듯하다

.

9)

5) 민정중(閔鼎重)(), 유영봉(), 󰡔국역 노봉집󰡕1 「외솔(孤松), 흐름출판사, 2015.

6)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국역 추안급국안󰡕 4; 󰡔연려실기술󰡕 권23 「인조조 고사본말 계해년의 죄적(罪籍). 7) 한영우, 「李睟光의 學問과 思想」 󰡔한국문화󰡕13, 1992; 정호훈, 󰡔朝鮮後期 政治思想 硏究󰡕, 혜안, 2004, 113~117. 8)󰡔국역 노봉집󰡕 3 「죽은 아내 증 정부인 신씨 행장[亡室贈貞夫人申氏行狀], 흐름출판사, 2015. 신씨는 딸 하나만 남기고

1646년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민구는 인조 초에는 이이(李珥)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가, 1635(인조 13)에는 이이를 비판하며 상소의 내용을 바꾸었다. 송시열, 󰡔송자대전(宋子大全)󰡕 권50, 「이계주(李季周)에게 답함」 이동규(李同揆) 가 조카.

(4)

계해반정 이후 조정에 들어와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흐름의 한켠으로 아직 조정에 들어 오지 못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

광해군대 폐모론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반정 이후 첫 번째 퇴출 대상이었고

,

계축옥사에 대한 태도 역시 관직 임용에는 혐의가 되었다

.

10) 정엽

(

鄭曄

)

은 인물을 광범위하게 조제

(

調齊

)

하 되

,

폐모론에 참여했거나 이이첨과 결탁한 인물은 절대 불가하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

11) 민정중의 가계

(

家 系

)

도 폐모론 상황과 관련이 없을 수 없었다

.

그는 아버지 민광훈

(

閔光勳

)

의 당시 행적에 대해 다름과 같이 썼다

.

“22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고사(故事)에 입격자를 발표한 다음 날 대궐에 절하며 은혜 에 감사하였는데,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정사(政事)를 어지럽히고 적신(賊臣)이 국권(國權)을 장악하 여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서궁을 재앙의 함정으로 여겨 감히 서궁에 가 서 절하는 자들이 없었다. 그런데 공이 홀로 가서 의례대로 절하자, 입격자들 중에 공을 따르는 자들이 또한 수십 명이나 되었으니, 실로 병진년(1616, 광해군 8)의 일이었다.”12)

광해군 때 서궁

,

즉 인목왕후에게 인사를 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

아버지 민광훈은 인사를 갔다는 것이다

.

이 일 때문이었는지 민광훈은 광해군 때 벼슬하지 못하고

,

반정 뒤 별검

(

別檢

)

으로 등용되었다

.

그리고

1628

(

인조

6) 9

,

친시에 장원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에 올랐다

.

반면 민정중의 외조부

,

즉 민광훈의 장인 이광정

(

李光庭

)

의 경우는 달랐다

.

그는

1618

(

광해군

10)

폐모 를 청하는 정청

(

庭請

)

에 참여한 바 있었다

.

13)반정 직후 이광정을 이조판서로 삼았는데

,

그가 젊어서부터 청 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켜 명류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흉도들이 모후

(

母后 인목대비

)

의 폐위를 청할 때 화를 두려워하여 정청

(

庭請

)

에 참여했으므로 사론

(

士論

)

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고 한다

.

14) 광해군 때 재상이었던 박홍구

(

朴弘耉

)

가 인조 당시 여전히 좌의정으로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

이튿날 이광정이 판서로서 정사

(

政事

)

에 참여하자 김자점

(

金自點

)

은 면전에서 폐모의 정청에 참여한 사람이 이조판서가 될 수 있느냐고 질책하였고 이어 이광정이 부끄러워 물러갔던 일도 있었다

.

그래도 이광정이 반정 이후 등용되었던 것은 정청 이후 관직을 멀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렇게 정계

,

학계가 개편되면서 계해반정 이후 두 차례의 호란

(

胡亂

)

이 있었다

.

민정중은 어린 나이에 병 자호란을 겪었는데

,

이 난리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

9) 그 일단은 󰡔국역 노봉집󰡕 6, 「황주경에게 보내는 편지[與黃周卿]」 참고.

10) 오수창의 조사에 따르면 반정 후 처벌된 관원은 40%에 이르며, 인조대 등용된 인물 75(25%) 중 계축옥사부터 폐모론이 있던 시기에 삼사와 이조에 참여했던 인물은 8명에 불과하여, 폐모론의 참석 여부가 반정 이후 등용의 중요한 기준이라는 점을 방증해준다. 오수창, 「仁祖代 政治勢力의 動向」 󰡔한국사론󰡕13, 1985, 57~59.

11) 󰡔인조실록󰡕 289(신묘).

12) 󰡔국역 노봉집󰡕3, 「돌아가신 아버지 통정대부 수 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부군 행장[先考通政大夫守江原道 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府君行狀]

13) 󰡔광해군일기󰡕(중초본) 1014(갑자).

14) 󰡔인조실록󰡕 1314(갑진).

(5)

“아버지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당시 오랑캐의 선 봉이 갑자기 들이닥쳐 경성(京城) 사람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다. 어머니는 두 아이들과 헤어졌다가 이 틀 뒤 부평(富平)에서 만났다.

부평과 강도는 겨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사람들이 강도를 천혜의 요새로 여겼으므로 집 안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따라가자고 청하였다.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시부모님께서 남쪽에 계시니, 돌아가 의지해야 도리에 맞는다. 섬 안으로 들어간다면, 길이 막혀 부모님께 걱정을 끼 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산을 넘고 시내를 건너 천리 길을 달려갔다.”15)

이들이 피난 간 곳은 경주

(

慶州

)

였는데

,

할아버지 민기

(

閔機

)

가 경주 부윤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

난리 뒤 에 아버지 민광훈은 벼슬할 뜻이 없어 지방을 떠돌았다고 한다

.

장악원 정

(

掌樂院正

),

사헌부 장령

,

집의로 불렀지만

,

조정에 들어가 사양하고 그만두었다

.

민광훈은 아버지 민기와 여주

(

驪州

)

에서 살면서 직접 논밭을 갈고 씨 뿌리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고 한다

.

집안이 곤궁하고 자신도 병을 앓았다

.

잠시 성주 목사

(

星州牧 使

)

로 나갔는데

,

거처가 일정하지 않다 보니 가족들이 모두 풍토병을 앓기도 했다

.

잇따라 기근이 들어 나물 을 캐먹고 아이들까지도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는 상황이었다

.

이처럼 가까이는 가난과 굶주림이

,

고개를 들 면 굴욕과 자조가 섞이고

,

분노와 희망이 교차하는 시대였던

1649

(

효종즉위년

)

에 그는 정계에 발을 딛었다

.

이 시기 학자 – 관료들은 시대의 과제에 맞부딪혀야 했다

.

그런데 역사와 문명이 왕조나 국가와 동일시되 지 않았듯이

,

지식계층으로서의 사림

(

士林

)

은 국왕과 대비되는 신하만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

그들은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신념을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

거기에는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

=

인민

=

백성 의 삶에 대한 대변이 포함되어 있었다

.

상소와 봉사

,

차자

,

경연의 언명에 나타난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어법 이 보여주는 공식성에는 인민의 절박한 삶을 대신 호소하는 지식인의 숙명적 언어가 내장되어 있었다

.

어떤 사회나 문명이 민생과 재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만났을 때 그 극복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에 따라 생존이 결정된다

.

사람이 병이 났을 때 병을 이겨내야 살 수 있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

민정중이 살았 던 시대가 그런 과제를 안고 있었다

.

이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사회 일반의 과제가 제기되었고

,

지식인 집단 은 그 방향과 대안

,

비전을 제시해야 하였다

.

하지만 개혁의 시대에는 갈등과 반동이 함께 닥치기 마련이었 다

.

사회에는 관성과 관례가 있으므로 개혁에 저항하는 보수성

(

保守性

)

은 나름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

그 리고 국왕을 위시한 왕실은 대체로 그 보수성의 정점에 있었다

.

거기에 변화의 불확실성

,

정책에 대한 이해 나 설득력의 부족이 더해지면 개혁은 더 시간이 걸렸다

.

기존 연구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그 저항과 반동을 극복하면서 대동법

,

균역법

,

노양처종모법 등이 만들어 졌다

.

이는 민생 안정의 기초 위에서 정부 재정이 유지되는 토대를 이룰 수 있었다

.

율곡 이이의 문제 제기 와 방향 제시

,

김육

(

金堉

),

송시열

,

송준길

,

유계 등의 해결과 극복 과정을 거쳐 조선후기 새로운 사회 및 국 가 질서가 정착되는 시기를 민정중은 살았다

.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가져가고 싶었을까

?

「스스로 경계하는 명문

[

自警銘

]

」은 그의 청년 시절 다짐인데

,

이이의

이일분수

(

理一分殊

)’

, 16

(

)

심법

(

心法

),

성 15) 󰡔국역 노봉집󰡕 3, 「돌아가신 어머니 정부인 이씨 행장[先妣貞夫人李氏行狀].

(6)

(

)

과 경

(

)

에 대한 몰입을 보여준다

.

사람이 천지간에 태어나 人生天地 만물의 으뜸 되었나니 首立萬物 받은 본성 누구나 선하나 性賦均善 맑고 탁함 기질 다르구나 淸濁異質 마음 본래 위태로운 것이라 心兮本危 성실 아니면 밝을 수 없고 非誠不明 성실에도 길이 있거니와 誠之有道 경 이후에야 가능하다네 敬而後能(중략) 사악한 욕구 물리쳐 없애면 邪欲退闢 의리 절로 드러나는 법이라 義理自著 이를 일러 성, 경이라 하니 寔謂誠敬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하리 潛心於此16)

Ⅲ. 정계 활동, 그리고 부침(浮沈)

민정중은 효종이 즉위하던

1649

년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관직을 시작하였다

.

민정중에 이어 이듬해인

1650

년 큰형 민시중

(

閔蓍重

)

이 사마시

(

司馬試

)

에 장원하였고

,

동생 민유중은 매제 이연년

(

李延年

)

과 함께 문 과에 급제하였다

. 1652

년에는아버지 민광훈이 승정원에

,

이연년이 사간원에

,

민정중이 홍문관에

,

민유중이 사관

(

史官

)

으로 예문관에 들어가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

당시 조정에서는 성혼

(

成渾

)

과 이이

(

李珥

)

을 문묘

(

文廟

)

에 종사

(

從祀

)

하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

영남 남 인은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면서 학문 연원과 정치 세력으로서의 기반을 재구성하였다

.

17) 기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이황은

선생

(

先生

)’

이었고

,

이이와 이황을 별개의 학파로 인식하는 태도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

18)하지만 영남 남인들은 문묘종사 논의를 거치면서 이이의 학문을 이황의 주리

(

主理

)

에 대비되는 주 기

(

主氣

)

라고 비판함으로써19)이황에 대한 사승

(

師承

)

관계를 전유

(

專有

)

하게 된다

.

20)이때만 해도 민정중은

16) 󰡔국역 노봉집󰡕 3, 「스스로를 경계하는 명문[自警銘]. 17세 때인 1644(인조 22)에 지었다. 17) 오항녕, 「朝鮮 孝宗代 政局의 變動과 그 性格」 󰡔태동고전연구󰡕9, 1993, 59~63.

18) 종종 영남학파=퇴계학파, 기호학파=율곡학파로 정리하는 논자들이 있는데, 필자는 이런 구도에 의문이 크다. 이 점은 별도 의 연구를 통해 밝혀보겠다. 김준태는 노론 주류이면서 󰡔퇴계집󰡕을 탐독했다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고 특기했는데, 는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서인 사림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19) 󰡔효종실록󰡕 1222(을사).

20) 󰡔숙종실록󰡕3514(기축). 이런 흐름은 이현일(李玄逸)에 이르러 정식화되었다. 이현일, 󰡔갈암집󰡕 「율곡이씨논사단 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문석윤, 「葛庵 李玄逸의 性理說」 󰡔민족문화󰡕29, 2006.

(7)

문묘종사 논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

그의 친구인 김수항

(

金壽恒

)

과 박세채

(

朴世采

)

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깊숙 이 논쟁에 참여하였다

.

민정중은 조정의 다른 현안에 개입하였다

.

바로 소현세자빈인 강빈

(

姜嬪

)

옥사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었다

.

인조 당시에도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여론이 많았지만

,

효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

효종

2

3

,

조익

(

趙翼

)

이 쓴 윤방

(

尹昉

, 1563~1640)

의 시장

(

諡狀

)

이 논란이 되었다

.

이 시장은 이식

(

李植

)

이 살아 있을 때 지은 것을 윤방의 아들 윤순지

(

尹順之

)

가 조익에게 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

그런데 강빈을

빈궁

(

嬪宮

)’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고치지 않고

,

또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앞 글자와 연서

(

連書

)

도 하지 않은 채 시장을 예조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

조익은 자신의 실수였다고 해명하였으나

,

효종은 조익의 상소를 의금 부로 내려 조사하게 하였다

.

효종은 이 사건이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강빈 신원

(

伸寃

)

의 가능성을 한번 시험 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은 것으로 판단하였고

,

조익은 삭탈관작 되었다

.

이 무렵 민정중은 「응지상소

(

應旨上疏

)

」를 올려 효종에게 여덟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

첫 번째는 외임

(

外任

)

을 잘 가려 뽑을 것

,

두 번째 인재를 헤아려서 적재적소에 발탁할 것

,

세 번째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을 소통시킬 것

,

네 번째 인륜을 밝혀 교화를 펼칠 것

,

다섯 번째 명분

(

名分

)

을 엄하게 하고 예 모

(

禮貌

)

를 높여 나라의 기강과 조정의 위신을 높일 것

,

여섯 번째는 기강을 진작시켜 염치를 권장할 것

,

일 곱 번째는 당시 조정에서 문제가 된 사안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

,

여덟 번째는 전례

(

典禮

)

를 중시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

21) 민정중은 일곱 번째 조항에서 조익

,

유계 등의 억울함을 풀어달 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

해를 넘겨 친청파

(

親淸派

)

로 인조 후반 조 귀인

(

趙貴人

)

과 함께 권력을 농단해 온 김자점

(

金自點

)

의 역모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

, 1652

(

효종

3) 4

,

부교리 민정중

(

閔鼎重

)

은 「응지상소」에서 강빈 옥사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

민정중은 강빈 옥사가 김자점과 조 귀인의 모함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

민정중은 기밀이라는 말과 함께 상소 내용을 첩황

(

貼黃

)

에 써서 올렸다

.

“강역(姜逆)의 옥사가 처음에 나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조역(趙逆 조 귀인)과 김적(金賊 김 자점)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항 대중들의 말에 더러 두 역적의 간교함이 위 로 성상의 귀를 가리울 수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바깥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모두 통촉하시어 두루 살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혹시라도 그 사이에 한 가지라도 의심할 단서가 있으면, 형제의 인륜은 하늘에서 근본한 것이니만큼 속히 신설하여 구천에 있는 영령을 위로하고 재앙(災殃)과 어긋난 기운을 이완시키십시오.”22)

민정중의 말은 온건하고 조심스러웠지만 행간의 의미는 분명했다

.

효종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

효종은 민 정중을 불렀다

.

효종은 상법

(

常法

)

으로 말하면 중형

(

重刑

)

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다는 위협적인 언사를 잊지 21) 󰡔국역 노봉집󰡕 1, 「응지상소 신묘년(1651, 효종 2)[應旨疏 辛卯].

22) 󰡔국역 노봉집󰡕1, 「응지소(應旨疏); 󰡔국역 효종실록󰡕3426.

(8)

않고

,

조 귀인과 김자점의 행위는 의심할 만하지만 소현세자의 장자

(

長子

)

는 나라를 맡길 인물이 되지 못하 였으므로 두 역적이 인조를 속여 강빈 옥사를 꾸밀 이유는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

23)

효종은 이 일을 일회성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면담 당시에도 민정중의 상소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 는 의심을 내비친 적이 있지만

, 5

월 들어 구체적으로 조석윤

(

趙錫胤

)

을 지목하여 그가 민정중을 시켜 말을 꺼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

조석윤이 민정중의 고무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효종은 강빈 옥사에 대해 재론하 는 자는 역적으로 다루겠다고 하교하였다

.

또 효종은

6

월 영의정 정태화

(

鄭太和

)

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민정중의 상소에 대해 언급하면서

,

당시에 민 정중에게 불문에 부치겠다고 한 자신의 말이 경솔했다며 후회하였다

.

24) 그때 민정중을 어떤 방식으로든 처 벌했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

이처럼 강빈 옥사를 둘러싼 여론에 대해 효종은 민감해져 있었다

.

강빈 옥사는 선왕 인조

(

仁祖

)

의 판단으로 이루어졌고 그 리더십과 연관되기 때문에 효종은 강력히 대처하 였다

. 1654

(

효종

5),

황해도 관찰사의 지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홍욱

(

金弘郁

)

은 응지 상소에서 강빈 옥사 를 언급하였다가 장살

(

杖殺

)

당했다

.

25)이 사건으로 정국은 싸늘하게 식었고

,

북벌을 염두에 둔 군사정책과 과도한 노비추쇄로 이반되었던 민심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이후

1656

년 수어청 종사관

,

26)

1658

년 영남 암행어사로 민정중은 군정과 민생을 살피는 역할을 맡았다

.

기록을 보면 민정중은 행정 관리와 실무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

27) 효종은

1657

년경부터 서인 산림

(

山林

)

을 위시하여 조정으로 인재를 불러 난국을 타개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가져갔으나

,

얼마 안 가 세상을 떴다

.

곧이어 발생한 정계와 학계의 전환점은 예송 논쟁이었다

.

효종이 세상을 뜬 뒤

,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

(

慈 懿大妃

)

조씨

(

趙氏

)

의 상복을 어떻게 입을지 하는 전례

(

典禮

)

문제로 기해예송이 시작되었다

.

송시열은 사왕

(

嗣王

)

의 방식 중 하나인

체이부정

(

體而不正

,

몸을 받은 아들이지만 장자는 아님

)’

에 입각하여 기년복

(

期年 服

)

을 주장하였다

.

이는 효종의 정통성을 상복에 어떻게 정리하고 반영하는가의 문제였으며

, 3

년복을 거듭 입음으로써 생기는 정무의 공백을 피하려는 실질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였다

.

28) 정태화

,

송시열의 기년복설 과 달리

,

허목은

차자가 장자가 되었다

[

次長子

]’

는 설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고

,

윤휴

(

尹鑴

)

어머니도 군 왕에게는 신하이다

[

臣母說

]’

라는 설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다

.

이때는 정태화의 조정으로 국제

(

國制

)

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론이 났다

.

그런데 윤선도가 윤휴의 삼년복설을 지지하는 동시에 송시열의 기년복설이 효종의 정통을 부정하는 설이 라고 주장하면서29) 예송논쟁은 전례 논쟁에서 가장 민감한 왕통 논란으로 비화할 상황이 되었다

.

이 국면은

23) 󰡔국역 노봉집󰡕 3, 「연중설화(筵中說話). 24) 󰡔효종실록󰡕 363(계묘).

25) 오항녕, 앞의 논문, 1993, 66~69. 김홍욱의 사건은 1659년 효종과 송시열의 기해독대에서 주요 논제였는데, 이를 통해 김홍욱은 신원(伸冤), 복권되었다.

26) 󰡔국역 노봉집󰡕 3, 「수어청 종사관으로 재직할 때 주장에게 보고한 첩장[守禦從事官時申主將牒狀].

27) 󰡔국역 노봉집󰡕3, 「영남 암행어사 별단 서계[嶺南暗行御史別單書啓]. 민정중의 암행어사 활동은 본 발표회의 김건우 교수 발표문 참고.

28) 오항녕, 「春秋大義와 禮訟의 기억 – 宋時烈과 魏伯珪」, 󰡔태동고전연구󰡕 27, 2011.

(9)

윤선도가 삼수

(

三水

)

로 귀양 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

30) 장차 사화

(

士禍

)

로 번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

민정중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예론(禮論)으로 서로 다툴 때, 윤휴가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로 한다는 설을 앞장서서 말하였기 때문에, 판서 송준길(宋浚吉)도 그와 절교하였습니다. 윤선거는 윤휴와 가장 친하여 정이 두터웠는데, 단지 윤선거만 윤휴와 친했던 것이 아닙니다. 신 또한 윤휴와의 교분이 형제와 같았으니, 그의 마음이 과연 사류(士類)를 해치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어 곧바로 서로 절교하지 못했습니다. 사우(士友)들 가운데에도 끝내 그와 절교하지 못한 자가 더러 있었습니다. 윤휴와의 절교를 일찍 했는 지 늦게 했는지는 논의할 만한 대단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군자가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에 손상이 있다는 점에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신 또한 여러 번 송시열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31)

예송의 여파가 가라앉은

1682

(

숙종

8) 11

24

,

민정중이 좌의정으로 주강

(

晝講

)

에 입시하였을 때 숙 종에게 한 말이었다

.

송시열의 견해에 대해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로 한다

고 반박한 윤휴의 견해는 윤선 도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였다

.

자칫 예론이 사화로 번질 수 있었던 것이고

,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

예송은 효종비인 인선왕대비

(

仁宣王大妃

)

장씨

(

張氏

)

가 세상을 떴을 때 재연되었다

.

아직 살아 있던 대왕 대비 조씨의 상복을 어떻게 입을지가 재론되었다

.

갑인예송

(

甲寅禮訟

)

이었다

.

결국 현종은 송시열의 기년복 설을

잘못된 예법

[

誤禮

]’

으로 판정하였다

.

32) 곧이어 유학

(

幼學

)

곽세건

(

郭世楗

)

사특한 논의에 빌붙었던 김수흥

(

金壽興

)

도 귀양을 보냈는데

,

사특한 논의를 창도한 송시열이 법 적용에서 어찌 빠진단 말인가

.”

라고 상소했다

.

숙종은 곽세건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종의 묘지명에 그 사실을 기록하려 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거 부했다

.

이단하

(

李端夏

)

에게 묘지문을 맡겼으나 그도 거절했으므로 숙종은

스승만 알지 임금은 모른다

며 이 단하를 파직시켰다

.

이어 송시열은 덕원부

(

德源府

)

로 귀양 보냈다

.

33)

예송에서 왕과 사서인

(

士庶人

)

의 상례 준거를 구별하여 본 부류는 김우명

,

김석주 등 외척과 허적

,

그리고 윤휴를 비롯한

북인계 남인

이었다

.

여기서 곽세건 등 영남 남인과

,

학계에서 기호 남인이라고 부르는

북인계 남인

이 예송을 기화로 결속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

갑인예송은 사상사적으로 볼 때 폐모론에 이어 신모설

(

臣母說

)

이 다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정치세력으로 보면 북인 여당

(

餘黨

)

청남

(

淸南

)’

으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등장했다는 점에서 광해군 폐위 이후 북인 세력의 재결집이라는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다

.

한편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갔던 김수항과 달리

,

갑인예송에서 민정중은 예송 당사자로 지목되지 않았 다

.

민정중과 윤휴는 원래 돈독한 관계였다

.

민정중은 효종 때 윤휴를 천거하였고

,

효종이 직접 만나보겠다 고 한 적도 있었다

.

또한 민정중의 말을 듣고 송시열은 윤휴를 지평

(

持平

)

에 추천한 적도 있었다

.

29) 󰡔현종실록󰡕 1418(임인).

30) 󰡔현종실록󰡕 1419(계묘).

31) 󰡔국역 노봉집󰡕 3, 「연중설화(筵中說話). 32) 󰡔현종개수실록󰡕 15715(정축).

33) 󰡔숙종실록󰡕 1113(임신).

(10)

“성상이 이르기를 ‘산림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혐의가 없는 자라면 내가 등용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가리키느냐?’라고 했다. 민정중이 대답하기를 ‘지금 윤휴, 윤선거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문학으로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고사(故事)처럼 불러 보시고 각기 품은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 만하면 등용하고, 쓸 만하지 않으면 돌려보내 더욱 힘쓸 수 있게 하 는 것이 옳습니다. 윤휴는 윤효전(尹孝全)의 아들이고 윤선거는 윤황(尹煌)의 아들이니, 모두 세신(世 臣)의 분의(分義)가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하였다.”34)

앞서 민정중이

송시열에게 책망을 받았다

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

이단상

(

李端相

)

이 윤휴 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

그 역시 민정중을 책망하며

듣자니 그대가 희중

(

希仲 윤휴의 자

)

을 혹 백이

(

伯夷

)

에 비기고 혹 제갈양

(

諸葛亮

)

에 견준다 하니 이 무슨 말인가

?”

라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

35)

1675

(

숙종

1) 2

,

민정중은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곧 탄핵에 직면했고 시골로 낙향하였다

.

또 송시 열을 추종한다고 하여 삭직 당하고 문외출송되었으나

,

숙종은 바로 민정중을 석방하였다

. 1678

(

숙종

4)

민 정중은 윤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

윤휴가 다시 반박함으로서 둘은 사실상 결별의 과정을 밟았다

.

36)민 정중은

신과 송시열

·

송준길 등은 모두 사우

(

師友

)

의 의리가 있음을 국인

(

國人

)

으로서 알지 못하는 자가 없 습니다

.”

라며

,

자신도 처벌해달라고 청하였다

.

그리고 효종 때 자신이 윤휴를 천거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 다

.

이듬해 결국 민정중은 장흥

(

長興

)

,

민유중은 흥해

(

興海

)

,

이숙

(

李䎘

)

은 명천

(

明川

)

,

이익

(

李翊

)

은 양덕

(

陽德

)

,

이선

(

李選

)

은 귀성

(

龜城

)

으로 귀양 갔다

.

37)숙종은 무슨 일인지

10

월이 되어 방면을 명하였고

,

경신대출척 이후 민정중은 조정에 복귀하였다

.

그로부터

9

년 뒤 기사사화

(

己巳士禍

,

환국

)

38)로 정국은 또 한번 흔들렸다

.

숙종은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

(

張禧嬪

)

을 왕비로 세우고

,

조정에 남인을 대거 끌어들였다

.

인현왕후의 폐위가 선포되자 박태보

(

朴泰 輔

)

를 소두로 숙종의 조치에 항의하였다

.

박태보는 숙종의 혹독한 형신

(

刑訊

)

에도 불구하고 소견을 바꾸지 않았다

.

숙종

15

(1689) 4

25

,

한밤중의 일이었다

.

이 과정에서 숙종은

민진후

(

閔鎭厚

)

형제가 너를 사주하였느냐

?”

라고 따졌다

.

민진후 형제란 인현왕후의

34) 󰡔국역 노봉집󰡕3, 「연중설화(筵中說話).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은 1605(선조 38) 문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관찰사·경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윤선거의 아버지 윤황은 충청 병마절도사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으로, 159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정 ·승지·대사성·대사간·이조 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35) 󰡔숙종실록󰡕 1425(계축).

36) 󰡔숙종실록󰡕 4612(신사).

37) 󰡔숙종실록󰡕 5614(정축).

38) 학계에서는 환국이라고 하고, 사료에서는 경화(更化), 사화(士禍) 등의 용어로 나온다. 본고는 사류(士類)에 대한 폭력적 탄 압으로 상당수 인물을 살상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기사사화라는 용어를 쓴다. 사화는, 첫째, 공론의 작동이 중단되는 지 점에서 발생한다. 개인 또는 특정 세력의 무고(誣告), 권신(權臣)의 야욕, 국왕권의 자의적 행사 등이 계기가 된다. 둘째, 어떤 경우는 국왕권의 폭력적 행사로 진행된다. 셋째, 그 폭력성이 상당 규모의 인명 살상을 낳는다. 이 과정에서 조정을 꾸려갈 정치세력의 교체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므로, 기사년의 정국변동은 환국이나 경화보다 사화가 적절하다고 생 각한다. 사화에 대한 개념화는 사림 개념과 연동되어 있으며, 여전히 정치사, 사상사의 주요 주제이다. 사림에 대한 논의는 일단 현단계에서는 이정철, 「조선시대 사림의 기원과 형성과정」 󰡔조선시대사학보󰡕 73, 2015 참고.

(11)

오빠인 민진후와 민진원

(

閔鎭遠

)

을 가리킨다

.

민진후 형제 역시 의금부에 잡혀와 하옥되었다

.

숙종의 심문에

,

민진후 형제는

지금 상중이라 외부와 내왕이 끊어졌습니다

.

더욱이 근래 두려워하여 견책을 기다리는 중이 라 친지와 족당

(

族黨

)

도 모두 사절하였고

,

박태보와는 본래 서로 혐의가 있었습니다

.

형 박태유는 상소를 올 려 망부

(

亡父 민유중

)

를 거짓으로 모욕하였으니

,

어찌 그 아우를 부추겨서 상소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

라 고 답변했다

.

이는 조정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숙종도 심문을 더 진행하지 않고 이들을 풀어주었 다

.

39)

민정중의 신변도 온전하기 어려웠다

.

장령 김원섭

(

金元燮

)

과 헌납 남후

(

南垕

)

민정중이 평생 계획한 것 은 위엄을 부리고 권세를 농락하는 꾀가 아닌 것이 없었고

,

밤낮으로 한 일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남을 해치는 일이었습니다

.

송시열을 아비처럼 섬겨 은밀히 방략

(

方畧

)

을 받아 조정에 앞잡이를 두고 팔도에 당파 의 응원을 벌여 두어 송시열이 기세를 펴서 마음대로 흉함을 행하게 한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주선한 것입니 다

.”

라고 탄핵하면서 극변

(

極邊

)

에 위리안치하라고 청하였다

.

40)

지평 조식

(

趙湜

),

정언 윤정화

(

尹鼎和

)

등은 민정중을 위리안치에 그치지 말고 안률

(

按律

)

하여 처단할 것 을 청하였다

.

조정뿐 아니라 경상도에서 유생들의 상소도 이어졌다

.

경상도 진사 이원백

(

李元白

)

등이 상소 하여

나라 사람이 민정중이 있는 것만 알고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한 지 오래였으니

,

상벌의 권한을 민정중 이 잡았고

,

생살

(

生殺

)

의 권력도 민정중에게 옮겨갔다습니다

.”

라며

,

민정중을 진

(

)

나라 양후

(

穰候

)

와 한

(

)

나라 양기

(

梁冀

)

보다 더하다고 비난하였다

.

41)주강에서 대사헌 이현일

(

李玄逸

)

역시 민정중을 죽이라고 청하 였다

.

42)

민정중에 대한 집요한 처형 요청은 해를 넘겨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

귀양 간 지 삼 년이 지난

1692

(

숙종

18)

귀양지 벽동

(

碧潼

)

에서 민정중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그를 처형하라는 논계는 지속되었다

.

갑술환국으로 세상이 조금 달라지자

,

관작이 회복되었고 조정에서 문충

(

文忠

)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Ⅳ. 재정과 민생의 경세론(經世論)

17

세기 중엽

,

조정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던 민생 관련 정책은 내수사 혁파

,

대동법

,

호포법

,

노비종모법 등이었다

. 1652

(

효종

3),

민정중은 「응지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먼저 없애야 할 것을 말한다면, 궁가(宮家)가 전토(田土)를 백성에게 빼앗아서 널리 차지하는 것과 사대부가 장업(庄業)을 백성과 다투는 것입니다. 또한 구법(舊法)을 준용하여 봉록을 넉넉히 지급함으

39) 󰡔국역 숙종실록󰡕1559(갑진).

40) 󰡔국역 숙종실록󰡕15719(계축).

41) 󰡔국역 숙종실록󰡕15918(신해).

42) 󰡔국역 숙종실록󰡕15104(정묘).

(12)

로써 농사를 대신하기에 충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43)

그는 급선무가

농사를 권면하고 궁핍한 이를 진휼하는 것

이라고 전제하고

,

가장 먼저 없애야 할 폐해로 궁가가 백성에게서 농지를 빼앗는 것

,

사대부가 백성들과 집터를 다투는 것이라고 하였다

.

법대로 녹봉을 주 어 농사를 넘보지 못하게 하자는 뜻이었다

.

송시열은 봉림대군

(

뒤의 효종

)

의 사부였을 때

대군이 소민

(

小民

)

과 전답

(

田畓

)

을 다투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경계하였던 적이 있었다

.

44) 그러나효종이 즉위한 뒤 수진궁

(

壽進宮

내수사

(

內需司

)

및 여러 궁가에 소속된 염분

(

塩盆

어전

(

漁箭

시장

(

柴場

)

중에서 줄인 것은

10

분의

1

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

45) 민정 중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

민유중도 효종 연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근래에 여러 궁가에서 외방에 전장(田莊)을 설치하는 폐해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 비옥한 토지를 광 범위하게 점거하고 산택(山澤)을 전부 수중에 넣는 것이 어느 곳이나 모두 그러한 실정입니다. ……더 구나 결수(結數)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일체 면세(免稅)하여 한계를 두지 않으니, 면세전이 온 나 라에 두루 널려 있게 될 형편입니다. 나라의 체모가 날로 손상되고 국법이 날로 무너지게 하며, 세입이 모자라고 백성의 원망이 깊어지는 원인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46)

민유중은 호조에서 일일이 조사하여 면세전의 수량은 법전에 의거해서 절급

(

折給

)

하고

,

정해진 수량 이외 의 전지는 민전

(

民田

)

과 똑같이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부과할 것을 주장하였다

. 1662

(

현종

3) 9

5

,

대 사간으로 입시하는 자리에서 경연을 열 것과 함께 해서

(

海西

)

궁장

(

宮庄

)

의 폐단에 대해 보고 했는데

,

현종은 인정하지 않았다

.

47) 그 이듬해로 추정되는 때에 민유중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궁가가 법을 어기며 백성들을 침탈하는 일은 그 방도가 이미 많습니다. 심지어 산과 바다를 각자 점거하여 비록 미미한 초목과 자잘한 해산물이라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품목에 따라 세금을 징수 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익을 모조리 차지하는 폐단이 정말 심합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 습니까.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다만 전하께서 사사로이 가까이 하는 은혜 때문입니다.”48)

이는 내수사 때문에 궁중

(

宮中

)

과 부중

(

府中

)

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재정이 이원화되는 현상을 비판한 것

43) 󰡔국역 노봉집󰡕 권1, 「응지상소[應旨疏]. 44) 󰡔송자대전󰡕 부록 「연보」 30(1636, 인조 14).

45) 󰡔효종실록󰡕 11012(임진).

46) 󰡔文貞公遺稿󰡕 권7 「궁가의 면세전에 대해 법전에 따라 절급한 수량 이외에는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부과하도록 청하는 계 [請宮家免稅之田依法典折給數外收稅應役啓].

47) 󰡔국역 현종실록󰡕 395, 10.

48) 󰡔文貞公遺稿󰡕 권7 「궁가의 시장과 어장에 관한 일로 말을 고쳐 연이어 올리는 계사와 이어서 수진궁과 어의궁의 노비와 경 작하는 자를 잡역으로 침탈하지 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는 계사[宮家柴漁場事改措連啓仍請還收壽進於義兩宮奴婢及作者 勿侵雜役之命啓].

(13)

이었다

.

그 결과 내수사가 독립 관청인 양 행세하면서

,

사적

(

私的

)

소유를 늘려간다는 말이었다

.

동생 민유중 과 함께 궁가의 면세와 불법 행위를 지적하고 내수사 혁파를 주장하는 한편

,

민정중은 공상

(

供上

)

공물도 줄 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어제 경연에서 판부사 송시열이 비용을 줄이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각사의 공물 가운데 두드러지게 지나친 것을 가려내 품처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써 왔습니다. 산삼과 도라지 등의 가미(價米)가 8 백 60여 석이니, 부비(浮費)가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49)

이는

1669

(

현종

10),

호조판서였던 민정중이 현종에게 한 말이다

.

50) 송시열은 현종에게 새해를 축하하 는 그림인 세화

(

歲畫

)

도 부비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

부비는 요즘의 수용비

(

需用費

)

,

어떤 일을 진행하면서 들어가는 소모 비용을 말한다

.

효종 때 재가 받은 사안임을 근거로

,

송시열은

6

백 석이나 되는 공상 도라지

[

䓀莄

]

값의 혁파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

이후 현종은 호조판서 민정중에게 부비를 더 추려 올리라고 명하 였고

,

이튿날 민정중은 일단 사포서

(

司圃署

)

의 도라지와 산삼

(

山蔘

)

을 추려서 반으로 줄였고

,

다른 관청도 모 두 추려 올렸다

.

민정중은 동생 민유중에게 다음과 같이 기쁨을 전했다

.

“오늘 사포서(司圃署) 어공(御供)의 부비 4백 석의 쌀을 줄이고 장차 각사(各司)마다 이에 준하여 항식으로 삼는 것은 성덕의 사업이니, 일을 맡은 신하도 더불어 영광인 것이네. 역(役)을 계량하는 것 은 공공을 위해 출발한 것이지만 자네가 수고하다가 초췌하여 병이 났으니 우애의 지극한 정으로 나 또한 편할 수가 없구려.”51)

당시 민유중은 충청 감사로 양전

(

量田

)

에 힘쓰다가 병을 얻을 정도였다

.

편지에서

역을 계량한다

는 말이 그것이었다

.

두 형제는 호조

,

선혜청

,

진휼청

,

양전사 등을 두루 담당하며 경제정책과 민생을 챙겼다

.

어사로 나간 민유중에게 민정중은 민생고와 대안을 세세히 조언하기도 했다

.

민정중의 이런 노력과 조치가 이듬해 시작된 조선 최대의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

“어사(御史)로 나갔으니 소매 속에 좋은 견해가 들어 있으리라 생각하네. 따로 기특한 계획이 없다 면, 진휼 당상을 내보내 한양 관청의 남은 재화를 모아 관동(關東 강원도)과 관북(關北 함경도)의 공물 을 대신 납부하여 면제해 주고 백성들에게는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난해 양남(兩南)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실로 착실한 진휼 정책이 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들 도(道)에서 1년 동안 한양 각 관청에 내야 하는 공물가를 모두 계산하면 베로 수백여 동이고,

49) 󰡔국역 현종개수실록󰡕1019. 이 내용은 󰡔노봉집󰡕 권6 「이유능에게 보내는 답장[答李幼能]」에도 실려 있다. 유능은 이단상(李端相)의 자이다.

50) 호조판서 민정중의 사례는 대동법 정착 과정에서 산림(山林) 송시열과 실무관료 허적(許積)의 입장을 대비시킨 이정철의 구 도가 꼭 맞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265~273.

51) 󰡔노봉집󰡕 권7 「지숙에게 보내는 답장[答持叔], 지숙은 동생 민유중의 자이다.

(14)

수수료가 또 그 3분의 1일세. 지금 민간에서는 베 몇 줌도 거둘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를 마련하겠는 가. 정말 절박하기 그지없네.”52)

1670(

현종

11)~1671

년의 대기근이 백성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

이른바 경신

(

庚辛

)

대기근이었다

. 1670

1

1

,

해무리가 졌는데 안쪽이 붉은색이고 바깥쪽이 푸른색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 1

월 내내 전국 각지에 서 날씨 이변 보고가 이어졌다

.

전염병도 발생했다

.

이 틈에 메뚜기 떼가 경기도와 함경도에서 기승을 부렸 다

. 4, 5

월까지 냉해가 들었다

.

53) 양남 지방은 가뭄이 더욱 심해졌고

,

특히 전라도는 보리가 마르고 모가 타 는 지경에 이르렀다

. 5

월 말에 내린 비로 가뭄이 끝나는가 싶더니

,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

재상급 인사들마저 십여 명이 죽어 나갔다

.

병조판서 김좌명

(

金佐明

)

도 이때 세상을 떴다

.

김좌명의 후임 으로 병조판서가 된 민정중의 친구 서필원

(

徐必遠

)

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

극심한 기근은

1671

(

현종

12)

까지 이어졌다

.

경신 대기근은

100

만의 기아자가 발생하여 인구

10%

가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다

.

그러나 여름에 또 보리가 흉작이었고 여역

(

癘疫

)

이 크게 돌아 사망하는 백성이 더욱 많았는데도 끝내 도 적이 되거나 유랑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

당시 사람들은 현종이 애를 쓴 덕도 있지만

,

능력 있는 신하들이 좌 우에서 부지런히 애쓴 공이라고 평가하였다

.

그 중심에 호조판서 민정중이 있었다

.

송시열의 제의와 민정중의 조사를 통해 현종

10

년 각사 공물을 줄인 뒤에 현종

12

년에도 진상 공물을 줄 였다

. 1670

년과

1671

년 경신 대기근에서 민생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었다

.

숙종

8

년에도 각종 공물을 줄이 는 조치가 이어졌다

.

공물을 줄이면 당연히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진다

.

그런데 얼마 뒤 반동이 시작되었다

.

한양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넉넉하게 베풀어 보존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하 는데, 임술년(1682, 숙종 8) 이후 흉년으로 각종 공물을 상당수 임시로 줄인 뒤 지금까지 8, 9년 동안 변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물주인(貢物主人)들의 원망이 오래되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줄이고 형 편이 나아지면 복구하여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54)

기사사화 뒤 좌의정으로 조정에 들어온 목래선

(

睦來善

)

의 말이다

.

이후 공물 복구의 추세가 계속되었다

.

같은 해

6

3

,

각 전

(

殿

)

의 진상 공물도 회복하였다

.

호조판서 오시복

(

吳始復

)

은 각 전

(

殿

)

의 공상

(

供上

),

탄일

,

명절 물선

(

物膳

)

을 예전대로 회복하자고 건의하였다

.

이때 대비전은 이미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서 비었고 원자는 아직 어려서 세자로 책봉되지 않았으므로

,

이 조치는 결국 숙종 자신과 왕후가 된 장희빈을 위한 진상 공물의 회복이었다

.

앞서 윤

3

23

일 민종도

(

閔宗道

)

의 건의로 왕후의 고비

(

考妣

)

에 대한 제수

(

祭需

),

소금

,

젓갈

,

생선 역시 봉상시에서 대도록 하였다

.

아직 왕비로 책봉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왕후와 다름없던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

52) 󰡔노봉집󰡕 권7 「지숙에게 보내는 편지[寄持叔]. 53) 󰡔국역 현종개수실록󰡕11517. 54) 󰡔승정원일기󰡕 숙종 1533.

(15)

(

張烱

)

의 제수였을 것이다

.

이리하여 각 전의 진상과 함께 각사 공물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

그닥 급하지 않은 관청도 손을 벌렸으니

,

군기시는

재정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지만 다른 관청과 형평에 어긋난다

는 이유를 들어 공물을 더 받겠다고 나섰다

.

55)

이러한 추세는 민정중

,

민유중 등이 추진했던 공물 감축 정책과 대비된다

.

당초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대 동법의 성공이 확실해질 무렵

,

대동법을 추진했던 정책가들은 공안

(

貢案

)

개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대동법 을 통해 공물을 전세화

(

田稅化

)

함과 동시에

,

공물의 물종과 수량을 줄여 백성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

대동법이 세제 개혁의 질적 측면이라면

,

공안 개정은 양적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계해년(1683, 숙종 9) 무렵 선신(先臣)이 고 상신 이단하(李端夏)와 공물가를 줄여서……이전에 비 해 줄인 것이 1만여 석이었으므로, 본청 저축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기사년(1689)에 이르러 대신과 담 당자가 도성 백성 즉, 공물주인을 위로한다며 모두 복구하고 그 법을 폐지했습니다. 근년에 연달아 흉 년이 들어 세입이 크게 줄었고 계해년 이후 각처 제향 및 응사(鷹師 매사냥꾼) 등 명목으로 또 매우 많아졌으니, 본청의 형편이 어찌 이렇지 않겠습니까.……계해년에 줄였던 대로 하면 수요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56)

선혜청 당상을 맡고 있던 민진원

(

閔鎭遠

)

의 말이다

.

위의 기사는 기사사화가 있은지

30

년 뒤의 일이다

. 26

살이었던 민진원도

56

살의 노성한 신하가 되어 있었다

.

그의 말에 나오는

선신

은 바로 아버지 민유중이 었다

.

민유중이 이단하와 함께 공물가를 줄여서 확보한 재정이

1

만 석이었다

.

호조의

1

년 전세

(

田稅

)

규모의

1/10

정도에 해당하므로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

이를 기사사화 이후 도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 1689

,

목래

,

오시복

,

민종도의 말에서 확인했던 공물의 원상복구는

도성 백성

’,

즉 공물주인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그동안 줄인 공물을 다시 늘려 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

장희빈 시대는 정부 지출의 증가

,

백성들의 공물 부 담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던 셈이다

.

민진원이 말했던 민유중의 계해년 공물 개혁은 󰡔숙종실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

이제 경기, 강원도에서 거두어들이는 쌀이 부족하고, 갖가지의 공물가도 삼남에 비하면 적기 때문에 조금 늘였고, 삼남에는 많은 까닭에 줄였으므로, 다섯 도 공물가가 비슷해졌습니다. 이는 거의 선배들이 말한 공안 개정의 뜻과 같으며, 다섯 도 전체로 볼 때 줄어드는 수량이 2만 수백 석이 됩니다. 신이 일찍 이 경술년(1670, 현종 11), 이후에 여러 번 권감(權減 물품의 종류를 임시로 줄이는 것)한 것과 경신년 (1680, 숙종 6)에 감분(減分 물가 자체를 낮추는 것)한 수량을 산출해 보니, 2만 7천여 석이 됩니다. 그 러므로 이번에 줄이는 것은 오히려 그동안 권감했던 것이나 감분했던 것의 수량에 미치지 못합니다.57)

55) 󰡔승정원일기󰡕 숙종 15826. 56) 󰡔비변사등록󰡕 숙종 454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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