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dx.doi.org/10.7738/JAH.2016.25.2.057
1. 서 론
전라좌수영은 조선시대 1479년(성종 10)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417년간 조선수군의 주진으로 남 해안 방어의 중임을 다해 왔으며, 임진왜란 중인 선조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본 연구는 2015년 조선대학교 교내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 었음.
26년 8월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이 병설되어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국난을 타개한 본거지이다.
1895년 이후에는 전라좌수영도 각 도의 수영(水營)과 함께 폐영됨에 따라 일대의 성곽도 헐리기 시작했고 이 후 근대화로 인한 도심지 개발로 현재는 관아건물들이 훼철되어 성내의 중심이었던 동헌과 내아 등은 남아 있 지 않은 상태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 궐패(闕牌)가 모셔진
조선후기 전라좌수영 동헌 고찰
A Study on Jeollajwasuyeong Donghe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신 웅 주 Shin, Woong-Ju (조선대학교 건축학부 조교수)
천 열 홍*1) Cheon, Yeol-Hong
(조선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박사과정)
Abstract
This study explored the Jeollajwasuyeong Donghe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s findings are as follows.
Buildings in Jeollajwasuyeong were completed since the mid-18th century. They formed areas based on functions and were largely classified into two areas. The buildings within Yeongseong included Gaeksa (guesthouse), Dongheon(government office), Hyangcheong(advisory organ), Jungyeong(military camp), Guncheong (county office), Gongbang(workroom), and Changgo(warehouse). There were also buildings for low-ranking government officials. The central part of Jeollajwasuyeong was the areas of Gaeksa and Dongheon. Gaeksa was iconic area where local governors served King and had 75 Jinnamgwan Guesthouses and 3 inner gates. Those were measured off by separate walls.
The Dongheon area was located in the northeast of Gaeksa. There were three gates such as Wanyeongru, Gongsamun, and Jeongbyeonmun at the entry area, which were also divided by walls like Gaeksa. Unjuheon (Dongheon) was at the center of the area where Gyeolseungdang, Mugwonjae, Naea, Chaekbang, and Gongsu were built. Outside the area, Baekwadang(used as Bijangcheong), Jinhyulgo, and Byeonggo were composed of part of the Dongheon area. Most of the buildings in Dongheon seemed to be repaired since 1664. It was difficult to locate the area of previous Dongheon.
In particular, Jinnamgwan was first built in 1599 and destroyed by fire in 1716. In 1718, the building was reconstructed and shared historic denominator with Unjuheon before 1858 and reconstructed Unjuheon in 1869.
It was found that Unjuheon was reconstructed more than at least three times, which was the central building in Dongheon. The buildings including Gyeolseungdang, Mugwonjae, and Baekwadang in the area were not existed within Jeollajwasuyeong and were reconstructed more than once and maintained until the early 1900s.
주제어 : 전라좌수영, 동헌, 여수
Keywords : Jeollajwasuyeong, Dongheon, Yeosu
진남관이지만, 실질적으로 역대 전라좌수사가 정무를 집행하던 장소는 동헌이므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며, 난중일 기를 썼던 곳도 동헌으로 역사적 가치가 깊은 곳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전라좌수영에 관련된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개항기, 일제강점기의 문 헌을 고찰하여 전라좌수영 동헌의 위치와 범위를 파악하 고 전라좌수영 동헌의 입지와 건물의 배치 특징을 분석하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 관아건축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전라좌수영 동헌의 고찰
전라좌수영이 창설될 당시의 동헌에 관한 자료는 확 인되지 않는다. 다만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동헌(東軒)과 후동헌(後東軒), 객사동 헌(客舍東軒), 객사중대청(客舍中大廳), 그리고 진해루 (鎭海樓) 등으로 전해진다. 그중 동헌은 가장 중심이 되는 공해(公廨)로서, 절도사(節度使)들이 공무를 보던 곳도 동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의 영성도(營城圖)1)에는 중 앙에 동헌 일곽이 그려져 있다. 담장으로 구획된 동헌 내의 건물들 대부분은 1664년에 절도사 이도빈(李道 彬)2)이 개건하였으며 이후 영이 철폐되고 신시가지의 조성에 따라 훼철되었다.
동헌 일곽에 그려진 건물들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 은 어려우나 호좌수영지의 호좌수영도 및 영성도를 통해 진남관과의 상대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고 고문서 및 고지도, 근대 사진 및 폐쇄지적도를 통해 구체적인 위치 를 추정할 수 있으며 주민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동헌 터 로 추정되는 건물들 속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2-1. 고문서 고찰
전라좌수영의 건축 사실이 확인되는 고문서로는 성 종실록(成宗實錄)(149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1530), 난중일기(亂中日記)(1592∼1598), 동 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1847),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호남읍지(湖南邑 誌)(1871), 여수군읍지(麗水郡邑志)(1902) 등이다.
1) 호좌수영지 영성도, 조경옥 소장
2) 1627∼1670.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1668∼1670)한 무신으로 본 관은 광주(廣州), 자는 도재(都哉). 봉창수(蓬昌守) 이형엄(李炯儼)의 딸이 부인이며, 아들 이우항(李宇恒, 1648∼1722)도 삼도수군통제사 를 역임하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 舜臣)이 동헌(東軒)에서 집무를 보았다고 하는 기록이 72차례3)나 확인된다. 이 중 전라좌수영 동헌에서 집무 를 본 것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68회이다. 전라좌수영 동헌의 건축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호좌수영지 (湖左水營誌)와 호남읍지(湖南邑誌)가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동헌 일곽의 건축물 로 결승당(決勝堂), 운주헌(運籌軒), 정변문(靜邊門), 공 사문(公事門), 무권재(無倦齋), 백화당(百和堂), 완경루 (緩輕樓)가 확인되고 중영(中營)의 일곽으로 동헌(東 軒), 공사문(公事門) 또한 확인된다.4)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간숙당(簡肅堂)이라는 건축 물이 시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데 정당(政堂)5) 17칸, 옛 운주헌(運籌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6)
3) *음력 날짜 1592년(임진년)
- 1월 3일, 4일, 4일, 5일, 6일, 5일, 6일, 8일, 9일, 11일, 12일, 13일, 14일, 16일, 18일, 19일, 20일, 21일, 25일, 26일, 28일, 29일, 30일 - 2월 2일, 4일, 5일, 6일, 7일, 8일, 10일, 12일, 15일, 16일, 27일, 29일 - 3월 3일, 5일, 7일, 9일, 10일, 12일, 18일, 19일, 20일, 21일, 22일,
23일, 25일, 26일, 28일
- 4월 5일, 9일, 10일, 12일, 14일, 18일, 20일 - 8월 24일(?)
1593년(계사년) - 2월 4일 - 3월 11일 1594년(갑오년)
- 1월 4일, 6일, 7일, 8일, 14일, 15일 1596년(병신년)
- 윤8월 20일(장흥부 동헌) - 9월 29일
- 10월 4일 1597년(정유년)
- 4월 20일(니산 동헌, 공주시 노성면 읍내리) - 5월 2일, 15일(구례현 동헌)
임진년 3월 3일에는 ‘조이립(趙而立) 우후·군관 등과 동헌에서 이야 기하며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무 외에 거처로 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동헌에 나가서 공무 를 보았다’는 표현이 대다수인 점은 별도의 거처가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임진년 4월 12일, 13일, 14일에는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는 기록이 있는데 동헌에서 활을 쏜 것인지, 동헌 주변의 다른 건물 에서 쏜 것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임진년 4월 12일에는 ‘관청으로 올라갈 때 노대석(路臺石)을 보았다’
는 기록도 확인된다.
임진년 8월 24일에는 ‘아침밥은 객사 동헌에서 정영감[충청수사 정걸 (丁傑)]과 같이 먹고 곧 침벽정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전라 좌수영의 동헌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4) 決勝堂肆間, 康熙參年甲辰, 節度使李公道彬改建, 朝夕理事于此. 運 籌軒肆間, 在決勝堂前. 靜邊門參間, 在運籌軒前. 公事門貳間, 在靜邊門 西. 無倦齋參間, 在運籌軒之東. 百和堂卽裨將廳捌間, 在運籌軒西. 緩輕 樓貳層參間, 在靜邊門前, 舊名定遠. 康熙貳拾參年, 節度使韓公根刱建.
乾隆貳拾肆年己卯, 節度使李公潤德改建, 親書額.
5) 지방의 관아(官衙), 같은 말로 정각(政閣);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
운주헌(運籌軒)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좌수영지(湖左水 營誌)는 1847년에 간행되었고 옛 운주헌이라고 하는 종명 (鐘鳴)과 간숙(簡肅)의 기록은 24년 후인 1871년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실린 것으로 미루어 1847년부터 1871년 사이에 건축적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99년에 편찬된 여수군읍지(麗水郡邑誌)에는 간숙당 은 정당(政堂) 17칸이고 옛 운주헌(運籌軒)7)이었다는 사 실과 관찰사(觀察使) 김노진(金魯鎭)8)의 운주헌 시가 기 록9)되어 있다.
1902년에 간행된 여수지(麗水誌)에도 간숙당은 정당 (政堂)으로 17칸이고 옛 운주헌(運籌軒)이라고 기록10)되 어 있다. 또한, 여수지(麗水誌)에는 숭정후 4 무오(崇 禎後 四 戊午),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무오년, 1858년에 은진(恩津) 송내희(宋來熙)11)가 쓴 운주헌 상량문(上樑 文)이 기록12)되어 있다.
6) 중국에선 다시 중앙이니 변방이니 한계 짓지 말라. 활과 칼을 바 꾸어 글 읽는 것으로 변했노라. 밖의 문은 바로 3만 리로 통하고 옛 티끌은 씻은 지 이천년 일세 순천부(順天府)에서 다섯 면을 찾아다가 한 고을로 승격시켜 여지승람에 실었네. 이름과 호로써 옛 관향을 잊 지 말라 종명(鐘鳴)과 간숙(簡肅)으로 편액을 삼았노라.
7) (전략) 城郭 郡城石築周回三千三百三十六尺高十三尺女堞三百六十 處曲城八處票樓六處泉井七處池一處名德池古突
山城西三十里前召募別將鎭今廢
公廨 簡肅堂政堂十七間舊運籌軒○天家不復限中邊回轉弓刀變誦絃外戶 直通三萬里前塵蕩滌二千年索還五面昇平
8) 1735년(영조 11)∼1788년(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강릉, 자 성첨(聖瞻). 이조판서 상성(尙星)의 아들.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 에 병과로 급제, 66년 문과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의·승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9) (전략) ○觀察使金魯鎭運籌軒
詩海靜魚龍伏元戎夜騎船星河影倒水鼓角響連天愧我輕裘 過多君仗鉞賢遺祠忠武在何獨古人然
10) (전략) 公廨
簡肅堂政堂十七間前運籌軒 拄笏樓政堂西樓前緩輕樓 水竹堂九間簡肅堂東 內衙九間水竹堂東 鄕廳八間前虞侯貳衙 巡校廳六間前將校廳
11) 1791년(정조 15)∼1867년(고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恩津). 자는 자칠(子七), 호는 금곡(錦谷). 아버지는 군수 계정(啓楨) 이다.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 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다. 부호군 (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 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2) (전략) 歲崇禎後四戊午暮春恩津宋來熙書
運籌軒上樑文
三面山一隅海素著江南佳麗之名鄕七里郭百丈城特 設湖左都督之巨鎭興廢乘運關防增光竊惟內禮舊基 昇化重地紀律明肅聳精彩於壁壘旌旗藩翰謹嚴覽體 勢於山川風物都護府召募鎭民戶則魚鱗錯流將軍島 麗水城地形則犬牙相制創建肇於 成化之際欽仰 聖祖之宏模功烈著於壬辰之間想像忠臣之毅蹟睠玆 左營節度之所莅寔惟南道觀瞻之攸尊梅梱之機務不
한편, 1895년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 8책의 순천부읍지 에는 운주헌의 건축시기와 규모가 기록되 어 있는데 기존의 자료와 상이하여 주목된다. 기사년(己 巳年) 신건(新建, 정황상 重建)인 점으로 미루어 1871년 이전의 기사년은 1869년일 확률이 높다. 운주헌의 규모 는 30칸으로 기록13)되어 있는데 진남관이 70칸으로 기 록된 것으로 볼 때 규모의 산정 방법이 다른 문헌과 달 랐던 것은 아니고 오기(誤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895년에 편찬된 호남영지(湖南營誌)에도 공해로 객 관(客館), 결승당(決勝堂), 운주헌(運籌軒), 망해루(望海 樓), 완경루(緩輕樓), 독제각(纛祭閣) 등이 있다.14)
2-2. 고지도 고찰
전라좌수영성과 관련된 고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 圖)(1750년대초),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案地圖)
(18세기중반), 여지도(輿地圖)(18세기중반), 전라남북 도여지도(全羅南北道輿地圖)(18세기후반), 호좌수영도 (湖左水營圖)(1847), 1872년지방지도-순천부지도(順天 府地圖)(1872) 등이 있다.
이 밖에 전라좌수영성의 성곽 및 건물을 표기하고 있 는 지도로는 순천부전도(順天府全圖)(1872), 호남전도 –순천부(湖南全圖-順天府)(18세기중반), 지승(地乘)(18 세기후반), 여수근해도(麗水近海圖), 광여도(廣輿圖)
(19세기중반) 등이 있으나, 앞서 말한 지도와 필사관계에 있어 중복되거나, 그 표기가 허술하다.
이 중 전라좌수영 내의 건축물이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고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1750년 대초),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案地圖)(18세기중 반), 지승(地乘)(18세기후반), 광여도(廣輿圖)(19세기
煩競頌裘帶之風標竹符之折旋有度總覽簿牒之從容 13) (전략) 公廨
鎭南館七十間 中門三間望海樓二層三間
運籌軒三十間己巳六月日新建 中門三間
公事門三間 無倦齋二間 裨將廳五間 緩輕樓二層三間 南門三層三間鐵門 伏波堂三間 14) (전략) 公廨
客館 決勝堂 運籌軒 望海樓 緩輕樓 纛祭閣俱 在城內伏波堂 將臺俱在城外忠武公 碑閣在西門外 倉庫
軍餉庫 賑恤庫 兵庫 解懸庫 軍器庫 官廳 補軍庫 助糧庫 兼濟庫 雇馬庫 營繕庫
중반), 호좌수영도(湖左水營圖)(1847), 순천부지도(順 天府地圖)(1872),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湖 左水營誌 營城圖)(19세기후반), 여수지(麗水誌)(1902) 가 있다.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전라 좌수영은 체성과 여장, 동문·서문·남문의 세 성문으로 이 루어진 성곽 안에 건물 3동이 표기되어 있고 성곽밖에는 충무공 비각과 선창, 장대, 충민사, 도로가 있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 案地圖)에는 체성과 여장, 동문·서문·남문의 세 성문으 로 이루어진 성곽을 팔각형으로 표기하고 성곽 안에는 객사, 영문, 군기가 표기되어 있다. 호좌수영도(1847)와 비교해 보면, 영문은 중영 영역을, 군기는 창고영역을 나 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성곽밖에는 선창, 수영교장대, 충 민사서원,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그림 1. 해동지도(1750년대 초반, 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림 2. 비변사인방안지도(18세기 중반, 우) [서울대학교 규 장각 소장]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승(地乘)에는 체성과 동문, 서문, 남문 등의 성문이 그려져 있고 성곽의 내부에는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 3동 그려져 있다. 좌수영성 주변 에는 충무공비각이 있다. 좌수영의 위쪽에는 고돌산진 과 충민사가 있고 돌산도 내에 방답진이 그려져 있다.
그림 3. 지승(18세기 후반, 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림 4. 광여도(19세기, 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는 지승(地 乘)의 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체성과 동문, 서문, 남문 등의 성문이 그려져 있고 성곽의 내부에는 비슷한 규모 의 건물이 2동만 그려져 있다. 좌수영성 주변에는 충무 공비각이 있다. 좌수영의 위쪽에는 고돌산진과 충민사가
있고 돌산도 내에 방답진이 그려져 있다.
전라좌수영의 영성과 병력, 군미, 병기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는 헌종 13년 (1847) 허섬에 의해서 간행되었는데 성곽 안에는 문루와 포루를 제외한 총 68개 건물이 보이고, 우물 3곳, 못(池) 이 한 곳 표기되어 있다. 도로는 남문과 동헌을 잇는 도 로와 서문과 동문을 잇는 도로가 T자를 이루고 있고 객 사, 동헌, 중영 영역은 담장으로 추정되는 사각형 테두리 가 표기되어 있으며, 객사 영역 배후의 향청영역과 함께 네 영역이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림 5. 호좌수영도(1874, 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림 6. 호좌수영도 동헌일곽(우)
동헌영역은 객사 우측에 자리하며, 진입부의 완경루(緩 輕樓)와 공사문(公事門), 靜邊門(정변문)을 진입과정 내 에 두었으며 객사와 마찬가지로 담장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내부에는 운주헌(運籌軒)이 일곽의 중앙에 놓여 있 으며, 공무를 집행하던 결승당(決勝堂)과 무권재(無倦齋), 내아(內衙), 책방(冊房), 공수(供需)15) 등이 설치되었다.
동헌일곽 밖에는 비장청(裨將廳)으로 사용되었던 백화당 (白和堂)과 진휼고(賑恤庫), 병고(兵庫)가 동헌영역의 일 부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1664년에 개건된 것으로 보이며 이전의 동헌이 놓였던 자리는 파악하기 어렵다.16)
1872년 제작된 순천부지도(順天府地圖)에는 체성과 여장, 동문·서문·남문의 세 성문으로 이루어진 성곽 안 에 우후영, 군기, 수군기가 표기되어 있다. 호좌수영도 (1847) 이후의 지도로, 성곽밖에는 동서분사창, 한산사, 연등교, 장(場), 연옥각, 석천사, 도로가 표기되어 있다.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湖左水營誌 營城 圖)는 체성과 여장, 동문·서문·남문의 세 성문으로 이 루어진 성곽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벽 의 중간에는 각루(角樓)도 설치되어 있다.
15) 음식을 만드는 곳
16) 오정훈, 전라좌수영의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 문집(계획계), 19권, 12호, 2003, 192쪽
객사의 서북쪽에 위치한 동헌의 영역은 2개로 구획 되어 있는데 동헌으로 추정되는 운주헌의 일곽에는 운 주헌을 비롯하여 결승당, 책방, 내아, 공수 등이 있고 운주헌 남쪽에는 솟을삼문이 있으며 일곽의 바깥으로 완경루가 있다.
그림 7. 호좌수영지 영성도(18세기 후반, 좌) [조경옥 소장]
그림 8. 호좌수영지 영성도 동헌일곽(우)
2개의 영역 중 동헌 일곽의 담장에 붙어 있는 영역 의 내부에는 비장들이 사무를 보는 백화당과 백화당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 형식은 호좌수영도와 비슷하 나 일부의 건물들 중에는 그 명칭이 다르거나 생략된 부분도 확인된다. 건물배치의 유사성, 정박되어 있는 함선의 수, 출처가 분명치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호 좌수영도의 수정 필사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02년 편찬된 여수지 (麗水誌)에도 2매의 지도 가 수록되어 있다. 1매는 여수반도를 먹으로 그린 후 양쪽 바다를 동해와 서 해로 표기하고 각종 산과 하천을 표기한 지도로 현 재 여수시에 군(郡)의 명 칭을 써 놓은 지도이다.
아사(衙舍)로 표기된 건 물군의 남쪽에는 경신루(警 晨樓)가 있고 명명되지 않 은 건물 2동이 좌수영성
의 중앙과 남서쪽 성벽 근처에 위치하며 남동쪽에는 윤 공영당(尹公影堂)이 위치한다.
2-3. 근대 사진 고찰
고종 32년(1895) 전라좌수영이 혁파된 후에도 진남관 일대의 몇몇 건축물들은 그대로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
된다. 진남관은 고종 4년(1910) 경술년 때에는 여수공립 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되었다가 해방 이후 재정비를 통해 보물과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전라좌수영 일곽에 있던 대부분의 건축물은 쌀 및 면화 생산기지이자 항구 건설의 일환으로 1910 년대부터 시작된 시가지 조성사업 및 매립사업으로 인 해 점차 그 위용이 사라져 갔다.17)
1907년 조선 전남 여수시장 전경사진 에서 진남관을 비롯하여 진남관의 출입문, ㄷ자형의 관청 건축물과 중층 의 남문(南門)이 확인된다. 비록 1895년에 전라좌수영이 혁파되었지만 12년이 지난 1907년에는 전라좌수영을 구성 하는 많은 관아 건축물들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847년의 호좌수영지의 호좌수영도에 왜학당(倭學 堂)이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여수지역에서 일본인 과의 교류는 1847년 이전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림 10. 여수 진남관 주변 유리건판 사진 (1910): 진남관의 북동쪽에 동헌으로 추정되는 ㄱ자 건축물과 솟을삼문이 확 인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0년대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에는 1907년 조선 전남 여수시장 전경사진 에서 확인되는 ㄷ자형의 관청 건축물을 비롯하여 진남관 서 쪽에 또 다른 ㄷ자형의 관청 건축물이 확인된다. 전라 좌수영성의 남문은 없어지고 남문지 앞으로 바다가 매 립되어 대지의 면적이 넓어져 더 많은 근대식 건축물 들이 건축되었다.
특히 진남관의 북동쪽에는 날개채가 달린 ㄱ자형 건 축물이 확인되는데 용마루에 양성(兩城)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중요한 관아건축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날개채가 달린 ㄱ자형 건축물은 1902년 여수지에 기 17) 우승완, 일제강점기 여수의 도시 특성 변화에 관한 연구 , 한 국도시설계학회지, 12권, 5호, 2011, 107쪽
그림 9. 여수지(1902) [서울대 학교 규장각 소장]
록된 17칸의 간숙당(簡肅堂, 옛 운주헌(運籌軒))으로 추 정된다. 옛 운주헌인 간숙당의 정면에는 수목에 일부가 가려진 솟을삼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1910년 이후에는 전라좌수영 내의 많은 관아 건축물들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급속한 도시화의 과정 을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11. 진남관 주변 유리건판 사진 (1910): 진남관의 북 동쪽에 동헌으로 추정되는 ㄱ자 건축물이 확인됨. [국립중 앙박물관 소장]
<그림 11>은 1910년대에 현재의 여수기상대(전라남 도 여수시 고소5길 42) 부근에서 촬영된 국립중앙박물 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으로, 일대에 초가지붕의 민가 와 일본식 가옥의 병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미 루어 전라좌수영성 내에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남쪽(사진의 왼쪽 하단이 남쪽)에는 ㄷ자형의 관청 건축물 3동이 진남관을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고 뒤쪽 에는 팔작지붕을 한 2채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진남관 보다 높은 대지에는 동헌으로 추정되는 ㄱ자형 건축물 이 확인된다. 지붕의 일부가 수목에 가려져 있으나 형 태 파악은 가능하다.
ㄱ자로 구성된 건축물의 본채는 경사면이 큰 팔작지 붕이 덮여 있고 건축물의 서쪽에는 본채와 다른 높이 의 팔작지붕이 설치되어 있다. 용마루의 높이가 본채 와 날개채가 다른 것은 건축물의 보 방향(짧은 방향) 으로 길이가 달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채는 비교적 규모가 있으나 날개채는 1칸 내외의 폭이었고 동헌의 출입문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수목에 가 려진 부분이 있어 자세한 확인이 불가능하며 동헌으로 추정되는 건축물 주변에도 몇몇의 한옥이 확인되지만 규모와 용도의 확인 역시 불가능하다.
2-4. 지적도 고찰
1915년 지적도를 고찰해보면 국가소유의 필지가 고 지도 상의 건축물 배치와 비슷한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남관 북동쪽에 위치한 넓은 면적의 필지들은 과거 전라좌수영 내의 중요한 관아 또는 관청의 자리였을 확률이 높다.
앞의 근대사진 고찰을 통해 진남관 북동쪽에 동헌과 동헌의 일곽을 구성하는 건축물이 배치되었던 것을 상 기할 때, 가장 넓은 면적의 필지는 1917년까지 존재했 던 동헌이 위치했던 자리로 추측할 수 있다.
동헌 일곽의 건축물 중 동헌의 존재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확인되지만 그 외의 부속 건축물들의 정확한 배치 관계는 시굴 및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림 12. 지적도와 사진의 교차분석을 통한 동헌의 위치 추정:
녹색 점선은 진남관, 적색 점선은 동헌으로 추정 [출처: 김 행범, 근대기 전라좌수영성의 공간변화에 관한 연구 , 호남 문화연구, 2012의 지적도 편집]
<그림 12>는 1915년 지적도와 1910년대에 촬영된 사 진을 합성한 것이다. 원근법, 카메라의 화각 및 렌즈의 종류에 따라 오차가 발생할 수 있으나 원거리에서 촬영 된 사진이므로 진남관의 배치를 기준으로 개략적인 동헌 의 위치를 살필 수 있다.
1915년 지적 상의 녹지분포와 호좌수영도 및 조경 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의 건축물 배치는 일치하지 않지만 1915년과 1921년의 국유지 분포현황과 비교하면 국유지가 많이 분포하는 곳에 두 지도 상의 건축물 배치
관계는 비교적 일치됨을 알 수 있다.
1915년 이후 약 55년 동안은 필지의 변화를 볼 수 있 는 지적도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71년에 제작되어 1991년까지 사용된 폐쇄지적도18) 상에서는 동헌으로 추 정되는 필지의 분할이 확인된다. 당시에 분할된 필지는 현재의 지적도와 거의 일치되는 것으로 국유지의 불하 (拂下)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불하된 각 각의 필지와 도로를 구성하는 선은 주변의 필지와 다르 게, 직선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 제작된 지적도는 1971년의 지적도와 비교했 을 때 동헌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필지 중 일부 필지의 18) 1971년 생산 폐쇄지적도, 여수시청 여서청사에 보관 중
그림 13. 1971년 지적도(노랑색이 진남관, 적색이 추정동헌 일곽): 1915년의 지적도와 비교하면, 동헌 일곽에 필지의 분 할이 확인됨 [출처: 여수시청 여서청사]
분 류 시 기 목 록 관 련 내 용
고문서
1530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좌수영 내 동헌 건축에 관해 기록됨 1592∼1598 난중일기 이순신이 동헌에서 집무를 보았다고 기록됨
1656 동국여지지 전라좌수영 내 동헌 건축에 관해 기록됨
1847 호좌수영지 공해의 동헌 일곽으로 결승당, 운주헌(동헌), 정변문, 공사문, 무권재, 백화당, 완경루 가 있고 중영 일곽으로 동헌, 공사문이 있다는 기록과 각 건물의 위치와 규모에 관 해 기록됨
1871 호남읍지 간숙당은 정당 17칸, 옛 운주헌으로 동헌이라고 기록됨
1895 호남영지 공해로 객관, 결승당, 운주헌, 망해루, 완경루, 독제각의 소개에 관해 기록됨
1902 여수군읍지 간숙당은 정당 17칸, 옛 운주헌이라는 기록과 관찰사 김노진의 운주헌에 관한 시구 가 기록됨
1902 여수지 간숙당은 옛 운주헌이라는 기록과 송내희의 운주헌 상량문이 기록됨
고지도
1750년대초 해동지도 전라좌수영성은 체성과 여장, 동문, 서문, 남문으로 이루어진 성곽에 건물 3동이 표 기되어 있고 성곽 밖에는 충무공 비각과 선창, 장대, 충민사, 도로 등이 표기됨 18세기중반 비변사인방안지도 전라좌수영성의 체성, 여장, 동문, 서문, 남문의 성곽이 팔각형으로 표기되어 있고
성곽 내에는 객사, 영문, 군기가 성곽 밖에는 선창, 서영교장대, 충민사서원, 도로 등 이 표기됨
18세기후반 지승 전라좌수영성의 체성과 동문, 서문, 남문 외 3동의 건물과 충무공비각, 고돌산진, 충 민사, 방답진 등이 표기됨
19세기중반 광여도 전라좌수영성의 체성, 동문, 서문, 남문이 표기되어 있고 내부에는 2동의 건물, 외부 는 충무공비각, 고돌산진, 충민사, 방답진이 표기됨
1847 호좌수영도 전라좌수영성 내외의 건물 68동, 우물, 못이 상세히 표기되어 있고 동헌의 일곽이 상세히 표기되어 있음
1872 순천부지도 전라좌수영성의 체성, 여장, 동문, 서문, 북문 외에 내부의 우후영, 군기, 수군기가 있고 외부에 동서분사창, 한산사, 연등교, 장, 연옥각, 석천사, 도로 등이 표기됨 19세기후반 호좌수영지 영성도 성곽의 구성 외에도 동헌영역이 2개로 구획되어 운주헌 일곽은 결승당, 책방, 내아,
공수, 완경루, 출입문이 표기되어 있고 그 옆에 백화당과 백화당에 출입하는 문이 표기되어 있음
1902 여수지 성곽이 타원으로 표기되어 있고 아사 건물군 남쪽에 경신루와 몇몇 건물이 표기되 어 있음
근대 사진
1907 조선 전남 여수시장
전경사진 진남관, 진남관 출입문, ㄷ자형 관청 건물, 중층 남문이 확인됨
1910 여수 진남관 주변 1 진남관 북동쪽의 날개채가 있고 지붕마루에 양성이 있는 ㄱ자형 건물과 출입문인 삼문이 확인됨
1910 여수 진남관 주변 2 지붕마루에 양성이 있는 ㄱ자형 건물은 본채와 날개채의 폭과 높이가 다른 것으로 확인됨
지적도 1915 조선총독부 지적도 진남관 북동쪽에 위치한 추정 동헌 필지의 소유와 용도가 확인됨 1971, 1991 폐쇄지적도 진남관 북동쪽에 위치한 추정 동헌 필지의 분할과 불하가 확인됨 표 1. 전라좌수영 동헌에 관한 관련 문헌
그림 14. 1991년 지적도(노랑색이 진남관, 적색이 추정동헌 일곽): 더 이상의 필지분할은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됨 [출처: 여수시청 여서청사]
합병과 분할이 관찰되나 대부분 그대로 유지된 것과 진남관의 남쪽에도 1971년부터 1991년 사이에 필지의 분할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남관의 영역과 동헌의 영역 사이에는 일부의 필지 가 매입되어 도로로 바뀌었다. 소방도로의 신설로 인 해 진남관과 동헌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1971 년과 1991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헌일곽으로 추정19)되는 곳은 진남로, 군자길, 동산 길 등의 21필지가 과거에 동헌일곽이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특히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에 표현된 동헌일곽의 형태가 1915년 지적도의 지적선과 거의 일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남쪽에 완경루 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호좌수영도와 호좌수영 지 영성도에는 동헌 영역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완경 루가 표현되어 있어, 보다 남쪽에 위치하였을 가능성 도 배제할 수 없다.
3. 전라좌수영 동헌 복원을 위한 분석
3-1. 동헌의 건축시기 추정
동헌의 건축시기를 추정하기 위해 성종실록(成宗實 錄)(1491), 난중일기(亂中日記)(1592∼1598), 호좌수 영지(湖左水營誌)(1847), 호남읍지(湖南邑誌)(1871),
호남읍지(湖南邑誌)(1895), 호남영지(湖南營誌)(1895),
여수군읍지(麗水郡邑誌)(1899), 여수지(麗水誌)(1902),
여수·여천 향토지(1982) 등을 고찰하였다.
전라좌수영 동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순천부 내례 포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다고 쓰인 성종실록(成宗 實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난중일기(亂中日記)
에는 충무공이 동헌에서 집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전해 19) 1915년의 지적도를 바탕으로 현재의 필지를 확인
지는 사실을 통해 1590년대에도 동헌이 존재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1847년의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는 공해에 동헌인 4칸의 운주헌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4칸 규모의 동헌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871년의 호남읍지(湖南邑誌), 1895년의 호남읍지 (湖南邑誌), 1899년의 여수군읍지(麗水郡邑誌), 1902 년의 여수지(麗水誌)등에는 17칸의 동헌이자 간숙당 으로 불린 운주헌이 존재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1917년의 여수총쇄록에 간숙당과 관련된 시구가 확 인되며 여수·여천 향토지에 간숙당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으로 1917년 이후에는 훼철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동헌은 하나의 건축물로 지속 된 것이 아니고 최소 3차례 이상 소실되었다가 다시 재건을 반복한 것을 알 수 있는데 1850년 전후에는 4 칸, 그 이후에는 17칸으로 규모가 바뀐 점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5. 동헌 일곽을 구성했던 건축물의 시기별 기록
3-2. 동헌의 위치 추정
전라좌수영 동헌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1915 년 지적도 20) 상의 국유지 분포현황, 1910년대 촬영된 사진21), 1847년의 호좌수영지 호좌수영도, 1815년에 제작된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 1915년 지적 도와 현재 지적도의 비교자료 등이 있다.
국가기록원 소장 1915년의 지적도에는 진남관이 위 치하는 필지와 진남관의 북동쪽에 진남관의 필지와 인 접하고 있는 4,936㎡의 부정형 필지가 확인된다.
이는 객사와 동헌의 일반적인 배치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호좌수영지의 호좌수영도 와 조경옥 소장 호 좌수영지 영성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다.
호좌수영지의 호좌수영도 와 1915년 지적도 를 20) 1915년 조선총독부 제작, 국가기록원 소장 폐쇄지적도
21) 1910년대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비교하면 진남관의 북동쪽에 운주헌을 중심으로 배치된 동헌의 일곽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동 헌을 이루는 건축물로 운주헌, 책방, 공수, 내아, 결승 당, 백화당 및 완경루 등의 배치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와 1915년 지적도 를 비교하면 역시 진남관의 북동쪽으로 동헌의 일곽이 배치되어 있고 동헌인 운주헌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책 방, 내아, 공수가 그려져 있으며 배면에는 결승당, 정면 에는 솟을삼문, 서쪽에는 백화당과 백화당을 출입하는 문이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6. 1915년 지적도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동헌영역 [출 처: 국가기록원]
이는 진남관과 동헌일곽의 배치관계를 고찰할 경우 아 래의 그림과 같이 동헌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7. 호좌수영도와 호좌수영지 영성도의 비교를 통한 동 헌의 위치 추정
그림 18. 1915년 지적도를 통해 추출한 추정 동헌영역과 현 재의 지적도 비교
1915년에 제작된 지적도를 바탕으로 구획된 추정 동헌 일곽의 필지를 2013년 기준의 지적도와 비교해보면 과거 에 동헌이 위치했던 자리를 비교적 명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완경루의 경우는 1915년 지적도 상에서 남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호좌 수영지의 호좌수영도 와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 성도에서도 위치에 차이가 있다.
3-3. 동헌의 건축형태 추정
동헌의 건축형태와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1910년대 촬영된 사진, 호좌수영지에 소개된 4칸 운 주헌의 규모, 호남읍지, 여수군읍지, 여수지에 소개된 17칸이라는 운주헌의 규모, 호남읍지의 30칸 운주헌 등이다.
동헌의 건축형태를 4칸으로 추정할 경우, 석성동헌, 괴산동헌 등과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 측 면의 규모를 1칸으로 산정하여 4칸이 되므로 규모는 이보다 작았을 수도 있지만 전후 퇴칸을 제외한 측면 1칸의 규모였을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문헌에서 진남관은 모든 퇴칸을 포함하여 75 칸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동헌의 퇴칸이 존재했다면 4칸보다 더 큰 규모로 산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호좌 수영지에서 소개된 4칸의 운주헌은 매우 작은 규모로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림 19. 괴산동헌 그림 20. 석성동헌
동헌의 건축형태를 17칸으로 추정할 경우에는 홍주동
헌(안회당), 강릉동헌(칠사당)과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판 단된다.
그림 21. 강릉동헌 그림 22. 홍주동헌
날개채의 용마루는 본채의 용마루와 높이가 같지 않으 므로 건축물의 폭(보방향의 두께)에도 차이가 있어, 날개 채는 기둥 2본의 폭으로 구성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림 23. 1910년 사진 상에서 추정되는 동헌의 지붕형태 17칸이 형성되기 위해
서는 본채의 경우 정면은 5칸, 측면은 전후퇴를 포 함하여 3칸으로 구성되고 날개채는 정면 1칸, 측면 2칸이 연결된 평면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1910년대 촬영
된 사진자료에서 진남관과의 규모 비교를 할 경우 동 헌의 경간(기둥간 간격)이 매우 크게 계산되므로 측면 퇴칸의 유무도 면밀히 분석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22)
3-4. 동헌 일곽의 구성 건축물 추정
전라좌수영 동헌 일곽을 구성했던 건축물은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영성도, 호좌수영지 (湖左水營誌), 호남읍지(湖南邑誌), 호남영지(湖南 營誌), 여수지(麗水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湖左水營誌 營城圖)
에서 객사의 서북쪽에 위치한 동헌의 영역은 2개로 구획 되어 있다. 동헌으로 추정되는 운주헌의 일곽에는 운주 헌을 비롯하여 결승당, 책방, 내아, 공수(음식 만드는 곳)
22) 그러나 진남관이 75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정면과 측면의 퇴 칸도 모두 1칸으로 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동헌(운주헌)에도 퇴칸이 있었을 경우 17칸보다 더 많은 칸수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등이 있고 운주헌 남쪽에는 솟을삼문이 있으며 일곽의 바깥으로 완경루가 있다.
2개의 영역 중 동헌 일곽의 담장에 붙어 있는 영역의 내부에는 비장들이 사무를 보는 백화당과 백화당을 출입 할 수 있는 문이 그려져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동헌 일곽의 건축물로 공해(公解)의 동헌일곽에 있는 결승당(決勝堂), 운주헌(運 籌軒), 정변문(靜邊門), 공사문(公事門), 무권재(無倦齋), 백화당(百和堂), 완경루(緩輕樓)가 확인되고 중영(中營) 의 일곽으로 동헌(東軒), 공사문(公事門)이 확인된다.
1895년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 8책의 순천 부읍지 에는 운주헌의 건축시기와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 데 기존의 자료와 상이하여 주목된다. 운주헌은 30칸, 공 사문 3칸, 무권재 2칸, 비장청 3칸, 완경루 2층 3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결승당 이 없으나 같은 해의 호남영지에 언급되어 있다.
1895년에 편찬된 호남영지(湖南營誌)에도 공해로 객 관(客館), 결승당(決勝堂), 운주헌(運籌軒), 망해루(望海 樓), 완경루(緩輕樓), 독제각(纛祭閣) 등이 소개되고 있 다. 같은 해에 편찬된 호남읍지와 건축물 구성이 다른 점 으로 미루어 동헌 영역은 주요 건축물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902년에 간행된 여수지(麗水誌)에도 간숙당은 정당 (政堂)으로 17칸이고 옛 운주헌(運籌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 주변 건물로 주홀루는 정당 서루로 전에는 완경루, 수죽당은 9칸으로 간숙당 동쪽에, 내아는 9칸으 로 수죽당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사문과 정변 문은 언급이 없으나 정변문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5개의 문헌을 통해 전라좌수영 동헌 일곽을 구성했던 건축물의 시기별 기록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운주헌은 동헌으로 1847년부터 1895년 사이에 4칸에 서 17칸으로 중건되었고 1917년에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결승당은 절도사(節度使)에 소속된 우후(虞 候, 정4품)가 업무와 생활을 하던 공간으로 1847년부터 1895년 사이에 비슷한 규모로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변문은 운주헌의 출입문으로 3칸의 솟을대문이었 던 것으로 확인되고, 공사문은 백화당의 출입문으로 3 칸의 솟을대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권재는 1847년 전후에 3칸으로 건축되었다가 훼철 되어 1895년부터 1902년 사이에 9칸의 수죽당으로 중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5년 조경옥 소장 호좌수 영도에는 동일한 자리의 건축물이 책방(冊房)으로 기 록된 것으로 미루어 무권재와 책방은 동일 건물일 가능 그림 24. 17칸 동헌의 구성
그림 25. 동헌일곽을 구성했던 건축물의 시기별 기록 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장청인 백화당은 8칸과 3칸의 기록이 혼재하는데 1900년에 5칸의 형사청으로 중건된 것으로 확인되고, 완경루는 1815년부터 1895년의 기록에서 확인되나 1902 년의 여수지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1895년부 터 1902년 사이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아는 1815년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와 1847년 호좌수영지의 호좌수영도 에 기록과 그림이 있고 1902년 여수지에서 9칸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지만 1910년대의 사진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훼철되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을 장만하던 공수는 1815년 의 조경옥 소장 호좌수영지 영성도에만 확인된다.
건축물명 1815 1847 1895 1902 비고
운주헌 ● ● ● ●
정변문 ● ● ● ●
결승당 ● ● ●
무권재 ● ● ● ● 책방
내아 ● ● ●
백화당 ● ● ● ●
공사문 ● ● ●
완경루 ● ● ●
표 3. 문헌을 통해 살펴본 동헌 일곽의 구성 건축물
문헌에 기록된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의 동헌 일곽을 구성했던 건축물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그림 26. 전라좌수영 동헌 일곽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
이를 종합하여 현재의 지적도 상에서 배치를 추정해 보면 동헌인 운주헌을 중심으로 출입문인 정변문이 위치 하고 동쪽에는 무권재, 북쪽에는 결승당이 위치하며 무 권재와 결승당 사이에 내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헌의 서쪽에는 백화당과 백화당의 출입문이 공 사문이 위치하고 운주헌의 남쪽에는 완경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결론
본 연구는 전라좌수영 동헌일곽에 대한 복원적 고찰 을 다룬 것으로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8세기 중반을 넘어서 정착된 전라좌수영 내 시설 물은 각각의 기능에 따라 일정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 었고 영성(營城) 내에서 건물별로 기능에 따른 영역을 나누면, 크게 객사-동헌-향청-중영-군청-공방-창고와 하급 관료의 건물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라좌수영의 영역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객 사와 동헌의 영역이다. 객사는 지방수령이 임금을 곁 에 모시고 있다는 상징성이 강한 건물로서 75칸의 진 남관과 3칸의 중문으로 별도의 담장을 통해서 구획되
호좌수영지 영성도 호좌수영지 순천부읍지 호남영지 여수지
표 2. 문헌에 기록된 동헌 일곽의 구성 건축물 배치 개념도
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동헌영역은 객사 북동쪽에 자리하는데, 진입부로 완 경루(緩輕樓)와 공사문(公事門), 정변문(靜邊門)이 있고 객사와 마찬가지로 담장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내부에 는 동헌이었던 운주헌(運籌軒)이 일곽의 중앙에 놓여 있고, 공무를 집행하던 결승당(決勝堂)과 무권재(無倦 齋), 내아(內衙), 책방(冊房), 공수(供需) 등이 설치되었 다. 일곽 밖에는 비장청(裨將廳)으로 사용되었던 백화 당(白和堂)과 진휼고(賑恤庫), 병고(兵庫)가 동헌영역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헌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건 물은 1664년 이후에 개건된 것으로 보이며 이전의 동 헌이 놓였던 자리는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현존하는 진남관(鎭南館)은 선조 32년(1599)에 최초 건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에 소실되어 숙종 44 년(1718)에 재건되었으므로 1858년 이전의 운주헌을 비 롯하여 1869년에 17칸으로 재건된 운주헌(간숙당)과도 그 역사적인 분모를 공유하고 있다.
동헌의 일곽을 구성하는 건물 중 중심이 되는 운주 헌의 경우도 최소 3차례 이상 재건축되었던 것으로 파 악되고 결승당, 무권재, 백화당 등의 동헌의 일곽을 구 성했던 건축물들도 전라좌수영성 내에 지속되지 않았 고 최소 1차례 이상 재건되어 1900년대 초까지 유지되 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문헌
1. 성종실록(成宗實錄)(1491)
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3. 난중일기(亂中日記)(1592∼1598)
4.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1656) 5.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1847) 6.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7. 호남읍지(湖南邑誌)(1871) 8. 여수군읍지(麗水郡邑志)(1902) 9. 해동지도(海東地圖)(1750年代初)
10.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案地圖)(18世紀中葉) 11. 여지도(輿地圖)(18世紀中葉)
12. 전라남북도여지도(全羅南北道輿地圖)(18世紀後半) 13. 호좌수영도(湖左水營圖)(1847)
14. 1872年地方地圖-順天府地圖(1872년지방지도-순천부지 도)(1872)
15. 1915년 국가기록원 소장 폐쇄지적도 1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사진 17. 1971년 여수시 폐쇄지적도
18. 1991년 여수시 폐쇄지적도
19. 김행범, 근대기 전라좌수영의 공간변화에 관한 연구 , 호남문화연구, 521집, 2012
20. 우승완, 일제강점기 여수의 도시 특성 변화에 관한 연구 , 한국도시설계학회지, 제12권 제5호, 2011 21. 오정훈, 전라좌수영의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 대한
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19권, 12호, 2003
접수(2016. 2. 15) 수정(1차: 2016. 4. 9) 게재확정(2016.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