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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orrelation between underground structure and tumulus of the Royal Tomb in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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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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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0.29.2.019

조선후기 회격릉의 지하구조를 반영한 봉릉의 시공과 형식

A Study on the correlation between underground structure and tumulus of the Royal Tomb in the Joseon Dynasty

신 지 혜*1) Shin, Ji-Hye

(건축문헌고고 연구원, 공학박사)

Abstract

In the early of Joseon Dynasty, Royal Tomb developed from stone chamber tomb to lime chamber tomb through precedents. The lime chamber tomb consists of main-chamber(JeongGwang) and sub-chamber(ToeGwang). This separation makes character to construct tumulus of the Royal Tomb half and half. By this character, the Royal Tomb are not constructed by separate structure but constructed by coadjustment. The underground structure and tumulus of the Royal Tomb affect each other in the size and method of construction. The selecting type of Royal Tomb is generally made decision through terrain and politics. This study prove the architectural structure is also one of the major cause the that select type of Royal Tomb.

주제어 : 조선왕릉, 지하구조, 회격릉, 석실릉, 봉분, 반월분, 현궁, 부장품, 산릉공역

Keywords : underground sructure, stone chamber Tomb, tumulus, lime chamber Tomb, tumulus, half burial mound, burial space, construction mothod, Royal Tomb

1. 서 론

조선 왕실의 무덤 중 왕과 왕후의 무덤만을 능(陵) 이라 구분하며, 능의 지하공간을 현궁(玄宮)1)이라 부 르고 왕릉의 격식을 갖추었다. 조선의 건립 이후 왕릉 은 42기가 조성되었으며 일정한 규모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왕릉의 장례를 위한 공간은 정자각 뒤편에 높은 언덕을 형성하고 그 위에 자리잡는다. 매장자를 안치 하는 지하공간은 재궁2)이 모셔지는 현궁이라는 중심 공간과 장례를 위한 통로로 구성된다. 지상에는 지하 공간을 덮고 왕릉의 상징성을 갖는 반구형(半球形)의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조선 왕과 왕후의 능에서 재궁을 봉안하는 지하구조를 현궁(玄 宮)이라 부르며, 왕세자와 세자빈의 경우는 현실(玄室)이라 격을 낮 추었다.

2) 재궁: 왕과 왕후를 매장하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관(棺)을 재궁 (梓宮)이라 하며 재궁을 감싸는 곽(槨)을 외재궁(外梓宮)이라 한다.

이와 비교하여 세자와 세자빈의 관은 재실(梓室)이라 하며 곽을 외 재실이라 격을 구분하여 부른다.

봉릉3)을 갖추었다.

조선초 왕릉의 지하공간은 석재를 사용하여 석실로 조성하였으나, 1468년 이후 대형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삼물회를 이용하여 회격으로 건립하도록 규정하였다.

대형석재에서 삼물회로 재료가 변화된 것은 구조와 공 간 규모와 시공법 등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전기 석실의 구조는 『세종실록』과 『국조오례 의』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문헌의 기록과 고려석실 의 조사를 바탕으로 조선전기에 건립된 석실의 구조와 시공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4)

3) 봉릉(封陵): 조선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기록된 『산릉도감의 궤』에서 왕과 왕후를 매장하고 지상에 반구형의 봉분을 갖추는데, 이것을 ‘봉릉’이라 기록하였다. ‘봉릉원경(封陵圓徑)’이라 하고 봉분 의 지름을 기록하여 봉릉의 규모를 나타내었다. 또 ‘봉릉제도(封陵 制度)’라 쓰고 봉분의 원경과 원둘레, 높이 등을 기록하고 있다. 따 라서 왕과 왕후의 매장을 위한 지하구조를 ‘현궁’이라 격식을 높여 부르듯 그 상부에 봉분을 특별히 격식을 갖추어 부르는 단어로 ‘봉 릉’이라 하였다.

4) 김상협, 「조선전기 왕실 석실 축조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제25권, 제7호, 2009년 7월, 175∼184쪽 ;

(2)

조선후기 회격릉에 대한 문헌 자료는 1601년 『의인 왕후산릉도감의궤』이후로 왕릉 조성할 때마다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를 통하여 각각의 왕릉 조성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또 영조 33년에 정리된『국조상례 보편』에서 왕릉의 치장(治葬)공간의 규범을 규정하고 있다. 또 2009년에 발굴된 장경왕후의 구 희릉(舊 禧 陵)을 통하여 회격릉의 유구를 볼 수 있었다. 이와같 은 문헌과 발굴조사를 기반으로 회격릉의 조성방법을 연구한 논문5)들이 발표되었다.

기존 연구는 석실과 회격에 대하여 각각의 시공방법 과 구조에 대하여 충실히 고찰하고 있어 이를 바탕으 로 본 연구는 석실에서 회격으로 전개과정에서 전례가 되었던 요소들과 재료의 속성차이로 인해 변화되는 공 간, 지하구조와 지상구조의 상관성에 대해 연구를 전 개할 수 있었다.

조선초 석실릉은 대형석재를 이용하여 구조체를 만 들고 필요한 내부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이었으나. 회격 릉은 삼물회를 다져서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내부공간 확보에 한계가 있었다. 내부공간 규모의 한계를 해결 하기 위하여 변화된 회격릉의 지하공간 구조를 살펴보 고, 석실릉의 구조와 어떠한 연계성을 갖고 변화되었 는지 알아볼 수 있다.

또 이러한 지하공간 변화는 상부 봉릉을 조성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지 살펴보려고 한다. 재료의 변 화로 인해 지하구조가 변화하였으나, 지하구조를 덮는 봉릉의 모습은 외관상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변화된 지하공간에 장례의례를 갖추어 매장자를 안치 하고 봉릉으로 덮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겼으며, 이는 봉릉의 형식6)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 상된다.

본 연구는 조선왕릉의 지하공간이 필요한 공간의 확 보를 위하여 방법을 모색하고 변화되어왔으며, 지하공 간과 지상의 봉분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그 형 식과 규모를 정하고 있음을 인식하는데 의미를 갖는 다.

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문헌에 기록 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문화재』, Vol.45, No.1, 2012년 3월

5) 안경호, 「조선 능제의 회격 조성방법- 장경왕후 초장지를 중심 으로-」, 정신문화연구, 제32권, 제3호, 2009 ;

김상협, 「조선왕릉 회격현궁 축조방법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21 권, 4호, 2012

6) 봉분의 형식은 단릉(單陵)과 쌍릉(雙陵), 삼연릉(三連陵), 합장릉 (合葬陵),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봉릉으로 구분된다.

2. 회격릉의 지하구조, 정광과 퇴광

7) 2-1. 석실릉에서 회격릉으로의 전개

조선초 왕릉은 석실의 제도로 조성되었다.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왕 릉 제도를 정리하였으며, 『세종실록』에 헌릉의 석실 조성과정과 구조를 기록하였다. 또 『국조오례의』의

「흉례」「치장」에서 석실 제도로 합장릉의 구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468년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석 재를 제외하고 회격을 구조체로 왕릉의 지하공간을 조 성하도록 하였다. 조선초 석실릉에서 회격릉으로 변화 될 당시의 산릉조성과정을 기록한 자료가 남겨져 있지 않아 아쉽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제 도를 이해하여 이를 토대로 조선초 회격릉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국조오례의』의 「흉례」「치장조」에는 석재를 구조체로 하여 두 개의 석실을 만든 합장릉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으나, 이를 단릉으로 건립할 때에는 〈그 림 1〉8)과같이 조성된다.

삼물회 재궁

애책 증옥 증백

편방 복완

숯5치

4자

삼물회 4자

숯5치

숯5치

그림 1.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석실(단릉)추정도 석실릉은 대형석재를 구조체로 세우고 그 외곽에 삼 물회와 탄격을 사용하여 석실을 밀실하게 감싸도록 하 였다. 이때 석실 내부에는 재궁이 안치되고 그 서쪽에 애책을 놓고, 애책의 남쪽에 증옥과 증백을 배치한다.

7) 정광(正壙)과 퇴광(退壙): 회격으로 지하구조를 형성할 때 두 번 의 광을 파는데, 먼저 재궁은 안치하기 위한 공간으로 봉릉의 중심 에 금정기로 마름하여 파는 광을 정광이라 한다. 퇴광은 국장을 위 하여 통로로 파는 광이다.

8) 김상협의 『조선전기 왕실 석실 축조 연구』를 바탕으로 그렸으 나, 편방의 위치만 문의석 남쪽으로 변경하였다. 석실 내부의 배치 는 『국조오례의』의 「흉례」부분에 기록된 「천전의」에 따라 석 실 내에 재궁과 부장품을 배치하였다.

(3)

남는 공간에 복완과 명기를 놓도록 하였다.9) 공간이 부족하여 석실 내부에 부장품을 배치할 수 없을 때 석 실 문밖에 편방(偏旁)이라는 석함을 만들어 그 안에 넣도록 하였다.10)

석실 내부규모는 너비5자5치, 길이 10자로 조성되며, 편방의 내부규모는 너비 2자2치, 길이 1자2치 정도 된 다. 석실과 편방의 내부규모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초 왕릉 내부에 재궁과 부장품을 안치하기 위하여 최소한 필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석실 외곽에 삼물회는 4자 두께로 쌓아올려 회격 을 만들었으며, 회격 외면에는 숯을 5치 두께로 쌓아 올려 탄격11)을 만들었다.12) 이것은 왕릉 지하공간을 회격으로 조성할 때 구조체가 되는 회격의 두께를 결 정하는데 기준이 되었다.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석실 제도에서 석재만을 제외하고 회격과 탄격의 규격을 그대로 적용하여 회격 릉을 만든다면 〈그림2〉와 같은 구조를 추정할 수 있 다.

숯5치

삼면방회4자

재궁 숯5치

숯5치

전면방회4자

퇴광

애책 증옥 증백 복완

편방

봉릉규모

그림 2.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른 회격 지하구조 추정도

재궁과 부장품을 안치할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동·

서·북면에 회격을 4자 두께로 쌓아올려 구조체를 형성 하고 그 외곽에 5치 규모의 탄격을 다져서 사방과 상 부를 둘러싼다. 4자 두께로 삼물회를 단단히 쌓아올려

9) 『국조오례의』, 「흉례」, 천전의(遷奠儀) 10) 『국조오례의』, 「흉례」, 치장(治葬)

11) 탄격(炭隔)은 숯가루를 다져쌓아 만든 것으로, 17세기 중반 이 전에 건립된 조선왕릉 현궁의 가장 바깥쪽에 형성되었다.

이우종, 「조선 왕릉 광중 탄격 조성의 배경과 시대적 변천」, 대한 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제26권, 제4호(통권258호), 2010년 4월, 18 3~192쪽

12) 『국조오례의』, 「흉례」, 治葬

구성한 회격 현궁에 재궁과 주요 부장품을 배치하고, 공간이 부족하여 남은 부장품은 편방이라는 석함을 만 들어서 전면방회(회격 현궁의 문)밖에 배치하도록 한 다. 이는 석실 문밖에 편방을 두었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2-2. 회격 현궁의 내부공간 확보의 어려움

17세기 이후에 남겨진 『산릉도감의궤』기록을 살펴 보면 『국조오례의』를 따르되 왕릉 지하구조의 규모 를 줄이거나 공역과 재료를 줄이기 위하여 회격의 두 께를 4자에서 3자5치∼3자까지 줄어들기도 한다. 또 재궁을 안치하는 현궁의 규모가 석실만큼 확보되지 않 고 부장품 배치공간이 현궁 문밖에 형성되는 것을 확 인하게 된다. 회격릉에서는 현궁 내부공간이 충분히 확보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 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 의인왕후의 목릉을 건립할 당시에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의 제도와 당시 에 사용하는 현궁의 제도가 다른데, 전거(前據)로 삼을 의궤가 없어 논의가 이루어졌다.13)

그 첫 번째 논의는 현궁을 이루는 사방 벽을 이루는 회격과 그 외부의 탄격의 두께, 천정을 이루는 천회 (天灰)의 두께를 어느 정도로 규정할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국조오례의』는 석실 제도를 기록하였으나, 회격의 규격은 동서남북 각 4자로 정하며, 그 외부 탄 격은 5치로 정하고 있어 참고할만하였다. 그러나 당대 장인들이 사용하던 규격은 동서남북의 회격은 3자5치 이며, 탄격은 1자 두께를 사용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 이고 있다. 논의 결과 당대 장인들의 규격은 구전되어 믿기 어려우므로 『국조오례의』를 따르기로 한다. 그 러나 『국조오례의』에는 천회의 규모는 기록에 정하 지 않았기 때문에 『정릉개장의궤』의 4자3치7푼을 따 르기로 한다.14)

두 번째 논의는 현궁 내부에 재궁과 부장품을 안치 13)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계사」, 8월 28일

(總)護使意啓曰 昨日 啓辭內 五禮儀所載 治葬條 用石室之制 與近世 所用 玄宮之制 不同而 各年儀軌無憑可考 如三物等築實厚(五禮)儀 則...

14)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계사」, 8월 28일

如三物等築實厚(五禮)儀則 東西南北 各四尺 而近世通用三尺五寸云 炭末築(實厚) 五禮儀則 東西南北 各五寸 而近世通用 一尺云 此皆 得 於工匠等 相傳之說 無文書可據爲難的信 且補板之蓋板上三物灰尺數() 無明文 但以靖陵改葬儀軌 觀之則 玄宮前面三物築實厚三尺五寸 蓋板 上三物灰 實厚以四尺三寸七分載錄 此則其時必因舊築三物基地 而爲 之仳有可據 而臣等未知從五禮儀 從改葬儀軌 與否至於炭厚尺寸 則改 葬儀軌內 不爲擧論 從五禮儀 用五寸乎 從相傳之通用一尺乎 此等節 目臣等難以儃定取稟

(4)

하기 위한 공간이 부족하여 해결책을 찾는다. 『국조 오례의』를 따라 현궁의 내부에 재궁을 배치하고 그 서쪽에 애책과 옥백(贈玉, 贈帛), 복완, 명기를 배치하 는 것이 정례이지만, 회격으로 조성된 의인왕후의 현 궁은 외재궁과 내재궁 사이에 간격이 2치뿐이며, 외재 궁과 보판의 간격은 다만 1치뿐이니 애책함 조차도 현 궁 안에 넣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때 『정릉개장의 궤』15)를 상고하니 애책과 옥백함 모두 현궁 문밖에 배치한 것을 전례로 의인왕후의 목릉 건립 시에도 이 를 따르도록 한다.16)

그림 3. 의인왕후 목릉의 지하구조 추정도

따라서 1601년 의인왕후를 위한 산릉 조성시 『국조 오례의』와 『정릉개장의궤』를 참고하여 왕릉 지하공 간을 구성하였다. 현궁을 둘러싸는 방회는 4자, 천회는 4자3치7푼, 회격 외부를 마감하는 탄격의 두께는 5치 로 사방과 천정까지 시공하였다. 또 현궁의 내부공간 은 내재궁을 안치한 외재궁의 공간만 확보되었으며, 부장품은 현궁 문밖에 각각의 석함에 담아 배치하도록 하였다.

석실릉의 현궁은 내부공간이 충분하였으나, 회격릉 의 현궁은 점차 내부공간이 협소해지는 이유를 구조형 성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형석재로 벽체를 구성하고 개석(蓋石)을 덮어 구 조를 형성하던 석실에서는 일정 규모의 내부공간을 형

15) 『靖陵改葬儀軌』는 1545년에 경기도 고양에 있는 장경왕후 희 릉 오른편에 조성된 중종의 정릉(靖陵)을 1562년에 선릉 동쪽 언덕 으로 천릉(遷陵)할 때 기록이다.

16)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來關」, 9월 14일

...五禮儀 則石室內長廣有裕 故得容哀冊贈玉贈帛等函仳難 竝容靖陵改 葬時 藏哀冊玉帛函 於閉玄宮之外者意必以此今亦依古例行之仳當取稟 傳曰酌豦之但 靖陵時事不可引 以爲例其時蒼黃必無所據今何足取法乎 事

성할 수 있었다. 반면에 삼물회를 거푸집 틀에 넣어 다져쌓는〔杵築〕 방식은 천정을 형성하는 거푸집을 안정적으로 받쳐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회격으 로 구성된 현궁의 천정부에 해당하는 천회는 공이로 다져서 4자4치 정도 쌓아올리는데, 분량의 삼물회의 무게17)와 공이로 다지는 진동과 하중을 거푸집이 감당 할 수 있어야 한다. 『산릉도감의궤』기록이 남아있는 1601년 이후의 산릉 시공과정에서 천회를 조성하기 위 한 거푸집을 견뎌주는 구조체로 외재궁을 사용하였 다.18) 회격으로 현궁을 조성할 때, 필요한 규모의 정광 을 판 후 외재궁을 내려 재궁을 안치할 자리를 잡는 다. 외재궁은 동·서·북쪽의 벽체를 먼저 쌓아올리는 기 준이 되며, 외재궁 상부에 보판(補板)19)을 올려 천정을 구성하는 거푸집의 역할을 한다.

석실로 조성된 왕릉에서도 재궁과 대관으로 목관을 이중으로 감싸 안치하였다. 회격릉에서도 내재궁과 외 재궁으로 이중의 목관을 사용하고 있다. 회격릉에서 지하구조의 첫 시작을 외재궁을 내려 기준을 삼고 하 17) 천회를 조성할 때 발생하는 무게를 예상하기 위하여 명성왕후 를 위한 산릉 조성 사례를 살펴보자. 『명성왕후산릉도감의궤』

(1683년)의 「삼물소」기록에 따르면 천회에 들어간 삼물회의 물량 은 1237섬 정도 되며, 이 삼물회를 14차에 나누어서 공이로 저축하 여 다져서 쌓아 견고히 하였다.

18) 1601년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 이후 조선왕릉을 건립하는 과정 을 담은 모든 산릉도감의궤에 정광을 판 후 ‘下外梓宮’이라하여 외 재궁을 광 밑바닥에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광의 회격구조를 시공 한다.

김상협의 『조선왕릉 회격현궁 축조방법 연구』(2012년)에서 거푸집 을 형성하는 두 가지 방법을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보판 과 횡대판으로 거푸집의 구조를 형성하고 그 내부에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구조부재를 설치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외재궁을 거푸집 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산릉도감의 궤가 기록되었던 가장 이른 시기의 1601년 『의인왕후산릉도감의 궤』 이후에는 외재궁이 거푸집의 하중을 지지하는 역할로 사용하 며 시기가 17세기 후반부터는 거푸집 역할을 하는 보판의 사용조차 사라지고 외재궁 외면에 직접 회격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시공이 이 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초기 회격릉의 사례에서는 보판과 격판 등을 이용하여 거푸집의 구조를 단단히 형성하고 회격구조를 모두 완성한 후 장례의례를 통해 재궁을 외재궁에 넣어 현궁 안으 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장례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 한 기록이 없어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

19) 보판(補板)은 회격릉 천회를 쌓아올리기 위하여 외재궁 상부에 3장으로 나누어 설치하는 판재이다. 1601년 『의인왕후산릉도감의 궤』와 1631년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에서는 천회를 쌓기 위해 외재궁 상부에 설치하는 판재를 보판이라 기록하고, 사방 벽체 를 형성하는 거푸집으로 사용되는 판재를 격판(隔板)이라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이때 보판의 두께는 5치 정도 된다. 1649년 『인조장릉 산릉도감의궤』에서 외재궁 상부에 판재는 ‘횡판’으로 기록하고 탄 격을 시공하지 않으니 보판을 사용하지 말라고 기록한다. 이때 보판 은 회격과 탄격 사이의 가로막는 판재를 말한 것이다. 1674년『숭릉 산릉도감의궤』1649년 인조장릉의 전례를 따라 보판을 사용하지 말 라고 하는데, 이때 보판은 사방벽을 형성하는 격판을 의미한 것이 다. 따라서 1649년 인조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이후의 기록에서 외재궁 상부의 올리는 판재는 ‘횡판’, ‘횡대판’이라는 이름으로 사 용된다.

(5)

중을 감당하게 하는 방법은 석실릉에서 석실을 완성하 고 장례의례가 이루어질 때 내재궁을 대관〔외재궁〕

에 넣어 석실 내부에 봉안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거푸집으로 사용된 보판 혹은 격판 을 사용하지 않고 외재궁의 외면이 거푸집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대신 외재궁의 표면이 상하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하여 기름먹인 종이〔油紙〕를 외재궁에 붙 여서 회격을 조성할 때 외재궁이 오염되는 것을 막도 록하였다. 결국 17세기 후반부터 회격릉의 현궁은 외 재궁의 규모만큼의 내부공간만을 형성하게 되며 부장 품은 모두 현궁 문밖에 배치하게 된다.

그림 4. 석실에서 회격으로 변화된 공간개념도

재궁을 안치하는 현궁의 재료변화로 인한 시공법의 변화는 재궁과 부장품의 배치공간에 변화를 주었다.

석실의 제도에서는 재궁의 서쪽 공간이 주요 부장품의 배치공간이며, 현궁 내부에 재궁과 부장품이 함께 매 장되는 공간구조였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회격릉은 현 궁에는 재궁과 그 곁에 세워지는 삽(翣)만이 배치되고 부장품은 현궁의 남쪽 문밖에 퇴광에 매장하게 된다.

2-3. 회격릉 퇴광의 공간 확대

회격으로 이루어진 현궁의 남쪽 퇴광에 부장품을 배 치하게 되면서 퇴광의 공간적인 가치가 변화하기 시작 한다.

첫 번째는 퇴광의 규모가 정광의 규모와 유사하며, 장례를 위한 통로로 일시적으로 사용하던 공간이 부장 품을 배치하는 상설적인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현궁의 문밖 일부분에 부장품을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은 잡석과 흙을 섞어서 메우거나 17세기 이후에는 석회를 사용하여 채워두었다.20) 그러나 조선

20) 퇴광을 메우는 방식은 1649년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이후의 의궤 기록에서 삼물회를 몇 차례에 나누어 쌓아 올린다. 그러나 이 전에는 퇴광을 삼물회로 채우지 않고 잡석과 흙을 섞어 채웠을 가

후기로 갈수록 퇴광에 부장품의 분량과 내용이 다양해 졌다.

1800년 이후에 『산릉도감의궤』에서는 「퇴광배설 도」라는 부장품 배치도를 그려볼 만큼 퇴광의 부장품 은 증가한다. 이는 석실 내부에 재궁을 안치하고 남는 공간에 부장품을 배치하던 시기와 달리 회격릉으로 변 화하면서 부장품을 안치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퇴광이 라는 충분한 공간에 각각의 석함에 부장품을 담아 배 설할 수 있게 되면서 부장품의 종류와 수량이 늘어나 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사례로 1800 년 정조의 장례를 위하여 건립된 건릉에는 퇴광에 애 책과 복완· 명기 외에도 ‘어제(御製)’를 담아 부장품으 로 넣었다.

그림 5. 1800년『건릉산릉도감의궤』「퇴광배설도」

두 번째 변화는 봉릉 하부 중심에 정광이 위치하였 던 것이 1674년을 기점으로 정광이 북쪽으로 약간 이 동하고 퇴광이 봉분의 중심부로 이동하여 봉릉의 중심 이 정광과 퇴광의 경계선이 된다. 이러한 배치의 변화 는 정광과 퇴광의 공간적 위계의 차이가 좁혀졌음을 시사한다.

조선초 석실로 형성되던 현궁과 17세기 후반까지 조 성된 회격릉에서는 봉릉의 중심에 재궁이 배치되도록 현궁의 위치를 배치하였다. 중종15년(1515)에 조성된 구희릉(舊禧陵) 봉릉의 중심에 회격으로 형성된 현궁 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봉분 하부 중심에 현궁이 배치되고 그 남쪽에 퇴광이 치우쳐서 배치되어 봉분하부 지하구조의 중심성은 현궁이며, 그 보조적 공간으로 퇴광이 남쪽에 배치되었다.

능성도 있다. 이 또한 퇴광이 장례의례를 위한 통로인 연도의 개념 에서 부장품의 배치공간으로 변화하면서 구조적 견고함을 위하여 석회가 사용되는 방식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이 없는 시기 에 대한 추정은 이후 연구를 통하여 채워질 부분이다.

(6)

그림 6. 『구 희릉 장경왕후 초장지 보존·정비보고서』, 8쪽 「능침주변발굴현황」

그러나 1674년 현종의 숭릉(崇陵)을 건립하면서 봉 릉 하부 중심에 놓이던 현궁이 북쪽으로 3∼4자 이동 하여 정광과 퇴광이 남북으로 유사한 규모로 배치된 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는 봉릉의 규모를 줄이기 위한 시도로 시작되었다.

1674년에 건립된 현종 숭릉(崇陵)은 건축 규모를 축 소하여 공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는 사례였다. 능상 위에도 공역축소를 위한 노력이 이 루어졌다. 효종 영릉(寧陵)의 제도에 따라 능상 위를 조성하되 봉릉의 규모는 인조 장릉(長陵)의 제도를 따 르도록 한다.21) 이는 능상석물 제도가 간략한 영릉을 따르되 영릉의 봉릉 규모는 35자에 이르니, 장릉의 봉 릉 규모인 25자로 조성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25자 봉릉 규모로는 기존의 지하구조를 포함 하기 어려웠다. 1649년에 장릉을 조성할 때, 지세가 좁 아 봉릉의 규모를 25자로 처음 정하였다.22) 그러나 봉 릉 안에 정광과 퇴광이 온전히 내포되지 못하여 퇴광 이 봉릉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 로 병풍사대석과 함께 사용하는 상석(裳石)으로 봉릉 밖으로 나오는 퇴광의 일부를 덮어 마감하도록 했 다.23)

21) 『숭릉산릉도감의궤』, 「계사」, 갑인 9월 19일 22)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1649년), 啓辭, 己丑5月25日

下石所列... 穴深十尺內減一尺五寸以金井上面爲准 灰隔四尺內減五寸 灰隔五寸全減 補板不用 外梓宮上用橫板厚五寸 封陵圓徑二十九尺內 減四尺

23) 『장릉산릉도감의궤』「계사」, 己丑 5월 27일

삼면방회3자5치

전면방회3자5치

퇴광:부장품배치

재궁 봉릉원경:25자

그림 7. 인조 장릉(長陵)의 지하구조

숭릉에서도 봉릉을 25자 규모로 조성하려니, 지하에 구성된 정광과 퇴광을 덮기 어려웠다. 숭릉의 봉릉을 두르는 석물의 제도는 난간석만 두르는 영릉의 제도를 따르기 때문에 장릉과 같은 해결책을 사용할 수 없었 다.24)

숭릉은 25자 봉릉에 지하구조를 맞추기 위하여 세 가지 방법을 적용한다. 첫째는 정광을 형성하는 사면 방회의 규모를 3자5치에서 3자로 줄이는 것이다. 그 결과 정광의 규모를 너비와 길이 각각 1자씩 줄일 수 있었다.25) 두 번째는 봉릉 밖으로 나오므로 퇴광을 1 자 가량 길이 방향으로 줄이도록 하였다.26) 마지막으 로 봉릉의 중심에 재궁의 중심이 위치하도록 배치하던 것을 뒤로 약 3자쯤 후퇴하여 외재궁의 하우판27)이 위 치하도록 하였다.28)

그 결과 봉릉의 중심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정광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퇴광이 위치하는 형태로 변화되었 다. 이와같은 중심공간의 변화는 이후 왕릉 지하공간 에 적용되어 정광과 퇴광이 유사한 규모로 연접하여 장방형 공간을 형성한다.

24) 『숭릉산릉도감의궤』 「계사」, 9월 28일

...又所啓 封陵圓徑 旣以二十五尺磨鍊 而但退壙下端數尺許 當出於封 陵外平地之上 長陵制度亦與此同 而以用裳石之 故退壙界限 猶得掩覆 於裳石之下 今則不用裳石 此甚難處...

25) 『숭릉산릉도감의궤』 「계사」10월 29일

都監郞廳 以摠護使意啓曰 壙中四面灰隔尺數 取考謄錄 則己亥年山陵 時 以三尺五寸磨鍊擧行 而上年遷陵時 因榻前定奪減其五寸以三尺磨 鍊 今春山陵時 亦用三尺之例矣 今則以何尺數爲之乎 敢稟. 答曰 以今 春例爲之

26) 『숭릉산릉도감의궤』 「계사」, 9월 28일

27) 하우판(下隅板): 외재궁을 남쪽면에 해당하는 판재로, 국장의례 를 행할 때 하우판을 떼어내고 외재궁 안으로 재궁을 들이므로 외 재궁의 입구가 된다.

28) 이는 『숭릉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봉릉의 원 경과 회격과 퇴광의 치수에 따라 도면을 그려본 결과 추정하는 것 이다.

(7)

외재궁 하우판

부장품 배치

봉릉지름:25자

재궁

전면방회:3자 삼면방회:3자

퇴광정광

그림 8. 현종 숭릉(崇陵)의 지하구조

32402700 1200141090

3000 3450

900 2550 900 2100

정광 퇴광

봉릉현궁

예토

복부형석회

천회 사방석

삼물회채움 전면방회

난간박석 난간박석

재궁 외재궁 횡대판

방회 하우판 부장품석함

지회

그림 9. 현종 숭릉(崇陵)의 지하구조 와 봉릉 단면

그림 10. 『근대건축도면집』 「下玄宮用拘捧機其他設計 圖」(1926년추정 청사진, p.133)

1649년 장릉과 1674년 숭릉의 조성과정에서 조선왕 릉의 지하공간과 봉릉의 규모는 상호 조절되면서 그 규모가 줄어들고 중심공간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봉릉 의 중심에 외재궁의 하우판이 위치하도록 정광과 퇴광

의 공간배치는 이후 조선왕릉의 지하공간 배치에 그대 로 이어진다. 이는 1926년 순종의 국장에서 하현궁의 (下玄宮儀)를 행하기 위하여 그린 도면에서도 외재궁 의 하우판이 봉릉의 중심에 위치하는 모습이 그대도 담겨져 있다.

3. 지하구조를 반영한 봉릉의 시공, 반월분

조선왕릉을 조성할 때 구덩이를 두 번 파게 된다.

첫 번째는 재궁을 안치할 현궁을 조성하기 위하여 파 는 석실릉에서는 ‘광(壙)’이라 하고, 회격릉에서는 ‘정 광(正壙)’이라 부른다. 두 번째 파는 구덩이는 장례의 례를 위하여 지상에서 지하로 연결하는 통로로 석실의 제도에서는 ‘연도’라 부르며, 회격릉에서는 ‘퇴광’이라 한다. 석실릉에서 현궁과 지상의 봉릉이 거의 완공되 었을 때 봉릉 남쪽에 현궁으로 통하는 연도를 파고 재 궁을 석실에 안치하는 장례의례〔下玄宮儀〕를 행한 다. 장례를 마친 후 연도는 잡석과 흙을 섞어서 막고 그 상부에 봉릉 남쪽 일부를 완공한다. (그림 11)

재궁

애책 증옥 증백

명기 복완

연도

그림 11. 조선초 석실릉의 봉릉과 연도

회격릉으로 구성되는 지하구조는 현궁을 조성하기 위한 정광과 장례의례를 위해 통로로 사용된 후 부장 품을 안치하는 퇴광으로 구성된다. 이때 정광과 퇴광 은 그 규모가 유사하여 봉릉 중심 원경을 기준으로 북 쪽에 정광이 위치하고 남쪽에 퇴광이 위치한다.

회격릉의 현궁을 조성하기 위하여 금정기를 배치하 고 정광을 파고 외재궁을 내려 그 삼면에 회격을 쌓아 올린다. 외재궁 상부에 횡대판까지 회격을 쌓은 후 천 회를 다져 쌓는다. 정광이 완성되면 봉릉의 중심에서

(8)

동서로 연결되는 원경에 반월편결29)을 세워 경계가 되 도록 하고, 정광 상부의 봉릉을 반월의 모양으로 시공 한다.

재궁 삼면방회

외재궁

하우판

난간석

반월편결 퇴광

그림 12. 조선후기 국장을 위하여 준비된 회격릉의 정광과 상부 半月成墳

예토

복부형석회

방회 외재궁

하우판 천회

횡대판

퇴광

재궁

그림 13. 조선후기 국장을 위하여 준비된 회격릉의 정광 과 상부 半月成墳 단면

정광 상부에 반월 형태의 봉릉이 완공될 무렵에는 산릉의 모든 건축공사가 완공된다. 국장의례를 위하여 궁궐에서 국장행렬을 갖추어 산릉에 도착한 재궁은 영 악전에 모셔두고, 현궁에 재궁을 안치하기 위하여 통 로가 되는 퇴광을 파기 시작한다.

퇴광은 국장의례를 행하는 공간이 되므로 사면에 휘 장과 걸개를 걸어 준비한다. 또 정광과 퇴광이 면하는 곳에 외재궁 하우판이 있는데 이것을 열어 국장의례를 준비한다. 이때 재궁은 영악전에서 능상(陵上)으로 올 라와 수도각으로 들어서고, 녹로를 통해 퇴광 하부로 내려 외재궁에 밀어넣어 안치한다. 하우판 앞(퇴광과 정광이 접하는 곳)에 전면방회를 정광의 방회를 쌓아

29) 반월편결(半月編結): 정광반월을 조성할 때 두 개의 기둥을 세 우고 3개의 가로부재를 이용하여 구성한 가림벽. 정광반월을 축토할 때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로 경계의 역할이 되며, 국장시 반월편결에 백휘장을 달아 반월의 단면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올리듯 여러 차례에 나누어 시공한다. 방회를 쌓는 기 간이 하루·이틀 소요되므로 그 다음날에 퇴광에 부장 품을 위계에 따라 배치하고 그 상부에 삼물회를 세 차 례에 나누어 쌓아올리면 퇴광이 밀폐된다. 퇴광 상부 에도 흙을 평평히 하고 봉릉의 구조를 시공하여 정광 반월분과 합하여 봉릉이 완공된다.

이와같이 국장의례를 기준으로 이전에 형성하는 정 광의 반월과 국장 이후에 조성하는 퇴광의 반월을 시 간차를 두고 나누어 조성하여 하나의 봉분으로 완성하 는 방법을 『산릉도감의궤』에서는 ‘반월분(半月墳)’, 혹은 ‘반월성분(半月成墳)’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광반월분과 퇴광반월분의 크기가 유사해진 시기는 1674년 숭릉 건립 시 정광과 퇴광의 배치변화 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1674년 이전과 같이 정광의 중심이 봉분의 중심에 위치하여 정광의 반월분이 크게 형성되고, 퇴광의 반월분이 작게 배분되었을 때에도

‘반월성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정광과 퇴광의 반월분이 규모가 유사해진 시기에만 한정하여 사용된 용어는 아니며, 절반이라는 의미보다 반월이라 는 형태에 기인하여 붙여진 용어로 생각된다.

회격릉에서 반월분 시공에 주목하는 것은 두 번에 나누어 시공되었다는 점보다 장례를 위한 통로확보를 위해 봉릉의 반절이 필요하므로 합장릉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4. 회격의 지하구조에 합리적인 봉릉 형식

4-1. 석실의 제도에서 합장릉

조선초 왕릉의 제도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의

「흉례」「치장조」에는 두 개의 석실을 하나의 봉릉 하부에 구성한 합장릉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 쌍의 왕과 왕후 중에서 첫 국상이 발생할 때 조성 하는 산릉에 두 개의 석실을 마련하여 위계에 따라 서 쪽은 왕의 석실이 되고, 동쪽은 왕후의 석실이 된다.

1446년에 『국조오례의』의 기준에 따라 조성된 영 릉(英陵)은 두 개의 석실이 마련하고, 동쪽 석실에 소 헌왕후의 재궁을 안치하였다. 이후 1450년에 세종의 국장으로 서쪽 석실에 합장되었다. 석실릉은 국장의례 를 위하여 봉릉의 대부분을 완공하고 연도에 해당하는 일부분만 열어 국장의례를 행할 수 있다. 1446년 소헌 왕후를 위한 국장의례 이후에 동쪽 석실의 문을 막고 삼물회와 숯을 시공하였다. 이때 수실(壽室)30)로 조성 30) 수실(壽室): 살아있을 때 미리 만들어 놓는 무덤. 왕릉을 석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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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석실 문 앞에는 삼물회를 시공했을지는 알 수 없으 나, 합장을 고려하여 시공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450년에 세종은 봉릉의 일부를 절개하여 연도를 열고 합장하였다.

삼물회

연도 재궁

삼물회 재궁

그림 14. 1450년 세종의 국장을 위하여 서실 (西室) 앞 연도를 열기 위하여 절개된 봉릉 4-2. 천릉으로 합장릉을 구성하는 회격릉

조선왕릉 중에서 회격으로 조성된 합장릉의 사례는 8건이다. 이들은 모두 천릉을 하여 두 개의 재궁이 같 은날 하현궁(下玄宮)하여 정광에 모셔지고 봉릉이 이 루어진 사례이다.

묘호 능호 초장시기 천장시기 합장시기

세종 영릉 1446 소헌왕후 1468년 여주 로 천장· 합 장(회격)

1450년 세종과 소헌왕후 합장 (석실) 인조 장릉 1636년 인열왕후

1649년 인조 1781년 천장 1781년 합장 장조 융릉 1762년 세자묘 1789 현륭원 1816년 헌경왕

후 합장 정조 건릉 1800년 정조 1821년 정조

천장 1821년 효의왕 후 합장 순조 인릉 1834 순조 1856년 순조

천장 1857년 순원왕 후 합장 문조 수릉

1830년 효명세자 연경묘1834년 문조 수릉 추존

1855년 천장 1890년 신정왕 후 합장 고종 홍릉 1897년 명성황후 1919년 명성

왕후 천장 1919년 고종 합 장

순종 유 릉31)

1904년 순명효황후 1926년 순종 1966년 순정효황후

1926년 순명효 황후 천장· 순 종 합장 1966년 순정효 황후 합장 표 1. 조선왕릉 중 합장릉으로 조성된 사례

조성할 때에는 왕후의 왕릉을 조성할 때 왕이 묻힐 석실을 곁에 미 리 만들어두기도 했다.

1821년에 이루어진 정조 건릉(健陵)의 합장 사례를 살 펴보면 이 시기 합장을 조성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 다.

1800년 정조 국장을 위하여 현륭원 동쪽 구릉에 건릉 조성하였다. 그러나, 1821년에 효의왕후의 국장이 발생 하면서 정조의 재궁을 현륭원 서쪽 구릉으로 천장(遷 葬)하여 합장하도록 하였다. 이때 구 건릉에 있는 정 조의 재궁을 옮겨오는 과정은 『건릉천봉도감의궤』에 기록하였으며, 새로운 건릉을 조성하는 과정은 『건릉 산릉도감의궤』(1821년)에 기록하였다.

1821년 4월에 산릉도감에서 산릉의 위치와 능상의 보 토를 진행하는 동안 천봉도감에서는 왕릉을 열어 재궁 을 현궁 밖으로 꺼낸다. 그리고 장생전에서는 왕과 왕 후의 외재궁을 각각의 규격에 따라 준비한다.

능상의 공역을 시작할 때 옹가와 수도각을 설치하는 데, 합장릉의 옹가는 입구를 2개로 나누어 설치하며 수도각도 각각 설치된다. 또 지하로 재궁과 외재궁을 내리는 구봉기와 별록로도 각각 두 개씩 설치한다. 이 는 왕과 왕후의 재궁이 각각의 길을 통하여 현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두 개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합장릉의 지하구조와 봉릉의 조성은 단릉의 조성과정 과 같으나, 단지 2개의 외재궁과 재궁이 동시에 들어 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때 서상위(西上位)의 위계 에 맞도록 왕의 외재궁을 서쪽에 배치하고 왕후의 외 재궁을 동쪽에 배치한다.

그림 15. 능상각도(좌)와 별녹로도(우)『건릉산릉도감의궤』

1821년

합장릉을 시공할 때에도 두 개의 현궁이 들어갈 규모 의 정광을 금정기로 마름하여 파고, 그 내부에 외재궁 을 위계에 맞춰 배치하여 방회와 천회를 쌓아올린 후 정광 상부 반월분을 시공한다. 정광이 완공되면 퇴광 을 파고 국장의례를 준비한다.

31) 유릉: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합장된 무덤이다. 하나 의 봉릉 하부에 3개의 회격이 합장릉의 형태로 조성된 유일한 사례 이다. 이때 양회(洋灰)를 사용하여 조선왕릉 회격 구조의 변화가 이 루어진 것으로 추정하나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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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에 국장행렬을 동반하여 왕후의 재궁이 산릉 에 도착하여 가정자각에 모셔진다. 왕의 재궁은 구릉 (舊陵)에서 견여(肩輿)에 모셔 수도각에 봉안하여 국장 을 기다린다.

재궁 재궁

전면방회 전면방회

퇴광:부장품배치

난간석 정광반월

퇴광반월 반월편결

그림 16. 회격의 제도로 합장릉을 형성하고 국장의례를 위해 퇴광이 열린 상태

국장을 위하여 정해진 시각이 되면 왕의 재궁과 왕후 의 재궁이 수도각을 지나 퇴광에 설치된 구봉기를 이 용하여 지하로 내려진다. 퇴광에 내려진 재궁은 윤여 를 이용하여 정광에 설치된 외재궁으로 밀어넣어 안치 하게 된다. 왕과 왕후의 재궁이 각각의 회격 현궁에 안치되면 남쪽 방회를 쌓아올린다. 현궁의 문이 되는 남쪽 방회가 완성되면 부장품을 석함에 담아 퇴광에 줄을 맞춰 배치하고 그 위에 남겨진 공간을 세 차례에 나누어 삼물회를 쌓아 밀폐하고 봉릉을 완성한다. 완 성된 봉릉의 남쪽에 혼유석을 배치하고 , 능상에 설치 한 옹가와 수도각을 철거하여 산릉공역을 모두 마무리 한다.

건릉(健陵)의 사례처럼 회격으로 조성된 현궁일 경 우 천릉(遷陵)을 통해 두 개의 재궁이 한번에 장사지 내는 방식으로만 합장릉을 구성할 수 있었다.

회격릉에서 합장을 위하여 수실을 만들지 않았던 이 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격릉에 장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퇴광반월분을 열 어 퇴광을 통하여 재궁이 외재궁으로 들어가야 하므 로, 이미 봉릉이 이루어진 왕릉에 합장을 위하여 다시 반월만큼의 봉릉을 절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삼물회를 깨트리고 봉릉을 열기가 어려우니, 수실을 위하여 미리 봉릉의 반월부분에 삼물회를 시공하지 않 고 비워두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회격릉 의 구조는 외재궁 기준으로 회격을 쌓아올리는 방식이 므로 목재로 만들어진 외재궁을 삼물회로 밀실하게 감

싸지 않으면 물이 스며들어 목재가 상하게 된다.

결국, 회격릉은 이미 시공된 두터운 회격을 깨트리 고 미리 만들어둔 수실에 합장하는 것보다 천장하여 새롭게 회격을 구축하는 방법이 용이하다.

따라서 조선왕릉이 회격으로 조성된 이후에는 하나 의 구릉에 두 개의 재궁을 안치할 때 합장릉의 방식보 다는 각각의 지하구조와 봉릉을 갖추는 쌍릉32)의 제도 를 선택하게 되었다.

4-3. 회격릉에 합리적인 봉릉 형식, 쌍릉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사이에 산릉을 조성하는데 과정에서 ‘雙陵之制’, ‘兩陵之制’에 대한 논의가 나타 난다. 이것은 하나의 언덕에 두 개의 봉릉을 조성하는 쌍릉에 대한 당대의 용어이다. 그중 왕후의 산릉을 조 성할 때 미리 왕의 현궁을 위하여 오른편을 비워두는 제도를 허우지제(虛右之制)라고 하며, 왕의 산릉 조성 시 훗날 묻힐 왕후의 자리를 왼편에 비워두는 것을 허좌지제(虛左之制)라고 한다.

쌍릉으로 조성하는데 건축적인 규정이 되는 전례는 장릉(長陵)33)을 조성할 때 논의되었다. 1635년에 인열 왕후의 국상으로 인하여 산릉을 조성할 때에 그 오른 편을 비워두어 인조 자신의 수릉34)으로 삼았다. 1649 년에 인조의 국상이 일어나자 예정되었던 인열왕후의 오른편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효릉(孝陵)의 제도를 참고하여 양릉(兩陵)의 간격은 2자로 하여 석난간을 설치하고, 능상 위 석물의 규모와 배치를 효릉의 제도 에 따라 조성하였다.35)

1674년 숭릉을 조성할 때 장릉의 전례를 따라 쌍릉 의 제도로 배치하여 양릉의 거리를 2자 간격을 마름하 고 난간석을 배치하였다. 이때 명성왕후를 위하여 비 워둔 자리의 난간석 하부 기초에 해당하는 엄석(掩石) 을 설치해두었다.36) 이후에 명성왕후 왕릉을 조성할

32) 쌍릉(雙陵)이라는 용어는 1674년 『顯宗山陵都監儀軌』에서 雙 陵之制 혹은 ‘雙陵體制’라 기록되었으며, 1805년 『정순왕후 원릉산 릉도감의궤』에까지 기록되었다.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궤』에서 는 ‘一岡兩陵之制’라는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33) 현존하는 장릉(長陵)은 1731년에 경기도 파주로 천릉하여 인조 와 인열왕후를 합장하여 하나의 봉릉을 이루었다.

34) 수릉(壽陵): 왕이 살아있을 때 미리 정해두는 임금의 무덤. 석실 을 미리 만들어두었던 수실(壽室)과 달리, 수릉은 살아있는 왕의 무 덤 자리를 예비한 것이다.

35)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 「啓辭」 己丑5月19日 36)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 「啓辭」9월28일

領議政許積曰 凡杵築之地 淺則遇凍還脆 深則雖久愈堅 不固之患 非 所慮也 石物依兩陵之制 排置則掩石地正 預爲杵築似好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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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난간석을 재배치하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다. 이와같은 쌍릉의 사례는 1700년에 인현왕후의 산 릉을 조성할 때에도 허우지제에 따라 숙종의 수릉을 예정하였으며 1720년 숙종이 승하하여 인현왕후 오른 쪽에 안장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언덕 위에 두 개의 봉릉이 위치하는 명릉(明陵)이 완성되었다.

인조의 장릉에서부터 숙종의 명릉에 이르기까지 쌍 릉의 제도는 전례가 되어 이어졌다. 그러나 1757년에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에서 예외가 생겨난다. 정성왕후 의 산릉을 조성할 때 영조를 위하여 왕후릉의 오른편 을 비워 쌍릉의 제도로 조성하였다.

그림 17. 정성왕후 홍릉 능상 배치도『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7』2014년

그러나 1776년에 영조의 국장이 이루어질 때 상황이 변하여 원릉(元陵)에 묻히게 된다. 결국 홍릉은 오늘날 까지 오른편을 비워둔 채 그대로 유지되었다. 쌍릉의 제도가 계속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홍릉의 사례 처럼 이후에 변화될 요소가 있기 때문에 미리 수릉을 비워두는 것에 확신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회격으로 왕릉을 조성할 때에 합장릉이 쉽지 않은 구조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쌍릉의 제도를 활 용하는 것은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풍수와 지세에 문 제가 없다면 한 쌍의 왕과 왕후가 하나의 언덕 위에 합장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죽어서도 한 공간에 묻히 는 인정에 따른 부분도 있으나. 조선후기 왕릉의 건설 공역을 줄이려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장점을 갖고 있 다.

쌍릉은 언덕 위에 두 개의 왕릉이 존재하지만 곡장 과 석물과 석등, 정자각은 하나를 사용하도록 배치된 다. 쌍릉의 제도로 처음 조성될 때 능상 위의 모든 석 물은 양릉(兩陵)이 완성될 것을 예상하여 자리잡도록

하고 정자각 또한 양릉의 중심에 위치하여 이후에 옮 기는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그림 18.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에 수록된 난간박석과 난간석도

18세기 후반부터 미리 수릉을 비워두는 쌍릉지제의 방식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헌종의 경릉37)의 사 례처럼 미리 예정하지 않더라도 쌍릉의 제도를 갖추는 사례가 있다. 1843년 효현왕후가 승하하여 경릉의 중 심에 안장되었으나. 1849년 헌종이 승하하여 효현왕후 오른편에 쌍릉으로 조성한다. 효현왕후 산릉을 조성할 때 미리 수릉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현왕후 난간 석 오른편을 쌍릉의 제도에 맞춰 새로 조성하여 헌종 의 난간석과 하나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이때에도 효 현왕후 산릉 조성으로 세워둔 석물을 재배치하였기 때 문에 헌종을 위하여 산릉을 조성할 때에는 문·무인석 등의 석물과 정자각을 별도로 만들지 않아 경제적 이 점이 있었다.

5. 맺음말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 에서 조선왕릉에 대한 연구성과가 눈에띄게 향상되었 다. 그 중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조선왕릉의 지하구조 를 다룬 논문들이 여러 편 등장하였다. 본 연구는 기 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지하구조의 중심이 되는 현궁 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여 현궁과 연도로 형성되는 지 하구조와 봉릉이 상호 연계되어 변화되어왔음을 논증 37) 경릉(景陵): 헌종의 경릉은 삼연릉으로 조성되었다. 1843년에 효 현왕후의 산릉이 자리잡고 1849년에 헌종이 오른편에 쌍릉의 제도 로 안장되었다. 이후 1904년에 효정왕후가 효현왕후 왼편에 안장되 어 삼연릉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볼 때 삼연릉은 쌍릉의 확장된 형태로 볼 수 있다.

(12)

하였다.

조선초 석실의 제도에서 회격릉의 제도로 전개될 때 한눈에는 다르지만 그 안에 전례로 삼은 요소들이 있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실의 외곽을 둘러싼 회격 과 탄격의 구조가 회격릉의 기본구조가 되었으며, 석 실 밖에 마련한 편방의 사례가 회격릉의 퇴광에 부장 품을 석함에 담아 배치하여 부장품 공간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되었다.

회격으로 현궁을 시공하기 위하여 거푸집을 사용하 는 방식이 외재궁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현 궁 내부에는 재궁만을 봉안하고 현궁 밖 퇴광에 부장 품을 배치하는 방식이 전개되었다. 이는 국장의례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형성되던 통로였던 퇴광이 부장품 을 안치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위계가 변화된다.

회격릉의 지하공간이 정광과 퇴광으로 나누어 형성 되므로 상부 봉릉의 시공은 정광반월분과 퇴광반월분 을 나누어 시공하게 된다. 이와같이 봉릉을 반월분으 로 시공하는 방법은 합장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단릉과 합장릉·쌍릉 등의 다양한 봉릉의 형식을 선택할 때 풍수와 지세·정치적인 면에서 이루어진 선 택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구조와 시공방법에 원인이 있 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회격릉의 지하를 구성하는 정광과 퇴 광의 공간적인 변화과정이 상부 봉릉에도 변화를 주어 봉릉의 형식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밝혔다. 이 는 기존의 연구에서 지하 현궁의 구조와 지상의 봉릉 형식이라는 별도의 구조로 연구되어온 것과 달리, 봉 릉과 지하구조를 연계하여 시공·구조의 변화를 밝힘으 로 조선왕릉을 건축적으로 이해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 또 봉릉의 형식은 외적 형태만으로 분류하거나 풍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던 과거와 달리 지하구조를 반영하여 봉릉의 구조가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본 연구가 17세기에 이루어진 변화를 중 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이후 『산릉도감의궤』의 기록 을 바탕으로 시기를 확대하여 봉릉과 지하구조 변화를 연구해 나갈 계획이다.

참고문헌 1. 『국조오례의』

2.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1601년 <奎 14826>

3. 『선조목릉천릉도감의궤』1631년 <외규장각>

4.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1649년 <장서각>

5.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1674년 <외규장각>

6. 『명성왕후숭릉산릉도감의궤』1683년 <奎 14832>

7.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1800년 <奎 13640>

8.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1849년 <외규장각>

9.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1843년 <외규장각>

10. 김상협, 「조선전기 왕릉 석실 축조 연구」 ,건축역사 연구, 제25권, 제7호, 2009년 7월, 175쪽

11. 김상협, 「조선왕릉 회격현궁 축조방법 연구」 , 건축 역사연구, 제21권, 4호, 2012년, 37쪽

12. 안경호, 「조선 능제의 회격 조성방법- 장경왕후 초 장지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32권, 제3호, 2009 가을호

13. 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 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문화재, Vol.45, No.1, 2012년 3월, 54~69쪽

14. 이우종, 「조선 능묘 광중 지회(壙中 地灰)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제26권, 제12호(통권266 호), 2010년 12월, 163~172쪽

15. 이우종, 「조선 왕릉 광중 탄격 조성의 배경과 시대 적 변천」,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제26권, 제4호 (통권258호), 2010년 4월, 183~192쪽

16.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7』, 2014년

접수(2019. 12. 09) 수정(1차:2020. 02. 27) 게재확정(2020. 03. 06)

수치

그림 6. 『구 희릉 장경왕후 초장지 보존·정비보고서』, 8쪽 「능침주변발굴현황」 그러나 1674년 현종의 숭릉(崇陵)을 건립하면서 봉 릉 하부 중심에 놓이던 현궁이 북쪽으로 3∼4자 이동 하여 정광과 퇴광이 남북으로 유사한 규모로 배치된 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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