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 王儉朝鮮
魏書(위서)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二千年前(2천년전)에 壇君王儉(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阿斯達(아사달)【經(경)에는 無葉山(무엽산)이라 하고 또한 白岳(백악)이라고도 하니 白州(백 주)에 있다. 혹은 開城東(개성동)쪽에 있다하니 지금의 白岳宮(백악궁)이 그것이다】에 정하 고 나라를 開創(개창)하여 朝鮮(조선)이라 일컬으니 高(고)와 同時(동시)라 하였다. 古記(고 기)에 이르되, 옛날에 桓因(환인)【帝釋(제석)을 이름】의 庶子(서자) 桓雄(환웅)이 있어, 항 상 天下(천하)에 뜻을 두고 人世(인세)를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삼 위태백)을 내려다보매 人間(인간)을 널리 利(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天符印三個(천부인삼 개)를 주어, 가서 (세상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雄(웅)이 무리 三千(삼천)을 이끌고 太白山 (태백산) 꼭대기【太白(태백)은 지금 妙香山(묘향산)】神壇樹(신단수) 밑에 내려와 여기를 神 市(신시)라 이르니 이가 桓雄天王(환웅천왕)이란 이다. (그는) 風伯(풍백)·雨師(우사)·雲師(운 사)를 거느리고 穀(곡)·命(명)·病(병)·刑(형)·善(선)·惡(악) 등 무릇 人間(인간)의 三百六十餘事 (삼백육십여사)를 맡아서 人世(인세)에 있어 다스리고 敎化(교화)하였다. 그때 一熊(일웅)과 一虎(일호)가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神雄(신웅)에게 빌되 원컨대 化(화)하여 사람이 되어지 이다 하거늘, 한번은 神雄(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자래와 마늘 二十(20)개를 주고 이르기 를 너의들이 이것을 먹고 百日(백일)동안 日光(일광)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 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忌(기)하기 三七日(삼칠일) 만에 곰은 女子(여자)의 몸 이 되고 범은 능히 忌(기)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熊女(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壇樹(단수)아래서 祝願(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 하였다. 雄(웅) 이 이에 잠간 변하여 結婚(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壇君王儉(단군왕검)이라 하였다.
(王儉:왕검)이 唐高(堯)〔당고(요)〕의 卽位(즉위)한지 五十年(50년)인 庚寅(경인)【唐高(당 고)의 卽位元年(즉위원년)은 戊辰(무진)인즉 五十年은 丁巳(정사)요 庚寅(경인)이 아니다. 아 마 틀린 듯하다】에 平壤城(평양성)【지금 西京(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소 朝鮮(조선)이라 일컫고, 또 도읍을 白岳山阿斯達(백악산아사달)에 옮기었는데, 그곳을 또 弓(궁)【혹은 方字 (방자)로 됨】忽山(홀산), 또는 今旀達(금미달)이라고도 하니 治國(치국)하기 一千五百年(1천 5백년)이었다. 周(주)의 虎王(호왕) 卽位己卯(즉위기묘)에 箕子(기자)를 朝鮮(조선)에 봉하매, 壇君(단군)은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阿斯達(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山神(산 신)이 되니, 壽(수)가 一千九百八歲(1천9백8세)이었다 한다. 唐(당)의 裵矩傳(배구전)에는 高 麗(고려)는 본시 孤竹國(고죽국)【지금 海州(해주)】인데 周(주)가 箕子(기자)를 봉하여 朝鮮 (조선)이라 하였고, 漢(한)은 三郡(삼군)을 分置(분치)하여 玄菟(현도)·樂浪(낙랑)·帶方(대방)
【北帶方(북대방)】이라 하였으며, 通典(통전)에도 此說(차설)과 같다【漢書(한서)에는 眞 (番)〔진(번)〕·臨(屯)〔임(둔)〕·樂(浪)〔낙(랑)〕·玄(菟)〔현(도)〕의 四郡(사군)으로 되어 있
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 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
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 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 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 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 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
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 (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三 國遺事』 권1 紀異1, 古朝鮮 王儉朝鮮)
高句麗 始祖 東明聖王
○ 始祖 東明聖王의 성은 高씨요 諱는 朱蒙[혹은 鄒牟 혹은 象解[衆牟]라고도 씀]이다. ○ 처음에 扶餘王 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山川에 제사하여 後嗣를 구하려 했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이란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겨 놓고 보니, 한 金色 蛙形[蛙는 一本에 蝸로 쓰여 있음]의 小兒 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賢嗣를 주심이라” 하고 곧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金蛙라 하고 長成하자 太子를 삼았다. ○ 그 후에 [扶餘]國相 阿蘭弗이 말하 기를, “日前에 天神이 나에게 降臨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이곳에 건국케 하려 하니 너희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東海 가에 迦葉原이란 곳이 있으니 토양이 기름지고 五穀 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고 하였다. 阿蘭弗이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 곳으로 도 읍을 옮기고 국호를 東扶餘라 하였다. ○ 그 舊都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칭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 하고 와서 도읍하였다. ○ 解夫婁가 돌아가고, 金蛙가 그 位를 이었 다. 이 때 [金蛙는] 太白山[지금의 白頭山] 남쪽 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얻어 來歷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河伯의 딸로, 이름은 柳花입니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제 말로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 하고 나를 熊心山 아래 鴨淥 가[邊]의 집 속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운 후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에게 몸을 허락하였다고 하여 드디어 이 優渤水에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고 했다.
금와는 이상히 여겨 그를 집 속에 가두었는데, 日光이 비추더니 몸을 피하는 대로 일광이 또 따라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닷되들이 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모두 먹지 아니하였고, 또 길바닥에 버렸더니 牛馬가 피해 갔 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품어 주었다.
○ 왕이 그 알을 쪼개 보려 하였으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 다. ○ 그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 리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표히 凡兒와 달리 제 손으로 弓矢 를 만들어 쏘는데, 百發百中이었다. 扶餘의 俗語에 善射者를 ‘朱蒙’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 금와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어 주몽으로 더불어 遊戱하는데 그 技 能이 모두 주몽을 따를 수 없었다. ○ 그 長子인 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용맹스러우니, 만일 일찍이 그를 도모치 않으면 後患이 있을까 두 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소서”라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으로 말을 기르게 하였다. ○ 주몽이 말의 성질을 살피어 駿馬에게는 먹을 것을 減하여 여위게 하고 노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 왕은 살찐 것을 자기가 타고 여윈 것을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原野에서 사냥을 할 때 주몽은 善射인 까닭으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그의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
였다. ○ 주몽은 이에 鳥(烏)伊․摩離․陜父 등 3명과 벗삼아 (도망하여) 淹㴲水[一名 蓋斯 水니, 지금의 鴨綠 東北에 있다]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追兵이 쫓아 올까하여 강물에 告하기를, “나는 天帝의 아들이요 河伯의 外孫으로 오늘 도망하는 중 에 追者가 쫓으니 어찌하랴”고 하였다. 이 때 魚鼈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 주몽 이 무사히 건너자 魚鼈이 곧 흩어지니 뒤를 쫓는 騎兵이 건너오지 못하고 말았다. “
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 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 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 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 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 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 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 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 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少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 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 有爲”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水 一名盖斯水 在今鴨淥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 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 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一云 朱蒙至卒本 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 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 敢犯焉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 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三國史記』 권13 高句麗本紀1, 始祖 東明聖王)
百濟 始祖 溫祚王
○ 百濟의 始祖 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鄒牟니 혹은 朱蒙이라고도 한다. [朱蒙은] 北扶餘에서 도망하여 卒本扶餘[渾江流域의 桓仁]로 왔는데, 卒本扶餘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 다. 朱蒙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딸로 아내를 삼았다. 얼마 아니하여 卒本扶餘 王이 돌아가니 주몽이 그 位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沸流라 하고 둘 째아들은 溫祚라 하였다[혹은 朱蒙이 卒本(에 와서 건너편 고을 越郡의 女子를 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琉璃)이 와서 太子가 되자 沸流와 溫祚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烏干․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南行하였는데, 따라오는 百姓이 많았다. 드디어 [北)]漢山에 이르러 負兒嶽[三角山]에 올라 가히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沸流는 海邊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열 명의 신하가 간하 기를, “생각건대 이 河南의 땅은 北은 漢水를 띠고, 東은 高岳을 의지하였으며, 南은 沃澤을 바라보고, 西로는 大海를 격하였으니, 그 天險地利가 얻기 어려운 地勢라 여기에 都邑을 이 루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仁川]로 가서 살았다. 溫祚는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輔翼을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니, 이 때가 前漢 成帝의 鴻嘉 3년이었다. 비류는 彌鄒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安居할 수 없으므 로 돌아와 慰禮를 보았는데 都邑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慙悔하여 죽으니, 그 臣民 이 모두 慰禮에 돌아왔다. 올 때에 백성이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百濟라고 고쳤다.
그 世系가 高句麗와 한가지로 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扶餘로써 姓氏를 삼았다.[혹은 이르 기를, 始祖는 沸流王으로서, 아버지는 優台니 北扶餘王 解扶婁의 庶孫이며, 어머니는 召西奴 니 卒本人 延陀勃의 딸이다. [召西奴가] 처음 優台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長子 는 沸流요 次子는 溫祚였다. 優台가 죽자 [召西奴]는 卒本에서 寡婦로 지내었다. 뒤에 朱蒙 이 [北扶餘에 容納되지 못하여 前漢 建昭 2년(西紀前 37) 2월에 南으로 卒本에 이르러 都邑 을 세우고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妃로 삼았다. 그가 건국에 內助의 공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과 같이 대우하였 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孺留가 오자 그를 太子로 세우고 位를 잇 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大王이 부여에서 難을 피하여 여기로 도 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家財를 기울여서 도와 邦業을 이룩해 그 勤勞가 많았다. 대왕 이 세상을 싫어하자[昇天], 나라는 孺留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있어 혹(疣)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國都를 세우 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浿水와 帶水의 두 江을 건 너 彌鄒忽에 가서 살았다 한다. 『北史』와 『[隋]書』에는 모두 이르기를 ‘東明의 後孫에 仇台란 이가 있어 仁信에 頓篤하였다. 처음 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는데 漢의 遼東太守 公
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 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 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 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
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
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 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 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 知孰是”(『三國史記』 권23 百濟本紀1, 始祖 溫祚王)
新羅 始祖 赫居世居西干
○ 始祖의 성은 朴씨, 諱는 赫居世(혁거세)이다. 前漢 孝宣帝 五鳳 원년 甲子 4월 丙辰날
[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함]에 즉위하여 王號를 居西干이라 하고, 그 때 나이는 13세, 국 호는 徐那伐이라 하였다. ○ 일찍이 朝鮮의 遺民[亡人]들이 이곳에 와서 山谷間에 흩어져 여 섯 촌락을 이루었다. 첫째는 閼川의 楊山村, 둘째는 突山의 高墟村, 觜山의 珍支村[혹은 于 珍村], 넷째는 茂山의 大樹村, 다섯째는 金山의 加利村, 여섯째는 明活山의 高耶村이란 것이 니, 이것이 辰韓의 6부이었다. 高墟村長인 蘇伐公이 하루는 楊山 밑 蘿井 곁에 있는 숲 사이 를 바라본즉,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으므로 가보니 말은 간 데 없고, 다만 있는 것은 큰 알뿐이었다. 알을 깨어 본즉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 곧 蘇伐公이 데려다가 길렀더니, 나이 10여 세가 되니 유달리【솟아나게】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 던 까닭에 높이 받들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 辰人은 瓠를 박이라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大卵]이 박과 같다 하여 朴으로써 성을 삼았다. 居西干은 辰人의 말에 왕이란 뜻이다[혹은 貴人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 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 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 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三國史記』 권1 新羅本紀1, 始祖 赫居世居西干)
脫解尼師今
○ 脫解尼師今이 즉위하니[혹은 吐解라고도 함] 그 때 나이 62세이며, 성은 昔씨요 妃는 阿孝 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디 多婆那國의 출생으로, 그 나라는 倭國의 東北 1천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국왕이 女國王의 딸을 데려다 아내를 삼았더니,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는데,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버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아내는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갈 데로 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처음 金官國 해변에 가서 닿으니, 금관국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아니하고, 다시 辰韓의 阿珍浦口에 이르 니, 이때는 시조 赫居世가 재위한 지 39년이 되던 해였다. 그 때 해변의 老母가 이를 줄로 잡아당겨 바닷가에 매고 궤를 열어 보니, 거기에 한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노모가 이 를 데려다 길렀더니, 커지매 身長이 九尺이나 되고, 인물이 동탕하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
8 三國史記 卷 第一 (脫解尼師今)
범상한 사람이 아니요 골상이 특이하니 학문을 배워 功名을 이루라”고 하였다. 이에 탈해는 학문에 오로지 힘쓰고 겸하여 地理를 알게 되었는데, 楊山 밑에 있는 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그 터가 吉地라고 하여 거짓 꾀를 내어 이를 빼앗아 살았으니 후에 月城이 그 곳이었다. ○ 南解王 5년에 이르러 왕이 그 어짊을 듣고 그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했고, 7년에는 登用하 여 大輔란 벼슬을 삼아 政事를 맡기었는데, 儒理가 돌아갈 때 유언하여 말하기를, “先王[南 解]의 부탁하신 말씀에, 내가 죽은 뒤에는 子와 壻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으로 位 를 잇게 하라 하셔서 寡人이 먼저 즉위하게 된 것이니, 이제는 그 位를 탈해에게 전할 것”
이라고 하였다.“
脫解尼師今
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 並寶物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 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櫝見之 有一 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 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 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 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 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 立 今也宜傳其位焉” (『三國史記』 권1 新羅本紀1, 脫解尼師今)金閼智 脫解王代
永平 三年 庚申【혹은 中元 六年이라 하나 잘못이다. 中元은 二年뿐이었다】八月 四日에 瓠公이 밤에 月城 西里를 가다가 큰 光明이 始林【혹은 鳩林이라고도 함】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紫色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黃金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 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우는지라 이것을 王에게 아뢰었다. 王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고 보니 그 속에 童男 하나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赫居世의 古事와 같으므로, 그 말에 인하여 閼智라 이름하니 閼智는 곧 우리 말에 小兒를 말함이다.
童男을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해서 모두 뛰놀았다. 왕이 吉 日을 택하여 太子로 冊封하였으나, 후에 婆娑에게 사양하고 王位에 나아가지 않았다. 金궤에 서 나왔다 하여 姓을 金氏라 하였다. 閼智는 熱漢을 낳고 漢은 阿都를 낳고 都는 首留를 낳 고 留는 郁部를 낳고 部는 俱道【혹은 仇刀】를 낳고 道는 未鄒를 낳아 鄒가 王位에 오르니 新羅의 金氏는 閼智에서 시작되었다.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 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 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行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 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 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三國遺事』 권1 紀 異1, 金閼智 脫解王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